이태조 건국이야기

도서정보 : 차상찬 | 2019-09-29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책 소개>
공양왕(恭讓王) 9월에 드디어 전제를 크게 개혁하여 백성이 모두 태조의 공덕을 칭송하고 노래하였다. 또한, 당시 민간에서는 ‘목자위왕(木子爲王)’(역주: 이성계가 왕이되다)라는 참언까지 유행하여 일반인들의 민심이 태조에게 돌아오는 일이 허다하였다. 날개 달인 맹호처럼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배극렴(裵克廉), 조인옥(趙仁沃), 조박(趙璞) 등 50여 무관이 모두 태조를 추대하려고 하였다.<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6,000 원

고려 태조 건국이야기

도서정보 : 차상찬 | 2019-09-2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책 소개>
태조의 부하에는 용장 용맹스러운 졸병이 많으나 문사에 능통한 사람이 적었으므로 개국 초기에 관제를 정하고 국정을 삼가 결단하는 데에는 전혀 궁예의 남아있는 신하인 박유(朴儒)를 등용하였다. 또한 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문사를 채용하였다.
정치상으로 중요한 사람은 심곡사(審穀使)를 설치하여 장마와 가뭄, 기근을 준비하고 전제(田制)를 정하여 부렴(賦?)을 가볍게 하였다. 혹은 창고 있는 포곡(布穀)을 풀어 백성의 노비되는 자를 구조하였다.<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2,500 원

고려 태조 건국이야기

도서정보 : 차상찬 | 2019-09-29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책 소개>
태조의 부하에는 용장 용맹스러운 졸병이 많으나 문사에 능통한 사람이 적었으므로 개국 초기에 관제를 정하고 국정을 삼가 결단하는 데에는 전혀 궁예의 남아있는 신하인 박유(朴儒)를 등용하였다. 또한 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문사를 채용하였다.
정치상으로 중요한 사람은 심곡사(審穀使)를 설치하여 장마와 가뭄, 기근을 준비하고 전제(田制)를 정하여 부렴(賦?)을 가볍게 하였다. 혹은 창고 있는 포곡(布穀)을 풀어 백성의 노비되는 자를 구조하였다.<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2,500 원

점 잘 보는 집 점 잘 보는 무당 찾는 기술

도서정보 : 닥터 카르마 | 2019-09-2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무당 100만명시대
신점/굿/사주/빙의
무속사기가 당신을 노린다

알아야 안 당한다.


한국의 무당 100만명시대, 날마다 일어나는 무속사기에서 당신을 지키기 위한 무속신앙 A~Z 이것만 알아도 무속사기 안당한다. 무속사기를 예방하는 비법과 같은 책! 실제무속인이 알려준 최초 무속사기 예방 노하우와 절대지식!

구매가격 : 15,000 원

면암 최익현은 과연 시대에 뒤처진 인물이었을까

도서정보 : 김정언 | 2019-09-2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논문 초록

면암 최익현은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그는 오늘날 대부분의 국민에게 존경받는다. 전국 각지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일제가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던 외고집으로 단식 끝에 순절하신 면암 선생의 기개를 숭고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를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가 조선의 고위 관료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을 막지 못했고, 서구의 근대 사상과 기술을 배척하며 기존 고루한 유교적 질서를 고수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둘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그의 올곧은 신념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뒤떨어졌던 한계를 지닌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인류가 밟아온 역사 속 모든 인물은, 정말 극히 일부 인물을 제외하곤 양면성이 있다. 심지어 이완용도 러일전쟁(1904)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독립협회 설립(1896) 등 애국적 활동을 했고, 나라를 팔아먹고 난 뒤인 일제강점기에도 고종의 신임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이완용과는 결이 다르지만, 면암 최익현도 이처럼 양면성과 관련한 논란이 많기에, 이 논문에서는 최익현 선생 업적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그리고 저자가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저자는 오늘날 역사의 뿌리가 되는 ‘근현대사’를 특히 좋아하기 때문에, 그 혼란의 역사 속에서 시대에 뒤처진 사상을 가진 인물 최익현을 왜 현대인들이 존경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다양한 근현대사 교양서를 읽던 중... 깜짝 놀랐다. 그가 고종황제와 주고받은 수 백통의 서신 안에 충격적인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루하고 옛것만 고집하는 노인네인 줄 알았던 면암 최익현이, 엄청난 현실 감각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 강화도조약으로 일어날 연쇄적인 조약 등을 예측하고,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고종에게 수십 년간, 수백 통의 상소문을 올렸다.

저자는 이를 깨닫고 ‘시대에는 뒤처졌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킨 최익현’이란 뿌리박힌 프레임을 깨고 싶다는 ‘발칙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프리카TV 역사 토론 방송 진행을 통해 이 주제에 대한 반응을 본 후, 기존 교육체계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큐니버시티’ 최성호 총장과의 논의 끝에 이를 논문으로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미리 말하지만, 저자는 ‘아마추어’ 역사 전문가이다. 고등학교 이과 출신에, 인문학과 관련 없는 ‘생명과학대학’을 졸업했고, 역사를 공부한 거라고는 ‘공무원 한국사’, ‘고등학교 세계사’와 다수의 교양서가 전부이다. 이 책도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썼다.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경로도 전공자보다는 한계가 있고, 그렇기에 논문에 쓴 역사적 사실 일부가 틀릴 수 있다. 저자는 혹시라도 존재하는 역사적 오류를 지적해 주는 것은 당연히 수용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역사 왜곡’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에는 ‘자신만의 관점’이라는 다양성도 함께 존재한다는 관용 정신을 가지고 이 논문을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일부 사람들은 “면암 최익현은 고집만 셌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야.”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개인적으로 최익현 선생의 흔들리지 않는 철학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선견지명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도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논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역사를 한가지 관점만으로 바라보는 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란 걸 이제 온 국민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고, 이에 동의한다. 이를 아는 독자라면 이 논문이 기존의 학설과 조금 벗어나더라도, 흥미롭게 읽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거라 믿는다.

구매가격 : 1,000 원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도서정보 : 백승종 | 2019-09-23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최고의 수양 서적”, 『중용』
이 한 권의 책은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2,400여 년 전 중국에서 만들어진 『중용』이라는 책은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주인공이다. 아직까지도 이 책을 “최고의 수양 서적”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중용』은 조선의 왕과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책이자 조선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대가 당면한 과제를 『중용』을 통해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중용』이라는 한 권의 책이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실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저자는 『중용』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역사가로서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중용』이 어떻게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는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 책은 『중용』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상사를 정리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500년 동안 『중용』을 두고 펼쳐진 선비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그들의 치열했던 성찰과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중용』의 역사를 읽는 것은 조선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사를 이해하는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중용』이라는 책은 애초에 중국에서 이념투쟁의 도구로 탄생했다. 유교는 초기부터 도가, 묵가, 법가, 불교와 사상적으로 싸워야 했다. 사상투쟁을 치르면서 유교의 논리는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조선에서도 『중용』은 사상투쟁의 무기로 활약했다. 조선 초기 선비들은 『중용』을 이용해 불교세력을 공격했다. 두 진영 간에 공방전이 치열했으나 세종과 성종 대를 지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수준이 크게 높아져 불교세력은 완전히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조선의 사회문화적 주도권은 성리학자들이 쥐게 되었다.

16세기 조선에는 성리학을 위협할 만한 ‘이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했다. 『중용』에서 이상국가를 건설할 토대를 발견한 것이다. 큰선비 이언적은 『중용』 20장에 나오는 ‘구경설(九經設)’에 주목했다. 구경설이란 공자가 정치를 하는 아홉 가지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수신(修身)이 가장 먼저고, 어진 이를 존중하고(尊賢), 나와 가까운 이를 친애하고,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고, 백성을 자녀처럼 대하는 것 등이다. “공자가 말한 통치의 요체는 자신을 바로잡고 근본에서 시작하여 말단에 이르며, 가까운 데서 출발하여 먼 곳까지 두루 미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언적과 같은 선비들은 구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성리학적 이상세계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17세기 후반까지 선비들은 구경설을 통치 철학의 핵심이라고 확신했다.

개인의 수양이 더 중대하다고 여기는 선비들도 『중용』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정치적으로 혼탁한 조정을 떠나 초야에 머무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군자가 되기 위한 수신의 철학을 『중용』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조익 같은 선비들이 시종일관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 위해 『중용』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16세기 말부터 조선 사회는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으면서 선비들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들은 앞선 세대가 이루어놓은 형이상학과 수양론을 결합해 예학(禮學)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냈다. 김장생 등은 『중용』에서 ‘예禮’의 중요성을 발견해 예학적 질서를 수립했다.

중용 열풍, 그리고 중용이 드리운 그림자

15세기 이후 『중용』의 열풍은 대단했다. 율곡 이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에 오류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조익 같은 학자는 주희의 학설과 다른 주장을 폈다. 당시만 해도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17세기 후반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회문화 전반에 보수화 경향이 심해졌다. 일상적으로 엄격한 사상 통제가 이루어졌다. 주류 선비들은 주희의 주장을 글자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신봉했다. 그들에게 주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윤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를 새롭게 저술했다. 윤휴는 『중용』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상으로 끌어내렸다.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는 경전을 굳이 복잡한 형이상학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윤휴의 이러한 시각은 송시열과 같은 보수적인 선비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대부분의 선비들은 주희의 저작을 숭배했고, 한 치라도 벗어나면 마녀사냥을 당했다. 윤휴를 비롯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몇몇 선비들은 결국 ‘사문난적’으로 몰려 고난을 면치 못했다.

정조 대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 정조는 천주교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성리학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적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중용』에 큰 기대를 걸었다. 신하들과 『중용』을 공부하기도 하고, 경전에 대한 논술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정조는 주희의 주석을 그대로 따랐다. 초야에 묻혀 주희의 주석서를 깊이 연구한 시골 유생들을 발굴해 높은 벼슬을 주기도 했고, 그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어전에서 『중용』에 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문체를 검열하고 중국에서 서적을 구입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된다. 정조는 특정한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중용이 조선 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살펴본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이를 통해 저자는 한 사회가 특정 이념에 몰입할 때 어떤 폐단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멀지 않은 때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 “1990년을 전후해 와르르 무너진 동구권 국가들, 즉 현실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소련,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의 패망 원인을 뒤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때로 진취적이고, 때로 구태의연했던,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

유교 경전 가운데서 『중용』은 가장 난해한 책으로 손꼽힌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중용』을 해석하는 관점은 실로 다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용』의 개념을 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장유, 윤증, 김창협, 이덕무, 홍대용 등 뛰어난 선비들이 『중용』에 관해 품었던 의문과 대답을 들어보면 『중용』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17~18세기 조선 사회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로운 경전 해석을 탄압했다. 그럼에도 개성 있는 선비들은 경전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윤휴는 주희의 『중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중용』을 편찬했다. “윤휴가 편찬한 새로운 『중용』은 주희의 것보다 논리적으로 세련되었다. 그의 설명에는 군두더기가 없고, 주장도 체계적이고 일관적이었다.”

윤휴의 연구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성호 이익과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성호 이익은 실증적이고 비판적으로 『중용』을 연구해 『중용』의 역사를 새로 썼다. 잘못 알려진 통념과 개념에 대해서도 바로잡았다. 일례로 이익은 4대를 제사 지내는 조선의 풍습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다. 공자와 맹자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밖에도 이익은 철저한 문헌 연구를 통해 많은 학문적 결실을 거두었고,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분위기임에도 용감하게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당대 최고 수재로 손꼽힌 실학자 정약용의 견해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정조가 실시한 친시(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 시험)에서 정약용이 작성한 답안지를 옛 문헌에서 발견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통해 저자는 출제자 정조의 의도와 정약용의 학문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용』의 핵심을 묻는 45개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주희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답안은 제외하고 정약용의 독특한 의견을 담은 답안 5개를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의 논평을 덧붙여 두었다.

과연 정약용은 어떤 답안을 제출했을까. 저자는 정약용의 답안지를 꼼꼼히 살핀 결과 그가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조정은 보수적이었고, 창의적인 대안보다는 주희의 학설을 더 철저히 익히도록 독려했다. 정약용은 대체로 보수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성호 이익을 계승한 학자로서 형이상학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사람들이 절대자를 믿지 않기 때문에 타락한 생활에 빠지기 쉽다고 서술했다.

“정약용의 답안지를 들여다보면 모순적이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주류 성리학계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듯하면서도, 거기에서 이탈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갈등을 명백한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내면은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왜 『중용』에 주목해야 하는가

18세기 이후 지배층의 보수성이 더욱 완고해지자 새로운 이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정감록’ 반란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여러 지식이 융합해 동학이 태동한다. “동학은 『중용』의 하늘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곧 하늘이었다. 최시형은 만물이 다 하느님이요, 너도 하느님, 나도 하느님, 사람도 물건도 본질적인 차이나 구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중용』에 언급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된 경지(천인합일)가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하겠다.”

『중용』은 조선 선비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책이었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회 변화의 이면에는 항상 『중용』이 숨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변화가 요구될 때마다 선비들은 『중용』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지구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중용』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제야말로 또 한 번 중용의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2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중용은 위기의 시대마다 늘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점이다. 21세기라고 무엇이 크게 다를까. 새 시대의 중용 해석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한 헌장을 되새기는 작업이기를 바란다.” “최고의 수양 서적”, 『중용』
이 한 권의 책은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2,400여 년 전 중국에서 만들어진 『중용』이라는 책은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주인공이다. 아직까지도 이 책을 “최고의 수양 서적”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중용』은 조선의 왕과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책이자 조선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대가 당면한 과제를 『중용』을 통해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중용』이라는 한 권의 책이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실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저자는 『중용』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역사가로서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서 『중용』이 어떻게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는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 책은 『중용』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상사를 정리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500년 동안 『중용』을 두고 펼쳐진 선비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그들의 치열했던 성찰과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중용』의 역사를 읽는 것은 조선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용』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사를 이해하는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중용』이라는 책은 애초에 중국에서 이념투쟁의 도구로 탄생했다. 유교는 초기부터 도가, 묵가, 법가, 불교와 사상적으로 싸워야 했다. 사상투쟁을 치르면서 유교의 논리는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조선에서도 『중용』은 사상투쟁의 무기로 활약했다. 조선 초기 선비들은 『중용』을 이용해 불교세력을 공격했다. 두 진영 간에 공방전이 치열했으나 세종과 성종 대를 지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수준이 크게 높아져 불교세력은 완전히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조선의 사회문화적 주도권은 성리학자들이 쥐게 되었다.

16세기 조선에는 성리학을 위협할 만한 ‘이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조선의 왕과 선비들은 『중용』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했다. 『중용』에서 이상국가를 건설할 토대를 발견한 것이다. 큰선비 이언적은 『중용』 20장에 나오는 ‘구경설(九經設)’에 주목했다. 구경설이란 공자가 정치를 하는 아홉 가지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수신(修身)이 가장 먼저고, 어진 이를 존중하고(尊賢), 나와 가까운 이를 친애하고,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고, 백성을 자녀처럼 대하는 것 등이다. “공자가 말한 통치의 요체는 자신을 바로잡고 근본에서 시작하여 말단에 이르며, 가까운 데서 출발하여 먼 곳까지 두루 미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언적과 같은 선비들은 구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성리학적 이상세계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17세기 후반까지 선비들은 구경설을 통치 철학의 핵심이라고 확신했다.

개인의 수양이 더 중대하다고 여기는 선비들도 『중용』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정치적으로 혼탁한 조정을 떠나 초야에 머무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군자가 되기 위한 수신의 철학을 『중용』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조익 같은 선비들이 시종일관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 위해 『중용』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16세기 말부터 조선 사회는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으면서 선비들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들은 앞선 세대가 이루어놓은 형이상학과 수양론을 결합해 예학(禮學)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냈다. 김장생 등은 『중용』에서 ‘예禮’의 중요성을 발견해 예학적 질서를 수립했다.

중용 열풍, 그리고 중용이 드리운 그림자

15세기 이후 『중용』의 열풍은 대단했다. 율곡 이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에 오류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조익 같은 학자는 주희의 학설과 다른 주장을 폈다. 당시만 해도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17세기 후반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회문화 전반에 보수화 경향이 심해졌다. 일상적으로 엄격한 사상 통제가 이루어졌다. 주류 선비들은 주희의 주장을 글자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신봉했다. 그들에게 주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윤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를 새롭게 저술했다. 윤휴는 『중용』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상으로 끌어내렸다.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는 경전을 굳이 복잡한 형이상학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윤휴의 이러한 시각은 송시열과 같은 보수적인 선비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대부분의 선비들은 주희의 저작을 숭배했고, 한 치라도 벗어나면 마녀사냥을 당했다. 윤휴를 비롯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몇몇 선비들은 결국 ‘사문난적’으로 몰려 고난을 면치 못했다.

정조 대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 정조는 천주교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성리학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적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중용』에 큰 기대를 걸었다. 신하들과 『중용』을 공부하기도 하고, 경전에 대한 논술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정조는 주희의 주석을 그대로 따랐다. 초야에 묻혀 주희의 주석서를 깊이 연구한 시골 유생들을 발굴해 높은 벼슬을 주기도 했고, 그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어전에서 『중용』에 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문체를 검열하고 중국에서 서적을 구입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된다. 정조는 특정한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중용이 조선 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살펴본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이를 통해 저자는 한 사회가 특정 이념에 몰입할 때 어떤 폐단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멀지 않은 때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 “1990년을 전후해 와르르 무너진 동구권 국가들, 즉 현실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소련,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의 패망 원인을 뒤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때로 진취적이고, 때로 구태의연했던,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

유교 경전 가운데서 『중용』은 가장 난해한 책으로 손꼽힌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중용』을 해석하는 관점은 실로 다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용』의 개념을 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비들의 다양한 해석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장유, 윤증, 김창협, 이덕무, 홍대용 등 뛰어난 선비들이 『중용』에 관해 품었던 의문과 대답을 들어보면 『중용』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17~18세기 조선 사회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로운 경전 해석을 탄압했다. 그럼에도 개성 있는 선비들은 경전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윤휴는 주희의 『중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중용』을 편찬했다. “윤휴가 편찬한 새로운 『중용』은 주희의 것보다 논리적으로 세련되었다. 그의 설명에는 군두더기가 없고, 주장도 체계적이고 일관적이었다.”

윤휴의 연구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성호 이익과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성호 이익은 실증적이고 비판적으로 『중용』을 연구해 『중용』의 역사를 새로 썼다. 잘못 알려진 통념과 개념에 대해서도 바로잡았다. 일례로 이익은 4대를 제사 지내는 조선의 풍습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다. 공자와 맹자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밖에도 이익은 철저한 문헌 연구를 통해 많은 학문적 결실을 거두었고,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분위기임에도 용감하게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당대 최고 수재로 손꼽힌 실학자 정약용의 견해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정조가 실시한 친시(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 시험)에서 정약용이 작성한 답안지를 옛 문헌에서 발견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통해 저자는 출제자 정조의 의도와 정약용의 학문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용』의 핵심을 묻는 45개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주희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답안은 제외하고 정약용의 독특한 의견을 담은 답안 5개를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의 논평을 덧붙여 두었다.

과연 정약용은 어떤 답안을 제출했을까. 저자는 정약용의 답안지를 꼼꼼히 살핀 결과 그가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조정은 보수적이었고, 창의적인 대안보다는 주희의 학설을 더 철저히 익히도록 독려했다. 정약용은 대체로 보수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성호 이익을 계승한 학자로서 형이상학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사람들이 절대자를 믿지 않기 때문에 타락한 생활에 빠지기 쉽다고 서술했다.

“정약용의 답안지를 들여다보면 모순적이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주류 성리학계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듯하면서도, 거기에서 이탈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갈등을 명백한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내면은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왜 『중용』에 주목해야 하는가

18세기 이후 지배층의 보수성이 더욱 완고해지자 새로운 이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정감록’ 반란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여러 지식이 융합해 동학이 태동한다. “동학은 『중용』의 하늘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곧 하늘이었다. 최시형은 만물이 다 하느님이요, 너도 하느님, 나도 하느님, 사람도 물건도 본질적인 차이나 구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중용』에 언급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된 경지(천인합일)가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하겠다.”

『중용』은 조선 선비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책이었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회 변화의 이면에는 항상 『중용』이 숨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변화가 요구될 때마다 선비들은 『중용』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지구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중용』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제야말로 또 한 번 중용의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2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중용은 위기의 시대마다 늘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점이다. 21세기라고 무엇이 크게 다를까. 새 시대의 중용 해석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한 헌장을 되새기는 작업이기를 바란다.”

구매가격 : 12,600 원

백범의 길 하

도서정보 : 심지연, 김주용, 리셴즈, 은정태, 이신철, 푸더민 | 2019-08-3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광활한 중국 대륙에 퍼진 김구의 굳센 기개
오직 독립만을 위한 임시정부의 험난한 노정




201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가 생생하게 전하는 임시정부의 항일 루트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혹독한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만큼은 명확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몸으로 임시정부와 동지들의 안전을 살피고, 한국광복군 창설과 통합 정부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구와 독립을 꿈꾸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선열들의 행적을 좇았다. 일본군의 공습과 폭격으로 천신만고의 피란길을 헤쳐 나간 임시정부 대가족들의 행로를 찾아내어 그대로 체험코자 했다.
-「발간사」 에서







◎ 도서 소개

2019년 6월 26일 김구 서거 70주기
길고 험난했던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한·중 역사 전문가가 꼼꼼하게 되밟다

1919년 3일 1일. 전국에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퍼져 나간 이후,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하와이로 투쟁의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굳센 항일 정신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함께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해외 독립 투쟁 여정은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한커우, 창사, 광저우, 우저우, 구이핑, 류저우, 이산, 우산, 구이양, 치장, 충칭을 거쳐 시안으로,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펼친 정치·외교 활동과 일제의 공습을 피해 최대한 몸을 숨기며 생활을 했던 고난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 11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리고 가족들의 발자취를 샅샅이 더듬어 그들이 걸어간 항일 노정을 되밟았다. 그 길은 비록 꽃길이기보다는 진창길이었지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 가족들의 항일 정신과 독립을 향한 투지는 한결같이 드높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하권에서는 우한에서 시안으로, 그리고 다시 상하이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치 활동과 피난 생활의 흔적을 따라가며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고 변했으며 또 사라졌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수많은 자료와 회고록, 여러 전문가·관계자·현지인 인터뷰를 통해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묻혔던 것은 들춰내고, 새로운 것은 보태”며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을 기리려 했다.

중국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한 독립 투쟁
쓰라린 아픔이 깃든 피난의 길을 따라가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하권은 우한, 창사, 구이핑, 류저우, 충칭, 시안에 남아 있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되밟는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해 국민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우한에서 항전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난징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우한으로 이동했다. 우한은 1938년 5월 7일 3당 통합 회의 도중 김구가 이운한에게 피격당한 사건인 ‘남목청(난무팅)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며, 윤봉길 의거 이후 군대를 양성해 항일 투쟁의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던 김구의 계획으로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가 세워지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약 반년 동안 곡물 가격이 싸고 한국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고 있는 창사에 머물기도 했다.
1938년 7월 19일,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200여 명은 창사를 떠나 또다시 피난길에 오른다. 3일 동안 기차를 타고 광저우로 갔다가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포산으로 옮겨 갔다. 광저우는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데, 쑨원의 도시로 신해혁명이 시작된 곳이며, 신규식이 1921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겸 외부총장의 자격으로 쑨원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얻어낸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의 결과로 중산대학과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졌는데, 혁명적인 대학과 현대식 군관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중국 거주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광저우로 모여들게 되어 한국 독립운동과 더욱 긴밀히 연결되었다.
포산에서의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이 광둥성에 상륙하면서 임시정부 가족은 짐을 꾸려 싼수이에서 류저우로, 다시 충칭으로 가게 된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근교 공동묘지의 방공호로 피신하거나 위펑산 동굴에 들어가 공습을 피하는 위험천만한 생활이 이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민족진영 3당 청년들이 통합을 모색하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는 등 항일 의지를 다져 나가기도 했다. 김구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중국정부의 지원을 얻어, 투차오에 임시정부청사와 한인촌을 꾸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하고 한국광복군을 성립해 정식 군대를 꾸려 충칭과 시안에서 훈련을 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항복 의사가 전해지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는 환국을 준비한다.

한중 우호와 연대를 기념하는 장소들의 기록
김구의 중국 활동 내용을 더해 연보 보강

충칭은 1940년 4월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근거지였던 데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보존되어 있어 해마다 많은 한인들이 찾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마저 없었다면 중국 중서부 대륙에서 한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표지판도 기념석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중한호조사, 한국광복궁 전진사령부 기지, OSS훈련지 등 역사적인 한중 우호와 국제 연대를 엿볼 수 있는 장소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알아보고 책에 담으려 노력했다. 또한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에 실린 연보에서 중국에서의 활동상을 보강하여 더 충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는 기획에서 출간까지 꼬박 2년이 걸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한국과 중국의 학자와 전문가 11명이 권역별로 답사를 하고, 연구하고, 취재했으며,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서로 내용을 체크하여 오류가 없도록 하는 데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애쓴 흔적들을 꼼꼼히 담아 독자들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찾아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기획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조직된 ‘고 백범김구선생국민장위원회’의 위원장 오세창, 부위원장 김규식, 조완구, 이범석, 김창숙, 조소앙, 최동오, 명제세 등의 위원을 중심으로 1949년 8월 6일에 창립한 협회이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전시와 교육, 역사 자료 수집과 편찬 등 의미 있는 기획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 책 속에서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시작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그 당시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각 단체들 사이에 연합전선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형성되었다. 그중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은 무장 부대 조직과 대일 항전 참여를 목표로 하였다. 조선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양군관학교 싱쯔분교 졸업생들이 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장 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규모상의 문제로 무장 부대를 ‘군’보다는 ‘대’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우한·창사-우한 국민정부청사 p. 15



포산에서 임정 가족들의 생활은 그동안 누려 왔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국이라고는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일자리가 있어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끼니 걱정은 그럭저럭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산에서는 일자리를 전혀 구할 수 없었다. 수입이 없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늘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나마 임시정부가 가족 수에 맞춰 생활비를 나누어 주었기에 간신히 기본적인 생계는 이어 갈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언제 또다시 피난을 가야 할지 몰라 늘 짐을 쌀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이러한 불안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는데,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일본군이 10월 초 광둥성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광저우 함락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더 이상 포산에 머무를 수 없어, 임시정부는 짐을 꾸려 일단 싼수이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정정화는 당시의 상황을 『장강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광저우·포산-포산 임시정부 가족 거주지 p. 100



구이핑을 거쳐 류저우에 온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모두 120명 정도였다. 각종 기록에 나오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의 거주지는 장시후이관, 징시로 10호, 타이핑시가 18호, 칭윈로 109호, 그리고 랴오레이공관,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기념관이 위치한 러췬서 등등이었다. 초기부터 분산 수용되었고, 류저우를 떠날 때까지도 변화는 없었다. 류저우에는 잠시 동안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 4월에 충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교통편이 그때서야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즉, 류저우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인 판공처를 설치해 운영했다기보다는 조만간의 이동에 대비해 잠시 대기하던 곳이라 하겠다.

구이핑·류저우-류저우 임시정부기념관 p. 129



김효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기와집 주변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 모두들 이곳에 텃밭을 일구어 그동안 중국 땅에서 누려 보지 못했던 농촌의 전원생활을 누렸다 한다. 윤봉길이 의거를 감행한 후 임시정부는 8년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치장에 머물던 일 년 반 동안에도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들은 일본군의 대공습에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는데, 그나마 이곳 투차오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당시 김효숙은 어린아이들을 한데 모아 한국어와 한글, 동요 등을 가르쳤다. 임시정부 직원의 부인이나 모친들도 허투루 나날을 보내지 않고, ‘한국여성혁명동맹’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한인촌이 있던 산비탈 아래에는 둥칸폭포가 있었다. 폭포수는 비교적 맑고 깨끗하여 그 물이 흘러 화시허를 이루었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화시허의 물을 길어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김자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신체가 강건했던 김신은 매번 투차오에 올 때마다 물 긷는 일을 도왔다 한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종종 화시허에서 잡은 물고기로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고, 더운 여름날이면 이곳에서 수영도 즐겼다.

충칭·시안-충칭, 투차오와 허상산 pp. 150-151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 중화민국 항전4 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에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 영수 장개석 원수의 한국 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국가의 해방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자 왜적에 대한 무장투쟁의 준비는 그의 도덕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발표된 「한국광복군선언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성립된 이후 정식 군대를 조직한 것에 대한 감격과 중국과의 공동 항전을 천명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해방과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항전할 것임을 대내외에 선전한 것이다. 이 선언문의 발표는 한국광복군 창설의 복잡다단한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용대가 1938년 10월 우한에서 창설된 이후 경쟁적인 관계가 고착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라는 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을 완성해야 할 임시정부로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고 결국 한국광복군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충칭·시안-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pp. 172-173



한국광복군은 다양한 계기와 조건 속에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과정 속에서 확대되었다. 초창기에는 30여 명 인원에 장교급 인사만 참여하여 ‘사병들은 거의 없는 군대’였다. 그러나 차츰 초모 활동과 한청반 훈련 과정에 성과를 드러내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통합되면서 큰 규모로 확장되었고, 다시 충칭의 조선의용대와 합쳐졌다. 그러나 중국 측의 지휘 통제 요구로 한국광복군은 다시 재편되었고 시안 소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충칭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전진사령부로서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충칭·시안-한국광복군 전진사령부 기지 p. 197



학도병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이 이들의 존재에 착안하여 대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안을 구상했는데, 이를 위해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중심이 되어 한인지하공작원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작전을 마련했다. OSS는 한국광복군이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출신이 다수라는 사실에서 한반도 침투 임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임시정부도 OSS훈련을 받은 한국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국내 침투 공작을 전개하는 것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1945년 4월 15일 한국광복군 사령부와 주중국 미군 사이에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광복군을 대상으로 3개월간 비밀 훈련을 실시하고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미군의 상륙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미군은 인적이 드문 시안 교외의 미퉈구쓰라는 절 뒤편에 있는 산악 지대를 한국광복군의 훈련지로 택해 5월부터 훈련을 실시했다.

충칭·시안-OSS훈련지 미퉈구쓰 p. 203

구매가격 : 20,000 원

마음챙김과 비폭력대화

도서정보 : 오렌 제이 소퍼 | 2019-08-3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를 담는 것이 아니라 ‘내뱉고’,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 식으로 해석하거나 흘려버린다. 그러다 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계 역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대화의 본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에 대해 안내한 책이다. 그 본래 기능이란 자신이 의도하는바 그대로를 전달하고, 상대방의 말을 오해 없이 듣는 것이다. 유명한 대화 모델인 ‘비폭력대화’와 초기불교 수행 전통에서 유래한 명상법인 마음챙김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결합, 보완하여 대화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를 정리하였다.

구매가격 : 14,000 원

이이화의 명승열전

도서정보 : 이이화 | 2019-08-3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삶을 산 17명의 승려
신간 『명승열전』에서 저자는 그의 시선을 한국불교사 속 인물을 향해 돌려 열일곱 명의 승려를 오늘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는 시대정신에 투철했고, 불교적으로는 중생 제도의 신념에 충실했다. 지은이는 이러한 승려들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어쩌면 이 책이 내세울 개성이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승려는 모두 열일곱 명. 이 가운데는 우리 불교계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도 있고, 승려이지만 잘 조명되지 않았던 방외(方外)의 인물도 있다.
저자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선정된 이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승과 속의 경계를 허물고 번뇌 가득한 세간에 뛰어든 승려이다. 그리하여 당대의 현실 문제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몸소 실천하려 했다. 또한 전쟁이나 귀족의 횡포 등에 신음하는 민중을 위한 주의?주장을 펴기도 했으며, 사회 개혁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한국불교사’
그동안 우리 불교사의 ‘위대한’ 승려를 다룬 책은 당대는 물론 다음 세대에 의해 ‘고승(高僧)’이라 불리는 인물을 조명한 예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그들의 행보, 그들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들은 그들의 사상적 바탕에서 기술된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이 책은 불교라는 종교적이거나 사상적인 측면을 기반으로 한 도서라 보긴 힘들다. 오히려 역사교양서로서 한국불교사, 넓게는 한국사에서 주목해야 할 승려의 행적을 전하고 재평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물론 ‘화쟁(和諍)’과 같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상적 맥락에 관해선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것의 드러냄이 이 책의 궁극적 목표는 아닌 것이다.
저자가 고백한바, 자신은 ‘불교사상사의 지식이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밝힌 것이라기보다 승려를 대상으로 한 다른 시각의 역사적 해설을 진행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더욱이 ‘이야기체 역사서의 시초’,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조금은 낯선 이 열일곱 명의 승려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기록상 남겨진 그들의 행보와 그들이 남긴 문집, 그들과 관련된 민간 설화와 현대 자료 등의 전 방위적 검토에 더불어 저자의 확고한 역사관을 통해 해당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귀한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한국불교 대표 고승,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그들 생애의 찰나
- 원효(元曉), 의상(義湘), 의천(義天), 보조(普照), 일연(一然), 무학(無學), 경허(鏡虛)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승려 일부는 불자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위인으로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인 기행(奇行)은 물론 그들의 한계까지 서슴없이 기술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끝에 도달한 저자의 평가가 기존의 긍정적인 데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도 이러한 방식은 신선하다. 한편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그들이 어떠한 실천적 면모를 보였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그들의 현실적 행보가 보인 한계에 대해 논하기도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시대의 영웅, 선방(禪房)을 박차고 나서다
- 서산(西山), 사명(四溟), 백용성(白龍城), 송만공(宋滿空), 한용운(韓龍雲)
저자가 소개하는 열일곱 명의 승려 중에는 우리 역사 속 암흑기라 일컬어지는 시기에 선방을 박차고 나와 동분서주했던 영웅적 인물도 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의 혼란한 가운데 현실로 뛰어들어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고자 창과 칼을 든 서산(휴정)과 사명(유정),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독립의 목소리를 한껏 높였던 백용성, 송만공, 한용운도 이 책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저자는 승려로서뿐만 아니라 현실 구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정치가로서, 그리고 시대의 짐을 짊어지고 고뇌하던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함께 살피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케 한다.
비록 이들의 행적이 계율을 어기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위기의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은 그들의 행적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특히나 2019년 삼일운동 100주기를 맞이하며 이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지금 그들의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국불교사의 방외(方外) 인물
- 도선(道詵), 묘청(妙淸), 변조(遍照), 설잠(雪岑), 천호(淺湖)
이 책을 특징짓는 지점에는 또한 다섯 승려가 있다. 도선, 묘청, 변조, 설잠, 천호가 그들이다. 이들은 우리 불교계에서 조명한 경우가 드물거나 없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승가에 귀의한 승려였다는 점, 그리고 우리 역사의 문제적 인물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도선의 경우 그 행적이 미묘하지만 그가 제창한 풍수지리설, 비보설 등은 신라 말기 혼란한 시기에 고려 건국이라는 개혁의 정당성을 부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에 대한 『고려사』 등의 기록이 고려 건국 세력이 지어낸 허구일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말이다. 한편 김시습이란 속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설잠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승려가 되었다. 그의 생은 기행의 연속이었지만 지조 있는 삶을 살았고, 자신의 절개와 애민정신이 투영된 많은 시편을 남기기도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인물은 묘청, 변조(신돈), 그리고 천호(이동인)이다. 신채호는 자신의 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서경천도운동을 벌인 묘청을 자주진보파 승려로 평가한 바 있다. 한편 변조는 양민과 천민들 사이에서 성인이라 불렸으며, 고려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정치적 행보를 늦추지 않았다. 천호의 경우 조선의 근대화에 관심을 두어 왕실과 일부 귀족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을 넘나든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 세 승려는 역사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이야기되거나 그에 관한 흔적이 미미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관련된 기록과 자료를 통해 이들의 행적을 재구성한다. 그 가운데 저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만 또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도 한다. ‘당신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이다.

구매가격 : 12,600 원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1년

도서정보 : 이한우 | 2019-08-2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출판사 서평

난세를 치세로 바꾼 18년의 역사,
그 치열한 기록이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형제들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 조선의 설계자라 평가받는 정도전을 죽인 ‘냉혈한’… 그에 대한 이해는 즉위 이전의 비정한 면모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자취를 좇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저자는 최근 역사 저술가로서 매진하며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밝혀줄 고전 번역에 힘쓰고 있다.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인 『대학연의』를 비롯해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사서삼경’ 등을 번역해온 저자의 시선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로 이동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집필했다. 이러한 행보에서 나아가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종실록』을 번역한 이유는 그만큼 태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주는 군주인 까닭이다.



나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방대한 실록 번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왕이 되기까지 냉혹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상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 전략을 펼치고 관제개혁에 힘쓰는 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태종에 집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곳곳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밑바탕이 된 민본정치의 기조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예리한 시각으로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며 태종의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세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태종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우리 역사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군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올바른 번역, 치밀한 해석, 섬세한 역주…
우리에겐 친절한 실록 완역본이 필요하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실록 원문의 편년체 서술을 따라 1년 단위로 책을 구성하여 재위기간 18년의 기록을 18권의 책으로 엮는 방대한 시리즈이다. 실록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 번역 과정을 친절하게 담았고,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ㆍ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기존 번역물의 오류를 바로잡고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냈다. 번역본과 함께 한문 원문을 책에 실었고, 독자들에게 한문 읽기의 묘미를 전하고자 ‘원문 읽기를 위한 도움말’을 통해 저자만의 번역 노하우를 소개한다.



기존의 공식 번역은 한자어가 너무 많고 문투도 낡았다. 게다가 역주가 거의 없어 불친절하다. 전문가도 주(註)가 없으면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실록이다. 특히 실록의 뛰어난 문체가 기존 번역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_본문 중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논문 표절과 무단인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저자는 최근 연구부정행위검증 민간기관인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실시한 논문표절 예비검증에서 모범 사례로 꼽혔다. 특히 인용문 번역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번역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결과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태종에 대한 탐구를 넘어『조선왕조실록』을 편집ㆍ요약본만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기존 공식 번역에 아쉬움을 느껴온 독자들 모두에게 실록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의 진면목이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전을 만나다

“또 이르기를 ‘공양군(恭讓君-공양왕) 때를 당해 용사(用事)하는 자들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라고 했으니 그때 우리 태조께서는 나라의 수상(首相)이 됐으므로 모르긴 하지만 용사자(用事者)란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
_본문 중에서



명나라 진련이 이색의 비명을 지어 보냈는데, “공양군 때를 당해 용사하는 자들은 공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태종은 이 ‘용사자’가 태조가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고, 비명의 찬자인 하륜은 지탄받게 된다. 하륜은 이숭인과 이종학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정도전, 남은에게 탄핵이 집중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왕조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정도전은 폐서인이 되었다. 태종 11년에 발생한 이색 비명 논쟁은 사실상 태종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태종은 이 사건으로 많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군주의 덕목은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고전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우리의 고전에 담긴 선조들의 살아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구매가격 : 28,64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