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역사, 강제동원

도서정보 :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 2018-07-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광복을 맞은 후, 7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강제동원의 상흔은 여전합니다. 일본의 보상은커녕 사과마저 요원한 상황입니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하고, 국가의 역할에 대해 짚어보는 기획 기사를 쓰고 책으로 엮었습니다.

구매가격 : 7,200 원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도서정보 : 김형오 | 2018-06-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어떻게 김구의 삶과 사상을 쉽고 깊게 읽을 것인가?”
‘보통사람(白凡)’이 묻고, 김구가 답하고, 뜻을 더하여 들려주는 문답식 《백범일지》

“여전히 어려운 시대, 백범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한 지금,
《백범일지》에 담긴 김구의 올곧은 정신과 신념,
우리의 삶에 적용할 용기와 지혜를 새롭게 만난다”





◎ 도서 소개

“어떻게 김구의 삶과 사상을 쉽고 깊게 읽을 것인가?”
‘보통사람’이 묻고, 김구가 답하고, 뜻을 더하여 들려주는 문답식 《백범일지》

쉽고 간결한 문체, 깊고 풍부한 이야기로 새롭게 만나는
혁명가 김구, 인간 김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백범일지》

- 2018년 서거 69주년, 다시 만나는 백범 김구의 삶과 시대
- 쉽고 간결한 문체, 깊고 풍부한 이야기로 풀어낸 ‘국민 애독서’
-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마음을 울리는 도전과 헌신의 태도
- 김구의 삶과 사람, 투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80여 장의 도판


우리나라 역사상 백범 김구만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며 치열하고 극적으로 살다 간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며 힘겨운 망명 생활을 견디고,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통일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다 흉탄에 맞아 생을 맞이한 민족의 지도자이자 영원한 투사. 《백범일지》는 이토록 힘겹게 살아낸 투쟁의 삶을 회고하는 김구 개인의 자서전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기록이요, 역경과 질곡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증언이다. 한편으로는 나라에 헌신하느라 떨어져 지냈던 가족에 남기는 유서를 대신해 쓴 글이자 민족에 바치는 당부의 말이기도 하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김구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판본과 해설서를 통해 널리 읽히는 ‘국민 애독서’ 《백범일지》를 쉽고 간결한 문체와 깊고 풍부한 이야기, 문답식 구성을 통해 새롭게 풀어낸 책이다. 엮은이는 지난 3년간 효창원 백범 묘소와 백범 좌상을 거의 매일 같이 마주하며 김구의 삶과 사상, 시대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오래 고심하고 공을 들였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 전문 연구자가 아닌,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김구의 생애와 생각을 진솔하고 정직하게 바라보고 쉽고 간결한 문체로 담아냈다.
김구의 호 ‘백범(白凡)’은 ‘평범한 백성’ 즉 ‘보통 사람’을 가리킨다. 이 책은 바로 이 ‘보통 사람’들의 질문에 김구가 직접 답하는 Q&A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시대 상황과 추가 설명 등 엮은이가 풀어쓴 글을 보탰다. 《백범일지》의 내용을 완전히 해부하다시피 한 다음 유형별로 묶은 뒤 총 60개의 질문(Q)과 답(A), 덧붙인 해설(+)을 9개의 장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이를 통해 《백범일지》에 담긴 비범한 혁명가이자 진솔한 인간이었던 김구의 삶을 보다 쉽게, 동시에 깊이 이해하고 그가 남긴 정신과 신념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백범은 더욱더 그리운 이름, 절실해지는 얼굴이다. 늘 푸르게 깨어 있고, 서늘하게 살아 숨 쉬는 얼과 혼이다. 이 책은 그런 선생과 《백범일지》에 바치는 나의 헌사다. 백범을 존경하지만 교과서로만 접한 사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긴 사람, 《백범일지》를 예전에 읽었지만 기억이 희미해져 다시 한 번 읽어보려는 사람, 최근에 읽고 평전이나 어록에도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의 손에 이 책이 들리기를 원한다. - 〈저자의 글〉 중에서



"백범 김구는 누구인가"
누구보다 비범하게,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살아낸 삶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은 그 외에도 수많은 변곡점을 거쳤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황해도 시골 ‘상놈 집안’에서 태어난 개구쟁이 소년의 일화부터 동학의 ‘아기 접주’로 명성을 날렸으나 결국 실패한 청년기의 좌절과 경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를 복수하기 위해 일본 장교를 살해한 뒤 이어진 옥살이와 탈옥 후의 유랑 시기,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온갖 궂은일을 맡아 처리해야 했던 긴 중국 망명 시절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김구 생애의 중요한 순간들을 짚어준다. 이를 통해 혁명가, 독립운동가로서의 판단력과 문제해결력, 리더십을 키워간 과정과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도 함께 조명한다. 배고픔과 외로움 같은 본능적인 어려움은 물론 자신이 저질렀던 부끄러운 실수와 생각까지도 숨김없이 고백하는 진솔하고 더없이 인간적인 김구의 매력을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엮은이는 《백범일지》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오랫동안 널리 읽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담긴 김구의 모습이 너무나 진솔하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에서 엮은이는 《백범일지》에 담긴 김구의 간곡한 당부를 함께 밝힌다. 즉 김구를 무작정 존경하고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워야 할 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을 찾아 귀감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김구가 겨레의 젊은이들에게 기대했듯 이 책의 독자들이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떻게 백범일지를 읽을 것인가"
백범이 묻고 김구가 답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민 애독서’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백범일지》의 내용을 풀어내 쉬운 문장으로 재구성하여 마치 일반 대중, 즉 ‘보통 사람’이 던지는 의문과 지적에 대해 김구 선생이 당시 왜 그렇게 했는지 직접 답하는 새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엮은이가 당시의 사건 정황과 시대 상황, 인물 정보 등을 덧붙여 읽는 이들의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백범일지》가 단순한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구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어린 두 아들에게 말해주려고 상해에서 유서 대신 쓴 것이 상권이고, 일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알리기 위해 중경에서 집필한 것이 하권이다. 상권에는 주로 김구의 개인적인 삶과 활동 내용이 담겨 있고, 하권에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항일투쟁의 기록이 담겨 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지내던 시절이자 임시정부 활동 침체기로 고난과 역경을 겪던 시절 집필한 상권의 내용을 중심으로 김구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 중년과 말년에 걸친 생애와 그 과정에서 연마하고 정립한 사상을 각 장의 주제에 맞게 풀어낸다.
김구는 피난 중에도 《백범일지》를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틈만 나면 수정하고 보완했다. 그만큼 김구의 삶과 뜻을 이해하는 데 근간이 되는 책임이 분명하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김구의 말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낸 동시에 원본에는 없는 설명과 해설을 덧붙여 한결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왜 지금 다시 김구여야 하는가"
어려운 시대, 길을 찾는 이들에게 전하는 용기와 지혜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창호에게 청사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청했다. 별호를 ‘보통 사람’이라는 뜻의 ‘백범’으로 고친 의미대로 낮은 자리에서 궂은일을 하고자 한 것이다. 김구는 감투에 욕심이 없었고 그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삶을 원했으나 격동의 시대, 폭풍 같은 환경이 그를 비범한 인간, 역경에 맞서 싸우는 전사로 키워냈다. 너무나 인간적인 김구가 많은 과정을 겪으며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엮은이는 책에서 스스로 어렵고 힘겨운 일에 부닥치면 ‘이럴 때 김구 선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으며 어떤 어려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아냈던 김구의 올곧은 정신과 신념, 용기와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울림과 가르침을 준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를 통해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통하는 김구의 올곧은 정신과 신념, 용기와 지혜를 전하고자 한 까닭이기도 하다. 특히 김구가 필생 염원했던 조국의 완전한 독립, 즉 통일 한국의 새날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나로 뭉쳐도 부족한 상황에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환상과 착각에 빠져 무책임한 주의 주장으로 자초했던 지난 아픔을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의 중요한 특징이자 강점은 기존의 평전이나 해설서들과 달리 엮은이의 통찰력을 더해 김구의 말과 글을 풀어냈다는 점이다. 늘 깨어 있는, 살아 숨 쉬는 얼과 혼인 김구의 말과 행동, 삶과 사상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하길 고대한다. 백범을 존경하지만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사람,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를 통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긴 사람, 《백범일지》를 읽었지만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안내자이자 길잡이가 될 것이다.


◎ 책 속에서

◆ 김구 곁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숱하게 겪었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산더미를 이룬 시신도 보았다. 사람을 죽였고,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환경은 처절했고, 심경은 절박했다. 김구는 칠십 평생을 회고하며 “살려고 산 것이 아니다. 살아져서 살았으며,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라고 말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살았던 한평생은 역설적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 살아 있는 역사로 남아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 〈1장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중에서

◆ 돌아보면 가족이 같이 산 날보다 헤어져 산 날이 훨씬 길었다. 또 피지도 못한 어린 것들, 고생만 한 아내, 효도 한 번 해드릴 겨를이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먼저 보내야 했다. 가족을 보살피기는커녕 관심조차 제대로 기울이지 못했다. 지지리도 부족한 자식이며 못난 남편, 냉정한 애비였다. 그래도 내겐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겉으로 소리 내 울지도 못한 채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외롭고 쓰라린 세월이었다.
- 〈1장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중에서

◆ 아버지의 어릴 적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운명하실 때 왼손 약지를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흘려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가 태어났다. 할머니 기일이 내 생일이 된 것이다. 말년에 중병이 들어 열나흘 동안 내 무릎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는 경자년 12월 9일, 애써 잡으셨던 내 손을 놓으면서 먼 길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 임종하실 때 그러셨듯이 자식 된 도리로 나도 손가락을 자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머니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싶어 당신 모르게 허벅지 살을 베어냈다. 왼쪽 허벅지에서 살 한 점을 떼어내 고기는 불에 구워 약이라 속여 잡숫게 하고, 피는 입안으로 흘려 넣어드렸다. 그것만으로는 양이 모자란 듯해 다시 칼을 들어 이번엔 좀 더 크게 떼어내려고 백배 천배 용기를 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극심했다. 결국 다리 살을 베어만 놓았을 뿐 손톱만큼도 떼어내진 못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를 베는 일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거로구나, 나 같은 불효자는 시늉만 내다가 마는구나!”
- 〈2장 백범은 ‘백범’인가?〉 중에서

◆ 해가 바뀌자마자 전봉준을 필두로 하여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4월 전주성을 함락시킨다. 이를 빌미로 6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동학군은 해주성 공격에 실패한 데 이어 공주 우금치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 우국충정과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19세 소년은 깨닫게 된다. 역사의 주도권은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동학도의 세는 급격히 기울어진다. 동학의 ‘아기 접주’로 명성을 날리던 김창수는 선봉장으로 나섰던 해주성 전투의 실패를 자책하며 교훈을 얻는다. 훈련 받지 못한 오합지졸로는 백전백패임을 절감하고 우선은 군사훈련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런 창수에게 찾아온 정덕현과 우종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다. 두 사람을 대하는 백범의 태도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련함과 친화력, 열린 의식 등 지도자의 자질을 읽을 수 있다.
- 〈3장 틀 속에 갇혀 틀을 깨려 하건만〉 중에서

◆ 김구의 아내 최준례가 10대 소녀 시절부터 자유 결혼을 꿈꾸었을 뿐 아니라 실천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신선하다. 여성의 성향이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고 혼사에 전혀 반영이 안 되던 시대에, 그것도 어머니가 이미 오래전에 다른 청년을 예비 사위로 못 박아 놓은 상황에서 말이다. 김구 또한 당시 조혼으로 인한 갖가지 폐해를 절감하고 있던 터라 이 신여성을 동정하고 그녀의 입장에 깊이 공감했다. 둘은 한마음이 되어 관습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다. 여러 차례 가슴 아픈 경험을 뒤로하고 마침내 천생연분, 필생의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 〈5장 고뇌와 갈등의 청년기〉 중에서

◆ 백범은 신문을 받을 때마다 지옥을 경험했다. 매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뒤에야 유치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목청껏 외치곤 했다. “내 목숨은 빼앗을 수 있어도 내 정신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간수들이 제지하고 윽박질렀지만, 김구의 부르짖음은 감옥을 우렁차게 울리며 좌절한 동지들의 신념을 다시 일으키는 지렛대가 돼주었다. 그런 김구도 고깃국 냄새엔 코가 먼저 반응했다. 온유한 낯빛과 공손한 말투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꾸짖고 마음을 다잡았다.
- 〈6장 세상 밖의 감옥, 감옥 안의 세상〉 중에서

◆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나는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나를 청사 문지기로 써달라고 청원했다. 이유는 연전 본국에서 교육 사업을 할 때 내 실력과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알아보려고 순사 채용 과목을 혼자 시험쳐본 결과 내 점수론 합격이 어려움을 절감했고, 또 문지기보다 높은 자리는 허영을 탐해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별호를 백범으로 고친 연유까지 설명하며 설득하자 안 동지는 흔쾌히 국무회의에 올리겠노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하룻밤 사이에 내용이 바뀌었다. 도산이 홀연 내게 경무국장 임명장을 내민 것이다. 그때는 각 부서 차장이 총장 직권을 대리했는데, 청년 차장들이 연장자인 내가 여닫는 문을 드나들기가 아무래도 겸연쩍고 거북스럽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하기야 도산보다도 내가 두 살 많긴 했지만, 나로선 생각지도 않은 문제였다.
“뜻은 고맙지만 나는 일개 순사 자격에도 못 미치는 사람입니다. 경무국장 자리는 감당하기 벅찹니다.”
“겸손의 말씀, 자격은 충분합니다. 지금 같은 혁명기엔 정신을 보고 인재를 쓰는 법입니다. 오랜 감옥 생활로 왜놈들 실정을 잘 아는 백범만한 적임자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 〈7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1)〉 중에서

◆ 백범은 결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았으며, 나이, 지역,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사람을 끄는 힘도 출중했다. 이봉창과는 상해의 뒷골목을 함께 누비고 좁은 여관방에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우국담론을 토로한다. 김구의 열린 마음과 애국 열정 그리고 삿됨이 없는 정의감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고 한 길로 가게 한다. 엄혹한 임시정부 시절, 배신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상해에서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목숨까지 던져가며 김구와 더불어 모진 풍파를 무릅쓴 수많은 애국자와 투사는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졌다. 그들은 기꺼이 싸우고 또 죽었다.
- 〈8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2)〉 중에서

◆ 임시정부는 월세도 못 낼 만큼 가난에 쪼들렸지만, 김구 몸엔 60만 원이란 천문학적 현상금이 붙었다. 임정 청사의 월세나 일반 노동자 월급이 30원 안팎이던 시대였다. 60만 원이면 청사 임대료 1,600년치를 내고도 남을 거액이었다. 잡기만 하면 일확천금할 기회였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인 밀정뿐만 아니라 중국인, 심지어는 서양인들까지 김구를 잡으려고 여기저기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으며 쑤시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범은 ‘움직이는 복권’이 되어 동가식서가숙하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도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도와주는 이들, 눈감아주는 이들이 많았다.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한인 노동자와 주부들로선 평생 팔자를 고칠 현상금이었지만, 김구의 실체를 아는 동포 중 어느 누구도 밀고한 이가 없었다. 오히려 숨겨주고 따뜻한 밥을 제공했다. 그들에게 백범은 현상금 60만 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 〈8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2)〉 중에서

◆ 백범 역시 누구보다 애타게 고대했을 ‘그날’이 왔다. 조국 광복의 날이 밝았다. 그런데 왜 기쁘지 않았을까? 일제의 무조건 항복은 김구에게 복음이 아닌 비보였다. 일지에서도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김구 말고 이런 위험한(?)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백범일지》가 얼마나 솔직한 고백록인가를 또 한 번 웅변한다. 김구는 우선 수십 년간 준비하고 열망한 보람도 없이, 독립된 조국에 광복군이 ‘해방군’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되어 너무나 아쉬웠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 향후 전개될 통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외세의 영향력은 커지고 우리 정부의 발언권은 약화될 것을 걱정했다.
- 〈9장 마지막 그날까지〉 중에서

◆ 나는 상해에서 18일을 머문 다음 1945년 11월 23일, 1진으로 선발된 열네 명과 함께 서울행 프로펠러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선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의 “보인다!”란 외침이 무겁게 가라앉았던 침통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손바닥만 한 비행기 창 아래로 푸른 바다에 올망졸망 떠 있는 섬들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곧 합창으로 번졌다가 울음소리로 흐려졌다. 비행기는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고국의 냄새를 맡았다. 떠난 지 26년 7개월여 만의 귀환이었다.
- 〈9장 마지막 그날까지〉 중에서

구매가격 : 15,840 원

김재옥 선생과 동락전투 : 6 25전쟁 처녀 호국영웅

도서정보 : 박정학 | 2018-04-27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6.25전쟁 처녀 호국영웅 『김재옥 선생과 동락전투』. 김재옥 선생의 일생과 공훈을 다룬 책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김재옥 선생을 우리의 역할모델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동락전투가 단순한 6.25 최대의 승전에 머물지 않고 우리나라가 세계 모든 나라에게 유엔군 파병의 가치를 알게 하는 모델이 되게 하자고 강조한다.

구매가격 : 5,0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7-08-24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한국 사회를 불구로 만든
박정희식 성장 만능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박정희는 청렴하고 경제에 헌신했다?
오히려 경제를 죽여서라도 권력 잡기에 혈안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풍미한 천민 자본주의, 성장 만능주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권의 주제는 ‘경제 성장’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경제 성장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성장과 발전이 박정희의 업적은 아니라고 서중석 교수는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오해이고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허리띠 졸라매고 죽도록 고생해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나라를 일으킨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을 주목하고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은 어떠했는지, 성장의 진정한 주역은 누구였는지, 성장의 과실을 공평하게 나눴는지 등을 살피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식 성장 만능주의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1960~1970년대에는 물신숭배 분위기, 즉 성장 만능주의, 성장 제일주의가 이른바 조국 근대화 논리와 얽혀 한국 사회를 풍미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배제되었다. 적나라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었고, 한마디로 정의, 성실, 근면, 정직 같은 것이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가 못 된 것이다. 서중석 교수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 청산을 못한 것이 한국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이런 천민 자본주의, 성장 제일주의, 성장 만능주의도 한국 사회를 불구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박정희 집권 시기 경제적 결함을 여러 가지로 지적했는데, 그 결함이 크다 보니까 그것이 마치 체질처럼 돼서 수정할 방법을 찾기가 힘들게 됐다. 예컨대 과도한 해외 의존이라든가 내수 시장 빈약, 경제력이 소수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재벌 중심 경제, 부동산 투기 등에서 볼 수 있는 투기성 경제, 타율적 금융, 노동 통제 같은 것들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게 된 것이다. 문제가 있는 경제에서 수십 년 동안 살다보니까 잘못된 것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람도 많아졌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경제 발전은 없었을까?
한국 경제가 성장한 여러 요인은 무엇인가

박정희 집권 18년간 한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했다.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변신했고, 배고픔도 해결됐다. 또 경공업 국가에서 중화학 공업 국가로 바뀌었다. 1971년에 37.5퍼센트였던 중화학 공업 비중이 1981년엔 51.1퍼센트가 되면서 고도 산업 국가가 됐다. 이 시기에 포항종합제철과 거대한 중화학 공장들이 들어서고 고속도로도 뚫렸다.
또 대단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2~1966년에는 연평균 7.9퍼센트를 기록했는데, 그다음 시기에 비하면 그리 높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7~1971년에는 연평균 9.7퍼센트라는 아주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제조업 성장률이 연평균 21.5퍼센트나 됐다.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2~1976년에도 9.2퍼센트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성장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이뤄진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변화를 두고 ‘박정희가 대단한 경제 발전을 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에 의해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심지어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경제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견해는 문제가 많고,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 발전에서 박정희가 맡은 역할은 부분적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이 시기에 경제가 발전하게 돼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 18년 시기는 인류 역사상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기와 많은 부분 겹쳐서 한국도 경제가 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과 성취욕도 경제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전쟁 특수, 중동 건설 특수도 큰 작용을 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여러 요인이 작용해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이지 박정희 개인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전태일 분신케 한 참혹한 노동 조건,
권력은 노동 통제에만 관심 있었다

이 시기 한국 경제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정부가 노동자를 통제하고 노동조합도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이 그런 정부에 의존해서 노동자를 압박하고 노조를 어용화해 이윤을 높이려는 쪽으로만 신경을 썼다.
당시 노동자 상황을 보더라도 한국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산업 사회로 가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걸맞은 노동 정책이 있어야 했고 적절한 노동 운동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기업도 살고 노동자도 사는 건강한 사회로 한국이 가야 했다. 그런데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그 길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많은 노동자들은 열악한 일터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이런 노동 문제를 고발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있었던 엄청난 물가 상승은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을 크게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경제 활동에 의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부동산 투기 등 각종 투기가 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성장 잠재력을 억압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키웠다. 그러다가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부마항쟁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박정희 유신 정권의 운명을 재촉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18년간의 경제를 평가할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게 18년 동안 관행처럼 돼 있다 보니까 그 뒤의 정권이 그걸 이어받지 않으면 경제가 운용이 안되는 식으로까지 한국 사회가 돼버렸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처럼 된 것이 있다. 너무 심각해서 그 병이 고질병이라는 사실은 물론 무슨 병인지도 나중에 가면 잊어버리게 되는 망각증 상황까지 갔다.”

구매가격 : 11,2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7-08-0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형님으로 모시겠소”
일본 극우들에게 고개 숙인 박정희
미숙성, 굴욕·저자세, 졸속 처리로 한일협정 체결

과거사에 대한 일본 측 사과 받아내기는커녕
망언 덮어준 박정희 정권

박정희와 일본 우익, 그리고 한일 회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권의 주제는 ‘한일 회담 한일협정’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 정권이 미숙성, 굴욕·저자세, 졸속 처리로 한일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과 일본 극우들에게 “형님으로 모시겠소”라며 머리를 숙이고, 검은돈을 받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한일협정을 맺었는지 자세히 살피고, 박정희 정권이 맺은 한일협정이 왜 문제가 되는지, 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도 분석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 동안 반대 시위가 일어난 까닭도 살피고 있다.
“박정희는 만주 인맥에 의존해 한일 회담을 타결하려 했고 한일 관계를 심화시키려 했으며 경제 건설을 하고자 했다. 이것은 1964년, 1965년에 엄청난 규모로 시위가 일어나게 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울러 박정희 집권기에 널리 사용된 ‘친한파’, ‘반한파’도 박정희 정권 때 한일 관계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의 만주 인맥과 그 뒤를 이은 군국주의자들은 유신 체제 지지·지원에 멈추지 않고 전두환·신군부 체제의 출현과 존속을 적극 지원하고 지지했다.”

군사 정권의 미숙함, 무경험, 경솔함, 독단, 독선

한일 관계는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해방 후 한일 관계의 분수령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한일협정으로 불리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들의 상당수가 한일협정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도 차분히 되짚을 필요가 있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에 대항하여 한?미?일 3각 안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했고, 정통성의 취약점을 경제 개발로 만회하려는 박정희 정권은 이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런데 한일 회담은 이승만 정권 때도, 장면 정권 때도 있었는데 왜 박정희 정권 때 대규모 시위 또는 반대 활동이 전개됐을까? 1964~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은 특히 시위가 많이 일어났던 박정희 정권 18년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에 걸쳐 전개됐고, 1979년 부마항쟁을 제외하면 그 규모도 대단히 컸던 시위·반대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큰 시위, 반대 운동이 2년에 걸쳐 벌어졌다.
이처럼 큰 저항에 직면한 이유는 군사 정권의 미숙함, 무경험, 경솔함, 독단, 독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취한 태도와도 관련돼 있었다. 일본에 보인 굴욕적 저자세, 졸속 처리하려는 태도 같은 것이 학생과 국민들에게 큰 반감을 샀던 것이다.

과거사 사과 받아내기는커녕 망언 덮어준 박정희 정권

전 국민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고, 6월 22일 일본에서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가장 중요한 일본의 사죄는 어물쩍 넘어갔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은 “한일 양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이다”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박정의 정권이 가장 매달렸던 청구권 자금도 문제가 참 많다.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구는 두고두고 피해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와 관련해 하나 더 생각할 문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그곳이 옛 소련 땅이 되면서 돌아올 길이 막막해진 이들의 문제는 한일 회담 과정에서 논의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한테서 받은 이 돈은 일본이 1950년대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지불한 것보다도 더 적은 것이었다. 청구권 자금을 받은 방식과 그 사용처도 논란이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금액을 일본으로부터 일괄 수령하는 방안을 관철했고, 그렇게 받은 금액을 피해자들에게 온전히 전하는 대신 기간 시설 건설 등에 상당 부분 사용했다. 경제 건설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고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몫이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무엇보다 문제는 박정희가 만주 인맥에 의존해 한일 회담을 타결하려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시 노부스케, 시이나 에쓰사부로, 고다마 요시오, 야쓰기 가즈오, 이시이 미쓰지로 등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경영하거나 대륙 침략 과정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만주 인맥은 박정희 군사 정권의 출현을 적극 환영했다. 5·16쿠데타 이후에 기시 노부스케는 이렇게 얘기했다. “다행히 한국은 군사 정권이기 때문에 박정희 등 소수 지도자들의 나름대로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액수로 박 의장을 만족시키기만 하면 저쪽에는 국회도 없는 것이고, 만일 신문이 이것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박 의장이 그들을 봉쇄해버릴 수 있으니까 되는 것이다.” 민정 이양기에 박정희가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만주 인맥을 중심으로 한 일본 극우 세력은 적극적으로 환영하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해 30시간을 머문다. 거기서 그는 만주군관학교 교장 같은 사람을 일본 정부에 요청해 만나고, ‘깍듯이’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 교장은 군국주의 파시즘이 골수까지 박힌 사람이었다. 박정희한테는 일본 패전 이전의 군인 시절에 대한 상당한 향수 같은 것들이 있었고, 첫 일본 방문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 등을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일본 도착 다음 날인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 이시이 미쓰지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같은 사람들과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생각으로 해볼 생각이다”라고 이야기해서 그 자리에 있던 그 사람들이 놀라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또 자신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에는 일본식 교육이 가장 좋다”며 자꾸 일본 정신을 강조했다고 한다.
1965년 한일 회담 조인을 한 당사자인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이 쓴 《대통령을 그리며》에 이런 말이 나온다. 1961년 11월 기시 노부스케 등을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쓰여 있다.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이렇게 졸속으로 맺은 한일협정은 지금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한일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에 들어서고 한국이 자주적으로, 대등하게, 자신감을 갖고 일본을 대하게 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로 나아간 1987년 6월항쟁 이후였고, 정부 차원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였다. 그 긴 세월 동안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지극히 비정상적이었던 건 박정희 정권 때 맺은 한일협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불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주 인맥의 대부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가 이끄는 정권이 저런 극단적인 짓을 계속하고 있고 박정희 유신 체제와 ‘친연성親緣性’이 강한 박근혜 정권이 그것에 야합하면서 그 불행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구매가격 : 10,5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려 했던 조봉암,
그는 왜 사형되어야만 했나?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의 최후,
이승만과 겨룬 ‘죄’, 대가는 죽음이었다

진보 정치인 조봉암을 재조명하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 3권.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3권의 주제는 ‘조봉암과 이승만’이다. 조봉암의 생애를 되짚는 작업을 통해 이 시기 한국인들이 걸어온 역정(驛程)을 찬찬히 살피고 있다. 조봉암이 본격적으로 정치인으로 활약한 시기는 이승만 집권기이다.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한 조봉암과 이승만은 자연히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이 책은 이런 조봉암과 이승만을 중심에 두고 일제 강점기, 해방 전후, 1950년대의 한국 정치와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진보 정치인 조봉암은 어떤 정치를 펼쳤는가? 진보당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이승만은 극우 반공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왜 조봉암은 사형되어야 했는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려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던 시기에 조봉암은 활약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이 책은 진보 정치인 조봉암을 재조명하는 책이며,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조봉암, 진보 정책을 꾸준히 제시하고, 실천했던 정치인

조봉암은 뛰어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의 진보 세력 가운데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 3·1운동을 겪으면서 한 명의 한국 사람으로 재탄생한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때 제1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 맹활약했다. 상해에서 1932년에 체포되어 7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1945년 1월경 헌병사령부 예비 검속에 검거되어 다시 수감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뒤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고, 이 외에도 농민들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협동조합을 육성·장려하고, 농민이 직접 교육받고 실천할 수 있는 농사 훈련 기구 같은 것을 창설하려 했다. 이런 조봉암의 급진성을 이승만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반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권고에 의해 조봉암은 사표를 제출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선 2위를 기록하며 이승만의 라이벌로 급부상하게 된다. 1956년 대선에서는 이승만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었다. 956년 대선은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정 선거가 만연했고, 이 부정 선거가 아니었다면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 수도 있다.
조봉암은 당시 현실에 맞는 진보 정책을 꾸준히 제시하고, 실천한 정치인이었다. 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하려 했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진보당은 ‘피압박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 세력의 전위’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진보당이 발당식을 했을 때도 피해 대중의 당이라는 걸 명시했다. 이건 공산주의하고 굉장히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사례를 봐도 이런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없다. 진보 세력의 정강 등에는 대개 ‘노동자, 농민, 진보적 소시민 또는 당하고 있는 여러 소수 세력을 옹호한다’, 이런 식으로 많이 나오지 않나. 그런데 조봉암은 피해 대중이라는 걸 명시했다.” 그러면서 개성을 맘껏 발휘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했다. 또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북진 통일’만을 강변하던 시대에 ‘평화 통일’을 주창한 사실만 해도 그렇다. 그 당시에는 용기가 없다면 ‘평화 통일’을 얘기하기가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중요한 점은 평화 통일이라는 말이 1950년대에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1950년대 상황을 모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조봉암은 1958년 1월 간첩죄 혐의로 진보당원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그리고 1959년 7월 31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처형 당시 60세였던 조봉암은 형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억울하게 사형에 처해진 조봉암은 52년이 흐른 2011년에야 명예를 회복한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전원 합의 판결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냉전 체제에 도전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죽은 것 아니겠나. 사실 냉전 체제에 도전한 정치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조봉암을 역풍(逆風)의 정치인이라고 불렀다. 역풍에서 풍이라는 게 뭐겠나. 냉전 체제 아니겠나. 냉전 체제를 거슬러 그것에 도전한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 권력욕이 남다른 독재자

뉴라이트가 ‘국부’라고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은 어떤 대통령이었는가? 우선 권력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다른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1952년 악명 높은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발췌 개헌을 통해 정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다. 전선에서 장병들이 피 흘리고 도처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감수하던 때, 후방 부산에서 최고 권력자가 집권 연장을 위해 개헌을 한 것이다.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권력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거세게 일어난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은 점점 커졌고 1954년에는 5·20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자유당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 뒤부터 선거 때마다 갖은 부정을 저지르며 정권을 유지해왔다.
이승만에게 조봉암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민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해 자신에게 도전했으며, 게다가 1956년 대선은 자칫 뒤집힐 뻔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정적 조봉암을 제거했고, 자신의 집권 기간 내내 그랬듯이 그 뒤에도 영구 집권을 꿈꾸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났고, 민중에 의해 12년간의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구매가격 : 10,5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민중이 이룬 거대한 승리, 4월혁명은 제2의 해방!
4월 그날, 천지를 진동한 함성은 독재의 총구보다 강했다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 4권.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4권의 주제는 ‘4월혁명’이다. 서중석 교수는 4월혁명을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며, ‘제2의 해방’으로 부르고 있다. 1950년대는 이승만 정권의 비리, 부정부패, 선거 부정, 악정, 폭정 등으로 숨이 턱턱 막히던 시기였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이런 말로 나타낼 수 있다.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리고 1960년 드디어 민중이 일어섰다.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에서 4월 26일까지 이어진 4월혁명은 막힌 숨통을 틔운 사건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 결론을 내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이었다. 이 책은 이런 4월혁명의 의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4월혁명 전후의 한국 사회를 반추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뉴라이트가 국부로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항쟁인가, 혁명인가, 4월혁명에 서린 민주주의 고투

4월혁명을 가리키는 용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헌법에도 그냥 4·19라고만 돼 있는 것처럼 4·19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고, 또 4·19의거, 4·19학생혁명, 4·19학생운동, 4·19혁명, 4월혁명, 4월학생혁명, 3, 4월 항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용어가 정리되지 않은 까닭을 4월혁명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2월 28일 경북 지방의 고등학생 시위부터 3·15 제1차 마산의거와 4월 11~13일에 있었던 제2차 마산의거를 거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를 총괄한다는 의미에서 4월혁명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4월혁명이 던져준 역사적 과제가 반드시 4월 19일과 4월 26일, ‘피의 화요일’과 ‘승리의 화요일’에서 다 드러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다. 이승만을 하야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건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가 4월혁명 정신이라고 부르는 또는 4월혁명의 의미를 살린 여러 가지 활동은 오히려 4월 26일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5·16쿠데타로 일단락된다고는 해도, 4월혁명 정신은 그 이후까지도 숨을 쉬면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4월혁명’으로 불러야 적절하다는 것이다. 곧 4월 26일을 경계로 해서 그날까지는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는 과정, 그 이후는 4월혁명 정신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서 4월혁명 운동기 또는 4월혁명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게 좋으며, 그래서 4·19혁명보다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4월혁명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4·19 기념식이 열리는 곳에 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러면서 5·18이 다가오면 5·18을 전후한 시기를 ‘5월 항쟁기’로 선포하고 ‘4월혁명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제는 제대로 이루자’고 소리 높이 외쳤다. 곧 4월혁명은 1987년 6월항쟁까지 가는 데 5·18과 함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4·19는 난동”, 반성과 사죄는 이승만 사전에 없었다

“어제 일어난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0일 오후 5시가 돼서야 처음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문도 미국이 압력을 가해서 겨우 발표한 것이었다. 자유당도 이날 처음 성명을 내고 “본당은 선량하고 순진한 학도를 선동하여 폭력 사건을 자행하게 한 장본인 및 그 도당의 악랄한 비국민적 만행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히고, 발포는 부득이했다고 강변했다. 이렇듯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반성은커녕 시위한 사람들을 두고 ‘비국민’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에 수습 방안을 발표했다. 이때도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직을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유당과 국무위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위기에 빠진 최고 권력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대신 주변 사람들 탓으로 돌린 것이다.
25일, 4월혁명에 한 획을 그은 큰 규모의 시위가 전개됐다. 교수 300여 명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나선 것.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등장한 이 시위는 이승만 정권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시위를 필두로 “이승만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등장했고, 그날 밤 10만 명이 넘은 군중이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끝까지 버티던 이승만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경 계엄사의 선무용 스피커가 이승만의 사임을 알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리의 화요일’이 온 것이다. 군중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올렸다. 떠나갈 듯 함성이 울리는 세종로 일대에서 일부 군중이 중앙청 정문으로 밀려들어갔다. 10대 소년들은 이승만 동상을 새끼줄에 묶어 끌고 다녔다. 흰옷을 입은 한 노인네는 덩실덩실 춤췄다. 해방의 날이 따로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자유,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

4월혁명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우선 195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볼 필요가 있다. 1950년대는 무기력, 체념, 암울, 불안, 절망, 이런 키워드로 상징된다. 그 시대는 그야말로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서울대 문리대 4·19 선언문에 담긴 것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무단 통치를 받은 1910년대를 여러모로 떠올릴 수 있는 억압의 사회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는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초래한 공포 사회였다. 말을 못 하는, 입을 닫고 묵종해야 하는 사회 위에 건설된 반공 독재로 자유가 크게 억압받았고 인간의 사고, 사상이 심하게 위축됐다.
4월혁명은 이런 1950년대를 끝장낸 혁명이었다. 4월혁명으로 정말 꿈에도 그리던,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가 찾아왔다. 그러자 문화인, 지식인, 학생들이 앞질러 만끽했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정권조차 4월혁명이 마련한 민주주의의 큰 틀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석 달이 지난 1961년 8월, 정권을 민간 정부에 넘기겠다는 민정 이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다. 그 발표에는 미국의 압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고 하지만 그와 함께 4월혁명의 큰 힘 때문에 그것을 배신할 수 없는 면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
또 4월혁명은 민족 자주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그러면서 통일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교원 노조 운동과 같은 노동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공무원 공채를 실시하고 공무원 임용령 등을 공포해 공무원 사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기도 했다. 또 법치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4월혁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신호로 해서, 제주 4·3 학살을 포함해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수많은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이 재조명된 것이었다. 이처럼 4월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은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고, 우리 사회를 변모시키고 사회에 신선한 바람, 역동적인 힘을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새 출발을 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4월혁명은 헌법 전문에 마땅히 들어갈 만큼 중요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구매가격 : 10,5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5·16쿠데타가 만든 테러·감시·가위질의 시대
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도 제약을 받았다

혁명? 5·16은 반혁명 쿠데타일 뿐!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 박정희 성찰하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권의 주제는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4월혁명 이후의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가 일어난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다. 대체 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일까? 왜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일까?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던 것일까? 당시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박정희’라는 이름은 아직도 한국 현대사의 논란거리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낯 뜨거운 말로 찬양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 세력이 끼친 폐해를 직시해야 한다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런 평가가 과연 올바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을까?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그 당시 한국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의 집권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먼저 성찰하면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박정희를 과도하게 떠받드는 세력들에 의해 그의 우상화가 하나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017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벌써부터 혈세를 쏟아부어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구미시는 당장 28억 원가량을 들여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창작 뮤지컬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비판과 성찰은 없이 일방적인 미화와 우상화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등장,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1959년 진보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조봉암이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혁신 세력이 진보정당을 꾸려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이승만 집권기 때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집단 학살 문제가 다시 수면 위에 떠올랐고, 여기저기서 진상 규명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구 암살 사건도 재조명됐다. 김구는 부활해 독립 운동과 민족주의, 통일의 상징이 됐다. 교원 노조가 결성되는 등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데모 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에 반대하는 2대 악법 반대 투쟁도 일어났다. 또한 통일 운동과 더불어 반미 운동도 일어났다. 이 당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그 유명한 구호가 나왔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런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4월혁명의 과실을 대부분 차지한 민주당은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보수 세력이었고, 분단·반공 세력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민주당 정권은 부정 선거 원흉이나 발포 책임자, 부정 축재자, 반민주 행위자를 처단하기 위한 특별법인 혁명 입법을 만드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서중석 교수는 장면 정부가 비록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9개월의 짧은 집권 기간 동안 경제 정책을 세우고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점, 경찰을 대폭 숙정해 물갈이한 점, 국군 숫자를 대폭 줄여 국방비를 경제 발전에 돌려쓰려고 했던 점은 뛰어난 성과라고 말한다. 1961년에 들어서면서 장면 정부는 점차 안정되지만 곧 쿠데타가 일어나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

그렇다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누구인가? “많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이나 집권했기 때문에 적어도 박정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우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국민에게 너무나도 생소한 사람이었다. 언론계나 지식인층도 잘 몰랐다. 국회의원들도 ‘박정희가 누구야?’ 하고 서로 얘기했다고 그런다.” 서중석 교수의 말처럼 당시 박정희는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를 만큼 무명의 군인이었다. 사실 군인 시절에도 박정희는 눈에 띄게 활동한 게 없었다. 한국전쟁 때도 별다른 활약상이 없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 다카키 마사오도 1970년대 후반, 198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졌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두 번째 응모하면서 했던 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도 2009년에서야 밝혀졌을 만큼 박정희의 과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했다. 1961년 5·16쿠데타 과정을 되짚어보면 보안이 철저하지도 않았고, 쿠데타 당일 병력 동원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았다. 쿠데타군 자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한 나라를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전엔 안 그랬는데 요 근래 박정희 정권에 관해 강의할 때 빠지지 않고 얘기하는 게 있다. ‘박정희는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운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그런 얘기를 한다. 쿠데타에 성공할 때도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정말 운이 좋았고, 경제 발전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내외 조건이 그야말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기에 경제 발전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 중화학 공업화를 할 때에도 선진국에서 사양 산업이 된 일부 중화학 공업을 넘겨주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또 정부에서는 중화학 공업에 매진했지만 기업들이 투자를 꺼렸던 1970년대 후반에 중동 건설 경기가 갑자기 일어난 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이다.”

쿠데타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서중석 교수는 쿠데타를 가능케 한 배경으로 다음 두 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당시 한국군이 굉장히 비대했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군인 숫자를 늘리는 게 국방력을 갖추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53년에 벌써 60만이 넘었고, 나중에는 72만 명까지 늘어났다. 또 하나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군인들이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는 것. 당시 어지간한 장교는 모두 미국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박정희, 김종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유학이란 큰 부자, 특권층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국을 다녀온 군인들은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었고 정권을 넘볼 힘도 갖추게 되었다. 실제로 1959년 미국 콜론 연구소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층 경제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한국에서 다수 생겼고, 이들은 특권적 관리나 정치가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이것이 폭발할 우려도 있다.”
우선 쿠데타 모의는 김종필, 김형욱 등 육사 8기들에서 시작된다. 왜 육사 8기가 쿠데타를 도모했나? 이들은 군 상층의 부패에 불만이 많았고 이를 거세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군 상층부를 바로잡자고 정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5·16쿠데타가 날 때까지 극소수만 대령 진급을 했고, 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 정도가 중령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에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를 장면 정부의 부패, 군의 부패 등을 들었지만, 서중석 교수는 권력욕과 진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등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이전부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던 박정희를 끌어들였고, 결국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5·16쿠데타, 막을 수는 없었을까
쿠데타 세력이 꿈꾼 나라는?

쿠데타는 분명 막을 수 있었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장면 정부의 인사 실책과 윤보선의 묵인 때문에 결국 막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우선 장면은 이종찬을 국방부 장관에서 내리고 현석호를 새로 임명했다. 이종찬은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신임 육군 참모총장에 장도영을 앉혔다. 장면은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란 소문을 몇 차례 들었지만, 그때마다 장도영은 ‘염려할 것 없다’면서 박정희를 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장도영만큼이나 쿠데타에 기여한 사람은 윤보선 대통령이었다. 장면과 감정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윤보선은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 일부에서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하자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곧 쿠데타를 묵인하고 만 것이다.
결국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일행.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나라를 꿈꾸었을까? 서중석 교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쿠데타를 성공시켰지만 이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상은 없었다.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게 혁명 공약 1번이었을 뿐 어떤 정치적 이념도 보이지 않았다. 반공을 제외하면 무(無)이데올로기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박정희에겐 사상이 있었는가. 서중석 교수는 박정희의 생각은 일제 식민 사관에 기반을 둔 저열한 민족성론, 식민지 노예근성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 극단적인 반공 노선 같은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혼란과 무질서를 물리력으로 뿌리 뽑겠다는 파시즘적 질서관, 그리고 일제 시기의 청년 장교들이 가졌던 군국주의, 국수주의나 군인 정신 같은 것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낡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아주 강렬하고 과격하게,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일제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고 비민주적·파쇼적 사고나 행태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적이거나 개혁적인 느낌을 갖거나 그것을 신선하고 민족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파시즘 이념이나 행동이 유럽에서 일부 층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또 일제 군국주의 청년 장교들의 정치 이념이 상당수의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처럼 그럴 수 있었다. 어쨌건 구부러진, 기이한 ‘민족의식’이 당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곧 쿠데타 세력의 사상이란 식민 사관과 극단적인 반공 노선, 군인 정신이 결합된 것일 뿐 내용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나

5·16쿠데타 때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나중에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다”라고 증언한다. 미국 정부는 ‘처음부터 쿠데타를 지지했다’고까지 얘기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에 개입해야 한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왜 이런 태도를 취했을까? 주한 미국 대사관에 오래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미국 정부가 쿠데타 지지로 나선 건 케네디 정부의 쿠바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장면 정부를 상당히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은 민간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었다. 민주와 자유를 어느 정도 지키는 민주주의 정부가 과연 한국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 후 진보 세력이 등장해 통일 운동과 전후 학살을 비롯한 과거사 진상 규명 운동을 강하게 하자, 미국은 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 그러면서 장면 정부 대신 자기들이 정말 믿는, 탄탄한 반공 권력이 들어서는 것을 생각했을 수 있다. 다만 쿠데타를 직접 지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쿠데타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곧 미국은 처음부터 박정희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건 아니지만 사실상 박정희의 쿠데타를 묵인했다. 주한 미군과 미국은 박정희를 인정했다. 박정희를 잘 알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없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박정희가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 정책을 철저히 수행할 것임을 확신했다고 본다. 남로당 프락치로서 한 박정희의 배신적 행위, 기회주의자로서 면모,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더 짚을 것은, 한 번 배신한 사람은 거기 다시 안 붙는다는 걸 하우스만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측에서 그간 보니 공산당을 배신한 자들이 공산당에 다시 가는 건 못 봤다’, 이런 점을 강조하더라.”

5·16쿠데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의 평가는 “쿠데타 세력이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만들려 했는가에 따라”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5·16 반혁명 쿠데타”로 부르는 게 제일 정확한 용어라고 말한다. 서중석 교수는 혁명이냐 반혁명이냐의 문제는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 또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을 과연 하려고 했는가. 분단 고착화인가, 통일 지향인가. 이 질문을 놓고 보았을 때 쿠데타 권력은 확실히 반혁명 세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쿠데타 이후 자유와 민주주의는 억압되었다. 정기 간행물 1,200종을 폐간시키는 등 언론의 자유도 퇴행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제약받았다. 반공법이 통과되면서 내면의 자유까지 짓눌렸다. 예술가들도 가위질의 공포에 항상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서 혁신계의 통일 운동을 반국가 행위로 철저히 처단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 자치도 완전히 뿌리 뽑혔다. 노동조합이 해산되고 많은 노조 간부가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노조는 권력에 종속되고 노동 운동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는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반혁명 쿠데타일 뿐이라고 말한다. “5·16쿠데타는 중남미 쿠데타처럼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고, 현상 변화나 현상 타파 즉 혁명을 예방하겠다는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5·16쿠데타의 의도는 전 세계적 규모의 냉전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 세력, 진보 세력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것, 역사의 정상적인 진행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매가격 : 10,5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6-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박정희는 정말 무서운 사람”
권력 앞에선 동료도, 은인도 안중에 없었다

권총을 찬 군인들의 권력 쟁탈전,
혁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


‘반혁명’이라는 무시무시한 낙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권의 주제는 ‘박정희와 배신의 정치’이다. ‘배신의 정치’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유포한 표현이다. 이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낸 정치인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추앙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친 박정희의 집권 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1961년 5·16쿠데타에서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박정희가 보인 모습은 개인적 신의와도, 민주주의 원리와 역사의 흐름을 준거로 한 대의와도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목숨을 걸고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 중 상당수를 내쳤다. 그것도 반혁명이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을 찍은 채. 그런 식으로 밀려난 이들 중에는 박정희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여러 차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은인 장도영도 포함돼 있었다. 권력 앞에서는 동료도, 은인도 안중에 없었던 셈이다. 일제 시대에 만주군 장교였다가 해방 후에는 남로당 프락치로 변신하고, 그 후에는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만은 살아났던 박정희로서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모습이다.

‘혁명재판’의 반혁명성, 쿠데타 권력의 발가벗은 모습

1961년 6월 22일, 최고회의는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걸 소급 입법했다. 이 특별법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조항이 바로 제6조다. 제6조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를 하면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 법으로 혁신계 인사, 한국전쟁 전후 집단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한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 등을 잡아들이고 중형을 선고했다.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로 몰아붙여서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를 처형하고 처단한 것이다.
서중석 교수는 쿠데타 정권의 반혁명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 반혁명 사건이라고 말한다. 반혁명 사건은 5·16쿠데타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일주일도 안 돼 2,014명을 검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숫자는 3,500명으로 늘어났다. 민족일보 사장인 조용수도 이때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통일 운동 세력을 철저하게 처단했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던 이들도 가혹하게 처벌을 받았다. 심지어 희생자들의 묘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3·15 부정 선거 원흉과 4월혁명 발포 사건 핵심 인물들은 대거 석방된다.
쿠데타에 반대한 세력, 쿠데타 관련 정보를 누설한 자들,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한 사람들도 모두 반혁명 사건으로 처단되었다. 그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반혁명 사건은 장도영 사건이다. 장도영은 5·16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고,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권총을 찬 군인들의 권력 쟁탈전에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군 복귀 공약,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박정희의 ‘배신의 정치’는 공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거듭 반칙을 했다. 곧 민정 이양 문제를 두고 줄기차게 말을 바꾼 것이다. 이른바 군 복귀와 민정 이양을 이야기한 ‘혁명 공약’을 지킬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세력은 겉으로는 민정 이양을 표명하면서도 야당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손발을 계엄으로 다 묶어놓고 중앙정보부라는 초거대 조직을 이용해 신당 조직에 착수하여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승리를 가능하게 할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러 압력에 못 이겨 2·18 성명을 통해 민정 불참 선언을 했다가 얼마 안 가 이를 다시 뒤집는다. 1963년 3월 16일 그 유명한 3·16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정권 인수의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것은 너무나 국가 장래가 염려되고 일방 우리 스스로 혁명 당국의 무책임성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따라서 본인은 앞으로 약 4년간 군정 기간의 연장에 대하여 그 가부를 국민 투표에 부쳐 국민 의사를 묻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른바 또 하나의 ‘배신의 정치’를 한 셈이다. 얼마 뒤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며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사상 논쟁 불붙은 1963년 대선, 그리고 제3공화국의 탄생

박정희의 공약은 별다른 게 없었다. “정당 정치 구현, 지방 자치 제도 실시, 중농 정책도 이야기했는데 이것들은 유권자를 헷갈리게 하는 공약이었다. 박 후보와 정당 정치 구현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지방 자치를 실시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이 당시에는 중농 정책과 정반대되는 정책을 펴고 있지 않았나.”
이 선거에서 사상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먼저 논쟁을 건 사람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조 500년 동안의 사대주의적 근성과 일제 식민지적 근성을 일소하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 외에 외국의 주의, 사상, 정치 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정부에 있는 듯하다”는 중대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들은 민주공화당은 윤보선을 허위 사실 유포, 후보자 비방 금지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사실 윤보선의 공격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이긴 했지만 여순 반란 가담자는 아니었다. 그만큼 윤보선에겐 박정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일국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 대해서조차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박정희 일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대선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이 났다. 15만 표 차이였다. 역대 대선에서 가장 근소한 표 차이였다. “이 선거는 박정희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공화당 간부들도 얼마나 가슴이 탔겠나. 정말 아슬아슬한 맛을 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는 서구적 정치, 선거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 정치, 정당 정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한국 사회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나. 그런 박정희가 이 선거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게 있었다고 본다.” 이렇게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군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이 군사 문화는 계속 존재하면서 우리 정치, 문화,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구매가격 : 10,500 원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 1

도서정보 : 강헌 | 2016-12-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문화 전방의 르네상스인, 강헌
그가 한국의 대중문화사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2015년 음악사를 매개로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드는 문화사를 종횡무진 설파한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으로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뒤이어 생사의 경계에서 독학한 명리학을 한 권의 책 『명리』를 통해 단숨에 골방에서 광장으로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그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거침없이 열어젖힌 저자 강헌이 이제 그가 온 생애에 걸쳐 섭렵한 온갖 경험과 학습의 총합을 장착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처럼 그는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원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그뿐인가. 그는 뮤지컬을 기획하고, 온갖 공연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으며, 곁가지로 와인, 축구, 음식 등 관심의 촉수가 닿는 거의 전 분야에 걸친 왕성한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하며 살았다. 심지어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생사의 경계선에서조차 그는 "명리"라는, 이전의 그의 족적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심사의 지평을 넓혔고, 그로 인해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넓은 관심사"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인 "얇은 전문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즉, 하나의 분야에 관한 충성심 높은 몰입 대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이기는 하나, 하나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겠다는 어떤 다짐과 노력 없이, 취미인지 관심인지 모를 애매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다양한 분야의 섭렵의 뒤에는, 그런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아마추어리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어떤 분야에 꽂히는 순간 그에 관한 놀라울 정도의 지적 자산을 축적하고, 그것에 대한 통찰을 얹어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뭔가를 작정하지 않고 살아온 이의 족적으로 치기에 그가 이룬 독보적인 관점은 그야말로 눈부시며 그야말로 총합적이고, 그것의 결정체를 담아 내놓은 것이 바로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전 4권 예정, 1~2권 우선 출간)이다.

구매가격 : 11,3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