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논리학

도서정보 : 크리스토프 드뢰서 | 2019-11-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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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트콤』과 『물리학 시트콤』에서 극강의 스토리텔링 능력을 뽐냈던 독일의 과학 재담꾼 크리스토프 드뢰서! 이번에는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논리학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다.

수수께끼와 퍼즐, 좋은 논증과 나쁜 논증, 이율배반과 역설, 그리고 논리가 수학의 토대를 뒤흔들었던 순간까지, 최고의 과학 재담꾼이 독자들을 기묘하고 아름다운 논리의 세계로 안내한다. 논리학으로 은행 강도를 잡고 시한폭탄을 해체하고 최적의 중고차를 찾을 수 있을까? 알쏭달쏭한 이야기로 논리학의 기초를 배우고 연습문제와 논리 퍼즐을 풀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논리학 속에 숨겨져 있던 진정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시트콤처럼 유쾌한 이야기를 통해 논리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들을 이해할 수 있다. 완벽한 카탈로그를 만들려는 도서관 사서의 이야기로 버트런드 러셀의 이율배반을 배우고, 거짓말쟁이 섬의 퀴즈쇼 이야기로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배우다보면 천재적인 논리학자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독자들은 궤변과 말장난처럼 보이는 논리학이 사실은 생각이 발 디딜 토대를 만드는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1,850 원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도서정보 : 원제 스님 | 2019-11-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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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힐링과 위로, 지혜의 말 속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혼란스럽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까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따듯한 힐링의 말과 소소한 지혜를 ‘치트키(cheat key)’에 비교한다면, 저자의 말과 글은 무사의 정공법을 닮았다. 이를테면 덮어두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라, 삶의 공포 속으로 들어가라, 지금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눈앞의 그것,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 온 모든 것을 몽땅 의심하라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잘 속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불행과 문제에 대한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탓으로 돌리기를 반복하는 이에게 저자는 ‘자기 상처를 현실을 피하는 도구로 삼지 말라’고 직언한다. 자신을 주연으로 한 드라마틱한 삶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지나친 추구가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구속한다며, ‘당장 내가 쓰는 이야기에서 벗어나라’고도 한다. 아픈 충고다.
그래서 저자의 말과 글은 종종 ‘힐링(healing) 법문이 아니라, 킬링(killing) 법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킬링은 죽인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것, 알고 있다는 믿는 그것, 내가 지금 애지중지하며 붙잡고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이 완전히 멈춰지고 사라질 때 비로소 진짜 나, 진짜 가야 할 길이 보인다. 마치 어두운 밤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을 껐을 때 달빛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은 ‘지 생겨먹은 대로만 살아도 문제없다’라고 말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제가 힐링보다 킬링을 주로 하게 되는 이유에는 ‘선(禪)’이라는 공부 방식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선은 ‘의심’의 수행입니다. 눈앞의 감각 대상과 경험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며, 거리를 두는 것이고 속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진리는 찾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
일상에서 진리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저자는 진리를 찾기 위해 불교 수행자의 길을 택했다. 여느 사람들이 과학자나, 소설가, 건축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저자에겐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경전과 어록 공부, 참선, 묵언 수행 그리고 2년 동안의 세계 일주 만행…, 많은 좌절과 갈등 속에서 바깥이 아닌 자신을 향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거치며 온몸으로 불교적 진리를 체득했다. 그 진리의 끝은 ‘나’에 머물지 않고 ‘전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에고(ego)와 아상, 무상과 무아, 공, 불성, 참나…, 머리로만 알고 있는 이런 교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저자는 선원 생활, 출가 전의 일, 만난 사람들, 책, 영화, 게임 등 자신의 모든 경험을 이용하여 들려준다. 저자가 평소 자주 하는 말처럼 ‘전체’의 삶을 위해 자신을 ‘써먹는’ 것이다.
〈왜 문제를 극복하려고만 하는가〉에서 지도하던 행자가 절집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절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저자는 딱 보름만 참아보라고 한다. 보름 동안,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하고 문제도 변하고 그 문제를 대하는 행자의 마음도 변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보름 뒤, 절을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심각했던 관계의 문제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되었고, 행자는 다시 수행에 전념했다. 무상(無常),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저자는 삶으로, 경험으로 상기시켜 준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을 예로 든 〈벽을 넘는 용기〉에서는 벽과 숲으로 대비되는 안전한 삶과 불확실한 삶을 통해 우리가 만든 견고한 아상(我相)을 설명한다. 동료 스님을 죽이고 싶었을 만큼 들끓었던 분노를 ‘인내’로써 이겨내며 인생은 오직 견뎌야 하는 것임을, 그렇게 잘 무사히 지나가면 진정한 자유를 느낄 때가 온다며 응원한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과 엄격한 문체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 이야기들의 끝은 무엇일까. 바로 작고 좁은 이기적인 ‘나’에게서 벗어나 온 우주, 전체로서의 ‘큰 나’, ‘참나’로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본질적인 삶을 마주하며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판때기’
놀이로서의 삶을 권유하다

저자가 세계 일주할 때 만난 국가대표 서퍼는 이렇게 말한다.
“스님, 저는 이 판때기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삶은 지금까지 보드판 위에서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서퍼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사실 자기만의 판때기 위에서 살아간다. 흔히 인생을 고해(苦海)에 비유한다. 그리고 파도는 인생의 크고 작은 다양한 고통이라고 한다. 저자는 파도를 바라보며 분석하고 이런저런 의미를 넣어 규정하지 않겠다고, 곧장 바다로 뛰어들겠다고 한다. ‘원제’라는 판때기가 있고 말과 글, 생각이라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판때기는 어떠한가.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매 순간일 뿐, 나에게 닥치는 상황마다 그때그때 ‘잘’ 보고, ‘잘’ 판단하고, ‘잘’ 대응하면 되는 것이다. 그 ‘잘’에 대한 리듬의 감(感)을 늘이는 데 이 책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의 마지막 당부이다.

절집에서 큰스님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경전에 나오는 말이고…, 그거 말고 니 얘기를 해봐, 니 얘기.”
저는 매일 매일이 정면승부입니다.
오늘도 눈 똑바로 뜨고 여지없이 정면승부를 합니다. (-본문 중에서)


선방 수좌 원제 스님의 킬링 법문 9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두려움이 사는 법”

1 꼭 근사한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할까 : ‘나’는 삶이라는 드라마를 무언가 그럴듯한 의미로 채우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채워진 것은 다른 형태로 변하거나 또 다른 좋은 것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이런 욕망의 악순환을 멈출 때 삶은 온전하게 펼쳐집니다.

2 무엇이든 의심하기 : 지금 나의 생각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나’라는 존재, 생각 자체를 의심해 보아야만 합니다. 제대로 의심하게 된다면, 열린 만큼 경험하게 되어있고, 깨어난 만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3 자신이 의지하는 등불을 꺼라 : 등잔불을 끄면 본래 있던 달빛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등잔불처럼 내가 믿고 따르며 소중히 여기는 어떤 가치와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전체로서의 삶이 드러납니다.

4 판단 중지 : ‘내가 모른다고, 혹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거나 그런 것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단지 내가 모를 뿐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면 될 일이지, 상대방이 틀렸다고,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 공부할 기회를 놓칩니다.

5 자신의 상처를 이용하지 마라 : ‘과거의 상처 때문에 지금 내 모습이 이래….’ 과거의 고통과 상처를 이용해 현재를 피하지 마십시오. 고통과 상처를 보내는 연습을 하십시오. 힘들지만 천천히 잘 보내는 연습을 하면 어느 순간 본래 있던 자유가 곧장 눈앞으로 찾아들 것입니다.

6 문제는 없다. 상황이 있을 뿐 : 우리 삶에 고정된 문제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만이 있을 뿐. 상황은 그때그때 ‘잘’ 보고, ‘잘’ 판단하고, ‘잘’ 대응하면 됩니다. 이 ‘잘’을 미리 정해놓지는 마십시오.

7 ‘나’는 이겨서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다 : ‘나’란 것도 알고 보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상황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어떻게든 대응해나가는 것, 솔직하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참을 인(忍)’입니다.

8 행복만을 선택하지 마라 :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들만 고르려는 선택을 멈추십시오.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허용해 주십시오. 그러면 기쁨도 우울도, 어두운 생각도, 분노도, 그 모든 게 이미 다 진리로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9 진정한 용기란 나를 놓아버리는 용기이다 : 나를 지키는 용기가 아니라 나를 놓아버리는 용기입니다. 아는 것도,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을 때 도리어 진정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매가격 : 11,200 원

반역은 옳다

도서정보 : 알랭 바디우 | 2019-10-1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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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정치다”
알랭 바디우, 혁명이 박제화된 지금
68년 5월 혁명을 새롭게 소환해
삶을 가로지르는 정치혁명을 말하다

2016년 10월, 한국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그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박근혜’로 상징되는 ‘적폐’의 시대가 끝나고 정의롭고 공정한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기를 열망했다. 2016년의 촛불혁명은 한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졌던 ‘박정희 개발독재’의 우상이 허물어지기도 했지만, 정치의 영역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서도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대표적으로 2017년 시작된 ‘미투 운동’과 함께 페미니즘 운동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었다. 촛불혁명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과연 얼마나 공평하고 정의로워졌는가?

1968년 5월, 프랑스의 거리도 수많은 사람으로 뒤덮였다.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으로 퍼진 68혁명은 반전운동과 혁명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촉발되어, 프랑스의 낡은 관습과 체제, 문화까지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평생 사회 변혁을 위해 노력해온 철학자 바디우가 1968년 5월 혁명 50주년을 맞이해 출간한 《반역은 옳다(On a raison de se revolter)》는 이러한 68혁명의 유산을 분석하고 오늘날의 의미를 살펴보는 책이다. 바디우는 이 얇은 책에서 이제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더 이상 혁명이 살아있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념 축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68혁명을 분석하고, 여전히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현실 속에서 68혁명의 ‘혁명성’을 되살리려 한다. 바디우의 이러한 시도는 촛불혁명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줄 것이다.

노(老)철학자 바디우는 지금 왜 68년 5월 혁명을 말하는가
이 책은 1968년 5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해 2018년 5월 프랑스에서 출간되었고, 다시 1년이 지나 한국에 번역되었다. 50년 전에 벌어진 68년 5월 혁명을 통해 바디우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책은 혁명을 기념하는 수많은 책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혁명에 참가한 자신(혹은 자신들의 세대)의 기억을 추켜세우거나, 노철학자의 향수에 빠진 책은 결코 아니다. 바디우는 68년 5월 혁명에 대한 “상투적인 전망들… 매도와 향수로서의 기념을 틀림없이 강화하게 될 전망들과 단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1968년 당시 시대의 영웅이었다가 지금은 평범한 정치인이 된 콘-벤디트(Daniel Cohn-Bendit)와 같은 저명한 과거의 68세대가 이제는 ‘68혁명’이라는 단어에서 혁명성을 애써 제거해 기념품으로만 간직하려는 것을 비판한다. 바디우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고, 그 사건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냈는지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하게 한다.

68년 5월 혁명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
68년 5월 혁명의 독특성은 모호함에 있다. 엄청난 규모의 시위와 파업, 거리의 민주주의라는 신화와 더불어 혼란과 무정부 상태, 무분별한 성적 일탈과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폄하는 이 혁명의 모호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68혁명은 일반적인 시대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거스를 수 없는 객관적인 흐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과거의 여느 혁명에서 볼 수 없었던 뚜렷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이 혁명을 아주 독특한 동시에 파악하기 힘든 것으로 만든다. 68혁명의 강렬한 이미지 뒤에 있는 것, 이 모호한 혁명의 와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새롭게 도래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명백하게 68년 5월 혁명은 객관적인 시대적 상황이 요구한 새로운 방향의 혁명이었다. 문제는 이 혁명이 보여준 새로운 방향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느냐에 있다. 그 가시적인 결과를 넘어, 이 혁명이 제시한 새로운 방향은 어쩌면 아주 미미한 흐름으로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68혁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대의 맥락에 이 혁명을 위치 짓고, 그 시대를 벗어나는 독특성, 혁명의 새로운 방향을 통해 제시되는 그 독특성에 주목할 때, 68년 5월 혁명의 위치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고 그것이 21세기의 오늘에 비추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혁명,
68년 5월 혁명의 모호성과 새로움
68년 5월 혁명에서 드러나는 시위 양상과 파업 방식은 유럽의 오랜 정치투쟁과 노조 파업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공장과 대학의 점거 그리고 점거된 해방 공간에서 일어나는 축제와 토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투쟁 방식이었다. 혁명에 참가한 주체 역시 이전과는 달랐다. 68혁명은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조직도, 지도부도 없었다. 혁명을 만들어낸 주체는 사실상 강력한 익명의 대중 집단이었고, 이 특정하기 힘든 집단은 기존의 제도화된 모든 조직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기존의 전통적인 혁명운동의 전위들, 공산당과 노조는 68년 5월 당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68년 5월 혁명은 ‘전위 없는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각각의 영역에서 자발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발생하고 진행됐다. 68년 5월 혁명은 몇 가지 서로 다른 혁명들의 동시적 전개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혁명, 그것이 68년 5월 혁명이다.

삶을 가로지르는 정치혁명이 필요하다
68혁명의 유산은 이미 오래전 퇴조의 길에 접어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전면화된 자본주의의 명령, 그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억압적 정치의 명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새로운 억압적 정치의 명령은 삶 자체에 적대적이다. 자본주의의 억압적 정치는 삶을 통제하고, 안전 담론을 확산시키며, 모든 인구를 단지 ‘자원’으로 관리하고 통제한다. 이러한 체제 아래 존재하는 자유란 단지 1차원적인 자유일 뿐이다. 오늘날의 의회 민주주의 정치는 모든 인구를 이러한 단순하고 한심한 삶에 머무르게 한다. 고령의 철학자 바디우가 여전히 혁명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68년 5월 혁명을 다시 평가하며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정치이다. 온전한 삶의 변화를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혁명적 정치의 영역에 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실패가 삶의 혁명이 없는 정치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1958년 혁명의 최종적 실패는 정치혁명이 없는 삶의 혁명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혁명적 정치의 난점은 그것이 삶을 가로지는 정치혁명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안타깝게 우리는 아직 그러한 혁명을 알지 못하지만, 바디우가 말하는 68년 5월 혁명의 정치적 새로움은 바로 그러한 차원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68년 5월 혁명과 2016년 한국의 촛불혁명
68년 5월 이후, 이미 알려져 있듯이 대다수의 정치조직은 해체됐고, 그 주체들은 하나둘 의회주의 정치에 투항했다. 새로운 혁명적 정치는 포기되었고, 많은 혁명적 정치의 옛 투사들이 자본-의회주의적인 인권의 옹호자로 전향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자들과 운동 세력은 고스란히 제도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활발히 정치 활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 당시의 이념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 프랑스의 경우 바디우와 랑시에르를 비롯한 소수의 지식인들이 68혁명의 유산을 지켜내고 발전시키려 노력했을 뿐,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의회-민주주의에 투항하여 제도권 좌파의 사상가가 되거나 국가 의존적 개혁주의로 나아갔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상당수의 한국 지식인들은 의회 민주주의 안에서의 개량을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승인했고, 그것이 떠받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철저히 복종했다. 2016년 촛불혁명의 성과도 제도권 정당이 독점하려는 상황 속에서, 바디우의 외침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강한 울림을 이끌어낸다. 진정한 정치―바디우가 참된 삶이라고 이름 붙였던―를 실현하기 위해, 즉 지구 곳곳에서 방황하고 고통 받는 엄청난 수의 노동자와 빈민 대중과 결합할 때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역은 옳다!”

구매가격 : 9,100 원

미학의 역사적 개관

도서정보 : 고유섭 | 2019-10-0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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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과학의 문제는 원시민족의 생활과 예술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을 구하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문화 민족을 예술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하면 먼저 문화 민족의 기원인 자연 민족의 예술의 본질과 조건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을 구하려고 하면 세력을 얻지 못하는 인류학적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인류학적 미학의 성립하는 이유이다.<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3,000 원

미학의 역사적 개관

도서정보 : 고유섭 | 2019-10-0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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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과학의 문제는 원시민족의 생활과 예술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을 구하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문화 민족을 예술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하면 먼저 문화 민족의 기원인 자연 민족의 예술의 본질과 조건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을 구하려고 하면 세력을 얻지 못하는 인류학적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인류학적 미학의 성립하는 이유이다.<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3,000 원

논증의 기술

도서정보 : 앤서니 웨스턴 | 2019-08-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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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논리적으로 하고 그 생각을 설득력 있게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고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난해하게 쓰인 다른 논리학 서적이나 요령만 전달하는 다른 글쓰기 서적과 달리 이 책은 논증의 핵심 규칙들을 제시하면서 각각의 규칙에 예문과 함께 명쾌한 설명을 붙여놓아 누구나 쉽게 논증의 기술을 이해하고 익힐 수 있게 해준다. 대입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각종 적성시험(PSAT, LEET, DEET, MEET) 응시자, 학위논문을 쓰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기획안을 작성하는 회사원, 글쓰기가 직업인 저술가나 언론인, 남을 설득해야 하는 정치인이나 기업의 영업사원 등이 실용적인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는 책이다.

구매가격 : 8,500 원

시지프의 신화

도서정보 : 알베르 카뮈 | 2019-08-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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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량한 폐허에서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을 제시했던 카뮈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불후의 명저. 인간의 근원적인 사고와 삶을 지탱해주는 최초의 바탕인 동시에 최후의 논리적, 미학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도달점인 부조리로부터 반항·자유·정열 이 세 결과를 이끌어내고 이것들을 최대한으로 느낌으로써 인간은 삶을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고 카뮈는 말하고 있다. 온힘을 다해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면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올리도록 저주받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시지프를 통해 현대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구매가격 : 6,300 원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실존 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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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철학은 무엇인가





1.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는 흔히 두 종류로 분별된다. 自我가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떤 ‘무엇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냐에 따르는 것이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근대 이전의 철학사상들은 대체로 後者의 견해를 추종했다. 인간존재를 현실세계에 있도록 하는 ‘무엇’으로서 주로 想定되는 대상은 god, 道, idea, 空, reason, 理, sein, 氣, ideology 등 아주 다양하며, 이외에도 얼마든지 常存한다.
그런데 과연 인간존재는 어떤 ‘무엇’에 의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역사 안에서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어쨌거나 ‘무엇’엔가 의존하며 근근이 살아내는 나약한 存在者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 자신’의 實存에 대해 의문을 갖게되는 始發點이다.
인간존재는 분명 어떤 ‘무엇’에 의해 존재하지만, 정작 인간존재를 존재케 하는 것은, 인간존재 그 자체일 따름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존재 자체’마저도 온통 해체되어버린 상황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더욱 그 어떤 ‘무엇’에 대해 강렬한 추구를 갖는다. 설령 그것이 物神에 불과한 欲望이나 資本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존재를 존재케 하는 ‘무엇’을 어떻게든 정립해 두어야만 한다고, 스스로 强迫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인간존재는 ‘스스로/저절로 그러하게’ 존재할 따름이다. 온갖 强制와 眩惑에 의해 ‘무엇에 의한 개돼지’ 신세일망정, 인간존재의 實存 그 자체가 ‘무엇’에 의해서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잘난 인간존재일지라도, 결국 죽음의 그림자가 삶의 언저리에 찾아들 때면, 절대적인 ‘무엇’에 자연스레 의지케 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런 삶의 현상이다. 다만 아직 청춘의 시절을 살아내는 청년들이, 이미 늙어버린 채로 그 ‘무엇’에 의존하는 꼬락서니는 당최 볼품없다.
필자 역시도 청춘의 시절을 살아냈고, 그 시절은 그야말로 ‘실존 그 자체’를 窮究하는 여행길이었다.
현실세계에선 일찌감치 제 몫을 챙기며, ‘틀딱’ 흉내 내는 ‘애어른’들을 성숙한 인간존재로서 분별한다. 그런 식으로 온갖 체제에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一回性의 限時的인 삶을 살아내면서, 청춘의 시절에 이미 늙어버린다는 건 아무래도 씁쓸한 노릇이다.
어느 빨갱이 철학자의 넋두리처럼, 청춘의 시절에 進步的이지 않다면 어찌 청춘일 수 있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도 허황된 進步를 추구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이지 않겠는가.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절대적 ‘무엇’에 대한 의존 역시 그러하다. 청춘의 시절에는 응당 ‘나 자신’의 ‘실존 그 자체’를 고뇌해야 한다. 어찌 청춘의 시절에 信仰이나 理念 따위에 의존하며, 실존을 思索치 않을 수 있는가.
실존철학의 始祖 쇼펜하우어에 대한 톨스토이의 말처럼, 적어도 청춘의 시절이라면, 어느 누구도 하찮은 인간이어서는 안되는 법이니까.
최초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일기가 지닌 형식은, 그의 글 중에서 가장 詩的이고 우아하다.
키르케고르는 그의 日記를 진지하게 기록했으며, 자신의 일기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847년 11월 4일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作家로서, 어느 정도까지 나는 일반 사람들을 나의 친구로 삼아 왔다.
하지만 현재 내가 일반대중과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해서 보면, 나는 다시 한 번, 후손들을 나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 삼아야만 한다.
누군가에 대해서 웃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세계에서 자기 이외의 대부분의 집단대중은 群衆이기 십상이다. 그나마 ‘개돼지 군중’ 노릇을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그래서 고독한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인생길 여행자들은 항상 고독하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자기의 日記를 친구삼으며,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인생여정을 꾸려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그 깊은 고독 속에서 인간존재는 ‘참된 나(眞我)’의 實存을 만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교회가 국가에 의해 조종되어온 이래로, 국가 교회의 관료적인 임무가, 구성원의 숫자를 늘리고, 구성원의 복지를 감독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 밑바탕에는, 좀 더 많은 구성원이 모여들수록, 성직자는 더 큰 힘을 갖게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기독교는 텅 빈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구조로서의 국가 교회는, 개인에게 무례하고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 교회는 종교 그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지 않는 믿는 사람들, 즉 사람들의 ‘돼지 떼 정신’에 따라서, 기독교를 단지 사교계의 전통 정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계에서 인내는 무관심과 같고, 그것은 기독교에 반대하는 가장 끔찍한 공격이다. 국가적으로 설립된 교회의 교리와 그것의 조직은, 둘 다 정말 매우 좋다. 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실제로 그것들은 정말 가증스럽다.”
기독교 교회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모습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철학자의 등장을 예견한다.
‘實存主義(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존재 개인은 단순히 思惟하는 主體만이 아니라(not merely the thinking subject), 나아가 행동하고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主體者(master)이다.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여 주창된 이 사상은, 후에는 야스퍼스, 가브리엘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실존’이란 말은 이들의 思考樣態나 표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實存은 本質에 先行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실존은, ‘人間’이라고 하는 관념적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自我’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하여,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자아’와 세계를 연결지으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逆轉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실존주의 철학은 카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루돌프 불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와 같은 많은 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실존주의의 원류는 근대 시민사회가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9세기 중엽 이후, 대중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독한 예외자로서의 입장을 관철한 두 거성,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와 독일의 ‘니체’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지성과 신앙의 차이에 괴로워하는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도, 주체성의 회복에 의해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는 실존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초엽에는 러시아의 ‘셰스토프’나 에스파냐의 ‘우나무노’ 등 철학자나,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작가 ‘카프카’ 등이, 일상적인 삶의 저변에 숨겨져 있는 음울한 허무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본래적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상을 전개시켰다.
실존철학을 하나의 독자적인 철학으로서 등장시킨 것은, 제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의 심각한 사회적 위기감의 체험이었다.
이러한 체험의 철학적 반성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1919)이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었다.
패전국 독일과 마찬가지의 사회적 불안이 세계 각국을 엄습하고, 사람들이 심각한 인간소외감의 포로가 됨에 따라,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주제로 하는 실존철학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실존철학을 탄생시키는 요인이 된 제1차 대전 후의 인간 소외적인 사회 상황은, 제2차 대전의 전후에는 더욱 심각해져서, 세계의 사람들을 불안과 절망 속으로 끌어들였다.
전쟁이 일으킨 잔혹한 살육, 비참하고 황폐한 생활, 인류 절멸 병기의 출현, 내일이 없는 인생에 대한 공포, 대중사회적 상황 밑에서의 생활 전면에 걸친 劃一化·水平化 등이 일상생활을 덮은 보편적인 사실이 되자, 실존주의는 널리 세인의 주목을 끄는 사조가 되고, 드디어 대중의 기분을 사로잡는 유행 사상으로서 무드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實存(existence)’은 원래 이념적인 ‘本質(Essence)’과 대비하여 상용되는 철학용어로서 ‘밖에 서 있는(Sistere)’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은 첫째로,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현실적 존재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나,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현실존재는,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인 ‘지금, 여기’를 사는 이 현실의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실존은 둘째로,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존재방식을, 현실의 생존방식을 통해 실현해 가는 自覺的 存在로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자각적 존재는, 모두 이미 지정되어 있는 본질에 따라서, 그 현실의 존재방식이 결정되는 것에 반하여, 자각적 존재인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므로, 현재의, 이 현실의, 자기의 생존 방식에 의해서 인간 독자의 본질, 그 인간을 그 인간답게 하는 개성이 시시각각으로 새겨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실존이 그 본질을 결정하고, 실존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자각적 자기가 진실한 實存이라는 이름에 맞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에 의해 그 본질을 결정해 가는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선택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 이전의 관념적 가능성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선택의 필연성을 스스로 인수하는 실존적 자유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가 무력하며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러한 旣存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는다’고 하는 무한의 自己超克과 自己超越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진실한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기성관념이 나타내는 형식적 보편성을 돌파하고, 유한한 단독적 자기의 입장으로 되돌아와 거기서부터 재출발함으로써, 현존하는 자기의 유한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脫自的인 자기초월의 결단이 인간 본래의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결단을 바탕으로 비로소 구체적인 진리도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무한한 자기초극의 노력으로써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려 하고, 이러한 자기의 결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근원적 진리라고 하는 실존철학의 주장은, 추상적 관념이나 객관적 제도나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어,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강력한 警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존철학은 모든 도그마의 절대화 경향에 반항하고, 인간실존의 진실을 우선시킴으로써, 현대 휴머니즘 철학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특정한 主義, 主張이나 衆愚的인 당파성에 의존해서 안이한 수면을 즐기려 하는 자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의 필요성과 책임감을 각성시키는 부단한 문제 제기자로서, 실존주의는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일상성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며, 선택의 자유와 책임의 강조만으로는 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향의 명확화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상식이나 과학과의 적극적인 결합이 요구된다.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등을 돌리고, 실존의 주관적·내면적인 입장에서 절대화시켜 실존의 敎說體系를 쌓아 올리고 그 안에 묻혀 있으려 할 때, 실존철학은 본래의 體系外的인 실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던 낡은 추상적 관념론의 입장으로 역전하는 위험성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실존철학의 커다란 한계가 있다. 실존철학의 탄생을 일찍이 간파하고 크게 평가했던 哲學史家 ‘하이네만’이, 실존은 사상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규제 원리일 수는 있어도, 사상의 내용체계를 만들어 가는 구성 원리는 아니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2.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實存主義의 始祖이다.
1788년 2월 22일,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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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기원, 그리스 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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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철학은 무엇인가


1. 그리스철학을 알아야 서양철학을 알 수 있다

그리스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하여, 고대 로마에까지 계승된 철학사상을 통틀어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철학을 알아야 서양철학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현대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현대에 이르도록 온갖 서양철학 전통은 플라톤철학의 脚註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그러한 플라톤철학을 탄생시킨 土臺가 바로 그리스철학이다.
이 시절은 동양철학의 百家爭鳴과 유사하게 각종 학파가 난립하여 대립적으로 자기의 철학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배경은, ‘페르시아 전쟁’이나 ‘펠로포네소스 전쟁’이 勃發하던 전쟁의 시대였다. 동양철학의 토대가 春秋戰國이었던 바와 유사하다.
東西洋 고대철학의 특징은, 공통적으로 도덕철학이라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문명이 태동하던 시절이므로 응당 도덕에 대한 강렬한 추구가 있었던 탓이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인류문명은 근대를 거치면서 법률이라는 새로운 체제로써 집단공동체를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적인 法治가 실현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도덕에 대한 기묘한 鄕愁가 있다. 그래서 법률에 의해 현실세계가 작동함에도 도덕에 의한 二次的 尺度를 들이민다.
도덕이라는 것이 그릇될 리 없다. 이는 종교라는 것의 성격과도 相通한다. 도덕이나 종교라는 것은, 지극히 이상적인 이상향을 제시한다. 그러니 다소 절실한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현실세계의 인간존재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종교는, 중세 이전의 古代的 必要에 의한 사회적 체제일 따름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自由民主的 法治에 의해 잘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유민주적 법치에 부합되는 생활을 하는 상태에서도, 일정한 所有를 넘어서면 道德的 名譽나 宗敎的 信望을 욕망한다.
이는, 인간존재가 지닌 본래적 原罪意識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심리적 조작을 부추기는 것이, ‘니체’의 분석처럼, 한갓 노예도덕에 불과한 프로파간다로써 현실세계를 조작하는 기독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니체’ 이후 현대의 기독교 역시 별다르지 않다. 하물며 동양사회의 이슬람, 佛敎, 儒敎 역시 말할 나위 없다.
法治와 맞서는 개념으로서 禮治를 맞세울 수 있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禮治의 의해 작동하는 집단공동체를, 아주 理想的인 것으로 쉬이 규정한다. 이야말로 人類史의 거대한 조작이며 착각이다.
도덕적 원리로써 통제되는 사회일수록 외려 더욱 가혹한 행태를 드러내기 십상이다. 이슬람 국가들의 도덕은 어떠하며, 가깝게는 북한의 도덕은 어떠한가. 그러한 것들은 지극히 종교적인 도덕이다. 다만 國際社會的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며, ‘우물 안 개구리’들의 우상놀음일 따름이다.
우리 역사에서 朝鮮王朝는 또 어떠한가. 조선왕조는 世界史에서 특별취급을 해야 할만큼 괴상한 도덕사회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현대사회에서 갖은 선동질과 조작질을 해대고 있는, ‘빨갱이 PC左派’들의 道德主義 역시 비슷한 認識的 脈絡에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21세기 法治社會가 이미 도래했는데도 여전히 도덕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인가.
그것은 도덕주의가 인간존재의 本性(無意識)을 歪曲하고 外面하면서, 당최 實現不可한 理想的(意識的) 人間像을 선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時宜適切한 정치적 작동원리는 法治다. 굳이 禮治의 보완을 필요로 할 것도 없다. 만약 도덕적인 측면이 요구된다면, 법률로써 制定하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遵法에 대한 기괴한 貶毁로써, 禮治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禮治야말로 時代錯誤的이며 非合理的 임을 是認하고 認識해야 한다.
근대 이전에 법치로써 불충분했던 것은, 법치를 실현할 만한 이론적 토대가 不備했던 탓이다. 그런데 근대를 거치면서 인류사회는, 법치로써 충분히 보다 나은 사회를 꾸릴만한 이론과 논리를 구성해 냈다.
예컨대, 人權, 自由, 個人, 市場 등의 개념들을 想起해 보라. 그러한 개념들은 대부분의 國家에서 법률로써 보장하고 있다. 그러니 법률만 제대로 지킨다면, 그 사회는 살만한 사회일 수 있다.
或者는 그러한 법률을 보완하기 위해 ‘종교적 도덕’ 혹은 ‘도덕적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 법률을 보완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하면 된다.
왜 인류는 법률사회보다 도덕사회가 나은 사회라는 妄想을 갖게 되었는가. 물론 근대 이전에는 그나마 도덕사회가 나름대로 보완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오히려 ‘도덕적 종교’가 권력을 점유한 시대였다.
그래서 그 편에 있는 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富貴榮華 好時節로 복귀하려는 劃策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빨갱이的 惑世誣民’에 의해 ‘개돼지 군중’ 취급 당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人類史를 거대한 흐름을 살핀다면, 쉬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도록 온갖 ‘종교적 도덕’들이 떠들어 대는 프로파간다는, 각 群像들의 利益을 위한 醜態일 따름이다. 그저 자기 편에 이익될 만한 것들만 정의롭게 나불거릴 뿐이다.
그런 입바른 소리를 누군들 못하겠는가. 그러니 허망하다는 것이다. 一言以蔽之하여 現在的 관점에서 볼 때, 法治야말로 가장 合理的이며 理性的이 道德的이다.
굳이 무슨 철지난 ‘도덕타령’ 할 것도 없다.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법률에 따라 처벌하면 된다. 도덕적 책임 따위를 물을 것 없다. 법률적 책임이면 족하다.
‘개돼지 군중’이 되어서 도덕적 책임 따위를 떠벌이게 되면, 결국 온갖 기득권층의 프로파간다에 조작당할 따름이며, 그 피해는 결국 ‘개돼지 군중’의 몫이다.
예컨대, 근래에 한일 무역분쟁이 일어나서, 또 다시 ‘反日 프로파간다’가 작동하면서 ‘개돼지 군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개돼지 군중’이 조작당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도덕적 책임 따위에 선동 당하기 때문이다.
國際政治의 ‘弱肉强食 정글’에서, 日帝强占에 대해 무슨 도덕적 책임을 논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당최 鬱憤이 풀리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국력을 키워, 일본보다 강대국이 되어서, 일본을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도덕주의란 것도 실상 强者의 논리일 따름이다. 그나마 弱者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실제적으로 법률임은 자명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아주 꼴통 같은 猝富들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强者이며 富者인 자들이 도덕적 평판도 좋기 마련이다. 그러니 근대 이전에는 그런 계층들이 꼴 같잖은 도덕주의자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를 체험했다면, 이제 도덕주의를 벗어버릴 때도 되었다. 한물간 도덕주의에 관심을 가질 시간에, 법률주의가 좀 더 그럴듯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다.
그것이야말로 左派든 右派든, 죄다 떠들어 대는 도덕주의보다는 훨씬 나은 狀況의 摸索이다.
우리는 칼 마르크스의 共産主義야말로, 人類史에서 가장 대표적인 理想的 道德主義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박근혜’가 아주 도덕적이며 양심적이라는 사실을, 彈劾裁判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의 賂物이나 國政壟斷 따위의 非道德性을 빌미 삼아 탄핵을 조작했던 ‘문재인 세력’이야말로, 철저히 비도적적이며 비양심적인 ‘빨갱이 세력’이라는 사실도 잘 알게 되었다.
정작 ‘박근혜’가 탄핵당한 실질적인 까닭은, 정작 ‘박근혜’가 너무 도덕적이고 양심적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대통령은 道德君子를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다. 한 국가의 國益을 伸張시킬 政治家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박근혜’를 탄핵시키고서, ‘문재인’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다보니 애당초 ‘문재인’은 정치가로서 자질도 不備한데다, 이제는 도덕이나 양심마저도 상실되어버렸다. 그래서 요새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의 ‘트럼프’나 일본인들의 ‘아베’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道德主義의 가장 큰 弊害는, 多數決 輿論主義에 의해 조작된다는 점이다. 떼거리 여론의 선동에 의해 罪過를 판단케 되는 것이다. 흔히 그런 떼거리 集團主義는 人民民主主義의 人民裁判에서 활용된다. ‘문재인 세력’이 활용한 ‘박근혜 촛불 彈劾戰術’ 역시 그러했다.
自由民主主義의 다수결은 철저히 法治에 토대를 둔 다수결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人民民主主義의 다수결 방식에 선동 당한다. 그 원인이 허망한 도덕주의적 추구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체험했다면, 이제는 정말이지 道德主義라는 妄想으로부터 깨어날 때도 되었다.


2. 개인의 등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모두 奴隷制 사회였다. 東洋社會 역시 노예제 사회였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자유로운 個人’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사실이다.
그 이전의 역사는 죄다 신분제 사회였으며, 그런 사회체제에서 주요한 노동력으로써 작동한 것은 奴隸였다.
個人은 고유한 개체로서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국가나 사회, 단체 등을 구성하는 낱낱의 사람으로 풀이된다.
개인은 ‘individual’을 번안한 낱말인데, 사회, 문화 등 다른 여러 낱말과 같이, 개인 역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번안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individual’은 ‘indivisible’에서 파생된 낱말로, 더이상 나뉠 수 없는 단수를 뜻한다.
서양에서 개인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人口調査와 形而上學에서부터이다.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단수로서 개인은, 固有個體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7세기에 이르러 個人主義가 발현되면서, 철학, 법률, 사회이론 등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개인의 고유한 특징을 個性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命題는, 주체로서의 개인을 나타내고 있다.
‘존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는, 개인의 인식이 ‘빈 書板(tabla rasa)’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세계의 역사는 絶對理性의 발현과정이고, 개인은 이러한 역사 발전의 한 역할을 담지하는 존재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관점을 부정하면서,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개인의 주체성과 능력을 강조하였다.
‘니체’ 또한 權力意志라는 개념으로서 개인의 욕구를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개인의 능력이 극대화된 영웅인 ‘超人(Übermensch)’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도 개인은 핵심적인 개념으로, 개인은 自由意志를 실현하는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마르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주체-객체가 맺는 관계를 두가지의 종류, 즉 ‘나-그것’과 ‘나-너’로 구분하면서, ‘나-그것’의 관계에서 ‘나-너’의 관계로 변화하는 개인의 관계 형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佛敎에서는 無我論에 따라, 나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라 파악하며, 개인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을 쓰는 실용적인 분류라고 하였으며, 개인은 사회와 세계의 문화가 반영된 의식의 중심으로 간주된다.
근대 이후 개인은 인류 자체이며, 사회는 인간관계가 만들어낸 심리적 구조의 결과이다. 개인이란 인간의 경험, 지식, 행동의 총체적 결과이다. 그리고 인류의 모든 역사는, 개인의 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
대다수의 국가에서 개인은 법률행위의 주체이므로, 사람은 생존하는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또한 개인정보는 생존하는 개인에 관한 정보 가운데, 각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가리킨다.


3. 근대 이전 노예제 사회

東西洋을 막론하고서, 근대 이전의 집단체제는 대부분 奴隷制를 바탕으로 작동했다. 그저 노예라는 명칭이 農奴, 奴婢, 賤民 등으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相異하였을 따름이다.
그리스철학이 정립되던 시기에도, 각 폴리스국가들이 노예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체제였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奴隷制(slavery)’란 先史時代 이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재산, 가축처럼 취급하는 것을 말하며, 그렇게 재산, 가축처럼 취급되는 인간을 ‘奴隷(slave)’라 한다.
노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戰爭 따위의 까닭으로,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타인의 소유의 객체가 되는 자, 또는 계층, 계급을 의미한다.
풍토, 관습, 전통의 相違에 따라 지역차는 있으나, 有史 이래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노예제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근대 유럽에서는 天賦人權 사상에 따라, 유럽 각국의 국민들에 대하여는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나, 타인종에 대한 노예무역은 한동안 광범하게 행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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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철학의 현대적 기원, 분석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1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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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은 무엇인가

1. 분석철학과 미국철학

‘分析哲學(Analytic philosophy)’은 철학연구에서 言語分析의 방법이나, 記號論理의 활용이 不可缺하다고 믿는 이들의 철학을 총칭한다. 이러한 분석철학의 흐름은, 특히 현대 美國哲學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상 현대의 미국철학은 분석철학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분석철학의 바탕에는, 그야말로 東西古今의 온갖 철학사상들이 녹아들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非但 분석철학만의 상황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철학사상에 접급하기 위해서는, 그 裏面에 배치되어 있는 哲學思想的 흐름을 이해하고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내 편향적이며 단편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분석철학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분석함으로써 철학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분석철학은, 그러한 분석의 대상을 주로 언어로 삼는다. 언어라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현실세계 자체를 알 수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實證하고 檢證하고 反證하기도 한다. 또한 논리적인 상태를 지향하여 과학적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지극히 현대적인 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대상에 대한 엄밀한 분석으로써 그 대상 자체를 理解할 수 있는가. 여전히 분석철학조차도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南韓과 北韓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국가공동체였다. 朝鮮族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런데 역사의 桎梏 안에서 적잖은 세월이 흐른 후, 이제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21세기에 이르러 韓國人들이, 美國人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北韓人이나 朝鮮族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일마저도 이처럼 난감할 따름인데, 인간존재가 과연 天地自然 자체를 理解할 수 있을까. 分析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굳이 不可知論 따위를 거론코자 함은 아니다. 인류의 天才였던 빼어난 자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분석하지 못한 대상을, 과연 ‘개돼지 군중’으로서나 근근이 살아내는 서민대중이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실로 난감할 따름이다.
다음은, ‘비트겐슈타인’이 1921년 10월, ‘버트런드 러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저는 여전히 ‘트라텐바흐’에서 憎惡와 卑賤에 둘러싸인 채 있습니다. 저는 數量이나 程度 따위가 中間인 사람이란, 어디서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더 나은 것이 없고, 어디보다도 무책임합니다.”
이로써 분석철학의 開祖인 ‘비트겐슈타인’이 현실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크게 그릇되지 않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 대부분은, ‘그저 그렇고 그런 중간치’일 따름이다. 그래서 한평생 ‘그저 그렇고 그렇게’ 살아내다가 죽어간다. 실로 그런 것이, 현실세계 인간존재들의 흔한 삶이다.
그러다보니 철학자는 현실세계에 접근하지 못한다. 증오에 찬 群衆, 비천한 ‘개돼지 군중’, 그러한 증오와 비천 속에서, 쓰레기더미에서 피어나는 한송이 연꽃처럼, 철학자는 자기만의 꽃을 피운다.
左派 同性愛者 ‘비트겐슈타인’의 고독한 哲學旅行은, 그러한 과정의 지속이었다. 시대의 ‘금수저 유대인’로서 태어났지만, 그런 탓에 여러 이유로 결코 현실세계와 타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런 것이, 고독한 人文學者의 삶인 것이다.
生來的으로 고독한 탓에 인문학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인문학자인 탓에 고독하다. 분석철학은 그러한 고독의 토대 위에서 피어났다.
그러니 고독을 體得치 못한다면 분석철학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철학은 물론 인문학 역시 알 수 없다.
더욱이 현실세계 대부분의 중간치들은, 증오와 비천 속에서 철학이나 인문학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은 이미 商品과 資本에 절실히 眩惑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닫힌 사회’에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절대적이어서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닫힌 사회’는, 역사란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發展史觀的 歷史主義에 기초해 있다.
‘닫힌 사회’에서 국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알고 있다. 일상생활에 빠져 지내는 개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국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기에, 국가는 개인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한다. 또한 대화보다 권력의 우위에 의한 폭력과 제재가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고 믿는다. 지극히 全體主義的인 사회라고 할 것이다.
반면에 ‘닫힌 사회’와 달리 ‘열린 사회’에서는, ‘도덕과 법률’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경되는 약속 같은 것으로 본다. 또한 ‘열린 사회’는, 역사를 정해진 방향에 따라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 개선될 수 있다. 경험 부족 탓에 많은 혼란과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사회’의 사람들은 토론을 통한 세세한 조정들을 통해, 오류를 점차 제거하며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열린 사회’는 개인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에 귀 기울인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인류는 발전한다.
불완전하기에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으며, 노력에 의해 우리는 진리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서로의 뜻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제도가 필요하게 된다. 자유와 평등은 이런 믿음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또한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와 같이 理想과 計?에 따라 개인들을 억누르고 희생시키면서, 사회 전체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열린 사회’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한다. 個人들이 理性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며,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自由가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다.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등 온갖 거창한 全體主義 이론들이, 장밋빛 이상에 심취해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던 시대에, 포퍼의 주장은 분명 전체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는 합리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포퍼 死後 어느정도 세월이 흐른 21세기에도, 세계는 여전히 포퍼의 시대와 별다르지 않다. 소련의 멸망은 ‘닫힌 사회’의 소멸을 예정하는 듯했다. 그래서 중국과 북한 등도 죄다 멸망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닫힌 사회’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열린 사회’들 역시 여전히 존속한다. 단지 각 사회체제의 극소수 旣得權 계층만이 갖은 프로파간다로써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따름이다.
이러한 樣相이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人類史를 감안할 때, 포퍼의 주장만으로 그러한 ‘열린 사회’가 실현되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현실세계는 고작 ‘利益과 戰爭’에 의해서나 작동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칼 포퍼’는, 10대 후반부터 마르크시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등,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합병할 때, 마르크주의자들이 그 사건을 帝國主義的 資本主義의 자연스러운 귀결, 즉 共産主義革命으로 가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마르크스주의를 일종의 全體主義로 규정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思想遍歷을 정당화라도 하듯이, “젊어서 ‘마르크스주의(共産主義)’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그 시절을 보내고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빨갱이)’로 남아 있으면 더 바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21세기, 大韓民國과 北韓의 ‘개돼지 군중’을 비롯하여, 隣接國으로서 중국의 ‘개돼지 군중’들에게, 가장 유력한 言明이라고 할 것이다.
분석철학이 현대 미국철학의 중심에 있으므로, 미국철학은 철학사상적으로 獨斷的이거나 獨立的이지 않다. 예컨대, 미국철학에서 극심하게 배척했던 맑시즘 역시 그 바탕에 배치되어 있다.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 미국사회에서 흔히 ‘PC左派’라고 하는 기득권 세력이, 사회 전반에서 ‘혁명적 해체’를 조작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反動으로 ‘트럼프’가 등장했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그러니 마르크스를 알지 못하면 미국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獨尊儒術 식의 이데올로기로써 현실세계를 조작하려는 기득권 세력들은, 늘 孤立主義的인 프로파간다를 제시한다. 그래야만 현실세계를 權力的으로 지배하기에 容易한 탓이다.
분명 미국철학은 자유민주주의 陣營에서는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철저히 ‘利益과 戰爭의 법칙’으로써 작동한다. 현실세계의 어떤 철학사상이라도 순수하게 고립되어 있는 경우는 不在하다.
만약 그러한 고립이 실현된다면, 그러한 집단공동체 진영은 애당초 철학사상으로 分別될만한 정신문명을 정립하여 구성할 수 없다. 이는, 人類史의 事例로써 쉬이 검증된다.
初期 社會主義運動이 基督敎를 비판하는 反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는 소수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실천되지 못했지만, 현대교회와 마르크스주의는 人文主義를 비롯한 공통된 주제들을 찾아서 交接하고 있다.
예컨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실제로 예수는 민중들과 연대한 社會主義者였다고 주장한다.
‘파울 틸리히’는, “사회참여를 무시하면서 내세만 찾는 기독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기독교의 정신과 일치하며,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회주의를 존중해야 하며, 그 힘을 자신의 신앙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오르크 분슈’는, “사회주의는 기독교의 몸이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고 顚覆的인 주장을 한, 예수의 山上說敎에서 나타나는 기독교는, ‘社會主義의 靈魂’이라고 보았으며, 이후 宗敎社會主義者들은, 基督敎와 社會主義 간의 공통점을 찾음으로써, 革命的 融合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의 進步的 改新敎 계열의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성서는 구원에 대해 말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辨證法으로써 양립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극단적 사례는, 바로 北韓이다. 대한민국이 憲法的으로 國家로서 否認하는, 북한이라는 기괴한 不法的 집단체제는, ‘主體思想 이데올로기’에 의해 작동한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共産主義的 社會主義, 白頭血統으로써 실현되는 朝鮮의 世襲王朝, 似而非 基督敎 永生敎 메시아 등으로써 구성된 ‘雜湯 이데올로기’다.
여기서 북한 주체사상이 기독교철학을 원용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사회주의체제이므로, 反종교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이야말로 철저히 종교적인 神政國家이다.
예컨대, 北韓體制의 開祖 金日成의 外家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때문에 맑시즘 철학사상에 무지했던 김일성이, 그나마 기독교철학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洪秀全의 太平天國’처럼, 북한이라는 ‘永生 先軍 天國’을 제작한 것이다.
美國哲學은 미국인의 철학적 활동 또는 성취이다. 미국의 철학적 전통은, 아메리카의 유럽 植民地化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淸敎徒는, 초기 미국철학을 종교적 전통에 끼워넣었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존 윈스럽’과 같은 사상가는, 공공 생활이 사행활에 우선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로저 윌리엄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종교적 관용과 政敎分離를 강조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철학은 크게 보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淸敎徒 칼뱅주의 개혁 신학으로, 이는 계몽주의 자연철학과 같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두 번째 부분은, 미국 啓蒙主義의 도덕철학으로, 미국 내 대학에서 교육되었다. 이들은 격동의 1760~1770년대에, 合衆國을 위한 새로운 知的 문화를 만드는 데 이용되었고, 미국 國父들의 정치사상과 함께 결합된 유럽 계몽주의의 미국적 구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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