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신화

도서정보 : 알베르 카뮈 | 2019-08-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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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량한 폐허에서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을 제시했던 카뮈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불후의 명저. 인간의 근원적인 사고와 삶을 지탱해주는 최초의 바탕인 동시에 최후의 논리적, 미학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도달점인 부조리로부터 반항·자유·정열 이 세 결과를 이끌어내고 이것들을 최대한으로 느낌으로써 인간은 삶을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고 카뮈는 말하고 있다. 온힘을 다해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면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올리도록 저주받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시지프를 통해 현대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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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실존 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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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철학은 무엇인가





1.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는 흔히 두 종류로 분별된다. 自我가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떤 ‘무엇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냐에 따르는 것이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근대 이전의 철학사상들은 대체로 後者의 견해를 추종했다. 인간존재를 현실세계에 있도록 하는 ‘무엇’으로서 주로 想定되는 대상은 god, 道, idea, 空, reason, 理, sein, 氣, ideology 등 아주 다양하며, 이외에도 얼마든지 常存한다.
그런데 과연 인간존재는 어떤 ‘무엇’에 의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역사 안에서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어쨌거나 ‘무엇’엔가 의존하며 근근이 살아내는 나약한 存在者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 자신’의 實存에 대해 의문을 갖게되는 始發點이다.
인간존재는 분명 어떤 ‘무엇’에 의해 존재하지만, 정작 인간존재를 존재케 하는 것은, 인간존재 그 자체일 따름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존재 자체’마저도 온통 해체되어버린 상황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더욱 그 어떤 ‘무엇’에 대해 강렬한 추구를 갖는다. 설령 그것이 物神에 불과한 欲望이나 資本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존재를 존재케 하는 ‘무엇’을 어떻게든 정립해 두어야만 한다고, 스스로 强迫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인간존재는 ‘스스로/저절로 그러하게’ 존재할 따름이다. 온갖 强制와 眩惑에 의해 ‘무엇에 의한 개돼지’ 신세일망정, 인간존재의 實存 그 자체가 ‘무엇’에 의해서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잘난 인간존재일지라도, 결국 죽음의 그림자가 삶의 언저리에 찾아들 때면, 절대적인 ‘무엇’에 자연스레 의지케 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런 삶의 현상이다. 다만 아직 청춘의 시절을 살아내는 청년들이, 이미 늙어버린 채로 그 ‘무엇’에 의존하는 꼬락서니는 당최 볼품없다.
필자 역시도 청춘의 시절을 살아냈고, 그 시절은 그야말로 ‘실존 그 자체’를 窮究하는 여행길이었다.
현실세계에선 일찌감치 제 몫을 챙기며, ‘틀딱’ 흉내 내는 ‘애어른’들을 성숙한 인간존재로서 분별한다. 그런 식으로 온갖 체제에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一回性의 限時的인 삶을 살아내면서, 청춘의 시절에 이미 늙어버린다는 건 아무래도 씁쓸한 노릇이다.
어느 빨갱이 철학자의 넋두리처럼, 청춘의 시절에 進步的이지 않다면 어찌 청춘일 수 있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도 허황된 進步를 추구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이지 않겠는가.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절대적 ‘무엇’에 대한 의존 역시 그러하다. 청춘의 시절에는 응당 ‘나 자신’의 ‘실존 그 자체’를 고뇌해야 한다. 어찌 청춘의 시절에 信仰이나 理念 따위에 의존하며, 실존을 思索치 않을 수 있는가.
실존철학의 始祖 쇼펜하우어에 대한 톨스토이의 말처럼, 적어도 청춘의 시절이라면, 어느 누구도 하찮은 인간이어서는 안되는 법이니까.
최초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일기가 지닌 형식은, 그의 글 중에서 가장 詩的이고 우아하다.
키르케고르는 그의 日記를 진지하게 기록했으며, 자신의 일기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847년 11월 4일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作家로서, 어느 정도까지 나는 일반 사람들을 나의 친구로 삼아 왔다.
하지만 현재 내가 일반대중과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해서 보면, 나는 다시 한 번, 후손들을 나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 삼아야만 한다.
누군가에 대해서 웃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세계에서 자기 이외의 대부분의 집단대중은 群衆이기 십상이다. 그나마 ‘개돼지 군중’ 노릇을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그래서 고독한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인생길 여행자들은 항상 고독하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자기의 日記를 친구삼으며,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인생여정을 꾸려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그 깊은 고독 속에서 인간존재는 ‘참된 나(眞我)’의 實存을 만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교회가 국가에 의해 조종되어온 이래로, 국가 교회의 관료적인 임무가, 구성원의 숫자를 늘리고, 구성원의 복지를 감독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 밑바탕에는, 좀 더 많은 구성원이 모여들수록, 성직자는 더 큰 힘을 갖게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기독교는 텅 빈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구조로서의 국가 교회는, 개인에게 무례하고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 교회는 종교 그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지 않는 믿는 사람들, 즉 사람들의 ‘돼지 떼 정신’에 따라서, 기독교를 단지 사교계의 전통 정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계에서 인내는 무관심과 같고, 그것은 기독교에 반대하는 가장 끔찍한 공격이다. 국가적으로 설립된 교회의 교리와 그것의 조직은, 둘 다 정말 매우 좋다. 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실제로 그것들은 정말 가증스럽다.”
기독교 교회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모습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철학자의 등장을 예견한다.
‘實存主義(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존재 개인은 단순히 思惟하는 主體만이 아니라(not merely the thinking subject), 나아가 행동하고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主體者(master)이다.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여 주창된 이 사상은, 후에는 야스퍼스, 가브리엘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실존’이란 말은 이들의 思考樣態나 표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實存은 本質에 先行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실존은, ‘人間’이라고 하는 관념적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自我’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하여,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자아’와 세계를 연결지으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逆轉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실존주의 철학은 카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루돌프 불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와 같은 많은 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실존주의의 원류는 근대 시민사회가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9세기 중엽 이후, 대중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독한 예외자로서의 입장을 관철한 두 거성,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와 독일의 ‘니체’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지성과 신앙의 차이에 괴로워하는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도, 주체성의 회복에 의해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는 실존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초엽에는 러시아의 ‘셰스토프’나 에스파냐의 ‘우나무노’ 등 철학자나,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작가 ‘카프카’ 등이, 일상적인 삶의 저변에 숨겨져 있는 음울한 허무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본래적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상을 전개시켰다.
실존철학을 하나의 독자적인 철학으로서 등장시킨 것은, 제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의 심각한 사회적 위기감의 체험이었다.
이러한 체험의 철학적 반성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1919)이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었다.
패전국 독일과 마찬가지의 사회적 불안이 세계 각국을 엄습하고, 사람들이 심각한 인간소외감의 포로가 됨에 따라,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주제로 하는 실존철학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실존철학을 탄생시키는 요인이 된 제1차 대전 후의 인간 소외적인 사회 상황은, 제2차 대전의 전후에는 더욱 심각해져서, 세계의 사람들을 불안과 절망 속으로 끌어들였다.
전쟁이 일으킨 잔혹한 살육, 비참하고 황폐한 생활, 인류 절멸 병기의 출현, 내일이 없는 인생에 대한 공포, 대중사회적 상황 밑에서의 생활 전면에 걸친 劃一化·水平化 등이 일상생활을 덮은 보편적인 사실이 되자, 실존주의는 널리 세인의 주목을 끄는 사조가 되고, 드디어 대중의 기분을 사로잡는 유행 사상으로서 무드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實存(existence)’은 원래 이념적인 ‘本質(Essence)’과 대비하여 상용되는 철학용어로서 ‘밖에 서 있는(Sistere)’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은 첫째로,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현실적 존재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나,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현실존재는,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인 ‘지금, 여기’를 사는 이 현실의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실존은 둘째로,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존재방식을, 현실의 생존방식을 통해 실현해 가는 自覺的 存在로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자각적 존재는, 모두 이미 지정되어 있는 본질에 따라서, 그 현실의 존재방식이 결정되는 것에 반하여, 자각적 존재인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므로, 현재의, 이 현실의, 자기의 생존 방식에 의해서 인간 독자의 본질, 그 인간을 그 인간답게 하는 개성이 시시각각으로 새겨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실존이 그 본질을 결정하고, 실존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자각적 자기가 진실한 實存이라는 이름에 맞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에 의해 그 본질을 결정해 가는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선택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 이전의 관념적 가능성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선택의 필연성을 스스로 인수하는 실존적 자유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가 무력하며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러한 旣存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는다’고 하는 무한의 自己超克과 自己超越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진실한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기성관념이 나타내는 형식적 보편성을 돌파하고, 유한한 단독적 자기의 입장으로 되돌아와 거기서부터 재출발함으로써, 현존하는 자기의 유한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脫自的인 자기초월의 결단이 인간 본래의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결단을 바탕으로 비로소 구체적인 진리도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무한한 자기초극의 노력으로써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려 하고, 이러한 자기의 결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근원적 진리라고 하는 실존철학의 주장은, 추상적 관념이나 객관적 제도나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어,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강력한 警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존철학은 모든 도그마의 절대화 경향에 반항하고, 인간실존의 진실을 우선시킴으로써, 현대 휴머니즘 철학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특정한 主義, 主張이나 衆愚的인 당파성에 의존해서 안이한 수면을 즐기려 하는 자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의 필요성과 책임감을 각성시키는 부단한 문제 제기자로서, 실존주의는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일상성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며, 선택의 자유와 책임의 강조만으로는 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향의 명확화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상식이나 과학과의 적극적인 결합이 요구된다.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등을 돌리고, 실존의 주관적·내면적인 입장에서 절대화시켜 실존의 敎說體系를 쌓아 올리고 그 안에 묻혀 있으려 할 때, 실존철학은 본래의 體系外的인 실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던 낡은 추상적 관념론의 입장으로 역전하는 위험성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실존철학의 커다란 한계가 있다. 실존철학의 탄생을 일찍이 간파하고 크게 평가했던 哲學史家 ‘하이네만’이, 실존은 사상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규제 원리일 수는 있어도, 사상의 내용체계를 만들어 가는 구성 원리는 아니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2.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實存主義의 始祖이다.
1788년 2월 22일,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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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기원, 그리스 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7-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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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철학은 무엇인가


1. 그리스철학을 알아야 서양철학을 알 수 있다

그리스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하여, 고대 로마에까지 계승된 철학사상을 통틀어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철학을 알아야 서양철학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현대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현대에 이르도록 온갖 서양철학 전통은 플라톤철학의 脚註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그러한 플라톤철학을 탄생시킨 土臺가 바로 그리스철학이다.
이 시절은 동양철학의 百家爭鳴과 유사하게 각종 학파가 난립하여 대립적으로 자기의 철학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배경은, ‘페르시아 전쟁’이나 ‘펠로포네소스 전쟁’이 勃發하던 전쟁의 시대였다. 동양철학의 토대가 春秋戰國이었던 바와 유사하다.
東西洋 고대철학의 특징은, 공통적으로 도덕철학이라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문명이 태동하던 시절이므로 응당 도덕에 대한 강렬한 추구가 있었던 탓이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인류문명은 근대를 거치면서 법률이라는 새로운 체제로써 집단공동체를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적인 法治가 실현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도덕에 대한 기묘한 鄕愁가 있다. 그래서 법률에 의해 현실세계가 작동함에도 도덕에 의한 二次的 尺度를 들이민다.
도덕이라는 것이 그릇될 리 없다. 이는 종교라는 것의 성격과도 相通한다. 도덕이나 종교라는 것은, 지극히 이상적인 이상향을 제시한다. 그러니 다소 절실한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현실세계의 인간존재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종교는, 중세 이전의 古代的 必要에 의한 사회적 체제일 따름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自由民主的 法治에 의해 잘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유민주적 법치에 부합되는 생활을 하는 상태에서도, 일정한 所有를 넘어서면 道德的 名譽나 宗敎的 信望을 욕망한다.
이는, 인간존재가 지닌 본래적 原罪意識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심리적 조작을 부추기는 것이, ‘니체’의 분석처럼, 한갓 노예도덕에 불과한 프로파간다로써 현실세계를 조작하는 기독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니체’ 이후 현대의 기독교 역시 별다르지 않다. 하물며 동양사회의 이슬람, 佛敎, 儒敎 역시 말할 나위 없다.
法治와 맞서는 개념으로서 禮治를 맞세울 수 있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禮治의 의해 작동하는 집단공동체를, 아주 理想的인 것으로 쉬이 규정한다. 이야말로 人類史의 거대한 조작이며 착각이다.
도덕적 원리로써 통제되는 사회일수록 외려 더욱 가혹한 행태를 드러내기 십상이다. 이슬람 국가들의 도덕은 어떠하며, 가깝게는 북한의 도덕은 어떠한가. 그러한 것들은 지극히 종교적인 도덕이다. 다만 國際社會的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며, ‘우물 안 개구리’들의 우상놀음일 따름이다.
우리 역사에서 朝鮮王朝는 또 어떠한가. 조선왕조는 世界史에서 특별취급을 해야 할만큼 괴상한 도덕사회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현대사회에서 갖은 선동질과 조작질을 해대고 있는, ‘빨갱이 PC左派’들의 道德主義 역시 비슷한 認識的 脈絡에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21세기 法治社會가 이미 도래했는데도 여전히 도덕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인가.
그것은 도덕주의가 인간존재의 本性(無意識)을 歪曲하고 外面하면서, 당최 實現不可한 理想的(意識的) 人間像을 선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時宜適切한 정치적 작동원리는 法治다. 굳이 禮治의 보완을 필요로 할 것도 없다. 만약 도덕적인 측면이 요구된다면, 법률로써 制定하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遵法에 대한 기괴한 貶毁로써, 禮治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禮治야말로 時代錯誤的이며 非合理的 임을 是認하고 認識해야 한다.
근대 이전에 법치로써 불충분했던 것은, 법치를 실현할 만한 이론적 토대가 不備했던 탓이다. 그런데 근대를 거치면서 인류사회는, 법치로써 충분히 보다 나은 사회를 꾸릴만한 이론과 논리를 구성해 냈다.
예컨대, 人權, 自由, 個人, 市場 등의 개념들을 想起해 보라. 그러한 개념들은 대부분의 國家에서 법률로써 보장하고 있다. 그러니 법률만 제대로 지킨다면, 그 사회는 살만한 사회일 수 있다.
或者는 그러한 법률을 보완하기 위해 ‘종교적 도덕’ 혹은 ‘도덕적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 법률을 보완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하면 된다.
왜 인류는 법률사회보다 도덕사회가 나은 사회라는 妄想을 갖게 되었는가. 물론 근대 이전에는 그나마 도덕사회가 나름대로 보완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오히려 ‘도덕적 종교’가 권력을 점유한 시대였다.
그래서 그 편에 있는 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富貴榮華 好時節로 복귀하려는 劃策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빨갱이的 惑世誣民’에 의해 ‘개돼지 군중’ 취급 당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人類史를 거대한 흐름을 살핀다면, 쉬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도록 온갖 ‘종교적 도덕’들이 떠들어 대는 프로파간다는, 각 群像들의 利益을 위한 醜態일 따름이다. 그저 자기 편에 이익될 만한 것들만 정의롭게 나불거릴 뿐이다.
그런 입바른 소리를 누군들 못하겠는가. 그러니 허망하다는 것이다. 一言以蔽之하여 現在的 관점에서 볼 때, 法治야말로 가장 合理的이며 理性的이 道德的이다.
굳이 무슨 철지난 ‘도덕타령’ 할 것도 없다.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법률에 따라 처벌하면 된다. 도덕적 책임 따위를 물을 것 없다. 법률적 책임이면 족하다.
‘개돼지 군중’이 되어서 도덕적 책임 따위를 떠벌이게 되면, 결국 온갖 기득권층의 프로파간다에 조작당할 따름이며, 그 피해는 결국 ‘개돼지 군중’의 몫이다.
예컨대, 근래에 한일 무역분쟁이 일어나서, 또 다시 ‘反日 프로파간다’가 작동하면서 ‘개돼지 군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개돼지 군중’이 조작당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도덕적 책임 따위에 선동 당하기 때문이다.
國際政治의 ‘弱肉强食 정글’에서, 日帝强占에 대해 무슨 도덕적 책임을 논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당최 鬱憤이 풀리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국력을 키워, 일본보다 강대국이 되어서, 일본을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도덕주의란 것도 실상 强者의 논리일 따름이다. 그나마 弱者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실제적으로 법률임은 자명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아주 꼴통 같은 猝富들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强者이며 富者인 자들이 도덕적 평판도 좋기 마련이다. 그러니 근대 이전에는 그런 계층들이 꼴 같잖은 도덕주의자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를 체험했다면, 이제 도덕주의를 벗어버릴 때도 되었다. 한물간 도덕주의에 관심을 가질 시간에, 법률주의가 좀 더 그럴듯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다.
그것이야말로 左派든 右派든, 죄다 떠들어 대는 도덕주의보다는 훨씬 나은 狀況의 摸索이다.
우리는 칼 마르크스의 共産主義야말로, 人類史에서 가장 대표적인 理想的 道德主義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박근혜’가 아주 도덕적이며 양심적이라는 사실을, 彈劾裁判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의 賂物이나 國政壟斷 따위의 非道德性을 빌미 삼아 탄핵을 조작했던 ‘문재인 세력’이야말로, 철저히 비도적적이며 비양심적인 ‘빨갱이 세력’이라는 사실도 잘 알게 되었다.
정작 ‘박근혜’가 탄핵당한 실질적인 까닭은, 정작 ‘박근혜’가 너무 도덕적이고 양심적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대통령은 道德君子를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다. 한 국가의 國益을 伸張시킬 政治家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박근혜’를 탄핵시키고서, ‘문재인’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다보니 애당초 ‘문재인’은 정치가로서 자질도 不備한데다, 이제는 도덕이나 양심마저도 상실되어버렸다. 그래서 요새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의 ‘트럼프’나 일본인들의 ‘아베’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道德主義의 가장 큰 弊害는, 多數決 輿論主義에 의해 조작된다는 점이다. 떼거리 여론의 선동에 의해 罪過를 판단케 되는 것이다. 흔히 그런 떼거리 集團主義는 人民民主主義의 人民裁判에서 활용된다. ‘문재인 세력’이 활용한 ‘박근혜 촛불 彈劾戰術’ 역시 그러했다.
自由民主主義의 다수결은 철저히 法治에 토대를 둔 다수결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人民民主主義의 다수결 방식에 선동 당한다. 그 원인이 허망한 도덕주의적 추구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체험했다면, 이제는 정말이지 道德主義라는 妄想으로부터 깨어날 때도 되었다.


2. 개인의 등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모두 奴隷制 사회였다. 東洋社會 역시 노예제 사회였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자유로운 個人’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사실이다.
그 이전의 역사는 죄다 신분제 사회였으며, 그런 사회체제에서 주요한 노동력으로써 작동한 것은 奴隸였다.
個人은 고유한 개체로서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국가나 사회, 단체 등을 구성하는 낱낱의 사람으로 풀이된다.
개인은 ‘individual’을 번안한 낱말인데, 사회, 문화 등 다른 여러 낱말과 같이, 개인 역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번안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individual’은 ‘indivisible’에서 파생된 낱말로, 더이상 나뉠 수 없는 단수를 뜻한다.
서양에서 개인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人口調査와 形而上學에서부터이다.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단수로서 개인은, 固有個體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7세기에 이르러 個人主義가 발현되면서, 철학, 법률, 사회이론 등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개인의 고유한 특징을 個性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命題는, 주체로서의 개인을 나타내고 있다.
‘존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는, 개인의 인식이 ‘빈 書板(tabla rasa)’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세계의 역사는 絶對理性의 발현과정이고, 개인은 이러한 역사 발전의 한 역할을 담지하는 존재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관점을 부정하면서,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개인의 주체성과 능력을 강조하였다.
‘니체’ 또한 權力意志라는 개념으로서 개인의 욕구를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개인의 능력이 극대화된 영웅인 ‘超人(Übermensch)’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도 개인은 핵심적인 개념으로, 개인은 自由意志를 실현하는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마르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주체-객체가 맺는 관계를 두가지의 종류, 즉 ‘나-그것’과 ‘나-너’로 구분하면서, ‘나-그것’의 관계에서 ‘나-너’의 관계로 변화하는 개인의 관계 형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佛敎에서는 無我論에 따라, 나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라 파악하며, 개인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을 쓰는 실용적인 분류라고 하였으며, 개인은 사회와 세계의 문화가 반영된 의식의 중심으로 간주된다.
근대 이후 개인은 인류 자체이며, 사회는 인간관계가 만들어낸 심리적 구조의 결과이다. 개인이란 인간의 경험, 지식, 행동의 총체적 결과이다. 그리고 인류의 모든 역사는, 개인의 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
대다수의 국가에서 개인은 법률행위의 주체이므로, 사람은 생존하는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또한 개인정보는 생존하는 개인에 관한 정보 가운데, 각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가리킨다.


3. 근대 이전 노예제 사회

東西洋을 막론하고서, 근대 이전의 집단체제는 대부분 奴隷制를 바탕으로 작동했다. 그저 노예라는 명칭이 農奴, 奴婢, 賤民 등으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相異하였을 따름이다.
그리스철학이 정립되던 시기에도, 각 폴리스국가들이 노예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체제였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奴隷制(slavery)’란 先史時代 이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재산, 가축처럼 취급하는 것을 말하며, 그렇게 재산, 가축처럼 취급되는 인간을 ‘奴隷(slave)’라 한다.
노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戰爭 따위의 까닭으로,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타인의 소유의 객체가 되는 자, 또는 계층, 계급을 의미한다.
풍토, 관습, 전통의 相違에 따라 지역차는 있으나, 有史 이래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노예제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근대 유럽에서는 天賦人權 사상에 따라, 유럽 각국의 국민들에 대하여는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나, 타인종에 대한 노예무역은 한동안 광범하게 행하여졌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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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일문중의 뿌리

도서정보 : 문병달 | 2019-04-22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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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일문중의 뿌리>는 고향 영천의 유래와 문중의 뿌리를 정리하고, 상·제례를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실천하는 데 지침서가 되도록 하였다.

구매가격 : 10,000 원

황금열쇠

도서정보 : HNYSH | 2019-04-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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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무엇인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비밀은 무엇인가? 역사, 철학, 과학, 종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자유, 의지, 행복, 언어, 웃음이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 모든 주제는 각각의 개념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위의 모든 개념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형이상학, 양자역학, 종교와 역사가 하나의 진리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진리를 통해 매트릭스, 원피스, 전쟁과 평화, 아바타, 파이 이야기, 컨택트와 같은 작품들에 담긴 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또 선과 악, 자유의지, 행복, 언어, 믿음, 소망, 웃음에 대한 고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전달해 준다.

이 책은 진리가 무엇인지 첫 페이지부터 밝힌다. ‘우주는 하나다.’ 이 진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말한 ‘그것’, 데카르트가 말한 ‘그것’, 스피노자가 말한 ‘그것’, 아인슈타인이 말한 ‘그것’, 톨스토이가 말한 ‘그것’, 스티븐 스필버그와 오다 에이치로가 말하는 ‘그것’과 맞닿아 있다. 이처럼 수많은 사상가와 과학자, 개척자와 창조자들이 수없이 진리가 무엇인지 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머리로만 그것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진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진리를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황금열쇠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지성을 한 단계 위로 도약시킬 것이다.

구매가격 : 9,000 원

생태 자본과 공생 행복

도서정보 : 박길용 | 2019-01-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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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인구의 지속 증가와 도시화, 고도 과학기술에 따른 산업화로 ‘생명과 지속성(life and sustainability)’에 도전을 받고 있다. 이성적인 것, 합리적인 것, 과학적인 노력에 의해 장밋빛 미래를 꿈꾸어 왔던 인류는 최초로 자기 문명을 부정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제 21세기가 창조해야 할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은 ‘이성’과 ‘감성’이 공존할 수 있는 유기체적, 전일적, 일원적인 생태 중심 패러다임이다. 생명과 지속성을 담보하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태중심주의 세계관은 ‘녹색 성장(green growth)’을 통한 ‘생태 문명’의 창조를 추구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근본 해석이 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단순히 ‘물질’ 내지 ‘자원’으로 인식하고 소유와 지배, 자기 이익의 차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물 그 자체의 존재 의지와 천부의 권리 확보라는 차원에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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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 죽음과 사상의 운명

도서정보 : 신남철 | 2019-01-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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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지주의에 반대하였다. 칸트의 이성비판은 결국 물건 자체라는 괴상한 것을 내놓게 되었으니, 그 인식의 한계가 불분명하고 사리에 어둡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직관의 방법’에 의하여 사물을 있는 대로 내면적으로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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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osed Roads to Freedom (영어로 읽는 세계문학 398)

도서정보 : 버트런드 러셀 | 2019-01-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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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가는 길> 영문판.
1918년에 출간된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에세이.
근현대사를 관통해 온 사회주의(Socialism)와 아나키즘(Anarchism), 생디칼리즘(syndicalisme)을 소개하고, 그러한 사상들이 실현된 세계에서 벌어질 문제들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구매가격 : 3,000 원

악셀 호네트

도서정보 : 이현재 | 2019-01-0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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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까지 서구 사회운동의 핵심 문제는 물질적 자원의 ‘분배’ 혹은 ‘재분배’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신사회운동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실현’하는 문제를 화두로 삼게 된다. 정의의 문제에서 자아실현의 문제로 사회운동의 동역학이 변동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운동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주민,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등 집단의 정체성과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 활기를 띠고 있다. 2015년부터 온라인을 기반으로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물결도 집단적 정체성을 차별 없이 인정받는 이슈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정투쟁’을 정체성 인정을 넘어 물질적 재분배까지도 획득해 내는 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악셀 호네트의 시도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 책은 호네트의 ‘인정이론’을 10가지 키워드로 해설한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 )
독일의 철학자. 1949년 독일 에센에서 태어났다. 본대학교, 보훔대학교, 베를린자유대학교 등에서 철학, 사회학, 독문학을 공부했으며,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하에 교수자격논문을 썼다. 베를린자유대학교에 재직하다가 하버마스가 퇴임하자 1996년 그를 이어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 부임했다. 2001년부터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 소장을 지내고 있으며, 3세대 비판이론 전통을 잇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대표 저서인 『인정투쟁』을 통해 사회적 투쟁의 심리적 동기를 ‘인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이로써 사회적 투쟁의 저변에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주요 저서로 『권력 비판』, 『정의의 타자』, 『물화』, 『자유의 권리』, 『사회주의 재발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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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도서정보 : 강신주 | 2018-08-2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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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철학사도 아니고 동양의 철학사도 아닌 ‘우리의 철학사’

그동안 독자들은 《철학 VS 철학》을 왜 좋아했을까? 아마도 이 책이 주체적으로 쓰인 철학사라는 점이 가장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저자 강신주가 철학사를 쓰는 관점은 “‘동양철학의 우리’가 아닌 ‘우리의 동양철학’을, ‘서양철학의 우리’가 아닌 ‘우리의 서양철학’”을 모색하는 것이다. 곧 서양의 철학사도 아니고 동양의 철학사도 아닌 ‘우리의 철학사’, 즉 주체적인 철학사를 도모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독창적인 안목을 제시한 철학자들과 그들의 텍스트를 직접 읽을 수 있게 안내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을 강하게 피력하기도 한다. “결국 철학사에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과거의 철학자와 현재의 철학사가 사이에 치열하고 정직하게 펼쳐지는 진실한 대화만이 존재할 뿐이니까. 과거 철학자들에 대한 맹종도 아니고, 또 철학사가로서 나 자신의 독백도 아니어야 한다. 중요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진지하게 경청하고, 이어서 나의 소감과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철학사다.”

《철학 VS 철학》은 기존의 철학사 책의 아쉬운 점을 메우는 책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동양과 서양의 사유가 교차되는 역동적인 시공간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철학사 책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서양에도 치우지지 않고, 동양에도 치우치지 않는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철학사. 서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니고, 동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닌 한국에서 필요한 철학사. 동서양의 철학을 아우르는 철학사. 이것이 바로 《철학 VS 철학》의 최대 장점이고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이유이다. 그리고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그리 이질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간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만을 강조한 경향이 있었는데,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비교철학적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명실상부한 철학사, 혹은 주체적인 철학사를 구성하고 싶었던 나의 속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서양철학에도 치우치지 않고 동양철학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균형감이 없다면, 특정 사유 전통에 대한 종교적 맹목이 싹트게 될 것이다. 이런 균형감을 유지하려고 나는 때로는 동양과 서양, 혹은 과거와 현재를 부단히 충돌시켰고, 때로는 그 사이의 대화를 집요하게 시도했던 것이다.”

인류 최고의 철학자 132명이 질문을 던지다

그리고 《철학 VS 철학》은 어렵지 않다. 철학책은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쉽고 재미있게 철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철학자마다의 까다로운 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6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수치상으로 132명 이상의 철학자가 등장한다. 저마다 인류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사람들이고, 매 장마다 이 철학자들이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거리들을 던져주고 있다.

66장은 모두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각 쟁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각각의 철학적 쟁점과 관련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기본 문맥, 동서양 사유 전통에서 이 쟁점을 이해하는 방식, 혹은 본론에서 다루지 못한 중요 철학자들의 사유 등에 대해 언급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각 쟁점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표명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밝힌 곳으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각 철학자들의 입장을 생생하게 음미하려면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그래서 해당 철학자의 사유를 보여주는 중요한 원문을 최소 두 가지는 직접 인용하려고 했다. 마지막 넷째는 ‘고찰(Remarks)’이란 표제가 붙어 있는 곳이다. 대립 관계로 철학사를 집필하느라 놓칠 수도 있는 중요한 철학사적 쟁점과 정보들, 그리고 해당 쟁점과 관련된 비교철학적 전망들을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곳을 통해 독자들은 한층 더 완전한 철학사적 조망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논의된 철학적 쟁점이 오늘날 우리 삶을 조망하는 데 왜 중요한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각 장에는 최소 두 명의 철학자가 등장해서 철학 쟁점을 가지고 격렬하게 토론을 한다. 그 논쟁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그 철학자의 사상과 우리 삶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야말로 철학적 사유의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다. “66장의 철학적 쟁점들을 제대로 통과하면, 누구라도 나보다 백배나 탁월한 인문주의자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철학사는 권력과 체제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인문주의자를 키우는 일종의 훈련장인 셈이다. 이 철학사의 본문을 구성하는 66장은 고수가 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무협영화에 등장하는 관문들인 셈이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넘다보면 체제와 권력에 길들여진 수동적인 자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찬양하는 능동적 주체가 자라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남을 지배하지도 남에게 지배받지도 않는 자유인의 정신

궁극적으로 저자가 이 《철학 VS 철학》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사랑이 지고한 가치이며, 인간에게는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긍정하는 입장에 있는 철학자들을 옹호하고, 체제와 권력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는 철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남을 지배하지도 남에게 지배받지도 않는 자유인의 정신’ ‘새로운 마주침을 통한 기쁨의 연대’ ‘타자와의 관계와 사랑의 어려움’ 등 철학자 강신주가 그동안 주장해온 내용들이 이 책에 가득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암울한 철학자들의 내적 논리의 허약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들의 비관적인 전망을 폭로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대다수의 우리 이웃들이 암울한 철학자들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나는 유쾌한 기억과 소망스러운 미래를 약속했던 철학자들을 제 위치에 복원시키고, 반면 암울한 기억과 잿빛 미래를 구가했던 철학자들의 내적 논리를 폭로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 철학사로 인문주의적 철학자들을 지킬 수 있고, 동시에 인문주의를 능욕하려는 제도권 철학자들의 침입도 격퇴할 수 있는 든든한 성곽을 쌓고 싶었던 것이다.”

구매가격 : 37,8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