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고대, 삼황오제 하상주 춘추전국 춘추오패 전국칠웅 진시황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10-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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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고대


1. 중국 역사는 한족 역사가 아니다

고대 중국에서, 공동체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奴?는, ‘말 한필에 비단실 한 타래’를 합한 값에 거래되었다.
그러한 가격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李氏朝鮮에서 노비의 거래가격이 ‘1년 노비 품삯’이었으니, 현대적 화폐 척도로써 분별하여도, 서로 큰 차이가 없다.
현대사회의 화폐를 기준 한다면, 대략 3,500만 원가량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이 정도 연봉을 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사람 한 명의 거래 가격이 그 정도였으니, 돈벌이 좀 못한다고 해서 自壞感을 가질 것은 없다. 적어도 노예나 노비가 되어, 돈 몇푼에 팔려 다니는 신세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연봉을 3,500만 원 넘게 받으려면, 노동자로서 고용되어,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하며, 노예나 노비 못지않은 受侮와 侮辱을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는, 수천 년 전의 고대사회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도록,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현실세계의 서민대중들은, 늘 혁명적 변화를 모색한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그런 것은 실현된 바가 없다. 늘 대다수의 서민대중보다, 여러 모로 월등한 역량을 지닌 소수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무참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도 그러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民度는, 고대 중국이나 이씨조선에 비한다면, 그 어떤 혁명적 변화라도 실현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실현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현대의 기득권층은, 고대의 기득권층에 비해, 또 다시 월등한 역량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소 암울하지만, 향후에도 이러한 사회적 구조는, 당최 변화될 것 같지 않다. 保守右派가 집권하든, 進步左派가 집권하든, 혁명적 변화는 당최 遙遠할 따름이다.
더욱이 저 먼 고대사회에 비해 나아졌다고 하나, 현대사회의 서민대중 역시, 기득권층의 선동질과 조작질에 惑世誣民 당하는 ‘개돼지 군중’ 신세일 뿐이다.
그렇다면 서민대중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것인가. 그나마 현실성 있는 시도는, 앎의 공부다. 스스로 공부하여, 시대와 상황을 잘 알게 된다면, 적어도 ‘개돼지 군중’ 신세는 면할 수 있다.
갖은 프로파간다 선동질과 조작질에 놀아나지 않는, 오롯한 自由人이며 個人으로서, 한 세상 살아낼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기득권층이 소유하는 만큼의 慾望充足이 가능할 리 없다. 그저 심리적 차원의 自己滿足이며, 自己享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마저도 하지 않은 채, ‘개돼지’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면, 고대 중국의 노예나, 이씨조선의 노비 신세보다, 아무 것도 나을 것이 없다.
실상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사회 서민대중의 수준이, 과거의 노예나 노비에 비해 별반 나을 것이 없다. 그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소유했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물질적 변화는, 그저 시대와 상황의 변화일 따름이다. 그런 것을 소유했다고 해서, 과거의 노예나 노비에 비해, 절대적으로 향상된 수준에 배치된 것이겠는가.
다만, 人權의 차원에서는, 근대사회 이후 급격한 발전이 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과거의 노예나 노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별반 나아진 것 없는 신세지만, 적어도 憲法的으로 동등한 인간존재로서의 天賦人權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현대판 노예나 노비의 수준에 불과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自由人으로서 살아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적 발전이라고 규정해도 무방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죽음의 순간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몇 푼의 돈벌이를 목적하며, 현대판 노예나 노비로서 살아낼 것인지, 다소 궁핍하더라도 정신적 자유인으로서 공부하며 살아낼 것인지는, 철저히 現代的 個人의 선택이다.
그러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 21세기 大韓國民에게 부여된 가장 큰 축복이며 행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국은 말할 나위 없으며, 북한의 형편을 살핀다면,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황된 이데올로기적 妄想에 세뇌되고 현혹되어, 중국이나 북한을 羨望한다는 자들이야말로, 스스로 현대판 노예나 노비로서 살아내는 인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一言以蔽之하여, 中國歷史는 漢族歷史가 아니다. 東夷族을 비롯한 다양한 異民族 세력에 의해 주도된 역사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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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중세, 가마쿠라 무로마치 난보쿠초 센고쿠 쇼쿠호 세키가하라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10-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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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중세

1. 일본 중세, 사무라이 시대가 시작되다

일본 역사에서 中世는, 韓國人의 관점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으로 代辯되는 시대이다. ‘도요토미’가 擡頭되는 까닭은, 말할 나위 없이,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때문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李氏朝鮮보다 劣等한 倭寇 세력에게 蹂躪당한 사건이다 보니, 지금까지도 反日主義의 대표적 원인의 하나로 膾炙된다.
당시 ‘도요토미’는, 나름대로 국제정치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분명 그것은 예수회 선교회를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帝國으로서의 日本夢을 시도했던 것이었다.
그런 시절에, 李氏朝鮮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실정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전쟁의 慘禍를 겪은 후에도, 이씨조선의 기득권층은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이씨조선 말기에, 國家를 송두리째 일본의 ‘덴노 全體主義’ 세력에게 빼앗기고서야, 국제정치의 위험성을 직시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뒤늦은 死後藥方文일 따름이다.
임진왜란 이후, 한국인의 정신성은 급격히 피폐하였고, 현재에 이르도록 ‘시대의 쭈구리’로서, 별다른 韓國夢을 지니지 못하는 실정이다.
李成桂와 鄭道傳 이후, 明나라의 屬國으로서, 철저한 事大主義的 小中華主義로써 국가체제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실상 그것은, 이씨조선 기득권층인, 양반사대부의 利權을 유지하는 방편일 따름이었다.
그런 상태로 수백 년을 지속하다 보니, 21세기에 이르러서도, 한국인들은 당최 氣魄을 갖지 못한 채, 烏合之卒의 離合集散의 形勢로써, 그저 제 밥그릇이나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현재 중국은 中國夢을 선전해대며, 실제로 그 계획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일본은 이미 수세기 전에 日本夢을 시도하였고, 어찌되었든 결국 大東亞共營圈을 내세우며, 日本帝國의 꿈을 실현하였다.
그러한 국제정치적 사례를 체험하면서도, 南北統一이나 故土收復은 고사하고, 한국인들에게는 현재까지도 마땅한 韓國夢이 不在하다.
‘짱께’들 눈치 보며 살아낸 세월이나, ‘쪽발이’들에게 주눅 늘어 살아낸 세월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민족의 無意識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21세기 상황에서, 중국에 대해 事大主義的 태도로서 親中主義를 주장하거나, 일본에 대해 植民主義的 태도로서 反日主義를 주장하는 자들을 보면, 이러한 時代錯誤的 ‘개돼지 관점’은, 향후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극히 암울하게 할 것으로 판단된다.
‘짱께’들의 屬國이 되지 않고, ‘쪽발이’들의 植民地가 되지 않으려면, 먼저 그들의 정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隣接國의 悲劇’이라는 국제정치적 법칙을 인식하고서, 보다 철저히 인접국 자체를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
수년 전 保守右派가 집권하던 시절이나, 현재 進步左派가 집권하는 시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資本主義와 市場經濟를 추종하는 보수우파야 그저 그런다지만, 平等, 公正, 人權, 民主化 따위를 프로파간다 삼아, 서민대중들을 선동질하고 조작질 해대는, 진보좌파의 現在的 作態는, 실로 참담한 심정을 갖게 한다.
현직 법무부장관이라는 자가, 온갖 不法行爲와 不正腐敗로 인해, 압수수색까지 당하는 상황이다.
혁명적 변화를 주장하며, 갖은 道德主義的 선동질을 해대던 자의 실체가, 결국 썩어문드러졌던 보수우파 기득권층의 ‘짓거리’와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자의 경우도 별다르지 않다.
서민대중들은 그들에게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대했다. 적어도 이씨조선이나 보수우파 기득권층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껍질을 벗겨보니, 그 실상은 더욱 추악하다. 그것은 그들이 추종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지니는 도덕주의적 성향 탓에, 더욱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의 경우도 그러했다. 순진무구한 인민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세상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지녔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소련은 몰락했고, 중국은 몰락해가고 있다. 고작 이런 것이 左派進步主義의 실체라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을 실로 암울하게 한다.
11세기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변모하였으나, 지방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정도로 막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지역 주민 스스로가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만 했다.
헤이안 시대 후반, 지방에서는 호족과 부농들이, 자신들이 개간한 농지를 사유화하고, 이를 지키려고 스스로 무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부시(武士, ぶし)’ 계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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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근세,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 조닌 겐로쿠 가세이 부시도 가부키 우키요에 대정봉환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10-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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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근세

1. ‘에도(도쿠가와) 바쿠후’(1603~1867)

에도 시대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불교의 不殺生 계율을 지나치게 誤濫用하여, 동물의 생명을 중시한다는 명분으로 殺生禁止令을 발표해, 많은 빈축을 샀다.
특히 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누쿠보(犬公方, 개 쇼군)’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쇼루이아레미노레이(生類憐れみの令)’란, 일본 에도 시대, 겐로쿠 연간에,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 의해 발효된, 여러 法令(오후레, お?れ)을 일컫는 말이다. 다만 특정 成文法律이 아니라, 여러 가지 비슷한 법령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는 흔히, ‘개 쇼군’에 의해, 개에 대한 살생을 금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어패류 및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체의 생명에 적용되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丙戌年 태생으로, 특히 개를 보호하였다. 개인적으로도 개를 좋아하여, 100마리의 개를 길렀다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愛犬이라는 개념이 강조된다. 기존에도 개라는 동물은, 아주 친숙한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어디까지나 家畜으로서, 三伏에는 도축되어 음식으로 활용되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기괴한 서양 愛玩犬 文化의 영향 탓으로, 어느새 ‘개 팔자’야말로 ‘사람 팔자’를 능가하는 시절을 맞고 있다.
물론 이 역시, 일부 주인 잘 만난 ‘금수저 개 팔자’의 경우이다. 학대 받다가 遺棄犬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불교의 不殺生 계율을 좇아, 개의 생명은 물론이며, 온갖 동물의 생명을 인간의 생명과 동일하게 인식하고서, 살생금지령이 발효된 시절이, 바로 일본 에도 시대이다. 물론 이 외의 사례도 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6년(412)과, 권8 신라본기 성덕왕 10년(711)에, 신라의 동물살상금지령이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법왕 1년(599)에는, 백제의 살상금지령이 기술되어 있는데, 사냥 및 매의 사육을 금지하였으며, 어망 등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세가 편에는, 고려의 도축금지령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의 경우, 북송의 휘종이, 1102년에, 개 살육금지령을 내렸으며, 5세기경에는, 불교 법강경 제3장 식육계에 따라, 생명을 빼앗는다는 이유로, 육식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작태들은, 현실세계 보통 백성들의 처지를 무시한, 空理妄想的인 가혹한 악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세계의 절대적 권력을 지닌 자가, 어떤 철학사상을 지니고서, 어떤 이념과 의식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피지배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위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현직 대통령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좇는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현재는 물론이며, 미래 역시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예컨대, 현직 대통령이 親中, 反中, 親日, 反日, 親美, 反美 따위의, 다양한 選擇肢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른 樣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善惡, 眞僞, 美醜 따위의 영역과는 별반 연관을 갖지 않는다. 물론 선택하는 자는,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선하며, 진실이며, 아름다운 선택이라고 인식할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에도 시대 ‘개 쇼군’의 사례는, 많은 것을 苦惱케 한다. ‘개 쇼군’ 역시, 제 깐에는, 참으로 선하며, 진실이며, 아름다운 선택을 한 것이다.
‘개 쇼군’은, 살생은 어쨌거나 나쁜 것이며, 따라서 사랑하는 백성들이, 그러한 살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참으로 정당하며, 공정한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서민대중들은, 에도 시대 최고 전성기였던 ‘개 쇼군’ 시절에, 살상금지령으로 인해, 난데없는 ‘고난의 행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강제적으로 肉食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란, 여러 모로 난데없을 따름이다. 어쨌거나 죽음의 순간까지, 인간존재는 동물적 존재로서, 菜食은 물론 동시적으로 육식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장 기초적인 건강 상태나마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선량한 ‘개 쇼군’의 판단에 의해, 전혀 예상치도 못한, 不殺生의 고통 속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아울러 所爲 朝貢貿易은, 明나라 황제가 周邊國의 왕을 冊封해주는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써, 해당국은 조공을 바친다.
예컨대, 李氏朝鮮에서 貢女, 絹織物, 高麗人蔘 등을 바치면, 明에서는 그 대가로, 조선 지배계급이 선망하는 高級絹織物, 瓷器, 書籍, 藥材 등을 下賜해 주는 방식이다.
혹자는, 조공무역은 조선에게 더 이익이 많았는데,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양국 간 주장을 보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명이 조선에게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 무역을 주장하는데, 조선은 거꾸로 명에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 무역을 주장했다. 조선에서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공무역은, 諸侯國에서 帝國에 일방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제후국에서 朝貢品을 바치면, 제국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回賜品을 하사하는 게 원칙이었다.
회사품은 조공품보다 귀하고 많아야 하는 게, 관례였고 원칙이었다. 더불어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 운반비를, 명나라 측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이는, 上國으로서 체면을 유지하려는 방도였다.
물론 이러한 역사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며, 一理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보다는, 그러한 상황에서 치욕스럽게 굴종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던, 李成桂, 鄭道傳 이후, 이씨조선 양반사대부 기득권층의 패배주의적 의식구조에 대해, 먼저 再考해야 한다.
그런 歷史的 慣性이, 21세기 현재에도 대한민국에 澎湃하여, 여전히 ‘짱께’들이나 ‘쪽발이’들에게 주눅 들어 있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의 현장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법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니다. 다만,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인해, 숙명적으로 인접국으로서 배치된 관계이다.
그러니 ‘인접국의 비극’으로부터 당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항상 그만큼의 간격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何時라도 중국이나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
명나라의 屬國으로서 정체되었던 이씨조선 시기를,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절이라고 인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화라는 것은, 自主獨立의 토대 위에서 실현되는 것이지, 속국이나 식민지의 상황에서의 停滯的 安定을 평화라고 판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川幕府)’는, 日本史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일본사에서 세 번째로 나타난 최후의 막부이다.
1603년 3월 24일(게이초 8년 음력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軍)에 취임하고,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 9일(게이오 3년 음력 10월 14일)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大政奉還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면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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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고중세, 전한 신 후한 위촉오 서진 오호십육국 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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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고중세



1. ‘전한(서한)’(기원전 206~기원후 8)

고대 중국의 역사를 살피면, 아주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상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애를 통해, 매우 드라마틱한 삶의 행태를 체험케 된다. 굳이 戰場에서, 권력을 목적하며, 목숨을 내놓고 도박을 하지 않아도, 그러한 속내를 나름대로 代理體驗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각종 역사적 사례로써 현재를 살피는 일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며 효과적인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 前漢 시기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漢武帝라는 人物像으로서 대표되는 시대이다. 중국 측 역사에 따른다면, 한무제는 衛滿朝鮮을 정벌하고서, 식민지 한4군을 설치한 인물이다.
현대적 관점에 따른다면,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에 대해 배상을 청구하듯이, 한4군 설치로써 수탈당한 것에 대해 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이후 이어지는 역사에서도, 한반도는 중국대륙에 정립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착취의 대상으로서 유지되었다. 그러하다면 응당 그에 대해서, 총체적인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멀지 않은 과거로서 기억하는 丙子胡亂, 壬辰倭亂 등은 말할 나위 없다. 나아가 淸日戰爭, 露日戰爭 등도 그러하다.
그런데 배상의 문제는 차치하고, 한4군이 어느 지역에 위치하였는가에 대한 여부마저도, 여전히 曰可曰否하고 있는 실정이다.
事大主義나 植民主義를 추종하는 자들은, 대체로 한반도 내에 한4군이 배치된 것으로 比定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韓民族의 전통적 疆域은 대폭 축소되어버린다. 거대한 만주대륙을, 우리 역사에서 스스로 제거해버리는 결과가 된다.
古代史는 그 자료가 不備한 탓에, 어떤 하나의 事實이나 史實에 대하여, 어떠한 이해와 해석을 갖는가가 아주 중요하다. 곧 어떤 史觀에서 접근하는가에 따라, 역사 자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어떤 사관으로써 역사를 살펴야 하는가. 두말 할 나위 없이,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의 國益에 도움이 되는 역사적 관점이 요구된다.
당최 검증될 수 없는 한4군의 위치를, 굳이 한반도 내에 배치하여, 한민족의 역사적 활동 영역을 축소하려는 의도는, 당최 납득키 어렵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하여, 과거부터 많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臨屯郡이나 眞蕃郡의 경우, 설치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철폐되었고, 玄?郡 역시 랴오닝 성 撫順 방면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위치에 대한 논란은, 주로 樂浪郡을 두고 계속되었다.
三國史記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이씨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로 比定하였다.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封泥, 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낙랑의 위치는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임이 확증되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木簡(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신채호 등의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낙랑이 요동 일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한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의 일부 학자들은, 낙랑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대한민국 사학계가 어떤 대표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사학계라고 통칭할 만한,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애석하지만 대한민국 사학계라는 것은, 기껏해야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의 학맥을 좇아, 밥그릇 싸움하는 집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런 집단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북한 사학계와 유사한 주장만을 떠들어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자들의 反國益的 주장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한4군 위치 비정에 있어, 대한민국의 역사적 국익의 관점에서 주장되는 이론은, 죄다 民族史學이나 在野史學이라고 貶毁해버린다.
그리고서는 자기들이 대한민국 사학계를 대표한다면서, 고작 ‘짱께’나 ‘쪽발이’ 세력에 동조하는 주장을 해대고 있다. ‘짱께’나 ‘쪽발이’들로부터 적잖은 ‘떡고물’이 떨어지고, 제 밥그릇 챙기는 데도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鮮卑族은, 漢族들이 세운 南朝를 정복하고, 북주와 북제로 나뉘어졌다. 그 후 隋나라 楊堅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되었다.
수나라의 양견은, 선비족 우문부가 세운, 北周의 외척으로서 선비족이다. 그 이유는, 북위 때부터 계속, 무천진 출신 선비족 8주국 관롱 집단이, 중국인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선비족의 다얀씨(大野氏)는, 北周의 귀족이며, 선비족 8주국 관롱 집단 출신, 당 李淵도 선비 출신이다.
이처럼, 중국 역사를 살필 때에는, 동시적으로 북방 유목제국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우리 역사를 살필 때에도 매한가지다.
허황된 ‘단일민족’ 이데올로기에 현혹되어, 그저 三國史記, 李朝實錄 따위만을 守舊的으로 살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와 이조실록은, 단일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底本이 되는 텍스트들이다.
따라서 그런 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응당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傍證史料를 동시적으로 살펴야 함은 明若觀火다.
‘前漢(기원전 206~기원후 8)’은, 고조 劉邦이, 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서, 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왕조이다.
수도는 長安이었는데,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洛陽보다 서에 있어서, 西漢이라고도 불린다.
고조 유방은, 원래 亭長으로, 의병을 일으켜 沛公의 자리에 올라, 楚의 義帝를 섬기다가, 그 세력이 커져, 또 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하략-

구매가격 : 3,000 원

근현대 일본,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 이마니시 류 아베 신조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2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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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가격 : 3,500 원

일본! 작게 보고 크게 보고

도서정보 : 박경하 | 2019-08-0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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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일본 작게 보고 크게 보고』는 20여 년이 넘는 기간을 일본에서 활동해 온 박경하 저자의 솔직담백한 일본 분석기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글로벌 세계의 가능성을 믿고 일본으로 건너간 저자는 한국의 과자회사 (주)오리온의 일본법인 지사장으로 활동하며 몸으로 접한 일본의 역사, 문화, 사회, 그리고 일본시장에서의 경영전략을 구어풍의 유머러스한 필치로 생생하게 풀어내어 이 책에 담았다.

구매가격 : 9,750 원

누구나 다 아는 일본 이야기

도서정보 : 이진천 | 2019-05-15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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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아는 일본 이야기?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왜 책으로 냈을까?
우리는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민족성, 국민성 조크와 함께 살펴보는 일본인과 일본 사회

역설적인 책 제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일본인의 특성 중 하나가 이중성이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내면으로 품고 있는 속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만으로 일본을 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 관련된 민족성, 국민성 특징을 살린 유머와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일본에서 생활했고 일본과 비즈니스를 하면서 일본인과 교류가 많은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조명하고, 우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가져야 할 자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구매가격 : 11,000 원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도서정보 : 시부사와 에이이치 | 2019-02-1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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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부의 창출은 도덕 경영에서 시작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영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의 근대화와 자본주의에 앞장선 인물로 유럽의 주식회사제도를 들여와 철도회사, 가스회사, 전등회사, 방직회사 등을 설립했다. ‘삿포로맥주’, ‘임페리얼호텔’, ‘도쿄전철’ 등 그가 세운 기업들은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찬사 받는 이유는 그가 이룬 경제적인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일본에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들어오기도 전, 즉 상업이 무시 받던 시기에 경제의 중요성을 통찰했다. 동시에 경제 부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도덕’을 꼽았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덕과 경제는 서로 반(反)하는 게 아니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의지하며 굴러가야 진정한 근대 자본주의가 완성된다.”고 하며 ‘인의’와 ‘도덕’을 선행되어야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재산 축적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경영인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들이 드러나는 오늘날, ‘도덕 경영’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정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화가 된 남자,
그의 위대한 도전이 시작된다
청년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의 개방을 요구하는 서양의 목소리에 거세게 반항했다. 그는 미국과 조약을 맺은 막부를 부정하며 일종의 봉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막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막부의 신하가 되었다.
이후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가해 유럽을 돌아보며 서양의 문화를 직접 목도하게 되었다. 그는 서양의 주식회사 제도 등을 보며 일본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럽 체류 중에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몸담았던 막부가 붕괴해버렸고 시부사와는 졸지에 ‘망국의 신하’가 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이번엔 메이지 정부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정부의 관료로 변신하여 근대일본의 틀을 구축하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서양 자본주의의 잔상은 너무나 짙게 남았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머지않아 관직을 그만두고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장사치들을 손가락질 하던 당시, 촉망받는 관리였던 시부사와는 일본에 주식회사제도를 도입하여 상업을 부흥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도전은 일본이 경제 강국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결국 이 책은 시부사와 한 개인의 도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본 경제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기기도 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전문가 서울대학교 박훈 교수의
상세한 설명과 유려한 번역!
친척들은 비오는 날 밤이면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찾아와 그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 이야기를 청했고 그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 이 책의 시작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 책이 자신의 자손들에게 읽히길 바라며 자신의 ‘유품’이라고 했다.
메이지 유신과 일본 근대화 전문가인 박훈 교수는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남긴 이야기를 되새기며 독자들에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독자들이 메이지유신 전후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한 주석을 더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소설 같은 이야기와 박훈 교수의 친절한 설명이 더해진 이 책은 독자들에게 평생의 ‘유품’으로 남을 것이다.

구매가격 : 14,400 원

전쟁 국가 일본의 성장과 몰락

도서정보 : 이성주 | 2019-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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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

《전쟁 국가 일본의 성장과 몰락》은 국제정치 감각이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지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전쟁에 매몰된 일본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전쟁은 전쟁 자체로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국가 간 수많은 이해관계와 정치적 결정이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단순히 군인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이라고 본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전쟁은 이해 당사국의 정치 행위이자 최후의 외교 정책이다. 20세기 초 한반도는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국제정치의 비정함이 전쟁으로 고스란히 드러난 현장이었다. 그 중심에 전쟁 국가 일본의 성장과 몰락이 있었다.
전쟁 국가 일본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결론은 하나다. 외교 감각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란 사실이다. 평화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이다. 어쩌면 지금이 러일전쟁을 목전에 둔 100여 년 전보다 상황이 더 나쁠 수 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그 지위를 노리는 중국,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러시아와 일본, 그들은 항상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를 노려본다. 그런데도 국제정치에 무관심하고 우리 일상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편향된 시각으로 극단으로 치우치는 사람들마저 있다.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던 역사를 잊은 듯하다. 국제정치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러일전쟁으로 부상한 전쟁 국가 일본
19세기 러시아는 영국과 쌍벽을 이루는 대제국이었지만 20세기 초 노동자와 민중 시위가 대도시 전역으로 퍼지면서 차르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국내의 불안을 외부로 돌리려고 했지만 일본에 패하면서 차르 체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반면 호시탐탐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은 보란 듯이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승리하며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러일전쟁은 세계 90퍼센트를 지배하던 백인 제국주의 국가들에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일본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전쟁 국가로서의 체제를 완성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문서 한 장으로 끝난 테이블 위의 해전
러일전쟁으로 제국주의 국가가 된 일본은 영일 동맹을 명분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며 손쉽게 중국 내 독일 조차지와 남태평양 제해권을 확보했다. 또한 전쟁 물자를 수출하여 채무국에서 채권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승전국 자격을 얻은 일본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과 남태평양 제도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 후 열강들은 갓 제국의 반열에 오른 일본의 팽창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일본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 정치적 견제였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열강들은 저마다 계산기를 두드리고 서로의 패를 맞추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줬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어느 해전보다 많은 전함을 사라졌고 전쟁으로 찌든 세계도 잠깐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세계 3위의 해군력을 갖춘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영국으로부터 홀로서기를 강요받은 조약이기도 했다.


전쟁 괴물로 변해버린 일본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고 알려졌지만 일본에게 태평양전쟁은 1937년 중일전쟁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미국과 회복할 수 없는 관계를 만들었다. 미국은 미일 통상 항해 조약을 파기하며 민간의 자율적인 수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일본은 1940년 6월 삼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을 체결하며 이에 대응했다. 일본과 미국은 최악의 관계로 빠져들었다. 미국이 각종 전쟁 및 전략 물자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를 발령했고 일본은 전쟁 카드를 꺼냈다. 일본과 미국 사이에 활발한 외교적 교섭이 있었으나 삼국 동맹 탈퇴와 중국에서 전면 철수 등을 주장하는 미국의 요구는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일본의 불만은 미국을 향해 커져만 갔다.


태평양전쟁,
전쟁 국가 일본의 폭주
중국 침략으로 세계의 문제아가 된 일본은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중국에 요구한 21개 조 조항 가운데 하나인 산둥반도의 이권을 포기했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한반도를 차지하고 만주까지 확보할 때까지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을 침략하자 서방 국가들의 견제가 시작됐다. 특히 미국은 일본 견제에 앞장섰다. 진주만 공격이 있기 20년 전인 이때부터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고민했다. 불만은 있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눈치를 보던 일본은 1940년 9월 자원 확보와 중국 전선의 반전을 위해 인도차이나 북부를 침공했고 1941년 4월 13일 일소 중립 조약을 체결하자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점령했다. 이를 계기로 서방 국가, 특히 미국과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일본은 관계 회복을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미국은 믿지 않았고 전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49분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일본 전투기와 폭격기가 진주만에 어뢰와 폭탄을 떨어뜨렸다.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선,
국제정치에 둔감해지 전쟁 국가 일본의 몰락
포츠담 선언에서 밝힌 연합국의 단호한 모습을 일본은 묵살했다.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일본의 항복 조건을 세세하게 밝혔지만 일본은 파멸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걷어찼다. 1944년 7월 9일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일본의 패배는 자명했다. 미국은 사이판을 발판으로 B-29로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하고 잠수함을 이용해 일본 앞바다를 마음대로 유린했다. 하지만 천황을 비롯한 황족과 일본 전쟁지도부는 천황제를 유지하는 종전 방안만 모색했다. 반면 소련은 1945년 4월에서 8월까지 언제 일본과의 전쟁에 끼어들지를 고민했고,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노력했다. 이 기간에 일본은 소련을 통한 강화를 모색하며 시간을 낭비하며 원자폭탄을 피할 수 있었던 많은 기회를 놓쳤다. 만약 일본이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면 원자폭탄을 맞지 않을 수 있었고 소련 참전도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의 분단도 없었을지 모른다.
나라의 외교 정책이 극단으로 치우쳤을 때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냉철한 상황 판단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 외교다. 하지만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그러는 사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고 외교 감각도 뒤떨어졌다. 전쟁을 피하는 외교적 수단을 버리고 광기를 선택했던 일본의 외교적 무지는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임진왜란도 조선, 명나라, 일본 삼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전쟁이고, 한국전쟁 역시 남북한 사이의 내전이라기보다 수많은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운 국제전이었다. 20세기 초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역시 국제정치가 얽힌 전쟁이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등장했던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은 아직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한쪽은 대륙 진출로, 한쪽은 해양 진출로 한반도를 주시한다. 거기에 우리는 남북 대치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다.
《전쟁 국가 일본의 성장과 몰락》은 지난 100여 년의 역사 중 한반도의 운명에 가장 치명적이고 밀접한 영향을 끼친 일본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국제정치의 중요성과 본질을 이해하는 입문서가 되길 희망하는 마음으로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괴물로 변해가는 일본》《미국 vs 일본 태평양에서 맞붙다》《파국으로 향하는 일본》등 5권의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를 새롭게 정리했다.

구매가격 : 22,400 원

중국외교비사1

도서정보 : 왕사오팡 | 2018-10-1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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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부터 1992년까지
중국 외교 150년사를 집대성한 역작!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관계였던 조공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인 조약체제로 변화한 중국 외교사를 추적하다

중국은 가장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한 나라이자 거의 4,000년에 달하는 문자로 기록된 장대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중국인들 스스로도 영광스러운 혁명 전통과 우수한 역사 유산을 지닌 민족이라고 자부한다. 그런 인식은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줄곧 이어져오고 있으며, 지금도 세계 속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 있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른 국가·민족과 빈번한 접촉과 왕래를 이어온 중국이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파장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없다면 지금의 중국도 이해할 수 없다.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외교사를 들여다보는 이 책의 의미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중국의 대외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이 책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이었던 시기를 토대로 중국 외교사를 치밀하게 추적해간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10년대 초반까지의 중국 외교사
중국은 지리적인 관계로 말미암아 가장 먼저 주변의 아시아 국가·민족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상고시대 이래로 조선과 베트남, 버마, 일본 등과의 밀접한 왕래가 있었으며, 그들과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 측면에서 관계를 확립했다. 비교적 고도로 발달된 중국의 봉건문화는 주변 국가의 문화 발전을 촉진했으며 동시에 세계의 문화 발전에도 공헌했다. 중국 또한 주변 국가로부터 문화적인 성취를 계속적으로 흡수해 중화민족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그러던 중 15세기 말에 동방에서 황금과 상품을 구하려는 유럽인에 의해 지리적인 대발견이 촉진되어 동서 교통의 혁명이 일어나고, 차츰 세계 시장이 형성되면서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지자 중국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16세기 이후 원시적인 축적 단계에 있었던 서방 자본주의 침략 세력은 동방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들었고, 이에 따라 더욱 많은 서방의 모험가와 상인, 선교사가 동방으로 몰려들어 각지에서 침략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나 정부도 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 정책을 전개하며 전체 아시아를 식민지로 확장하려고 했다. 이런 극적인 세계사적 변화는 중국의 정치, 문화, 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중국외교비사1』은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 속에서 중국의 대외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고, 왜 변화했는지를 추적한다. 명말 서구 식민 세력의 침략에서부터 자본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 중국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 청일전쟁, 제국주의의 조차지 강탈, 8개국 연합군의 중국 침략 등에 이르기까지 1840년대부터 1910년대 초반까지를 두루 다루면서, 그 시기 중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계사적인 사건을 통해 중국 정부의 대응과 그 안에서 각국의 대외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통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 외교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
이 책은 왕사오팡의 『중국외교사: 1840-1911』(鄭州: 河南人民出版社, 1988)를 번역, 재출간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시대가 지났어도 퇴색하지 않는 의미가 있는 책이기에 지금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드넓은 영토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이 어떻게 서구 열강에 의해 침략을 당했는지, 그 당시 중국의 약점은 무엇이었으며, 서구 열강은 어떻게 중국에서 이권을 탈취했는지, 외세의 침략에 무능했던 중국 통치 계층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등의 광범위한 분석과 해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중국 외교관 후보자들의 교과서였기 때문에, 중국 엘리트들이 어떤 역사 인식을 공부하는지도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과거 중국 서적에는 자료의 출전이 분명하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객관적이고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고 연구자의 관점이 명확한 역작이다. 자료 인용에 있어서도 중국의 1차 자료뿐만 아니라 외국의 1차 사료도 충분히 인용하고 있다.
2018년은 한중수교 26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 중국외교사를 전문적으로 다룬 서적은 많지 않았다. 책을 번역한 한인희 교수의 17년 시간이 담긴 이 책은, 한국 학계에서 중국 외교사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져야함을 촉구한다. 더불어 중국 역사 속에서 바라본 중국 외교사를 통해 중국 전문가뿐만 아니라 중국을 공부하는 학생, 중국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중국을 이해하는 훌륭한 교과서이기도 하다.

구매가격 : 35,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