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여행_일본(개정판)
도서정보 : 폴 노버리 | 2023-10-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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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풍습, 역사, 문화, 생활, 삶
이 책은 『세계 문화 여행』 시리즈의 일본편으로 일본의 풍습, 역사, 문화, 생활, 삶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업차 일본을 방문하든 단순한 여행이든, 일본에서 더욱 풍성하고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현지 풍습과 전통, 역사와 종교와 정치, 일본인의 가정과 직장과 여가, 의식주, 의사소통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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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길러낸 중국의 엘리트들
도서정보 : 장융전 | 2023-09-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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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초나라의 인재를
선진국 진나라에 보내라!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 엘리트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사람이 되어 돌아왔는가
그리고 중국의 사회,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미국이 길러낸 중국의 엘리트들: 미국의 중국 유학생들, 1872-1931』(원제: 礎材晉育)은 미중 양국의 인재 교류의 양상을 살펴본 책이다. 『중국유미학생월보』를 주된 자료로 삼고, 1902년에 창립했다가 1931년 해체한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 활동을 중심으로 중국인 미국 유학생을 조명했다. 이 단체는 중국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전국 유학생 조직으로, 룽훙이 주도한 어린 유학생들은 포함되지 않으며 그들이 본국으로 소환된 이후의 ‘과도기 세대’ 유학생들이 중심이다. 그렇게 볼 때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는 미국 유학이 유행한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미국 유학생을 이해하려면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를 이해해야 하며 선구자 세대부터 과도기 세대로 연결되는 역사의 전체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이 책의 서술은 1872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가 해체된 1931년까지의 기간을 담고 있다.
중국이 수천 년 주변 국가들로부터 유학생을 받아오다가 처음으로 바깥에 유학생을 내보낸 곳이 바로 미국이었다.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2020년 현재 미국의 중국 유학생은 37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미국의 전체 외국인 유학생 중 35퍼센트를 점하는 수치로, 실로 놀라운 양적 성장이다.
200여 년 사이에 양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무역과 인재로 활발하게 교류했지만 그 과정은 한순간도 순탄하지 않았다. 대국 간의 교류는 다면성과 복잡성을 포함하고 있어 항상 주변국들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역사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작금의 상황에 매몰된다면, 전체적인 모습을 놓칠 수밖에 없다.
동치 중흥이래 미국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롤 모델이었다. 단지 ‘물건의 신기함’ ‘물질적 안락’ ‘질서정연함’ 때문이 아니라 서방 열강들의 무차별한 침략 속에서 미국만이 정치적으로 가까운 우방이며 보호자라는 믿음이 있었다. 미국에 유학했던 많은 중국 인재가 한편으로 미국을 신앙처럼 여기며 중국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이 중국인을 배척하는 법안을 만들면서도 중국 유학생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친미 성향의 지도층과 광대한 소비층을 배양하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당시 왕징춘王景春은 미국 유학 경험을 통해 “중국은 이 세계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놀랄만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이 이룬 현대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다. 내일의 중국은 명석한 두뇌와 식견을 가진 지도자의 영도아래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켜 세계 시장에 다양한 원료를 제공할 것이다”라고 희망을 쏘아 올렸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심각한 갈등 속에서도 많은 중국인은 미국을 이상향으로 여기고 있고, 미국 역시 중국이라는 광대한 시장에서 발을 뗄 수 없다.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일부 영역에서 롤 모델에 근접하거나 넘어서다보니 롤 모델이 이에 놀라서 당황하는 초유의 형국이 되었을 뿐이다. 섣부른 예측론자들은 또 다양한 통계수치를 들어 오래지 않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해서 G1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학자로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같은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국이 전통 속에서 그리고 현대화 과정에서 쌓아온 풍부하고 많은 자산과 경험은 쉽사리 소진되지 않을 것이고,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지 미국으로 간 중국 유학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시기는 늦었지만 수많은 한국 인재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 유학을 떠났고, 그렇게 연결된 고리를 통해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 계단으로 이용했으며 사회 전반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그 사이에 있는 우리는 역사 속에서 꾸준히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1872년 룽훙容宏이 최초로 어린 유학생들을 데리고 미국에 간 것을 시작으로 중국의 미국 유학 역사의 막이 올랐다. 당시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의 상소문에 따르면 “오랑캐의 기술을 익혀 오랑캐를 제압한다師夷之長技以制夷”는 명제 아래 “총명한 아이들을 선발해 서양 여러 나라에 보내어 군정·선박·수학·제조 등 학문을 배우게 한다. 약 10여 년의 교육을 마치고 서양인의 장점을 중국에 접목하여 익히면 강해질 것이다”라는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중국을 강국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이루는 순간 중단될 계책이기도 했다.
맨 처음 중국 정부가 미국에 유학생을 보내는 정책을 수립한 목적은 “초재진육楚材晉育”(춘추전국시대 낙후된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화법」이 활성화되던 1882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중국 유학생은 감히 미국에 남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법안이 폐지된 후, 특히 1965년 매년 2만 명의 이민이 허용되면서부터 비로소 유학생에게 ‘배움이 뛰어나면 남을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해졌다. 결국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교육시키는 “초재진육”은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등용하는 “초재진용楚材晉用”의 수단이 되었고, 인재 유출 현상의 단초를 제공했다.
지나친 ‘서양화’는 늘 골칫거리였다. 룽훙이 데리고 간 120명의 어린 유학생은 1872년부터 187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공부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15년간 투자하여 중등 교육부터 기초를 다진 뒤 군대·선박 분야의 인재로 육성할 계획이었으나 1881년 여름, 10년도 못 채우고 모든 유학생을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그 까닭은 이들이 지나치게 서양화되어 학업을 완수해도 중국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서양화는 곧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당시의 유학이 사회적 투자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학생들이 과도하게 서양화되었다는 지적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다. 즉 개인 차원을 넘어 국가와 사회 전체와 관련된 사안이므로 사회적 자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득실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 젊은 유학생이 전반적으로 유학 교육에 대해 비판한 바 있었다. 후스胡適는 1910년 2차 경관 국비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1913년 초 그는 「비유학편非留學篇」을 발표해 “유학을 간다는 것은 나라의 큰 수치다留學者, 吾國之大恥也”라며 비판했다. 중국은 낙후되었으니 유학생을 태평양 너머로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배워 우리의 부족함을 메워야 하지만 “유학 정책은 유학을 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이 목표가 없으면 유학 정책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게 후스의 입장이었다.
후스가 유학하던 무렵은 중국이 유학생을 파견한 지 40여 년이 흐른 시점인데 어째서 일본과 달리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해 후스는 “정부의 잘못된 교육 방침과 유학생의 잘못”을 지적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국내 교육을 장려하기보다 그저 유학 보내는 데 중점을 둠으로써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비판했고, 유학생에 대해서는 취득한 학위를 생계 수단으로 삼은 것, 산업만 중시하고 인문학을 경시한 것, 근본을 무시한 것 등을 비판했다.
유학생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을 지적했다. 1) 자존심이 없다. 다른 나라의 물질문명에 취해 우리 전통을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2) 문명은 수입할 수 없다 중국 문자는 문명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돛帆과 타舵, 삿대篙와 노櫓 등 차이를 모르면 가르칠 수 없고 책도 쓸 수 없다. 유학생들이 설사 천하에 없는 지식을 익혔다 한들 한자를 모르고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후스는 많은 결점을 안고 있으나 유학 자체를 폐지할 수는 없으니 개혁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중국을 ‘잠자는 사자’로 비유했으나 후스는 ‘잠자는 미인’에 빗대어 입맞춤으로 잠자는 미인을 깨어나게 한 왕자는 바로 현대 서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을 신중하게 선발하고, 국내 고등교육 기관의 증설’이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때 이후로 후스는 생각이 바뀌어 더 이상 「비유학편」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누군가 중국을 ‘고대 문화가 발달한 나라’ ‘문학의 우아함, 역사적 영광, 민족의 돈후함’ 등으로 표현하면 그는 오히려 ‘과대망상’ ‘미몽’ ‘반동’이라며 비웃곤 했다. 후스는 유학의 목표는 훗날 유학할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여러 회의 자리에서 지속적인 유학생 파견을 주장했다. 그 자신 귀국 이후 엘리트주의에 매몰되어 교육의 질을 높이려면 인력, 재력, 에너지를 고급 학부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에 선 것이다.
후스가 「비유학편」을 쓰던 1913년은 룽훙의 어린 유학생들이 소환되던 1881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시기다. 그러나 룽훙의 어린 유학생에 대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본래의 모습을 잃었고 커다란 성과도 없었다’는 비판과 ‘현재 유학생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근본을 무시한 것’이라는 후스의 지적을 비교해볼 때, 세월의 편차에도 유학생에 대한 비판의 축은 달라지지 않았다. 30년 세월의 간극을 지우는 비판의 결론은 결국 자신이 중국인임을 잊을 만큼 서양화됐다는 사실이다. 후스는 사상적으로 성숙해진 이후 ‘비非’유학을 말하지 않고 유학이 중국의 엘리트 교육 발전과 연구의 지름길임을 강조했다.
룽훙부터 지금까지 150년간 여론과 (미국을 포함한) 학계에서는 유학 교육에 대해 비판적 태도가 우세했다. 후스의 「비유학편」 외침은 마치 드넓은 벌판에서 부는 호각소리가 흩어지는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가 1920년대 이후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모두 서양화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좌파와 우파,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중국에서 교육 받은 자와 귀국 유학생을 막론하고 서양화된 유학 교육이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하나같이 비판했으며 유학 자체를 폄하하기도 했다. 이는 서양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비판은 세 방향으로 모아졌다. 첫 번째는 맹목적 답습으로, 유학생들은 서양의 꽃을 가져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중국 나무에 이식했다는 비판이다. 두 번째는 그들이 배운 것은 모두 이론뿐으로 이론에 상응하는 응용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유학생들이 지나치게 서양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1920년대 학계에서도 유학생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수신청舒新城의 『근대중국유학사』는 시간적으로 룽훙의 어린 유학생부터 1920년대 중기까지, 공간적으로 일본부터 유럽까지 유학의 전체 과정(국비, 자비, 경관과 그 이후 칭화대학 유학생 및 기독교 학교 유학생)을 조명했다. 수신청의 비판은 정부의 실책, 즉 청조 말부터 일관되지 않은 유학 정책과 통일된 집행기구의 부재, 느슨한 선발 시험 등에 집중되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자비 유학생에 대한 자격 제한이 지나치게 느슨해 기본 테스트조차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정부가 사회 자원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출세만 바라는 허영심”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칭화대학 졸업생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었으나 돌아온 성과가 너무 적어 ‘경제적’으로도 실패했다고 보았다. 칭화대학 출신 유학생들은 국내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 ‘중국인도 서양인도 아닌不中不西’ 존재가 많았다. 수신청은 “유학 교육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면서도 스스로 이 비판이 “지나치게 격렬”하여 “유학생들이 이룬 공헌을 지워버리는” 면도 있다고 한 반면, 왕이쥐의 비판은 수신청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그는 근대 중국의 유학 정책은 정치·사회·경제·문화 모든 방면에서 악몽이자 비극이었다고 했다.
왕이쥐의 연구는 유학생을 겨냥한 잘 조사 정리된 기소장과 같았다. 그는 몇몇 특별한 인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학생에 대해 난감함에 가까운 평가를 내렸다. 안하무인으로 교만하며, 지나치게 서양화되어 중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서양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지식은 실질적이지 못해서 중국 사회의 요구에 들어맞지 않았고, 쉽게 출세하려는 야심으로 오직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할 뿐 사회적으로 갖춰야 할 도덕의식과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학생들이 야구를 하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교회를 다니는 등 지나치게 미국 문화에 젖어들게 방치하여 감독 교사를 무시하는 일은 둘째 치고 중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초창기 유학생들은 학업 성적도 좋지 않아서 본국으로 소환될 무렵 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단 2명뿐이고, 10명 미만이 갓 대학에 입학한 상태며 나머지는 아직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고 했다. 1854~1954년까지 100년 동안 대략 미국에서 유학한 중국인 학생은 2만2000명이었는데 50~60퍼센트만이 학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중국 학계에서는 근대 미국 유학에 대해 이전과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내놓았다. 대표적인 연구는 리시쒀李喜所의 『근대 중국의 유학생近代中國的留學生』(1987), 쑨스웨孫石月의 『중국 근대 여성유학사中國近代女子留學史』(1995)다. 개혁개방의 물결에 따라 미국 유학생에 대해서도 서양 제국주의의 문화 매판이라는 정치 선전 형태의 평가를 거둬들이고 대신 중국 근대화의 애국적 선구자로 칭송했다. 물론 그들이 서양 문화를 숭배하거나 군벌과 반동세력에 부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열심히 공부해서 곤경에 처한 중국의 출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 세 편의 연구로 이어졌다. 2001년 예웨이리葉維麗가 출간한 『중국을 위한 현대적 길찾기: 미국 내 중국 유학생들 1900~1927』, 2004년 스테이시 비엘러의 『애국자인가 반역자인가?: 미국의 중국 유학사』, 1999년 한예룽의 박사논문 「세계 일부로서의 중국: 1920년대 미국의 경관자금 반환이 중국 학술기관 설립에 미친 영향」이다. 그러나 이 연구들 역시 ‘애국자와 매판’ 또는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
가장 의미 있는 작업은 타이완 학자 쑤윈펑蘇雲峰이 1996년에 출간한 『칭화학당에서 칭화대학까지 1911~1929』라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그는 1981년 출간한 『칭화대학사고淸華大學史稿』가 칭화대학을 ‘노예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했다면서 재조명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초기에 칭화대학은 외교부 관할이었는데 미국 공사의 간섭을 받는 등 국격 손상에 해당하는 일이 있었으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귀국 유학생 출신이 교육부보다 외교부에는 더 많아서 안정적인 편이었다고 평가했다. 적어도 그들은 현대 지식인이었고 이념적으로 미국과 근접하여 비교적 소통이 원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칭화대학은 미국 문화와 사회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영어 교육을 중시하고 중국어 교육을 소홀히 했으나 얼마 후 이를 개진하여 융합을 꾀했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칭화대학이 충분한 재원을 바탕으로 미국식 하드웨어를 갖추고 교수와 엘리트 학생들에게 건강하고 활발한 캠퍼스 생활을 제공했다. 졸업생들은 미국 여러 대학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차별받는 환경에서도 강렬한 애국심으로 ‘변방의 지식인周邊知識人’으로서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개명한 입장에서 중국 문화와 사회에 합리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창조적인 공헌을 발휘했음을 통계 수치로 소개했다.
수신청과 왕이쥐가 비판한 근대 중국의 유학 교육 문제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로 종합된다. 첫째는 자원 분배의 불균등이다. 즉 근대 중국은 전체적으로 교육 자원을 균형 있게 분배하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고등 교육을 중시하고 초등 교육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한 예로 1931년 당시 중국은 대학생 한 명당 초등학생 한 명의 200배에 달하는 교육비를 지출했다. 같은 시기 유럽 국가의 비율은 1대 8 정도였다. 이러한 불균등한 구조보다 더 기형적인 것은 대학들이 상하이, 베이징, 난징, 광저우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1922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30퍼센트의 대학과 41퍼센트의 대학생이 모두 베이징에 있었고, 1932년의 다른 통계에서는 상하이의 대학생이 전국 대학생의 2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연해에 위치한 몇몇 도시에 대학이 집중된 현상은 유학생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1925년의 통계에 따르면 귀국 유학생 584명 중 34퍼센트, 1937년의 다른 통계에 따르면 귀국 유학생 1152명 중 28퍼센트가 상하이에 머물렀다. 게다가 교육비용이 갈수록 비싸지면서 농민과 빈민 계층은 교육의 기회로부터 멀어졌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졌고 내륙 지역의 개발이 더딘 곳일수록 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간혹 농촌에 사는 극소수 학생이 간신히 도시에 와서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에 정착했다.
쑤윈펑은 교육 자원의 분배와 정치·사회적 영향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칭화대학을 설립한 목적은 지역 간 불균형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한 지역 간 형평성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장쑤·저장·푸젠·광둥 연해 성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쑤윈펑은 학생들의 출신 환경과 관련해 56퍼센트의 학생 배경을 조사해 “지주, 관료, 자산계층 출신이 44퍼센트”에 달한다는 결과를 확인함으로써 근대 중국 교육 자원의 분배가 균등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런 자원 분배의 불균등을 당시의 사회현상으로 해석하면서도 수신청·왕이쥐가 제시한 불균등이 근대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수신청·왕이쥐가 제기한 두 번째 비판은 유학생들이 전공한 학문의 활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본 그들은 많은 통계자료를 검토한 결과 정부가 유학 정책을 수립하지 않았거나 실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선발과 관리와 관련된 문제였다.
정책을 수립하지 않았거나 지켜지지 않은 결과 학생들의 전공은 사회적 수요와 거리가 있었고 귀국 후에 자신의 전공을 활용할 수 없었다. 1925년 조사에 따르면 34.5퍼센트에 달하는 귀국 유학생이 전공을 활용하지 못해 실업자나 가정주부가 되었다고 했다. 왕이쥐의 조사 결과 귀국 유학생들의 사회 진출은 정계와 학계에 집중되었는데 1917~1934년에는 32~40퍼센트가 교육계에서, 16~42퍼센트가 정계에서 직업을 구하고 있다. 문제는 두 분야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유학생들이 귀국 후 자기의 전공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교육계로 진출한 이들은 주로 인문학과 농업 전공자였다. 이과 전공자는 연구할 기회를 얻지 못해 학교 밖에서 길을 찾아야 했는데 소수는 정계에 진출했지만 역시 연구나 기술직이 아닌 사무직이었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농학 전공자로, 1925년 통계에서는 70퍼센트가 교육계에서 일하고 일부가 정계로 진출했을 뿐 농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무했다. 경제계나 금융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전공과 무관한 일을 했다.
경제 및 공학 전공자도 자신이 배운 바를 활용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첫째, 상경대를 졸업한 유학생은 대부분 은행에 근무했으며 창업자는 없었다. 둘째, 564명의 경제계 인사 중 10명만 귀국 유학생 출신이며 그중 9명이 은행에 근무했다. 셋째, 40명의 공업계 인사 중 30명은 엔지니어이고 18명이 귀국 유학생이었는데, 유학생들은 전공과 무관하게 국영 기업의 관료로 일했다.
이런 결과는 단순히 교육 투자의 차원을 떠나 깊은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유학 출신들이 전공을 활용하지 못한 데는 그들이 남에게 굽힐 줄 몰랐다거나 농촌으로 가기를 꺼려했다는 심리적 요인 외에도 중국 사회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만한 응용지식이 부족하거나 불가능했거나 원하지 않았다는 요인이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학계에 남든 정계에 뛰어들든 ‘배움이 뛰어나면 관직에 나간다’는 전통 가치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1930년대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유학생의 태도도 변했고 학문적 수준도 향상되었으나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수신청·왕이쥐의 세 번째 비판은 “미국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왕이쥐는 룽훙을 비롯한 많은 유학생은 미국인이 되고 싶어 했을 뿐이라고 평했다. 그 예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귀화 경향도 높은 점을 들었는데, 어린 유학생 중 8명이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중 4명이 미국인이 되었다. 학위를 얻지 못한 100여 명 중에서는 단 한 명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미국인으로 귀화하는 경향은 계속 이어져 1937년 출간된 『칭화동창회록淸華同學錄』에는 21명의 졸업생이 이미 14년 이상 미국에 장기 거주하고 있었다.
왕이쥐는 선발 과정을 거쳐 출국한 유학생들이 엄격한 이민법 심사에 통과해 미국에 남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 이들이 미국에 남는다는 것은 유학 정책에 대한 투자를 회수하지 못하는 것이자 가장 우수한 인재를 잃는다는 점에서 두 배의 손실이었다. 귀화는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유학은 가족 전통과 관계되어 있다. 부친이 유학하면 아들도 유학을 간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중국 문화에 대한 소속감은 멀어지고 3대째가 되면 귀화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린다.”
중국 학생들의 미국 유학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서 사회적으로 유학 교육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수신청부터 왕이쥐까지 근대 중국의 유학 교육은 단지 교육사의 주제를 넘어 중국 근대사 전체 맥락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중국 근대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적 맥락에서 미국 유학 교육이라는 문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유학한 중국 학생에 관한 연구에서 수신청·왕이쥐의 비판을 진지하고도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번안사학자들처럼 ‘애국-매판’ 또는 ‘전통-현대성’이라는 이원대립의 사고 틀에 갇히고 만다. 우리는 반드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즉 21세기의 시각으로 21세기의 문제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21세기의 언어와 개념으로 분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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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 2 – 동아시아 편
도서정보 : 괴담실록 | 2023-09-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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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괴담실록’이 들려주는
더 으스스하고 괴이하며 기묘한 이야기
한때 ‘빨간 마스크를 한 여자’에 대한 괴담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빨간 마스크를 한 여자가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 질문을 던지고 해코지한다고 알려져, 실제 등교 거부 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괴담으로 유명하다. 이 괴담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에 엄청나게 퍼졌고,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이다.
공포와 두려움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감정이라는 말이 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은 ‘이야기’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기록에서 기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튜브 채널 ‘괴담실록’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대표적인 채널로, 조선시대 괴담을 담은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에 이어 한·중·일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괴담을 엮은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 2》를 출간하였다.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 2》는 한·중·일을 넘나드는 동아시아의 이야기로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옛사람들의 괴이한 이야기를 접하고, 은유와 암시에 가려진 그들의 두려움을 엿보며 상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중·일의 정서를 담은 괴담에 ‘괴담실록’만의 해석을 녹여 더욱 흥미롭게 엮었기에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를 단지 괴담이 아닌 옛사람들의 미지에 대한 고군분투이자 때론 희망과 지혜를 얻기 위한 유산으로 받아들인다면 더욱 매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15,400 원
이중톈 중국사 16-안사의 난
도서정보 : 이중톈 | 2023-09-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낮에는 안녹산과 황소가 칼날을 세우고
밤에는 이백과 두보가 노래를 읊은
피와 시의 시대
“초겨울에 열 고을 양갓집 자제들
죽은 피가 진도 못 속 물을 이뤘네
휑한 들판 맑은 하늘 싸우는 소리도 없는데
사만의 의로운 군사가 같은 날 죽었네”
중국 최고의 고전 해설가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16권. 이번 권에서 이중톈은 당나라 멸망의 진실을 파헤친다. 안사의 난은 한때 세계제국으로 군림했던 당나라가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시발점이다. 이민족 출신의 변방 장수였던 안녹산은 어떻게 이 거대한 제국에 균열을 냈고, 이 균열은 왜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이어졌을까? 당나라의 멸망은 양귀비의 뛰어난 미모 때문도, 환관의 폐해나 조정의 붕당, 군벌의 배신, 이민족의 침략 때문도 아니었다. 당나라는 스스로 무너졌다! 무덤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 것은 안녹산이었고 무덤을 판 것은 황소였지만 그 길을 걷고 관에 직접 못질을 한 것은 당나라 제국 자신이었다.
당 현종과 양귀비, 안녹산과 황소, 이백과 두보 등 당나라의 흥망을 함께한 다양한 인물 군상과 당나라를 둘러싸고 격동했던 세계정세가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당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황하만큼이나 길고 굽이진 중국사의 줄기를 경쾌하고 유려한 필치로 써내려온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16권. 이번 권에서는 당나라 몰락의 전초가 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한때 세계제국의 위용을 떨쳤던 당나라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걸었는지 서술한다. 이중톈이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써내려간 당나라 멸망사에는 황제와 재상, 환관, 신하, 장수, 비빈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이 중에는 당 현종과 양귀비 그리고 안사의 난의 주인공 안녹산처럼 역사에 이름을 새긴 쟁쟁한 인물도 있으며,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당나라가 한 발자국씩 차근차근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때에도 이 나라에는 명군과 훌륭한 재상, 어진 신하, 뛰어난 장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안사의 난 당시 재위에 있었던 당 현종은 무측천이 한 차례 흔들었던 당나라를 다시 굳건하게 다진 명군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명철했을 뿐 아니라 요숭과 송경 같은 명재상을 적재적시에 등용해 당나라의 재부흥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당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 사람을 후보로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을 때는 명군이었으나 집권 말기에 양귀비의 미모에 미혹되고 간신 이임보에게 놀아난 당 현종이 첫째 순위고, 그런 당 현종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군벌들의 난립을 조장한 이임보 또한 혐의를 비껴갈 수 없다. 안녹산은 당 현종 앞에서는 충성을 맹세하고 뒤로 돌아서는 칼을 꽂아 제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환관 구사량 등은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몰두해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지방의 군벌 이희열 등은 곳곳에서 제국에 반기를 들며 일어나 칭왕, 칭제하면서 당나라를 너덜너덜하게 찢어놓았고, 조정 신하 이덕유 등은 자기들끼리 패거리 짓기에 몰두하면서 나라의 힘을 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아랍 제국의 아바스 왕조는 당나라의 세력권을 침범해 들어오며 그 세계제국으로서의 위신을 크게 꺾었고, 마지막으로 황소는 이미 껍데기만 남은 당나라에 마지막 치명타를 날렸다.
다시 한번 묻자면, 그렇다면 누가 망국의 주범인가. 이중톈은 단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중톈이 분명히 하는 점은 당나라가 스스로 몰락했다는 것이다. 지리멸렬한 내분이 지속되는 가운데 당나라의 유수한 인재들은 허송세월하며 국력을 낭비했고, 분쟁에 휘말린 백성만이 도탄에 빠진 채 고통을 겪었다. 그 결과 “허약하고 쇠락한 왕조는 심지어 자기 무덤을 팔 힘도 없었고 외래 세력에 의지해 관뚜껑을 닫아야 했다”(192쪽).
당나라의 성쇠를 함께한
찬란한 문학사의 별―이백과 두보
‘당시(唐詩)’는 ‘당사(唐史)’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중톈은 당나라의 시로 당나라 역사 서술의 마침표를 찍는다. 당나라에서 시(詩)는 유독 비범한 의미를 가졌고, 시를 읊고 노래하는 것이 당나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이자 최신 유행, 아이덴티티였다. 당나라에서는 사대부 등 상류계급은 물론 저잣거리의 사람들, 화류계 여성까지 참여해 모두 시를 읊고, 듣고, 즐겼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아직까지도 한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두 인물 시성(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백은 구속받지 않는 당나라의 시대정신 그 자체였으며, 두보는 당나라가 가장하는 태평성대 아래 움트던 부패와 고통을 꿰뚫어본 시인 겸 역사가였다. 그래서 이백의 시는 유독 드높고 호방하며 즉흥적이고 자유로우며, 두보의 시에는 연민과 슬픔, 휴머니즘의 정서가 배어 있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 이후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위대했던 당나라의 기상은 이백과 두보 이외에도 왕유, 잠삼, 두목, 이상은 등 위대한 시인을 배출했으며 이들 모두의 시는 이백과 두보의 시가 그러했듯 그 자체로 당나라의 정신 혹은 역사가 되었다. 당나라는 쇠하여 사라졌으나 이들의 시는 여전히 별처럼 빛나며 그 시대를 전한다.
구매가격 : 12,600 원
사상사로 본 중국 왕조사
도서정보 : 이동연 | 2023-07-1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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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왕조의 특징은 정치와 사상이 같이 간다는 것!
그 어떤 소설보다 역동적이라 알면 알수록 묘미가 새로운 책!
《사상사思想史로 본 중국왕조사中國王朝史》는 다양한 분야에서 융합형 글쓰기를 천착해 온 이동연 작가가 2년간의 집필 끝에 완성한 노작勞作이다. 제목에서 보듯 중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조망해 본다. 특히 중국, 중국의 사상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또 그 저변에는 어떤 흐름이 있는지 살펴본다.
저자는 “공자와 노자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창시할 때 무엇을 근거로 했을까. 5,000년 전 중원의 황토 고원을 근거지로 활동한 삼황오제였다. 삼황오제의 선두에 ‘복희와 여와’가 있다. 그중 복희의 ‘음陰(--) 양陽(—)’론이 바로 동양 문화의 뿌리다. 이 뿌리에서 싹이 나며 춘추시대 초기, 즉 주나라의 문왕이 《주역》을 집대성했다. 이런 흐름을 타고 춘추 말기에 노자와 공자를 필두로 제자백가가 나왔다. 고대 사회에서 중국 왕조의 정치는 물론 사상까지 특히 동아시아에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중국 왕조의 특징은 정치와 사상이 같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도 왕의 승계를 도통道統의 계승이라 보고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이라 했다”고 말한다.
구매가격 : 20,000 원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도서정보 :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저/조성우 역 | 2023-07-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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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내려진 시대
후한 제국이 무너지자 중국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이 분열은 동시에 중국 문화권의 확장과 다양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 분열기의 중국』에서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교수(미 스탠포드대)는 특유의 박람강기를 동원하여 그 복잡한 변화상을 그려낸다.
한과 당 사이 4백여 년 동안 중국은 지리적 정의가 바뀌었고, 외부 세계와 한층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가족의 모습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고, 문학 및 사회 영역에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였다. 새로 개발된 양자강 유역은 쌀 생산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문학은 조정과 수도를 벗어나 원림, 사찰, 전원 별장 등 새롭게 등장하는 사교 공간과 지역 문화를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자기인식이 분명한 상류층 가문이 성장하자 물질적 부로 규정되는 전통적인 한 대 호족과는 다른 지배층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후한을 무너뜨린 종교 반란 뒤에 새롭게 나타난 도교와 불교는 국가, 경제, 친족을 포함한 삶의 모든 측면에 변화를 불러 왔다.
수 왕조가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자 황제의 권력은 보다 강고해졌고 지배층은 제국의 질서에 귀속되었다. 이제 중국인들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일부가 되어 공통의 불교 신앙을 가진 국가들과 물질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교류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과 당 사이의 수 세기는 중국에 깊고 영원한 자취를 남겼다.
구매가격 : 21,000 원
하버드 중국사 당
도서정보 :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저, 김한신 역 | 2023-07-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중국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기,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기
중국 역사의 “황금기”로 불리는 당 제국은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개방적으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였던 기간이었으며, 동시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 동아시아문명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범지구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미 스탠포드대 교수)는 이 책에서 중국이 ‘중원지역’을 벗어나 지리적 확장을 이루었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페르시아만 여러 나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역동적인 당대라는 시기를 쉽고도 풍부하게 담아낸다. 당대 사람들은 바다와 육지에서 광범위하게 무역에 종사했다. 내륙 아시아로부터 온 상인들이 장안과 낙양에 거주하였고, 모험적인 상인들은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이는 곧 범지구적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번영과 평화는 곧 종지부를 찍었다. 756년 절도사 안녹산의 반란은 당 제국을 그 뿌리까지 흔들었고 그 후 재건된 당 왕조는 이전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후대 동아시아인들에게 찬란한 영광의 시기로 기억되는 당대의 전반기보다 쇠락해가는 당의 후반기에 주목한다. 그 역사적 단절이 중국 역사 궤도에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구학계의 방대한 학술성과를 집대성하고 특유의 박람강기를 동원하여 지리, 정치, 도시생활, 농촌 사회, 외부 세계, 친족, 종교, 문학과 예술에 걸쳐 난숙하였던 당대 문명이 정치적 위기를 통해 한계에 직면한 뒤에 새롭고 보다 업그레이드된 문명으로 탈피하는 과정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구매가격 : 21,000 원
하버드 중국사 진·한
도서정보 :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저/김우영 역 | 2023-07-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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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2천년 동안 이어질 고대 제국의 질서가 창조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원전 221년 진의 시황제는 장차 중화제국의 심장부를 이루게 되는 영토를 통일했다. 정복을 통해 하나가 된 이 광대한 영토가 정치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중국 문화의 철저한 재형성이 불가피했다. 『하버드 중국사 진·한, 최초의 중화제국』은 향후 2천년 동안 이어질 고대 제국의 질서가 창조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진과 한 제국은 중국사의 ‘고전기’를 이루는데, 이는 그리스-로마가 서양에서 맡은 역할과 유사하다.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미 스탠포드대 교수)는 지리적으로 방대하기 이를 데 없고 문화적으로 다양하기 짝이 없는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은 조정의 관리들과 당대 학자들이 직면했던 핵심과제가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한다.
저자는 중국의 동서남북에 걸친 엄청난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면서도 지역성을 유지하기 위해 취해진 강력한 조치와 그 파급효과, 즉 국가의 신성한 구현체인 황제라는 인물상의 발명, 문자의 통일 및 유교적 이상의 보급을 위한 국가 공인 경전의 확립, 재산과 토지, 정교한 친족구조를 바탕으로 지방을 지배한 유력 가문들의 흥성, 제국 내부의 비무장화, 유목인 전사들이 중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본다.
21세기의 화두인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하버드대의 특별기획으로 티모시 브룩(UBC대 교수)이 책임 편집을 맡은 여섯 권짜리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한국어판이 『하버드 중국사 진·한, 최초의 중화제국』의 출간으로 완간되었다. 기원전 3세기, 진 제국의 통일 이래 20세기 초에 청조가 무너지기까지 면면히 이어진 중화제국의 역사를 추적하는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는 중국이라는 제국의 장구한 역사를 형성해왔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많은 요인을 새롭게 조명하여 호평을 받아 왔다.
구매가격 : 21,000 원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도서정보 :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저/조성우 역 | 2023-07-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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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내려진 시대
후한 제국이 무너지자 중국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이 분열은 동시에 중국 문화권의 확장과 다양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 분열기의 중국』에서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교수(미 스탠포드대)는 특유의 박람강기를 동원하여 그 복잡한 변화상을 그려낸다.
한과 당 사이 4백여 년 동안 중국은 지리적 정의가 바뀌었고, 외부 세계와 한층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가족의 모습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고, 문학 및 사회 영역에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였다. 새로 개발된 양자강 유역은 쌀 생산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문학은 조정과 수도를 벗어나 원림, 사찰, 전원 별장 등 새롭게 등장하는 사교 공간과 지역 문화를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자기인식이 분명한 상류층 가문이 성장하자 물질적 부로 규정되는 전통적인 한 대 호족과는 다른 지배층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후한을 무너뜨린 종교 반란 뒤에 새롭게 나타난 도교와 불교는 국가, 경제, 친족을 포함한 삶의 모든 측면에 변화를 불러 왔다.
수 왕조가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자 황제의 권력은 보다 강고해졌고 지배층은 제국의 질서에 귀속되었다. 이제 중국인들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일부가 되어 공통의 불교 신앙을 가진 국가들과 물질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교류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과 당 사이의 수 세기는 중국에 깊고 영원한 자취를 남겼다.
구매가격 : 21,000 원
하버드 중국사 당
도서정보 :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저, 김한신 역 | 2023-07-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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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기,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기
중국 역사의 “황금기”로 불리는 당 제국은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개방적으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였던 기간이었으며, 동시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 동아시아문명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범지구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미 스탠포드대 교수)는 이 책에서 중국이 ‘중원지역’을 벗어나 지리적 확장을 이루었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페르시아만 여러 나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역동적인 당대라는 시기를 쉽고도 풍부하게 담아낸다. 당대 사람들은 바다와 육지에서 광범위하게 무역에 종사했다. 내륙 아시아로부터 온 상인들이 장안과 낙양에 거주하였고, 모험적인 상인들은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이는 곧 범지구적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번영과 평화는 곧 종지부를 찍었다. 756년 절도사 안녹산의 반란은 당 제국을 그 뿌리까지 흔들었고 그 후 재건된 당 왕조는 이전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후대 동아시아인들에게 찬란한 영광의 시기로 기억되는 당대의 전반기보다 쇠락해가는 당의 후반기에 주목한다. 그 역사적 단절이 중국 역사 궤도에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구학계의 방대한 학술성과를 집대성하고 특유의 박람강기를 동원하여 지리, 정치, 도시생활, 농촌 사회, 외부 세계, 친족, 종교, 문학과 예술에 걸쳐 난숙하였던 당대 문명이 정치적 위기를 통해 한계에 직면한 뒤에 새롭고 보다 업그레이드된 문명으로 탈피하는 과정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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