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의 길 상

도서정보 : 김광재 도진순 윤은자 이종수 이혜린 | 2019-08-2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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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중국 대륙에 퍼진 김구의 굳센 기개
오직 독립만을 위한 임시정부의 험난한 노정




201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가 생생하게 전하는 임시정부의 항일 루트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혹독한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만큼은 명확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몸으로 임시정부와 동지들의 안전을 살피고, 한국광복군 창설과 통합 정부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구와 독립을 꿈꾸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선열들의 행적을 좇았다. 일본군의 공습과 폭격으로 천신만고의 피란길을 헤쳐 나간 임시정부 대가족들의 행로를 찾아내어 그대로 체험코자 했다.
-「발간사」 에서







◎ 도서 소개

2019년 6월 26일 김구 서거 70주기
길고 험난했던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한·중 역사 전문가가 꼼꼼하게 되밟다

1919년 3일 1일. 전국에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퍼져 나간 이후,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하와이로 투쟁의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굳센 항일 정신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함께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해외 독립 투쟁 여정은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한커우, 창사, 광저우, 우저우, 구이핑, 류저우, 이산, 우산, 구이양, 치장, 충칭을 거쳐 시안으로,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펼친 정치·외교 활동과 일제의 공습을 피해 최대한 몸을 숨기며 생활을 했던 고난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 11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리고 가족들의 발자취를 샅샅이 더듬어 그들이 걸어간 항일 노정을 되밟았다. 그 길은 비록 꽃길이기보다는 진창길이었지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 가족들의 항일 정신과 독립을 향한 투지는 한결같이 드높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상권에서는 상하이에서 전장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치 활동과 피난 생활의 흔적을 따라가며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고 변했으며 또 사라졌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수많은 자료와 회고록, 여러 전문가·관계자·현지인 인터뷰를 통해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묻혔던 것은 들춰내고, 새로운 것은 보태”며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을 기리려 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
상하이에서 시작해 난징에서 새 국면을 맞이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상권은 상하이,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 전장에 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의 흔적을 되밟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처음엔 교민단 사무소를 빌려 쓰다가 1919년 8월 초 샤페이로 321호로 이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자리 잡은 상하이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고인에 대한 장례를 치르며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고취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구는 상하이 거주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들을 상하이에 불러들였는데, 가족과의 화목한 시절도 잠시, 김구의 부인인 최준례를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마랑로 푸칭리 4호로 청사를 이전한다. 이때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 자리에 오르지만 경제적으로는 극히 곤궁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의 도맡아 일제 처단을 위한 작전을 감행한다.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을 일본으로 파견하고, 최홍식, 유상근을 다롄으로 파견하는 등 필사적으로 의거를 추진한다. 일본 헌병이 한인 거주지를 포위하고 한인들의 출입을 경계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근거지였던 만큼 일본총영사관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압박했다. 김구를 체포하고자 하는 계획도 여러 차례 실행되었지만 실패하고, 결국 김구에게 60만 원이 현상금이 걸리는 등 위태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는 삼엄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의거는 한인 독립의지를 선양하면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열강에 충격을 주는 효과를 낳았다. 중국인들은 한인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고, 중국국민당도 한인의 항일 활동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난징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렇듯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 투쟁은 중국국민당과 중국 국민들의 지지와 기대를 얻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한국인들의 굽힐 줄 모르는 독립 의지에 공감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미국인 가족도 있었다. 이러한 국제연대의 역사를 피치 목사와 추푸청 가족과의 일화를 통해 자세하게 다루었다.

최초로 밝히는 김구의 상하이 탈출 루트
지도로 본 상하이와 난징의 활동 장소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 상권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활과 활동상에 대해 자세히 싣고 있다. 김구가 상하이에 입성할 때 이용한 부두가 어디였는지, 상하이 우정총국과 요코하마쇼킨은행이 독립 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흥미롭게 추적한다. 또한 상하이병공창 창장으로 지내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쑹스뱌오와 김구를 비록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몸을 숨겨 주고 자싱으로의 피난을 도운 피치 부부를 조명함으로써 독립 거사의 실행에 한 사람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1932년 5월 중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를 탈출해 자싱으로 향했던 탈출 루트를 소개해 당시의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한다. 또한 난징에 남아 있는 김구와 관련된 사적 위치를 지도로 보여 줌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징에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는 기획에서 출간까지 꼬박 2년이 걸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한국과 중국의 학자와 전문가 11명이 권역별로 답사를 하고, 연구하고, 취재했으며,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서로 내용을 체크하여 오류가 없도록 하는 데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애쓴 흔적들을 꼼꼼히 담아 독자들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찾아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기획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조직된 ‘고 백범김구선생국민장위원회’의 위원장 오세창, 부위원장 김규식, 조완구, 이범석, 김창숙, 조소앙, 최동오, 명제세 등의 위원을 중심으로 1949년 8월 6일에 창립한 협회이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전시와 교육, 역사 자료 수집과 편찬 등 의미 있는 기획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 책 속에서

1922년 김구는 국내의 가족들을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김구로서는 상하이 생활이 그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운동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920년 1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이핀샹에서 신년축하회를 할 때만 해도 다음 해의 신년축하회는 서울에서 열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낙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1921년 기대를 걸었던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않으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열기는 빠르게 식어 갔다. 김구도 이 점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결국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생활이 안정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이 곁에 있어야 했다.

상하이(1)-마랑로 임시정부청사 pp. 51-52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김구는 무엇보다도 안중근의 아들로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처벌하고자 하였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명예를 더럽힌 안준생의 행위는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안준생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도 상하이에 잔류하였다. 1939년 10월 상하이 한인들의 ‘만선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에 들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함으로써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된 바 있었다. 그때 중국 대륙을 전전하다 막 충칭에 도착한 김구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연출된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 아들의 ‘화해극’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안중근의 정신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김구는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았다.

상하이(1)-카이쯔얼로 경무국 p. 104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에 대해서도 일본총영사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거 당일 상하이총영사는 육군·해군 등과 협의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 검거를 프랑스 측에 요구”하기로 하였고, 밤 8~9시경에 일본 헌병 사복대 등 수백 명은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한인의 출입을 경계하였다. 다음 날인 30일 오전 4시 영사관의 아카키 사무관 지휘하에 70명에 이르는 검거반을 출동시켜, 오전 5시 프랑스 공무국 경찰대와 현지에서 회동하여 한국인들을 검거하게 하였다. 이후 프랑스 조계의 한인 사회는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암흑천지로 변하였고, 결국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1 1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물론 김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5월 2일 상하이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에 의하면, 헌병대장과 협의하여 “경찰 20명, 헌병 10명, 총 30명의 체포대”를 조직하여 김구 체포 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김구 체포를 위해 헌병대 100명을 대기시켰고 박춘산이라는 첩자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체포에 일화 2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다시 일본외무성과 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군사령부 등과 합동으로 6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상하이(2)-황푸 강변, 일본총영사관, 애스터호텔, 부두 pp. 121-122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로 위축되었다. 1926년 12월 김구가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령이 되었고,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골몰하면서 열혈 청년에 의한 의열 투쟁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금이 필요했다. 이에 김구가 채택한 것은 해외 동포들에게 편지로 후원을 요청하는 이른바 ‘편지정책’이었다. 그 결과로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답지하였는데, 김구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백범일지』에는 후원자 30여 명의 실명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자금은 대부분 우편환으로 송금한 것이었으니,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상하이에 답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적 우편 체제 덕분이었다. 해외 동포들의 후원금이 머나먼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상하이우정총국이었다. 당시 우정총국은 공공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후원금을 수령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구가 직접 수령할 수는 없었고, 대리인을 파견하여 찾아야 했다. 임시정부 초기에는 피치 목사가 수령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한 사실도 있다. 이 상하이우정총국을 통해 들어온 자금으로 김구는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기획하여 성사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도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상하이(2)-상하이우정총국과 쇼킨은행 pp. 142-143



1925년 쑹스뱌오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국민당 정부의 병공兵工관계 일에 참여하였다. 특히 1932년 1월 28일 상하이사변 직후, 그는 상하이병공창장으로서 반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의 휘하에 있는 병기주임 왕웅(김홍일)은 19로군 차이팅카이 부대의 후방 정보국장도 맡고 있어서 일본군 동향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일본총영사관과 가까운 쑤저우허와 황푸강 합수지점에 일본 해군의 기함인 이즈모호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매일 오전 11시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군 대장과 고급장교들이 선상 회의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쑹스뱌오와 왕웅은 폐기된 수뢰 껍데기를 부뢰로 개조하여 2월 12일 잠수부를 통해 이즈모호를 폭파시키고자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쑹스뱌오와 왕웅은 이처럼 반일 연대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쑹스뱌오의 상하이병공창은 이봉창 의거에도 수류탄을 제공하였고, 윤봉길 의거에는 20여 차례 시험을 하며 정성껏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만들어 왕웅 주소지로 배달하였던 것이다.

상하이(2)-김구와 쑹스뱌오의 한중폭탄연대 pp. 180-181



1932년 피치 부부와 김구의 운명적 인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 독립운동에는 단순히 한국인들만의 반일투쟁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은 물론, 미국인 등 서양인들과도 같이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분명히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자유, 생명에 대한 존중, 민족을 넘어서는 인류애 등 약소국의 민족운동은 이러한 보편적인 토대와 결합되어야만 세계사적 의미가 있고, 또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상하이(2)-생사기로에서의 국제연대 p. 218



김구의 자싱 생활은 한 중국인 가족이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인 사회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동정 여론이 일어났다. 게다가 김구가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하자 중국 신문들은 그를 ‘조선 혁명의 수령’으로 일컬었다. 이런 정황에서 국민당 정부도 김구의 신변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당시 장쑤성 주석으로 있던 천궈푸는 부하 샤오정에게 김구와 관련 인물들이 상하이를 탈출할 수 있도록 하고 이후에 필요한 것들을 해결해 주도록 지시했다. 한국 측에서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던 박찬익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을 위한 교섭에 나섰다.

자싱·하이옌·항저우-자싱, 메이완가 p. 223



김구는 이처럼 난징의 친화이허 화이칭교에서 주아이바오와 동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혹심한 공중폭격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였고, 한편으로는 장제스를 만나는 등 독립운동을 영도하였다. 자싱에서 시작하여 난징으로 근 5년을 주아이바오와 같이 살고 난 이후인 1937년 여름,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김구와 임시정부도 중국의 국민정부를 따라 난징을 떠나 유랑의 길에 올랐다.

난징·전장-친화이허 화이칭교 p. 285



김구를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이 시기 치루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장제스와 만나 재중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한중연합항일 방안을 모색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중일전쟁 개시 이전 장제스는 비록 국내 정치의 안정을 당면 과제로 삼고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면서 항일에 소극적이었지만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나누면서 지원을 약속하고 협력 방향을 논의하였다. 당시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 중 첫 번째 방문자는 김구였다.

난징·전장-치루와 중앙판뎬 p. 299



신해혁명 이후 쑨원은 군벌과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국민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24년 1월 국공합작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북벌을 실행할 군 인재를 배양하고자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원명 중국 국민당육군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황푸군관학교는 약소민족의 연합과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을 제창한 쑨원의 뜻에 따라 한인 청년들의 입학을 격려?우대하였다. 재중 한인 독립운동가와 단체들 또한 독립 투사와 인재 양성을 위해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하였다. 황푸군관학교의 한인 입학은 1925년 7월에 입학한 3기생부터 시작하여 이후 6기까지 총 43명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27년 말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에는 200여 명의 한인이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한. 상도, 1994, 163~166쪽)

난징·전장-한인애국단과 중양육군군관학교 p. 310



김구가 장제스와 면담하고 중양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훈련반 입교생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김구의 거처와 활동의 중심이 난징으로 옮겨졌다. 이후 김구가 난징에서 전개하는 모든 활동의 조직적 기반은 한인애국단이었다. 한인애국단은 일본 군정요인과 친일파에 대한 암살 임무 외에도 비밀리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와 협력하여 대일 정보 수집 공작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김구가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을 진행하거나 대외 활동을 벌이는 데 있어서 한인애국단이 공식적인 단체로서 언급되었다. 실제로 김구가 난징에서 운영한 조직과 단체에 대한 실무는 안공근 등 한인애국단의 간부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난징 지역 초기 한인애국단 간부로는 안공근?안경근?노태연?오면직?노종균?이마석 6인이 있었다. 이들 중 이마석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은 모두 김구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일찍이 상하이에서 장기간 특무 활동에 종사했던 인물들이다.

난징·전장-한인애국단과 중양육군군관학교 p. 318



1935년 1월 조선총독부 파견 상하이 사무관 나카노가 밀정 오대근을 시켜 김구 암살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오대근은 난징에 도착한 후 특별공작원 7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 전 전원이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김구 암살 공작은 그 이후에도 다시 한 차례 시도되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나카노의 후임으로 파견된 히토스기 도헤이 사무관이 1935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밀정 임영창을 통해 김구 암살을 실행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윤대원, 2018). 『백범일지』에도 이와 관련한 언급이 보인다. 김구가 11월 초 자싱에 가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한 후 난징으로 돌아왔는데 난징 경비사령관 구정룬이 김구에게 일본이 고액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를 교섭해 왔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경관 일곱이 푸쯔먀오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 것은 이때의 암살 시도와 관련이 있다. 이렇듯 계속되는 일본 측의 암살 공작 속에서 김구는 활동상의 안전과 편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이전에 자싱에서 뱃사공으로 자신을 도왔던 주아이바오를 데려와 난징 푸쯔먀오 구역에 있는 화이칭교 부근에 거주하면서 고물상 부부로 위장하였다.

장닝-김구의 은신처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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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풍경

도서정보 : 최찬식 | 2019-08-1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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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은 즉, 화천(華川)의 맑게 흐르는 물을 내보내는 수문(水門)이다. 문루 아래에는 칠간수(七間水)라고 부르는 일곱 개의 홍문(虹門)이 있어 울리는 물소리가 항상 끊이질 않는다.
강 언덕의 푸른 풀은 다분히 밥을 짓는 저녁연기를 포함하여 그 짙푸른 색깔의 봄빛을 눈 아래 가지런히 펼치니, 이것은 승경 가운데 승경이라고 하겠다.<본문 ‘화홍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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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풍경

도서정보 : 최찬식 | 2019-08-18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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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은 즉, 화천(華川)의 맑게 흐르는 물을 내보내는 수문(水門)이다. 문루 아래에는 칠간수(七間水)라고 부르는 일곱 개의 홍문(虹門)이 있어 울리는 물소리가 항상 끊이질 않는다.
강 언덕의 푸른 풀은 다분히 밥을 짓는 저녁연기를 포함하여 그 짙푸른 색깔의 봄빛을 눈 아래 가지런히 펼치니, 이것은 승경 가운데 승경이라고 하겠다.<본문 ‘화홍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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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고적

도서정보 : 이중화 | 2019-08-1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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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로종, 즉 연복사종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 원나라 지정(至正) 6년(1346)에 주조하였는데, 먼저 기술한 바와 같이 원나라 장인의 손에 의하여 원나라식으로 주조한 것이다. 기술이 정교하고 그 특징과 그 모습이 아름다워 실로 천하일품이라고 한 세상의 평가가 지나친 논리는 아니다.
박연(朴淵)은 모습이 돌로 만든 항아리(石甕)와 같고 반석이 중심에 용출하였다. 이름 하여 도암(島巖)이라 하였다. 견주기를 박 진사(進仕)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폭포 위에서 피리를 불었더니 용녀(龍女)가 이에 감동하여 끌어들여 지아비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박연(朴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온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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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고적

도서정보 : 이중화 | 2019-08-1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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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로종, 즉 연복사종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 원나라 지정(至正) 6년(1346)에 주조하였는데, 먼저 기술한 바와 같이 원나라 장인의 손에 의하여 원나라식으로 주조한 것이다. 기술이 정교하고 그 특징과 그 모습이 아름다워 실로 천하일품이라고 한 세상의 평가가 지나친 논리는 아니다.
박연(朴淵)은 모습이 돌로 만든 항아리(石甕)와 같고 반석이 중심에 용출하였다. 이름 하여 도암(島巖)이라 하였다. 견주기를 박 진사(進仕)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폭포 위에서 피리를 불었더니 용녀(龍女)가 이에 감동하여 끌어들여 지아비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박연(朴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온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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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인물사전

도서정보 : 김명수, 조영관 | 2019-08-15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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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희망 프로젝트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귀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반기문, 세종대왕, 김구, 김태연, 타이거 우즈, 송해, 임권택, 버락 오바마, 정근모, 방탄소년단, 손흥민, 유재석, 오준영 등 유명인사, 톱스타부터 주부 유튜버, 개인택시 기사에 이르기까지 직업, 신분, 국적, 피부 색깔이 다양하고 천차만별인 남녀노소 인물 100명의 인터뷰 내용을 담아 책에 실었다.

1회성 프로젝트가 아닌 매번 100인의 인터뷰 기록이 모일 때마다 출간을 목표로 삼는 장기프로젝트이다.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확산되기를 희망한다.


500자 이내의 짧은 미니 인터뷰

책은 장시간에 걸쳐 탐닉하는 것도 즐겁지만 출퇴근 시간 혹은 잠깐 비는 시간을 활용하는 독서도 삶의 즐거움을 주게 된다.
현시대를 반영하여 한 인물을 500자로 정리해 빠르게 읽어 나갈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매가격 : 9,000 원

수집가의 철학

도서정보 : 이병철 | 2019-08-1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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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문명을 탑재한 휴대폰, 문명사의 눈으로 바라보다
― 휴대전화 컬렉터가 세계 유일의 폰박물관을 만들기까지

1980년대 생물학자의 평전을 저술하고, 1990년대 세계의 고고학적 성과를 엮은 탐험사를 쓰고, 2000년대 여성 인물들의 삶과 우리말 글쓰기를 집필한 저자의 인문적 저력은 2010년대 폰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휴대폰은 쓰고 버리는 기계이지만, 우리 산업문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폰은 21세기 기계문명의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 생활에 미친 변화는 가히 문명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폰에 대한 역사적이고 문학적이면서 문명사적인 접근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소리를 멀리 보내기 위한 인류의 고군분투, 열정,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개인들의 사연, 사회문화적인 변동을 문학적인 글쓰기와 감성으로 담아냈습니다.
『수집가의 철학』 1, 2, 3장은 테마 에세이로서 유선전화, 휴대전화, 박물관 이야기와 함께 지은이가 휴대전화를 수집해 폰박물관을 세우고 나라에 기증한 사연을 적었습니다. 4, 5, 6장은 폰박물관 전시 유물 3천여 점 중 37점을 가려 뽑아 이동통신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구성하면서 기기 하나하나의 얘기를 다루었습니다. 휴대전화의 문명사적 위상과 거기에 얽힌 과학기술 이야기, 수집한 뒷이야기, 일상에서의 추억 위주로 썼습니다. 전 세계에 휴대폰에 대한 책들을 보았지만, 이런 책은 없을 만큼 독특하고 독창적입니다.

무선호출기 등장은, 군대와 경찰만 쓰던 휴대용 이동통신 수단을 일반 대중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것은 2m를 벗어 날 수 없었던 통신 공간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첫걸음이었다. 유선전화기와 송수화기를 연결한 선의 길이에 그쳤던 사람들의 행동 반경이 수백, 수천 km로 넓혀진 것이다. 모바일 통신 수단을 얻은 인류는 그 옛날 불[火]을 얻었을 때처럼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호모 모빌리쿠스(또는 호모 ‘모빌리언스, 호모 모바일런스), 그 원년元年은 1974년이었다. 본문 245쪽, 『삐삐, 어린 백성이 처음 가져본 모바일』에서


한국의 긍지! 후세에 전할 사명이 있다
― 이름 없는 사물에 시선을 주고, 그 흔적을 보존하는 수집가

2008년 8월 초 일본 요미우리 신문 기자가 저자를 찾아왔습니다. 마에다 야스히로前田泰? 기자! 그는 여섯 시간이나 박물관에 머무르면서 집요하게 질문했습니다. 기자는 저자의 재정 상태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정말 당신 돈으로 휴대전화를 수집했습니까?” “얼마나 들었습니까?”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세계에서 몇 개 없는 최초의 휴대전화 한 대를 사기 위해 수천만 원을 지불해야 했던 때가 떠올라 울컥했다고 합니다. 막내의 학교 입학을 1년 미루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마에다 기자의 질문은 취재가 아니라 취조 같았다고 합니다. 부러움과 질투 아니었을까요! 일본은 세계에서 처음 셀룰러 방식 이동통신 서비스를 했을 뿐만 아니라 휴대전화에서도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인데, 일본에도 없는 휴대전화 박물관이 한국에 처음 생긴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질문에 묻어있던 것입니다.
기자의 집요한 검증 끝에 나온 기사의 끝부분에 저자 이병철이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世界が韓國製品の性能の高さを認めている. 携帶電話は韓國の ‘誇り’. 後世に?える使命がある.”(세계가 한국 제품의 성능과 품질을 인정하고 있다. 휴대전화는 한국의 긍지이다. 후세에 전할 사명이 있다.) ‘携帶大國の誇り?える’(‘휴대전화 대국’의 긍지를 전한다)라는 헤드라인을 단 기사가 요미우리 신문 17면에 실린 날은 광복 예순세 돌 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2003년 경매 시장에서 처음 풀박스 사이먼을 보았을 때 내 심장은 그대로 멎을 것 같았다. 잠시 후 가격을 보았을 때는 숨이 목에 턱 걸렸다. 일단 물건을 잡아놓고 급히 은행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꿈에도 그리던 사이먼을 샀다. 당장은 돈 걱정보다 그것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사이먼을 받기까지 몇 주일은 1초가 3년인 양 마음을 졸였고, 받아든 날부터 또 몇 주일은 구름 위에 올라앉은 듯 몽롱했다.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느낌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이먼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까닭이다. 309쪽, 『융합을 시작하다, 휴대전화+컴퓨터』

160여 컷의 다양한 폰 사진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1980~19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만도 천만 명이 넘게 애용한 무선 호출기(Pager, 삐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인이 널리 사용했던 이동통신 수단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삐삐. 지금이 야 과거 유물이 되어 버렸지만, 서른다섯 살이 넘은 사람에게는 온갖 추억과 사연이 깃든 애틋한 물건입니다. 『수집가의 철학』에는 소리(phone)를 멀리(tele) 보내려 발명한 수많은 폰 사진이 풍부하게 실려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씌어진 글은 또 하나의 읽을 거리입니다. 무선통신부터 아이폰까지 거의 모든 폰 사진이 담겨 있는 『수집가의 철학』을 펼치면 자신만의 시간 여행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매가격 : 13,860 원

일본 요괴문화 상품이 되다

도서정보 : 김진영, 고영란, 최태화, 방운학, 인단비, 편용우 | 2019-08-14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 잡은 요괴. 요괴문화가 상품이 되기까지의 핵심을 파다. 일본 요괴문화가 한 시대를 움직이고 있다. 이 책은 일본 요괴문화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인 비판을 목적으로 한다.? 대중 오락문화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일본 요괴문화의 구조와 속성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일본의 서브컬쳐였던 요괴문화가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통해 메인컬쳐로 시민권을 얻게 되는 과정과 닌텐도 같은 게임회사에서 요괴를 어떻게 산업화시켰는지를 찾으러 가본다. 먼저 상상속의 요괴를 캐릭터화시켜 상품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제1장 ‘캐릭터화 된 일본의 요괴문화’를 준비했다. 제2장 ‘일본 만화와 요괴 정복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에 스토리를 입혀 하나의 콘텐츠로 만들어가는 양상을 살펴본다. 제3장 ‘닌텐도의 힘’ 제4장 ‘게임의 세계와 포켓몬GO’ 제5장 ‘스마트 시대와 요괴’ 제6장 ‘고전에서 찾아보는 포켓몬스터의 성공비밀’은 하나의 문화콘텐츠로 성립된 일본 요괴문화를 일본의 게임회사가 어떻게 활용하여 왔는지에 대해 다양한 시점에서 분석을 시도했다.

구매가격 : 9,000 원

진짜 일본은 요괴문화 속에 있다

도서정보 : 류정훈, 김성은, 김미옥, 김학순, 박희영 | 2019-08-13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요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책은 다채로운 요괴들의 모습과 아울러 그에 파생되는 요괴문화라는 현상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기획되었으며 전근대 근대 현대를 모두 아우르기 위해 요괴학의 역사부터 게임 산업에 소비되는 요괴들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우선 요괴와 요괴문화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기술하고 문학과 회화 등에서 변용되는 요괴의 이미지에 대해 심도있게 알아본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요괴가 문화콘텐츠 속 캐릭터로 중요하게 자리매김하는 배경을 살펴보고 그 효과와 전망에 대해서도 고찰해 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현대적 관점에서 요괴를 이해하고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요괴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구매가격 : 8,000 원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도서정보 : 신정일 | 2019-08-12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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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의 천재들은 기축옥사를 일으켰는가?”

16세기 조선에서는 수많은 천재들이 활동했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에 새로운 기운을 일으켜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이기도 했다. 임금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고, 갈래 갈래 나뉜 선비들 역시 자신들이 속한 당파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전쟁을 벌였다. 사화인지 역모 사건인지 불분명한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문에 백성들은 전대미문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정여립이라는 사내를 잊으라고 했고 그는 족보에서도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리고 호남 지방은 조선 왕조 내내 반역의 고향으로 낙인찍힌 채 오늘날에 이르다.

조선천재 1000여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시작점에는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이었던 기축옥사를 재구성한다. 기축옥사는 기축년(1589년)에 생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정여립의 모반사건의 연루자를 색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인에 의해 동인들이 탄압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이 책은 기축옥사라는 역모 사건을 두고 조선에서 벌어졌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비들의 개혁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선조,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유성룡과 이항복, 당리를 위해 정적을 죽이는 정철과 정의로움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최영경, 그런 다툼 속 역모로 목숨을 잃게 된 수많은 이들이 16세기의 역사 속에 되살아나고 있다.

구매가격 : 10,2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