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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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주도한 전두환 일당, 쿠데타를 일으키다

광주항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우선 전두환?신군부 세력의 10?26 이후 행적을 살펴야 한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은 박정희가 죽자 일찍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겠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그리고 곧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한 12?12쿠데타를 일으킨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 정승화를 비롯한 군 상층부의 무능력, 미국의 방관, 일본의 지원 등으로 쿠데타는 결국 성공하고 만다. 전두환 일당은 쿠데타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하게 됐다.

12?12쿠데타가 성공하자 보안사는 1980년 2월부터 전두환 권력을 만들기 위해 K-공작(K는 ‘King’의 약자)을 실시했다. K-공작은 언론을 조종, 통제, 회유한 작전이다. 보안사가 언론사 간부들을 접촉해 ‘현재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안 된다’, ‘3김은 안 된다. 사회 안정을 위해 군부가 집권해야 한다’ 등의 취지의 보도를 하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했다. 곧 전두환?신군부가 한국을 이끌 세력, 안전 구축 세력으로 퍼뜨리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보안사에 이어 또 하나의 정보 기관을 손에 움켜쥐게 된다.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된 것이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이로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찾아온 서울의 봄, 그러나…

서울의 봄은 1980년 2월 29일 대규모 사면 복권 이후, 더 넓게는 1980년 초 정치인들의 신년사가 나오고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될 무렵부터 5·17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으니 한국 사회가 이제는 민주화로 나아갈 거라는 기대가 이 단어 속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신군부 세력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권이 단결하고 최규하 쪽과도 연결하면서 국회를 활용해 계엄을 해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때에도 서로 각자 대권 행보를 하며 분열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결국 5?17쿠데타가 성공하자 김대중은 ‘소요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됐고, 김영삼 또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학생 운동 세력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학생회를 부활시켰고, 병영 집체 훈련 거부 등 민주화 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전두환?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노동 쟁의도 크게 늘어나는 등 사회 각계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분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북항쟁이다. 이 항쟁은 단순히 노조 집행부와 그 반대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그간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에서 누적된 불만, 분노가 노조 문제를 계기로 분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80년 5월이 되자 대규모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게 된다.

신군부가 서울역 시위를 그대로 놔둔 이유는?

1980년 5월 13일 밤 학생회장단이 모여 토론한 끝에 교문을 박차고 거리에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대로 각 대학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인다. 14일에도 서울 시내 21개 대학에서 약 7만 명이, 지방 11개 대학에서 약 3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15일에는 최고 7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신군부는 충분히 이 시위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왜 막지 않았을까? 광주에서처럼 시민들이 이 시위에 대거 호응하면 신군부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왜 막지 않았을까? 그 이전부터 진압군 투입 준비도 이미 마친 상태였는데.

신군부는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미리 용의주도하게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 ‘거리에 나오는 걸 방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끔 한다. 그런 것 등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국보위 같은 걸 만들어 권력을 장악한다’, 이런 계획을 짜놓은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경우 학생과 시민들이 큰 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비해 군을 미리 움직여 서울과 전국 주요 지역에 배치해놓았다.

이러한 조치는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크게 확대되는 것에 대비한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 학생 시위가 커지면서 상황이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걸 빙자해 5월 17일 쿠데타 이후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민주화를 완전히 짓밟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굉장히 많은 학생, 시민이 봉기할 수 있다. 그런 봉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 그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5?17쿠데타 이후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 일당은 그 병력의 상당 부분을 광주로 이동시켰다. 광주를 아주 단단히 진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일본은 왜 5?17쿠데타를 도왔나?

10·26 이후 전두환 일당은 미국에는 절대적으로 보안을 취하면서도 일본에는 12·12쿠데타 계획을 알려주는 등 일본과 교감을 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이후 일본 측은 소련의 북한 남침 사주설을 포함해 북한의 남침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6번이나 전두환 일당에게 ‘자료’를 내주었다. 더군다나 일본 내각조사실은 북한이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남침하기로 결정했다며 날짜까지 콕 집어서 신군부에게 첩보를 건넸다. 그러나 이 첩보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났지만, 전두환?신군부는 이 남침설과 학생 시위를 구실 삼아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게 되는 국보위가 설치된다. 이것이 곧 5?17쿠데타이다.

일본이 이토록 전두환?신군부를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후 7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 우익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본은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새로운 정권으로 이 세력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는 데 일본의 지원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두환 일당은 왜 제2쿠데타 날짜를 5월 17일로 정했나?

1980년 5월 정치권은 국회 소집에 합의했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전두환·신군부를 규탄했다. 이에 전두환 일당은 10·26 직후 선포돼 반년 넘게 계속된 비상 계엄을 지속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두환 일당은 또 하나의 쿠데타를 계획하며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한다. 이 시국 수습 방안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비상 계엄 전국 확대였고, 둘째는 국회 해산, 셋째는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였다. 비상 계엄 전국 확대는 군인들이 전권을 가지고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것은 유신 헌법조차 짓밟으면서 강권,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겠다는 음모였다. 그와 함께 시국 수습 방안에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 규제 방안 등도 들어 있었다.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의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인 5월 20일 이후 이 시국 수습 방안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 순방 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는 17일로 쿠데타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다. 이렇게 한 데에는 5월 20일 임시 국회가 소집되고, 5월 22일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대학생들이 다시 대규모 데모를 벌일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17일 쿠데타를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다. 이로써 전두환 일당은 1979년에 12·12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1980년에 다시 5·17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다.

광주항쟁, 왜 일어났나?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5월 14~16일 민주 성회 때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그다음 날 아침에 자동적으로 교문에 모여 시위를 하자.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광장에 모이자’고 약속한 대로 교문으로 온 학생들이 많았다. ‘계엄 해제’를 외치는 학생들을 향해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봉 등으로 마구 구타했다. 정문 앞에서 해산당한 학생들은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내로 나간 학생들은 수백 명 단위로 비상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학생 시위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고, 경찰력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한 것이다. 게다가 서울 동국대에 있던 11공수여단까지 광주로 이동시켰고, 여기에 더해 3공수여단도 광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후 공수 부대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른다. 그걸 본 광주 시민들은 수그러들기는커녕 격렬하게 항의를 한다. 이제 시위는 학생에서 시민들로 확대되었다. 공수 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고, 공수 부대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단순한 학생 시위가 공수 부대의 만행으로 항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공수 부대는 왜 광주 시민에게 폭력을 휘둘렀나?

전두환?신군부 세력은 5?17쿠데타로 비상 계엄을 전국에 확대한 뒤 이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서울, 광주 지역 등에 이미 진압 부대를 투입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군 투입이 요구되는 사태가 발생할 때에는 강경한 응징 조치를 하겠다고 정해놓고 있었다. 초동 단계부터 강경 진압 등 ‘위력 과시’를 해 시위 군중을 위축시킴으로써 ‘시위 확산’과 ‘격렬화’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5?17쿠데타를 일으켰는데도 서울에서는 시위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그쪽을 철저히, 과감히 타격하자. 상대방이 다시는 시위를 일으킬 수 없도록 끝까지 추격해 궤멸적 타격을 입히자’, ‘우리에게 저항하는 자(세력)들은 이렇게 당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자’고 결의를 다진 것이다. 그래서 경찰로도 시위를 막을 수 있는데도 7공수여단을 시내 한복판으로 보낸 것이고, 그에 더해 서울에 있던 11공수여단 병력까지 광주로 급히 보내고 곧이어 3공수여단 병력을 또 보낸 것이다.

더군다나 광주는 자신들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였다. 그 때문에도 광주를 더 무자비하게, 위력적으로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수 부대가 만든 생지옥, 심지어 성폭행까지…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다

19일 새벽부터 1,000여 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 군중의 어깨, 다리 등을 마구 찔러 금남로 일대는 삽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건물 안으로 도망가는 시위 군중을 추적해 끄집어내어 길가에서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겼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마구 때렸다. 겁에 질린 여자들까지 아랫배를 걷어차고 가슴팍을 치거나 대검으로 상의를 마구 찢기도 했다. 심지어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도 있었다.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본 광주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오후 들어 수만 명의 민중이 금남로 일대를 가득 채웠다. 19일부터 본격적으로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왜 시민들은 성난 민중으로 변해 그 무섭고 무자비한 공수 부대와 적극적으로 맞붙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공수 부대의 만행,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만행에 분노해 그야말로 피가 끓는 시민들이 궐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부끄러움’의 정서다. 18일 공수 부대의 만행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이 시민들을 자꾸 싸우게 했고, 그것이 항쟁으로 바뀌는 추동력이 되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대학살, 21일 애국가와 함께 울린 총성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렸다. 21일 금남로 일대에서 이뤄진 발포로 최소한 54명이 숨지고 5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추정됐다. 21일 3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보급을 받은 실탄은 M16 소총탄 123만 발, 살상력이 큰 40mm 고폭 유탄 316발, 한꺼번에 여러 명을 해칠 수 있는 세열 수류탄 4,880발이었다. 이 중 48만 4,484발이 실제로 사용됐는데, 공수 부대원 1인당 142발을 쏜 셈이다. 광주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인 대학살이었다. 심지어 이날 오후에는 헬기 기관총 소사까지 있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 광주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경악할 만한 사태가 벌어지자 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이제 우리도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여러 지역으로 갔다. 일부 시위대는 10여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화순 탄광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을 입수했고 나주경찰서 무기고와 여러 파출소에서 M1 소총, 카빈 소총, 실탄을 가져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장성, 담양, 영광, 보성, 무안, 영암, 함평, 강진, 해남, 완도, 곡성, 구례 등 전남 각 지역으로 가서 무기와 탄약을 가져왔다.

이처럼 1980년 5월 21일에는 공수 부대의 정조준 사격, 헬기 기총 소사 등 시민을 향한 발포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러자 광주 시민들은 전남 전 지역으로 나아가 무기를 확보했고, 그러면서 이제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전체가 들끓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를 확보하면서 시민군이 등장하게 된다.

왜 전두환 일당은 일부러 사태를 더 악화시켰나?

21일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다. 이날 오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시위가 확산된 이유는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유언비어 유포와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 담화문을 접한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왜 광주항쟁이 일어났는지, 시민들이 왜 싸웠는지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되지 않았고, 공수 부대의 만행에 대해서도 전혀 말하지 않았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이희성이 발표한 것과 똑같이 조작, 허위 사실,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발표였다. 광주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분노한다.

그런데 왜 이런 발표를 연달아 한 것일까? 21일, 22일 연속해 일어난 일들은 전두환·신군부가 일부러 상황을 악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왜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은 짓을 계속 저질렀을까? 전두환 일당은 본때를 보여 자신들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다. 그래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두환·신군부 유신 잔당은 이희성 담화문이 의도한 것과 똑같은 의도로 광주와 일반 국민을 격리 차단해 오로지 유혈 사태를 불사하는 폭압, 폭력의 군홧발로 광주를 짓밟고 일반 국민들에게 허위 사실을 사실로 믿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자신들에게 저항하면 광주처럼 당한다는 협박용으로 일부러 5월 21일 이희성 발표에 이어 22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발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1공수여단의 어느 하루, 어린이 사살→오인 총격전→분풀이 학살

24일, 공수 부대가 어린이까지 사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트럭에 나눠 탄 제11공수여단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이동하던 중 진월동 원제마을 저수지 옆을 지나가게 된다. 그때 저수지에서는 15명가량의 소년들이 물놀이를 하며 멱을 감고 있었다. 공수 부대는 이 아이들에게 총을 쐈다. 결국 열세 살의 한 소년이 그 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이어서 공수 부대는 근처에 있는 진제마을 쪽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마을 뒷동산에서 놀던 아이들한테 발포했다. 여기서도 열 살짜리 어린이 한 명이 숨졌다. 이 부대는 진제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하수구에 숨어 있던 박연옥을 향해 발포했다. 박연옥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후 이 부대는 효덕초등학교 앞을 지나 광주-목포 간 국도를 이동하다가 갑자기 집중 사격을 당했다. 공수 부대를 공격한 건 마을 양쪽에 매복해 있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었다. 공수 부대를 시민군으로 착각해 공격한 것이었다. 공수 부대도 바로 응사했다. 이 오인 총격 사건으로 장교 1명을 포함한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보병학교 교도대가 빠져나간 후 11공수여단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또 일으켰다. 근처 마을에 들이닥쳐 3명의 젊은이를 끌고 가 ‘즉결 처분’을 해버렸다. 엉뚱하게 화풀이로 마구잡이 보복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평생 해서는 안 될 일을 11공수여단은 하루에 수차례나 저질렀다.

전두환·신군부는 27일 왜 그토록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나?

27일 마지막으로 도청에 남아 있는 시민군은 200여 명이었다. 이에 반해 진압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3?7·11공수여단, 20사단, 31사단, 전교사 예하 병력 등 총 2만 317명이었다. 이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광주 시내로 진입했다. 이 가운데 상무 충정 작전에 전투 요원으로 실제 투입된 계엄군 병력은 6,168명이었다. 그중 작전을 주도하는 특공조로 편성된 공수 부대원은 장교 37명을 포함해 317명이었다. 시민군의 숫자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전두환 일당은 왜 이토록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일까? 이 또한 5월 18일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18일 오후 4시경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하기 전에는 학생 시위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경찰력으로도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5월 27일에도 마찬가지로 군이 아니라 경찰만 투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엄청난 병력을 투입해 적군을 상대로 작전을 펴는 것처럼 한 것이다.

“5월 18일, 19일에 광주 시민들을 상대로 이른바 위력 과시, 선제 타격이라는 걸 하지 않았나. 전두환·신군부 권력 탈취에 저항하는 세력을 궤멸시키다시피 제압해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그래서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5월 19일 시민들이 공수 부대와 맞서면서 광주항쟁이 본격화되고, 그렇게 되면서 오히려 계엄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까지 맞게 됐다. 그야말로 전두환·신군부 쪽이나 계엄군으로서는 굉장한 치욕이라고 볼 수 있는 상태를 자초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27일에 그런 식으로 보복해 만회하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민군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저항 세력을 초토화하고 시민들에게 특별히 위력을 과시해 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날 시민군은 15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체포됐다.

왜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가?

그동안 전두환은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정보 수집, 수사만 했다. 광주사태 진압과는 명령, 지휘 계통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주 학살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비선 라인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에서 공수 부대가 한 행위는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탈취 방안이던 ‘시국 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일당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 많은 학생, 시민들이 반발하고 투쟁과 시위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 예상 아래 서울과 광주 등 중요 지역에 공수 부대를 비롯한 병력을 이미 배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5·17쿠데타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위력을 과시해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리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전두환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5월 21일, 자위권이 발동된다. 자위권 발동을 국방부 장관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회의가 21일 오전에 열리는데, 전두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실질적 권력자인 전두환이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1시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자위권을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걸로 밝혀졌다. 이튿날 22일, 전두환은 공수 부대원들에게 격려금을 하사하도록 지시한다. 또한 전두환은 25일 최규하로 하여금 광주로 내려가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5월 27일 새벽에 벌어진 상무 충전 작전에서도 전두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전두환은 광주에서 진행된 여러 작전이나 자위권을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했고, 가장 중요한 27일 작전을 결정하는 자리에도 참석했다. 미국 또한 전두환이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군 실력자라고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두환은 27일 상무 충정 작전을 몇 시간 앞두고 사병들에게 거액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보면 분명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정신은 살아 숨 쉬며 6월항쟁으로 승화했다

광주항쟁은 27일 마지막 시민군들이 진압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곧 광주의 진실 알리기 운동이기도 했다. 광주항쟁은 특히 젊은이들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광주의 진실, 이것을 접한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1980년대 내내 되물었다. 잔인한 유혈 사태, 시민을 향한 발포, 그러한 공수 부대에 과감히 맞서 싸운 시민들, 이 모습들은 1980년대 내내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했다.

학생들은 1984년경부터 학생 운동의 폭을 넓혀갔는데, 주된 활동의 하나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학가는 4월에 4·19 기념을 겸해 4월 투쟁을, 5월에는 여러 날에 걸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각종 교내 활동과 시위 투쟁을 벌였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은 그 자체가 반전두환 투쟁이었고 민주화 운동이었다. 5월 투쟁은 학생 운동을 확장하는 지렛대였다.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광주항쟁은 어떠한 역사적 역할을 했는가. 광주항쟁은 갑오농민전쟁(1894년), 3·1운동(1919년), 4월혁명, 부마항쟁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변란을 일으킨 집단이나 독재자의 영구 집권욕에 의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또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항쟁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광주항쟁을 꼽을 수 있다.”

광주항쟁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군부의 유신 잔당들이 ‘서울의 봄’을 깨부수고 제2의 유신 체제를 만들고 있는데 그러한 변란에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다면, 그런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정의롭게, 올바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도 광주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길이 남을 역할을 했다. 4월혁명과 똑같이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민주화, 자주화 운동의 추동력이었다. 광주항쟁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뜨겁게 불을 지폈다. 그뿐 아니라 6월항쟁으로 전두환·신군부가 무릎을 꿇고 결국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오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면에서 광주항쟁은 한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잊혀서는 안 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보위, 무소불위 권력 휘두르다

1980년 5월 27일 무력으로 광주항쟁을 짓밟은 전두환은 곧이어 국보위를 설치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국보위를 통해 전두환 일당은 부정 축재자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공직자 등 1만여 명을 숙정했다. 또한 언론계에도 칼날을 들이대 언론 검열에 비협조적인 기자들을 추방했다. 특히 광주항쟁 때 있었던 보도 검열 거부, 제작 거부를 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을 했다. 당시 기자의 30퍼센트가 쫓겨났는데, 과히 언론 대학살이라고 할 만했다. 전두환 일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들을 연행해갔고, 정치인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했다. 이때 몰수한 재산 규모는 1,133억 원에 달했다.

인권 유린과 잔혹함의 상징,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는 국보위에서 시행한 대표적인 사업이다. 이 사업은 전두환 일당의 인권 유린과 잔혹함을 상징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전두환 일당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없이 1980년 8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 6만 755명을 체포했다. 이 중 3,25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1만 7,761명이 훈방 등의 조치를 받았다. 이 사람들을 제외한 3만 9,742명이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1일까지 11차에 걸쳐 전국 각지의 군부대에서 소위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았다.

이 중에는 13세 소년에서 70대 노인까지 있었고 군 장성, 언론인, 노조원,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돼 있었다. 특히 민조 노조 운동가들이 표적이 되어 끌려갔다. 원풍모방을 비롯해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한일도루코, 청계피복, 원풍타이어 등의 노조 간부 22명 또는 그 이상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4주간 순화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강창성은 박정희의 지시로 하나회를 대대적으로 수사하던 사람으로, 전두환 일당이 그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을 한 것이었다.

전두환은 이 사업이 국보위 사업 중에서 핵심 사업이라고 강조하며 범국민적, 범국가적으로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강한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전두환의 주문이 있었기에 삼청 교육은 잔혹하게 시행됐고, 수많은 사망자 등 피해자를 양산했다. 공식 사망자만 54명으로 밝혀졌고,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은 397명, 행방불명자 4명, 삼청 교육으로 인한 상이자는 2,768명이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일본은 전두환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대중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연행됐다. 계엄사는 1980년 7월 4일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들이 국민연합을 주축, 전위 세력으로 하여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대중 선동에 의해 학원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민중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유혈 혁명 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 집권하려는 내란 음모 행위의 전모가 드러났다.”

계엄사 합수부는 7월 12일 김대중 등 37명을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했다. 이어서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하나의 사건을 조작했다. 계엄사는 내란 음모 이외에도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그 수괴로 있으면서 북괴의 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 사용한 혐의 등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전두환 일당이 문제 삼은 일본에서의 활동을 일본 정부가 반드시 문제 제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전두환?신군부와 일본 정부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일본은 전두환 일당이 5?17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도록 남침 정보를 조작해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결국 일본 정부는 김대중의 기대와 달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은 사형이 구형되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도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미국은 한국이 강력한 반공 기조를 유지한다면, 독재 정권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19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이 취임 직후 첫 번째 손님으로 전두환을 미국에 초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을 강력히 지지했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되다

전두환은 2단계를 통해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먼저 최규하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기들이 만든 헌법에 따라 또 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다. 1980년 8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작성했다. 그리고 전두환·신군부의 강박에 의해 8월 13일 김영삼이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8월 14일에는 김대중 등 24명에 대한 군사 재판이 시작됐다. 8월 16일에는 마지막 수순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했다. 8월 21일 전국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 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9월 29일 이번에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했다. 10월 22일 국민 투표로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었고, 1981년 2월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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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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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

18~20권의 주제는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이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평가한다.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두 번째 해방은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인 6월항쟁도 1987년 대선에 패배하는 등 갖은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한국 사회에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6월항쟁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20권에서는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전개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즉 이 세 권을 통해 6월항쟁 전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6월항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눈으로만 바라다본 측면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의 순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료 등을 꼼꼼히 살피며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또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특히 장세동이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게 6월항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1987년 5·26 전면 개각으로 장세동은 안기부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라고 서중석 교수는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이심전심으로 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강경 일변도로 밀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책에는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 지시하고 6시간 만에 번복한 이유, 미국의 역할 등도 세세하게 담았다. 그럼으로써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세세히 분석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과 김영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6월항쟁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아주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항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은 것도 항쟁이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각지에서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중석 교수는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성취한 승리였다.

7·8·9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했나

‘도도한 민주화 물결’에서 7·8·9월에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투쟁으로 장기간 존속돼온 노동 통제 체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대대적인 탈법 파업 투쟁으로 노동 기본권을 유린한 노동 관계법을 무력화했다. 그 이전까지 사용자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노동 조건을 노사 당사자의 단체 교섭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으로 노조 활동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 대중을 단련시키고 사회, 정치 의식과 자신의 조직을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비약을 이뤄냈다. 한계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대규모였지만 계획적, 조직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조직적인 지도력도 약해서 투쟁 성과가 조직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 연대 투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대개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투쟁 후반기에 전두환 정권, 사업주, 언론 등 지배 세력의 ‘불순 세력 개입’, ‘좌경 용공’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에 탄압까지 있자 노동자 대투쟁은 끝을 맺었다.

1987년 대선 패배, 누구의 책임인가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신군부 정권에서 그래도 낫다는 얘기를 듣던 자들조차도 자신들의 협력 행위를 합리화하려고만 했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신군부 집권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추종했던 자나 언론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6월항쟁에서 쌓아올린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켰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은 상당 기간 더 이상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4월혁명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대신 수십 년간 반공 독재에 협력한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DJ 당파, YS 당파로 명명하고 하나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몰아세웠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신적 지주가 약화되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상당 부분 방황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

6월항쟁의 배경,
개헌 투쟁과 전두환의 반격

* 2·12총선 후 개헌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 5·3 인천 사태 이후 전두환은 어떤 방식으로 반격전을 폈나
* 남북 이산가족 첫 상봉은 어떻게 성사됐나

전두환·신군부 권력을 뒤흔든 1985년 2·12총선 이후 재야 운동 세력은 민통련으로 집결된다. 또 학생 운동권은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을 벌이고 구로 동맹 파업 등 노학 연대 투쟁에 나선다. 새로 등장한 선명 야당은 직선제 개헌 장외 투쟁을 전개해 개헌 열기는 최고조로 오른다. 그러나 5·3 인천 집회에서 운동권이 미국·전두환 정권뿐만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이 이끄는 야당도 공격하자, 전두환의 총반격이 시작된다. 전두환은 비상 조치를 만지작거리며 유성환 국시 사건, 금강산댐 사건, 건국대 사태 등 대형 사건을 잇달아 일으킨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권은 이 과정을 천착하면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통해 6월항쟁의 주인공인 시민 세력이 부상하는 것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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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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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

18~20권의 주제는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이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평가한다.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두 번째 해방은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인 6월항쟁도 1987년 대선에 패배하는 등 갖은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한국 사회에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6월항쟁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20권에서는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전개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즉 이 세 권을 통해 6월항쟁 전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6월항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눈으로만 바라다본 측면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의 순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료 등을 꼼꼼히 살피며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또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특히 장세동이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게 6월항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1987년 5·26 전면 개각으로 장세동은 안기부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라고 서중석 교수는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이심전심으로 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강경 일변도로 밀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책에는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 지시하고 6시간 만에 번복한 이유, 미국의 역할 등도 세세하게 담았다. 그럼으로써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세세히 분석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과 김영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6월항쟁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아주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항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은 것도 항쟁이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각지에서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중석 교수는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성취한 승리였다.

7·8·9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했나

‘도도한 민주화 물결’에서 7·8·9월에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투쟁으로 장기간 존속돼온 노동 통제 체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대대적인 탈법 파업 투쟁으로 노동 기본권을 유린한 노동 관계법을 무력화했다. 그 이전까지 사용자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노동 조건을 노사 당사자의 단체 교섭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으로 노조 활동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 대중을 단련시키고 사회, 정치 의식과 자신의 조직을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비약을 이뤄냈다. 한계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대규모였지만 계획적, 조직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조직적인 지도력도 약해서 투쟁 성과가 조직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 연대 투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대개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투쟁 후반기에 전두환 정권, 사업주, 언론 등 지배 세력의 ‘불순 세력 개입’, ‘좌경 용공’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에 탄압까지 있자 노동자 대투쟁은 끝을 맺었다.

1987년 대선 패배, 누구의 책임인가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신군부 정권에서 그래도 낫다는 얘기를 듣던 자들조차도 자신들의 협력 행위를 합리화하려고만 했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신군부 집권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추종했던 자나 언론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6월항쟁에서 쌓아올린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켰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은 상당 기간 더 이상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4월혁명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대신 수십 년간 반공 독재에 협력한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DJ 당파, YS 당파로 명명하고 하나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몰아세웠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신적 지주가 약화되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상당 부분 방황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

6월항쟁의 전개,
현대사를 바꾼 최대 동시다발 시위

* 은폐됐던 박종철 고문 사망 진실, 어떻게 드러났나
* 6월항쟁이 장엄한 항쟁으로 피어오른 이유는?
* 전두환은 왜 군 출동 지시를 번복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권에서는 민주대연합과 동시다발 투쟁이 박종철 추도 대회에서 결합되고,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또 국본과 자연발생적인 과감한 투쟁의 상호관계,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5·26 전면 개각과 안기부장 교체, 전두환과 노태우 측의 미묘한 갈등이 6월항쟁에 미친 영향에도 각별히 예의주시했다.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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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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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

18~20권의 주제는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이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평가한다.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두 번째 해방은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인 6월항쟁도 1987년 대선에 패배하는 등 갖은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한국 사회에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6월항쟁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20권에서는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전개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즉 이 세 권을 통해 6월항쟁 전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6월항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눈으로만 바라다본 측면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의 순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료 등을 꼼꼼히 살피며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또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특히 장세동이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게 6월항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1987년 5·26 전면 개각으로 장세동은 안기부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라고 서중석 교수는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이심전심으로 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강경 일변도로 밀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책에는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 지시하고 6시간 만에 번복한 이유, 미국의 역할 등도 세세하게 담았다. 그럼으로써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세세히 분석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과 김영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6월항쟁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아주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항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은 것도 항쟁이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각지에서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중석 교수는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성취한 승리였다.

7·8·9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했나

‘도도한 민주화 물결’에서 7·8·9월에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투쟁으로 장기간 존속돼온 노동 통제 체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대대적인 탈법 파업 투쟁으로 노동 기본권을 유린한 노동 관계법을 무력화했다. 그 이전까지 사용자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노동 조건을 노사 당사자의 단체 교섭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으로 노조 활동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 대중을 단련시키고 사회, 정치 의식과 자신의 조직을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비약을 이뤄냈다. 한계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대규모였지만 계획적, 조직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조직적인 지도력도 약해서 투쟁 성과가 조직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 연대 투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대개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투쟁 후반기에 전두환 정권, 사업주, 언론 등 지배 세력의 ‘불순 세력 개입’, ‘좌경 용공’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에 탄압까지 있자 노동자 대투쟁은 끝을 맺었다.

1987년 대선 패배, 누구의 책임인가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신군부 정권에서 그래도 낫다는 얘기를 듣던 자들조차도 자신들의 협력 행위를 합리화하려고만 했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신군부 집권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추종했던 자나 언론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6월항쟁에서 쌓아올린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켰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은 상당 기간 더 이상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4월혁명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대신 수십 년간 반공 독재에 협력한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DJ 당파, YS 당파로 명명하고 하나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몰아세웠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신적 지주가 약화되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상당 부분 방황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

도도한 민주화 물결,
전두환·노태우의 항복 선언, 그 후

* 노태우 6·29선언을 둘러싸고 왜 논쟁이 격화됐나
* 7·8·9월에 노동자는 어떻게 투쟁을 전개했나
* 1987년 대선 패배에서 양김과 운동권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6·29선언에 대해 노태우와 전두환은 자기 공로라고 서로 싸우면서, 자신들도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에 대한 반박을 구체적 자료로 낱낱이 추궁했다. 6·29선언이 나온 것은 군이 출동할 수 없어서였다. 당시 비상 조치가 발동되지 않은 데 대한 종래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전두환과 군, 노태우와 민정당, 미국의 입장을 각각 면밀히 검토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권은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아울러 총선에서 소선거구제와 지역주의의 관계를 중시했고. 7·8·9월 노동자 대투쟁, 통일 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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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모르는 영국왕-너 그거 아니 6

도서정보 : R. 리프레, 강준린 | 2020-01-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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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역사를 되돌아보고 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일들이 많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방대하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궁금하고 해괴한 일들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여 전개하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보다 더 넓고. 얕고 광범위한 교양 상식이 될 것은 물론 인문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현실 생활의 스트레스를 이 책과 함께 풀어보는 것은 어떨가 싶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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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오르는 물고기-너 그거 아니 7

도서정보 : R. 리프레, 강준린 | 2020-01-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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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역사를 되돌아보고 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일들이 많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방대하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궁금하고 해괴한 일들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여 전개하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보다 더 넓고. 얕고 광범위한 교양 상식이 될 것은 물론 인문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현실 생활의 스트레스를 이 책과 함께 풀어보는 것은 어떨가 싶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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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풍은 서풍보다 무겁다-너 그거 아니 8

도서정보 : R. 리프레, 강준린 | 2020-01-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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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역사를 되돌아보고 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일들이 많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방대하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궁금하고 해괴한 일들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여 전개하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보다 더 넓고. 얕고 광범위한 교양 상식이 될 것은 물론 인문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현실 생활의 스트레스를 이 책과 함께 풀어보는 것은 어떨가 싶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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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전쟁-너 그거 아니 9

도서정보 : R. 리프레, 강준린 | 2020-01-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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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역사를 되돌아보고 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일들이 많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방대하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궁금하고 해괴한 일들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여 전개하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보다 더 넓고. 얕고 광범위한 교양 상식이 될 것은 물론 인문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현실 생활의 스트레스를 이 책과 함께 풀어보는 것은 어떨가 싶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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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옮긴 교회당-너 그거 아니 1

도서정보 : R. 리프레, 강준린 | 2020-01-0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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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역사를 되돌아보고 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일들이 많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방대하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궁금하고 해괴한 일들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여 전개하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보다 더 넓고. 얕고 광범위한 교양 상식이 될 것은 물론 인문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현실 생활의 스트레스를 이 책과 함께 풀어보는 것은 어떨가 싶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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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탑-너 그거 아니 2

도서정보 : R. 리프레, 강준린 | 2020-01-0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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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역사를 되돌아보고 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일들이 많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방대하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궁금하고 해괴한 일들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여 전개하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보다 더 넓고. 얕고 광범위한 교양 상식이 될 것은 물론 인문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현실 생활의 스트레스를 이 책과 함께 풀어보는 것은 어떨가 싶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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