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전자책

월간 샘터 2020년 3월호

도서정보 : 샘터편집부 | 2020-02-10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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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샘터>는 1970년 4월 창간한 국내 최장수 월간 교양지입니다.
창간 이후 49년 동안 <샘터>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밝고 건강하며 긍정적인 기사를 선별, 게재하여 독자에게 용기와 희망, 행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심은 모든 어른의 마음의 고향’이라는 창간의 다짐이 말해 주듯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순수한 감성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피천득, 법정, 최인호, 이해인, 정채봉, 장영희 선생 등 국내 최고의 지성의 영혼을 울리는 메시지를 통해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습니다.

명사들의 품격 높은 산문에서부터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까지 감동 가득한 글과 문화 예술 정보 등 다양한 읽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샘터> 정기구독료의 1%를 사회에 환원하는 한편, 독자가 모금하는 ‘샘물통장’을 만들어 매년 소외된 이웃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평범함 사람들을 위한 행복’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독자 곁을 지켜가는 <샘터>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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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도서정보 : 파커 J. 파머 | 2018-08-2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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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시선과 유머로 가득 찬 노년 탐구
스스로를 면밀히 돌아보지 않는 삶은 타인에게 위협이 된다
우리는 우리 삶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먼 생애 동안 마구잡이로 헤쳐온 오르막 내리막의 길
그 길들의 가장자리에 선 한 노인이 써내려간 에세이


올해 일흔이 된 소설가 김훈은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무겁고 무섭지만, 게으른 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혐의가 짙다고 말한다. 의미가 무거울 때 우린 이런 불평을 해봐도 좋겠다. “노년이라고 다 강태공이 되는 건 아니다. 우럭과 감성돔에 환호하는 노년의 평범한 낚시꾼이 더 많다. 그게 인간의 삶이다.”
김훈보다 딱 열 살이 많은 미국의 구루 파커 파머 역시 ‘나이듦’의 무거움을 말하지 않는다. 사회 활동가이자 영성 교육자로서 왕성한 에너지를 발산해온 파머는 생의 후반부에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안으로만 숨고 파고들다가 그는 자기 안에서 안으로 통하는 문을 하나 더 열어버렸다. 그렇게 발견한 노년, 그는 현재 노년의 리듬에 따라 물감처럼 스미는 글을 쓴다. 아름다운 글을.
삶의 가장자리엔 절벽이 있다. 그건 놀랍지 않다. 놀라운 건 ‘나이 드는 걸’을 좋아하는 감정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그동안의 경험이 폭넓고도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 바닥을 차고 뛰어오르게 한다. 세상은 다시 열리고, 마음은 젊어진다. 타자의 마음에 자유자재로 침투하면서 몸은 강물처럼 유연해진다. 이것이 노년이고 노년의 열정이다.
파머는 이 책에서 이런 놀라운 풍경을 보여준다. 저자는 노화라는 중력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나이듦에 협력’할 때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한 경험을 들려준다. 노인들만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다. 젊음에게 노년은 낯선 것이고, 낯선 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스물네 편의 에세이와 여러 편의 시로 이루어진 이 책은 나이듦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다. 대신 저자의 경험을 비추는 프리즘을 일곱 번 바꿔가면서 독자들도 그런 작업을 해보도록 북돋운다. 여기에 삶을 붙잡고 놓아주는 그 속에 자신을 풀어놓는 얼마나 놀라운 힘이 스며 있는지, 느끼고 생각하는 건 우리 몫이다. 쇠퇴와 무기력이 아닌 발견과 참여를 통해 프레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경험에 열린 눈을 뜨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장 긴요한 덕목이 될 것이다.

노년, 부서지는 존재를 끌어안는

노년에 깊이 다가갈수록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질문은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이다. 자기 삶에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면 타인의 위로와 포용도 별 의미가 없다고, 반드시 스스로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파머는 생각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질문이 그릇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질문은 고통스런 세상이 펼쳐질 때 아무리 곱씹어도 답을 낼 수 없고, 스스로에게 ‘좋아요’를 누르든 ‘싫어요’를 누르든 거기엔 우쭐대는 자아가 만들어낸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나는 태양계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 만물 가운데 하나인 나는 삶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태양 아래 서서 자신과 타인들이 성숙해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배반과 충성심, 실패와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통찰이며, 의심이고 확신이다. 또한 나의 두려움이고 희망이다.”
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생애 동안 마구잡이로 헤쳐온 오르막 내리막 길에서 삶은 여전히 최고 속도로 거칠게 펼쳐지고 있다. 붙잡고 싶은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은 공포를 자아낸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것이 둘러싸고 있고, 늙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뜻이므로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싶다는 욕망도 자아낸다. 이제 나이든 저자는 너그러움을 품고 그 안으로 시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노인임을 무릅쓰고 발언하는 이유

내가 태양이 아니라면, 노인인 나는 찬란한 젊은이들을 가로막으면서 그림자를 드리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파머는 인종, 계급, 성차별이 여전한 미국 사회에서 중산층의 백인 남자로서 생계 걱정이 없었다. 이런 행운아는 기성세대이자 기득권이므로 목소리를 내지 말고 가만있어야 하는가. 파머는 노년에 안전하게 제 목소리를 감추는 것은 ‘책임 회피’라고 말한다. 노년은 쭈그리고 앉아 보낼 시기가 아니다. ‘분노’와 ‘항의’는 그때에도 지속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다.
열 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에세이를 써온 저자는 자신이 쓴 문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됐어”라는 한 단어라고 말한다. 나이 들면서 이 말은 쉽게 나왔다. 생명을 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주저 없이 “됐거든”이라 말하고, 광란, 과로, 개인적 편견, 건강하지 않은 관계, 사회적 잔인함이나 부정의, 종교나 정치에서의 무모한 권력 행사, 인종주의, 성차별, 외국인 혐오에 대해 ‘됐다’고 말한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사회를 향해 그는 분노한다. 카페의 옆 테이블을 보자. 여기 있는 여성들은 사랑스러운 엄마로서, 친구로서, 파트너로서, 이웃으로서 놀라운 일을 하고 있다. 파머는 “이런 여성들이 스스로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신들 눈에는 젊은이들이 현명하지 않은 것 같은가? 그건 당신의 마음이 ‘고물’이 됐기 때문이다. 파커는 노년에 정말로 버리고 싶은 것은 오래된 확신 같은 거라고 말한다. “우리가 했던 실수를 젊은이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노인들에게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수를 할 테지만, 우리와 같은 실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고, 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온 세계가 아니며, 그들은 우리의 젊었을 적보다 더 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 삶은 타인에게 위협이 된다

누구나 자기 삶을 ‘쓰고’ 있다. 탄탄한 서사를 구축하면 삶은 그제야 의미의 그물망으로 들어오고 더 단단하고 응집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자기 삶에 대한 작가적 구성력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쓸 것인가.
중요한 덕목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말했다. 파머는 이 문장을 수정한다. “나의 지옥은 대학 학위와 재정적 안정성을 가진 50세 이상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즉 나 같은 사람들)만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는 다양성이 삶의 즐거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하게 잘 사는 삶의 기본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종, 민족성, 종교, 성적 지향 등에서 ‘타자성’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생renewal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파머는 말한다. 그들의 두려움 때문에, 생기 넘쳤던 미국은 뒷걸음질하면서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바깥세계에 있는 생경한 모든 것은 반갑게 맞아들여야 한다.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이방인 담론의 출발점은 바로 타자의 낯섦을 끌어안고 자기방어를 해제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때론 불쾌하고 기이하며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더라도.
사실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과제다. 타자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닌 이는 ‘환대’의 결과가 아름다울 거라 상상하지만, 어쩌면 당신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버리고 가구를 몽땅 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곤란한 상황, 감정들은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전체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 중 하나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타인을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을 면밀히 돌아보지 않는 삶은 타인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저자는 백인의 특권과 거기서 비롯된 불의 및 비인간성에 자기도 모르게 공모했던 것, 백인우월주의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그 독성에 오염돼왔던 것을 고백한다. 그것은 자기 우월감이었고, 올바른 렌즈로 세상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다.
따라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우리는 삶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에 대한 능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우울증의 늪

그늘 없는 영혼에는 삶이 비밀을 감추는 걸까. 삶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파커는 세 차례나 겪었다. 수개월 동안 차양을 내린 채 어두운 방에 머물자, 친구는 그에게 외출을 좀 자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그때 파머가 한 대답은 우울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럴 수 없어. 세상이 칼로 가득 찬 느낌이야.”
40년 동안 그는 ‘더 위로 더 멀리’ 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가 추구한 것은 네 가지인데,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가치다. 하지만 이를 뒤쫓다보면 인간 능력의 오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네 가지는 이렇다. 첫째, 지성(생각하기)의 능력에 가치를 두었다―즉 가슴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둘째, 자아의 힘을 과신했다―신경증적 두려움을 위장하면서. 셋째, 지상을 넘어선 비상하는 영성을 추구했다―그러나 그것들은 일상의 자잘한 요소들과 연결되지 못했다. 넷째, 도달할 수 없는 윤리를 추구했다―그러나 그것들은 타인들의 이미지로 형성되는 윤리였을 뿐이다. 이 네 가지 당위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자 파머는 죄의식을 갖게 됐고, 스스로를 나약하고 미덥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됐다.
이때 우울증이라는 친구가 나타나 파머의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끌려 하면서 계속 쫓아왔다. 그 목소리가 두려워 파머는 애써 무시한 채 계속 걸었다. 그러자 친구는 더 가까이 다가와 그의 이름을 큰 목소리를 불렀고,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그 친구는 돌을 던지며 막대기로 파머를 치기 시작했다. 막대기와 돌로도 안 되자 그 친구는 우울증이라는 바위를 파머에게 떨어뜨렸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친구가 바위로 친 것은 그를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돌려세우기 위함이었다.
“저는 높은 성취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왜냐하면, 음, 낮은 곳보다 높은 곳이 더 좋으니까요.” 그런가? 틀렸다. 이제야 지상으로 내려온 파머는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누구든 넘어질 때가 있다. 높은 데서 넘어지면 멀리 떨어질 것이고, 그런 추락은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 반면 땅에서의 삶은 (우리 본성과 더불어, 세상과 진짜 맺고 있는 땅에 발 딛고 있는 삶은) 우리가 발을 헛딛거나 넘어져도 큰 상처 없이 스스로 일어나 툭툭 털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도록 해준다.

내면과 외면에 관여하면서 살아가기

마음이 부서지는 것(비통함)은 인간적이라 불리는 영역과 함께 나타난다. 사랑과 신뢰가 우리를 저버릴 때, 한때 의미를 지녔던 것이 메말라버릴 때,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꿈이 표류할 때, 치명적인 병을 앓게 될 때, 소중한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비통함에 빠지고 괴로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끌어안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바뀔 수 있을까. 고통은 우리 마음을 부서지게 하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부서질 수 있다. 우선 마음이 메마르면 조각조각 파편나기 쉬운데, 그 폭발력은 고통의 당사자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그리고 고통의 표면적인 원천을 향해 수류탄처럼 던져지면서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반면 마음이 유연하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데, 이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위한 더 큰 능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음이다. 오직 유연한 마음만이 새로운 생명으로 열리는 방식으로 고통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마음을 더 유연하게 할 수 있을까? 파머는 육상 선수가 부상을 입지 않기 위해 다리 근육을 스트레칭하듯이, 마음의 스트레칭 훈련을 권한다. 규칙적인 훈련을 하면 마음이 파편들로 부서질 가능성이 줄어들고, 부서짐으로써 더 넓게 열릴 가능성이 높다. 노년에 들어선 자들에게는 갖은 상실이 늘어나면서 마음 스트레칭의 기회도 함께 늘어난다. 파머는 이렇게 요약한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마취제 없이 인생의 작은 죽음들을 받아들일 때마다 파머의 마음은 스트레칭이 되었다. 틀어진 우정, 그의 글에 대한 비열한 비평, 중요한 과제의 실패 같은 것 말이다. 이때 더 큰 의미로 찾아오는 것은 인생의 작은 즐거움들이다. 낯선 사람의 작은 친절, 유년기의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두 살배기 아이의 깔깔 웃음소리…….
그렇지만 개인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 삶을 가장 큰 규모에서 직간접적으로 규제하는 국가도 과연 유연해질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그는 냉소주의에 굴복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 세계에 가능성과 희망을 품고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개인적, 정치적 삶 속에서 고통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고통을 이용할 것인가. 이는 우리에게 고통이 일어날 때 그것이 새로운 삶을 열어젖히도록 개인적, 집단적으로 마음을 운동시킬 의지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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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2030 뜨는 직업 지는 직업

도서정보 : 최정원 | 2018-09-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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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평균수명, 행복하고 잘살기 위해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까?

미래에는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직업을 가지는 일이 드문 일이 될 것이다. 긴 인생 동안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져야만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늘 신기술과 신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탐구하고 시도해 보아야 한다.
청소년이 살아가야 할 시대는 인공지능이 많은 분야에서 활약하는 4차 산업 시대이다. 청소년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신중하게 알아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제 단순히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목적보다는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살지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진로 탐색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청소년에게 그런 시간을 제공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미래에 부상할 직업은 과연 무엇일까?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바둑 챔피언을 이기면서 인공지능이 모든 일을 사람 대신 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년 안에 지금의 직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래에 인공지능이 대신하기 어려운 일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까?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의료 분야와 환경 보존 관련 직업, 컴퓨터나 로봇 관련 직업들은 향후에 각광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어 나노 로봇으로 질병을 찾고 치료하는 나노 의사, 외국인을 상대로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지원하는 국제의료관광 코디네이터, 아픈 신체 부위를 대체할 수 있는 장기를 만들어 내는 신체 각부 생산자, 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 노화방지 매니저, 미래 식량을 책임질 유전공학 식재료 전문가, 방대한 정보를 분석하는 데이터과학자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인공지능이나 로봇, 기계 등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정서를 만족시키는 예술가들, 예를 들어 작곡가, 화가, 디지털 지휘자 등도 각광받을 것이다.

사라지거나 성격이 변할 직업은 무엇일까?

인공지능(A.I.) 등이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국내 직업을 계산해 보면 향후 20년 내 관리직 등 57%의 직업이 사라진다는 전망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달 발표한 국내 전문가 21명에 대한 설문조사는 더 암울하다. 향후 10년 내에 현재 직업 종사자 10명 중 6명 이상이 인공지능·로봇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는 평가다. 20년 후면 현재 중·고등학교에 재학한 학생들이 생산 인구로서 경제 전반에서 활발히 활동해야 할 시기이다. 이때 사회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윤택한 삶을 누릴 기회를 잃고 양극화의 하단에 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교수, 의사, 초·중·고 선생님, 사서, 교통경찰관, 은행원 등은 지금의 성격과는 매우 다른 형태로 변하거나 사라질 직업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직업들이 어떻게 변화되거나 사라질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청소년들이 이런 직업들을 희망한다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알려주고 있다.

여전히 존속할 직업은 무엇일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체하고 수많은 직업이 사라진다고 해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할 것이다. 다양한 식재료의 섬세한 맛을 다루는 요리사나 독창성과 자유로운 사고와 감성으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작가, 화가, 작곡가 등은 아무리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빠르게 정보처리 능력을 가진 로봇이라도 인간을 따라잡기에는 부족하다. 게다가 경험과 종합적인 판단, 환자와의 소통이 전제가 된 한의사는 기계가 대체하지 못할 영역을 다루므로 적어도 50년 내에는 존속하거나 주가가 상승하는 직업이 될지 모른다.
미래에는 인간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로봇과 함께 의사소통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시대가 될 것이다. 그 시대에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과 더불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창의성과 급변하는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청소년이 10년 후 성인이 되었을 때 이 사회 곳곳에서 필요한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도록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는 물론 부상할 직업, 사라지거나 성격이 변화하는 직업, 여전히 존속할 직업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구매가격 : 9,800 원

미치게 친절한 철학

도서정보 : 안상헌 | 2019-06-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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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문제를 푸는 건 결국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무심코 읽다 끝까지 읽게 되는 철학책

철학사를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미치게 친절한 철학》은 누구나 철학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최대한 쉽게 쓴 철학 입문서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알지만 라캉이나 들뢰즈는 잘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첫 장 고대철학 몇 페이지를 읽고 나면 재미도 없고 이해하기 힘들어서 현대철학까지 읽어 낼 엄두를 못 내기 때문이다.

구매가격 : 15,400 원

우리의 관계를생각하는 시간

도서정보 : 에린k.레너드 | 2019-02-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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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노력해도 인간관계가 좋아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처방전
20년간 수천 명을 상담한 관계 해법의 결정판

연인과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와 동료…… 가까운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즐겁게 살아간다. 물론,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원인도 가까운 사람들이다. 애를 쓰고 노력하고 갖가지 방법을 찾아보지만, 한번 뒤틀린 마음과 한번 멀어진 사이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히려면 정서적 친밀감을 되찾아야 한다. 공감과 책임을 바탕으로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고,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은 튼튼한 관계를 쌓고, 상대방과 더 가까워지도록 도와주는 생각의 힌트를 풍부하게 소개한다. 지금까지 사람 때문에 괴로웠다면 이 책에서 확실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9,600 원

지구별 오디세이

도서정보 : 니코스 하드지코스티스 | 2018-02-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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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구별 여행자의 방랑 노트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고 말했다. 여행을 통해 얻는 지식은 심장 박동처럼 역동적이며 경험과의 상호작용이 숨결처럼 배어 있다. 내가 사는 ‘이곳’이 아닌 낯선 ‘저곳’에 대한 생생한 디테일을 알게 해주며, 새로운 소리, 냄새, 무한대로 펼쳐지는 온갖 상황을 경험하게 한다. 저자는 6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지구가 마치 거대한 한 나라인 것처럼 하나의 목적지로 보고 여행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목표는 오로지 지구의 영혼을 만나는 것뿐. 이 책은 관광이나 이벤트 위주의 여행 경험을 서술한 것이 아니기에 여행 책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한 ‘맛집’도, 많은 이들이 오가는 ‘핫플레이스’도 없다. 단지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인연, 우연히 발견한 새로운 경험의 조각들이 인생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덧입혀져 묘한 끌림을 선사한다. 여행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 여러 에피소드 및 다채로운 사진과 함께 담긴 이 책을 통해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덴마크’ 하면 흔히 뿔 달린 투구를 쓰고 유럽 전역을 약탈하던 바이킹족을 떠올릴 것이다. 혹은 칼스버그 맥주나 안데르센의 동화가 생각날 수도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차갑고 말수 적은 스칸디나비아인답게 덴마크 사람 역시 무뚝뚝할 거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유능하고 부지런하며, 솔직한 매력의 덴마크 친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현실감 넘치는 조언들을 통해 외국인으로서 마주치게 될 크고 작은 문제들을 극복하고, 덴마크 사람들을 보다 깊이 알고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구매가격 : 11,200 원

비와 별이 내리는 밤

도서정보 : 메이브 빈치 | 2019-08-2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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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일주일』 메이브 빈치가 선사하는 한여름 밤의 기적!

“누구든 혼자 있어서는 안 되는 밤이 있다.
그런 밤, 당신에게 필요한 한 권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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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내리는 그리스 여름밤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시간

따뜻한 온기와 기분좋은 편안함이 깃든 소설로 전 세계 4천만 독자의 사랑을 받은 작가 메이브 빈치. 삶을 바라보는 사려 깊은 시선과 인간 본성에 대한 애정, 생생한 캐릭터와 위트 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고국인 아일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메이브 빈치는 2018년 유작인 『그 겨울의 일주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어 한국 독자에게도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소개되는 『비와 별이 내리는 밤』은 2004년 발표된 소설로, 그리스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예기치 못한 인연과 우연으로 만나 서로의 삶에 엮여들기 시작한 네 여행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각자의 삶에서 도망쳐 여행중이던, 완벽한 타인이었던 이들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까지, 그 가슴 따뜻한 여정이 그리스의 아름다운 바다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누구도 혼자여서는 안 되는 밤 서로의 곁을 지켜준
네 여행자의 우정과 사랑

그리스의 작은 마을 아기아안나. 언덕 위에 위치한 타베르나(그리스의 식당)에 여행자 네 사람이 찾아온다. 아일랜드에서 온 간호사 피오나, 캘리포니아 출신 영문학 교수 토머스, 독일의 저널리스트 엘자, 그리고 수줍은 영국인 청년 데이비드. 이들이 타베르나에 도착했을 때 언덕 아래 항구에서 유람선 화재 사고가 발생하고, 타베르나의 주인 안드레아스와 함께 모두 참담하고 슬픈 마음으로 그 비극을 지켜본다.

사실 이들 네 사람은 각자의 사연과 고민을 품고 고향에서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온 것이었다. 피오나는 함께 여행중인 남자친구 셰인을 반대하는 가족들로부터 도망쳐온 것이고, 토머스는 이혼한 아내가 재혼을 하게 되자 아내와 아들이 좀더 편하게 새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안식년을 핑계로 장기 여행을 하고 있다. 방송국에서 뉴스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는 엘자는 방송국 대표인 남자친구와 헤어지며 직장을 그만둔 후 여행중이고, 데이비드는 오직 사업과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 회사를 아들인 데이비드에게 물려주는 것밖에 관심 없는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쳐,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있는 중이다.

어쩌다 한자리에 모였을 뿐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그날 어둠이 내리고 별이 하나둘 떠오를 때까지 서로의 곁을 지키면서 마치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각자의 고민과 사연을 털어놓으며 급격하게 가까워진 네 사람은 그후 아기아안나에 계속 머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타베르나의 주인 안드레아스와 지혜로운 마을 주민 보니와도 점차 관계를 쌓아나간다.

예기치 못하게 서로의 삶에 대해 깊이 알게 되고 관여하게 되면서,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 보니가 멀리 그리스까지 와 이곳 아기아안나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와 그녀의 조언을 들으면서, 네 사람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삶의 문제에 대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각자가 두고 떠나온 삶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들이 조금씩 풀려나가면서 이들 네 사람의 삶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 조금은 다른 자리에 놓여 있게 된다.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소박하고 다정한 이야기의 힘

이 작품에서 메이브 빈치는 누구나 할 법한 고민들을 품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린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이들 네 여행자도 때로는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 애정어린 조언을 무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며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작가는 살갑고 다정한 시선으로 이들의 삶 전체를 보듬는다. 네 여행자와 마을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서로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상대의 아픔과 고민을 자신의 것처럼 함께하며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메이브 빈치 특유의 따뜻함으로 그려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선하고 친절한 마음. 메이브 빈치의 소설은 이렇듯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에 더욱 친근하게 와닿는다. 마을 사람들의 비극을 자기 일처럼 안타깝게 여기며 그들의 슬픔에 최대한 가닿기 위해 진심을 다하는 여행자들의 마음과, 그저 잠깐 스쳐지나갈 뿐인 여행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의 삶이 제 궤도로 들어설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염려는 독자의 마음을 따뜻한 온기로 물들인다. 고단한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이유가 하나쯤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다정한 소설에 빠져들어, 파도가 반짝이는 그리스의 바닷가 마을에, 맛좋은 지중해 음식과 와인이 있는 언덕 위 그 타베르나에 함께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 추천의 말

더없이 매력적인 그리스를 배경으로 메이브 빈치 특유의 마법이 펼쳐진다. 누구보다 뛰어난 작가 메이브 빈치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최고로 발휘된 작품. _선데이 익스프레스

선물 같은 책. 현실을 잊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에 관해서는 메이브 빈치를 이길 작가가 없다. _플레인 딜러

변함없이 훌륭한 스토리텔링, 기분좋은 쾌활함,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소설. _아이리시 타임스

메이브 빈치의 트레이드마크인 단순명료함이 발휘된 이 소설에 팬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다른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친절과 사랑은 승리하며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고전적인 즐거움을 주는 소설. _데일리 메일

생에 대한 긍정과 열정이 깃든 그리스 작은 마을의 삶을 그린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의미 있는 관계에 경의를 표한다. _북리스트

메이브 빈치의 글은 쉽고 단순하다. 놀라울 정도로 쉽고 단순해서, 현대문학의 현란함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단순함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아일랜드 최고의 작가가 쓴, 예기치 못하게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히는 눈부신 작품. _북페이지

그리스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고, 인물들은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되어 마치 아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메이브 빈치의 수작. _초이스

고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행복해질 만한, 기분좋은 소설. _헤럴드


▶ 책 속에서

“너무 적게 말하거나 너무 많이 말하게 될 때가 있죠. 그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아요.” _본문 35쪽

“종종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에요. (…) 가끔 어떤 일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크고 우리의 작은 싸움들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_본문 38쪽

사랑이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위대한 러브스토리를 떠올리더라도 알 수 있다. 사랑은 적당하고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가까이 살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오랜 약혼 기간을 원하고 집세 보증금을 저축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타협이었다. _본문 58쪽

“많이 울고, 웃기도 해요. 그게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이니까요.” _본문 125쪽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려면,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면 우리 모두 존경받을 필요가 있어요.” _본문 276쪽

“우리의 행운은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일이 잘될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결정은 우리가 내리는 거죠.” _본문 307쪽

“기억해요. 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는 것.” _본문 389쪽

“기적이 있다는 걸 알려면 오늘밤을 보기만 하면 돼요. 그걸 믿지 않는다면 더 나아갈 이유가 없는 거니까요.” _본문 417쪽

구매가격 : 10,200 원

나는 행복하기로 선택했다

도서정보 : 김가희 | 2019-04-1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크고 작은 아픔과 마주하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용기와 희망,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시간은 언제인가?

지금 바로 이 시간, 힘들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당신을 위한 찬란한 오늘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기에 가장 큰 아픔을 겪었다. 어떠한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러운 시련이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던 때, 저자는 깨달았다. 꿈을 꾸기에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행복하기로 선택했다』는 세상의 모든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한 위로와 용기의 메시지다.
1장에서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저자의 경험을 통해 짚어보고, 2장과 3장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우선순위로 두는 법,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시작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서는 ‘지금부터 행복을 선택한’ 독자들을 위한 위로와 응원을 풀어낸다.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본 적 있나요?
지금 당신에겐 위로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힘들 때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 세상이 끝난 것 같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행복한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죽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절망스럽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시련이 찬란한 나날을 위한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자신을 위해 처절하게 눈물 흘리라고 말한다. 그 눈물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며, 끝까지 손을 잡고 나아갈 나를 향한 위로이다. 또한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가 아닌 온전히 스스로 나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지이다.


포기하고 싶더라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세요
길이 끝나는 곳에 또 다른 길이 시작됩니다

또 다른 길을 찾는 첫 번째 발걸음은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다. 행복을 선택한다는 말은 남이 아닌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명확해지고 결단이 쉬워진다. 주변에 신경 쓰기보다는 나 자신에 집중하며 열정을 다해 도전할 에너지가 생긴다.

추운 계절이 지나면 따스한 봄이 오듯 당신을 위한 가장 좋은 계절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은 지루하고 힘들지라도, 이 시간은 당신을 빛내줄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이다.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으며 나다운 행복을 만들어가길 응원한다.

구매가격 : 10,00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용의주도한 전두환 일당, 쿠데타를 일으키다

광주항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우선 전두환?신군부 세력의 10?26 이후 행적을 살펴야 한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은 박정희가 죽자 일찍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겠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그리고 곧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한 12?12쿠데타를 일으킨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 정승화를 비롯한 군 상층부의 무능력, 미국의 방관, 일본의 지원 등으로 쿠데타는 결국 성공하고 만다. 전두환 일당은 쿠데타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하게 됐다.

12?12쿠데타가 성공하자 보안사는 1980년 2월부터 전두환 권력을 만들기 위해 K-공작(K는 ‘King’의 약자)을 실시했다. K-공작은 언론을 조종, 통제, 회유한 작전이다. 보안사가 언론사 간부들을 접촉해 ‘현재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안 된다’, ‘3김은 안 된다. 사회 안정을 위해 군부가 집권해야 한다’ 등의 취지의 보도를 하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했다. 곧 전두환?신군부가 한국을 이끌 세력, 안전 구축 세력으로 퍼뜨리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보안사에 이어 또 하나의 정보 기관을 손에 움켜쥐게 된다.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된 것이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이로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찾아온 서울의 봄, 그러나…

서울의 봄은 1980년 2월 29일 대규모 사면 복권 이후, 더 넓게는 1980년 초 정치인들의 신년사가 나오고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될 무렵부터 5·17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으니 한국 사회가 이제는 민주화로 나아갈 거라는 기대가 이 단어 속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신군부 세력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권이 단결하고 최규하 쪽과도 연결하면서 국회를 활용해 계엄을 해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때에도 서로 각자 대권 행보를 하며 분열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결국 5?17쿠데타가 성공하자 김대중은 ‘소요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됐고, 김영삼 또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학생 운동 세력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학생회를 부활시켰고, 병영 집체 훈련 거부 등 민주화 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전두환?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노동 쟁의도 크게 늘어나는 등 사회 각계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분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북항쟁이다. 이 항쟁은 단순히 노조 집행부와 그 반대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그간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에서 누적된 불만, 분노가 노조 문제를 계기로 분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80년 5월이 되자 대규모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게 된다.

신군부가 서울역 시위를 그대로 놔둔 이유는?

1980년 5월 13일 밤 학생회장단이 모여 토론한 끝에 교문을 박차고 거리에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대로 각 대학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인다. 14일에도 서울 시내 21개 대학에서 약 7만 명이, 지방 11개 대학에서 약 3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15일에는 최고 7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신군부는 충분히 이 시위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왜 막지 않았을까? 광주에서처럼 시민들이 이 시위에 대거 호응하면 신군부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왜 막지 않았을까? 그 이전부터 진압군 투입 준비도 이미 마친 상태였는데.

신군부는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미리 용의주도하게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 ‘거리에 나오는 걸 방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끔 한다. 그런 것 등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국보위 같은 걸 만들어 권력을 장악한다’, 이런 계획을 짜놓은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경우 학생과 시민들이 큰 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비해 군을 미리 움직여 서울과 전국 주요 지역에 배치해놓았다.

이러한 조치는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크게 확대되는 것에 대비한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 학생 시위가 커지면서 상황이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걸 빙자해 5월 17일 쿠데타 이후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민주화를 완전히 짓밟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굉장히 많은 학생, 시민이 봉기할 수 있다. 그런 봉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 그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5?17쿠데타 이후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 일당은 그 병력의 상당 부분을 광주로 이동시켰다. 광주를 아주 단단히 진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일본은 왜 5?17쿠데타를 도왔나?

10·26 이후 전두환 일당은 미국에는 절대적으로 보안을 취하면서도 일본에는 12·12쿠데타 계획을 알려주는 등 일본과 교감을 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이후 일본 측은 소련의 북한 남침 사주설을 포함해 북한의 남침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6번이나 전두환 일당에게 ‘자료’를 내주었다. 더군다나 일본 내각조사실은 북한이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남침하기로 결정했다며 날짜까지 콕 집어서 신군부에게 첩보를 건넸다. 그러나 이 첩보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났지만, 전두환?신군부는 이 남침설과 학생 시위를 구실 삼아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게 되는 국보위가 설치된다. 이것이 곧 5?17쿠데타이다.

일본이 이토록 전두환?신군부를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후 7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 우익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본은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새로운 정권으로 이 세력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는 데 일본의 지원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두환 일당은 왜 제2쿠데타 날짜를 5월 17일로 정했나?

1980년 5월 정치권은 국회 소집에 합의했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전두환·신군부를 규탄했다. 이에 전두환 일당은 10·26 직후 선포돼 반년 넘게 계속된 비상 계엄을 지속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두환 일당은 또 하나의 쿠데타를 계획하며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한다. 이 시국 수습 방안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비상 계엄 전국 확대였고, 둘째는 국회 해산, 셋째는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였다. 비상 계엄 전국 확대는 군인들이 전권을 가지고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것은 유신 헌법조차 짓밟으면서 강권,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겠다는 음모였다. 그와 함께 시국 수습 방안에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 규제 방안 등도 들어 있었다.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의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인 5월 20일 이후 이 시국 수습 방안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 순방 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는 17일로 쿠데타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다. 이렇게 한 데에는 5월 20일 임시 국회가 소집되고, 5월 22일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대학생들이 다시 대규모 데모를 벌일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17일 쿠데타를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다. 이로써 전두환 일당은 1979년에 12·12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1980년에 다시 5·17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다.

광주항쟁, 왜 일어났나?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5월 14~16일 민주 성회 때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그다음 날 아침에 자동적으로 교문에 모여 시위를 하자.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광장에 모이자’고 약속한 대로 교문으로 온 학생들이 많았다. ‘계엄 해제’를 외치는 학생들을 향해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봉 등으로 마구 구타했다. 정문 앞에서 해산당한 학생들은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내로 나간 학생들은 수백 명 단위로 비상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학생 시위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고, 경찰력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한 것이다. 게다가 서울 동국대에 있던 11공수여단까지 광주로 이동시켰고, 여기에 더해 3공수여단도 광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후 공수 부대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른다. 그걸 본 광주 시민들은 수그러들기는커녕 격렬하게 항의를 한다. 이제 시위는 학생에서 시민들로 확대되었다. 공수 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고, 공수 부대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단순한 학생 시위가 공수 부대의 만행으로 항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공수 부대는 왜 광주 시민에게 폭력을 휘둘렀나?

전두환?신군부 세력은 5?17쿠데타로 비상 계엄을 전국에 확대한 뒤 이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서울, 광주 지역 등에 이미 진압 부대를 투입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군 투입이 요구되는 사태가 발생할 때에는 강경한 응징 조치를 하겠다고 정해놓고 있었다. 초동 단계부터 강경 진압 등 ‘위력 과시’를 해 시위 군중을 위축시킴으로써 ‘시위 확산’과 ‘격렬화’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5?17쿠데타를 일으켰는데도 서울에서는 시위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그쪽을 철저히, 과감히 타격하자. 상대방이 다시는 시위를 일으킬 수 없도록 끝까지 추격해 궤멸적 타격을 입히자’, ‘우리에게 저항하는 자(세력)들은 이렇게 당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자’고 결의를 다진 것이다. 그래서 경찰로도 시위를 막을 수 있는데도 7공수여단을 시내 한복판으로 보낸 것이고, 그에 더해 서울에 있던 11공수여단 병력까지 광주로 급히 보내고 곧이어 3공수여단 병력을 또 보낸 것이다.

더군다나 광주는 자신들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였다. 그 때문에도 광주를 더 무자비하게, 위력적으로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수 부대가 만든 생지옥, 심지어 성폭행까지…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다

19일 새벽부터 1,000여 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 군중의 어깨, 다리 등을 마구 찔러 금남로 일대는 삽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건물 안으로 도망가는 시위 군중을 추적해 끄집어내어 길가에서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겼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마구 때렸다. 겁에 질린 여자들까지 아랫배를 걷어차고 가슴팍을 치거나 대검으로 상의를 마구 찢기도 했다. 심지어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도 있었다.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본 광주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오후 들어 수만 명의 민중이 금남로 일대를 가득 채웠다. 19일부터 본격적으로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왜 시민들은 성난 민중으로 변해 그 무섭고 무자비한 공수 부대와 적극적으로 맞붙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공수 부대의 만행,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만행에 분노해 그야말로 피가 끓는 시민들이 궐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부끄러움’의 정서다. 18일 공수 부대의 만행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이 시민들을 자꾸 싸우게 했고, 그것이 항쟁으로 바뀌는 추동력이 되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대학살, 21일 애국가와 함께 울린 총성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렸다. 21일 금남로 일대에서 이뤄진 발포로 최소한 54명이 숨지고 5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추정됐다. 21일 3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보급을 받은 실탄은 M16 소총탄 123만 발, 살상력이 큰 40mm 고폭 유탄 316발, 한꺼번에 여러 명을 해칠 수 있는 세열 수류탄 4,880발이었다. 이 중 48만 4,484발이 실제로 사용됐는데, 공수 부대원 1인당 142발을 쏜 셈이다. 광주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인 대학살이었다. 심지어 이날 오후에는 헬기 기관총 소사까지 있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 광주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경악할 만한 사태가 벌어지자 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이제 우리도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여러 지역으로 갔다. 일부 시위대는 10여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화순 탄광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을 입수했고 나주경찰서 무기고와 여러 파출소에서 M1 소총, 카빈 소총, 실탄을 가져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장성, 담양, 영광, 보성, 무안, 영암, 함평, 강진, 해남, 완도, 곡성, 구례 등 전남 각 지역으로 가서 무기와 탄약을 가져왔다.

이처럼 1980년 5월 21일에는 공수 부대의 정조준 사격, 헬기 기총 소사 등 시민을 향한 발포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러자 광주 시민들은 전남 전 지역으로 나아가 무기를 확보했고, 그러면서 이제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전체가 들끓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를 확보하면서 시민군이 등장하게 된다.

왜 전두환 일당은 일부러 사태를 더 악화시켰나?

21일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다. 이날 오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시위가 확산된 이유는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유언비어 유포와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 담화문을 접한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왜 광주항쟁이 일어났는지, 시민들이 왜 싸웠는지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되지 않았고, 공수 부대의 만행에 대해서도 전혀 말하지 않았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이희성이 발표한 것과 똑같이 조작, 허위 사실,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발표였다. 광주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분노한다.

그런데 왜 이런 발표를 연달아 한 것일까? 21일, 22일 연속해 일어난 일들은 전두환·신군부가 일부러 상황을 악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왜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은 짓을 계속 저질렀을까? 전두환 일당은 본때를 보여 자신들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다. 그래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두환·신군부 유신 잔당은 이희성 담화문이 의도한 것과 똑같은 의도로 광주와 일반 국민을 격리 차단해 오로지 유혈 사태를 불사하는 폭압, 폭력의 군홧발로 광주를 짓밟고 일반 국민들에게 허위 사실을 사실로 믿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자신들에게 저항하면 광주처럼 당한다는 협박용으로 일부러 5월 21일 이희성 발표에 이어 22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발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1공수여단의 어느 하루, 어린이 사살→오인 총격전→분풀이 학살

24일, 공수 부대가 어린이까지 사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트럭에 나눠 탄 제11공수여단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이동하던 중 진월동 원제마을 저수지 옆을 지나가게 된다. 그때 저수지에서는 15명가량의 소년들이 물놀이를 하며 멱을 감고 있었다. 공수 부대는 이 아이들에게 총을 쐈다. 결국 열세 살의 한 소년이 그 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이어서 공수 부대는 근처에 있는 진제마을 쪽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마을 뒷동산에서 놀던 아이들한테 발포했다. 여기서도 열 살짜리 어린이 한 명이 숨졌다. 이 부대는 진제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하수구에 숨어 있던 박연옥을 향해 발포했다. 박연옥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후 이 부대는 효덕초등학교 앞을 지나 광주-목포 간 국도를 이동하다가 갑자기 집중 사격을 당했다. 공수 부대를 공격한 건 마을 양쪽에 매복해 있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었다. 공수 부대를 시민군으로 착각해 공격한 것이었다. 공수 부대도 바로 응사했다. 이 오인 총격 사건으로 장교 1명을 포함한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보병학교 교도대가 빠져나간 후 11공수여단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또 일으켰다. 근처 마을에 들이닥쳐 3명의 젊은이를 끌고 가 ‘즉결 처분’을 해버렸다. 엉뚱하게 화풀이로 마구잡이 보복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평생 해서는 안 될 일을 11공수여단은 하루에 수차례나 저질렀다.

전두환·신군부는 27일 왜 그토록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나?

27일 마지막으로 도청에 남아 있는 시민군은 200여 명이었다. 이에 반해 진압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3?7·11공수여단, 20사단, 31사단, 전교사 예하 병력 등 총 2만 317명이었다. 이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광주 시내로 진입했다. 이 가운데 상무 충정 작전에 전투 요원으로 실제 투입된 계엄군 병력은 6,168명이었다. 그중 작전을 주도하는 특공조로 편성된 공수 부대원은 장교 37명을 포함해 317명이었다. 시민군의 숫자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전두환 일당은 왜 이토록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일까? 이 또한 5월 18일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18일 오후 4시경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하기 전에는 학생 시위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경찰력으로도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5월 27일에도 마찬가지로 군이 아니라 경찰만 투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엄청난 병력을 투입해 적군을 상대로 작전을 펴는 것처럼 한 것이다.

“5월 18일, 19일에 광주 시민들을 상대로 이른바 위력 과시, 선제 타격이라는 걸 하지 않았나. 전두환·신군부 권력 탈취에 저항하는 세력을 궤멸시키다시피 제압해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그래서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5월 19일 시민들이 공수 부대와 맞서면서 광주항쟁이 본격화되고, 그렇게 되면서 오히려 계엄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까지 맞게 됐다. 그야말로 전두환·신군부 쪽이나 계엄군으로서는 굉장한 치욕이라고 볼 수 있는 상태를 자초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27일에 그런 식으로 보복해 만회하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민군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저항 세력을 초토화하고 시민들에게 특별히 위력을 과시해 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날 시민군은 15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체포됐다.

왜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가?

그동안 전두환은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정보 수집, 수사만 했다. 광주사태 진압과는 명령, 지휘 계통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주 학살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비선 라인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에서 공수 부대가 한 행위는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탈취 방안이던 ‘시국 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일당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 많은 학생, 시민들이 반발하고 투쟁과 시위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 예상 아래 서울과 광주 등 중요 지역에 공수 부대를 비롯한 병력을 이미 배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5·17쿠데타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위력을 과시해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리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전두환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5월 21일, 자위권이 발동된다. 자위권 발동을 국방부 장관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회의가 21일 오전에 열리는데, 전두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실질적 권력자인 전두환이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1시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자위권을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걸로 밝혀졌다. 이튿날 22일, 전두환은 공수 부대원들에게 격려금을 하사하도록 지시한다. 또한 전두환은 25일 최규하로 하여금 광주로 내려가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5월 27일 새벽에 벌어진 상무 충전 작전에서도 전두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전두환은 광주에서 진행된 여러 작전이나 자위권을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했고, 가장 중요한 27일 작전을 결정하는 자리에도 참석했다. 미국 또한 전두환이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군 실력자라고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두환은 27일 상무 충정 작전을 몇 시간 앞두고 사병들에게 거액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보면 분명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정신은 살아 숨 쉬며 6월항쟁으로 승화했다

광주항쟁은 27일 마지막 시민군들이 진압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곧 광주의 진실 알리기 운동이기도 했다. 광주항쟁은 특히 젊은이들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광주의 진실, 이것을 접한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1980년대 내내 되물었다. 잔인한 유혈 사태, 시민을 향한 발포, 그러한 공수 부대에 과감히 맞서 싸운 시민들, 이 모습들은 1980년대 내내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했다.

학생들은 1984년경부터 학생 운동의 폭을 넓혀갔는데, 주된 활동의 하나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학가는 4월에 4·19 기념을 겸해 4월 투쟁을, 5월에는 여러 날에 걸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각종 교내 활동과 시위 투쟁을 벌였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은 그 자체가 반전두환 투쟁이었고 민주화 운동이었다. 5월 투쟁은 학생 운동을 확장하는 지렛대였다.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광주항쟁은 어떠한 역사적 역할을 했는가. 광주항쟁은 갑오농민전쟁(1894년), 3·1운동(1919년), 4월혁명, 부마항쟁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변란을 일으킨 집단이나 독재자의 영구 집권욕에 의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또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항쟁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광주항쟁을 꼽을 수 있다.”

광주항쟁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군부의 유신 잔당들이 ‘서울의 봄’을 깨부수고 제2의 유신 체제를 만들고 있는데 그러한 변란에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다면, 그런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정의롭게, 올바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도 광주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길이 남을 역할을 했다. 4월혁명과 똑같이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민주화, 자주화 운동의 추동력이었다. 광주항쟁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뜨겁게 불을 지폈다. 그뿐 아니라 6월항쟁으로 전두환·신군부가 무릎을 꿇고 결국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오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면에서 광주항쟁은 한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잊혀서는 안 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보위, 무소불위 권력 휘두르다

1980년 5월 27일 무력으로 광주항쟁을 짓밟은 전두환은 곧이어 국보위를 설치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국보위를 통해 전두환 일당은 부정 축재자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공직자 등 1만여 명을 숙정했다. 또한 언론계에도 칼날을 들이대 언론 검열에 비협조적인 기자들을 추방했다. 특히 광주항쟁 때 있었던 보도 검열 거부, 제작 거부를 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을 했다. 당시 기자의 30퍼센트가 쫓겨났는데, 과히 언론 대학살이라고 할 만했다. 전두환 일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들을 연행해갔고, 정치인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했다. 이때 몰수한 재산 규모는 1,133억 원에 달했다.

인권 유린과 잔혹함의 상징,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는 국보위에서 시행한 대표적인 사업이다. 이 사업은 전두환 일당의 인권 유린과 잔혹함을 상징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전두환 일당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없이 1980년 8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 6만 755명을 체포했다. 이 중 3,25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1만 7,761명이 훈방 등의 조치를 받았다. 이 사람들을 제외한 3만 9,742명이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1일까지 11차에 걸쳐 전국 각지의 군부대에서 소위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았다.

이 중에는 13세 소년에서 70대 노인까지 있었고 군 장성, 언론인, 노조원,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돼 있었다. 특히 민조 노조 운동가들이 표적이 되어 끌려갔다. 원풍모방을 비롯해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한일도루코, 청계피복, 원풍타이어 등의 노조 간부 22명 또는 그 이상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4주간 순화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강창성은 박정희의 지시로 하나회를 대대적으로 수사하던 사람으로, 전두환 일당이 그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을 한 것이었다.

전두환은 이 사업이 국보위 사업 중에서 핵심 사업이라고 강조하며 범국민적, 범국가적으로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강한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전두환의 주문이 있었기에 삼청 교육은 잔혹하게 시행됐고, 수많은 사망자 등 피해자를 양산했다. 공식 사망자만 54명으로 밝혀졌고,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은 397명, 행방불명자 4명, 삼청 교육으로 인한 상이자는 2,768명이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일본은 전두환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대중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연행됐다. 계엄사는 1980년 7월 4일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들이 국민연합을 주축, 전위 세력으로 하여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대중 선동에 의해 학원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민중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유혈 혁명 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 집권하려는 내란 음모 행위의 전모가 드러났다.”

계엄사 합수부는 7월 12일 김대중 등 37명을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했다. 이어서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하나의 사건을 조작했다. 계엄사는 내란 음모 이외에도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그 수괴로 있으면서 북괴의 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 사용한 혐의 등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전두환 일당이 문제 삼은 일본에서의 활동을 일본 정부가 반드시 문제 제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전두환?신군부와 일본 정부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일본은 전두환 일당이 5?17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도록 남침 정보를 조작해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결국 일본 정부는 김대중의 기대와 달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은 사형이 구형되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도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미국은 한국이 강력한 반공 기조를 유지한다면, 독재 정권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19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이 취임 직후 첫 번째 손님으로 전두환을 미국에 초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을 강력히 지지했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되다

전두환은 2단계를 통해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먼저 최규하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기들이 만든 헌법에 따라 또 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다. 1980년 8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작성했다. 그리고 전두환·신군부의 강박에 의해 8월 13일 김영삼이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8월 14일에는 김대중 등 24명에 대한 군사 재판이 시작됐다. 8월 16일에는 마지막 수순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했다. 8월 21일 전국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 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9월 29일 이번에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했다. 10월 22일 국민 투표로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었고, 1981년 2월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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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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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

18~20권의 주제는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이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평가한다.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두 번째 해방은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인 6월항쟁도 1987년 대선에 패배하는 등 갖은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한국 사회에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6월항쟁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20권에서는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전개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즉 이 세 권을 통해 6월항쟁 전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6월항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눈으로만 바라다본 측면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의 순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료 등을 꼼꼼히 살피며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또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특히 장세동이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게 6월항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1987년 5·26 전면 개각으로 장세동은 안기부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라고 서중석 교수는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이심전심으로 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강경 일변도로 밀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책에는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 지시하고 6시간 만에 번복한 이유, 미국의 역할 등도 세세하게 담았다. 그럼으로써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세세히 분석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과 김영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6월항쟁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아주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항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은 것도 항쟁이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각지에서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중석 교수는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성취한 승리였다.

7·8·9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했나

‘도도한 민주화 물결’에서 7·8·9월에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투쟁으로 장기간 존속돼온 노동 통제 체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대대적인 탈법 파업 투쟁으로 노동 기본권을 유린한 노동 관계법을 무력화했다. 그 이전까지 사용자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노동 조건을 노사 당사자의 단체 교섭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으로 노조 활동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 대중을 단련시키고 사회, 정치 의식과 자신의 조직을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비약을 이뤄냈다. 한계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대규모였지만 계획적, 조직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조직적인 지도력도 약해서 투쟁 성과가 조직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 연대 투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대개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투쟁 후반기에 전두환 정권, 사업주, 언론 등 지배 세력의 ‘불순 세력 개입’, ‘좌경 용공’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에 탄압까지 있자 노동자 대투쟁은 끝을 맺었다.

1987년 대선 패배, 누구의 책임인가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신군부 정권에서 그래도 낫다는 얘기를 듣던 자들조차도 자신들의 협력 행위를 합리화하려고만 했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신군부 집권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추종했던 자나 언론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6월항쟁에서 쌓아올린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켰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은 상당 기간 더 이상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4월혁명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대신 수십 년간 반공 독재에 협력한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DJ 당파, YS 당파로 명명하고 하나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몰아세웠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신적 지주가 약화되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상당 부분 방황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

6월항쟁의 배경,
개헌 투쟁과 전두환의 반격

* 2·12총선 후 개헌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 5·3 인천 사태 이후 전두환은 어떤 방식으로 반격전을 폈나
* 남북 이산가족 첫 상봉은 어떻게 성사됐나

전두환·신군부 권력을 뒤흔든 1985년 2·12총선 이후 재야 운동 세력은 민통련으로 집결된다. 또 학생 운동권은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을 벌이고 구로 동맹 파업 등 노학 연대 투쟁에 나선다. 새로 등장한 선명 야당은 직선제 개헌 장외 투쟁을 전개해 개헌 열기는 최고조로 오른다. 그러나 5·3 인천 집회에서 운동권이 미국·전두환 정권뿐만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이 이끄는 야당도 공격하자, 전두환의 총반격이 시작된다. 전두환은 비상 조치를 만지작거리며 유성환 국시 사건, 금강산댐 사건, 건국대 사태 등 대형 사건을 잇달아 일으킨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권은 이 과정을 천착하면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통해 6월항쟁의 주인공인 시민 세력이 부상하는 것을 주목한다.

구매가격 : 10,85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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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

18~20권의 주제는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이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평가한다.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두 번째 해방은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인 6월항쟁도 1987년 대선에 패배하는 등 갖은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한국 사회에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6월항쟁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20권에서는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전개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즉 이 세 권을 통해 6월항쟁 전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6월항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눈으로만 바라다본 측면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의 순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료 등을 꼼꼼히 살피며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또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특히 장세동이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게 6월항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1987년 5·26 전면 개각으로 장세동은 안기부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라고 서중석 교수는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이심전심으로 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강경 일변도로 밀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책에는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 지시하고 6시간 만에 번복한 이유, 미국의 역할 등도 세세하게 담았다. 그럼으로써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세세히 분석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과 김영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6월항쟁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아주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항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은 것도 항쟁이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각지에서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중석 교수는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성취한 승리였다.

7·8·9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했나

‘도도한 민주화 물결’에서 7·8·9월에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투쟁으로 장기간 존속돼온 노동 통제 체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대대적인 탈법 파업 투쟁으로 노동 기본권을 유린한 노동 관계법을 무력화했다. 그 이전까지 사용자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노동 조건을 노사 당사자의 단체 교섭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으로 노조 활동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 대중을 단련시키고 사회, 정치 의식과 자신의 조직을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비약을 이뤄냈다. 한계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대규모였지만 계획적, 조직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조직적인 지도력도 약해서 투쟁 성과가 조직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 연대 투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대개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투쟁 후반기에 전두환 정권, 사업주, 언론 등 지배 세력의 ‘불순 세력 개입’, ‘좌경 용공’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에 탄압까지 있자 노동자 대투쟁은 끝을 맺었다.

1987년 대선 패배, 누구의 책임인가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신군부 정권에서 그래도 낫다는 얘기를 듣던 자들조차도 자신들의 협력 행위를 합리화하려고만 했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신군부 집권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추종했던 자나 언론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6월항쟁에서 쌓아올린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켰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은 상당 기간 더 이상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4월혁명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대신 수십 년간 반공 독재에 협력한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DJ 당파, YS 당파로 명명하고 하나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몰아세웠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신적 지주가 약화되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상당 부분 방황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

6월항쟁의 전개,
현대사를 바꾼 최대 동시다발 시위

* 은폐됐던 박종철 고문 사망 진실, 어떻게 드러났나
* 6월항쟁이 장엄한 항쟁으로 피어오른 이유는?
* 전두환은 왜 군 출동 지시를 번복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권에서는 민주대연합과 동시다발 투쟁이 박종철 추도 대회에서 결합되고,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또 국본과 자연발생적인 과감한 투쟁의 상호관계,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5·26 전면 개각과 안기부장 교체, 전두환과 노태우 측의 미묘한 갈등이 6월항쟁에 미친 영향에도 각별히 예의주시했다.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구매가격 : 10,85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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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

18~20권의 주제는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이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평가한다.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두 번째 해방은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인 6월항쟁도 1987년 대선에 패배하는 등 갖은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한국 사회에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6월항쟁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20권에서는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전개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즉 이 세 권을 통해 6월항쟁 전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6월항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눈으로만 바라다본 측면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의 순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료 등을 꼼꼼히 살피며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또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특히 장세동이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게 6월항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1987년 5·26 전면 개각으로 장세동은 안기부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라고 서중석 교수는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이심전심으로 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강경 일변도로 밀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책에는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 지시하고 6시간 만에 번복한 이유, 미국의 역할 등도 세세하게 담았다. 그럼으로써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세세히 분석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과 김영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6월항쟁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아주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항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은 것도 항쟁이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각지에서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중석 교수는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성취한 승리였다.

7·8·9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했나

‘도도한 민주화 물결’에서 7·8·9월에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투쟁으로 장기간 존속돼온 노동 통제 체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대대적인 탈법 파업 투쟁으로 노동 기본권을 유린한 노동 관계법을 무력화했다. 그 이전까지 사용자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노동 조건을 노사 당사자의 단체 교섭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으로 노조 활동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 대중을 단련시키고 사회, 정치 의식과 자신의 조직을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비약을 이뤄냈다. 한계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대규모였지만 계획적, 조직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조직적인 지도력도 약해서 투쟁 성과가 조직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 연대 투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대개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투쟁 후반기에 전두환 정권, 사업주, 언론 등 지배 세력의 ‘불순 세력 개입’, ‘좌경 용공’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에 탄압까지 있자 노동자 대투쟁은 끝을 맺었다.

1987년 대선 패배, 누구의 책임인가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신군부 정권에서 그래도 낫다는 얘기를 듣던 자들조차도 자신들의 협력 행위를 합리화하려고만 했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신군부 집권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추종했던 자나 언론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6월항쟁에서 쌓아올린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켰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은 상당 기간 더 이상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4월혁명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대신 수십 년간 반공 독재에 협력한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DJ 당파, YS 당파로 명명하고 하나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몰아세웠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신적 지주가 약화되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상당 부분 방황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

도도한 민주화 물결,
전두환·노태우의 항복 선언, 그 후

* 노태우 6·29선언을 둘러싸고 왜 논쟁이 격화됐나
* 7·8·9월에 노동자는 어떻게 투쟁을 전개했나
* 1987년 대선 패배에서 양김과 운동권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6·29선언에 대해 노태우와 전두환은 자기 공로라고 서로 싸우면서, 자신들도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에 대한 반박을 구체적 자료로 낱낱이 추궁했다. 6·29선언이 나온 것은 군이 출동할 수 없어서였다. 당시 비상 조치가 발동되지 않은 데 대한 종래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전두환과 군, 노태우와 민정당, 미국의 입장을 각각 면밀히 검토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권은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아울러 총선에서 소선거구제와 지역주의의 관계를 중시했고. 7·8·9월 노동자 대투쟁, 통일 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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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뒤에 남는 것들

도서정보 : 임수희 | 2020-01-2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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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불신의 사회에서
처벌만으로 다할 수 없는 정의를 질문하다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한 젊은 아빠와 그의 두 친구가 나란히 피고인석에 섰다. 평범해 보이는 이 청년들이 기소된 죄명은 무려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공동상해). 2명 이상이 공동하여 상해죄를 저지르면 원래 정해진 형의 1/2까지 가중하여 처벌하도록 만든 특별법상의 범죄였다. 무슨 일이었을까.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 하나가 있는 젊은 부부는 불화로 이혼소송을 하게 되었고, 별거를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젊은 아빠는 아이와도 헤어지게 된다. 아이의 아빠는 어느 날 아이를 보고 싶다고 아내에게 연락을 해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아이 아빠가 아이를 건네받자 밖에서 아이 아빠가 미리 부탁해 와있던 두 친구가 나타나 아이 엄마를 양쪽에서 붙들었다. 그리고 아이 아빠는 아이를 안고 나가버렸다. 이 과정에서 아이 엄마의 손목이 삐었다.

당연히 아이 엄마는 경찰에 신고했고, 아이 아빠와 친구들은 입건이 된다. 곧 후회를 하고 아이를 며칠 안에 돌려주었지만, 이미 아이 아빠와 친구들은 형사사건의 피의자가 되었다. 경찰은 아이를 데려간 부분은 아이 아빠가 아이의 친권자이고 아이를 곧 돌려주었기에 문제 삼지 않았지만, 친구들을 시켜서 아이 엄마의 손목을 삐게 한 잘못은 2인 이상이 공동하여 상해죄를 저지른 것이므로 셋 다 기소가 된 것이다.

두 둘도 안 된 아이를 엄마와 강제로 떼어놓다니, 그 과정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겪은 충격과 공포, 고통을 생각하면 이는 중차대한 범죄행위다. 한편으로는 아빠도 친권자인데 아이를 왜 못 만났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혼 와중에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아이는 금방 엄마에게 돌아갔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세 피고인은 어떤 판결을 받고, 어떤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일까? 기소가 되었으니 반드시 재판을 하고 판결이 선고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형사사법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어떤 형을 선고해야 마땅한 것일까? 피고인들은 아이를 돌려주었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으며, 제출된 수사기록을 증거로 하는 데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증거조사절차도 서류로 신속하게 끝났다. 판사가 그저 형을 정해서 선고하는 절차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형을 선고하고 나면, 모든 상황은 끝나는 것일까? 피고인들이 형을 선고받아 징역을 가거나 벌금을 내면 이 일의 당사자들, 특히 피해자인 아이의 엄마와 아이의 삶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이의 아빠가 벌금을 내고 징역을 가고 나면, 이혼 후 양육비를 받아야 하는 아이의 엄마와, 부모가 이혼을 하더라도 엄마와 아빠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할 아이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단지 법은 처벌을 하고 나면 끝인 것일까? 가해행위 안의 다양한 역동을 보지 않은 채, 수사와 기소, 재판에서 ‘단지 남자들이 공동하여 피해 여성을 꽉 붙잡아 손목을 삐게 한 행위’에 대해서만 미시적으로 다루는 것은 맞는 것일까?

“어떤 가해행위가 있을 때, 그 행위가 침해하는 것은 단순히 국가가 금지한 어떤 법 위반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준 것과 함께 아이의 성장 과정과 발달 과정에 해악을 미치고, 아이 엄마에게는 신체적 손상과 정신적 충격, 심각한 고통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을 하더라도 계속되어야 하는 부모자식 관계, 자녀의 양육을 위해 맺어가야 하는 부모 간의 협력 관계가 파괴된 것이고, 이 파괴된 관계가 초래하는 가족 공동체 내에서의 공포와 긴장, 그리고 깨어진 평화와 희망의 부재까지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 관여된 가족 내 모든 사람들의 ‘삶의 파괴’를 의미합니다.”(32쪽)

그렇다면 질문이 조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이 사건의 당사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고, 특히 이 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피해는 어떻게 해야 더 깊이 있게 회복될 수 있는지 함께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죄를 저질렀을 때 그에 대한 처벌을 통해 대가를 치르는 것도 피해자의 피해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정말 충분한 것일까? 우리의 사법 절차 안에서 좀 더 깊이 있는 피해의 회복을 도모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시작한다.

처벌을 넘어선 정의를 찾아가는 여정

이 책의 저자는 판사다. 추상적인 법 이론을 다루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실제의 사람들이 얽혀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하며 법적 판결을 내리는 실무자다. 이 책의 저자인 임수희 판사는 판사로 재직하며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법정에서 마주하며, 재판절차가 단지 시시비비의 판단만을 할 뿐 사람들의 삶에는 청사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고민해왔다. 그러던 와중 회복적 사법이라는 패러다임에서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삶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사법이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RJ)이란 범죄자 처벌에 초점을 맞춘 현재의 형사사법체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범죄로 인한 피해의 실질적 회복과 진정한 책임을 기초로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피고인과 피해자 등 이해관계자가 대화를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그로써 지역공동체의 평화 또한 추구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그러다 형사재판을 담당하던 당시 우연히 형사사법에 회복적 사법을 적용하는 법원의 시범실시 사업을 담당하게 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공감적 대화를 통한 이해, 사과, 치유, 진정한 책임과 용서, 피해회복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목도했다.

그는 재판실무의 경험과 직접 진행했던 형사재판 회복적 사법 시범실시사업을 통해 “응보사법과 회복적 사법은 수레의 양축처럼 양자가 모두 있어야 하고, 각각 단단히 서야 다른 하나도 단단히 설 수 있으며 형사사법이라는 수레를 제 기능대로 굴러가게 할 수 있다고 보게 되었”(247~248쪽)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아직 우리의 사법절차에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회복적 사법의 이야기를 조단조단 풀어놓으며 우리를 회복적 사법의 여정으로 초대한다.

이 책은 형사사법의 한계로부터 출발해, 회복적 사법의 핵심인 ‘대화’와 그 대화가 펼쳐지는 회복적 사법의 장(場)들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형사사법절차를 따라 경찰, 검찰, 법원 각 단계의 회복적 사법에 관한 현안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응보사법으로 다시 돌아와, 그것이 여전히 어떻게 중요한지, 그리고 회복적 사법과 응보사법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해보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피해자의 자리와 목소리

저자는 이 회복적 사법의 여정 속에서 피해자의 자리와 목소리를 중요하게 짚는다. 헌법상 피해자도 재판에서 진술할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권리가 있지만, 범죄 가해자의 처벌에 집중하는 한국의 형사사법절차는 피해자가 수동적, 객체적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세팅되어 있다. 현재 우리 형사절차 속에서 범죄사건의 ‘피해자’는 수사단계에서는 ‘참고인’, 재판단계에서는 ‘증인’이 된다. 범죄피해의 당사자이지만 피해자는 범죄 수사나 공판에서 주체적 지위로 나설 수 없고, 범죄자와 국가 사이의 대립구도 속에서 증인 혹은 참고인이라는 증거방법에 불과한 지위에 놓이는 것이다.

“즉, 피해자의 진술은 피고인의 유죄 입증을 위해 필요한 내용을 위주로 신문되고, 그 외에는 설령 피해자가 하고 싶은 말이라 하더라도 부수적이거나 무용한 것으로 취급되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피고인에게는 피해자를 반대신문할 기회를 주게 되지요. 반대신문으로 피해자의 진술을 탄핵해서 그 신빙성을 흔들어놓음으로써, 피고인의 방어권을 행사하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팅하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충분히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60쪽)

그런데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직접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이 치유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피해자 자신이 자기 입을 열어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는 것’. 이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복합적 의미를 가지는데,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피해자 자신이 그 내부에서 피해로부터 해방되며 피해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즉, 피해자 자신이 내적으로 피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럼으로써 그 상처와 고통이 치유되는 큰 의미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57쪽)

게다가 형사절차 속에서 범죄피해자 입장에서는 범죄로 인해 피해는 자신이 입었는데, 막상 가해자가 피해자가 아닌 판사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국가가 나서서 범죄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은 사적 복수를 금지해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그리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제3자적 기관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범죄 가해자의 행위를 확정하고 책임원칙에 입각해 처결을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인류사회의 진전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범죄피해를 입은 당사자임에도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지위에 머물게 된다. 또한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범죄 가해자를 상대하다보니 그 과정에서 범죄자가 불필요한 인권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적법절차를 지키고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해지는데, 이때 피해자의 회복과 구제는 또다시 2차적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고, 범죄피해자의 깊이 있는 피해의 회복이 중요한데도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는 재판이라는 절차가 결국 어떤 말을 어떻게 하더라도 피고인을 처벌할 것인가, 중하게 처벌할 것인가, 약하게 처벌할 것인가라는 결론 외에는 도달점이 없기 때문이 아닐지 묻는다. 그리고 이어 피해자가 주체적인 지위로 존중받을 수 있는 회복적 사법에 기반한 절차가 주어질 때 이 절차 속에서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피해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혹시라도 우리가 재판의 목적과 기능을 달리 설정하여, 피해자가 ‘말하는’ 것을 단지 피고인에 대한 처벌 유무 및 형의 양정의 자료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가 말하는 자체로써 그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되게 할 수는 없을까요. 피고인 역시 피해자의 말을 탄핵하거나 반대신문을 하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알기 위해 듣고 이를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공감할 기회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피고인이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고 그에 공감하여 피해를 회복시키고 자발적 책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새로운 공간으로써 재판절차를 열어갈 수는 없을까요.”(66쪽)

“응보가 야만이 아니고 용서가 도덕이 아니다”

저자는 나아가 회복적 사법이라는 패러다임이 범죄의 가해자에게도 진정한 반성의 기회를 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이것이 사회통합에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복적 사법에 기반한 적절한 절차와 유능한 절차조력인 내지는 조정자가 제공된다면, 또한 그러한 기회를 통해 피해자와 대화하고 소통하게 되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저지른 짓이 피해자에게 끼친 실질적 해악과 영향을 더 잘 알게 되어 범죄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피고인들에게 우리 형사사법절차는 ‘방어권’의 보장이라는 이름하에 그중 일부만을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게 하고 그조차도 피해자를 향해서가 아니라 국가나 판사를 향해서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피해자와 어떤 말을 하고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잘 떠올리지 못합니다. 특히 피해를 ‘갚을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거나 저지른 짓이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어떤 것이어서 적절히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때 종종 피고인들은 그냥 입을 닫아버리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피고인들에게 적절한 절차와 유능한 절차조력인 내지 조정자가 제공된다면 어떨까요. 가해자에게 후회와 반성과 사과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떨까요. 그러한 표현을 직접 피해자를 향해서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또는 방법이 주어진다면요.” (219~220쪽)

이러한 회복적 사법 절차를 통해 피고인에게 양형상의 이익을 제공하고, 그들을 좀 더 수월하게 사회 내로 재통합시켜 재범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실제로 북미, 유럽, 오세아니아에서 회복적 사법 절차를 피고인들이 만족스러워하고, 이는 재범률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피고인이 회복적 사법 프로세스를 통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이해와 용서를 구하고, 피해자에게 벌어진 자기 행위의 결과를 좀 더 실질적으로 이해해서 피해를 회복할 방법을 찾아 형사처벌을 넘어서는 진정한 책임을 지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재범을 덜 저지르고 사회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222쪽)

저자는 현행의 응보사법과 회복적 사법이 대척점에 있지 않다고 본다. 수레의 양축으로 서로가 서로를 단단히 받쳐주는 관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특히 회복적 사법의 도입이 기존의 응보사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양자가 각각의 굳건한 영역을 가지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거나 서로를 완성시킨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는다. 응보사법의 확립이야말로, 회복적 사법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응보적 형사절차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조건이라면 피고인의 입장에서 응보적 형사책임을 회피할 우회적 수단을 모색할 것이고 실제로 그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굳이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회복적 사법을 따라 더 나아간 책임을 직면하고 떠안을 아무런 이유가 없”(248쪽)기 때문이다. 또한 적법절차와 책임원칙이라는 응보사법의 핵심이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조건이라면 자칫 피고인의 인권침해 혹은 피해자가 국가도 지우지 못할 과도한 부담이나 처분을 피고인에게 강요하려 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응보사법의 확립하에서 회복적 사법을 성공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하여 종래의 형사책임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었던 수준에서 질적으로 더 나아간 책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 즉 금전적 배상 등은 물론 정서적, 관계적 회복 등을 포함한 실질적 피해회복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결국 이는 응보사법의 핵심인 ‘책임’을 더 높은 차원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249쪽)

저자는 “응보가 야만이 아니고 용서가 도덕이 아니라, 응보와 용서(회복) 양자 모두가 인간 사회 유지에 필요한 도구적 요소이자 더 많은 개인이 안전하게 살아남을 인간협력관계의 조건”(250쪽)이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응당한 처벌뿐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진지한 책임을 지고, 실질적 피해회복이 이루어지며, 치유가 일어날 때 당사자들이 사법절차에 더 만족할 수 있고 이것이 나아가 사법신뢰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 법이 더 건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와 사회를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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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법칙

도서정보 : 한병진 | 2020-02-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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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서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다

많은 정치학 관련 서적은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고, 주로 구조적 원인을 언급하면서 몇 가지 교훈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러한 분석은 구체적 전략과 전술에 대한 지침을 도출하지 못한 채 그저 ‘잘하자’ 하는 당위적 주장에 머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이 책은 구체적인 사례와 사건을 미시적으로 접근한다. 그를 바탕으로 승리의 전략과 전술을 눈앞에 펼치듯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다양한 사회과학 이론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비유로 설명해낸다는 것이다. 카카오톡의 독점에서 손실회피와 현상유지편향을 살피고, IS에 가담한 김군의 사례로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신념의 집단극화를 설명한다. 친구 사이가 ‘썸’을 거쳐 ‘연인’으로 발전하는 ‘양인심사양인지’의 과정을 통해 ‘공동지식’의 탄생을 설명하고, 미인대회의 우승자 맞히기로 조정게임의 원리를 이해시킨다. 충분한 학술적 기반 위에 서 있으면서도 친숙하고 익숙한 언어로 펼쳐지는 이 책에서 독자들은 사회과학서의 새로운 글쓰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은 독재의 극장인가, 민주주의의 용광로인가?

광장은 민주주의자에게 유용할 뿐 아니라 독재자에게도 유용하다. 양날의 칼이다. 1960년 4월 나라 전역, 1980년 5월 광주, 1986년 6월 종로, 2002년 시청, 그리고 2016년 촛불까지. 광장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장이었다. 승리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견지한 핵심 대중의 선도적 노력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수많은 시민을 광장으로 불러 모았고, 마침내 승리를 경험했다. 이들의 수많은 인내와 희생 끝에 세상은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올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에게 광장은 서로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개인은 두렵고 힘이 없지만, 집단은 강하고 용감하다. 자신과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위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은 광장에 모인 사람의 수가 커질수록 줄어든다. n분의 1 법칙이다. 위험 부담이 줄면 참여자가 늘고, 참여자가 늘면 승산이 커진다. 높아진 승산은 다른 이의 참여를 유인한다. 이렇게 광장의 시민은 상호 의존적으로 연대한다.

동시에 광장은 지배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 경우 광장은 특유의 공개성 탓에 본심을 드러낼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이 된다. 이집트의 카이로 타히르 광장,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 앞 광장, 크레믈린 궁전 앞의 붉은광장 등은 모두 독재자의 위용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그 광장에서는 독재자를 지지하는 집회가 열리고 수많은 참가자가 독재자를 한목소리로 찬양했다. 독재자가 지배하게 되면 광장은 극장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노출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광장의 시민들은 관객인 동시에 배우가 된다. 독재자에게 환호하는 이웃을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에 그보다 더 크게 환호한다. 이렇게 광장은 독재자에 대한 열광으로 끓어오른다.

이기는 시민을 위한 광장 사용 설명서

체면이고 염치고 없다. 우겨라! _ 정치는 사실을 두고 다투는 과학이 아니다. 정치인은 성과를 내는 것보다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잘되면 내 덕이고, 안 되면 남 탓이다. 조롱을 당할지라도 계속 우기는 것이 유리하다. 선제적으로 과장된 언사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전선을 선점해야 한다.

핵심 대중을 마련하라 _ 정치에서 싸움은 세가 결정한다. 세는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분위기를 이끌 핵심 대중이 필요하다. 핵심 대중은 전위조직이다. 이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해 참여자의 수가 티핑포인트를 지나면 승리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다. 핵심 대중은 혁명의 마차를 끄는 말이자, 화약통의 심지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미친 자들이다.

가치를 공유하라 _ 핵심 대중은 가치에 따라 움직인다. 핵심 대중은 능력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가치를 공유하는 지도자에게 감동한다. 가치는 열정의 원천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정체성을 이기지 못한다. 가치를 분명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에만 호소해서는 시민들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다. 지지자가 상당히 모인 후에 참여하는 추종자들은 교환 관계에 가깝다. 반면 지도자와 핵심 대중은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 관계에 가깝다.

급진주의자를 피하라 _ 광장에 나가보면 종종 싸움을 위한 싸움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현실성이 없는 급진적인 구호를 외친다. 이들의 강한 정체성은 분열과 대립을 낳는다. 심지어 급진주의자는 자신을 억압하는 기득권 세력보다 온건파를 더 저주한다. 이들이 혁명의 문턱값을 완전히 높여버리면 광장에는 위험이 넘쳐난다. 편협한 정체성에 집착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급진주의로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상대를 끌어들여라 _ 골리앗은 다윗에서 덤비라고 소리쳤지만 다윗은 거부했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골리앗과 근접전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 다윗은 원거리 전투(돌팔매질)로 승리를 거두었다. 강자가 규정한 싸움터로 나아가서는 이길 수 없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은 지위, 명성, 돈을 기준으로 싸움을 하라고 한다. 판에 들어와서 바꾸라고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아무리 능력을 보여주어도 돌아오는 것은 실패와 환멸뿐이다.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퍼지는 장소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더 큰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소통의 방법을 찾아라 _ 벨라루스의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칠레 운전자들은 출근길에 천천히 차를 몰았고, 보행자들은 천천히 걸었다. 홍콩 시위대는 비도 오지 않은 날에 노란 우산을 들고 나왔다. 정치에서 공개성은 승산에 대한 기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손목이나 가슴에 단 다양한 상징물은 자신의 의도, 신념, 태도, 믿음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이런 도구와 행동을 통한 관찰 가능성은 소통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선택을 다수의 선택에 맞추어 조정하려면 다수의 태도와 믿음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야 한다. 소통 행위로 공동지식이 만들어지고 세가 모인다. 광장정치를 시작하려는 이들은 기발한 소통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광장정치의 키워드 공동지식의 역설

정치를 이루어내는 것은 결국 다수가 지닌 공동지식이다. 개인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음을 상대도 알고 있고, 상대도 알고 있음을 나 역시 알고 있어야 한다. 누가 이길 것이라는 다수의 공통된 믿음을 다수가 서로 알고 있을 때 권력투쟁의 추는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이렇게 다수의 선택이 일치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믿음이 바로 공동지식이다. 공동지식은 공유, 전파되어 상승의 연쇄를 불러온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주어진 영토 내에서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한 조직이다. 이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시민의 의무는 폭력을 독점한 국가를 순치하는 것이다. 감시와 견제와 법에 따른 제어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 바탕에는 공동지식이 있다. 공동지식에 기초한 시민의 감시와 저항이 없다면 국가는 나쁜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때 국가를 직접 관리하는 엘리트의 선의가 아니라 민주적 의지를 지닌 시민의 집단적 힘만이 믿을 만한 해결책이다.

다시, 공부가 희망이다

공자는 평생 중원을 떠돌며 활동했으나 고작 수십의 제자만을 남겼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 그 제자들이 이룩한 세상의 변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들 공자의 제자들은 핵심 대중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사람이 도를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에 빠져 세상을 단순화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라는 말이다. 실제로 공자는 ‘인仁이란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즉 경직된 행동 원칙이 아니라 ‘선함에 대한 분별력 있는 감수성’으로 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대신 필요한 것은 공부이다. 『논어』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로 시작한다. 2000년을 이어온 동양의 위대한 고전 첫 마디가 공부하고 익히라는 말인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이 무거운 이유는, 수십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박살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가치나 주의 주장으로 세상을 모두 재단해버리는 이야기는 우리를 흥분시키고 빠져들게 한다. 공자는 세상에 쉬운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는 자세만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학學은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민주적 방법만이 사회를 커다란 과오로부터 벗어나게 하듯 “학이시습지”만이 우리를 커다란 과오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자신이 진리와 정의를 독점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민주주의를 잃어버리고, 모든 선의는 타락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이데올로기를 피하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쉼 없이 공부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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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순정만화

도서정보 : 이마루 | 2020-02-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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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를 만든
칸으로 지어진 세계, 순정만화

아무튼 시리즈 스물일곱 번째는 순정만화 이야기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라는 아무튼 시리즈에 걸맞게,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정적 순간에조차 순정만화 속 대사가 자동 재생되는 저자는 지금까지 이십 년 넘게 차곡차곡 쌓아오고 있는 순정만화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 쏟아냈다.

지방 소도시, 여중-여고라는 공간에서 성장한 저자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세계, 더 넓고 전혀 다른 세계를 순정만화 속에서 접하고 점점 더 그 세계로 빠져들었다. 마침 「나나」, 「윙크」, 「밍크」 같은 순정만화잡지들이 속속 창간되고 동네 곳곳에 책 대여점이 생긴 시절이었다.

저자는 유시진 작가의 『쿨핫』은 만화 속 대사 한두 마디를 외울 정도가 아니라 이 만화가 자신의 대인관계와 세계관을 결정 지었다고 말한다. 또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신일숙의 『에시리쟈르』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배웠다고도 말한다.
작품만이 아니라 칸칸이 세계를 지어 이야기를 전한 작가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세계였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순정만화 작가들은 독립적으로 자기 일을 하는 프로페셔널한 여성으로서, 확고한 취향을 가진 흥미로운 인간으로서 내 안에 존재했다.”

권교정, 김혜린, 박은아, 신일숙, 천계영, 한승원…, 『불의 검』, 『아르미안의 네 딸들』, 『오디션』, 『다정다감』, 『내 남자친구 이야기』…, 긍하와 강이, 하치와 나나, 부옥과 명자, 루다와 동경, 소서노와 카라…. ‘순정만화의 시대’를 통과한 이들이라면 저자가 소환한 작가들, 작품들, 주인공들 이름만으로도 그때 그 마음들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반짝이던 세계가 아직 나에게 남아 존재한다는 것

순정만화 속 세계를 한껏 돌아다니던 저자는 이제 책장 한쪽을 『도쿄 후회망상 아가씨』,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우리지만 결혼, 할 수 있을까?』, 『결혼, 안 해도 좋아』 같은 만화로 채운 30대가 되었다. 그사이 그 많았던 대여점도, 만화잡지도 그리고 몇몇 작가들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이 책은 반짝이던 한 시절을 추억하며 연발하는 감탄사나 그 세계를 빚은 작가들에게 보내는 헌사가 아니다. 저자의 순정만화 사랑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계의 폭도 깊이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지금까지도, 또 그만큼 변한 세상에서도 순정만화를 가득 채운 그 어떤 마음들이 자신에게 조각조각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여성이 만들고 여성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황홀하게 넘쳤던 ‘순정만화의 시대’, 저자는 그런 시간을 관통해왔음이,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음이 지금까지도 힘이 되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구매가격 : 7,700 원

(북클럽 『자본』 시리즈-08) 자본의 꿈 기계의 꿈

도서정보 : 고병권 | 2020-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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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인간의 노고를 줄여주는가
― 인간재료가 된 노동자, 기계 도입 이후 벌어진 일들

19세기 공장에서 기계제가 매뉴팩처를 대체했다는 것은 ‘기계’가 이전의 ‘작업하는 인간’을 대체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기계의 출현은 그 기계가 인간의 도구, 즉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한 메커니즘의 도구 혹은 기계적 도구로서 나타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인간의 도구’였을 때는 인간의 뜻대로 인간의 신체 리듬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러나 ‘기계의 도구’가 되는 순간 그것들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움직이는 방식과 속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계의 일부가 되는 순간 과거에 인간이 쓰던 도구들은 인간적 한계를 금세 벗어난다. 그리하여 ‘작업기계’가 ‘작업인간’을 대체하고, 마누스(manus) 즉 ‘인간의 손으로’ 하는 작업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공장에 기계제 생산이 본격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러 기계를 한자리에 모아두고 작업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분공정을 수행하는 부분기계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기계‘시스템’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계제는 생산공정에서 노동자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리학과 화학 등의 법칙을 이용하지만 이 기술적 법칙은 인간과는 무관하다. 생산력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 동력을 계산하고 마찰을 계산하고 속도를 계산하지만, 이때 고려되는 것은 기계적 한계이지 인간적 한계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기계적 한계를 고려할 뿐 인간적 한계는 실상 고려하지 않는 기계제 대공업을 지배적 생산형태로 삼으면서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기계 도입은 사회 전반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 마르크스는 세 가지 현상을 지적한다.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노동인구의 확대’이다. 언뜻 생각하면 기계제의 발달은 노동인구를 감소시킬 것 같지만 실제로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수를 오히려 늘렸다는 것이다. “기계가 근육의 힘을 불필요하게” 만든 탓에 여성과 아동이 새로운 노동인구로 유입되었고, 급기야 가족구성원 전체가 노동력으로 자본주의에 제공되었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더 많이 얻게 된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계 도입은 ‘노동일 연장’을 초래했다. 마르크스는 기계 도입과 함께 노동일도 늘어났다고 말한다. 기계가 도입되면 노동생산력이 크게 증대해 노동일이 줄어들어도 될 것 같지만 자본주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는 “모든 자연적 한계를 초월해 노동일을 연장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된다. 오히려 자본가에게 노동일을 연장할 만한 동기와 수단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기계는 노동일을 연장해도 거기에 대해 따지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인간처럼 생물학적 한계도 갖고 있지 않아 영구기관같이 멈추지 않고 작동한다. 일단 작업이 시작되면 기계시스템의 작동은 ‘노동자’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이다. 이제는 기계가 장인이고 인간은 조수가 되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지위가 부차화되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 전처럼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고 저항의 효과도 크지 않게 된다. 노동일은 결국 기계에 의해 더욱더 연장된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1833년 영국의 표준노동일 제정으로 노동일 연장은 불가능해졌다. 기계 도입에 맞춰 노동일 연장의 필요성은 이전보다도 커졌는데 노동일이 법적 규제를 받게 되니, 자본으로서는 ‘노동강도 강화’를 통해 노동일 단축을 만회하려는 욕구와 필요가 생길 것이다. 이에 따라 기계제 생산에서는 기계의 속도를 높이는 방식과 노동자들을 기계에 맞추어 훈련하는 방식으로 노동강도를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기계의 도입과 함께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인구의 확장’, ‘노동일의 연장’, ‘노동강도의 강화’가 나타났다. 한마디로, ‘노동’은 이전의 매뉴팩처보다 훨씬 늘어났다(당연히 자본가의 ‘이윤’도 늘었다). 이것이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다. 기계는 인간의 노고를 줄여주는가. 물론 기계가 인간의 노고를 줄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본가는 이윤을 늘리기 위해 기계를 공장으로 들여온 것이며, 이런 목적에서 사용하면 기계는 인간노동을 더 많이 뽑아내는 수단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때 노동자는 가치생산의 주체라기보다 가치착취의 대상, 가치착취의 재료처럼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자본』 제13장에서 마르크스는 기계 도입으로 인한 노동인구의 확장을 아예 ‘인간이라는 착취재료의 확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고 재료라는 거죠. - 「2장 기계가 도입되고 나서 벌어진 일들」

기계노동자와 절망 공장
― 기계제 시대 ‘노동자 착취’의 실태를 보고하다

저자 고병권은 본문에서 자본주의가 기계를 도입하는 목적을 자주 환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이윤’이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기계’를 도입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이윤’에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상품을 생산하는 목적이 사람들의 편리를 위함이 아니듯 자본주의가 기계를 도입하는 목적 역시 노동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함이 아니라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함이고, 그러므로 이윤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노동을 크게 절약해주는 획기적인 기계라 해도 자본주의는 그 기계를 생산에 투입하지 않는다. 차라리 인간노동을 계속해서 ‘탕진’하는 편을 택한다. 결국 기계의 도입은 노동의 과정을 변형시키고 노동자의 신체를 뒤틀리게 한다. 결국 기계제하의 공장은 이전의 매뉴팩처 작업장보다 노동자를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자본』 제13장에서 마르크스는, 이전에 『자본』 제8장에서 ‘노동일’의 문제에 관해 고발했을 때처럼 기계제하의 노동자들이 놓인 ‘처참한 상황’을 보고한다. 저자 고병권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노동자의 존재양태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단어를 계속 바꾸어 쓰고 있는데, 이번 장에서 새로 쓴 단어는 ‘기계노동자’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기계시스템의 편제에서 한 부분으로 전락한 노동자, 즉 ‘의식을 가진 부분기계’가 된 노동자를 가리키기 위해 쓴 이 단어에 주목한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계를 다룰 때조차 ‘기계의 부분으로(즉 부분기계로) 존재하는 노동자’라는 의미다.

기계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은 인간 노동자의 숙련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어떤 의미에서 기계제 공장의 노동자들은 모두가 기계의 조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전에는 하나의 부분도구를 다루는 일이 평생 동안의 전문 분야였지만, 오늘날에는 하나의 부분기계에 봉사하는 것이 평생의 전문 분야가 된다.”고병권은 마르크스가 세심하게 단어를 골라 썼다는 걸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면서, 매뉴팩처에서는 노동자가 도구를 “다룬다”(fuhren)라고 쓴 반면,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기계에 “봉사한다”(dienen)라고 썼다고 말한다. 즉 매뉴팩처에서는 노동자가 도구의 ‘지배자’였으나 공장에서는 기계시스템의 ‘하인’임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장을 병영과 감옥에 비유한다. 공장은 자본가의 전제정치가 펼쳐지는 공간으로서 노동자들이 노동과정과 관련해 조금만 의사결정에 관여하려 하면 ‘경영권 침해’라고 펄펄 뛴다. 또한 공장은 흡사 감옥처럼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생명의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박탈했다. 또한 기계제 도입 이후에는 대공장만이 아니라 기존의 가내공업 작업장의 노동자가 당하는 착취 역시 훨씬 강하고 파렴치해진다. 여기에 이른바 “약탈적 기생충들”, 즉 대공장과 영세한 가내공업을 매개하며 중간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가로채는 이들까지 개입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노동자들의 건강에 꼭 필요한 시설도 비용을 아낀다는 이유로 구비해놓지 않고, 그래서 채광과 환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상자처럼 좁은 공간에서 노동을 시키기도 한다.

자본가는 노동환경 개선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비용으로 계산한다. 시간, 공간, 햇빛, 공기 등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장시스템이야말로 생산수단 절약의 “온상 같다”라고 표현했으며, 생산수단의 절약이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면 “노동자의 생명조건인 공간과 공기, 햇빛, 생명에 대한 체계적 약탈, 그리고 생명이나 건강을 위협하는 생산환경에서 노동자를 지킬 수 있는 보호수단에 대한 체계적 약탈로 나타난다”라고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공장법을 통한 사회적 규제가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된다.

공장법에는 보건 조항들이 있습니다. 청결과 환기, 안전에 필요한 소소한 규정들이지요. 그러나 자본가들은 비용이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노동자들의 팔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극히 사소한 조치들에도 “아주 미친 듯이” 반대합니다. 작은 안전장구들만 갖추어도 인명 손실을 막을 수 있는데 법적 규제가 없으면 이런 걸 갖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것까지 법에 규정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일할 때 적절한 크기의 공간이 필요하고 환기가 되어야 하고 위험한 장치에 다가갈 때는 보호장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진 않으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당연한 조치들이거든요. 그런데 자본가에게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 본문 174~175쪽, 「5장 ‘보이지 않는 실’-기계제 시대의 착취」

기계가 꾸는 꿈, 프롤레타리아와 기계의 연대
― 노동자와 기계의 ‘전쟁’을 넘어, 기계와 노동자가 함께 만드는 ‘미래’를 꿈꾸다

기계제 시대가 펼쳐지면서 기계에 밀려난 다수의 노동자들에 의해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이른바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무려 1만 명 넘는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하니, 봉기의 규모와 강도가 얼마나 상당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매우 폭력적인 진압이 이루어졌고 주모자들은 처형되었다. 이토록 격렬한 투쟁이 일어난 까닭은 무엇인가.

기계제 생산에서는 생산성의 증대가 ‘고용 노동자 수의 감소’로 나타난다. 증기직기가 도입되자 수많은 노동자가 길거리로 나앉았다(실제로 증기직기는 러다이트 운동의 가장 격렬한 공격 대상이었다). 마치 일자리를 놓고 기계와 노동자가 경쟁하는 꼴이 되었다. 한갓 노동수단이었던 어떤 것이 ‘기계’의 형태를 취하자마자 곧바로 노동자의 경쟁 상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기계가 한 대 들어오면 노동자는 수백 명이 쫓겨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추방을 면한 노동자들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지며 고용이 불안정해진다. 이들은 추방의 공포 때문에 노동일의 연장과 노동강도의 강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 공장 바깥에선 추방된 노동자들이 이른바 ‘노동력의 저수지’를 형성하고 있어 노동력의 가격도 하락한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제값을 받지 못하더라도 노동력을 팔아야만 한다.

기계제 대공업 이후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이러하다. 자본가는 기계를 들임으로써 유토피아를 맞이했을지 모르나 대다수 노동자에게 기계제는 확실히,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때려죽”이는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 고병권은 마르크스의 시선이 이 디스토피아에서 멈추지 않았음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마르크스가 공장법의 보건 조항에서 잔혹한 ‘자본의 정신’을 읽었다면, 공장법의 교육 조항 등에서는 뭔가 다른 것을 읽어냈다는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처참한 실태와는 별개로 마르크스는 공장법의 교육 조항에서 “미래 교육의 싹” 같은 것을 보았다. 공장법의 교육 조항이란 어린 노동자의 교육, 즉 노동과 교육의 결합을 의무화한 조항을 가리킨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일과 학업을 병행하게 해야 한다는 이 조항은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조치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모두가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 상황 속에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단서를 구한다.

마르크스가 찾아낸 미래의 싹은 무엇인가. 노동자는 기계제 대공업이 가져다준 비참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기계제라는 ‘새로운’ 시대이기에 가능한 어떤 희망을 찾아냈다. 공장법 규제 속의 의무교육 조항에서, 그리고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시작된 가부장제 해체에서, 그리고 공장법의 일반화를 통한 자본축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열리게 될 것인가. 마르크스가 열어젖힌 그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고병권은 자본이 꾸는 꿈이 곧 ‘기계가 꾸는 꿈’은 아니라고, 기계를 내세워 자본가가 하려던 그 혁명을, 프롤레타리아가 얼마든지 아주 다른 혁명으로 뒤집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똑같은 존재에 대해 누군가는 유토피아를, 누군가는 디스토피아를 떠올립니다. 『자본』(특히 I권)에서는 자본의 운동을 중심에 두고 서술하므로 자본가들이 기계 속에서 그리는 유토피아가 부각되지만, 마르크스는 거기 잠재된 자본의 디스토피아, 자본의 몰락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이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토록 강력한 생산수단과 교류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냈던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낸 저승의 힘을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그러고는 “생산력들의 반역의 역사” 즉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기계들의 반역이 이미 시작된 것처럼 썼습니다. 내가 이번 책의 제목을 ‘자본의 꿈 기계의 꿈’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기계괴물의 등장과 함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길몽과 악몽의 가능성이 함께 열리고 있으니까요.
- 「1장 기계괴물의 출현」

구매가격 : 9,73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

도서정보 : 김덕련, 서중석 | 2020-01-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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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주도한 전두환 일당, 쿠데타를 일으키다

광주항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우선 전두환?신군부 세력의 10?26 이후 행적을 살펴야 한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은 박정희가 죽자 일찍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겠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그리고 곧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한 12?12쿠데타를 일으킨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 정승화를 비롯한 군 상층부의 무능력, 미국의 방관, 일본의 지원 등으로 쿠데타는 결국 성공하고 만다. 전두환 일당은 쿠데타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하게 됐다.

12?12쿠데타가 성공하자 보안사는 1980년 2월부터 전두환 권력을 만들기 위해 K-공작(K는 ‘King’의 약자)을 실시했다. K-공작은 언론을 조종, 통제, 회유한 작전이다. 보안사가 언론사 간부들을 접촉해 ‘현재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안 된다’, ‘3김은 안 된다. 사회 안정을 위해 군부가 집권해야 한다’ 등의 취지의 보도를 하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했다. 곧 전두환?신군부가 한국을 이끌 세력, 안전 구축 세력으로 퍼뜨리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보안사에 이어 또 하나의 정보 기관을 손에 움켜쥐게 된다.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된 것이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이로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찾아온 서울의 봄, 그러나…

서울의 봄은 1980년 2월 29일 대규모 사면 복권 이후, 더 넓게는 1980년 초 정치인들의 신년사가 나오고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될 무렵부터 5·17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으니 한국 사회가 이제는 민주화로 나아갈 거라는 기대가 이 단어 속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신군부 세력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권이 단결하고 최규하 쪽과도 연결하면서 국회를 활용해 계엄을 해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때에도 서로 각자 대권 행보를 하며 분열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결국 5?17쿠데타가 성공하자 김대중은 ‘소요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됐고, 김영삼 또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학생 운동 세력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학생회를 부활시켰고, 병영 집체 훈련 거부 등 민주화 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전두환?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노동 쟁의도 크게 늘어나는 등 사회 각계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분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북항쟁이다. 이 항쟁은 단순히 노조 집행부와 그 반대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그간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에서 누적된 불만, 분노가 노조 문제를 계기로 분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80년 5월이 되자 대규모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게 된다.

신군부가 서울역 시위를 그대로 놔둔 이유는?

1980년 5월 13일 밤 학생회장단이 모여 토론한 끝에 교문을 박차고 거리에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대로 각 대학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인다. 14일에도 서울 시내 21개 대학에서 약 7만 명이, 지방 11개 대학에서 약 3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15일에는 최고 7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신군부는 충분히 이 시위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왜 막지 않았을까? 광주에서처럼 시민들이 이 시위에 대거 호응하면 신군부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왜 막지 않았을까? 그 이전부터 진압군 투입 준비도 이미 마친 상태였는데.

신군부는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미리 용의주도하게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 ‘거리에 나오는 걸 방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끔 한다. 그런 것 등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국보위 같은 걸 만들어 권력을 장악한다’, 이런 계획을 짜놓은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경우 학생과 시민들이 큰 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비해 군을 미리 움직여 서울과 전국 주요 지역에 배치해놓았다.

이러한 조치는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크게 확대되는 것에 대비한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 학생 시위가 커지면서 상황이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걸 빙자해 5월 17일 쿠데타 이후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민주화를 완전히 짓밟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굉장히 많은 학생, 시민이 봉기할 수 있다. 그런 봉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 그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5?17쿠데타 이후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 일당은 그 병력의 상당 부분을 광주로 이동시켰다. 광주를 아주 단단히 진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일본은 왜 5?17쿠데타를 도왔나?

10·26 이후 전두환 일당은 미국에는 절대적으로 보안을 취하면서도 일본에는 12·12쿠데타 계획을 알려주는 등 일본과 교감을 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이후 일본 측은 소련의 북한 남침 사주설을 포함해 북한의 남침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6번이나 전두환 일당에게 ‘자료’를 내주었다. 더군다나 일본 내각조사실은 북한이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남침하기로 결정했다며 날짜까지 콕 집어서 신군부에게 첩보를 건넸다. 그러나 이 첩보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났지만, 전두환?신군부는 이 남침설과 학생 시위를 구실 삼아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게 되는 국보위가 설치된다. 이것이 곧 5?17쿠데타이다.

일본이 이토록 전두환?신군부를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후 7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 우익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본은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새로운 정권으로 이 세력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는 데 일본의 지원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두환 일당은 왜 제2쿠데타 날짜를 5월 17일로 정했나?

1980년 5월 정치권은 국회 소집에 합의했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전두환·신군부를 규탄했다. 이에 전두환 일당은 10·26 직후 선포돼 반년 넘게 계속된 비상 계엄을 지속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두환 일당은 또 하나의 쿠데타를 계획하며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한다. 이 시국 수습 방안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비상 계엄 전국 확대였고, 둘째는 국회 해산, 셋째는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였다. 비상 계엄 전국 확대는 군인들이 전권을 가지고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것은 유신 헌법조차 짓밟으면서 강권,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겠다는 음모였다. 그와 함께 시국 수습 방안에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 규제 방안 등도 들어 있었다.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의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인 5월 20일 이후 이 시국 수습 방안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 순방 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는 17일로 쿠데타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다. 이렇게 한 데에는 5월 20일 임시 국회가 소집되고, 5월 22일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대학생들이 다시 대규모 데모를 벌일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17일 쿠데타를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다. 이로써 전두환 일당은 1979년에 12·12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1980년에 다시 5·17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다.

광주항쟁, 왜 일어났나?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5월 14~16일 민주 성회 때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그다음 날 아침에 자동적으로 교문에 모여 시위를 하자.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광장에 모이자’고 약속한 대로 교문으로 온 학생들이 많았다. ‘계엄 해제’를 외치는 학생들을 향해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봉 등으로 마구 구타했다. 정문 앞에서 해산당한 학생들은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내로 나간 학생들은 수백 명 단위로 비상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학생 시위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고, 경찰력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한 것이다. 게다가 서울 동국대에 있던 11공수여단까지 광주로 이동시켰고, 여기에 더해 3공수여단도 광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후 공수 부대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른다. 그걸 본 광주 시민들은 수그러들기는커녕 격렬하게 항의를 한다. 이제 시위는 학생에서 시민들로 확대되었다. 공수 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고, 공수 부대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단순한 학생 시위가 공수 부대의 만행으로 항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공수 부대는 왜 광주 시민에게 폭력을 휘둘렀나?

전두환?신군부 세력은 5?17쿠데타로 비상 계엄을 전국에 확대한 뒤 이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서울, 광주 지역 등에 이미 진압 부대를 투입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군 투입이 요구되는 사태가 발생할 때에는 강경한 응징 조치를 하겠다고 정해놓고 있었다. 초동 단계부터 강경 진압 등 ‘위력 과시’를 해 시위 군중을 위축시킴으로써 ‘시위 확산’과 ‘격렬화’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5?17쿠데타를 일으켰는데도 서울에서는 시위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그쪽을 철저히, 과감히 타격하자. 상대방이 다시는 시위를 일으킬 수 없도록 끝까지 추격해 궤멸적 타격을 입히자’, ‘우리에게 저항하는 자(세력)들은 이렇게 당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자’고 결의를 다진 것이다. 그래서 경찰로도 시위를 막을 수 있는데도 7공수여단을 시내 한복판으로 보낸 것이고, 그에 더해 서울에 있던 11공수여단 병력까지 광주로 급히 보내고 곧이어 3공수여단 병력을 또 보낸 것이다.

더군다나 광주는 자신들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였다. 그 때문에도 광주를 더 무자비하게, 위력적으로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수 부대가 만든 생지옥, 심지어 성폭행까지…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다

19일 새벽부터 1,000여 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 군중의 어깨, 다리 등을 마구 찔러 금남로 일대는 삽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건물 안으로 도망가는 시위 군중을 추적해 끄집어내어 길가에서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겼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마구 때렸다. 겁에 질린 여자들까지 아랫배를 걷어차고 가슴팍을 치거나 대검으로 상의를 마구 찢기도 했다. 심지어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도 있었다.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본 광주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오후 들어 수만 명의 민중이 금남로 일대를 가득 채웠다. 19일부터 본격적으로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왜 시민들은 성난 민중으로 변해 그 무섭고 무자비한 공수 부대와 적극적으로 맞붙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공수 부대의 만행,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만행에 분노해 그야말로 피가 끓는 시민들이 궐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부끄러움’의 정서다. 18일 공수 부대의 만행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이 시민들을 자꾸 싸우게 했고, 그것이 항쟁으로 바뀌는 추동력이 되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대학살, 21일 애국가와 함께 울린 총성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렸다. 21일 금남로 일대에서 이뤄진 발포로 최소한 54명이 숨지고 5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추정됐다. 21일 3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보급을 받은 실탄은 M16 소총탄 123만 발, 살상력이 큰 40mm 고폭 유탄 316발, 한꺼번에 여러 명을 해칠 수 있는 세열 수류탄 4,880발이었다. 이 중 48만 4,484발이 실제로 사용됐는데, 공수 부대원 1인당 142발을 쏜 셈이다. 광주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인 대학살이었다. 심지어 이날 오후에는 헬기 기관총 소사까지 있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 광주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경악할 만한 사태가 벌어지자 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이제 우리도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여러 지역으로 갔다. 일부 시위대는 10여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화순 탄광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을 입수했고 나주경찰서 무기고와 여러 파출소에서 M1 소총, 카빈 소총, 실탄을 가져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장성, 담양, 영광, 보성, 무안, 영암, 함평, 강진, 해남, 완도, 곡성, 구례 등 전남 각 지역으로 가서 무기와 탄약을 가져왔다.

이처럼 1980년 5월 21일에는 공수 부대의 정조준 사격, 헬기 기총 소사 등 시민을 향한 발포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러자 광주 시민들은 전남 전 지역으로 나아가 무기를 확보했고, 그러면서 이제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전체가 들끓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를 확보하면서 시민군이 등장하게 된다.

왜 전두환 일당은 일부러 사태를 더 악화시켰나?

21일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다. 이날 오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시위가 확산된 이유는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유언비어 유포와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 담화문을 접한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왜 광주항쟁이 일어났는지, 시민들이 왜 싸웠는지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되지 않았고, 공수 부대의 만행에 대해서도 전혀 말하지 않았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이희성이 발표한 것과 똑같이 조작, 허위 사실,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발표였다. 광주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분노한다.

그런데 왜 이런 발표를 연달아 한 것일까? 21일, 22일 연속해 일어난 일들은 전두환·신군부가 일부러 상황을 악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왜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은 짓을 계속 저질렀을까? 전두환 일당은 본때를 보여 자신들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다. 그래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두환·신군부 유신 잔당은 이희성 담화문이 의도한 것과 똑같은 의도로 광주와 일반 국민을 격리 차단해 오로지 유혈 사태를 불사하는 폭압, 폭력의 군홧발로 광주를 짓밟고 일반 국민들에게 허위 사실을 사실로 믿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자신들에게 저항하면 광주처럼 당한다는 협박용으로 일부러 5월 21일 이희성 발표에 이어 22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발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1공수여단의 어느 하루, 어린이 사살→오인 총격전→분풀이 학살

24일, 공수 부대가 어린이까지 사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트럭에 나눠 탄 제11공수여단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이동하던 중 진월동 원제마을 저수지 옆을 지나가게 된다. 그때 저수지에서는 15명가량의 소년들이 물놀이를 하며 멱을 감고 있었다. 공수 부대는 이 아이들에게 총을 쐈다. 결국 열세 살의 한 소년이 그 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이어서 공수 부대는 근처에 있는 진제마을 쪽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마을 뒷동산에서 놀던 아이들한테 발포했다. 여기서도 열 살짜리 어린이 한 명이 숨졌다. 이 부대는 진제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하수구에 숨어 있던 박연옥을 향해 발포했다. 박연옥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후 이 부대는 효덕초등학교 앞을 지나 광주-목포 간 국도를 이동하다가 갑자기 집중 사격을 당했다. 공수 부대를 공격한 건 마을 양쪽에 매복해 있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었다. 공수 부대를 시민군으로 착각해 공격한 것이었다. 공수 부대도 바로 응사했다. 이 오인 총격 사건으로 장교 1명을 포함한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보병학교 교도대가 빠져나간 후 11공수여단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또 일으켰다. 근처 마을에 들이닥쳐 3명의 젊은이를 끌고 가 ‘즉결 처분’을 해버렸다. 엉뚱하게 화풀이로 마구잡이 보복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평생 해서는 안 될 일을 11공수여단은 하루에 수차례나 저질렀다.

전두환·신군부는 27일 왜 그토록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나?

27일 마지막으로 도청에 남아 있는 시민군은 200여 명이었다. 이에 반해 진압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3?7·11공수여단, 20사단, 31사단, 전교사 예하 병력 등 총 2만 317명이었다. 이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광주 시내로 진입했다. 이 가운데 상무 충정 작전에 전투 요원으로 실제 투입된 계엄군 병력은 6,168명이었다. 그중 작전을 주도하는 특공조로 편성된 공수 부대원은 장교 37명을 포함해 317명이었다. 시민군의 숫자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전두환 일당은 왜 이토록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일까? 이 또한 5월 18일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18일 오후 4시경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하기 전에는 학생 시위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경찰력으로도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5월 27일에도 마찬가지로 군이 아니라 경찰만 투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엄청난 병력을 투입해 적군을 상대로 작전을 펴는 것처럼 한 것이다.

“5월 18일, 19일에 광주 시민들을 상대로 이른바 위력 과시, 선제 타격이라는 걸 하지 않았나. 전두환·신군부 권력 탈취에 저항하는 세력을 궤멸시키다시피 제압해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그래서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5월 19일 시민들이 공수 부대와 맞서면서 광주항쟁이 본격화되고, 그렇게 되면서 오히려 계엄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까지 맞게 됐다. 그야말로 전두환·신군부 쪽이나 계엄군으로서는 굉장한 치욕이라고 볼 수 있는 상태를 자초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27일에 그런 식으로 보복해 만회하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민군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저항 세력을 초토화하고 시민들에게 특별히 위력을 과시해 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날 시민군은 15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체포됐다.

왜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가?

그동안 전두환은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정보 수집, 수사만 했다. 광주사태 진압과는 명령, 지휘 계통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주 학살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비선 라인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에서 공수 부대가 한 행위는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탈취 방안이던 ‘시국 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일당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 많은 학생, 시민들이 반발하고 투쟁과 시위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 예상 아래 서울과 광주 등 중요 지역에 공수 부대를 비롯한 병력을 이미 배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5·17쿠데타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위력을 과시해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리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전두환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5월 21일, 자위권이 발동된다. 자위권 발동을 국방부 장관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회의가 21일 오전에 열리는데, 전두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실질적 권력자인 전두환이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1시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자위권을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걸로 밝혀졌다. 이튿날 22일, 전두환은 공수 부대원들에게 격려금을 하사하도록 지시한다. 또한 전두환은 25일 최규하로 하여금 광주로 내려가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5월 27일 새벽에 벌어진 상무 충전 작전에서도 전두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전두환은 광주에서 진행된 여러 작전이나 자위권을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했고, 가장 중요한 27일 작전을 결정하는 자리에도 참석했다. 미국 또한 전두환이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군 실력자라고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두환은 27일 상무 충정 작전을 몇 시간 앞두고 사병들에게 거액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보면 분명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정신은 살아 숨 쉬며 6월항쟁으로 승화했다

광주항쟁은 27일 마지막 시민군들이 진압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곧 광주의 진실 알리기 운동이기도 했다. 광주항쟁은 특히 젊은이들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광주의 진실, 이것을 접한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1980년대 내내 되물었다. 잔인한 유혈 사태, 시민을 향한 발포, 그러한 공수 부대에 과감히 맞서 싸운 시민들, 이 모습들은 1980년대 내내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했다.

학생들은 1984년경부터 학생 운동의 폭을 넓혀갔는데, 주된 활동의 하나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학가는 4월에 4·19 기념을 겸해 4월 투쟁을, 5월에는 여러 날에 걸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각종 교내 활동과 시위 투쟁을 벌였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은 그 자체가 반전두환 투쟁이었고 민주화 운동이었다. 5월 투쟁은 학생 운동을 확장하는 지렛대였다.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광주항쟁은 어떠한 역사적 역할을 했는가. 광주항쟁은 갑오농민전쟁(1894년), 3·1운동(1919년), 4월혁명, 부마항쟁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변란을 일으킨 집단이나 독재자의 영구 집권욕에 의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또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항쟁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광주항쟁을 꼽을 수 있다.”

광주항쟁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군부의 유신 잔당들이 ‘서울의 봄’을 깨부수고 제2의 유신 체제를 만들고 있는데 그러한 변란에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다면, 그런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정의롭게, 올바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도 광주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길이 남을 역할을 했다. 4월혁명과 똑같이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민주화, 자주화 운동의 추동력이었다. 광주항쟁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뜨겁게 불을 지폈다. 그뿐 아니라 6월항쟁으로 전두환·신군부가 무릎을 꿇고 결국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오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면에서 광주항쟁은 한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잊혀서는 안 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보위, 무소불위 권력 휘두르다

1980년 5월 27일 무력으로 광주항쟁을 짓밟은 전두환은 곧이어 국보위를 설치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국보위를 통해 전두환 일당은 부정 축재자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공직자 등 1만여 명을 숙정했다. 또한 언론계에도 칼날을 들이대 언론 검열에 비협조적인 기자들을 추방했다. 특히 광주항쟁 때 있었던 보도 검열 거부, 제작 거부를 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을 했다. 당시 기자의 30퍼센트가 쫓겨났는데, 과히 언론 대학살이라고 할 만했다. 전두환 일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들을 연행해갔고, 정치인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했다. 이때 몰수한 재산 규모는 1,133억 원에 달했다.

인권 유린과 잔혹함의 상징,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는 국보위에서 시행한 대표적인 사업이다. 이 사업은 전두환 일당의 인권 유린과 잔혹함을 상징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전두환 일당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없이 1980년 8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 6만 755명을 체포했다. 이 중 3,25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1만 7,761명이 훈방 등의 조치를 받았다. 이 사람들을 제외한 3만 9,742명이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1일까지 11차에 걸쳐 전국 각지의 군부대에서 소위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았다.

이 중에는 13세 소년에서 70대 노인까지 있었고 군 장성, 언론인, 노조원,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돼 있었다. 특히 민조 노조 운동가들이 표적이 되어 끌려갔다. 원풍모방을 비롯해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한일도루코, 청계피복, 원풍타이어 등의 노조 간부 22명 또는 그 이상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4주간 순화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강창성은 박정희의 지시로 하나회를 대대적으로 수사하던 사람으로, 전두환 일당이 그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을 한 것이었다.

전두환은 이 사업이 국보위 사업 중에서 핵심 사업이라고 강조하며 범국민적, 범국가적으로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강한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전두환의 주문이 있었기에 삼청 교육은 잔혹하게 시행됐고, 수많은 사망자 등 피해자를 양산했다. 공식 사망자만 54명으로 밝혀졌고,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은 397명, 행방불명자 4명, 삼청 교육으로 인한 상이자는 2,768명이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일본은 전두환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대중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연행됐다. 계엄사는 1980년 7월 4일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들이 국민연합을 주축, 전위 세력으로 하여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대중 선동에 의해 학원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민중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유혈 혁명 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 집권하려는 내란 음모 행위의 전모가 드러났다.”

계엄사 합수부는 7월 12일 김대중 등 37명을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했다. 이어서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하나의 사건을 조작했다. 계엄사는 내란 음모 이외에도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그 수괴로 있으면서 북괴의 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 사용한 혐의 등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전두환 일당이 문제 삼은 일본에서의 활동을 일본 정부가 반드시 문제 제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전두환?신군부와 일본 정부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일본은 전두환 일당이 5?17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도록 남침 정보를 조작해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결국 일본 정부는 김대중의 기대와 달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은 사형이 구형되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도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미국은 한국이 강력한 반공 기조를 유지한다면, 독재 정권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19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이 취임 직후 첫 번째 손님으로 전두환을 미국에 초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을 강력히 지지했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되다

전두환은 2단계를 통해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먼저 최규하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기들이 만든 헌법에 따라 또 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다. 1980년 8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작성했다. 그리고 전두환·신군부의 강박에 의해 8월 13일 김영삼이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8월 14일에는 김대중 등 24명에 대한 군사 재판이 시작됐다. 8월 16일에는 마지막 수순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했다. 8월 21일 전국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 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9월 29일 이번에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했다. 10월 22일 국민 투표로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었고, 1981년 2월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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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014-모네

도서정보 : 허나영 | 2020-02-0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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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지 우주가 내게 보여주는 것을
붓으로 증명하려 했을 뿐이다”


미술사의 흐름을 뒤바꾼 인상주의 혁명
그 시작과 끝에 ‘빛과 색을 쫓는 사냥꾼’ 모네가 있다

빛의 인상을 쫓는 여정을 시작한 르아브르 해안에서 구세대 미술에 도전장을 내민 파리를 거쳐
대표작 <수련>을 피워낸 지베르니 정원까지 빛으로 가득한 모네의 화실을 찾아 나서다





◎ 도서 소개

인상주의자 모네의 ‘예쁜 그림’에 담긴 아방가르드 정신
회화가 나아갈 길에 새로운 빛을 제시한 그의 삶과 예술로의 여행

프랑스의 근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에펠탑이라면, 미술에는 인상주의 회화가 있다. 둘 다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탄생했고, 처음 발표된 당시에는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예술사에서 확고부동한 가치와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만국박람회를 통해 에펠탑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인 1889년에 모네는 로댕과 함께 각각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와 조각가로서 2인전을 열었다. 르누아르, 드가 등 동료 화가들과 의기투합해 첫 인상주의 전시를 열고 〈인상, 해돋이〉를 발표한 지 꼭 15년만이었다. 그 후로 현재까지 모네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랑받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모네와 인상주의를 주제로 한 전시는 거의 예외 없이 성황을 이루고, 201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모네의 1890년작 〈건초더미〉가 낙찰가 신기록을 세웠다.
모네가 이토록 큰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그림이 대중에게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그의 작품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그저 ‘예쁜 그림’으로만 봐도 좋은 것일까? 1874년에 〈인상, 해돋이〉를 보고 루이 르루아가 내린 ‘인상밖에 없는 그림’이라는 평가는 명백한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 회화를 모범으로 삼는 아카데미와 살롱의 기준에서 이 그림은 아름답기는커녕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그림이었다. 모네는 기존 회화가 추구하던 이상화된 형태와 색, 실제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인상’을 그렸다. 안개 낀 날과 맑은 날 센강의 물빛이 다르고, 공기와 햇빛의 질에 따라 그림자조차 수백 혹은 수천 가지 다른 색을 띤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이런 시각적 차이를 그림으로 구현한 최초의 화가들이 모네와 인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아직 옛것에 얽매인 당대의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결국 역사는 모네와 인상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존 주류 미술에 대항해 시대를 앞선 새로운 미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는 혁명이고 아방가르드다. 이 혁명을 모네는 ‘빛’과 ‘색’으로 이루어냈다. 그는 자신의 눈에 실제로 보이는 자연의 빛을 그린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그가 말년에 시력을 잃어가면서 그린 작품들에 나타난 왜곡된 형상과 색채조차 그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모네는 천재라기보다는 예민한 시각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으며, 빛과 색에 관한 그의 집요한 탐구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를 조각하는 장인과 같았다. 모네의 발자취를 쫓는 이 책은 불가해하리만치 집요한 그 열정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가까이에서 이해해보려는 시도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르아브르에서부터 본격적인 화가 생활을 시작한 파리를 거쳐 아르장퇴유, 베퇴유, 루앙, 지베르니 등으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저자 허나영은 종종 멈춰 서서 화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모네의 삶과 예술을 추동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헤아린다. 르아브르 바닷가에서는 화가의 길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한창 인상주의 전시 준비로 바쁜 와중에 이곳을 찾은 그의 심경을 상상해보고, 파리 생라자르역의 철골 지붕을 바라보며 삶의 무게와 이루고 싶은 꿈 사이에서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분주하고 고단했던 그의 30대를 돌아본다. 첫사랑이었던 아내 카미유를 떠나보낸 뒤 새로운 사랑 앞에서 주저하던 마음과 그럼에도 끝내 그 사랑을 지켜낸 용기까지, 이 책에는 모네의 그림만큼이나 다채로운 빛깔을 띤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시대의 인상을 넘어 회화의 현대성을 포착하다

저자는 모네의 삶과 예술을 이끈 두 가지 배경을 19세기 파리 사회와 미술사의 흐름에서 찾는다. 프랑스혁명으로 주춤했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경제 발달이 본격화된 19세기 중후반의 파리는 ‘모던’이라는 구호 아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격렬하고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오스만 남작의 도시 개조 프로젝트에 따라 무질서한 중세도시가 현대도시로 탈바꿈하고, 새로운 교통수단인 기차가 프랑스 전역을 핏줄처럼 연결했다.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들은 시누아즈리나 자포니즘 같은 이국적인 문물에 환호했다. 달라진 생활 방식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했고, 이를 재빠르게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의 그림은 한마디로 유행을 담은 그림이었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인 ‘벨 에포크’가 모네의 작품 속 화려한 색채로 나타났다. 모네 자신의 삶 역시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가 지베르니에 정착해 정원을 가꾸며 〈수련〉 연작을 그리던 무렵, 인상주의는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며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회화가 신화, 종교, 역사 같은 고전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일상과 현실에 주목하게 되면서, 화가들이 이젤을 들고 화실 밖으로 나가게 된 것도 19세기의 일이다. 사실주의 운동을 이끈 쿠르베, 농민의 삶과 자연을 다룬 바르비종파 화가들,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며 그리라는 가르침을 준 부댕과 용킨트 등이 모두 모네의 스승이자 선배다. 이 같은 경향은 좀 더 앞선 시기에 영국에서 터너와 컨스터블의 풍경화로 나타났고, 모네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을 피해서 간 런던에서 터너의 그림을 접하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미술을 향한 시대적 흐름은 이미 형성되고 있었고, 모네는 그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이에 부응하기 위해 뜻이 맞는 동료와 후원자 들을 모아 인상주의라는 본격적인 길을 냈다. 그 길을 타고 회화는 대상에 대한 정형화된 재현에서 예술가의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한다. 미국의 모더니즘 비평가 그린버그는 인상주의가 이미 지나간 세대의 미술이 되어버린 1950년대에 모네의 현대성을 재발견했다. 특히 색으로 가득한 평면에 가까워진 모네의 후기 작품들이 회화라는 매체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고 보았고, 인상주의를 현대미술의 출발로 평가했다.


빛과 색으로 가득한 거대한 평면, 대장식화 〈수련〉의 탄생

흔히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모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두 개의 키워드는 ‘덮개’와 ‘연작’이다. 루앙대성당을 그릴 때 그는 성당이라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자신 사이에 있는 덮개를 그린다고 했다. 공기, 바람, 안개, 온도, 습기, 시간 그리고 빛과 같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 쉽게 지각되지 않던 것들이 모네의 그림을 통해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덮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날씨와 시간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담기 위해 그의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연작 형식으로 발전했다. 에트르타 해안에서 모네와 어울렸던 모파상에 따르면, 그는 하늘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개의 캔버스를 바꿔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는 건초더미나 런던의 국회의사당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빛과 색을 쫓는 사냥꾼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상을 포착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빛과 함께 모네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물’이다. 말년에 그는 화가보다 정원사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지베르니의 정원을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 특히 연못을 중심으로 한 물의 정원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작품이자, 대장식화 〈수련〉 연작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이 연작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실 수련이 아니라 수련이 떠 있는 연못의 수면이다. 모네는 여타의 대상을 모두 밀어내고 오로지 거대한 수면만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수련〉이 전시된 오랑주리미술관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물과 빛으로 이루어진 덮개에 감싸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그림뿐 아니라 전시 공간까지도 그의 의도대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꽃의 수족관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는 둥근 벽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전시실을 주문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제작했다. 평론가 앙드레 마송은 모네를 미켈란젤로에 빗대어 오랑주리미술관을 ‘인상주의의 시스티나성당’이라고 불렀다. 기념비적인 크기와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놓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한 비유다.

86세로 삶을 마감한 모네는 한 미술 사조의 시작과 끝을 모두 함께한 드문 인물 중 하나다. 인상주의라는 혁명을 시작하고 그 ‘마지막 생존자’가 된 모네는 말년에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탐구의 집약체이자 그것을 뛰어넘어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대장식화 〈수련〉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리고자 했지만, 그 집요한 탐구의 끝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에 드러난 표면적인 아름다움 그 이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과 함께하는 여정이 또 다른 영감과 울림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주를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을 더욱 깊고 정교하게 만들어준다”
-조르주 클레망소





◎ 책 속에서

◆ 모네에게 야외 화실은 그 어떤 화가에게보다도 큰 의미를 지닌다. 결코 실내에서는 담을 수 없는 소재를 화폭에 담기 위해 야외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빛’이다. 모네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태양의 빛과 그에 따라 변하는 만물의 색을 그리기 위해 화구를 들고 센강 변으로 갔다.
-〈프롤로그〉 중에서

◆ 모네의 삶과 예술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은 르아브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노르망디 바다를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 수 있게 도움을 준 스승 외젠 부댕을 만났을 뿐 아니라, 모네에게 인상주의자라는 이름표를 붙여준 〈인상, 해돋이〉를 그린 곳이기 때문이다.
- 〈1장 여명 - 노르망디 바닷가에 이젤을 세우다〉 중에서

◆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급변하는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바로 19세기 젊은 예술가들이 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모네를 비롯하여 이후 인상주의자라고 불리게 되는 화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파리의 삶을 각자의 개성을 살려 표현한 ‘도시의 화가들’이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모네가 주로 그린 것은 자연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모네의 발걸음이 닿았던, 소위 ‘모네의 화실들’은 파리지앵들이 기차를 타고 나가 여가를 즐기던 확장된 파리라고 볼 수 있다.
- 〈2장 일출 - 미래를 향해 달리는 도시와 화가들〉 중에서

◆ 당시 모네를 포함해 인상주의자라고 불린 이들의 상당수는 30대 혹은 40대였다. 이미 가정을 이루었거나 적어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몫을 해야 하는 나이였다. 살롱으로 대표되는 미술 제도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기성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버리는 것은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로 뭉쳤던 것이다. 비록 당시의 보수적 시각에서는 쓸데없는 아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인상주의자들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모네를 인상주의자로 기억하는 것이 그 증거다.
- 〈3장 아침 햇살 - 인상주의자의 탄생〉 중에서

◆ 모네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붓을 잡은 것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한편,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음을 고백한다. 카미유와 함께 바다에 갔을 때, 아르장퇴유의 들판을 산책했을 때, 그녀가 마당에서 아들과 노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모든 순간을 그림에 담고자 했던 모네이기에 이렇게라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 〈4장 정오 - 두 번의 죽음을 넘어서〉 중에서

◆ 모네가 지베르니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가꾸고 있을 때, 비록 인상주의는 해체되었지만 뒤랑뤼엘은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인상주의자들도 당시에 모르던 것이 있다. 그들에게 세계 미술과 문화의 중심은 파리였다.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 20세기에 들어서서 발발한 두 번의 전쟁으로 세계 경제와 정치뿐 아니라 예술의 중심 역시 미국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 파리지앵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부를 얻어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파리에 집을 사두고 살롱을 열어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교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뒤랑뤼엘은 미국 본토에서도 미술 시장이 새롭게 열릴 것이라 예측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 〈5장 오후의 태양 - 지베르니에서 맞이한 벨 에포크〉 중에서

◆ 프랑스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1891년 뒤랑뤼엘갤러리에 전시된 〈건초더미〉 연작을 ‘진정한 사실을 그린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흔히 사실적인 묘사라고 여겨지는 사물의 껍데기가 아니라, 빛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 모네의 그림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 〈5장 오후의 태양 - 지베르니에서 맞이한 벨 에포크〉 중에서

◆ 그토록 시각에 의존하던 화가가 정상적이지 않은 시력으로 그림을 계속 그린다는 것이 범부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네의 그런 열정 덕분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색다른 작품이 탄생했다. 그가 반복해서 다뤄온 동일한 일본식 다리와 장미 아치를 그렸음에도 형상은 불분명해지고 색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붓질은 거칠면서도 강한 마티에르가 드러난다. 그래서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파악하려다가도 강렬한 색과 붓질에 압도당하고 만다. (...) 실제 대상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떠나 오로지 색과 질감만으로 훌륭한 회화가 된다는 점에서 이 시기 모네의 작품은 훗날 미국 추상표현주의와도 연결된다.
- 〈6장 노을 - 〈수련〉, 꿈의 완성〉 중에서

◆ 분명 멀리서 보았을 때 보이던 꽃과 나무, 물비늘이 그림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형태가 흩어지고 대신 다양한 색의 붓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모네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중 하나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꽃이든 사람이든, 설사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성당이라 하더라도 모네의 손에서는 그저 붓자국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는 여인의 아름다운 속눈썹이나 성당의 성스러운 조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햇빛이 자연과 사람을 비출 때 보이는 색에 집중했고 그것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빛 그 자체였다.
- 〈6장 노을 - 〈수련〉, 꿈의 완성〉 중에서

◆ 지금 우리 눈앞에 놓인 모네의 ‘예쁜 그림’ 뒤에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힘겨운 노력과 투쟁이 있다.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물길의 당연한 흐름에 모네가 커다란 돌을 던졌다. 물론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인 쿠르베와 마네가 있었고 후배 격인 고흐와 쇠라가 있었다. 또한 이 예술가들의 전위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해준 뒤랑뤼엘과 같은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네가 던진 돌 옆에 또 다른 돌을 던져주고 흙을 옮겨주자 물길이 바뀌었다. 이들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인상주의는 그렇게 서양미술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에필로그〉 중에서

구매가격 : 16,800 원

이시원의 영어 대모험 1권

도서정보 : 박시연, 이시원 | 2020-02-0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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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안 되면~ ♪
시원 쌤과 함께
초등영어 쉽게 시작해요!





◎ 출판사 서평

이시원표 초등영어 학습만화 탄생!
“영어가 안 되면~” 중독성 강한 멜로디의 CM송과 쉬운 영어 학습 강의로 알려진 시원스쿨. 시원스쿨의 메인 강사이자 대표인 이시원 선생님을 드디어 학습만화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시원스쿨 기초영어 콘텐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담은 이시원표 초등영어 학습만화입니다.
영어는 지구상의 수많은 언어 중에서도 공용어로 꼽힐 만큼 중요하고,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언어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영어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수준에 맞지 않는 영어책과 과도한 학습량을 만나 영어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립니다.
이시원 선생님은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만화 속 캐릭터로 변신했습니다. 파리만 날리는 예스어학원의 시원 쌤 캐릭터는 사실 예스잉글리시단의 비밀 요원이었고, 위기에 처한 영어 유니버스를 구하러 떠나지요. 영어를 시작하는 어린이들이 시원 쌤과 함께 모험을 하다 보면, 시원스쿨 특유의 쉬운 영어 학습법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고, 영어의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 개성 넘치는 만화 속 캐릭터로 변신한 시원스쿨 대표강사 이시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만화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유쾌한 성격 만큼이나 탄탄한 영어 실력을 갖춘 시원 쌤, 그리고 어린이들이 공감할 만한 영어 고민을 가진 예스어학원 신입생들의 모험을 따라가 보세요. 만화 속 핵심 영어 문장이 머리에 남는 것은 물론, 영어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생깁니다.

* 시원스쿨 기초영어 콘텐츠의 노하우를 접목한 학습법
책 속의 또 다른 책 ‘예스어학원 수업 시간’에서 시원스쿨의 노하우가 살아있는 초등영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알아야 할 필수 단어 30개와 핵심 문법 3가지는 빠르게 영어 말문을 열어 주는 단어 연결법을 적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원스쿨의 차별화된 학습법을 통해 다양한 영어 문장을 익힐 수 있습니다.

* 만화로 생긴 흥미를 영어 실력으로 만들어 주는 학습 과정
만화 속 이야기가 학습 과정에 자연스럽게 녹아나도록 구성했습니다. 때문에 아이들이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영어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만화 속 대사를 영어로 표현해 보는 말하기 시간, 영어에 대한 배경지식을 심어 주는 이야기 시간 등 만화를 통해 얻은 영어에 대한 흥미를 탄탄한 영어 실력으로 만들 수 있는 학습 과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진짜 이시원 선생님의 강의와 원어민 발음 듣기 제공
책 곳곳에 들어 있는 QR코드를 통해 시원스쿨 이시원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와 원어민 영어 발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눈으로 읽기만 하는 책이 아니라, 진짜 이시원 선생님이 진행하는 영어 수업을 보고, 필수 영어 단어를 원어민 발음으로 들으면 한층 더 정확하고 깊이 있는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 언제 어디서나 재미있게 영어 단어와 친해질 수 있는 딱지 수록
영어 단어는 많이 보고 반복해서 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들이 영어를 한층 더 재미있게 느낄 수 있도록 귀여운 캐릭터와 영어 단어가 들어 있는 딱지를 특별 부록으로 담았습니다. 딱지를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다가 심심할 때마다 꺼내서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어 단어와 친해질 수 있습니다.

* 초판 한정 〈비법 영어단어〉 노트도 놓치지 마세요!







◎ 1권 줄거리

영어 실력 특급, 개성도 특급인 비밀 요원,
시원 쌤과 위기에 처한 405 유니버스를 구하라!
꿈에서는 몰려드는 어린이들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지만, 현실에서는 휑하기만 한 예스어학원의 시원 쌤.
꾸준한 홍보로 어느 날 갑자기 세 명이나 되는 신입생이 나타난다. 이 아이들에게 ‘영어, 억지로 외우지 말자!’는 자신의 모토에 따라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칠 생각에 설렌다.
그런데 설렘도 잠깐, 갑자기 칠판에 써 놓은 영어 단어가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은 모두 깜짝 놀라지만, 시원 쌤은 침착하게 자신의 시계에 대고 “슬라고, 출동!”을 외치는데….
과연 시원 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시원 쌤의 외침에 따라 나타난 녹색 괴물의 정체는?

구매가격 : 9,6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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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보 : 커트 보니것 | 2020-02-0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이제는 멸종해버린, 보니것식 SF 클래식
선악과를 탐한 현대인의 ‘웃픈’ 파멸

이 모양 이 꼴인 세상에서
가장 지적인 방식으로,
미치지 않고 살아남는 법!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시니컬한 유머 작가”

커트 보니것 미발표 단편집

“진정한 예술작품.
이 책에 실린 열네 편의 단편 모두
‘클래식 보니것’이라 할 만하다.” 허핑턴 포스트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휴머니스트이자 유머리스트, 하루키가 존경하고 박찬욱이 사랑한 작가 커트 보니것의 미발표 초기 단편소설집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카메라를 보세요』는 보니것의 미발표 초기 단편소설 중에서도 보니것의 시그니처인 SF 작품들 위주로 선별해 묶었다. 비현실적 배경과 설정 속에서 보니것식 현실비판은 더욱 빛을 발하고,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인 문체와 재기발랄하면서도 오 헨리를 연상시키는 반전 결말이 돋보인다.

헤밍웨이는 <에스콰이어>에 글을 실었고,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윌리엄 포크너는 <콜리어스>에, 존 스타인벡은 <우먼스 홈 컴패니언>에 글을 실었으며, 커트 보니것도 마찬가지였다. 매해 불어나는 가족 때문에 그는 잡지사에 단편을 기고해 돈을 벌어야 했다. 『카메라를 보세요』에는 “이미 자신의 날개를 본” 젊은 보니것의 독보적인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보니것은 자신의 소설 창작 원칙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간을 사용하되 그 사람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 것.” 『카메라를 보세요』를 펼쳐 든 독자들은 모두, 커트 보니것의 여느 작품들이 그렇듯, 여기에 실린 열네 편의 단편들이 이 원칙에 완전히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멸종해버린, 보니것식 SF의 시작

이 작품들은 커트가 언어로 빚은 환등기이고, 인간 행동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와 신비를 가차없이 뱉어내는 비밀돌이이지만, 유머와 용서가 감돌고 있다. _14쪽, 「서문」 중에서

커트 보니것을 수식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 반전反戰 소설가, SF 작가, 블랙유머의 대가, 휴머니스트, 반反 문화의 대변인…… 이중에서도 커트 보니것을 가장 커트 보니것답게 만들어주었던 것, 보니것을 그 시대의 독보적인 ‘1인’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은 그의 독창적인 SF 상상력이었다. 그의 장편 대표작 『제5도살장』 『고양이 요람』 등에서도 SF 요소는 빠지지 않았다. 『카메라를 보세요』에는 커트 보니것만의 기발하고 인간미 넘치는 SF 단편들이 수록되었다.

「비밀돌이」는 외로운 사람에게 대화와 조언을 제공하는 마법 같은 기계에 대한 이야기다. 「작고 착한 사람들」은 페이퍼나이프 모양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방문한 소인국 외계인 한 무리가 겪은 일들을 다룬다. 「에드 루비 키 클럽」에는 사람의 몸속에 주입하면 반드시 진실만을 말하게 되는 “진실 혈청”이 등장한다. 「거울의 방」에서는 그 당시 가장 트렌디한 정신과학의 한 분야였던 ‘최면 치료’를 마법적인 분위기로 풀어냈다.

보니것은 이런 말을 했다. “과학은 실제로 작동하는 마법이다.” 보니것의 SF에는 과학적 상상력과 더불어 마법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등장인물들은 기존에 없던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고, 말하지 못하던 것을 말하게 된다. 그 과정에는 분명 과학이 작동하지만 등장인물 내면의 흐름과 결말은 마법적이고 극적이며 휴머니즘과 유머가 풍긴다.

“이 사람은 당신과 나, 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몇 안 되는 생명체 중 하나야.
우리를 증오, 조롱, 질투, 음란한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 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친구, 편집증 환자란 말입니다. 이 모양 이 꼴인 세상에서 가장 지적이고 박식한 방식으로 미친 사람을 말해요. 편집증 환자는 거대한 비밀 음모가 자신을 곧 파괴할 거라고 믿죠." _337쪽, 「카메라를 보세요」 중에서

「비밀돌이」의 인물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솔직한’ 조언이라는 명목하에 듣는 이의 가장 잔인하고 나쁜 속내를 들춰내는 기계 ‘비밀돌이’ 때문에 그동안 알뜰하고 소소하게 이뤄온 인생을 부정하게 된다. 「지붕에서 소리쳐요」에서는 작가 자신과 주변 이웃의 위선과 거짓을 가감없이 폭로한 책 때문에 파경 위기를 맞은 부부가 등장한다. 「셀마를 위한 노래」는 그동안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던 학생들의 IQ가 누설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우주의 왕과 여왕」에는 시대의 불황과 실업과 가난에서 유리된 채 안일한 일상을 이어가던 상류층 커플이 난생처음으로 세상의 비극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

『카메라를 보세요』의 단편 속 등장인물들은 뜻밖의 사건으로, 혹은 과학의 발전을 통해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진실을 맞닥뜨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불편한 속내를 꺼내 열게 된다. 어떤 진실은 드러나고 말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진실은 비극과 파멸을 초래하기도 한다. 『카메라를 보세요』에 수록된 단편들에서는 진실의 선악과를 탐한 현대인의 ‘웃픈’ 희비극이 절묘하게 그려지며, 이 모양 이 꼴인 세상에서 가장 지적이고 박식한 방식으로 미치지 않고 살아남는 보니것만의 비법을 알려준다. ‘문학 역사상 인간의 어리석음이 빚은 비극과 희극을 가장 잘 결합해낸 작가’다운 커트 보니것의 면모가 돋보이는 책이다.


책 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커트의 야심의 고백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자신의 소설 창작 규칙 중 하나를 내게 읊어주었을 때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간을 사용하되 그 사람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 것.” _12쪽, 「서문」 중에서

글 쓸 거리가 많다는 것은 신도 알지. 요즘은 분명히 예전 그 어느 때보다 많아. 자네는 의무를 다하지 않고, 나도 의무를 다하지 않고, 모두가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_18쪽, 「1951년 밀러 해리스에게 보 내는 커트 보니것의 편지」 중에서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뭘까, 심지어 음식보다 더? 이야기할 사람!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 바로 그거지.” _25쪽, 「비밀돌이」 중에서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마법이지.” _28쪽, 「비밀돌이」 중에서

“어쿠스티-젬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빈말로 칭찬하는 사람, 교묘히 남을 속이는 사람뿐이에요. 당신의 업적으로 매일 다른 누군가의 월급이 엄청나게 올라요. 정신 차려요! 당신은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그 누구보다 일을 열 배나 잘했어요.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_29쪽, 「비밀돌이」 중에서

퍼즈는 그곳에서 팔 년을 일했다.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괴짜였고, 같이 있었어야 할 사람들에게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무기력하고, 냉소적이고, 심각하게 내성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_46쪽, 「푸바」 중에서

퍼즈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의 보라색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인생의 가장 잔인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희생이란 정말로 희생이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어머니를 돌보면서 그는 잃은 것이 아주 많았다. _56쪽, 「푸바」 중에서

“불행을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불행한 게 그렇게 좋은가보죠.” _60쪽, 「푸바」 중에서

“우리가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인가요? 우리 문제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결혼생활에 놓인 압박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세요!” _76쪽, 「지붕에서 소리쳐요」 중에서

“잘나가는 친구 있어?” “아뇨.” “그럼 이 동네는 나쁜 동네야.” _108쪽, 「에드 루비 키 클럽」 중에서

“나도 그렇게 말했지."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신병원에 데려갔어. 나한테도 거창한 이야기가 있었어. 사람들이 내게 저지른 일, 사람들이 짜고 나에게 저지르려고 했던 일. 나는 그 이야기를 믿었어. 엘리엇 씨, 나도 믿었다고. 엘리엇 씨, 그들이 날 정신병원에서 언제 풀어주었는지 알아? 아내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내보내준 게 언제였는지 알아? 나를 해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내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였어.” _137쪽, 「에드 루비 키 클럽」 중에서

“아픈 것은 그들의 미래였어요.” _204쪽, 「거울의 방」 중에서

그는 지적이고 건강했지만, 지나치게 착해서 가장으로 군림하거나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마들렌이 언젠가 묘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주류 인생의 경계에 서서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먼저 가시죠” “사양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_218쪽, 「작고 착한 사람들」 중에서

동료란, 내가 그를 특별히 좋아하는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다. _259쪽, 「작은 물방울」 중에서

“복수는 사소한 거죠.” _276쪽, 「작은 물방울」 중에서

“어떤 진실은 말하면 안 돼, 계속 살고 싶다면.” _296쪽, 「개미 화석」 중에서

“당신은 증오의 붉은 아지랑이를 통해 상황을 바라보고 있어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살인 카운슬러의 침착하고 현명한 서비스입니다.” _331쪽, 「카메라를 보세요」 중에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 사람은 취객, 떠돌이, 시인밖에 없죠.” _347쪽, 「우주의 왕과 여왕」 중에서

“우리 아버지는 내 미래를 위해 일하다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도 같은 이유로 죽어가고 있고요. 그리고 지금 나는 대학 학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접시닦이로도 취직을 못하고 있어요!” _356쪽, 「우주의 왕과 여왕」 중에서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카메라를 보세요』에 실린 열네 편의 단편은 전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다. 잘 다듬어진 이 작품들은 무자비할 정도로 재미있으며, 하나도 빠짐없이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결말에 도달한다. _데이브 에거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전후 사회를 날카롭게 찔러대던?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파괴적으로? 젊은 작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적이고 웃기고 담백한, 이제는 거의 멸종해버린 보니것만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_보스턴 글로브

어느 완벽한 세상에서라면, 사람들이 한밤중에 줄을 서서 기다릴 법한 책. _뉴욕

보니것이 비상하기 몇 년 전부터, 이 젊은 작가는 자신의 날개를 분명히 보았다. 이 초기작들이 그 증거이다. _피츠버그 포스트-가제트

21세기의 가장 혁신적이고 인상적인 작품을 쓸 작가로서의 재능이 엿보인다. _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진정한 예술작품. 이 책에 실린 열네 편의 단편 모두 ‘클래식 보니것’이라 할 만하다. _허핑턴 포스트

구매가격 : 11,000 원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14 관광산업, 지속 가능할까?

도서정보 : 루이스 스필스베리 | 2019-07-22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관광산업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
vs
관광산업은 자연을 훼손하고, 현지인의 전통적 삶의 방식을 파괴한다.

관광산업은 ‘굴뚝 없는 공장’으로 불린다. 관광산업이 공장 없이도 일자리를 창출시키고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관광산업은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관광산업이 발달할수록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항공기나 버스와 같은 운송 수단의 운행이 많아지다 보면, 공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늘어나게 된다. 또한 관광객이 현지에서 배출하는 쓰레기와 오수가 많아지면서 환경에 해를 끼치게 된다.
물론 관광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관광산업이 발전하면서 관련 일자리가 늘어나고, 관광 수익으로 도로, 공항, 호텔 등 관광 기반 시설을 건설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광산업이 관광지가 있는 지역에 경제적 이익을 고스란히 가져다줄까? 관광 수입의 대부분은 관광지가 있는 지역사회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외국계 여행사와 항공사, 그리고 호텔 체인으로 유입된다고 한다. 케냐의 경우, 전체 호텔의 75퍼센트 가량을 외국계 회사가 소유하고 있다. 또한 관광산업의 발달로 값싼 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이 많아질수록 관광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 환경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가령, 네팔에서 트레킹 관광객의 짐을 나르는 포터들은 신발을 살 돈이 없어서 맨발로 무거운 짐을 옮기다 병에 걸리거나, 관광객이 무리하게 요구해서 적정량 이상의 짐을 나르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한다.
이렇게 관광산업의 긍정적 기능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관광산업의 역기능도 함께 살펴보면서, 요즘 대두되고 있는 지속가능한 관광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관광산업에 대한 순기능과 함께
그 이면에 감춰진 역기능을 살펴보면서
지속가능한 관광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청소년 교양 길라잡이

《세상에 대하여 더 잘 알아야 할 교양⑭ 관광산업, 지속 가능할까?》는 청소년 도서 최초로 ‘관광산업’ 전반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경제적 쟁점들을 균형 있게 살펴보면서 지속가능한 관광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또한, 관광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 정치적 문제와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 급감하는 경제적 수익, 위장환경주의, 빈민가 관광 등과 같은 관광산업에 관련된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관광산업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지를 다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더불어 관광객의 쾌락 효용을 줄여 현지인의 경제적 수익을 늘리는 것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광산업이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사회 교과서에서 만나지 못했던 관광산업의 이면과 대안을 흥미롭게 소개한 이 책을 통해 지속가능한 관광, 공정여행의 세계와 만나보자.






▶ 책 속에서
관광의 시작
관광의 역사는 전혀 짧지 않습니다. 이미 2천여 년 전에 부유한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닻을 내리고 해변에서 파티를 즐겼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종교적으로 신성한 장소에 순례를 다녀오곤 했어요.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들은 8세기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으로 성지순례를 다녔지요. 17, 18세기에는 유럽 특히 영국 상류층 자녀들 사이에서 그랜드 투어가 유행했습니다. 그랜드 투어는 유럽 곳곳의 유적과 문화를 경험하려는 교육 목적의 관광이었습니다.
-15쪽

관광 수입 분배의 양극화
관광 수입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사회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외국이 소유한 회사로 흘러들어 간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누수 현상’이라고 합니다. 돈이 관광지가 있는 국가에서 새어나와 외국계 여행사와 항공사, 그리고 호텔 체인으로 유입된다는 것이지요. 케냐의 경우, 전체 호텔의 75퍼센트 가량을 외국계 회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또 수입이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늘어난 수입은 소수의 부자 혹은 해안가 리조트 주인 등 몇몇 사람이나 한정된 지역에만 치우쳐 돌아갑니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이나 다른 지역은 여전히 빈곤한 상태이지요.
-31~32쪽

관광산업의 일자리 문제
관광산업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도 안고 있습니다. 우선 외국계 회사는 현지인들에게 호텔 경영과 같은 전문 교육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숙련된 직원들을 해외에서 데려옵니다. 이렇게 되면 현지 주민은 기술이 필요 없고, 임금이 적은 일자리만 얻게 됩니다. 호텔 식당 종업원이나 호텔 벨맨처럼 서비스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임금이 너무 적기 때문에, 생계를 꾸릴 만한 수입을 벌어들이려면 팁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몰디브의 고급 리조트에서 일하는 직원은 대부분 하루 1달러(1,100원) 미만으로 생활합니다. 부모들이 음식을 살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해 5세 이하의 어린이 중 30퍼센트가 영양실조를 앓고 있습니다.
-34쪽

지속가능한 관광
지속가능한 관광은 대안 관광, 생태 관광, 혹은 책임 관광 등 관광산업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관광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녹색 관광, 지역 기반 관광, 착한 여행 등 목적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속가능한 관광이 특히‘ 공정여행’이라는 단어로 인식되고 있지요.
지속가능한 관광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합니다. 도보 여행, 들새 관찰하기, 멸종 위기에 있는 동·식물의 흔적을 찾아다니기, 가난한 마을에 학교 짓기 등의 활동도 포함됩니다. 민박을 이용하는 관광도 지속가능한 관광에 해당합니다. 민박은 호텔, 여관 등 전문 숙박업소에서 묵지 않고 일반 가정집에서 묵는 것을 말해요. 민박은 현지 주민이 관광으로 직접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이에요.

-81~82쪽

구매가격 : 9,600 원

돼지학교 수학5 계산 천재가 된 돼지(사칙연산)

도서정보 : 백명식 | 2015-07-28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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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문제에 항상 등장하는 연산 부호 +? × ÷
그런데 이 연산 부호는 누가 언제 왜 만들었을까요?
또 사칙 연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차례차례 알아봅시다!

매틱 별의 숫자를 찾기 위해 모험을 나선 돼지 삼총사와 큐리, 어스. 우주의 모든 비밀을 아는 수학 마녀에게 세 번째 두루마리를 받았어요. 두루마리 속 사칙 연산의 비밀을 풀면, 수학 마녀가 매틱 별의 숫자 찾는 법을 알려 준대요. 사칙 연산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계산이에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없으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될지 몰라요. 우리 모두 돼지 삼총사를 도와 사칙 연산의 비밀을 풀어보아요!
돼지 삼총사는 사칙 연산의 비밀을 풀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독일의 한 작은 마을로 갔어요. 그곳에서 셈판과 사칙 연산을 통해 사람들을 도와주는 수학자들을 만났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유레카!”로 잘 알려진 최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를 통해 지금의 계산기를 대신하던 셈판에 대해 알게 되었고요. 독일에서는 덧셈, 뺄셈 부호를 만든 비트만과 곱셈 기호를 만든 오트레드, 나눗셈 부호를 만든 하인리히를 통해 사칙 연산이 실생활에 얼마나 유용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어요. 더불어 덧셈과 뺄셈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덧셈을 거꾸로 하면 왜 뺄셈이 되는지, 또 덧셈을 쉽게 계산하게 도와주는 곱셈, 나눗셈과 곱셈을 이용해 검산하는 법까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재미난 사칙 연산을 돼지 삼총사와 함께 만나 보세요.


용감한 돼지 삼총사와 떠나는 창의적 수학 교과서
돼지학교 수학 (전 20권)
★ 전국수학교사 모임 추천도서

만화처럼 쉽고 재미있는 수학 그림책! 〈돼지학교 과학 시리즈〉로 사랑받아 온 돼지 삼총사가 이번에는 수학의 세계로 여행을 떠납니다. 만화보다 재미있는 돼지 삼총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학을 싫어하는 어린이들도 수학적 지식과 호기심이 쑥쑥 자라나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스토리텔링으로 새로워진 초등 수학을 한 번에! 〈돼지학교 수학 시리즈〉는 초등 수학의 다섯 가지 영역인 수와 연산, 도형, 측정, 규칙성, 확률과 통계 분야를 모두 학습할 수 있도록 주제별로 담았습니다. 수학의 기초를 다지면서 수학의 역사, 수학자 이야기, 여러 가지 현상 속의 수학적 의미와 생활 속 수학 등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익힐 수 있게 구성되어, 새로워진 수학 교육 과정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자발적 수학 탐구력, 창의적 문제 해결력까지! 〈돼지학교 수학 시리즈〉는 돼지 삼총사의 다양한 모험을 통해 초등 수학 지식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바탕으로 좀 더 깊고 넓게 생각할 수 있는 자발적 수학 탐구력을 길러 줍니다. 돼지 삼총사와 함께 여러 가지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도 키울 수 있습니다.

수학 선생님이 감수한 알차고 정확한 내용! 〈돼지학교 수학 시리즈〉는 전국수학교사모임 소속 선생님들의 꼼꼼한 감수를 통해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확한 지식을 담았습니다.

구매가격 : 9,600 원

독립군 소녀 해주

도서정보 : 이규희 | 2017-01-02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남의 집 종살이를 하던 해주에게,
그것도 고작 열두 살의 여자아이였던 해주에게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을까요?


이름은 없지만, 독립을 위해 애쓴
우리 모두의 독립운동 이야기-독립군 소녀 해주!
《독립군 소녀 해주》는 단지 특별한 어린 소녀 해주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주인공 해주는 어쩌면 위인전에 실리지 않았고, 우리가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독립을 위해 십시일반 힘을 모으고 열심히 살았던 백성들인지도 모릅니다. 남의 집 종살이를 했으나 기백만은 당당하게 주인어른을 도와 돈을 벌고, 또 그 돈을 독립운동에 보태고, 숨을 곳을 마련해 주던 해주의 부모님, 비록 백정의 아들이었으나 신분의 차별에 굴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광복군에 들어간 돌석 오빠,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나 험한 일 마다않고 해주와 함께 상하이까지 서신을 전하러 간 우빈 도련님까지. 이들 모두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제 36년의 기나긴 억압의 터널에서 우리나라가 빠져나오게 만든 건강한 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평가절하 되었기에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 71년이 되는 오늘, 우리가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또 잊지 않아야 했기에 8월 15일을 맞아 내인생의책 출판사에서 펴냅니다.

한글도, 태극기도 몰랐던 해주는
어쩌다 독립군 소녀가 되었을까요?
이 대감댁 머슴의 딸로 태어난 해주는 분희 언니랑 장에 가는 게 유일한 낙인 열두 살 소녀입니다. 어느 날, 해주는 분희 언니와 함께 건어물을 사러 나왔다가 경성역에서 일장기를 들고 팔락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젊은 군인들도 잔뜩 있었지요. 그 무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 끌려가는 조선인 청년들의 출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해주는 그저 많은 사람과 경쾌한 노래에 신이 났지요. 일장기를 팔락이며 집으로 돌아온 해주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주인어른의 불호령을 듣습니다. 일장기를 든 게 왜 나쁜 일인지 모르는 해주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지요. 주인어른은 해주를 달래며 조심스럽게 분희와 해주에게 태극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태극기는 해주의 가슴을 떨리게 했지요. 그리고 태극기를 자랑스레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펐습니다. 해주에게 이렇게 태극기를 보여 준 주인어른은 독립운동을 뒤에서 열심히 돕는 이시창 어른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감시가 심해져 도움을 주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그때 해주가 나서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일본의 감시가 소홀하다는 틈을 타 해주가 편지를 전해 주게 되었지요. 해주의 첫 번째 독립운동이었어요. 벌벌 떨리는 가슴을 안고, 무사히 편지를 전달한 해주는 가슴 깊이 올라오는 분노에 두근거렸습니다. 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이렇게 고통 받아야하지? 조선말을 쓰고 조선 노래를 부르는 조선인으로는 편히 살 수는 없는 걸까? 라면서요. 해주는 처음으로 조선인으로 독립을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과연 독립군 소녀 해주는 앞으로 또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걸까요?

구매가격 : 10,400 원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57 시리아 전쟁, 21세기 지구촌의 최대 유혈분쟁

도서정보 : 김재명 | 2019-07-22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시리아의 군사 충돌은 내전이다.
VS
시리아의 군사 충돌은 전쟁이다.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 교수가 쓴 국내 최초 시리아 전쟁 분석서!

우리는 항상 국제뉴스를 통해 중동의 이야기를 듣는다. 끊임없는 군사 충돌의 혼란상을 들으며 몸서리를 치다가도 코란과 성경, 수니파와 시아파 등 복잡한 용어 설명을 들으면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 혼란의 결정판이 시리아 전쟁이다. 누구는 내전이라 하고 누구는 전쟁이라 한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여기에 복잡한 국제정세가 얽혀있어서 정부군과 반군 세력을 나누는 것부터 혼란스럽다.
이 책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57-시리아 전쟁, 21세기 지구촌의 최대 유혈분쟁》은 그런 시리아 전쟁을 다루고 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해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 교수가 알기 쉽게 설명한다.
시작은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중동의 민주화 바람이었다. 자유국가가 거의 부재하다시피 하는 중동의 현실에 염증을 느낀 각국의 국민들은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 국가를 세우겠다는 열망을 강하게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대부분의 중동 독재자들은 권좌에서 내려오거나 시민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달랐다. 독재자 알아사드는 2대에 걸친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국민과 전쟁을 선언했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폭격이 자행되었고 급기야는 국제법상 금지된 화학무기까지 사용해 자국민을 학살하고 있다. 2011년에 시작된 이 아비규환은 2018년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초기에 민주화 시위에서 발발한 정부군과 시민의 충돌 양상은 내전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중동의 인접 국가들이 개입하고 서방세계가 각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대립하면서, 이제는 대리전의 성격을 띤 국제전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일반적으로 쓰는 ‘시리아 내전’이라는 표현 대신 ‘시리아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러 국가의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고 그 이면에는 각자의 복잡한 계산이 깔려있다. 이러한 시리아의 특수성은 정부군과 반군 사이 미묘한 힘의 균형을 만들어 전쟁의 앞날을 예측하기가 한층 어려운 실정이다.
문제는 전쟁으로 인해 희생되는 무고한 시민들이다. 특히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의 삶은 폭격과 화학무기로 인해 단어 그대로 박살이 났다. 참혹하게 무너진 지옥의 폐허 속에서 사람들은 국적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저자가 발로 뛰며 취재하여 완성된 원고에는 그 참상이 세밀하게 쓰여 있다. 알아사드 정권의 만행이 낱낱이 고발된 글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가 일게 한다.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이토록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책의 문장은 전체적으로 차분하지만 그 행간에는 저자의 짙은 탄식이 배어 있다.
작가는 묻는다. 인류는 왜 어리석은 전쟁을 멈추고 평화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시리아 전쟁, 21세기 지구촌의 최대 유혈분쟁》에는 독자가 21세기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 책 속에서

지난 7년 동안 시리아에선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집과 재산을 잃었다. 한마디로 ‘21세기 초 지구촌이 맞닥뜨린 최대의 재앙’이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렸다.
- 19쪽, 시리아 전쟁의 참혹한 현실

적지 않은 시리아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소년병으로서 직접 전투 현장에 뛰어들기도 한다. 전쟁 초기에는 15세에서 17세 사이의 소년들이 무기를 옮기고 보초를 서는 등 어른 반군들을 돕는 보조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쟁이 오래 끌면서 나이 어린 소년들조차 초보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전투에 뛰어드는 경우도 늘어났다.
- 34쪽, 어른들의 전쟁에 희생되는 어린이들

1925년 프랑스의 위임통치에 맞서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들이 늘어나자,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마스쿠스의 오랜 유적지를 비행기로 공격했다. 오늘날 다마스쿠스를 가보면 일부 유적들이 심하게 훼손된 것을 볼 수 있다.
- 49쪽, 시리아의 얼룩진 현대사

시리아에 머무는 동안 곳곳에서 알아사드 부자의 대형 얼굴 사진과 마주쳐야 했다. 도서관이나 우체국 같은 공공장소는 물론이고 작은 식당에도 그들의 사진이 어김없이 내걸려 있다. 영국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러더’의 모습과 다름없다.
- 59쪽, ‘빅 브러더’가 다스리는 통제 국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2011년의 인물로 ‘시위자(The Protester)’를 꼽았듯이, 서구의 ‘점령하라(Occupy)’ 시위와 더불어 중동의 민주화 시위는 21세기 초 세계를 흔든 큰 물결이다. 튀니지의 한 노점상 청년이 경찰의 과잉 단속에 맞서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기폭제가 돼 일어난 ‘아랍의 봄(Arab Spring, 또는 튀니지의 나라꽃인 재스민에 빗댄 ‘재스민 혁명’)’은 중동의 정치 지형은 물론 국제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 71쪽, 아랍의 봄, 아랍의 겨울

시리아 전쟁에 뛰어든 무장 세력은 매우 복잡하다. 큰 틀에서 보면 시리아 정부군과 그에 맞선 반군으로 나뉜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4개 무장 세력으로 갈린다. 첫째는 시리아 알아사드 독재 정권의 시리아 정부군과 이들을 돕는 외국 세력(러시아, 이란, 레바논 헤즈볼라), 둘째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군과 그들을 돕는 외국세력(미국,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셋째는 시리아에서 자치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분리 독립을 꿈꾸는 쿠르드족 세력, 넷째는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내세우는 이슬람 국가 무장 세력이다.
89쪽, 누가 싸우고 있는가

미국이 군사개입을 망설이며 저울질하는 사이에 IS가 결정적으로 미국과 서방국가들을 자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IS에 붙잡힌 미국과 영국의 기자들이 잇달아 참수 당하는 일을 두고 보기 어렵게 됐다. 더 이상의 인질 참수는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결국 미국이 무력 개입에 나섰고 2014년 9월부터 공습이 이어졌다. 그동안 미국이 무기를 대주고 지원해왔던 시리아 반군의 주적인 시리아 정부군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국가’라는 특정 반군 세력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 108쪽, 이슬람 국가(IS)와 미국의 군사개입

머릿수로 따지면, 쿠르드(Kurd)족은 지구상에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 못한 민족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다. 머릿수는 약3천만~3천7백만 명에 이른다. 유엔에 가입한 193개 국가 가운데 인구가 겨우 몇 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들도 여럿이다. 인구 3천만 명이라면 어엿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만한데도 그러질 못했다.
- 115쪽, 비운의 민족, 시리아 쿠르드족(Kurd)

화학무기는 국제법상 사용해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무기다. 사람의 피부와 호흡기, 신경을 마비시켜 결국은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무기다. 2013년 8월 동구타에 떨어진 화학무기로 9백에서 1천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부상자는 무려 8천 명에 이르렀다.
- 133쪽, 시리아에서 벌어진 전쟁범죄

2011년 아랍의 봄을 타고 벌어진 시리아 전쟁은 처음엔 민주(반군)-반민주(시리아 정부군)의 대치 전선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민주화보다는 다른 요인들이 우선하는 분쟁으로 변질된 모습이다. 여기에는 주변국들의 책임이 크다.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 국가들은 시리아전쟁에 자국의 이해관계를 잣대로 개입하면서 전쟁의 성격을 변질시켰다.
- 154쪽,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은 까닭은?

결론적으로 전쟁을 하루빨리 끝장내고 ‘아랍의 봄’을 시리아에서 되살리려면, 결국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알아사드 독재 정권을 외교적으로 강하게 압박하면서 평화 중재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길밖에 없다. 알아사드의 퇴진과 전쟁범죄 처리는 그 뒤 수순이다.
- 167쪽, 시리아 해법 ? 정치적 해법으로 전쟁 끝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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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69 인구와 경제, 인구가 많아야 경제에 좋을까?

도서정보 : 정민규 | 2019-07-23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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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많아야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
많은 인구는 내수를 진작할 밑거름이 될 거야!”
vs
“인구 절벽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보장제도나
인구 정책, 경기 부양책을 준비하는 게 중요해!”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OECD 주요 36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2018년 우리나라의 출생아 수가 326,900명으로 집계되면서, 출산율 0.98명을 기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0년 이래 출생아 수가 최저치를 경신했고, 출산율 1명 선마저 무너진 것입니다.
저출산을 우려하는 여론이 완연합니다. 장차 경제 활동 인구의 급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이 속속 입안되었습니다. 신혼부부의 전세 대출을 지원하고 신혼희망타운을 각지에 조성하거나, 출산휴가·육아휴직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아동 복지 시설을 확충했어요. 정부는 인구를 늘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탄탄한 내수 시장을 확립하려 합니다. 이로써 내수와 수출이 조화를 이루는 경제 구조를 도모하려는 구상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인구 증가가 반드시 경제에 플러스 요인일까요?
우리나라 인구 정책의 지향을 재설정합니다.

하지만 인구가 많아야만 경제에 좋을까요? 달리 말해서, 과연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문제일까요? 이러한 의문에 뱀의 입 현상은 이견을 제시하는 증거입니다. 2000년대부터 기업 생산성이 높아져도 고용은 증가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생산성과 고용률의 격차가 점점 더 커져서 뱀의 입처럼 벌어지는 추세가 장기간 지속해왔습니다. 기술이 혁신되고 지식 총량이 늘어나도 그만큼의 일자리가 늘어나진 않는 ‘노동의 역설’이 기존의 ‘인구 증가는 경제 규모 증가’ 현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두려워할 것은 인구 절벽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인구가 급증하는 세계 어딘가에는 그 지역대로의 인구 문제가 또 있을 테니까요. 관건은 태어난 아이의 숫자가 아니라, 아이가 태어난 가정의 행복입니다. 우리 실정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겠지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거울삼아 인구 정책을 장기적인 관점으로 적기에 시행해야 합니다. 독일의 직업 교육 제도나 마이스터 제도 등을 탐구함으로써, 이 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경제 활동을 주도할 인재 육성 방안까지 탐구해요.
아울러 결혼과 출산만을 장려할 게 아니라, 실버 문화 또는 혼족 문화와 같은 새로운 시장을 파악하고 가구 축소 추세에 대응하는 것 역시 중요함을 환기합니다. 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인구 주택 총조사나 장래인구추계 등의 정책도 소개하지요. 이처럼 인구와 경제에 관하여 진중한 숙고를 풀어냄으로써, 이 책은 우리나라 인구 정책의 새로운 지형과 인구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 속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과연 문제일까? 인구 감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회는 없을까? 최근 우리 사회에는 저출산과 고령화가 빚어낼 미래상을 놓고 위기의식이 많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여러모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인구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본 걸까요?
- 8쪽, 들어가며

오늘날 지구에는 약 76억 명이 살고 있는데요.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1960년에는 현재의 절반도 되지 않는 30억 명이었습니다. 세계 인구가 엄청난 속도로 증가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인구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늘어나서 걱정이고, 우리나라는 인구, 그중에서도 생산 가능 인구가 갈수록 부족해져서 고민입니다.
- 15쪽, 인구, 늘어야 할까, 줄어야 할까?

전 세계적으로는 인구 증가 그리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빈부 격차가 문제시됩니다. 하지만 주요국들로 눈길로 돌려 보면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1970년 이후로 서구 주요국에서부터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현재 많은 나라의 국가적 과제이지요. 특히 최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저출산 현상이 심각합니다.
- 35쪽, 인구 변동의 대표적인 현상

워라밸이 기업에서 구현되느냐보다 더 많이 우려되는 것이 바로 일자리 부족 현상입니다. 청년 세대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노동 시간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그런데도 노동생산성은 높아져서 투입한 노동에 비해 재화는 넉넉하게 생산되고 있으니, ‘노동의 역습’이라고 할 만한 역설이 벌어진 셈입니다.
- 64쪽, 인구가 줄면 일자리가 늘어날까?

인구 절벽 때문에 한국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장기 불황의 시기를 겪을 것이라고 많이들 예상합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조차 저출산 및 인구 감소와 ‘잃어버린 세월’ 간에 인과 관계가 있는지에 관해 논란이 있습니다. 실제로 인구와 국내총생산(GDP)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 77쪽, 인구 절벽, 두려워할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저출산 기조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구조뿐만 아니라 젊은 층의 환경과 심리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구는 결코 단기간에 그 양상이 달라지지 않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세대별로 삶의 질을 높일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 91쪽,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들

경제 성장을 논할 때, 이제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환경이 극심하게 오염되어 가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인구가 줄어든다면 각각의 사람들이 더욱더 하나로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129쪽, 공존과 공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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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66 기후 변화, 자연을 상품으로 대하면?

도서정보 : 필립 스틸 | 2019-10-02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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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의해 지구 온난화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사기다!”
vs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 변화가 모인다면 기후 변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집 일대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무덥거나, 숨쉬기 힘들 만큼 공기가 오염되었다면 어떨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이렇게 일상생활을 하기가 고통스러운 환경이라면 누구든 그곳을 벗어나 살기 좋은 다른 지역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현상이 특정 지역이 아니라 인류의 고향, 지구에서 전면적으로 일어난다면요? 우리는 피할 곳조차 없는 채로 자연이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후손들이 받을 고통은 훨씬 더 심해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구 온난화와 같은 기후 변화 요인이 누적, 심화하면서 폭염, 한파, 가뭄, 폭풍, 집중 호우 등 기상 이변이 도처에서 속출합니다. 지구는 이 같은 기상 재해로부터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더는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살아온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급격한 기후 변화가 인류가 산업화를 시작한 18세기 이후 생겨난 매우 최근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유사 이래 정말 단기간에 벌어진 일이죠. 그러나 그 여파는 어마어마합니다. 자연을 상품처럼 대하며 오용하고 남용한 결과입니다.

유엔재난위험경감사무국(UNISDR) 집계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17년까지 20년 동안 기후 재해와 관련한 경제적 손실이 전 지구적으로 2,545조 8,000억 원에 달합니다. 20년 동안 매년 127조 원의 손실을 본 것입니다. 2018년 한국의 국가 예산이 429조 원인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액수죠. UNISDR 보고서에 의하면, 홍수로 인해 20억 명이 직간접적 손해를 입었습니다. 가뭄은 15억 명, 폭풍우는 7억 2,600만 명, 지진은 1억 2,500만 명, 폭염과 한파는 9,700만 명의 인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후 재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한국 역시 2018년 사상 초유의 폭염을 경험했지요.

지구가 이처럼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고, 사람들이 그 가공할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아직 인류는 이렇다 할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기후 변화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6월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선언했지요. 산업화를 뒤늦게 시작한 개발도상국에서는 주요국에 책임을 묻습니다. 한편에서는 인간 때문에 지구 온난화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하는 형국입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후 변화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지구가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환경 단체의 분투로 개선될 단계는 이미 지났습니다. 기후 변화의 원인과 영향, 국제 사회의 대응 등을 자세히 다룬 이 책을 통해 공동의 인식과 행동 변화가 뒤따르기를 바랍니다.

▶?책 속에서

과거의 자연적인 기후 변화는 대부분 점진적이었습니다. 급격한 변화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요. 물론 자연적인 기후 변화는 여전히 일어나요. 하지만 자연적인 기후 변화는 온난화라는 새로운 현상과 상호 작용합니다. 온난화는 갑작스럽고 극단적인 변화예요. 인류의 생활 방식과 관련이 깊어요.
- 15쪽,?기후 변화를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기후 변화 이론에 반대하는 몇몇 과학자와 정치인, 언론인은 데이터가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제기하는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후 변화는 이미 수백만 년 동안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는가?” “다른 합리적인 설명이 있는데 왜 싸잡아 인간 탓을 하는가?” “이 모두가 장기적인 자연적 주기의 일부분이지 않을까?” “다음 빙하기로 가는 도중에 발생하는 일시적인 현상 아닐까?”
- 28쪽,?뜨거워지는 지구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2005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를 황폐화했습니다. 1,245명이 사망했고 1,080억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즉각 이 재난을 놓고 기후 변화를 탓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과학자들 중 누구도 카트리나와 기후 변화의 연관성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 47쪽,?기후의 변화

슈퍼컴퓨터가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긴 하지만, 기후 모델링은 결국 미래를 추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상 현상을 일일이 정확하게 내다보진 못하기 때문에 기후 모델링은 일기 예보와는 다릅니다. 실제 기상 결과에 따라 기후 모델을 업데이트하며 예측의 정확성을 차츰 높여 갑니다.
- 52쪽,?지구의 미래

하지만 동시에 기후 변화가 거짓이라는 반론도 대두했습니다. 힘 있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은 기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활동에 의한 기후 변화를 믿지 않는 이들을 기후 변화 부인론자라고 일컬어요. 이들은 기후 변화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화이기에 호들갑을 떨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가령 빙하기와 간빙기의 주기적인 변화 때, 기온이 상승한 후에야 온실가스 농도가 상승하던 사례를 언급합니다.
- 69쪽,?목표와 조치

결국 지구 온난화는 우리 삶의 방식과 관련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동안 점점 더 많은 상품과 엔터테인먼트, 더 빠른 수송과 여행,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원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 세계와의 ‘접촉’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고향이 아닌 상품으로 대했습니다.
- 90~91쪽,?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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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여행인문학19-(크로아티아 코르출라섬에서 태양을 보다

도서정보 : 류호선 | 2020-01-08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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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보물섬, 코르출라“

옛 유고슬라비아 독립국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는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아드리아해에 길게 접해 있어 많은 섬을 가지고 있지요. 코르출라섬은 그중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입니다. 발을 담그면 물이 들어버릴 것만 같은 짙푸른 바다가 육지와 만나는 곳에 붉은 지붕과 하얀 벽돌로 지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코르출라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무척 유명한 섬이에요. 2018년부터 대한민국의 인천공항에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가는 직항 노선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이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해안을 즐기기 위해 코르출라섬을 찾고 있습니다.

《코르출라섬에서 태양을 보다》는 코르출라섬에 사는 마르코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축구로 유명한 크로아티아답게 마르코의 하루도 동네 친구와 함께 공을 차면서 시작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와 축구를 하느라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진 아드리아해로 풍덩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지요. 코르출라섬에는 여느 지중해의 섬들처럼 올리브와 포도가 많이 재배되고 있어요. 마르코네 가족도 포도 농사를 지어 직접 와인까지 담그지요. 하지만 코르출라섬에는 다른 섬들에는 없는 특별한 상징이 있어요. 바로 《동방견문록》을 지은 마르코 폴로가 태어난 섬이라는 사실이지요. 마르코도 언젠가는 마르코 폴로처럼 위대한 탐험가가 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겠다는 꿈을 갖고 있답니다. 섬 안에 있는 모든 도로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코르출라섬만이 가진 독특한 특징이에요. 하지만 ‘생각하는 거리’라 불리는 곳은 유일하게 계단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 마르코는 큰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꿈에 흠뻑 젖어 거리를 거닐고 싶을 때면, ‘생각하는 거리’를 찾아가 두 눈을 감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산책을 하곤 한답니다.

《코르출라섬에서 태양을 보다》는 이처럼 실제로 크로아티아의 코르출라섬에 사는 우리 또래 어린이의 시선에서 쓰였어요. 생선과 토마토소스를 넣고 끓인 ‘브루데트’나 양젖으로 만든 치즈인 ‘파슈키 시르’같은 요리처럼 마르코가 소개해주는 크로아티아의 음식 이야기를 듣다 보면 코르출라섬의 생활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져요. 특히 마르코의 꿈은 우리 주변의 또래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여러분 주변에는 커다란 배를 모는 선장이 되어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가 꿈인 친구가 있나요? 마르코는 어떻게 그처럼 멋진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을까요? 마르코가 이야기해주는 흥미진진한 코르출라섬으로 우리 함께 떠나 보아요!

《코르출라섬에서 태양을 보다》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이 한 권의 책으로도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크로아티아어와 한글을 함께 썼어요. 이 책을 번역해주신 아이다 주조 님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기 전 옛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같은 국경 안에 있었던 보스니아에서 태어나 자라셨다고 해요. 감수를 맡아주신 네라 유드리즈님은 보스니아에서 태어나셨지만 어렸을 때 크로아티아로 건너가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고 하고요.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의 가슴 아픈 역사가 이 책을 통해 보듬어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니까요.

구매가격 : 10,400 원

돼지학교 과학14 땅속을 뚫고 들어간 돼지(지층과 화석)

도서정보 : 백명식 | 2014-06-12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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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돌을 찾아 땅속을 뚫고 들어가다!

돼지학교의 주인공 데이지, 꾸리, 도니는이번 방글이 선생님 생일에 화석을 선물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화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궁금해하는 삼총사를 위해 피그 박사님은 먼저 화석이 생겨나는 땅속으로 삼총사를 데려갔어요. 박사님은 돼지 삼총사에게 화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층이라 불리는땅속은 어떤 모양인지, 지층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려 주셨지요. 지층을구석구석 살피고 나서, 삼총사는 땅 위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화석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화석 찾기가 삼총사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은거예요. 지층과 화석에 대해 속속들이 배운 ‘땅속 박사’ 돼지 삼총사는 과연 선생님께 선물할 화석을찾을 수 있을까요? 돼지 삼총사와 함께 우리도 화석을 한번 찾아봐요!

전문가의 꼼꼼한 감수로 지층과 화석에 관한 알찬 정보가 가득!

다채로운 그림을 통해 우리가 밟고 있는 땅 밑에 지층과 화석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정확하게 알려 줍니다. 지층의 생성 과정, 다양한 암석과 지층별 모양, 지층의 생성 순서, 화석이 땅속에서 만들어지는 과정, 화석의 분류, 시대별로 살던 생물 종류에 이르기까지 개념을 반복적으로설명하여, 한 번 읽더라도 여러 번 읽은 것처럼 상기할 수 있도록 내용을 담아냈습니다. 또한, 다양한 학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 한국 교원대 지구과학교육과교수님이 꼼꼼히 감수해 정확한 정보만을 실었습니다.

구매가격 : 9,600 원

채소동물원

도서정보 : 마르탱 파주 | 2014-09-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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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상상력으로 새롭게 탄생한 채소의 역사『채소 동물원』. ‘모든 것을 뒤엎는 상상의 힘’으로, 신선하고, 기상천외하면서 따뜻한 이야기를 써 온 마르탱 파주가 이번에는 ‘생명’에 대한 뻔한 통념을 뒤엎어 봅니다. 생명은 소중하니 잘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식의 모범 답안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생명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를 짚어 줍니다.

구매가격 : 9,600 원

돼지학교 과학 16 열 받은 돼지(핵과 에너지)

도서정보 : 백명식 글·그림 | 2014-09-24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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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에너지와 활용 방법을 알아보자!
에너지의 역사부터 에너지의 종류, 에너지의 활용 방법까지
알쏭달쏭 에너지에 대한 모든 것!

에너지는 무엇일까요?
에너지는 사람이나 물체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해요. 지하철이 달리고,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것 그리고 우리 몸이 움직이는 것도 모두 에너지 덕분이에요. 인류는 불 에너지 발견을 시작으로 다양한 에너지를 찾아 개발해 왔어요. 물, 바람 같은 자연의 힘은 물론,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화석 에너지도 개발했지요. 그리고 이 에너지들을 이용해서 전기 에너지도 만들 수 있어요. 돼지 삼총사, 피그 박사님과 함께 에너지 탐험을 떠나 볼까요?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고요?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는 화석 에너지에요. 하지만 화석 에너지는 지구 온난화를 심화시키는 공해가 많이 발생하고, 지구에 매장되어 있는 양이 한정적이에요.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지 않으면 미래에는 에너지 부족에 시달릴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에너지를 개발해야 할까요? 돼지 삼총사와 함께 알아보아요.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면 아주 큰일이 난다고요?
원자력 에너지는 적은 양으로도 아주 큰 힘을 낼 수 있는 에너지에요. 우라늄 1그램이면 석탄 3톤이 만드는 양의 전기를 만들 수 있지요. 하지만 원자력 에너지는 전쟁에 쓰이는 핵무기를 만드는 재료이기도 해요. 돼지 삼총사와 함께 도움을 주지만 위험한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조사해 봐요.

전문가의 꼼꼼한 감수로 에너지에 관한
정확하고 유익한 정보가 가득!

다양한 에너지원과 에너지의 종류, 에너지의 역사, 에너지 변환, 미래 에너지와 청정에너지, 그리고 원자력 에너지까지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알려줍니다. 이해를 돕는 자세한 그림과 한 단계 높은 심화 과정까지 모두 담았습니다. 더불어 다양한 어린이 과학 도서를 저술하고 감수해 온 수원대학교 물리학과 곽영직 교수님의 세심한 감수로 정확한 정보만을 선별하였습니다.

구매가격 : 9,6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