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 글항아리 | 2018년 08월 22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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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삶의 가장자리엔 절벽이 있다. 그건 놀랍지 않다. 놀라운 건 "나이 드는 걸"을 좋아하는 감정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그동안의 경험이 폭넓고도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 바닥을 차고 뛰어오르게 한다. 세상은 다시 열리고, 마음은 젊어진다. 타자의 마음에 자유자재로 침투하면서 몸은 강물처럼 유연해진다. 이것이 노년이고 노년의 열정이다.

파머는 이 책에서 이런 놀라운 풍경을 보여준다. 저자는 노화라는 중력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나이듦에 협력"할 때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한 경험을 들려준다. 노인들만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다. 젊음에게 노년은 낯선 것이고, 낯선 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스물네 편의 에세이와 여러 편의 시로 이루어진 이 책은 나이듦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다. 대신 저자의 경험을 비추는 프리즘을 일곱 번 바꿔가면서 독자들도 그런 작업을 해보도록 북돋운다. 여기에 삶을 붙잡고 놓아주는 그 속에 자신을 풀어놓는 얼마나 놀라운 힘이 스며 있는지, 느끼고 생각하는 건 우리 몫이다. 쇠퇴와 무기력이 아닌 발견과 참여를 통해 프레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경험에 열린 눈을 뜨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장 긴요한 덕목이 될 것이다.

저자소개

지은이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
미국 고등교육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왕성한 저술과 다양한 강연으로 미국 각계각층의 뜨거운 지지를 얻으며 시민들의 멘토로 추앙받는 사회운동가. 작가이자 교사, 활동가로서 그의 가르침은 교육, 의료, 종교, 법률, 자선 사업, 정치, 사회 변혁 등에서 커다란 영감을 주고 있다. UC 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워싱턴 DC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조직가로 활동했으며 성인 학습자와 구도자를 위한 "퀘이커 삶-배움 공동체"에서 10년간 일했다. 저서로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역설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등이 있으며 "용기와 회복 센터"의 창립자다.
www.couragerenewal.org

옮긴이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글쓰기와 강연을 해왔다. 지은 책으로 『모멸감』 『눌변』 『문화의 발견』 『돈의 인문학』 『사회를 보는 논리』 등이, 옮긴 책으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등이 있다. 파커 파머의 책과 그의 "용기와 회복 센터"로부터 영감을 받아 국내에 "마음의 씨앗"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마음비추기 피정"을 10년 동안 진행해왔다.

정하린
한국NVC센터 소속 활동가. 평화와 인권에 관심을 갖고 상담, 비폭력 대화, 젠더 화해 운동에 대한 공부와 강의를 하고 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덕성여대 특수대학원에서 임상 및 상담심리를 전공으로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목차소개

추천의 글 | 김훈
전주곡

1장 가장자리의 시선: 여기서 내가 볼 수 있는 것
2장 젊은이와 노인: 세대의 춤
3장 리얼해진다는 것: 환상에서 착각으로
4장 일과 소명: 삶을 기록하기
5장 바깥으로 손을 뻗기: 세상에 관여하기
6장 안쪽으로 손을 뻗기: 당신의 영혼에 관여하며 머물기
7장 가장자리를 넘어: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후주곡

출판사 서평

맑은 시선과 유머로 가득 찬 노년 탐구
스스로를 면밀히 돌아보지 않는 삶은 타인에게 위협이 된다
우리는 우리 삶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먼 생애 동안 마구잡이로 헤쳐온 오르막 내리막의 길
그 길들의 가장자리에 선 한 노인이 써내려간 에세이


올해 일흔이 된 소설가 김훈은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무겁고 무섭지만, 게으른 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혐의가 짙다고 말한다. 의미가 무거울 때 우린 이런 불평을 해봐도 좋겠다. “노년이라고 다 강태공이 되는 건 아니다. 우럭과 감성돔에 환호하는 노년의 평범한 낚시꾼이 더 많다. 그게 인간의 삶이다.”
김훈보다 딱 열 살이 많은 미국의 구루 파커 파머 역시 ‘나이듦’의 무거움을 말하지 않는다. 사회 활동가이자 영성 교육자로서 왕성한 에너지를 발산해온 파머는 생의 후반부에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안으로만 숨고 파고들다가 그는 자기 안에서 안으로 통하는 문을 하나 더 열어버렸다. 그렇게 발견한 노년, 그는 현재 노년의 리듬에 따라 물감처럼 스미는 글을 쓴다. 아름다운 글을.
삶의 가장자리엔 절벽이 있다. 그건 놀랍지 않다. 놀라운 건 ‘나이 드는 걸’을 좋아하는 감정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그동안의 경험이 폭넓고도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 바닥을 차고 뛰어오르게 한다. 세상은 다시 열리고, 마음은 젊어진다. 타자의 마음에 자유자재로 침투하면서 몸은 강물처럼 유연해진다. 이것이 노년이고 노년의 열정이다.
파머는 이 책에서 이런 놀라운 풍경을 보여준다. 저자는 노화라는 중력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나이듦에 협력’할 때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한 경험을 들려준다. 노인들만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다. 젊음에게 노년은 낯선 것이고, 낯선 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스물네 편의 에세이와 여러 편의 시로 이루어진 이 책은 나이듦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다. 대신 저자의 경험을 비추는 프리즘을 일곱 번 바꿔가면서 독자들도 그런 작업을 해보도록 북돋운다. 여기에 삶을 붙잡고 놓아주는 그 속에 자신을 풀어놓는 얼마나 놀라운 힘이 스며 있는지, 느끼고 생각하는 건 우리 몫이다. 쇠퇴와 무기력이 아닌 발견과 참여를 통해 프레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경험에 열린 눈을 뜨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장 긴요한 덕목이 될 것이다.

노년, 부서지는 존재를 끌어안는

노년에 깊이 다가갈수록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질문은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이다. 자기 삶에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면 타인의 위로와 포용도 별 의미가 없다고, 반드시 스스로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파머는 생각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질문이 그릇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질문은 고통스런 세상이 펼쳐질 때 아무리 곱씹어도 답을 낼 수 없고, 스스로에게 ‘좋아요’를 누르든 ‘싫어요’를 누르든 거기엔 우쭐대는 자아가 만들어낸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나는 태양계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 만물 가운데 하나인 나는 삶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태양 아래 서서 자신과 타인들이 성숙해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배반과 충성심, 실패와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통찰이며, 의심이고 확신이다. 또한 나의 두려움이고 희망이다.”
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생애 동안 마구잡이로 헤쳐온 오르막 내리막 길에서 삶은 여전히 최고 속도로 거칠게 펼쳐지고 있다. 붙잡고 싶은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은 공포를 자아낸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것이 둘러싸고 있고, 늙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뜻이므로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싶다는 욕망도 자아낸다. 이제 나이든 저자는 너그러움을 품고 그 안으로 시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노인임을 무릅쓰고 발언하는 이유

내가 태양이 아니라면, 노인인 나는 찬란한 젊은이들을 가로막으면서 그림자를 드리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파머는 인종, 계급, 성차별이 여전한 미국 사회에서 중산층의 백인 남자로서 생계 걱정이 없었다. 이런 행운아는 기성세대이자 기득권이므로 목소리를 내지 말고 가만있어야 하는가. 파머는 노년에 안전하게 제 목소리를 감추는 것은 ‘책임 회피’라고 말한다. 노년은 쭈그리고 앉아 보낼 시기가 아니다. ‘분노’와 ‘항의’는 그때에도 지속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다.
열 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에세이를 써온 저자는 자신이 쓴 문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됐어”라는 한 단어라고 말한다. 나이 들면서 이 말은 쉽게 나왔다. 생명을 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주저 없이 “됐거든”이라 말하고, 광란, 과로, 개인적 편견, 건강하지 않은 관계, 사회적 잔인함이나 부정의, 종교나 정치에서의 무모한 권력 행사, 인종주의, 성차별, 외국인 혐오에 대해 ‘됐다’고 말한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사회를 향해 그는 분노한다. 카페의 옆 테이블을 보자. 여기 있는 여성들은 사랑스러운 엄마로서, 친구로서, 파트너로서, 이웃으로서 놀라운 일을 하고 있다. 파머는 “이런 여성들이 스스로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신들 눈에는 젊은이들이 현명하지 않은 것 같은가? 그건 당신의 마음이 ‘고물’이 됐기 때문이다. 파커는 노년에 정말로 버리고 싶은 것은 오래된 확신 같은 거라고 말한다. “우리가 했던 실수를 젊은이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노인들에게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수를 할 테지만, 우리와 같은 실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고, 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온 세계가 아니며, 그들은 우리의 젊었을 적보다 더 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 삶은 타인에게 위협이 된다

누구나 자기 삶을 ‘쓰고’ 있다. 탄탄한 서사를 구축하면 삶은 그제야 의미의 그물망으로 들어오고 더 단단하고 응집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자기 삶에 대한 작가적 구성력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쓸 것인가.
중요한 덕목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말했다. 파머는 이 문장을 수정한다. “나의 지옥은 대학 학위와 재정적 안정성을 가진 50세 이상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즉 나 같은 사람들)만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는 다양성이 삶의 즐거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하게 잘 사는 삶의 기본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종, 민족성, 종교, 성적 지향 등에서 ‘타자성’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생renewal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파머는 말한다. 그들의 두려움 때문에, 생기 넘쳤던 미국은 뒷걸음질하면서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바깥세계에 있는 생경한 모든 것은 반갑게 맞아들여야 한다.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이방인 담론의 출발점은 바로 타자의 낯섦을 끌어안고 자기방어를 해제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때론 불쾌하고 기이하며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더라도.
사실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과제다. 타자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닌 이는 ‘환대’의 결과가 아름다울 거라 상상하지만, 어쩌면 당신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버리고 가구를 몽땅 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곤란한 상황, 감정들은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전체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 중 하나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타인을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을 면밀히 돌아보지 않는 삶은 타인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저자는 백인의 특권과 거기서 비롯된 불의 및 비인간성에 자기도 모르게 공모했던 것, 백인우월주의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그 독성에 오염돼왔던 것을 고백한다. 그것은 자기 우월감이었고, 올바른 렌즈로 세상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다.
따라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우리는 삶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에 대한 능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우울증의 늪

그늘 없는 영혼에는 삶이 비밀을 감추는 걸까. 삶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파커는 세 차례나 겪었다. 수개월 동안 차양을 내린 채 어두운 방에 머물자, 친구는 그에게 외출을 좀 자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그때 파머가 한 대답은 우울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럴 수 없어. 세상이 칼로 가득 찬 느낌이야.”
40년 동안 그는 ‘더 위로 더 멀리’ 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가 추구한 것은 네 가지인데,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가치다. 하지만 이를 뒤쫓다보면 인간 능력의 오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네 가지는 이렇다. 첫째, 지성(생각하기)의 능력에 가치를 두었다―즉 가슴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둘째, 자아의 힘을 과신했다―신경증적 두려움을 위장하면서. 셋째, 지상을 넘어선 비상하는 영성을 추구했다―그러나 그것들은 일상의 자잘한 요소들과 연결되지 못했다. 넷째, 도달할 수 없는 윤리를 추구했다―그러나 그것들은 타인들의 이미지로 형성되는 윤리였을 뿐이다. 이 네 가지 당위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자 파머는 죄의식을 갖게 됐고, 스스로를 나약하고 미덥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됐다.
이때 우울증이라는 친구가 나타나 파머의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끌려 하면서 계속 쫓아왔다. 그 목소리가 두려워 파머는 애써 무시한 채 계속 걸었다. 그러자 친구는 더 가까이 다가와 그의 이름을 큰 목소리를 불렀고,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그 친구는 돌을 던지며 막대기로 파머를 치기 시작했다. 막대기와 돌로도 안 되자 그 친구는 우울증이라는 바위를 파머에게 떨어뜨렸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친구가 바위로 친 것은 그를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돌려세우기 위함이었다.
“저는 높은 성취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왜냐하면, 음, 낮은 곳보다 높은 곳이 더 좋으니까요.” 그런가? 틀렸다. 이제야 지상으로 내려온 파머는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누구든 넘어질 때가 있다. 높은 데서 넘어지면 멀리 떨어질 것이고, 그런 추락은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 반면 땅에서의 삶은 (우리 본성과 더불어, 세상과 진짜 맺고 있는 땅에 발 딛고 있는 삶은) 우리가 발을 헛딛거나 넘어져도 큰 상처 없이 스스로 일어나 툭툭 털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도록 해준다.

내면과 외면에 관여하면서 살아가기

마음이 부서지는 것(비통함)은 인간적이라 불리는 영역과 함께 나타난다. 사랑과 신뢰가 우리를 저버릴 때, 한때 의미를 지녔던 것이 메말라버릴 때,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꿈이 표류할 때, 치명적인 병을 앓게 될 때, 소중한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비통함에 빠지고 괴로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끌어안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바뀔 수 있을까. 고통은 우리 마음을 부서지게 하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부서질 수 있다. 우선 마음이 메마르면 조각조각 파편나기 쉬운데, 그 폭발력은 고통의 당사자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그리고 고통의 표면적인 원천을 향해 수류탄처럼 던져지면서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반면 마음이 유연하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데, 이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위한 더 큰 능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음이다. 오직 유연한 마음만이 새로운 생명으로 열리는 방식으로 고통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마음을 더 유연하게 할 수 있을까? 파머는 육상 선수가 부상을 입지 않기 위해 다리 근육을 스트레칭하듯이, 마음의 스트레칭 훈련을 권한다. 규칙적인 훈련을 하면 마음이 파편들로 부서질 가능성이 줄어들고, 부서짐으로써 더 넓게 열릴 가능성이 높다. 노년에 들어선 자들에게는 갖은 상실이 늘어나면서 마음 스트레칭의 기회도 함께 늘어난다. 파머는 이렇게 요약한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마취제 없이 인생의 작은 죽음들을 받아들일 때마다 파머의 마음은 스트레칭이 되었다. 틀어진 우정, 그의 글에 대한 비열한 비평, 중요한 과제의 실패 같은 것 말이다. 이때 더 큰 의미로 찾아오는 것은 인생의 작은 즐거움들이다. 낯선 사람의 작은 친절, 유년기의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두 살배기 아이의 깔깔 웃음소리…….
그렇지만 개인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 삶을 가장 큰 규모에서 직간접적으로 규제하는 국가도 과연 유연해질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그는 냉소주의에 굴복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 세계에 가능성과 희망을 품고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개인적, 정치적 삶 속에서 고통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고통을 이용할 것인가. 이는 우리에게 고통이 일어날 때 그것이 새로운 삶을 열어젖히도록 개인적, 집단적으로 마음을 운동시킬 의지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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