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자본』 시리즈-08) 자본의 꿈 기계의 꿈

고병권 | 천년의상상 | 2020년 01월 1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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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기계란 무엇이고,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란 무엇인가
― 『자본』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책, 제13장 ‘기계제 대공업’ 깊이 읽기

철학자 고병권과 함께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더 꼼꼼히 더 재미있게 공부해보자는 뜻을 가지고 어느새 2년 가까이 이어온 「북클럽『자본』」 시리즈가 그 여덟 번째 책 『자본의 꿈 기계의 꿈』을 펴냈다. 철학자 고병권은 이 시리즈의 각 권에서 마르크스의 『자본』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보석을 발굴하고 있는데, 신간 8권은 『자본』에서도 가장 분량이 길고 주제 또한 방대해 흡사 ‘책 속의 책’같이 느껴지는 『자본』 제4편 제13장 ‘기계제 대공업’에 대한 심도 높은 분석과 감성적 통찰을 담아냈다.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번 책 『자본의 꿈 기계의 꿈』은 ‘기계’를 다룬다. 그중에서도 기계가 자본주의와 만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계와 만난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야기한다. 저자 고병권은 『자본』 제13장이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에 관한” 마르크스의 “경제학·사회학·역사학·정치학이 모두 망라된 느낌”이라면서 이 장에 실린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선, ‘기계’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도구’와 ‘기계’를 구분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했다. 기계의 독특함을 보여줌으로써 시리즈의 지난 책(7권)에서 살펴본 ‘매뉴팩처’와 이번 책에서 살펴볼 ‘기계제 대공업’의 차이를 알게 해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매뉴팩처는 작업방식의 변화, 즉 노동력을 어떻게 조직하는가가 중요한 생산형태였다. 반면 ‘기계제 대공업’은 노동수단에서 일어난 혁신의 결과로 나타난 생산형태다. 저자 고병권은, 마르크스에게는 ‘기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곧 ‘기계는 도구와 어떻게 다른가’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기계에 대해 물음을 던진 것은 기계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답변을 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형태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말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 제13장에는 눈여겨봐야 할 표현이 등장한다.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라는 문구다. 이 말은 어떤 숨은 의미를 담고 있는가. 고병권의 통찰에 따르면, 이는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기계’ 또한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즉 마르크스는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을 문제 삼는 동시에 ‘비자본주의적 사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자본주의 아래에서 기계가 생산수단으로서 자본가의 사적 소유물이며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을 빨아들이는 착취 장치로 기능한다 해도, 그것이 곧 기계의 본성이나 운명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책에서 저자 고병권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저자소개

저 : 고병권
서울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회사상과 사회운동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했고 지금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이다. 그동안 『화폐, 마법의 사중주』,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생각한다는 것』,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1991년에 처음 우리말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 시절 한국은 민주주의 열망이 불붙던 시기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 달라지지 않은 것’을 사유하고자 다시 『자본』을 읽어야 하는 시대라 믿는다.

목차소개

저자의 말―기계는 무슨 꿈을 꾸는가

1 기계괴물의 출현

- 기계가 ‘자본주의’와 만나면 - 기계와 도구의 구별이 중요한 이유 - ‘도구’가 발전해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 산업혁명은 ‘동력기계’가 일으킨 혁명이 아니다 - 마침내, 기계괴물이 등장

2 기계가 도입되고 나서 벌어진 일들

- 기계의 가치와 생산물의 가치 - 기계 도입의 문턱
- 노동자는 ‘인간재료’? -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①― 노동인구의 확대 -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②― 노동일의 연장 -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③
― 노동강도의 강화 - 다이달로스의 몽상과 우울

3 기계노동자와 절망 공장

- 기계노동자, 의식을 가진 ‘부분기계’ - 껍데기 노동과 값싼 죽음 - 절망 공장의 노동자 - 두 사람의 관찰자―유어의 눈과 엥겔스의 눈 - 증기왕을 처단하라

4 노동자와 기계의 전쟁

- 대규모 기계파괴 운동 - 기계는 자본가의 무기
- 쫓겨난 노동자에 대한 보상 이론 - 기계제는 ‘하인’ 노동자를 늘린다 - 과연 기계는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할까? - 식민지를 찾아서 - 번영은 드물고 공황은 빈번하다

5 ‘보이지 않는 실’―기계제 시대의 착취

- 몰락하거나 거듭나거나 - 값싼 착취재료―헛되이 고통받고 단축되는 생명들 - 시다의 꿈 - 공장법의 규제가 필요한 이유 - 부르주아 심문관과 ‘자본의 정신’ - ‘보이지 않는 손’과 ‘강철로 된 손’ - 자연에 대한 닦달―기계제 생산과 생산력주의의 지배

6 미래에서 온 공병―기계의 미래와 노동자의 미래

- 공장법의 일반화와 마르크스의 방법 - 공장노동과 교육의 미래 - 가부장제 해체와 가족의 미래 - 자본의 꿈이 기계의 꿈은 아니다 - 잘 파냈다, 노련한 두더지여!

부록노트
I―마르크스와 다윈
II―캘리포니아 농업의 기계화와 멕시코인화
III―역사적 복수의 규칙

출판사 서평

기계는 인간의 노고를 줄여주는가
― 인간재료가 된 노동자, 기계 도입 이후 벌어진 일들

19세기 공장에서 기계제가 매뉴팩처를 대체했다는 것은 ‘기계’가 이전의 ‘작업하는 인간’을 대체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기계의 출현은 그 기계가 인간의 도구, 즉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한 메커니즘의 도구 혹은 기계적 도구로서 나타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인간의 도구’였을 때는 인간의 뜻대로 인간의 신체 리듬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러나 ‘기계의 도구’가 되는 순간 그것들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움직이는 방식과 속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계의 일부가 되는 순간 과거에 인간이 쓰던 도구들은 인간적 한계를 금세 벗어난다. 그리하여 ‘작업기계’가 ‘작업인간’을 대체하고, 마누스(manus) 즉 ‘인간의 손으로’ 하는 작업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공장에 기계제 생산이 본격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러 기계를 한자리에 모아두고 작업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분공정을 수행하는 부분기계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기계‘시스템’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계제는 생산공정에서 노동자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리학과 화학 등의 법칙을 이용하지만 이 기술적 법칙은 인간과는 무관하다. 생산력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 동력을 계산하고 마찰을 계산하고 속도를 계산하지만, 이때 고려되는 것은 기계적 한계이지 인간적 한계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기계적 한계를 고려할 뿐 인간적 한계는 실상 고려하지 않는 기계제 대공업을 지배적 생산형태로 삼으면서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기계 도입은 사회 전반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 마르크스는 세 가지 현상을 지적한다.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노동인구의 확대’이다. 언뜻 생각하면 기계제의 발달은 노동인구를 감소시킬 것 같지만 실제로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수를 오히려 늘렸다는 것이다. “기계가 근육의 힘을 불필요하게” 만든 탓에 여성과 아동이 새로운 노동인구로 유입되었고, 급기야 가족구성원 전체가 노동력으로 자본주의에 제공되었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더 많이 얻게 된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계 도입은 ‘노동일 연장’을 초래했다. 마르크스는 기계 도입과 함께 노동일도 늘어났다고 말한다. 기계가 도입되면 노동생산력이 크게 증대해 노동일이 줄어들어도 될 것 같지만 자본주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는 “모든 자연적 한계를 초월해 노동일을 연장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된다. 오히려 자본가에게 노동일을 연장할 만한 동기와 수단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기계는 노동일을 연장해도 거기에 대해 따지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인간처럼 생물학적 한계도 갖고 있지 않아 영구기관같이 멈추지 않고 작동한다. 일단 작업이 시작되면 기계시스템의 작동은 ‘노동자’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이다. 이제는 기계가 장인이고 인간은 조수가 되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지위가 부차화되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 전처럼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고 저항의 효과도 크지 않게 된다. 노동일은 결국 기계에 의해 더욱더 연장된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1833년 영국의 표준노동일 제정으로 노동일 연장은 불가능해졌다. 기계 도입에 맞춰 노동일 연장의 필요성은 이전보다도 커졌는데 노동일이 법적 규제를 받게 되니, 자본으로서는 ‘노동강도 강화’를 통해 노동일 단축을 만회하려는 욕구와 필요가 생길 것이다. 이에 따라 기계제 생산에서는 기계의 속도를 높이는 방식과 노동자들을 기계에 맞추어 훈련하는 방식으로 노동강도를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기계의 도입과 함께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인구의 확장’, ‘노동일의 연장’, ‘노동강도의 강화’가 나타났다. 한마디로, ‘노동’은 이전의 매뉴팩처보다 훨씬 늘어났다(당연히 자본가의 ‘이윤’도 늘었다). 이것이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다. 기계는 인간의 노고를 줄여주는가. 물론 기계가 인간의 노고를 줄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본가는 이윤을 늘리기 위해 기계를 공장으로 들여온 것이며, 이런 목적에서 사용하면 기계는 인간노동을 더 많이 뽑아내는 수단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때 노동자는 가치생산의 주체라기보다 가치착취의 대상, 가치착취의 재료처럼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자본』 제13장에서 마르크스는 기계 도입으로 인한 노동인구의 확장을 아예 ‘인간이라는 착취재료의 확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고 재료라는 거죠. - 「2장 기계가 도입되고 나서 벌어진 일들」

기계노동자와 절망 공장
― 기계제 시대 ‘노동자 착취’의 실태를 보고하다

저자 고병권은 본문에서 자본주의가 기계를 도입하는 목적을 자주 환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이윤’이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기계’를 도입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이윤’에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상품을 생산하는 목적이 사람들의 편리를 위함이 아니듯 자본주의가 기계를 도입하는 목적 역시 노동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함이 아니라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함이고, 그러므로 이윤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노동을 크게 절약해주는 획기적인 기계라 해도 자본주의는 그 기계를 생산에 투입하지 않는다. 차라리 인간노동을 계속해서 ‘탕진’하는 편을 택한다. 결국 기계의 도입은 노동의 과정을 변형시키고 노동자의 신체를 뒤틀리게 한다. 결국 기계제하의 공장은 이전의 매뉴팩처 작업장보다 노동자를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자본』 제13장에서 마르크스는, 이전에 『자본』 제8장에서 ‘노동일’의 문제에 관해 고발했을 때처럼 기계제하의 노동자들이 놓인 ‘처참한 상황’을 보고한다. 저자 고병권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노동자의 존재양태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단어를 계속 바꾸어 쓰고 있는데, 이번 장에서 새로 쓴 단어는 ‘기계노동자’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기계시스템의 편제에서 한 부분으로 전락한 노동자, 즉 ‘의식을 가진 부분기계’가 된 노동자를 가리키기 위해 쓴 이 단어에 주목한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계를 다룰 때조차 ‘기계의 부분으로(즉 부분기계로) 존재하는 노동자’라는 의미다.

기계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은 인간 노동자의 숙련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어떤 의미에서 기계제 공장의 노동자들은 모두가 기계의 조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전에는 하나의 부분도구를 다루는 일이 평생 동안의 전문 분야였지만, 오늘날에는 하나의 부분기계에 봉사하는 것이 평생의 전문 분야가 된다.”고병권은 마르크스가 세심하게 단어를 골라 썼다는 걸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면서, 매뉴팩처에서는 노동자가 도구를 “다룬다”(fuhren)라고 쓴 반면,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기계에 “봉사한다”(dienen)라고 썼다고 말한다. 즉 매뉴팩처에서는 노동자가 도구의 ‘지배자’였으나 공장에서는 기계시스템의 ‘하인’임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장을 병영과 감옥에 비유한다. 공장은 자본가의 전제정치가 펼쳐지는 공간으로서 노동자들이 노동과정과 관련해 조금만 의사결정에 관여하려 하면 ‘경영권 침해’라고 펄펄 뛴다. 또한 공장은 흡사 감옥처럼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생명의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박탈했다. 또한 기계제 도입 이후에는 대공장만이 아니라 기존의 가내공업 작업장의 노동자가 당하는 착취 역시 훨씬 강하고 파렴치해진다. 여기에 이른바 “약탈적 기생충들”, 즉 대공장과 영세한 가내공업을 매개하며 중간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가로채는 이들까지 개입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노동자들의 건강에 꼭 필요한 시설도 비용을 아낀다는 이유로 구비해놓지 않고, 그래서 채광과 환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상자처럼 좁은 공간에서 노동을 시키기도 한다.

자본가는 노동환경 개선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비용으로 계산한다. 시간, 공간, 햇빛, 공기 등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장시스템이야말로 생산수단 절약의 “온상 같다”라고 표현했으며, 생산수단의 절약이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면 “노동자의 생명조건인 공간과 공기, 햇빛, 생명에 대한 체계적 약탈, 그리고 생명이나 건강을 위협하는 생산환경에서 노동자를 지킬 수 있는 보호수단에 대한 체계적 약탈로 나타난다”라고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공장법을 통한 사회적 규제가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된다.

공장법에는 보건 조항들이 있습니다. 청결과 환기, 안전에 필요한 소소한 규정들이지요. 그러나 자본가들은 비용이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노동자들의 팔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극히 사소한 조치들에도 “아주 미친 듯이” 반대합니다. 작은 안전장구들만 갖추어도 인명 손실을 막을 수 있는데 법적 규제가 없으면 이런 걸 갖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것까지 법에 규정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일할 때 적절한 크기의 공간이 필요하고 환기가 되어야 하고 위험한 장치에 다가갈 때는 보호장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진 않으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당연한 조치들이거든요. 그런데 자본가에게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 본문 174~175쪽, 「5장 ‘보이지 않는 실’-기계제 시대의 착취」

기계가 꾸는 꿈, 프롤레타리아와 기계의 연대
― 노동자와 기계의 ‘전쟁’을 넘어, 기계와 노동자가 함께 만드는 ‘미래’를 꿈꾸다

기계제 시대가 펼쳐지면서 기계에 밀려난 다수의 노동자들에 의해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이른바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무려 1만 명 넘는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하니, 봉기의 규모와 강도가 얼마나 상당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결국 매우 폭력적인 진압이 이루어졌고 주모자들은 처형되었다. 이토록 격렬한 투쟁이 일어난 까닭은 무엇인가.

기계제 생산에서는 생산성의 증대가 ‘고용 노동자 수의 감소’로 나타난다. 증기직기가 도입되자 수많은 노동자가 길거리로 나앉았다(실제로 증기직기는 러다이트 운동의 가장 격렬한 공격 대상이었다). 마치 일자리를 놓고 기계와 노동자가 경쟁하는 꼴이 되었다. 한갓 노동수단이었던 어떤 것이 ‘기계’의 형태를 취하자마자 곧바로 노동자의 경쟁 상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기계가 한 대 들어오면 노동자는 수백 명이 쫓겨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추방을 면한 노동자들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지며 고용이 불안정해진다. 이들은 추방의 공포 때문에 노동일의 연장과 노동강도의 강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 공장 바깥에선 추방된 노동자들이 이른바 ‘노동력의 저수지’를 형성하고 있어 노동력의 가격도 하락한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제값을 받지 못하더라도 노동력을 팔아야만 한다.

기계제 대공업 이후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이러하다. 자본가는 기계를 들임으로써 유토피아를 맞이했을지 모르나 대다수 노동자에게 기계제는 확실히,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때려죽”이는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 고병권은 마르크스의 시선이 이 디스토피아에서 멈추지 않았음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마르크스가 공장법의 보건 조항에서 잔혹한 ‘자본의 정신’을 읽었다면, 공장법의 교육 조항 등에서는 뭔가 다른 것을 읽어냈다는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처참한 실태와는 별개로 마르크스는 공장법의 교육 조항에서 “미래 교육의 싹” 같은 것을 보았다. 공장법의 교육 조항이란 어린 노동자의 교육, 즉 노동과 교육의 결합을 의무화한 조항을 가리킨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일과 학업을 병행하게 해야 한다는 이 조항은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조치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모두가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 상황 속에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단서를 구한다.

마르크스가 찾아낸 미래의 싹은 무엇인가. 노동자는 기계제 대공업이 가져다준 비참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기계제라는 ‘새로운’ 시대이기에 가능한 어떤 희망을 찾아냈다. 공장법 규제 속의 의무교육 조항에서, 그리고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시작된 가부장제 해체에서, 그리고 공장법의 일반화를 통한 자본축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열리게 될 것인가. 마르크스가 열어젖힌 그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고병권은 자본이 꾸는 꿈이 곧 ‘기계가 꾸는 꿈’은 아니라고, 기계를 내세워 자본가가 하려던 그 혁명을, 프롤레타리아가 얼마든지 아주 다른 혁명으로 뒤집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똑같은 존재에 대해 누군가는 유토피아를, 누군가는 디스토피아를 떠올립니다. 『자본』(특히 I권)에서는 자본의 운동을 중심에 두고 서술하므로 자본가들이 기계 속에서 그리는 유토피아가 부각되지만, 마르크스는 거기 잠재된 자본의 디스토피아, 자본의 몰락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이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토록 강력한 생산수단과 교류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냈던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낸 저승의 힘을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그러고는 “생산력들의 반역의 역사” 즉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기계들의 반역이 이미 시작된 것처럼 썼습니다. 내가 이번 책의 제목을 ‘자본의 꿈 기계의 꿈’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기계괴물의 등장과 함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길몽과 악몽의 가능성이 함께 열리고 있으니까요.
- 「1장 기계괴물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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