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의 유교철학 비판, 사변록 2, 제2장 중용에 대한 비판

도서정보 :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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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음력 10월 12일 春生門事件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李範晉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李完用 · 李允用 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궁녀 김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嚴妃)을 통해 고종에게 접근,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에 의해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鄭秉夏가 참형되었고, 내부 대신 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탁지부 대신 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 대신 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 정권이 무너지자, 그동안 은신중이었던 친러 · 친미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되어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 법부 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 · 이윤용 · 朴定陽 · 趙秉稷 · 尹用求 · 李在正 · 安駉壽 · 權在衡 · 尹致昊 · 李商在 · 高永喜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國賊으로 단죄하는 한편, 단발령의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공세를 탕감하는 등 인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갑오 · 을미의 개혁 사업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 23府였던 지방 제도를 漢城府와 13도로 개편하였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하였다. 한편 의정부로 환원한 신내각은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시키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으로 대신 초청하였으며, 러시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으나,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이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협상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해 불간섭을 표명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불리한 외교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외상대리 ‘사이온지(四園寺公望)’와 러시아 공사 ‘Hitro Vo’는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4일자로 제1차 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측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 뒤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山縣有朋)’를 Nikolai Ⅱ의 대관식에 파견하여, 러시아외상 Rovanov와 타협을 모색하게 하였다. 같은 해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진행된 비밀 회담을 통해, 양국 대표는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 조관과 2개조의 비밀 조관으로 구성된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취소하는 대신,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Alexiev,K.를 조선 정부의 탁지부 고문으로 앉히고 조선의 재정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열린 ‘로바노프·閔泳煥 비밀회담’에서, 러시아측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조선에게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 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전차 · 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 · 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같이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고종은 파천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수리중인 관계로 환궁 시기를 늦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운군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 의존 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光武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 세력에 대한 친러 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국왕의 무능 · 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국제정치의 현장에는 敵도 없고 同志도 없는 법이다. 다만 자기가 소속된 집단공동체의 이익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개인관계에서도 名分이나 義理가 별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無法律의 국제정치에서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니 국제정치에서는 國益이야말로 가장 시의적절한 中庸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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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3, 제3장 논어에 대한 비판

도서정보 :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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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遊天下의 여행자 孔子의 論語와 思辨錄



孔子는, 흔히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석가’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석가’나 ‘예수’가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인 데 비해, 孔子는 동아시아 문명을 대표하는 人文學者다. 후대에 그의 철학사상이 儒敎로서 종교적 형태로 정립되지만, 그는 오래도록 政治家로서의 立身揚名을 도모하였고, 직접 정치를 행한 시절도 있다. 하지만 결국 공자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대체로 공자가 현대 중국의 先祖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별다른 역사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실상 공자는 東夷族의 문화권인 魯나라 사람이다. 노나라(기원전 1046~기원전 256)는 지금의 ‘취푸’市에 위치한 나라로서, 周나라 ‘武王’이 아우인 周公 ‘旦’에게 내린 봉토를, 그의 아들인 ‘伯禽’에게 다스리게 하던 제후국으로 주나라의 혈족국가이다.
春秋時代 초기, 노나라는 동방의 강국으로서, 은공, 환공 시대(기원전 722~기원전 694)에 여러 번 齊나라, 宋나라 등과 싸워서 이겼고, 또 杞나라, 莒나라와 같은 소국에 부단히 침공했다. 춘추시대 중기에 사회가 변혁하여, 정권은 귀족 대신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기간 실권을 장악한 ‘주요’는 노장공의 세 아우 계우, 숙아, 경보의 자손으로,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三家라 했다. 혹은 저희가 모두 노환공의 후예이므로, 三桓이라 했다. 곧 소위 ‘정재대부’다.
노나라는 西周의 예법과 제도를 비교적 잘 보존한 나라 중 하나로, 다만 당시 형세의 영향으로, 일련의 변혁활동을 전개했다. 춘추 말기, 노소공이 삼가에게 쫓겨나, 객사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삼가의 가신 ‘양호’ 등이 국정을 전제하여, 한때 ‘배신이 국명을 쥐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노정공 시대(기원전 509~기원전 495), ‘양호’ 등은 실패하여 출분하고, ‘삼환’이 다시 새로이 정권을 장악하여, 후의 ‘애공’(기원전 494~기원전 468 재위)은 군권 회복을 도모하여, 삼가 대신들과 충돌이 극해져 마침내 월나라로 망명해 죽었다.
전국시대 초기, 약 원공 시대(기원전 436~기원전 416), 삼환은 점차 세력을 잃고 쫓겨나, 목공(기원전 415~ 기원전 383) 이후, 정권은 다시 국군의 손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전국시대 힘이 이미 쇠약해, 자주 제나라의 작전에 함께했다. 전국 말년, 초나라가 진나라의 핍박을 받아 동천하면서, 노나라를 공벌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256년, 초나라는 노나라를 병탄하고 경공을 폐출하자, 노나라는 멸망했다. 한 평제 시기에는, 경공의 8세손 공자 관을 포로후로 봉하고, 주공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공자 관이 죽자 시호를 ‘절’이라 하고, 그 아들 공손상여가 습작하게 했다. 왕망이 신 왕조를 세우고, 또 공손상여의 후예 희취를 포로자로 봉했다.

東夷는 중국 동북부지방과 한국 · 일본에 분포한 종족을 중국인이 부르던 명칭이다. 은나라 때는 人方이라는 夷族 집단이 있었고, 竹書紀年을 비롯한 先秦時代의 문헌과 금석문에서 ‘동이’를 뜻하는 다양한 명칭이 발견된다. 여기에 표현된 이족과 동이족은 산둥성 · 장쑤성 북부 일대에 거주한 족속을 말한다. 이들은 단순한 異民族이 아니라, 뒤에 중국민족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箕子나 孔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漢나라 이후 쓰여진 史書에 나오는 東夷는,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동부지방에서 활약한 ‘동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였다. 漢나라 때의 중국인은 변방의 종족을 東夷 · 西戎 · 南蠻 · 北狄이라 불렸는데, 동이는 바로 동쪽에 있던 종족을 가리킨 말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濊 · 貊 · 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하였다.
동방을 夷라 한다고 하는데, 夷라는 말은 산둥반도로부터 淮泗 유역에 분포된 민족 집단이 한족과 접촉하는 殷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그후 중국인들에게 여러 종족 개념과 방위개념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서융(戎), 남만(蠻), 북적(狄) 등의 명칭이 나타났다. 東夷란 특정한 민족 개념이 아니라, 방위개념이 첨가된 한족에 대한 상대적 개념의 동방 이민족의 범칭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濊 · 貊 · 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한다.
한편, 과거에 상고시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한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줄기는 산둥 방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랴오둥과 한반도지역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에 근거하여, 箕子朝鮮의 실체를,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건국한 나라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은 고고학적인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많다.
또한 東夷는, 秦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황하, 회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부와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북방 몽골리안계 종족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통일 이후에는, 산둥반도의 일부가 중국 역사에 흡수됨으로써, 발해만을 끼고 만주와 한반도에 분포한 한, 예맥 등을 동이로 지칭하였다. 즉 동이족의 범위가 상당히 동쪽으로 축소 이동한 것이다.

현대 중국은 물론이며, 현대의 중국인으로서 분별되는 漢族의 역사는 근대 文化革命 이후에나 실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이전의 대부분의 中國歷史는 북방 외래민족의 역사이다. 그러한 역사의 桎梏을 인식한 ‘마오쩌둥(毛澤東)’은, 문화혁명으로써 일부러라도 아주 가혹하게 기존의 전통을 말살해버린 것이다. 그래야만 名實相符 한족의 국가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아주 중요시하는 사회적 변화 단계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특히 문화혁명이 중시되는 것은, 종래의 혁명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에서는 전 민중이 사회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종래 문화와 그 창조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것이고, 민중은 그것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면, 사회주의 사회는 민중이 문화와 그 창조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경제, 사회, 정치를 스스로 움직인다.
그로부터 교육제도의 대규모 개조에 의한 인민대중의 교육수준의 향상, 사회주의적 인텔리겐차의 육성, 인류가 형성하여 온 적극적인 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 부정적인 문화유산의 가능한 한 신속한 청산, 그것들에 의한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의 확립, 이러한 것이 계급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 완수되어야 할 객관적 조건이 될 뿐 아니라, 이 문화혁명을 수행함으로써 공산주의적 인간이 형성되고,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를 없애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주체적 조건이 이루어지게 된다.
文化大革命은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문화가 붕괴되었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문화대혁명으로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으며, 혁명은 공산당 권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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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4, 제4장 맹자에 대한 비판

도서정보 :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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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的 理想主義者 孟子와 思辨錄



현대사회의 戰爭은 모름지기 금융이나 에너지에 얽힌 資本的 전쟁이며, 그러한 자본을 조작하는 情報的 전쟁이다. 그러다보니 현재 진행 중인 미국과 중국의 전쟁 역시 자본전쟁이며 정보전쟁이다. 美中戰爭의 핵심은 중국의 자본의 기틀이 될 中國夢的 一帶一路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프로젝트를 결코 坐視할 수 없으며, 나아가 반드시 擊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제1의 覇權國이라는 位相에 異常이 招來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여 이러한 자본전쟁이 과거처럼 武力的 暴力에 의하지 않으므로 다소 人間主義的이라는 착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차라리 폭력에 의한 전쟁이라면, 폭력에 저항하다가 당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항복하면 된다.
그러나 자본전쟁은 애당초 마땅히 항복할 만한 꺼리나 대상 자체가 不在하다. 그래서 외려 더 가혹하다. 예컨대, 사무라이 식으로 敵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취된 빨대를 꽂아두고서 말라죽지 않을 만큼 생존시키며 그 津液을 쪽쪽 빨아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美中 자본전쟁 혹은 패권전쟁에 온통 銳意注視해야만 한다.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南韓이나 北韓의 입장은 참으로 尖銳하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강대국의 곁에 있는 약소국은 금세 작살나버릴 수 있는 탓이다.
혁명 역시 자본적 혁명이며 정보적 혁명이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자본과 정보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사회에서 武力과 宗敎를 지니지 못한 바와 같다. 그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세력은 결코 권력을 쟁취할 수 없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없음은 곧 ‘생존 자체의 불안’을 惹起한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혁명은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우리 민족의 산하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革命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등을 의미한다.
혁명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變革, 義擧, 쿠데타 등을 말할 수 있다. 변혁은 급격하게 바꾸어 아주 달라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거는 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쿠데타(coup d’État)는 武力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이며,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으로 이루어지므로,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변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王權이 天皇에게 부여되었을 뿐, 그 裏面의 작업들은 변혁보다는 혁명에 근접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때문에 메이지 혁명이라고 지칭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明治維新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王政復古를 통한 중앙 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은 학문상 명칭이며,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 등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는 대체로 ‘덴포(天保)’ 시기로 일치하지만, 종료 시기는 1871년 廢藩置縣, 1873년 地租改正,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1889년 헌법 발표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지 않고 있다.
에도 막부는 외교에 관한 권리를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관리, 통제, 제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쇄국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아편 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굴욕적인 통상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그러다가 26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이 주도하여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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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 의병장 면암 최익현의 유배 여행기, 면암집

도서정보 : 최익현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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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配旅行者 勉菴 崔益鉉



면암 최익현의 시대는 중세국가인 조선왕조가 근대국가인 서구세력이나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支離滅裂해가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君臣의 동맹을 맺고서 의지하는 淸나라 역시 그러했다. 그러한 시대에 면암 최익현의 삶은, 不得已 나라의 붕괴를 감내해야 하는 士大夫로서, 온갖 旣得權을 박탈당한 流配의 형태로서 점철된다.
면암은 ‘梁大集 在成의 書室에 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記述한다.

“西洋은 하나의 禽獸이다. 그들은 父子ㆍ君臣ㆍ夫婦ㆍ長幼의 질서와, 禮樂ㆍ文物ㆍ節烈ㆍ衣冠의 융성함을, 등에 난 가시나 눈에 생긴 못처럼 여길 뿐만 아니다.
기필코 더럽히고 욕보일 것을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가 쇠약해진 것을 편승하고, 우리가 욕심대로 방종하는 것을 엿보더니, 방자하게 우리에게 호령하기를, 어찌 너희의 黻冕(슬갑과 면류관 즉 제복)과 珪璋(옥으로 만든 예물)을 없애 버리고, 너희의 남녀와 상하의 구분을 없애 버리고, 우리의 간편함을 따르지 않느냐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스스로 예의에 구속함을 싫어하고, 저들의 개방된 행동을 좋아하여,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끝내는 노골적으로 그들과 합류한다. 그리하여 돼지로 길러 去勢하여도 성낼 줄 모르고, 소로 길러 코를 뚫어도 심상하게 여기다가, 급기야 國母를 시해하고 머리를 깎는 변이 천지를 뒤흔들어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지 않는다.
이리하여 天性이 바뀌고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온 천하가 금수로 변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면암의 서양 인식은 當代 엘리트 지식인의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말기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해를 傍證한다.
또 면암은, ‘魯城 闕里祠에서 講會할 때 誓告한 條約’에서는 이렇게 기술한다.

“中華와 오랑캐의 큰 경계와 사람과 짐승의 큰 한계는, 진실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므로 옮기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중화의 중화가 된 까닭은 예의와 문물이 있기 때문이다.
문물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衣冠만한 것이 없는데, 옷은 반드시 옷깃과 소매를 중히 여기고, 冠은 반드시 비녀와 상투가 있으니, 혹시라도 형체와 의복을 毁傷하여, 머리를 깎거나 검은 옷을 입는다면, 비록 짐승이 되는 것을 숨기고 싶어도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일본놈들이 오니, 여러 역적들이 저들의 일등공신이 되고 싶어, 멋대로 호령하여 먼저 우리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다시 머리를 깎으려 하였다.
가령 저들의 명령하는 것이, 간혹 옛 성인의 制作을 모방하여 의리에 그다지 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금을 협박하여 멋대로 호령하는 처지에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따르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중화가 되고 오랑캐가 되며, 사람이 되고, 짐승이 되는 판가름이 여기에 있음에랴.”

孔子로부터 이어지는 수백 년의 禮治 전통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勤幹이었다. 면암은, 그러한 것을 포기함은, 국가공동체를 팔아넘기는 賣國奴와 같은 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衛正斥邪의 이념을 고수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올바름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고, 사악함은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외부세력이 막강하더라도, 그들의 문명 수준은 한갓 禽獸나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高宗은 그저 왕실만이라도 다소의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만을 바랐고, 開化派들은 개혁을 선도할 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면암은, 결국 乙巳條約이 체결되고서 조선왕조가 붕괴하자, ‘魯城 闕里祠에서 先聖에게 고한 글’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崇禎(明毅宗의 연호) 287년, 을사(1905, 광무 9) 12월 초하루, 기해 26일 갑자에 후학 崔益鉉은 통곡하며 先聖 孔夫子께 고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인민도 오래되었고, 순박한 풍속도 오래되었으며, 三皇ㆍ五帝ㆍ三王 같은 표준을 세운 성인도 가신지 오래되었으니, 세대의 치란과 道의 흥망이 氣數의 성쇠로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문에 周의 말엽에 하늘은 집대성한 성인을 내어 春秋의 권한을 빌려, 亂臣賊子를 죄주고 王道를 바르게 했으니, 이것이 곧 우리 夫子의 道가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주어, 堯舜보다 더 어질게 된 것입니다.
그후 다시 覇道에서 떨어져 오랑캐가 되고, 오랑캐에서 다시 떨어져 짐승이 되었으며, 楊墨(楊朱와 墨翟)은 변하여 老佛(道敎와 佛敎)이 되고, 노불이 다시 변하여 陸王(陸象山과 王陽明)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하를 변역한 것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亞聖ㆍ大賢들이 전후에 번갈아 나서, 道를 호위하고 邪說을 막는 책임을 지고, 尊周攘夷의 공을 세운 때문에, 道學이 다 떨어지지 않고 衣裳도 다 찢어지지 않아 중화의 전통을 보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陽秋(春秋의 별칭)의 한 가닥 맥이 線같이 海東의 한 지방에 오히려 존재해 있었으니, 이는 곧 碩果不食으로 천하의 志士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요사이 서양의 鬼物들이 날뛰어, 利瑪竇 같은 예수[耶蘇]들의 邪說이 점점 물들어 고질이 되었고, 끝내는 동쪽 오랑캐가 몰아 잡아먹어, 인류가 거의 다했습니다.
우리를 비린내 나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쇠사슬을 채워,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臣妾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鬱鬯酒를 맡던 종주국이 위태로워 종묘ㆍ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부자의 말씀을 외고 본받던 선비들이 스스로 금지하여, 선비의 복장이 깨끗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道는 전수할 데가 없게 되었고, 聖靈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는 실상 저희들이 우매하고 용렬하여서, 禍의 기틀이 싹터 움직일 적에 대책을 세워 막지 못하고, 惡의 불꽃이 치열할 때 성토하고 멸망시키지 못하여, 春秋의 법을 끝내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으니, 천지의 죄인인 동시에 부자의 죄인입니다.
경건하게 뵈옵는 마당에, 가슴이 찢어지고 정신이 떨려서, 통곡하고 죽고 싶을 뿐이기에 삼가 고하옵니다.”

上記에서 드러나듯, 면암의 삶은 痛恨으로 점철된다. 그 근본적 원인은 王朝와 文明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勉菴으로서는, 오랑캐에 불과한 일본과 금수에 불과한 서양세력에 의해 박탈되었음이 더욱 견딜 수 없는 羞恥였다.
일본과 서양세력이 등장하기 전에도, 斯文亂賊으로서 楊墨(楊朱와 墨翟), 老佛(道敎와 佛敎), 陸王(陸象山과 王陽明) 등은 존재했다. 그러한 온갖 걸림돌을 죄다 제거하면서 지탱해 온 왕조였다.
그런데 ‘Matteo Ricci(利瑪竇)’의 예수[耶蘇]를 앞세우며 새로이 등장한 서양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은, 기존의 사문난적들과는 그 樣相이 전혀 달랐다. 어차피 철학사상이나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근원은, 인류문명의 始原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므로, 살펴보면 공통점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세력이 지닌 과학기술이나 군사력은, 당시 朝鮮王朝로서는 당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는 이념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견고한 이념을 지녔더라도, 그것을 지탱할 실제적인 物理力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이념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최익현의 시대 이후 이어지는 공산주의 이념에서 검증된다.
人類史에서 共産主義者들이야말로 종교적 신앙심에 버금하는 강력한 이념을 지녔다. 실로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은 조선왕조 衛正斥邪主義者들 못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經濟力이라는 물리력을 상실하면서 죄 몰락해버렸다.
물론 그 결과는 20세기 末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므로, 최익현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다보니 면암의 삶은, 굳이 실제적인 流配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심리적인 유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하략-

구매가격 : 3,000 원

대조선 특명전권대신 박영효의 일본 여행기, 사화기략

도서정보 : 박영효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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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메이지유신 실패한 갑오개혁 그리고 박영효



‘大朝鮮 特命全權大臣兼修信使’은 朴泳孝가 일본 訪問時에 사용한 공식 公職名이다. 使和記略은 박영효가 1882년(고종 19) 8월~11월까지 일본을 여행한 기록이다. 여행의 성격은 응당 外交 여행이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1868)’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는 시절이다. 때문에 이 시대를 연상케 하는, 최익현, 유대치, 김옥균, 홍영식, 서정범, 서재필,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 이토 히로부미 등 여러 이름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裏面에는 이런 이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Thomas Blake Glover(1838~1911)’를 말할 수 있다.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19세기 후반에 일본 ‘나가사키’ 市에 체류한 스코틀랜드 상인이다.
그는 사실상의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서,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Glover Garden’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내에서 가장 번성하던 ‘사쓰마 번(가고시마현)’에 신식 무기들을 판매하였으며, 그 무기는 1864년의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우리는 메이지유신이 세계 列强의 거대한 ‘Great Game’의 결과물 중 하나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나마 일본은 이러한 Big Picture를 이해하였기에 일련의 近代化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예컨대, 勉菴 崔益鉉은 결단코 상투를 자를 수 없음을 端初로 衛正斥邪 義兵運動을 벌이다가, 對馬島로 유배되어 斷食으로써 殉國한다. 그리고 박영효는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다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민족반역자로 규정된다.

使和記略의 使行은, 같은 해 6월에 일어났던 壬午軍亂으로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제물포조약에 의해 성사된 修信의 의미와, 한편으로는 金玉均이 사행의 일원으로서, 임금의 은밀한 교지를 수행하는 임무를 띤 것이었다.
이 기록은 같은 해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의 기록으로 주요 사건이 있는 날만 썼다.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비교적 자세히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은 원문을 그대로 소개했는가 하면, 외국사신들과 만난 기사도 주요 내용은 물론 앉은 배치도까지 그려져 있다.
이 기록의 주요 내용을 보면, 첫째,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고안해 사용했는데, 그 제조 경위가 자세히 밝혀져 있다. 둘째, 일본과의 修好面에서 앞서 체결한 제물포조약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손해배상금 상환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기하도록 고친 사실을 기록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경상도 歲收諸稅 중에서 순금·은으로 교환해 일본의 은화폐든지 금화폐의 量目에 비추어 해마다 5만원을 지불하며, 그 방법은 두 차례로 나누어 조선 元山港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 수송시키기로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이들 일행 가운데는 2년 뒤 갑신정변을 주도한 開化黨의 김옥균·徐光範과 그 반대파인 守舊黨의 거두 閔泳翊도 수행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일본의 여러 발전상이, 우리 나라의 정치 변혁에 여러 가지로 작용했으리라는 면을 추측하는 자료를 담고 있다.
한편, 2개의 續約을 訂定한 내용도 담고 있는데, 제1관은 원산·부산·인천 항구의 里程을 조선의 이정법에 의해 사방 각각 50리씩으로 하고, 2년 뒤 다시 각각 100리씩으로 한다. 제2관은 일본의 영사·공사와 그 수행원의 가족이 우리 나라 內地의 각 곳에 유람하는 것을 허가하는데, 유람하는 지방을 지정해서 예조로부터 증명서를 주고 지방관은 증명서를 조사해 호송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학생도 약간 명을 인솔해 가서 입학시키고 이전에 가 있던 유학생을 데리고 왔다. 유학은 주로 語學校와 士官學校가 주였는데, 尹致昊도 이 때 유학했고, 일본에 있는 동안 일왕의 생일을 맞아 여러 외국 특사들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다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사화기략은 대일 관계의 기본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초기의 관세 문제, 일본의 水路 및 풍속과 國旗의 제정 경위 등을 밝혀 주는 자료가 된다.
-하략-

구매가격 : 3,000 원

전쟁과 국제정치, 남한산성과 인조, 병자호란 1권

도서정보 : 조선왕조실록(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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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爭과 國際政治, 丙子胡亂과 南漢山城 그리고 仁祖



丙子胡亂 당시 南漢山城의 상황을 記述한 朝鮮王朝實錄의 記事를 보면, 수백년 전의 기록에 불과한데도, 실로 피눈물 나는 심정을 갖게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 先祖들의 역사적 체험이 아니라면, 이처럼 직접적으로 체감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아프리카에서 수백만명이 굶어죽는다는 뉴스를 들어도 그저 무덤덤하지만, 내 부모형제가 이런저런 질병에 걸렸다고 하면 온갖 근심을 하게 되는 것은, 人之常情인 탓이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人들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여 수백만명이 죽는다는 뉴스를 들어도 그저 무덤덤할 터이다.
그런데 기괴하게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상황은, 마치 21세기 北韓의 모양을 보는 듯하다. 後金(淸)의 침략을 피해 궁궐과 首都를 잃어버리고서 남한산성에 숨어들었던 仁祖의 심정이나, 美國의 폭격을 피해 地下防空壕로 숨어드는 金正恩의 심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음은 인조 15년 1월 3일, 조선왕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보낸 降伏文書이다.

조선 국왕 姓 某는, 삼가 大淸 寬溫仁聖皇帝에게 글을 올립니다.
小邦이 대국에 죄를 얻어, 스스로 병화를 불러, 외로운 성에 몸을 의탁한 채, 위태로움이 朝夕에 닥쳤습니다. 專使에게 글을 받들게 하여,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려고 생각했지만, 군사가 대치한 상황에서 길이 막혀 자연 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듣건대, 황제께서 궁벽하고 누추한 곳까지 오셨다기에, 반신반의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습니다. 이제 대국이 옛날의 맹약을 잊지 않고, 분명하게 가르침과 책망을 내려 주어 스스로 죄를 알게 하였으니, 지금이야말로 소방의 心事를 펼 수 있는 때입니다.
소방이 丁卯年에 和親을 맺은 이래, 10여 년간 돈독하게 우의를 다지고, 공손히 예절을 지킨 것은, 대국이 아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실로 皇天이 살피는 바인데, 지난해의 일은 소방이 참으로 그 죄를 변명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소방의 신민이 식견이 얕고 좁아, 명분과 의리를 변통성 없이 지키려고 한 데 연유한 것으로, 마침내는 사신이 화를 내고 곧바로 떠나게 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방의 군신이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邊臣을 신칙하였는데, 詞臣이 글을 지으면서, 내용이 사리에 어긋나고 자극하는 것이 많아, 모르는 사이에 대국의 노여움을 촉발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하들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하여,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明나라는 바로 우리 나라와 父子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전후에 걸쳐 大國의 兵馬가 關에 들어 갔을 적에, 소방은 일찍이 화살 하나도 서로 겨누지 않으면서, 형제국으로서의 맹약과 우호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토록까지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 역시 소방의 성실성이 미덥지 못해, 대국의 의심을 받게 된 데서 나온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일에 대한 죄는 소방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으면 정벌했다가 죄를 깨달으면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天心을 체득하여 만물을 포용하는 대국이 취하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만일 정묘년에 하늘을 두고 맹서한 언약을 생각하고, 소방 생령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소방으로 하여금 계책을 바꾸어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용납한다면, 소방이 마음을 씻고 從事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대국이 기꺼이 용서해 주지 않고서, 기필코 그 병력을 끝까지 쓰려고 한다면, 소방은 사리가 막히고 형세가 극에 달하여, 스스로 죽기를 기약할 따름 입니다. 감히 심정을 진달하며 공손히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항복문서의 내용을 살피면, 그야말로 피가 끓는다. 그러나 전쟁에 패배하면 곧 罪人이며 奴隷일 따름이다. 그러한 상황은 21세기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본에 대해,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慰安婦 문제의 해결을 종용하고 있다. 그런데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 등 敗北國들의 여성들은, 지금 이 순간 貧困 따위에 내몰려 賣春女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 것이 여전히 人類史를 작동시키는 戰爭이라는 참으로 가혹한 動力이다.
병자호란은 아득히 멀어진 과거의 역사 속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無法律의 國際政治 場에서 전쟁은 결코 과거일 수 없다. 우리 민족으로서, 가깝게는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이다. 더욱이 현재의 時局은, 북한 핵문제나 美中 무역전쟁 혹은 패권전쟁으로 인해 一觸卽發의 戰爭的 상황에 있다. 여차하면 남한산성의 비극과 같은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인구 중 통상 40% 가량이 奴婢였다고 한다. 가혹한 신분제도 탓에, 백성의 大多數는 막상 戰亂이 발생해도 굳이 불안해 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노비의 형편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나라의 침략에 勞心焦思한 것은 王室과 士大夫 등의 기득권 세력이었다. 다만, 이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일 따름이다. 어쨌거나 감성적인 측면에선, 우리 선조들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옴은 不得已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 노비로서 생존하는 일과 청나라에 끌려가 戰爭奴隷로서 살아내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힘겨웠을까. 현실세계에서 별로 가진 것이 없거나, 더 이상 형편이 나빠질 것 없을 때, 인간존재는 혁명적인 誘惑에 쉬이 眩惑된다. 근대사회에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勞動者나 小作農이나 農奴들이 플로레타리아혁명에 적극 동참한 역사적 史實이 이를 傍證한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국가라도, 항상 養民이 강조되는 것이다. 양민이란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이며, 이것이 곧 政治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러한 인식은 이미 書經의 시대로부터 常存한다. 서경 중에서도 洪範九疇는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그러한 홍범구주를 國是로 삼는 국가공동체였다. 그러나 그저 허울 좋은 이념일뿐,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백성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으니까 말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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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국제정치, 남한산성과 인조, 병자호란 2권

도서정보 : 조선왕조실록(탁양현 엮음) | 2018-08-3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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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義的 名分 혹은 實利的 國益



朝鮮王朝(1392~1910) 執權 519년 동안에, 壬辰倭亂(1592~1598), 丁酉再亂(1597), 丁卯胡亂(1627), 丙子胡亂(1636) 등의 전쟁이 집중적으로 20~30여 년 간격으로 일어난 시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비록 갖은 受侮를 당했을망정 멸망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청나라가 조선왕조의 멸망을 목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조선을 점령하여 王權 자체를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조선을 점령하지 않더라도, 청나라는 자기네 領土로 삼을 영역은 이미 많았다. 더욱이 청나라는 명나라를 내몰고서 중원대륙을 점령하고자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병자호란은, 단지 더 큰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한 前哨戰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예컨대 三國時代에서 高麗王朝로,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권력이 이동하는 시절에는, 별다른 다툼도 없이 기존의 집권세력이 멸망해버린다. 그 이유는,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易姓革命的 권력투쟁의 경우 執權 자체를 목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不可避한 경우 전쟁도 不辭하겠지만, 政權만 확실히 簒奪하면 더 이상의 武力的 충돌은 없다.
人類史에서 대부분의 집단 간에 충돌하는 전쟁의 경우, ‘收奪的 利得’을 목적하므로, 굳이 그 집단 자체를 붕괴시킬 필요가 없다. 나아가 기존의 집단을 유지시키면서,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수탈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득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는 물론이며 현대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현대의 전쟁이란 대부분 에너지나 자본을 수탈하려는 覇權에 얽힌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청나라 황제가 인조에게 보낸 國書로서, 인조 15년 1월 28일의 기사이다. 여기에는 丙子胡亂이 收奪戰爭이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짐이 만약 明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步兵·騎兵·水軍을 조발하여, 혹 수만 명으로 하거나, 혹 기한과 모일 곳을 정하면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水兵·槍砲·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犒軍하는 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聖節·正朝·冬至 中宮千秋·太子千秋 및 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內官에게 명하여 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箋文의 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陪臣이 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軍中의 포로들이 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사로잡은 사람이니,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諸臣과 혼인을 맺어 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刷還해야 마땅하다.
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조칙으로 보이는 바이다.
崇德 2년 정월 28일.
歲幣는 黃金 1백 兩, 白銀 1천 냥, 水牛角弓面 2백 副, 豹皮 1백 張, 鹿皮 1백 張, 茶 1천 包, 水㺚皮 4백 장, 靑黍皮 3백 장, 胡椒 10斗, 好腰刀 26把, 蘇木 2백 斤, 好大紙 1천 卷, 順刀 10파, 好小紙 1천 5백 권, 五爪龍席 4領, 각종 花席 40령, 白苧布 2백 匹, 각색 綿紬 2천 필, 각색 細麻布 4백 필, 각색 細布 1만 필, 布 1천 4백 필, 쌀 1만 包를 定式으로 삼는다.

다만, 아주 특수한 경우로서, 상대방 집단의 붕괴 자체를 목적하게 되면, 그러한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해진다. 대표적으로 理念戰爭이나 宗敎戰爭 따위가 그러하다. 그런 형태의 전쟁은 별다른 이득을 목적하지 않으며, 오로지 抹殺을 목적하는 탓이다. 따라서 그런 형태의 전쟁만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적어도 민족이나 국가 자체가 멸망하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다.
여하튼, 21세기에 南韓이나 美國의 입장에서, 北韓이 핵문제를 비롯하여 여러모로 걸리적거린다면서, 북한이 1인 독재체제이므로 金正恩을 암살하여버리면 북한체제를 붕괴시키고 점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섣불리 기존의 체제를 붕괴시켜버리면, 그 집단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거나,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급격히 감소해버릴 수밖에 없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收奪戰爭처럼, 인류사의 대부분의 전쟁은 수탈전쟁이다. 가장 거대한 전쟁이었던 世界大戰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저마다의 이득이 相衝하여 발생한 전쟁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전쟁의 원리를 명확이 인식해야 한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 등의 관계에서 유발될 수 있는 전쟁적 상황 역시, 이러한 수탈전쟁의 원리를 좇을 것임은 明若觀火다. 그러니 名分이 아닌 實利를 선택해야 하며, 그러한 실리는 곧 國益임을 유념해야 한다.
혹여 우리 민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그러한 시절은 인류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21세기에는 지구별 어느 곳이라도 속속들이 노출되어 있는 탓에, 그러한 想像共同體가 실현되기는 실로 어렵다.
병자호란의 시절에는 어떠했는가. 현대에 비한다면, 그 시절에는 그나마 鎖國的 집단공동체의 실현이 다소 가능했다. 그런데도 결국 국제정치의 狂風을 피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覇權國이 아닌 이상, 君臣關係를 맺고서 事大하는 패권국이 몰락해가고, 새로이 패권이 변동하는 상황에서, 그 영향력으로부터 고립될 방편은 없는 것이다. 멀리 바다 너머에 있던 日本 역시도, 결국 그러한 국제정치적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다음은 인조 15년 1월 30일에, 전쟁에 패배하여 신하의 신분으로서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禮를 행하는 장면을 기술한 記事다.

龍骨大와 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上(仁祖)의 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揖하는 예를 행하고, 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翰林·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侍講院·翊衛司의 諸官을 거느리고, 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汗이 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方陣을 치고 좌우에 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汗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大君 이하가 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汗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汗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나라 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의 여러 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衛率 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進饌하고 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桑田에 나아가 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昌慶宮 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위의 記事에 여실히 드러나듯이, 전쟁에서 패배한 자는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나을 정도의 갖은 恥辱을 堪耐케 된다. 仁祖는 청나라의 汗에게 3번 절하고 9번 조아린다. 그리고서 한은 시종들에게 개를 끌고 오도록 하여 고기를 던져준다. 그야말로 조선왕조의 王이 개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 왕비들이 한에게 절을 올린다. 한 나라의 왕비들이 敵의 王에게 절을 올린다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위안부나 매춘부로 내몰리는 여성들의 신세와 별다르지 않다. 국가공동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그러한 치욕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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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글 뜻

도서정보 : 권상호 저 | 2018-08-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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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글 뜻]은 수많은 한자를 다루는 책이다. 하지만 기존의 딱딱한 한문책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저자는 국문학도로서 문자의 유래를 서예가로서 그것의 예술적인 가치를 말하며 인생의 여행자로서 그것을 일상어로 풀어낸다. 도정의 유희를 통해 서예와 문자 속에 숨어 있는 인생살이를 깨닫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야기는 흥겨운 추임새처럼 경쾌하게 이어진다. 그의 흥에 취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유쾌함 속에서 지식을 얻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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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삶

도서정보 : 최준영 저 | 2018-08-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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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의 『동사의 삶』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긴 시간 책과 함께 살았습니다. 새로운 도전에 달뜨던 시절에도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때에도 변치 않는 습관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책읽기와 글쓰기는 저의 살아있음의 유일한 증거였지요. 책을 읽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프롤로그 발췌 동사로서의 삶을 살아온 ‘책고집’ 최준영의 인문학 단상. 어렵고 딱딱한 학문 혹은 멋들어진 쇼맨십으로 꾸며진 인문학 강의가 아닌 뚜벅뚜벅 담담한 세상살이의 인문학을 말한다. “저는 명사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동사의 삶에 가깝고요. 학위도 소속대학도 없이 그저 떠돌아다니면서 강의하고 있으니까요.” 노숙자 인문학의 창시자이자 거리의 인문학자로 활발하게 활동한 최준영은 바쁜 나날 속에서도 책과 펜을 놓지 않았다. 작가는 ‘매일 쓰기의 힘’을 이야기하며 『동사의 삶』은 작가의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삶의 에센스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살아있음의 증거로서의 글쓰기를 지속한다고 말한다. 당신의 어제와 오늘은 얼마나 다른가? 어제의 당신과 몇 발자국이나 멀어졌는가? 당신은 어떤 품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1부 ‘배우다’는 독서와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발 넓은 지식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학문적인 의미에서의 독서와 인문학이 아닌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인문학을 이야기한다. 생활의 언어로 풀어낸 인문학은 쉽지만 일상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제시한다. 2부 ‘살다’는 최준영의 인생이야기이다. 솔직하고 감성적인 문장으로 작가 본인의 삶을 이야기하며 독자의 삶까지 환기시킨다. 가족과 친구 감정에 대한 단상을 소박하고 솔직하게 서술했다. 3부 ‘쓰다’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쓰기의 본질적인 이야기부터 어색한 문장을 고치는 법 문장력을 기르는 방법론까지 총망라했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4부 ‘느끼다’에서는 정치 사회 역사를 다루었다.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작가의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뼈 있는 문장들은 담담하지만 부조리한 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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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길

도서정보 : 최준영 | 2018-08-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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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삶』을 잇는 실천적 길 『동사의 길』 동사의 삶이 근본을 이야기했다면 동사의 길은 조금 다르다. ‘최준영의 길’로 명확하게 정의한 인문학 일대기는 예술과 삶을 지나 독서로 이어진다. 이는 ‘길’이라는 키워드에 알맞다. 인문학 볼모지에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걸어온 최준영의 길을 소개한다. 노숙자 인문학의 창시자이자 거리의 인문학자 두 발로 뛰는 실천인문학자 최준영의 묵묵한 인문학 일대기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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