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다양성-영미 시학 <수정판>

도서정보 : 라종혁 | 2018-10-0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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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영미 시학을 형식의 시점에서 탐구하며, 르네상스와 빅토리아 시학 역시 형식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그 외에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시학은 철학적 시점과 문화론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영미 전통 시학을 전체적 맥락에서 탐구하며 영시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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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섹슈얼리티

도서정보 : 오세은 | 2018-10-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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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섹슈얼리티의 얼굴들

《문학과 섹슈얼리티》는 문학 속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문학의 작품과 작가뿐만 아니라 외국문학의 작품과 작가들의 섹슈얼리티를 함께 논의하고 있다. 섹슈얼리티의 이론적 토대가 외국작가의 작품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을 동시에 감상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자는 문학 속에서 성과 사랑 같은 개인의 사생활이 왜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보이고자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 책의 목표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이론을 이해하고, 문학작품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해석을 이론과 병행해서 체계적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선보인다.
최근 들어 섹슈얼리티가 문학,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문화적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철학적·사회적 이해를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다소 난해한 구석이 있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 나간다면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론적 학습과 작품 감상을 모두 성취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성담론이 과거에 비하여 퇴보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성과 사랑의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학문적 기반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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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 개벽혁명 사상가들, 홍수전 손문 모택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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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의 開闢’과 ‘체 게바라의 革命’



開闢은 곧 革命이다. 개벽이든 혁명이든, 흔히 인위적인 激變인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런데 天地自然 안에서 어떠한 변화든, 그것은 자연스런 변화일 따름이다. 그러한 바는, 個人이든 集團이든 매한가지다. 다만, 개벽은 원만한 自然의 측면이 강하고, 혁명은 급격한 人爲의 측면이 강하다는 차이는 있다.
또한 개벽은 종교적 개념이고, 혁명은 정치적 개념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것은 다소 便宜的인 분별일 따름이다. 그러한 detail이 不要한 바는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개벽적 혁명이란, 천지자연 자체의 자연스런 변화라는 인식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세계에는 온갖 다양한 형식의 ‘開闢的 革命’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개벽적 혁명 중에서, 굳이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가장 巨大한 존재형식인 國家的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고, 가장 微小한 존재형식인 個人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최소한의 생존이나마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우리 민족의 ‘生存의 利得’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는 집단공동체는 중국과 일본이다. 물론 북방의 여러 민족도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미국이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여건보다도 강력한 地政學的 여건을 좇는다면, 응당 중국과 일본을 우선하여 거론치 않을 수 없다.
中國 近代 역사에서, 그러한 開闢的 革命을 실현한 인물은 홍슈취안, 쑨원, 마오쩌둥 등이다. 이 외에도 개혁적인 변화를 추구한 인물들은 많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실행한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그러했다면 근대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 안에서 중국대륙은, 항상 혁명적 개벽의 변화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래서 중국대륙을 지속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반도는, 高麗王朝로부터 朝鮮王朝에 이르는 1,000여년 동안, 마치 ‘고인 물’처럼 별다른 변화가 없이 정체된, 王朝 獨裁의 역사였다.
그래서 오히려 21세기의 한반도는, 개벽적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만큼 개벽적 혁명의 에너지가 오랜 세월동안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세기를 지나면서, 이미 ‘6․25, 4․19, 5․16, 5․18’ 등의 개벽적 혁명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체험했다고 해서, 이제 개벽적 혁명의 動力이 정지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체험 탓에, 더욱 새로운 개벽적 혁명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러하다면 그러한 개벽적 혁명은 어떤 것일까.

21세기 大韓民國이야말로, 開闢的 革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것이, 철저히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人民民主主義와 共産主義’ 주변의 개벽적 혁명들이, 죄다 역사의 뒤안으로 소멸해버리는 것을, 이미 여실히 目睹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것들을 죄다 삭제해버고서 나아질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면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으며, 기대해서도 안 되는 듯하다.
어쨌거나 개벽적 혁명은, 철저한 現實主義의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예컨대 낭만적 혁명가 ‘Che Guevara’와 같은 理想主義的 想像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이었지만, 결국 한갓 ‘그림자 연극’에 불과했음이, 역사로써 검증되는 탓이다.

예컨대, 근대 중국에서, ‘홍수전’의 太平天國이라는 개벽적 혁명의 경우를 살피면, 지금으로부터 150~160여 년 전에, 基督敎的 신화를 통해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열정이, 無知하고 배고픈 민중에게 먹혀 들어갔다는 사실이 참으로 怪異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잠시만 생각해보면, 첨단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예컨대 ‘허경영’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현상들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으니, 그다지 괴이할 것은 없다. 하물며 서민대중의 대부분이 ‘文盲으로서의 지적 궁핍’과 ‘奴隸로서의 물질적 빈곤’에 허덕이던 과거에는 어떠 했을지, 쉬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지상세계에 진정 Utopia는 작동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유토피아는, 인간존재의 認識的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결코 나쁜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권력과 자본을 탐내어 표에 아부하는 ‘정치꾼’ 수천 명 보다는, ‘홍수전’이나 ‘허경영’ 같은 ‘유토피아적 이미지’가 더욱 소중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당최 가진 게 없는 서민대중으로서는, 험난한 亂世가 닥쳤을 때, 그 고통스런 세월을 견뎌낼 마땅한 방편이 도무지 없으며, 기득권층은 본래 그랬듯이 국가나 국민에게는 관심 없으며 그저 제 몫에나 집념할 때, 그래도 그나마 힘이 되어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것이, ‘미륵’과 같은 유토피아라는 개벽적 혁명의 理想鄕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홍수전’의 태평천국이 작동한 시기는, 동아시아는 물론이며, 전 세계가 집단적 난세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경우에도, 彌勒, 鄭鑑錄, 東學, 甑山 등, 다양한 혁명적 영웅과 개벽적 이상향이 등장했다. 그러니 설령 그것이 惑世誣民의 似而非에 불과할지라도, 그 의미와 가치는 각별하다. 그러한 난세에는, 외려 합법하고 적법하다는, 집단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暴壓이야말로, 더욱 잔혹하며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日帝强占 시기에, 그 主體勢力인 일본은 말할 나위 없으며, 그러한 일본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末期 朝鮮王朝는 또 어떠한가. 과연 그들에게서, 서민대중들이 一抹의 희망이라도 모색할 수 있었겠는가.
고통의 기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면, 稀少하게도 ‘빠삐용’처럼 불굴의 의지로써 이상향을 추구하는 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서민대중은 시나브로 매몰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할 때, 영웅과 이상향은 참으로 소중한 대상으로서 작동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만 한다. 이는 실로 현실세계의 不得已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아주 잘 알려진 두 가지 캐릭터를 회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향후, 21세기 韓民族의 개벽적 혁명을 모색함에 있어, 아주 강렬한 본보기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작 ‘체 게바라’는 ‘빠삐용’의 同一的 그림자였음을, 반드시 유념해야만 한다.
그런데 ‘체 게바라’와 ‘빠삐용’의 ‘이미지 중첩’과 유사한 역사적 상황으로서 모티브가 된 것은, 근대 중화민국과 조선왕조에서 등장한다. 중국군벌 ‘차오루린’은, 조선왕조의 ‘이완용’과 상호 유사한 캐릭터다. ‘차오루린’은 ‘5․4운동’의 비난의 대상이고, ‘이완용’은 庚戌國恥의 비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문제가 되는 외교문서에 결정적으로 직접 서명을 하였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서명한 것은, 비단 개인의 결정에 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러한 상황에 처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니 일견 ‘역사적 희생양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중들은 時流를 좇아, 대다수가 비난을 하면, ‘생존의 이득’을 도모하며, 집단의 관성에 떠밀려 多數의 무리에 편승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집단대중에게는, 어떤 집단적 인식능력이나 판단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완용’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韓民族의 대표적인 민족반역자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규정되어 비난받는다. 그래서 단지 ‘이완용’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極右나 極左에 의해 비난받는 상황까지도 연출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이완용’처럼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極右的인 衛正斥邪主義者’나 ‘極左的인 獨立主義者’처럼, 적극적인 폭력행사도 不辭하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집단대중은 ‘이완용’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생존의 이득’을 도모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존재의 행동방식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비난한다. 비난을 표하지 않으면, 자칫 자기가 ‘희생양 이미지’가 되어버릴 수 있는 탓이다. 게다가 자기 편의 숫자가 多數이면, 이제 비난의 정도는 가혹할 지경에 이른다. 이는, 어떻게든 ‘희생양 이미지’를 제작하고야 마는, ‘권력의 가혹한 本性’이다.
그리고 정작 대표적 민족반역자로서,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응당 그 시절에 가장 큰 권력을 지녔던, 高宗에게 묻는 것이 합당하다. 어쨌거나 ‘차오루린’이나 ‘이완용’은 ‘역사의 희생양 이미지’로서, 아주 오래도록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한다’고들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차오루린’과 ‘이완용’이 상호 유사하게 ‘이미지 조작’되었다면, 정반대의 위치에 배치되어 ‘이미지 조작’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동시대에 발생한 상황이므로, ‘역사적 이미지 조작’을 思慮함에 있어, 재미있는 비교가 될 수 있다.
현대의 중국이나 대만을 가보면, 소위 ‘中山公園’이나 ‘中山路’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것은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매한가지다. 이는, ‘손문(쑨원)’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쑨원’은 그야말로, 현대의 중화민국을 제작해 낸 國父로서, 굳건히 자리매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近代史를 살핀다면, 실상 ‘쑨원’의 역할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니 아무래도 과장된 ‘역사적 이미지 조작’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물론 ‘쑨원’이 나름대로 중국의 근대화에 主演으로서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餘他 인물에 비해 별로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에 동시대에 대한민국에서, 대체로 ‘이승만’은, ‘쑨원’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이승만’ 역시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 ‘쑨원’처럼 國父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을 거론할 때면, ‘정읍 선언’에 의한 남북분단의 元兇이며, 고집센 高齡의 독재자로서 규정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일부 보수적 세력을 제외한다면,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이승만’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니 이 또한, ‘쑨원’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이미지 조작’되었듯이, ‘이승만’은 지나치게 축소되어 ‘이미지 조작’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역시 당시의 상황에서, 누구 못잖게 나름대로 민족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 것이 사실이다. 다시 日帝强占과 같은 지옥으로 매몰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적 이미지 조작’의 片鱗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 바로 역사이다. 그러니 역사를 대할 때,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서, 항상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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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 존 로크 장자크 루소 알렉시스 드 토크빌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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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民主主義의 資本’과 ‘人民民主主義의 Kitsch’



周知하는 바와 같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체제원리는, 응당 自由民主主義다. 자유민주주의는 근대 서양문화의 정치철학적 산물이다. 대한민국은 여러 이유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과연 그럴 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人類史에 등장하는 어떤 체제원리보다도,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을 가장 인간답도록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는 너무도 다양한 통치철학들이 존재한다. 그 이론만으로 치자면, 자유민주주의를 능가하는 철학사상은 적지 않다. 동양의 정치철학의 경우에도, 孔孟이나 老莊의 帝王學的 통치철학은, 만약 그 이론대로만 실현될 수 있다면,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쉬이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이다. 諸子百家의 다양한 통치철학은 물론이며, 近代에 世界史를 搖動시켰던 맑스의 통치철학은 또 어떠한가.
맑스의 공산주의 통치철학은 실로 아름다운 정치적 이상향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주의적 상상일 따름임이, 역사로써 검증되었다. 朝鮮王朝를 주도했던 孔孟 전통의 朱子學的 통치철학 역시 그러했다. 공산주의 통치철학은 이상주의로써는 결코 현실세계를 나아지게 할 수 없음을 증명했고, 주자학적 통치철학은 그것보다 나은 통치철학이 작동하기까지 꼼짝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不條理의 엄청난 고통을 증명했다.
물론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라고 해서 萬病通治藥일 리는 전혀 없다.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도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인류사를 고찰할 때,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만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정치철학은 不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은, 근대 이후 널리 회자되는 대표적인 청소년 교육론이다. ‘에밀’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청소년의 이름이다. 여기에서 ‘루소’는 지속적으로 自然主義 교육론을 주장한다. 어린이에게는 ‘자연적 완전함’이 내재하므로, 그것이 발현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압적인 훈육을 부정하며 거부한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루소’는, 자기의 자녀 5명을 죄다 고아원에 보내버린 냉혹한 아버지이다. 혈연마저도 자기의 생존을 위해 배척해버린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청소년 교육론을 집필했으며, 自然主義的 교육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실로 irony다. 그러나 자기의 罪過에 대한 自己處罰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납득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루소’는 이데올로기적인 강압적 교육을 부정한다. 그것이 지닌 폭력성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훈육의 폭력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으로서, 북한의 ‘어린이 집단 매스게임’을 연상할 수 있다. 一絲不亂하게 기계처럼 작동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그러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가혹한 강압적 훈육을 받았을지, 당최 상상이 되질 않는다.
‘루소’의 견해를 좇는다면, 북한의 ‘어린이 집단 매스게임’이야말로, 强壓主義 교육의 典型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비판하는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론이 人權主義 차원에서 지극히 타당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당초 ‘루소의 에밀’이, 자기 자식을 내버린 原罪를 지니고 있음 또한 묵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원죄는,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援用한다면,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야만 하는 不得已한 不條理와 닮아 있다. 現在的으로 자본주의는 분명 원죄처럼, 市場이라는 것에 본래 惡魔性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에 의하여 작동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항상 견제와 균형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북한의 主體思想 교육론은, 자기 어린이들을 집단적 강제 속으로 내던져, 예컨대 ‘어린이 집단 매스게임’처럼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이데올로기 작품을 제작해낸다. 나아가 그러한 원리가 작동하여 표현되는 體制理論이나 國家共同體라는 작품 역시 그러하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Kitsch라고 할 것이다. ‘키치’는 一見 ‘醜의 美學’이다.

辭典에서 ‘키치(Kitsch)’를 찾아보면, ‘저속한 작품’ 혹은 ‘공예품’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형용사 ‘키치的’은 ‘천박한, 야한, 대중취미의’ 등의 의미를 갖는다고 되어 있다.
一言以蔽之하여 키치란, 겉으로 봐서는 예술품인 듯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천박한 싸구려 상품으로서, 당최 예술품일 수 없는 것이 바로 키치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무수한 저작들 역시, 이러한 키치의 분별로부터 당최 자유로울 수 없음이 필자에게 깊은 아픔과 설움으로 다가서는 건, 또 무슨 까닭일까.
여하튼 키치라는 용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개념처럼 매우 근대적인 것이다. 키치는,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에, 뮌헨의 화가와 畫商의 俗語로 사용되었으며, 하찮은 예술품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1910년대에 이르면, 느슨하고 널리 유통되는 호칭으로서, 국제적인 용어가 된다.

키치의 발생 배경은, 美學的으로는 낭만주의 예술에서, 사회적 배경으로는, 19세기 중반 부르주아 사회의 형성과 예술의 상업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이 이미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파급 속도도 빨라, 중산층도 그림과 같은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라 미술품이나 그림을 사들이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키치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의 문화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럴 듯한 그림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던 개념이다.
이러한 상황은, 共産主義나 人民民主主義가 중산층 대중문화에 習合되어가는 상황과 유사성을 갖는다. 비록 귀족적 ‘금수저’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의 知的 역량을 지닌 文化大衆에게, ‘도덕적 인권주의’나 ‘이상적 평등주의’ 등은 분명 매력 있으며, 구매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美的 논의의 대상으로서 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현대에 이르면서, 고급문화나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까지 개념이 확대되어, 현대의 대중문화와 소비문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본래 키치가 가리키는 구체적 대상은, 古美術品을 모방한 가짜 복제품이나 유사품, 통속미술작품 등이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와 같은 걸작품을, 석고나 플라스틱으로 복사한 ‘가정용품’에서, 잡지 표지를 장식하는 저급한 일러스트레이션에 이르기까지, 粗惡한 감각으로 만들어진 미술품과, 저속한 대중적 취향의 대중문화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상황은, ‘맑스’의 공산주의 작품을 모방하여 제작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본래의 共産主義는 실로 아름다운 정치사상적 예술작품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작품화되었을 때는, 고작 ‘러시아’나 ‘중국’의 社會主義體制쯤의 작품밖에는 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북한의 ‘주체사상’에 의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란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 분명 그 原作으로서 원용된, ‘맑스의 공산주의’나 ‘조선왕조의 성리학’에 의한 정치철학적 작품들은,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북한 땅에서 실현되었을 때는, 결국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작품들처럼, 천박한 키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이 키치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키치도 분명 類似예술작품이기 때문이며, 키치가 지니는 기괴한 매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하는 탓이다.

키치에 대한 평가는, 산업사회의 소비문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삶의 태도를 표현하는, 특정 철학적 미학적 범주라는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개념이 확대되면서, 키치가 가진 사회적 기능과 성격에 주목하게 되었다.
키치는, 본래의 기능을 거부하는 특성, 충동이나 수집의 특성, 값이 싸야 하며 축적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낭만적 요소를 포함하며 상투성과 쾌적함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여러 요소들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중층성의 특성 등을 가진다.
키치가 가진 이러한 사용기능에 사회적 기능이 부과되어 키치가 존재하므로, 키치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키치는, 처음에는 ‘이발소그림’과 동의어였다.
허름한 이발소의 벽면을 차지한 싸구려 액자 속에는,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돼지나, 가을 추수가 끝난 전원풍경, 밥짓는 연기가 굴뚝으로 뿜어나오는 해질녘 시골집의 풍경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염원하는 행복의 이미지들이 들어 있었다.
이발소그림과 같은 키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서나 내용을 담고 있는, 미적 수준에서는 한없이 저급한 그림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제 키치는, 단지 이발소그림과 같이 미적으로 저급하거나 조악한,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장 밀착된 특수한 장르화뿐 아니라, 자본주의 문화 일반, 나아가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리키는,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그것이 마치 자본적 시장이 지니는 惡魔性처럼, 키치가 지니는 악마성이다. 심지어 키치는, 미학적인 퀄리티를 갖는 데 실패한 저급한 예술품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 ‘우수한’ 특정 작품들의 어떤 경향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고급예술의 맥락 안에서, 이제 ‘키치的’이라는 의미는, 어떤 작품들의 성향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미적 개념이다. 키치를 지향하는 작품들은, 팝아트 이후 고급예술 전반을 장악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지배적인 경향이 된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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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 당한 기억 사이로

도서정보 : 김상훈 | 2018-10-05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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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날마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사유의 빛 점들이
내 안의 옹벽을 쌓는 흙으로 정착하기보다
하릴없이 저물다가는 낮과 밤처럼 종종 아프다
그것들은 며칠 혹은, 몇 달씩 닻을 내리고
내 사유의 굽은 등성이에 따개비처럼 증식하며
게으른 자아의 입자들을 무한정 휘젓는다
그럴 때마다 터무니없이 갈변하는 시구의 방점들
이제 갓 피어난 사유의 물꽃 위로
겹겹 떨어지는 기호의 빗방울들은 몸 버릴 곳 몰라
“벌목 당한 기억 사이로”
발신자 불명의 글 한 줄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혁명을 기대했던 햇살이 냉정하게 제 갈 길 가듯
몸 버리고 갈 줄 알았더니 몸 데리고 간다
한 시절의 다리를 건너간다는 것이 때로는
까실한 생의 사포질에 뼈까지 갉아먹히는 듯하여
수면 위에 눈물 한 잎 새기는 일처럼 아득하다
“벌목당한 기억들이 먼훗날 누구의 잎새가 되든”
고뇌에 동참했던 팬들, 김상훈의 뜨락 식구에게 감사드리고
이 시간에도 연탄불에 얼굴 디밀고 있을 아내 이숙자 씨에게
이 책으로 발생하는 기쁜 일이 있다면 아낌없이 모두 바치며
시음사 편집실과 김락호 대표님께 감사의 염(念) 드린다.

구매가격 : 10,500 원

발견의 시대

도서정보 :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 | 2018-10-04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에드먼드 펠프스, 마이클 스펜스, 니얼 퍼거슨 등
세계적인 경제・인문 석학들의 강력 추천 교양서**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미리 본
21세기의 번영과 몰락, 그리고 새로운 발견!

역사는 반복된다. 많은 학자들이 4차산업혁명 시대인 현재를 두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급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역사 속에 이미 이러한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적 석학이자 세계은행 전 부총재인 이언 골딘과 옥스퍼드대학교 정치학 박사인 크리스 쿠타나는 현대와 르네상스 시대가 놀랄 만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금융, 정치, 교육, 기술에서 공통점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특이점이 발현되는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는 인류의 황금기이자 새로운 성공의 기회가 폭발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위험을 피하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정부, 기업, 개인에게 제언하는 책이다.




◎ 추천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 교수가 강조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 신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양한 변화가 연속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아찔한 위험도 많으나 기회 또한 그만큼 풍성하다. 정부와 기업과 개인이 이 기회를 잘 ‘발견’해 자신의 것으로 삼고, 최고의 시대를 열어가길 바란다.
송병락 자유와창의교육원 원장, 전 서울대학교 부총장, 『전략의 신


◎ 책 속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그리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관점’이다. 관점이 있으면 우리 인생을 정의하는 대립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있고 세계를 형성하는 광범위한 세력에 맞서 우리 의지를 더 효과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다. 충격이 발생할 때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한발 물러나 더 넓은 맥락에서 더 주도적으로 충격의 의미를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다. (중략) 관점은 우리 개개인이 인생을 단순한 날수의 합이 아니라 위대한 여정으로 바꿀 수 있게 해준다. 관점은 우리가 힘을 합쳐 21세기를 인류사에 길이 남을 시대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_ pp.29-30, 서장: 몰락할 것인가, 부흥할 것인가?



무어의 법칙은 어쩌면 현시대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경험적 관찰일 것이다. 첫 번째 구텐베르크 시대를 정의한 특징 중 하나는 ‘속도’였다. 한 개인의 일생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새로운 문화 및 의사소통 매체가 탄생하고 보편화됐다.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인프라(사회 기반 시설)를 생각해보라. 15세기에는 인쇄기가 곧 기초적인 인프라였다. 오늘날 기본 인프라는 육지와 해저를 가로지르는 광섬유 케이블이다. 1988년에는 최초로 대륙과 대륙을 잇는 광섬유 케이블망이 설치됐다. 이후 이 인프라를 통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컴퓨터 연산 능력이 향상되면서 한때 드문드문했던 광섬유 케이블망은 매우 촘촘해졌다. 광섬유 케이블망에 접속된 사용자 인구는 2000년을 기점으로 4억 명에서 30억 명 이상으로 7배 이상 증가했다.

_ p.68, 1장 지금부터 펼쳐질 완전히 새로운 세상



르네상스는 유럽에서 일어난 현상이었고 그중에서도 서유럽에 국한된 것이었다. 서유럽 내에서도 (무역에 더 유리했던) 북쪽 지역이 남쪽 지역을 점점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같은 이유로) 대서양 지역이 지중해 지역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농경 지역으로 남아 있던 동유럽에서는 억압적인 봉건제도가 갈수록 소작농을 더 짓눌렀다. 거시 경제 측면에서 아시아는 이 시기에 대체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른 대륙들은 뒤로 밀려났다. 아프리카에서는 1450년부터 1500년까지 15만 명이 노예로 팔려 갔고 그다음 세기에는 25만 명이 노예로 팔려 갔다.71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의 신항로 개척으로 기존에 존재하던 문명이 멸망했다.

_ pp.169-170, 3장 가능성으로 가득 찬 신인류, 비트루비안 맨



오늘날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변화는 시각예술에서 일어났다. (중략) 이러한 변화의 선봉에는 선원근법 (멀리 있는 물체를 작게 그려서 평면 캔버스에 원근감을 주는 기법)을 개발한 브루넬레스키와 머릿속에서 미화한 누드화 대신 실제 알몸을 눈앞에 두고 개개인의 특징을 세세하게 잡아내 누드화를 그린 얀 반 에이크(1390년 추정~1441년) 같은 예술가가 있었다. 르네상스가 정점에 이르렀을 무렵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독창성에 감탄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처럼 실사에 가까운 인물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비법은 수년간 실제 사람의 눈이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는가를 연구한 결과다. 이로써 입꼬리와 몸의 윤곽을 불분명하게 두고 화가의 붓이 아닌 그림을 보는 사람의 뇌가 세부적인 부분을 마저 채우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는 인간 해부학을 면밀히 탐구한 결과 모든 근육과 힘줄이 제자리에 놓인 뒤틀린 듯하면서도 동시에 우아한 대리석 조각상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_ pp.194-197, 4장 신 르네상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



회의론자들은 천재성은 항아리에서 공을 뽑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공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항아리에 공이 가득하지만 공을 하나씩 뽑을 때마다 항아리는 점점 바닥을 드러낸다. 그리고 언젠가는 항아리가 텅 비게 된다. 언젠가는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도 고갈된다. 그럴듯한 은유지만 틀렸다. 천재성은 오히려 연금술사의 실험실에서 혼합물을 제조하는 것과 같다. 각각의 혼합물은 ‘기존에 있는’ 아이디어나 기술이다. 처음에는 소금, 설탕, 일반적인 액체류처럼 재료가 몇 가지 없다. 그러나 이 재료들을 섞으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혼합물이 생성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비어 있다시피 했던 작업대는 각종 산과 알코올과 분말로 빼곡해진다. 새로운 혼합물을 만들기 위해 실험실에 들어설 때마다 지난번보다 가짓수가 훨씬 많아진 혼합물을 마주하게 된다. 실험해볼 혼합물 조합이 바닥날 걱정은 전혀 없다.

_ pp.284-285, 5장 인류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라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향후 20년간 전 세계적으로 전반적인 인프라에 100조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 낙후된 인프라는 부유한 국가들의 문제다. (중략) 낙후된 인프라는 가난한 국가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부유한 국가들보다 훨씬 시급하다). 개발도상국은 2020년까지 급격히 증가하는 수요를 충당하려면 현재 인프라에 지출하는 총 8,000억~ 9,000억 달러의 2배가 필요하다. (중략) 그러나 오늘날 다른 사회 체계를 위협하는 복잡성과 집중도가 인프라도 위협하고 있으며 이 위험에 대한 이해도는 ‘낮다’. 기본적인 사회 체계에 대한 모든 위험과 마찬가지로 인프라에 대한 위협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프라에 대한 위험과는 달리 우리는 아직 명확한 대응 방법을 모르며 부유해지고 발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새로운 인프라 문제 앞에서 부유층과 빈곤층 모두 똑같이 취약하다.

_ pp.330-331, 6장 무찔러야 할 거대한 적들



도널드 트럼프도 선지자이자 종말론적 예언가다. 현시대의 규범을 깨고 외견상 독창적으로 집권했으나 르네상스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트럼프는 표절자나 다름없다. 황금을 입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이후로 트럼프는 인쇄술만큼이나 오래된 대중주의자의 각본에서 대사와 지문을 도용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트럼프와 그의 방식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트럼프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공중 보건 체계와 경제와 주요 인프라와 자연 안에 위험이 축적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살면서 우리는 왜 ‘사회’ 시스템이 취약하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_ pp.354-355, 7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

구매가격 : 17,600 원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채근담

도서정보 : 저자 : 홍자성 | 2018-10-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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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서, 인생 수양서 중에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채근담』.
『채근담』에는 우리가 꿈꾸는 삶,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허울 좋은 문장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올바르고 이로운 삶인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전집에서는 현실에 살면서도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과 처세를 담았다. 속세와 더불어 살되 비루함과 천박함에 떨어지지 않게 이끌어주는 경구들이 주를 이루며, 후집에서는 산림 속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는 즐거움을 주로 담았다.
삶의 한가운데서 삶을 끌어안으라!

깨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그것은 깨진 독을 그대로 물속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는 방법 역시 삶의 밖이 아닌 삶의 한가운데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채근담』이 인생 수양서 중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자나 사상가들의 허울 좋은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진정한 고락苦樂을 아는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지극히 대중적이며 지극히 생활적인 처세서인 것이다.

맛의 진미와 사람의 진가는 담박함 속, 질리지 않음에 있다!

『채근담』에서 ‘채근’은 송나라의 학자 왕신민汪信民이 “인상능교채근즉백사가성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혀를 자극하는 맛을 통하여 음식의 맛을 찾고자 하지만 사실 맛의 진미는 담박함 속, 질리지 않음에 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알아갈수록 진국인 사람은 사실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나서지 않는, 드러내지 않는 사람 가운데 진실 된 내면을 갖춘 이가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극적인 맛으로 표현되는, 조금만 더 가까이 하면 금세 물려버리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 먹을수록 참맛이 느껴지는 담박한 음식처럼 알아갈수록 진국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삶에 정답은 없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나 『채근담』을 읽다 보면 삶의 정답은 분명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정답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구매가격 : 9,800 원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손자병법

도서정보 : 저자 : 손무 | 2018-10-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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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막론한 병법兵法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손자병법』. 그 안에는 단순히 무분별한 승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애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승리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살상은 없지만 늘 전쟁 같은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도 2,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여전히 지침서가 되는 것이다.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하였다. 그 옛날 온갖 무기를 대동한 물리적 힘이 필요했던 싸움에도 적을 아는 것이 우선이었거늘, 오늘날과 같이 소리 없고, 형체 없는 전쟁에 있어 상대에 대한 파악이 중요함을 더 말해 무엇하랴.
『손자병법』에는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 들어 있다. 그것이 2,500년의 지난 오늘날에도 『손자병법』이 읽히는 이유이다.
전쟁의 기술이 아닌, 인간에게 방점을 찍은 승리의 비기秘記

2,5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고, 동서양을 아우른 세계 리더와 명사名士들의 지침서로 읽혀온 『손자병법』. 국경을 초월한 이 전쟁의 기술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판단의 잣대로 전해지는 것은 단순한 병법兵法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에 방점을 찍은, 인간에 기초한 전쟁을 역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움직여야 세상을 움켜쥘 수 있다는 오늘날의 화두를 2,500년 전의 병법가가 먼저 깨달은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겨라!

『손자병법』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꼽으라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일 것이다. 그러나 손자가 이룬 병법의 원칙 중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백 번 싸워 백 번 다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가 아닐까? 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굳이 싸움으로 응대하지 않고서도 굴복시킬 수 있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손자병법』을 읽으면 사람을 움직이고, 싸움의 흐름을 주도하는 법이 보인다. 그리고 진정한 리더로 거듭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이끄는 싸움 안에서 휘둘리지 않는 법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9,800 원

우리 뇌는 왜 늘 삐딱할까?

도서정보 : 저자 : 하워드 J. 로스 | 2018-10-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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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의식과 행동을 교묘히 조종하는
일상의 편향성을 조심하라!

“당신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군요. 당신 생각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뿐 아니라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아요.” 대화 도중 상대방이 당신에게 위와 같이 비난 섞인 평가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맞아요. 당신 말대로 나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에요. 내 생각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아요.”라고 순순히 인정할까?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뿐만이 아니다. 아마도 성별과 연령,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어 지구 위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당신은 편향된 사람이다’라는 식의 평가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현실은 어떨까? ‘자신이 편향된 사람임’을 강하게 부인하는 사람들 대다수, 아니 그들 중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사실상 모든 사람이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주관적이고 편파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의 편향되고 지극히 주관적이며 공정하지 못한 사고를 비판했던 ‘상대방’ 또한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저자 하워드 J. 로스는 이 책 『우리 뇌는 왜 늘 삐딱할까?』를 통해 모든 인간이 지닌 주요한 요소이자 습관 중 하나인 편견・편향성의 개념과 실체를 날카롭게 파악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일상의 요소요소에 은밀히 스며들어 우리의 의식과 행동, 삶을 지배하는 편견・편향성의 복잡다단한 모습과 실태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탐구한다. 또한, 그는 편견・편향성이 지닌 때로 치명적이기까지 한 부정적인 요소는 물론이고 긍정적이며 삶의 ‘위험 탐지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내는 긍정적인 요소도 세밀히 짚고 넘어간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은밀히 감춰진 편견・편향성의 매우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것의 부정성은 줄이고 긍정성은 늘려가는 방법도 배우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1,900 원

논어

도서정보 : 공자 | 2018-10-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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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인문고전
『논어論語』, 동양 사유 체계의 기본을 만들다

동양 문화의 근간이 되는 사고는 관계론적 사고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그 사상의 정점에 둔다. 이는 유가의 핵심사상으로 여겨지는 “인仁”에서 나오는데, 인이라는 한자어는 “사람들로부터(人)”, “둘로부터(二)”라는 뜻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최고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처럼 유가의 성전聖典인 『논어』는 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가히 동양 사유 체계의 토대를 조형해낸 기본서이자 모태母胎였다. 그러므로 동양 사회의 형성과 그 사유 체계는 결코 『논어』와 분리시켜 논하기 어려우며 그 영향력도 연원淵源이 심오하고 뿌리가 깊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어록으로 내용은 공자의 말과 행동,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공자와 당시 사람들의 대화, 제자들 간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마땅히 갖춰야 할 수양은 어떤 것이며, 학문하는 자세와 가족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사회와 국가의 일에 어떠한 태도와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를 총망라하고 있다.


“이룰 수 없음을 알지만 굳이 그 길을 간다”
유가 학파의 창시자이자 동양 최고의 멘토, 공자

공자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기원전 551년, 노나라 추읍陬邑 창평향昌平鄕(오늘날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하여 태어나 이름을 구丘라 지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곧 만사를 안 것이 아니고,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여 그것을 구한 자이다[술이 7.19].”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모든 것을 알았던 성인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가 성실한 학습을 통해 지식을 얻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공자에게 정치란 무너진 ‘주례周禮’를 회복함으로써 선왕의 ‘인정仁政’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이룰 수 없다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굳이 그렇게 함(知其不可而爲之)’으로써 그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삶과 정신을 구현해 가고자 했다. 그것이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숭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현실 정치에서 거의 기용되지 못하였다. 한 마디로 유랑하며 먹을 것을 구하는 상갓집 개 신세였다. 말기에 이르러 그는 일종의 대학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이 대학이 훗날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가 사상과 학파가 되었다. 유가 사상은 수천 년에 걸쳐 중국의 고대 법률을 지배하였고,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사유방식에 융화되어 중국 특유의 법률 의식과 법률 심리를 형성시켰다.


일생에 한번은 꼭 읽어야 하는 고전 1순위
인생이라는 책장에 『논어』를 두다

왜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할까? 고전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인간의 본질을 가장 적확하게 분석하고 인간이 지향하여 나아갈 바를 가장 본원적으로 가르쳐준다. 올바름과 지향점이 철저하게 실종되고 가치관이 대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의 오늘은, 난세 중의 난세였던 춘추전국시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더구나 서양 문화의 지배적인 사상과 우리 안에 깊이 심겨져 내려온 관계중심적인 사상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가치관의 충돌까지 안겨준다. 이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사상의 토대가 되어준 『논어』를 다시 펼쳐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논어』는 모든 종류의 권장 도서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책이다. 『논어』는 지난 2,500년 동안 동양 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사람됨의 도리와 세상살이의 이치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처럼 오래 그리고 널리 읽혀온 책에겐 분명 그럴듯한 이유와 깊이가 있으리라. 인생이라는 책장에 『논어』를 두어,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깊이를 배울 때, 그것은 우리의 지혜의 보고이자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젊은이들을 경외해야 할 것이니 어찌 그들의 내일이 지금 사람들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자한 9.23]” 『논어』가 전하는 시대를 초월한 지혜를 통해, 우리의 오늘이 어제의 그들이 경외할만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왜 소준섭 박사의 『논어』인가?

『논어』는 일생에 한번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소준섭 박사는 독자들이 『논어』를 읽으면서 겪었을 법한 어려움을 염두에 두고, 고전의 풍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논어』를 들고 왔다.

소준섭 박사의 『논어』가 가진 강점:
1. 원문과 독음을 함께 수록해 독자들로 하여금 한문과 사자성어를 쉽게 공부하도록 하였다.
2. 쉽게 볼 수 없었던 공자의 제자들의 초상화와 인물 설명을 추가하여 읽는 재미와 지식을 더했다.
3. 정교한 해석이 있다.
4. 원문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각주를 풍부하게 달았다.
5. 부록으로 『논어』에 대한 자세한 해제와 공자 연보를 담아 『논어』의 가치와 공자의 삶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중국 전문가 소준섭 박사의 혁신적이고 정교한 해석으로 펴낸 『논어』는 2,000년을 넘게 전해 내려온 공자의 지혜를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해주어 격변하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길이 남을 마음의 양식이 되어줄 것이다.

구매가격 : 7,7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