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문명과 황제의 나라 고려, 고려사 고려사절요 정인지 김종서 1권

도서정보 : 정인지, 김종서(탁양현 엮음) | 2018-10-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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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夷文明(遼河文明)과 黃帝國 高麗



韓民族은, 만주대륙을 비롯한 중국대륙 東部地域에 대해, 항상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분히 生來的인 것이다. 굳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갖게 되는 鄕愁다. 본래 그곳이 우리 한민족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親中主義나 事大主義인 것으로 自己誤解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이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므로, 향수를 갖는 것과는 명료히 분별되어야 한다. 비록 朝鮮王朝 이후 중국에게 빼앗겨버렸지만, 언제라도 그곳은 收復해야 할 우리의 영토이다.
그 故土는, 漢族이 차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민족의 始祖인 東夷族(東夷族 聯盟)의 영토였다. 중국인들은 흔히 黃河文明(西紀前 2,500)이라는 신석기문명이 漢族의 시조이므로, 중국대륙이 중국인들의 영토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동이족은 遼河文明(西紀前 5,500) 시절부터, 그곳을 영토로 삼았다. 그래서 그 故土에 대한 鄕愁가 遺傳的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古朝鮮, 夫餘, 高句麗, 渤海 등에 의해, 여전히 그곳은 한민족의 영토로서 지배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 이후, 불과 6백여 년 정도, 수천 동안 지배하던 그곳을 중국에게 빼앗긴 상태이다. 그러니 현재 대한민국헌법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것은, 국제정치의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국제법적 질서로써 존속시키기 위한 不得已일 따름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그런 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이 한반도를 자기의 영토라고 선언한다고 해도, 국제법적으로 대항키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핀다면, 응당 ‘대한민국의 영토는 만주대륙과 한반도로 한다’는 것이 마땅하다.
나아가 東夷族과 百濟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지역과, 新羅와 伽耶의 영토였던 일본열도 서부지역까지도, 우리 영토임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그러한 속내를 결코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植民史觀을 지닌 親日主義者들이나, 事大主義史觀을 지닌 親中主義者들은, 어떻게든 韓民族의 疆域을 韓半島로 한정하려고 劃策한다. 더욱이 한민족이 현재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영토는, 한반도 내에서도 남한지역에 한정되며, 북한지역은 傀儡政府에 의해 불법적으로 强占된 상태이다.
북한지역의 人民들이 韓民族임은 자명하지만, 남한지역에서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를 추종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主體思想과 共産主義를 추종하는 북한의 勞動黨政府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판단에는, 우선 역사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黃河文明은, 중국의 황허강 중하류 지역에 성립한 옛 문명의 총칭이다. 문명의 성립이란, 일반적으로 國家·靑銅器·文字의 성립 등이 요소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하문명의 성립기는, 수메르문명(메소포타미아문명, 西紀前 3,500)나 인더스문명(西紀前 3,000)보다 늦은, 西紀前 2,500년 경이라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 4대 문명으로 분류되었지만, 현재는 長江文明(西紀前 3,500) 등, 다양한 문명이 중국 각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4대 문명에 황하문명만을 채택하지는 않으며, ‘黃河 및 長江文明’이라 한다.
黃河文明은, 黃河流域에서 나타난 중국의 고대 문명을 통틀어 나타내는 말로서, 揚子江文明과 함께 중국의 고대 문명을 대표한다. 新石器 시대에 나타난 仰韶文化와 竜山文化 등을 거쳐, 商과 周의 青銅器 문화로 발전하였다.
1921년, 중국의 河南省 澠池縣 仰韶에서, 신석기 시대의 대규모 취락지가 발굴된 뒤, 黄河 유역에서는 新石器와 靑銅器 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적 발견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그 뒤 학계에서는, 黄河文明을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중국 문명이 黄河流域에서 시작되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뒤, 중국의 각 지역에서, 다양한 유형의 신석기 문화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학설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73년, 浙江省 寧紹 평원의 河姆渡에서는, 벼농사와 高床式 건축물 등의 遺蹟이 발굴되어, 揚子江 유역에서 仰韶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黃河文明과는 다른 계통의 수준 높은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東北 지방의 遼河流域에서도, 黃河文明과 다른 계통의 신석기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그것이 바로 遼河文明이다. 이 요하문명은 분명하게 韓民族의 始祖에 의한 東夷文明이다. 이에 대해서, 중국은 東北工程으로써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대체로 先史時代 中國人의 생활구역은, 黃河流域 지대의 산기슭에 있는, 물이 솟아나는 지대에 많으며, 수해를 피하기 위하여, 段丘 위에 거주했다. 나일 강이나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하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흙의 퇴적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성립했으나, 이 점은 중국 농업의 성립 조건과는 다르다.
黃土는 잿빛이 나는 황색의 石英이나 長石 등의 微粒의 퇴적으로서, 빗물 속의 석회질을 모아, 땅이 비옥하고 부드러워서, 농경 생활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이 황토 지대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문명은 성립된 것이다.
長江流域에 古文明이 성립하지 않은 이유는, 高溫多濕하기 때문에 초목이 무성하여, 철기시대 이전에는 개간이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근 장강 中·下 유역의 문화 유적의 발굴 조사가 진척 중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황하문명의 하부 문화는 다음과 같다.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 西紀前 7,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화 현의 페이리강 유역에 있다. 이들은 원형·방형의 움집에 살았으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陶器나 磨製石器 등을 특색으로 한다.
‘라오관타이 문화(老官台文化, 西紀前 6,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샨시성 화 현(웨이난 시)의 老官台이다. 이들은 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암적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베이신 문화(北辛文化, 西紀前 6,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산둥성 텅저우 시의 베이신이다. 황갈색의 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츠산 문화(磁山文化, 西紀前 6,000년~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허베이성 우안 시의 츠산이다. 이들은 원형, 타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西紀前 4,800?~西紀前 2,500?)’는, 1921년 허난성 몐츠 현 양사오촌에서 발견된, 붉은 바탕에 채색 한 토기(칠무늬토기)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前期(西紀前 4,800)는, 紅陶가 주류로 대표 유적은 산시성(섬서성) 시안 시 반파, 양샤오 반파 유형 문화라고 불린다. 모계 제도로 농촌의 계층화가 보인다. 기원전 4000년경에, 녹로의 사용을 볼 수 있는 양사오 묘저구유형 문화가 나타났다.
後期(西紀前 3,500)에는, 반파 후기 유형, 시왕촌 유형, 대사공 유형, 진왕색 유형의 4종의 문화로 크게 분류되어, 빈부의 차이가 보이는 사회 분업,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허우강 문화(後岡文化, 西紀前 5,000?~西紀前 4,000?)’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안양 시 허우강이다. 베이신 문화를 계승 발전했다.
‘다원커우 문화(大漢口文化, 西紀前 4,300?~西紀前 2,400?)’는, 1959년 산둥성 닝양현 보투오 촌에서,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후에 산둥성 타이안시 타원커우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이쪽이 대표 유적이 되었다.
전기는 홍도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후기에는 흑도, 회도가 주류로 나타났다. 후기의 란곡흑도의 고병배 무늬도기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산둥 룽산문화에 계승된다.
‘룽산 문화(龍山文化, 西紀前 2,500?~西紀前 2,000?)’는, 중국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 의해서, 1930년 산둥성 장추시 룽산진에서 발견된 흑도(흑색 토기)나 회도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흑도는 얇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흑색의 토기로, 제작에는 소성 온도는 약 1,000도 이상 되는 녹로가 사용되었다.
후기에는 청동기의 주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원 룽산 문화(섬서 룽산문화, 진난 요서 룽산문화, 허난 룽산문화)와 산둥 룽산문화로 나뉜다. 중원의 룽산문화는, 양사오 후기 문화를 계승해 灰陶가 주류를 이루며, 뼈가 갈라진 특징을 가진다. 산둥의 룽산 문화를 계승하여, 黑陶가 주류를 이룬다.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西紀前 2,000?~西紀前 1,600?)’는, 1959년 허난성 옌스시 얼리터우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은 약 2km 사방에서 뻗어있고, 중심부에는 두 개의 궁전 자취가 있다. 이 유적의 사람들은, 진난 요서 룽산문화, 허난 룽산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청동 주조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上記한 문화들이, 대체로 黃河流域과 長江流域을 중심으로 형성된, 中國文明의 始原이다. 그런데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고대문명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遼河文明이다. 그것은 韓民族의 始祖인 東夷族 聯盟에 의한 東夷文明이다.
‘훙산 문화(紅山文化, 西紀前 9,000)’는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시와 랴오닝 성 조양시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큰 특징인 玉器는, 한반도 강원도 고성군 패총에서 출토된 옥 귀걸이(7천년 전)와 전남 여수 안도리(6천년 전) 등지에서 발견된 옥 장신구, 귀걸이와 유사점이 있어, 古朝鮮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연대는 西紀前 9,000년 경으로, 지금까지 赤峰, 凌源, 建平, 朝陽 등 500여 곳의 유적을 찾아내어,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北 랴오허 지류의 西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하면서, 興隆窪文化, 紅山文化, 趙寶溝文化, 新樂遺跡 등의,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culture)의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문명(civilization)으로 간주하여, 遼河文明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현재 중국은, 요하문명을 東北工程으로써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토를 빼앗기고서, 역사까지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하략-

구매가격 : 3,000 원

한나의 역사스캔들

도서정보 : 최한나 | 2018-10-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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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박한 지식, 어두운 야사까지 파헤치는 통렬한 용기
전혀 예기치 못한 한나의 ‘가슴 설레는 역사’를 만나다!

역사 전문 크리에이터 한나의 「역사스캔들」은 10년에 걸쳐 진행된 방송으로도 유명하거니와, 누적 조회 수 약 2천만 뷰를 넘긴 인기 절정의 역사 강좌이기도 하다. 한국사의 뒤안길에 널려 있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독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의미 있고 재미있는 정사와 야사 스토리만을 모아 이 한 권의 책이 태어났다. 그녀만의 10년 내공이 오롯이 담긴 이 책을 통해 우리네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쉽고 명쾌한 설명으로 정점을 찍다
삼국시대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굴곡진 우리 역사 속 이야기를 재미있고 명쾌한 설명으로 풀어나갈 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과도 의미심장하게 연결시켜준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그렇기에 읽다보면 마법처럼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역사를 읽는 통찰력까지 느끼게 되는 스스로에게 놀랄 것이다.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부터 짜릿한 야사까지
자야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
생전에 기자들이 언제 백석이 생각나는지 물었더니,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냐?”고 말했다죠.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 앞에 서니 평생 한 남자를 그리워한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애잔했습니다. (『백석과 자야, 길상사에 깃든 러브스토리』 중에서)

왕들이 즐겼던 엽기 보양식?
왜 옛날 사람들에게 동물의 고환이 인기가 많았을까요? 고환이란 것이 알다시피 정자를 만드는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을 먹으면 분명히 ‘나도 정력이 좋아질 것이다’라는, 그런 직관적인 느낌이 추가되었다고 봅니다. (『왕의 정력을 지켜라, 임금님의 보양식』 중에서)

이태원의 이름의 기원이 세 가지나 된다고?
그러면 이태원의 세 번째 이름은 무엇일까요?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하네요. 너무도 가슴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태원이 배나무 골 말고 다른 한자로도 사용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요.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이태원을 ‘異胎院’이라고 표기한 것입니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태가 다르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 이방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들이 있는 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태원 지명에 담긴 아픈 역사, 그리고 환향녀』 중에서

고려와 조선의 최고 패륜왕은?
파렴치한 폭군으로 역사의 해석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두 임금을 소개할게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네요. 조선시대 최대의 폭군으로 연산군이 있다면 고려시대 최대 패륜아는 충혜왕을 꼽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패륜의 극치를 보여주는 왕들입니다.
『희대의 패륜왕 빅매치! 충혜왕 VS 연산군』 중에서

구매가격 : 13,300 원

클래식 클라우드 - 헤밍웨이

도서정보 : 백민석 | 2018-10-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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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패배하지 않은,
영광과 비참을 모두 겪은 초인 같은 작가”

4대륙 20여 개의 나라에 흔적을 남긴 헤밍웨이.
프랑스 파리에서 스페인 팜플로나와 마드리드, 이탈리아 밀라노와 베네치아, 쿠바 아바나까지 그의 작품을 찾아 떠나는 독특한 문학여행

한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결국 사랑하게 된 작가, 헤밍웨이를 따라 걷다


- 헤밍웨이의 작품과 함께 배경지를 탐방하는 특별한 문학기행
-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이어지는 거장과 명작의 인사이트
- 한눈에 살펴보는 거장의 삶과 문학의 공간과 키워드, 결정적 장면
-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그대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이니.”
-헤밍웨이,『태양은 다시 뜬다』 중에서

“인간은 파멸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고, 『태양은 다시 뜬다』로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을 유행시킨 작가,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전과 중일전쟁 등에도 참전해 부상을 입기도 하고 훈장을 받으면서,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 경험을 작품에 생생하게 구현시킨 작가. 헤밍웨이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태양은 다시 뜬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무기여 잘 있거라』의 작가이자, 20세기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세계 온갖 장소에 족적을 남겼다. 네 명의 여성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애인들도 적지 않았던 헤밍웨이는 말년까지 바다낚시와 아프리카 사파리 사냥, 권투, 투우 같은 위험한 스포츠를 즐겼고, 40대부터는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위스키를 매일 1리터씩 마신 알코올중독자였다.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헤밍웨이의 문화적 유산을 소비하고 있다. 하드보일드 미학을 표방하는 소설과 영화, 모히토와 다이키리 같은 칵테일, 영화나 드라마에서 황소들에게 쫓겨 다니는 사내들의 모습까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때문에 쿠바에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이야기를 생략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누군가 가르친다면, 1920년대에 헤밍웨이가 이미 그렇게 했다는 사실도 함께 배우고 있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실상 직접 그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고, 그의 복잡한 삶의 세부에 관해서는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
-삶에 대한 하나의 전기,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서

이 책을 쓴 소설가 백민석은 4개국 20여 개 도시에 흔적을 남긴 헤밍웨이를 따라 프랑스 파리에서 이탈리아 밀라노와 베네치아, 스페인 팜플로나와 마드리드, 쿠바 아바나까지 네 나라, 여섯 도시에 있는 그의 행적과 작품들과 자취들을 직접 따라간다. 저자는 헤밍웨이의 시, 희곡, 단편소설, 장편소설, 에세이, 논픽션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출간된 다양한 작품들을 읽으며 분석하고, 나약한 인간이지만 힘겨운 삶 속에서도 꿋꿋이 도전하며 살아 나가는 헤밍웨이의 모습을 그의 많은 작품들과 함께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헤밍웨이의 작품들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어 삶과 문학을 따로따로 읽는 것이 오히려 오독이 될 수 있다며, 독자들이 스스로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가능한 다양한 단서들을 찾아내 이 책에 담아내고자 했다. 이 책은 저자가 헤밍웨이의 흔적을 좇아 거주지와 카페와 호텔들을 찾아다닌 문학 기행이자, 초인 같은 그의 삶에 대한 하나의 전기이자, 다양한 그의 작품들에 관한 상세한 해설서이다.


죽음을 갈망했던 했던 뛰어난 소설 미학의 작가

헤밍웨이는 평생 네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보다 더 많은 연인을 사귀었다. 그는 성공적인 작품을 낼 때마다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고 다른 대륙으로 이사를 했다. 헤밍웨이는「노인과 바다」를 16년 동안 고쳐 썼고, 『무기여 잘 있거라』의 표현을 바로잡느라 마지막 페이지를 서른아홉 번이나 고쳐 썼다고 한다. 글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밍웨이의 문학은 지금의 시각에선 어쩌면 낡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고전의 가치란 그가 실존했던 시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실제로 저자는 사방에서 헤밍웨이의 흔적들을 본다.
저자는 또한 헤밍웨이의 소설 미학으로 알려진 입말체 대화법, 빙산 이론, 하드보일드 스타일, 남성중심주의 미학의 작품들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그의 뛰어난 문학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리의 산책로, 잃어버린 원고, 카페 셀렉트, 명언들, 투우의 상징적 기원, 헤밍웨이 스타일 칵테일인 다이키리와 모히토 등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함께 그려낸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비참과 영광을 다 겪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그 영광 뒤에 숨겨진 삶

평생 사고를 서른두 번 당했고 질병은 서른여섯 번을 앓고, 비행기 사고가 두 번, 뇌진탕을 다섯 번 겪었을 뿐만 아니라 눈 질환이나 전장에서 입은 부상 등으로 수시로 재발하던 고질병이 많았던 헤밍웨이는, 젊었을 때부터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 속에서도 계속 죽음을 갈망하면서 쫓아다녔다. 그러나 일생 동안 심한 육체적 고난을 겪은 헤밍웨이에게는 세상을 떠나는 일도 그의 뜻대로 쉽사리 되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헤밍웨이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다. 3년간 헤밍웨이를 쫓아다니고 읽고 쓰면서, 비로소 그를 한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게 되었다고. 헤밍웨이는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영광과 비참을 모두 겪었다는 점에서도 초인이었다고 말한다. 헤밍웨이의 문학은 죽음이 어땠든 파멸되지도 패배하지도 않고 더더욱 풍부해지고 있다고 끝맺는 이 책은, 헤밍웨이의 삶과 문학에 관한 다채로우면서 독특한 또 하나의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어떻게 그는 그 많은 글을 쓰고, 그 많은 책을 읽고, 그 많은 사고를 당하고, 그 많은 병을 앓고, 그 많은 여행과 이사를 다니고, 그 많은 연애를 하고, 그 많은 전장을 쫓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에게 주어진 한 시간, 하루, 일 년은 내게 주어진 한 시간, 하루, 일 년과 다른 길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_「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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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가격 : 15,040 원

B급 세계사 : 알고 나면 꼭 써먹고 싶어지는 역사 잡학 사전

도서정보 : 김상훈 | 2018-10-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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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그런 거였어?”
무릎을 치면서 읽는 역사책
알쏭달쏭한 상식에 날개를 달다!

사소하고 꼬질꼬질한 것들의 역사
역사 연표에 가려진 이야기에 돋보기를 들이대다!

‘모른다’고 하기에는 뭔가 억울하고
‘안다’고 하기엔 확신이 서지 않는 애매한 상식들…
우리의 일상과 촘촘하게 엮인 역사의 실타래를 풀다!

우리나라 사람은 역사를 좋아한다. 역사책은 꾸준한 판매량을 보인다. 직장인들의 회식 자리에서 역사는 단골 메뉴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 본 것 같은 주제와 소재들이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애매하게 아는 것이 문제다.
『B급 세계사』는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하고, 안다고 하기에도 모른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며, 알아 두면 입이 근질거릴 55가지 흥미로운 역사의 장면을 담았다. 오늘날까지 우리의 일상과 함께하고 영향을 미치는 사물과 사건들이 어떻게 발생했고,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근현대와 중세, 고대를 종횡무진 오가며 ‘오늘’의 기원을 밝힌다. 가십거리는 물론 지적인 대화를 위한 도구로서도 매우 적절하다. 이 책을 통해 통사(通史)와 연표에 가려진 사소하고 꼬질꼬질한 역사가 가진 매력과 재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1,000 원

하룻 밤에 읽는 이탈리아 문학사 (개정판)

도서정보 : 유럽문학연구회 편엮 | 2018-10-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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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밤에 읽는 이탈리아 문학사 (개정판) 세계 고전문학사 이탈리아 문학 바이블(Bible) 인문학 특강 2016년 출간도서 (표지)리커버 및 개정판!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며 신라틴어 즉 로망스어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변천하여 그당시 이탈리아 각 지방의 방언이 수세기의 부화기를 거친 뒤에 문학어로서의 이탈리아어로 발전해 나왔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기까지 피렌체의 경제적 정치적 생활을 지배하게 된 칼리말라(arte di calimala 조합)의 영향으로 인문주의의 요람기가 싹트기 시작하여 교회와 봉건영주의 정권을 벗어난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 등 자유 도시국가들은 실천적 학문인 법률과 의학에 흥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등에도 관심을 가져 고유한 문학을 찾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국민문학의 형성에 있어 전통적인 라틴 문학은 물론이요 프랑스 문학의 영향도 크게 입었다. 남부 이탈리아 반도와 여러 섬의 방언이 혼연일치 되어 시칠리아어를 이루어 이탈리아어로서의 최초의 시어(詩語)를 구성했다. 즉 13세기 전반 프랑스 남쪽의 서정시가 시칠리아 섬에 있는 페데리코 2세의 궁전에 전파되어 이탈리아 문학어로 된 연애시가 각 지방으로 유행되어갔다. 1250년 페데리코 2세가 사망하자 그당시 상공업의 융성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민주적 자유도시를 이루고 있던 토스카나 지방에 문화가 재흥되어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이 문학어는 점차적으로 북상하여 토스카나 지방인 볼로냐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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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밤에 읽는 스페인·포르투칼 문학사 (개정판)

도서정보 : 유럽문학연구회 편엮 | 2018-10-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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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밤에 읽는 스페인·포르투칼 문학사 (개정판) 세계 고전문학사 스페인.포르투칼 문학 바이블(Bible) 인문학 특강 2016년 출간도서 (표지)리커버 및 개정판! * 스페인(에스파냐) 문학 에스파냐 문학의 기원은 카스틸리아 왕국을 거점으로 하여 12세기부터 시작된다. 8세기초에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모로족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800년이나 소위 재정복전(再征服戰)을 벌였는데 이동안에 카스틸리아 왕국이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국토통일의 성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포르투칼 문학 포르투갈 문학은 그 기원이 프로방스로부터 시작된다. 우선 서사시로 시작되는 최고(最古)의 것은 1189년의 것으로 음유시인(吟遊詩人) 파이오 소아레스 데 타베이로스의 서정적 연애시이다. 이때에 디니스 왕(王)을 비롯하여 많은 음유시인들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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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밤에 읽는 러시아 문학사 (개정판)

도서정보 : 유럽문학연구회 편엮 | 2018-10-2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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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밤에 읽는 러시아 문학사 (개정판) 세계 고전문학사 러시아 문학 바이블(Bible) 인문학 특강 2016년 출간도서 (표지)리커버 및 개정판! 러시아는 9세기 중반에 동슬라브족이 유럽에 세운 국가에서 비롯하여 수백 년 동안 차르(황제)가 러시아를 다스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차르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커져갔고 1917년에 혁명이 일어나 제정을 무너뜨렸다. 이듬해 러시아는 러시아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22년에는 다른 세 공화국과 함께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을 탄생시켜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소련)에서 가장 크고 힘이 막강한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와 10개의 공화국은 새로 느슨한 형태의 연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편의상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러시아 문학과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부터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의 소련문학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매가격 : 11,000 원

나의 외국어 학습기

도서정보 : 김태완 | 2018-10-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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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양학자 김태완의
‘학문의 길에서 만난 6개국 언어 습득기’

이 책은 경상도 산골에서 자라나 외국어 학습의 방법론이 전무했던 시절을 거쳐 온 한 50대 학자가 어떻게 초급의 한계를 뛰어넘어 깊이 있는 인문 지식까지 외국어로 섭렵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한 에세이이다. 저자 김태완은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 앙리 마스페로(Henri Maspero)의 『도교와 중국 종교(Le Taoisme et les Religions Chinoises)』(공역), 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의 『고대 중국의 축제와 가요(Fetes et Chansons anciennes de la Chine)』 등 프랑스어로 쓰인 동양학 관련 주요 도서를 번역했고, 중국어로 쓰인 수징난(束景南)의 『주자평전(朱子大傳)』을 번역하여 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봉화 산촌 출신인 저자는 산골에 파견된 평화봉사단, 말하자면 원어민을 통해 처음 영어를 접했지만 체계 없는 교육으로 중고등학교 때까지 영어에 관한 한 백지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엔 영어 전공자가 아닌 독일어 교사가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빈번해 학습의 연속성이 이어지지 않았고,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외국어의 매력을 알기도 전에 영어와 담을 쌓는다. 1부 [나의 외국어 학습 잔혹사]에서 저자는 문법 공부마저 여의치 않았던 시절을 보내온 경험을 서술하면서 지금의 4, 50대가 어떻게 영어를 접하고 배웠는지, 또 한국 영어교육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파노라마 보여주듯 생생하게 증언한다.
대학 때까지 영어 학습에 관해서는 임기응변으로 모면해왔던 저자가 외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계기는 바로 학문에 대한 관심이다. 학문 연구에는 언어가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며, 특히 동양학을 공부하려면 연구 수준이 높은 유럽, 미국, 일본의 언어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석·박사과정을 거치면서 고전 한문, 불어, 일본어, 중국어를 공부했고 여세를 몰아 독일어, 영어를 학습하게 된다. 외국어 문외한의 심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자는 각 외국어의 구조를 깨치는 순간부터 심화 학습 과정, 모든 외국어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공부법을 상세히 기술하는 등 외국어 학습자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부록에는 한문, 중국어, 일본어 번역의 실제를 수록해 각 언어의 특성이 어떻게 한국어에 반영되고 번역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고전 한문 예문은 『맹자』, 주돈이의 「애련설」, 소식의 「적벽부」,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은 편지가 제시되어 있고, 중국어 예문은 김용의 「소오강호」, 일본어 예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실려 있다.

2. 조선 시대의 역관 제도, 외국어 학습 교재, 어학연수,
언어 천재 신숙주, 홍대용의 실전 중국어 등등
전통시대 외국어 학습 풍경과 한자 문화권의
독특한 교류 방식까지 살펴보는 흥미진진한 인문 교양서

저자는 동양문화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다. 이런 풍부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전통시대 외국어 학습의 풍경과 역사 인물들에 얽힌 흥미진진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외국어를 배우는 자세와 학습 목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조선 시대에는 외교와 교류를 위해 한학(漢學), 왜학(倭學), 몽학(蒙學) 등 역관 제도를 두고 매우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했다고 한다. 사행(使行: 사신으로 외국에 다녀오는 일) 때는 질문종사관을 배속시켜 통역에 난해한 어구를 질문하여 뒷날 역학서를 개편하는 데 참고하게 했고, 사역원 산하 통역사 양성 기관인 우어청에서 돌아가면서 교육생 한 사람을 차출하여 어학연수를 보내 통역 실무를 익히게 했다.
외국어 학습 교재는 있었을까?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고려 말부터 쓰인 것으로 보이는 『노걸대(老乞大)』(초급) 『박통사(朴通事)』(중급) 같은 교재에 언문을 붙여서 중국어 학습에 활용했는데, 지금 봐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현장성, 실용성, 활용도, 응용도 같은 외국어 학습에 필요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조선 지식인들은 어떤 목적으로 외국어를 배웠을까? 조선 초기 지식인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이두와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에 통달했고 심지어 인도와 아랍의 문자까지 터득한 언어 천재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외국어 실력과 국제 감각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 외교를 주도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조선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1765년 청의 수도 연경(북경)에 다녀온 북학파의 기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사례는 외국어 공부의 방법과 목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대용이 연행(燕行)의 전말을 기록한 여행기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과 문집 『담헌서(湛軒書)』에는 그가 중국 문물을 보고 배우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였는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과외교사를 두어 중국어를 배우고 연행 길에 올랐으나 현지인을 만나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고군분투한 에피소드는 본국에서 교재 위주로 독학하거나 학원에서 수강한 사람이 외국에 처음 나가서 마주하는 언어의 절벽을 보여준다. 또 차츰 중국어 말하기에 능숙하게 되면서 엄성, 반정균 등의 중국 인문 지식인과 교류하게 되고,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평생 영향을 주고받았던 일은, 현지 지식인과 지적으로 소통하고 해당 나라의 문화와 문물을 깊이 있게 접하기 위해 당시 문인들이 외국어를 공부했음을 말해준다. 저자 또한 ‘교양을 갖춘 격조 높은 교류’를 최종 목표로 삼고 외국어 공부를 해왔으며, 그런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집필했음을 밝힌다.

3. 성인 학습자에게 필요한 외국어 공부법은 따로 있다!
언어를 유형별로 파악하고 구조를 익힌 후
영어 등 인도-유럽어를 공부하는 특별한 비법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외국어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학습을 시작한 저자가 6개국 언어를 습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나이가 들어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해당 언어의 구조를 익히는 것이므로, 공부하려는 언어의 유형별 특성을 먼저 파악하라고 말한다.
지구상에 있는 수천 종의 언어를 유형별로 나누면 크게 고립어, 포합어, 교착어, 굴절어이다. 이중 언어학적 관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형태론적으로 특이한 포합어를 제외하고 세 가지 유형을 살펴보자.

1) 고립어는 단어의 형태가 변하지 않으며 접사가 없고, 단어가 문장 안에 놓이는 순서나 다른 언어와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문법적 기능이 결정된다. 고전 한문과 현대 중국어가 그 예다. 중국어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我愛?’다. 이 문장을 도치시켜서 ‘?愛我’라고 하면 ‘너는 나를 사랑한다’는 뜻으로서 단순히 어순을 바꿨을 뿐인데 주어와 목적어가 반대로 된다.
2) 교착어는 어근에 접사가 결합하여 단어가 형성되며 문장 속에서 문법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첨가어라고도 한다. 우랄-알타이어에 속하는 언어가 대체로 교착어이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그 예다. 일본어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私はあなたを愛する’이다. 중국어와 달리 어순을 바꾸어도 뉘앙스는 조금 달라질 수 있지만 뜻은 변함이 없다
3) 굴절어는 관사, 명사, 형용사, 동사의 어미가 성과 수와 격에 따라 굴절하면서 문법적 기능을 나타낸다. 영어, 독일어, 불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등이 그 예다. (다만 현대 영어는 굴절어의 특성을 상당히 잃어버렸다.) 문장 성분들 사이에 일치가 무엇보다 중요한 굴절어인 독일어는 명사, 형용사, 관사 어미가 성, 수, 격에 따라 굴절하며, 동사도 수와 인칭에 따라 굴절한다. 독일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Ich liebe dich’이다. 동사원형 lieben은 인칭 대명사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굴절한다. Ich liebe(나는 사랑한다.) Du liebst(너는 사랑한다). Sie liebt(그녀는 사랑한다).

이 밖에도 저자는 굴절어의 특징을 가진 영어의 구조, 인도-유럽어를 공부할 때 중요한 서법과 시제, 한국어와 인도-유럽어의 차이, 한국어 운문과 한문·유럽의 운문에서 운(韻, rhyme)과 율(律, rhythm)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 등을 설명하면서 인도-유럽어에 효과적으로, 또 깊이 있게 접근하는 지름길을 소개한다.

4. 동아시아의 라틴어인 고전 한문에 입문하는 길
한문과 따로 또 같이 배우는 중국어와 일본어 학습법

15세기 조선 지식인 최보(崔溥, 1454~1504)는 조선 성종 때(1487)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상을 당해 급히 고향 나주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땅에 표착한다. 중국 땅에서 그의 일행은 해적들에게 습격당하기도 하고 왜구로 오인을 받아 곤경을 겪었지만 최보가 가까스로 조선 관인(官人)임을 입증하여 혐의를 벗어난다. 최보가 쓴 세계 3대의 중국 여행기인 『표해록(漂海錄)』은 15세기 중국 강남 지역의 사회생활과 인문지리의 실상을 전해주는 생생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조선과 중국 지식인 사이에 우연히 이루어진 문화 교류의 수준과 양식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최보는 중국어를 몰랐다. 그가 중국 절강성에 표착하여 북경을 거쳐 의주로 돌아오기까지 중국인과 의사소통을 한 주된 수단은 바로 필담(筆談)이었다.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는 나름의 고유한 문화를 함께 발전시켜왔는데, 그 동질성을 지켜온 성채가 바로 한문이다. 전근대의 한국, 중국, 일본, 월남(베트남)이 공유한 한문은 서유럽의 라틴어와 같은 역할을 했다. 동아시아 식자층은 한자를 문자로 썼으며 한문 문어체로 문자 생활을 영위하였다. 공유하는 문자가 있어 음성언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이라도 매우 효과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한자 문명권의 언어인 한문, 중국어, 일본어를 따로 또 같이 공부하는 방법을 상세히 소개하고 실제 번역의 예를 들어 각 언어의 특성을 파악하게 했다.

1) 전근대 동아시아의 역사, 철학, 문학을 현대어 번역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음미하려면 고전 한문을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한자를 익히는 것과 한문을 배우는 일은 범주가 다르다. 저자는 한문의 언어 갈래, 문법보다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방법이 효과적인 까닭, 고전 한문의 다양한 문체와 수사법, 독특한 행문(行文) 습관, 고유명사를 처리하는 까다로운 법식 등을 설명하면서 먼저 한문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2) 중국어도 한자로 표기하지만 한문이 아니다. 한문은 고전 문언문이고 중국어는 현재 중국 사람들이 읽고 쓰고 말하고 들으며 언어생활을 영위하는 중국의 언어이다. 중국어도 중국어 나름의 공부법이 따로 있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어의 언어 갈래부터 시작하여 중국어 학습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보어와 다양한 품사에 대해 살펴보면서 구조와 특징을 익히게 한다.
3) 일본어가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에 속하기 때문일까. 한국인들은 일본어에 대해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입문하기 쉬워도 나오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일본어 학습자는 한자 읽기의 고충과 관용 표현의 벽을 만난다. 저자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유사점과 차이점, 일본어의 다양한 서법, 격조사 の를 즐겨 사용하는 독특한 언어 습관을 설명하면서 일본어의 특징에 섬세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중국어와 일본어 학습에 한문 학습이 꼭 선행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세 언어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문 고전에서 유래한 어휘와 문장이 현대 중국의 고급 언어에서 빈번하게 인용되니, 고급 중국어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번체자를 먼저 익히라고 조언한다. 또 중국을 통해 직접 혹은 한반도를 경유하여 문화를 발전시켜온 일본도 한문, 한자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고급 일본어를 구사하려면 고전 한문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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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 정치철학, 율곡 이이 에드먼드 버크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1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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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俗主義的 事大主義’와 ‘現實主義的 資本主義’



‘율곡 이이’는 朝鮮을 대표하는 保守主義者다. 그리고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을 대표하는 보수주의자다. ‘율곡 이이(1537~1584)’와 ‘에드먼드 버크(1729~1797)’ 두 사람 사이에는, 2백 여 년에 가까운 시공간적 間隙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공간적 간극을 넘어서서, 두 사람은 동일한 보수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保守主義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두 가지 보수주의의 차이는, ‘從俗主義的 事大主義’와 ‘現實主義的 資本主義’로서 분별될 수 있다. 이에, 두 가지 보수주의의 차이에 主眼하여 論述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보수주의는, 하나의 參照的 指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保守主義는 當代의 時代精神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그 시대에 보존하여 지킬만한 것을 주장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정신에 대항하여 등장하는 精神性은, 흔히 進步主義로서 지칭된다. 그래서 진보주의는 시대의 급격한 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역사 속 시대정신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 大別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保守主義(conservatism)’는, 흔히 政變이나 革命 등의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현체제를 유지하려는 사상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대체로 進步主義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인식된다. 주로 이데올로기적인 근대 서양문명의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를 가리키는데, 사회심리학적 의미에서 인간의 어떤 본래적인 심리적 태도 또는 性向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굳이 근대에만 한정하여 사용하는 개념인 것은 아니다.
다만, 兩者는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래서 ‘H. 세실’은, 인간존재의 특정적 심리태도를 의미하는 보수주의를 ‘자연적 보수주의’라 하여, 그것을 小文字로 썼고, 특정의 사상적 조류를 의미할 때는 ‘정치적 보수주의’라 하며 大文字를 사용하였다.
‘K. 만하임’도 심리적 보수주의를 傳統主義라 하였으며, 사상적인 것을 保守主義라 불렀다. 실제로 ‘정치적 進步主義者’가 사생활 영역에서는 보수적 행동을 취한다거나, ‘정치적 保守主義者’가 사생활 영역에서는 진보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즉, 어떤 개인의 심리적 태도는 반드시 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현대 대한민국의 경우, 대체로 진보주의자로 분별된다면,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에 대한 지향을 지니며, 親中․親北하며 反美․反日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자기의 자녀들은 미국으로 유학보낸다거나, 강남의 좋은 학군으로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분명한 ‘정치적 진보주의자’이지만, 사생활에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아주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한 엘리트 계층으로서, 어쨌거나 ‘정치적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堅持할 것 같은 상황인데, ‘江南左派’의 경우처럼 진보주의자로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정치적 태도와 실생활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보수주의는,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하여, ‘지금 이대로 영원히’ 하는 식으로, 자기가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점에서, 변화를 좋아하고 낡은 것을 버리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와 대립된다. 즉, 한쪽은 現象을 고집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쪽은 현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심리적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개인이 많든 적든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서, 대개 기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행동형식은 미리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고장에 철도가 신설된다고 할 때, 그 고장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나타낼 심리적 반응은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지만, 상호 간의 작용에 의하여, 사회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심리적 태도는, 여러 濃度로 존재하고 있어, 反動主義와 急進主義의 양극 사이에, 保守主義와 進步主義가 스펙트럼의 빛과 같이, 제각각의 뉘앙스를 가지고서 끼여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反動主義(極右)’와 ‘急進主義(極左)’는, 모두 現象의 과격한 변화를 바라는 심리적 태도이지만, 전자는 ‘뒤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후자는 ‘앞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바란다는 차이가 있다.
보수주의가 반동주의에 접근하는 것은, 미지의 것보다는 익숙한 것으로 향하려는 ‘뒤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택하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심리적 보수주의가 현상을 고집하려는 것은 안정을 바라기 때문이며, 그것은 ‘A.B. 울프’가 말하였듯이, 安全第一主義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예컨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것과 같다.
본래 인간존재는, 관례에 따라서 행동하기 위하여 안전을 구하려 하고, 그 안전을 그의 생활환경의 현상유지에서 찾아내는 성향이 강하다. 따라서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는, 합리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감상적인 애착 또는 현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가치감정에 동기가 있고, 그 감정은 습관에 의하여 형성되며, 공포심에 의하여 자극되는 것이다. 이 습관과 공포심은, 보수주의의 두 가지 심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생활환경이, 그를 만족시키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심리적 태도로서의 小數主義는, 인간의 생활환경에 대한 調整과 適應의 과정에서 생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특정적인 교육이나 연령의 영향에 따라서 강화된다. 특히 老齡이 육체의 쇠약에 따라 非融通性이나 幻滅感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초래하여, 보수주의적 태도를 강화한다는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근대 유럽的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로서의 보수주의는, 앞에서 말한 심리적 태도를 기반으로 하여 생겼다. 즉, 역사의 어떤 단계에서, 각자가 가진 보수주의적인 심리적 태도가 표면에 떠올라, 특정한 사상적 조류를 凝集시키는 중심이 되어,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생긴 것이다.
각자의 보수주의적 심리태도는, 각각 특정된 개인적 또는 계급적 이익과 무관하게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生存의 利得’이 동기가 되어 부상한다. 그것은 ‘所有의 안전을 바라는 欲望’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財産權과 市場이 작동하게 된다.
또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생긴 다른 이유는, 인간의 또 하나의 심리적 태도인 進步主義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진보주의’의 성립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즉, 진보주의라는 사상적 조류가 성립되자,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각자의 심리적 태도가 능동적인 것이 되어, 의식적으로 그런 사상적 조류에 반대하는 운동으로서 보수주의가 성립된 것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각각 ‘秩序의 黨’과 ‘進步의 黨’으로 나뉘어 대립되나, 그 관계는 역사적 제반조건에 따라, 제각기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는, 근대 시민계급의 대두와 사회구조의 변화를 전제로 하여, 1789년 프랑스혁명 발전과정에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市民階級이 당시의 進步主義인 自由主義 또는 民主主義의 역군으로서 등장한 데 대하여, 貴族階級이 保守主義라는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상적 조류를 낳았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조선왕조의 士大夫 ‘율곡 이이’가 生來的 보수주의자 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히 ‘율곡 이이’는 무언가를 保守하려는 세력이었으며, 진보적으로 변화하려는 세력이 아니었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귀족계급은 그들의 사회적 토대인 토지소유의 영향 하에, 이미 심리적 태도에 있어서 보수주의의 寶庫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 토대에 동요를 느끼게 되자, 능동적인 공포심에 쫓겨서, 의식적으로 시민계급의 진보주의에 대하여 보수주의를 취하였다.
그러나 보수주의가 ‘1789 이념’에 비하여, 하나의 사상적 조류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초의 王政復古時代이다. 그 무렵, 보수주의라는 말이 비로소 정치적 용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즉, 1818년 王黨主義運動의 기관지가 ‘Le Conservateur’라고 명명되면서부터, 보수주의라는 말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곧 유럽 전체에 퍼졌고, 그것이 ‘1789 이념’에 대항하는 反革命的 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영국에서 ‘토리당’을 ‘보수당’이라 칭하게 된 것은, 다소 세월이 흐른, 1835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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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근대 자유민주 사상가들,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10-1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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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과 일본
그리고 보수와 진보



어차피 인생이란, 제 몫의 분량을 責務할 따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허망한 욕심일뿐, 제 몫 이상도 이하도 不得已다. 그러니 여느 노랫말처럼, ‘잘난 놈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놈은 못난대로 사는’ 인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지 보다 잘 살고 싶은 것은 人之常情이다.
이는, 運命論이나 宿命論 따위를 거론코자 함이 아니다. 天地自然의 원리가 본래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富와 名譽와 權力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지구별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애당초 모든 인간존재들이 평등하게 누릴만한 여건이 不備하다.
그러한 바는, 인구가 稀少할 때나, 산업화 이후 急增한 때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존재가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차피 稀貴해 질 수밖에 없으며, 희귀하므로 그 가치는 점점 치솟게 되고, 희귀함을 향유할 수 있음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있음이다.
다만, 제 역량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과거의 신분제 사회에 비한다면, 현대사회는 적어도 법률적으로도 공평한 기회쯤은 보장되어 있다. 물론 ‘기회균등’이라는 개념도, ‘세계평화’나 ‘만민평등’이라는 개념만큼 추상적이며 이상적인 개념일 따름이다. 당최 실현될 수 없는 인식적 개념에 불과한 탓이다.
현실세계에서 만인에게 결코 기회는 균등할 수 없으며, 세계는 평화로울 수 없으며, 만민은 평등할 수 없음은, 역사로써 검증되며, 굳이 역사가 아니더라도, 천지자연의 자연스런 원리인 탓에, 살다보면 저절로 체득케 된다.
이러한 不均等, 不平和, 不平等의 세계일지라도, 부득이하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토대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토대가 흔들리게 되면, 애당초 생존이 불투명하므로, 이런저런 것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게 되어버린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존의 토대는 國家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국가를 지니지 못한 탓에, 수천 년 동안 참으로 가혹한 역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를 침탈당한, 예컨대 ‘티베트’의 경우, 참으로 가혹한 ‘이스라엘’의 과거를 살아내고 있다.
우리 민족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국가를 빼앗겼던 기억이 있다. 국가를 빼앗긴 국민에게는, 이제 개인도 가정도 가족도 가문도 고향도, 죄다 박탈되어버린다. 그러다보니 窮餘之策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서, 他國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의 떠돎이란, 그야말로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지칭하던 것처럼, ‘亡國奴’의 신세일 따름이다. ‘망국노’란 ‘國家를 잃어버린 노예’라는 의미다. 이는, 日帝에게 나라를 빼앗기고서, 중국 땅에 빌붙어 사는 조선인들을, 중국인들이 卑下하며 부르던 명칭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만주는 물론이며, 중국대륙의 대부분은, 본래 우리 韓民族(東夷族 聯合)의 영토였다. 현대 중국인의 실질적인 민족적 祖上이라는 漢族의 漢나라의 영토는, 東北工程이나 上古史 문제와 얽혀 異說이 紛紛하지만, 대체로 ‘베이징’ 이남의 지역인 것으로 比定될 따름이다.

여하튼 중국인들은, 중국대륙이 마치 漢族의 땅인 양 착각하며 억지부리지만, 漢族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것은 漢나라, 宋나라, 明나라 쯤이며, 그 영역도 현재의 중국 영토에 비해 지극히 협소했다. 그리고 그 외의 왕조들은 죄다 異民族의 국가체제였다.
현대의 중국이, 漢族의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니게 된 것은, 2차례 세계대전 과정에서, 소수민족들을 죄다 强合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재의 중국은, 漢族의 국가라기보다는 ‘다민족 연합국’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漢族의 민족적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여러 모로 ‘중화민국(대만)’이 좀 더 漢族다울 수 있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늘 ‘中國 分裂’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지니는 것이다. 여러 소수민족들이 내색하지 못할망정, 독립하여 자기 민족의 국가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언제 어떻게 폭발하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중국 내 ‘조선족’이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부득이하여 중국인이나 고려인 신분으로 살고 있지만, 어쨌거나 韓民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라는 토대야말로, 現在的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임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가, ‘국가이익(國益) 우선’이라는 점도,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국익을 지켜내지 못하면, 국가도 지킬 수 없음은, 역사로써 검증되는 탓이다.

우리 민족은 古朝鮮, 高句麗, 渤海, 統一新羅, 高麗 시대 이후에는, 朝鮮王朝로부터 현재에 이르도록 强大國을 事大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실정이다. 스스로 강대국일 수 없으면, 어쨌거나 생존을 위해 강대국의 決定을 수용해야만 한다. 弱肉强食의 국제정치의 場에서, 戰爭主義와 事大主義 이외에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는 거의 없는 탓이다.
‘事大主義 思惟方式’은 한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慣性을 정지시키거나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예컨대, 韓中日 3국의 역사로써, 여실히 검증된다. 3국 관계의 ‘사대주의 프레임’은, 아주 긴 역사의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탓에, 어떤 激變에 의해서도 쉬이 변화되기 어렵다.
여기서 frame 개념은 ‘認識 틀’이라는 뜻으로서, 여러 의미가 있다. 미국의 미디어 연구자인 ‘토드 기틀린’은, 프레임 개념을 원용하여, 매스미디어의 보도가 ‘프레임’에 갇혀 있으며, 바로 그러한 ‘프레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기틀린’은 ‘프레임’을, “상징 조작자가 상례적으로 언어적 또는 영상적 담화를 조직하는 근거로 삼는 인식, 해석, 제시, 선별, 강조, 배제 등의 지속적인 유형”이라고 정의했다.
그간 프레임은 학계에서만 사용됐으나, 2006년 4월,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가, 국내에 번역·출간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저널리즘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레이코프’는,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코끼리를 떠올릴 것이다”며, “상대편의 프레임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고 주장했다.
‘레이코프’는,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이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흔한 속설이다. 만약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 모두를, 대중의 눈앞에 보여준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된 희망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다. 한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
‘레이코프’는, 유권자들의 ‘票心(voting intentions)’을 가르는 것은, 진실이나 훌륭한 대안이나 정책의 상세 목록들이 아니라, 가치와 인간적 유대, 진정성, 신뢰,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프레임은 ‘이데올로기 이미지’와 유사하다. 그래서 한번 프레임이 결정되고 작동하기 시작하면, 당최 그것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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