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향기가 보여요

도서정보 : 문제일 | 2019-01-2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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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박사 문제일 교수가 안내하는
기분?학습?관계?아픔에 관한 뇌 이야기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할까? 일상의 사소한 궁금증이 흥미로운 연구가 된다!
뇌과학자가 들려주는 향기로운 삶의 통찰

뇌공학자 정재승 교수 추천!
“DGIST 문제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탁월한 후각 연구 전문가다. 시각이나 학습, 기억 등에 비해 후각은 아직 뇌과학적 접근이 부족한 형편이지만, 냄새를 인지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의 일상을 가장 강력하게 지탱해 주는 감각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후각기관에서 출발해 뇌과학 전반의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하는가’에 대해 친절한 해답을 전한다. 뇌과학자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조언도 빼놓지 않는 그의 책에는 독자에 대한 애정이 깊고도 그윽하다. 뇌과학에 입문하고 싶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이 책에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향기를 만끽해 보시길 바란다.

◎ 도서 소개
뇌-후각 전문가 문제일 교수가 들려주는 친근한 뇌과학
어렵게만 느껴지던 뇌과학을 일상 속 에피소드로 만난다!

평균 길이 16.7cm, 폭 14cm, 높이 9.3cm, 무게는 1kg 남짓한 뇌. 이 작은 기관은 정말 많은 일을 한다. 뇌과학은 뇌를 포함한 신경계를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미지의 영역이었던 마음과 관련된 여러 문제와 그 메커니즘이 뇌과학과 함께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뇌와 뇌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나는 향기가 보여요』의 저자인 ‘향기박사’ 문제일 교수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인지과학전공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우리나라 몇 안 되는 탁월한 후각 연구 전문가로서 뇌-후각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2017년에는 치매를 일으키는 단백질이 후각상피조직에서도 생성되고, 이 단백질이 직접 후각신경세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후각능력 손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후각은 감정과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감각이다. 게다가 후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메뉴가 무엇일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하고, 위험한 곳을 냄새로 미리 알고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희미해진 기억을 선명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백화점에서 ‘지름신’을 부르기도 한다. 또, 연어가 고향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되어 주고, 미각과 연결돼 맛을 느끼게도 해 준다. 그뿐만 아니다.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냄새로 나에게 잘 맞는 상대를 알 수도 있다. 어떻게 후각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까?
후각의 놀라운 비밀은 뇌와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코가 어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흘러나온 화학물질을 감지하는 것이다. 콧속의 신경세포는 이 화학물질을 전기신호로 바꿔 뇌에 전달하고 뇌는 코에 어떤 향기가 감지된 것인지 알아낸다. 후각신경은 시각이나 청각과는 다르게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관장하는 변연계Limbic System를 통해 처리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후각을 자극하는 환경에서는 기억과 감정이 함께 강하게 연계되어 감정적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고 후각과 연관된 기억은 다른 기억보다 오래 지속된다. 또, 연구에 따르면 혀·뇌·심장·폐·간·신장·대장·소장·피부·정자 및 정소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각수용체가 발현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만큼 후각이 일상적인 판단과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문제일 교수는 뇌과학 지식들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꾸준히 글을 써왔다. 『나는 향기가 보여요』는 문제일 교수가 뇌와 후각의 관계에서 비롯된 뇌 이야기뿐만 아니라, 뇌과학 전반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일상의 에피소드가 잘 어우러지게 쓴 60편의 글을 엮은 것이다. 특히 각 챕터의 끝에 뇌-후각 연구가 마케팅, 교육, 예술, 신경의학 등 다른 연구 분야에 어떻게 접목해 있는지를 소개하여,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뇌-후각 연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고향의 기억도 뇌 때문이다?!
느끼고, 배우고, 함께하고, 늙어 가는 뇌에 관한 60가지 이야기

이 책은 크게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생활 속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뇌의 관계,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인간관계를 더 잘 맺기 위해 참고할 만한 뇌과학 지식들, 치매·우울증·틱장애·등 뇌신경과 관련된 질병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뇌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분은 뇌에서 올까, 마음에서 올까? 우리는 가끔 자기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낀다. 남의 불행을 볼 때 고소하다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의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배가 살살 아프기도 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나온 이유는 뇌와 장의 관계 때문이다. 뇌는 면역기관과 공조해 장에 신호를 보내 장 속의 미생물들이 몸에 좋은 활동을 하도록 도와주고 장 속 미생물은 음식물을 소화시켜 뇌에 중요한 신경전달물질 혹은 대사체를 만들어 서로 소통한다. 뇌과학에 의하면 장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머리를 아프지 않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장에서는 일상 속에서 궁금했던 기분과 마음의 문제가 뇌와 어떤 작용을 주고받는지를 페퍼민트처럼 시원하게 알려 준다.
또, 뇌는 정보를 기억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기관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일과 밀접하다. 학습에 관한 뇌과학적 지식을 더 효율적으로 익히는 데 도움을 준다. 사춘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뇌가 어떻게 발달하는지를 알면 학습의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아이 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도움이 될 정보가 많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평소에는 잘 돌아가던 머리가 멈춰 버리고, 성인이 되어 새롭게 학습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긴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악기를 새로 배울 때도 자동적 처리 과정과 의식적 처리 과정 간의 갈등을 경험하고, 어른의 뇌는 악기를 배우는 와중에도 계획을 세우고 행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복잡한 의식적 처리 과정으로 바쁘기 때문에 배울 때 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스투르프 효과를 참고할 수 있다. 이외에도 상쾌한 허브향이 나는 2장에서는 우리가 뭔가를 배울 때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다.
3장 제라늄처럼 풋풋한 관계의 뇌과학에서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오해들과 뇌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흔히 남자와 여자의 뇌가 다르다고 말한다. 흔히 남성은 공간지각 능력이 뛰어나고 여성은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식이다. 실제 남성과 여성의 뇌의 차이는 무엇일까? 연구에 의하면 여자의 뇌는 대뇌의 좌우 반구 간 연결, 소뇌의 좌우 반구 간 내부 연결이 발달해 있고, 남자의 경우 대뇌의 좌우 반구 간 내부 연결과 소뇌의 좌우 반구 간 연결이 발달되어 있다. 이는 곧 집중력을 요하는 일에 여성이 더 나은 성취를, 공간 지각과 운동에서 남성이 더 나은 성취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4장 은은한 라벤더 색이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아픔의 뇌과학에서는 여러 질병을 이해하고 치유하기 위한 뇌과학 이야기를 들려준다. 알츠하이머병, 우울증,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ADH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약물 중독, 두통, 불면증 등 많은 질병이 뇌와 관련이 있다. 뇌과학 연구를 통해 뇌를 잘 사용하는 것으로도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거나 호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치매는 오늘날 뇌과학 연구의 핵심 분야다. 이 장에서 문제일 교수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정확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비만, 우울증, 치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뇌와 건강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때 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뇌과학에 관심 있는 남녀노소를 위한 뇌과학 디딤돌

왜 사람들이 뇌과학에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뇌과학에 대한 관심은 나를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관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뇌과학의 좋은 점은 자기도 몰랐던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인식을 바꿔 준다는 점이다. 개인을 보살피고 건강을 유지하면 되는 것일 줄 알았던 기존의 상식에서, 뇌과학 연구를 통해 인간의 뇌는 집단생활을 통해 사회적으로 진화해 왔다는 과학적 사실이 힘을 얻게 되면서 주변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뇌 건강에도 이롭다는 인식으로 발전했다. 또한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거, 사무실, 도시 등 주변 환경도 새롭게 알게 된 뇌과학적 연구를 통해 적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정비되면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변화되어 왔다.
감정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배워서 익히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나의 몸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보살피는 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대부분의 일들과 관련이 있다.『나는 향기가 보여요』는 이러한 일상에서 맛보는 달콤 쌉쌀한 경험들에 대해 뇌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뇌과학에 관심을 막 갖기 시작한 독자들에게는 뇌와 과학에 느꼈던 거리감을 훨씬 좁히는 기회를, 뇌과학자를 꿈꾸는 학생과 부모에게는 뇌과학이 다루는 다양한 연구 주제를 한번 엿볼 수 있는 디딤돌 같은 책으로, 남녀노소 다양한 층위의 독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과학 책이다.

구매가격 : 12,000 원

요하문명과 고조선, 중국역사는 한족역사가 아니다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1-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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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中國歷史는 漢族歷史가 아니다



1. 세계 覇權戰爭과 歷史

21세기에 동아시아는 새로운 변화의 岐路에 서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霸權戰爭이 본격화되고 있다.
역사적 사례를 살필 때, 우리나라는 어떠한 상황에도 적응해야 하며, 우리나라의 생존을 모색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더욱이 韓半島는 地政學的으로 지극히 중요한 위치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北韓의 核武器나 南北統一 등의 문제를 첨예한 관심을 갖고서 銳意注視해야만 한다.
그러한 문제들의 向方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列强들이 뒤엉킨 ‘Great Game’의 국제정치에 의해 左之右之될 수 있기 때문이다.
地政學的 관점에서 판단할 때, 人類史의 전쟁은 대부분 인접한 나라 사이에서 발생한다.
우리 역사를 살피더라도, 대부분의 전쟁은 중국대륙이나 북방민족과의 전쟁이었고, 바다 건너 일본과의 전쟁은 몇 차례 되지 않는다. 그 이외 국가와의 전쟁은 거의 全無하다.
그리고 壬辰倭亂과 日帝强占을 除한다면, 일본과의 마찰은 기껏해야 해적질이나 노략질 당하는 수준이었지만, 북방세력과의 전쟁은 온 나라가 焦土化되어버리는 侵略戰爭이며 收奪戰爭이었다. 이러한 정황은 교통수단이 발달한 현대사회라고 해도 크게 달라진 바 없다.
그러니 예컨대, 미국과 중국 중에서 우리나라와 戰爭(侵略)의 가능성을 굳이 비교한다면, 응당 인접한 중국과 대한민국의 전쟁가능성이 미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인접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은, 항상 불안과 공포를 초래한다. 중국이 經濟大國으로서 성장하는 현상 역시 그러하다.
或者는 이를 아주 好意的으로 인식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결코 우리나라에 좋을 것 없은 현상이다. 거대한 中國市場의 혜택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사실은, 당최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더욱이 현재 중국의 最高權力者 習近平은, 중국이 경제대국이 되었음에도 民主化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一人專制의 皇帝로서 天子가 되려고 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접국인 대한민국은 조선왕조처럼 중국을 事大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러니 정작 대한민국에게 호의적인 상황이란, 남북통일이 되어서 대한민국이 스스로 自彊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 말고는 없다. 역사를 살필 때,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인접한 국가들의 성장은, 어쨌거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일로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國內政治라고 해서, 國內政治的으로 작동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어떠한 국내정치적 상황일지라도, 국제정치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時局에서, 中國歷史에 대해 再認識할 필요가 있다.
국내정치가 국제정치의 거대한 영향력 下에 있듯이, 韓民族의 역사도 항상 中國歷史와 동아시아歷史의 거대한 영향력 하에 있다.
이러한 역사적 구조가 싫다면서, 한반도를 뚝 떼어 選好하는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있다면 좋겠으나, 인류가 멸망하기 이전에 그러한 상황은 아마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동아시아歷史에서 우리가 흔히 갖게되는 거대한 錯覺 혹은 誤解로서, 中國歷史와 漢族歷史 개념의 差異를 명료히 규명코자 한다. 이로써 우리 역사의 과거와 미래도 더욱 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資本的 利益과 武力的 戰爭

현대사회는 표면적으로 ‘資本的 利益’과 ‘武力的 戰爭’에 의해 작동하므로, 자칫 歷史는 뒷전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공동체가 國益을 목적하는 ‘利益과 戰爭’의 名分을 구할 수 있는 토대는, 모름지기 역사다.
국제사회에서 마찰과 충돌이 발생하여 전쟁을 不辭해야 하는 경우, 결국 그에 대한 명분으로서 내세워야 하는 것이 역사다. 그러한 역사의 분야는 지극히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哲學, 宗敎, 理念, 文明, 文化, 貿易, 資本, 科學, 軍事, 社會, 藝術….
어떠한 상황이든, 그에 걸맞는 분야의 역사적 사례를, 명분의 논리적․이론적 토대로 삼는 것은 人之常情이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현대에 이르러 굳이 東北工程이나 植民史觀을 거론치 않더라도, 잠시만 방심하면 각자의 利害關係에 따라 조작되어버리는 것이 歷史다.
누구라도 자기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조작하여 記述하는 것이 역사인 탓이다. 그러한 역사의 특성을 思慮한다면, 더욱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3. 中國大陸과 中原大陸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어쨌거나 中國歷史는 동아시아歷史를 주도하는 역사다. 中國歷史는 주로 中國大陸을 무대 삼아 이루어진 역사다. 여기서 中國大陸과 中原大陸을 동일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許多하다.
그런데 中國大陸과 漢族들의 주된 무대였던 中原大陸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中國大陸이 地政學的 개념이라면, 中原은 歷史學的 개념이기 때문이다.
中國大陸은 현재 中華人民共和國의 통치지역을 말하는 地政學的 용어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보통 內地라고 하고, 대한민국에서는 中國本土라고도 하지만, 엄밀히는 서로 다른 표현이다.
漢族中國人들이 內地라고 하는 것은 中原大陸에 가깝고, 한국인 등 외국인들이 本土라고 하는 것은 중국대륙에 가깝기 때문이다.
中國大陸은 크게 둥베이(東北), 화베이(華北), 화둥(華東), 화중(華中), 화난(華南), 시난(西南), 시베이(西北)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관할이지만,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南中國海의 여러 섬, 중화민국이 실효 통치중인 타이완(臺灣), 펑후제도(澎湖諸島), 진먼섬(金門島), 마쭈열도(馬祖列島), 유럽의 식민지였으나 지금은 특별행정구인 홍콩(香港), 마카오(澳門)는 일반적으로 제외한다.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는 中華圈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타이완, 홍콩, 마카오 내에서는, 중국대륙이란 말을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 공산당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정치중립적 표현으로 쓰고 있다.

-하략-

구매가격 : 2,500 원

자끄 데리다 철학,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유령이 되어버린 이방인 여행자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1-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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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Derrida哲學 一般



기존의 구조를 해체시키는 사유방식은, 東洋文化에서는 지극히 古代的인 것이다. 老莊哲學이 세계 解體主義의 始原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더욱이 노장철학은, 현대의 서양 해체주의가 지닌 代案不在의 문제까지도 이미 해결하고 있다.
예컨대, 老子의 道는 無爲自然의 土臺 위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토대는 서양의 同一性 토대와 달리, 變化性의 토대이다. 그래서 현실세계의 解體를 쉬이 수용한다. 기존의 것의 해체에 대한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그러한 해체가 同時的으로 새로운 生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의 토대 위에서 자유로이 살아내는 逍遙遊는, 莊子哲學을 대표한다.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 하지 않는 바가 없는, 無爲而無不爲인 것이다. 이 역시, 解體와 生成이 同時的으로 변화하는 시공간에서의 노닒이다.
그런데 獨尊儒術의 시대가 주도하면서, 그러한 古代的 解體主義는 정치권력으로부터 疏外된다. 朝鮮王朝는 대표적인 사례다. 애석하게도 儒家哲學에는 변화적 사유가 없지 않으나, 강조되지 못한다.
周易哲學이나 孟子哲學의 경우 지극히 radical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儒敎哲學에서는 그러한 측면이 은폐되고 소외되어버렸다. 유교철학은 철저히 現實政權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통치이데올로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硬直性 탓에, 近代에 이르러 西洋文明에 의해 철저히 蹂躪당한다. 그렇게 현대에 이르도록, 세계는 서양문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서양문명 자체에서는, 2차례의 世界大戰을 체험하면서, ‘기존의 것’들에 대한 심각한 懷疑가 찾아든다.
神과 君主의 시대를 극복하는 르네상스를 체험하고, 역사를 激變시킨 과학기술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었지만, 그 결과로서 정립된 모더니즘은, 결국 帝國主義的 覇權과 植民主義的 利權에 복무하는 거대한 戰爭으로서 마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더니즘을 마감시킨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것이, 곧 解體主義다. 이러한 상황에서, 東洋文明은 다시 고뇌에 빠져든다.
동양문명으로서는 지극히 古代的 思惟方式인 해체주의가 현실세계를 주도하지만, 유교철학이라는 동양문명의 전통적 사유방식을 추구하였던 탓에, 서양문명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던 트라우마가, 자꾸만 동양적 사유방식을 스스로 貶毁토록 하기 때문이다.
동서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解體主義의 始原으로서, 이미 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老莊哲學의 해체주의를 외면한다면, 서양문명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던 근대의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이다.
서양문명은 시공간적 他者인 탓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미 동양문명의 해체주의를 自己化하여 활용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가 그러하다.
대체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동양문명의 老莊哲學的 사유방식을 알고 있으며, 나아가 周易哲學이나 陰陽哲學까지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援用하여 각종 이론과 논리를 제시하고, 그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世界史的 思潮를 구성해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양문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애당초 동양적 사유방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설령 알더라도 외면한다. 그러면서 현실세계를 서양문명이 주도하므로, 그저 ‘서양 것’이니 추종해야 하는 양, 죄다 포스트모던의 尖兵을 자처한다.
필자가 ‘데리다 철학’을 지어내면서, 한국사회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대부분의 硏究物과 著作을 讀書했는데, 이러한 思想史的 이해를 지닌 자는 극히 稀少했다. 그러니 다소 암울한 심정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를 독서하고서, 노장철학의 해체주의에 대해 반드시 유념하기를 당부한다. 방대한 분량의 莊子는 잠시 留保하더라도, 老子道德經은 반드시 독서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필자의 메시지에 내포된 眞義를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가 後期資本主義, 後期産業社會로 사회구조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게 된다.
한 시대의 문화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며, 그에 따른 담론들도 그러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이러한 요구가 다양한 분야에서 突出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극에서의 이중극, 건축에서의 이중약호지움, 미술계에서의 알레고리, 문학에서의 패러디 같은 특징들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러한 제특징들이 보이는 유사점과 철학적 시각이, 사회문화상과 예술과 유사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데리다는, 글쓰기보다 말하기를 우위에 두어온 西歐의 形而上學 체계를 顚覆시키고,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하여,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리오따르는 ‘巨大敍事’를 지배서사로 보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지배서사를 거부한다. 더불어 진리의 비판적 수행의 과제는, 전통적 이론이 아니라 문화, 예술이라고 보며 미학을 중시한다.
지배서사 뒤에는, 잊혀졌던 敍事와 再現이, 하나가 아니고 二重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미디어 정보와 복제물이 범람하는 소비상품 사회를 분석하며, 기호학을 소비문화 현상에 적용한다. 그러면서 模造物이 더 진짜 같으며, 실체와 모사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적 특성들은, 일시성, 탈구축, 알레고리적 특성, 차용, 패러디, 종합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이러한 제 특성들은 모더니즘의 일획적, 총체적 질서와 구분되는 의미를 지님과 더불어, 새로운 활력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多元化가 오용되거나, 다시 형식의 틀 안에 귀속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다이즘적인 무조건적 거부가 아니라, 진리, 규범, 양식 속에 깃들어 있는 絶對性과 中心性의 虛構를 드러냄으로써, 解體를 시도한다.
더불어 모더니즘의 실험정신을 계승하면서도, 形式性과 總體性을 拒否한다. 그러면서 대중문화의 패턴과 어법을 차용하여, 엘리트적 권위의식과 대중문화의 二分法的 境界를 解體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물의 해체와 불확정성, 비역사성을 통해, 개인을 중시하고 인간본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와 다원화가 갖는 의미는 크다고 보며,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화 양상에 관한 연구, 이창희.


데리다의 全 작업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활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서구 형이상학을 해체함으로써,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 등에 균열을 내려고 했던 작업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 하에서 진행되고, 그리로 수렴된다.
초기의 해체가 이론이나 개념 체계를 매개로 현실에 개입했다면, 후기의 해체는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관여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해체를 시도하는 다른 곶은, 그 제목에서 해체의 내용과 방향을 표시한다.
데리다는 ‘발레리’가 대표하는 유럽인의 유럽 담론에서, 유럽의 지리적 표상으로, 유럽의 본질로 등장하는 ‘곶’의 의미를 실마리 삼아, 한편으로는 기존의 곶 담론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유럽의 정체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해체가 기존의 담론, 텍스트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양면적 평가를 요한다. 해체가, 자신이 해체하려는 담론의 논리와 문법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될 것이라는 혐의를 피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해체는 분명 전통이 된 담론의 논리와 문법을 흔든다.
유럽의 更新을 지향하는 데리다의 해체는, 자신의 전통 속에 담긴 自文化中心性에 균열을 냄으로써, 유럽을 他者를 향해 개방시킨다.
비유럽은 그러한 작업의 성과 위에서, 유럽과 보다 평등하게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해체가 유럽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긍정일 수 있다하더라도, 그 작업의 의의를 폄하하기는 어렵다. "유럽"의 해체 : 데리다의 『다른 곶』(L"Autre Cap)을 중심으로, 김정현.


근대 실증적 세계관에 대한 現象學의 반론과 반성적 자각은, 과학적 방법론과 실증주의의 원칙이 지배하는, 모든 학문적 체계와 영역에서,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한 쟁점으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특별히 객관적 과학으로서, 그 학문적 성격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近代學의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성향에 대하여, 현상학의 반론은 상당히 유력한 공격과 타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에 대한 많은 현상학적 연구들 속에서, 現代學이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성의 제시로써 이해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상학의 이러한 의의와 공헌에도 불구하고,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로 대표되는 Jacques Derrida의 날카로운 분석은, Husserl의 현상학적 시도가 여전히 전통 형이상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土臺主義(Fundamentalism)的 세계관에 머물고 있음을 비판한다.
따라서 Derrida가 주도적으로 수행한 현상학 해체와 함께, 현상학적 교육론의 해체를 엄밀하게 시도하고자 하며, 더 나아가 이 현상학 해체의 과정에서 돌출된 Derrida의 독특한 해체의 언어들, 특별히 差延(différance)의 개념과 그 논리를 중심으로 해체주의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물론 본론의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겠지만, Derrida의 해체의 언어들은, 사실 Husserl 現象學이 그렇게 구현하고자 소망했던 것, 즉 왜곡되고 황폐화된 세계의 진정한 회복과 치유, 그 자유를 더욱 철저한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함이다. Derrida의 "선험 현상학 해체"와 그 교육학적 함의, 서상문, 장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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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신학, 복음 회심 전도 고난의 여행자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1-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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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使徒 Paul 神學 一般



哲學처럼 虛妄한 학문이 있을까? 있다. 神學이다. 그런데 인간존재의 삶이 본래 허망한 탓에, 이런 학문들이야말로 삶 자체를 담아낸다.
그러니 길지도 않은 人生을 살아내면서, 이러한 학문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참으로 서글픈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까닭에선지, 현대사회에서 유대민족은 대체로 善의 진영에 배치된다. 그런데 현실세계의 어느 민족이라도 善惡의 측면을 동시적으로 모두 지니고 있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어떻게 유독 유대민족만이 선하고, 이방민족은 악하겠는가. 그런데도 이러한 사유방식은 相對主義的 認識이 유도되지 않는 한, 인간존재에게 本性的인 것이다.
예컨대, ‘Schindler"s List’에 그려진 猶太人들의 受難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史實이며, 그것이 현대의 猶太人의 image로서 규정될 수는 없다.
현대사회에서 유태인은, 세계의 금융과 자본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유력한 세력 중 하나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상의 裏面에서 행해지는 그들의 工作과 造作은, ‘스크루지’의 사채놀이처럼 지극히 資本中心的이어서, 결코 善하지 않은 경우가 許多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순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양, 온갖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受難史로써 宣傳煽動한다. 그러니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 이는, 유대민족 기독교문화의 기원에 대해, 오해하며 착각하는 하나의 역사적 事例다.

아울러 예컨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이브’를 제작했다는 신화적 발상 또한 그러하다. 이로써 유대민족의 문화에는, 조선왕조의 男尊女卑를 넘어서는 지독한 男性優越主義가 배치되게 된다. 현실세계의 여성은 한갓 남성의 갈빗대 하나에 불과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초의 人間夫婦는 觸手不可의 善惡果를 따먹음으로써, 善의 세계였던 ‘에덴동산’에 善惡의 共居를 초래한다. 이후 基督敎는 善에 대한 간절한 志向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제 현실세계는, 결코 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善의 갈망은, 惡에 대한 가혹한 排斥을 동시적으로 작동시킨다.

人類史에서 이러한 유대민족 기독교의 實體에 대해, 최초로 심각하게 苦惱한 사람은, 말할나위 없이 ‘F. W. Nietzsche(1844~1900)’다. 그러한 고뇌 끝에, 니체는 ‘神의 죽음(Gott ist tot)’을 선언한다.
니체는 中世와 近代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좇아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上記한 바와 같이, 니체 이후에 世界大戰을 거치면서, 유태인과 기독교는 여전히 새로운 형태의 同一視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改新敎는 유태인들과의 分離를 실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그 이면에서는, 유대민족의 수난을 信仰的 基底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러,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에게는 天賦人權이 보장되었다. 설령 이것이 憲法的 규정에 불과할지라도, 이전의 역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존재들은, 기본적인 自由와 平等을 향유하고 있다.
그런데 애당초 자유나 평등은 실현되기 어려운 認識的 槪念이다. 자유나 평등은 인간존재의 認識(想像) 속에서나 가능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현실세계의 모든 인간존재들이 同時的으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평등할 수 없는 탓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이유로, 하늘로부터 부여된 자유와 평등을 부담스러워 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현대에 이르러 그러한 상황을 人文學的으로 정돈한 것이, ‘에리히 프롬’이 논변하는 ‘자유로부터의 逃避’다.
그렇게 자유나 평등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에서, 인간존재들이 의지하는 것이 종교이며, 대표적인 것이 基督敎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가 그토록 선전하며 갈망하는, 신앙적 삶으로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의 태도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天賦人權的 자유와 평등을 실제적으로 실현하기는 너무도 힘겨우므로, 차라리 그 힘겨움으로부터 도피해버리는데, 그러한 힘겨움으로부터의 도피처가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애당초 ‘主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평등만을 전제할 따름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지 않는다면, 아예 자유와 평등은 말할 나위 없으며, 생명 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사도 바울을 통해 傳道된 기독교의 福音原理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현실세계에서 眞善美를 强辯하는 세력은 지극히 道德主義的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의든 타의든, 그것에 쉬이 수긍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實現不可다.
이것이 ‘시치프스의 딜레마’가 지속되는 현실세계에서, 자꾸만 인간존재들이 神의 영역인 교회로 도피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도피처를 찾거나, 그것에 의지하여 삶을 꾸려내는 側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실상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저 資本主義體制의 굴레마저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니 ‘奴隷道德’의 측에 배치되든, ‘資本道德’의 측에 배치되든, 죄다 派瀾苦海를 표류하는 苦難일 따름이다.

현대사회는 인터넷에 토대를 둔 사이버 세계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먹방(맛집)’과 유사한 代理滿足을 주고, 불교는 ‘몸짱(얼짱)’과 유사한 代理充足을 준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인상적이다.
天國을 도모하고 成佛을 모색하는 양, 현대인들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먹방’의 대리만족을 위해 온갖 사이트를 찾아헤매고, ‘몸짱’의 대리충족을 위해 갖은 사이트를 찾아나선다.
그런데 어쨌거나, 죄다 自我 自體의 실현은 아니며, 다만 代理的인 실현임을 유념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실제가 아니며, ‘시뮬라크르’일 따름이다. 그래서 결국, 천국에 가지 않는 한, 현실세계는 천국일 수 없으며, 成佛하지 않는 한, 인간존재는 부처일 수 없다.
그러다보니 그러한 한계를 너무도 잘 인식하는 각 종교는, 자꾸만 道德主義的이며 倫理主義的인 樣態를 드러낸다. 그러니 결국 현실세계의 어떠한 종교도, 마치 애당초 儒敎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극히 도덕주의적인 종교로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번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하면, 가장 먼저 의문시되는 질문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누구인가?
예수인가 아니면 바울인가?
생각해보면, 예수는 어떤 종교를 만들도록 지시한 적이 없으며, 또한 예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유대교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생각할 때, 예수와 더불어 바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신약성경의 대다수 서신을 기록하였고, 누구보다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전통적 그리스도교회가 ‘예수의 종교’ 보다, ‘바울의 복음’에 그 신앙적 기초를 두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서신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용이나 언급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의 서신에는 실제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지상적 활동이 누락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서신들이 복음서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바울은, 복음서에 그토록 빈번이 보도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들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며, 심지어 복음서에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예수의 ‘수난사’ 조차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이며, 특별히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義’에만 초점을 맞춘 듯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예수의 지상적 사역을 非歷史化하고, 그의 십자가 수난과 처형을 신학적으로 抽象化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팔레스틴 땅에서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지상적 예수보다, 만인의 죄를 씻어준 보편적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의 의미를 과거에 맞추기 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공동체 안에 ‘現在化’하며,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예수 이해는 ‘역사적 예수’에 기초해 있기보다는,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복음은, 유대적 종말사상의 특수성을 반영한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두기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속에 계시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義’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렇게 바울이 예수의 말씀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고, 암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니체, 바우르, 브레데 등 몇몇 비평가들은, 바울이 예수의 전승을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하였거나, 예수의 전승이나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한동안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역사적 예수’로 그 관심을 돌리는 것이, 참 그리스도교의 회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바울이 가르친 복음이 예수의 정신이나 의도와 부합되는지, 예수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것은 아닌지, 또는 예수의 교훈을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이들도 있다.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면, 어떤 면에서 창시자이며, 어떤 점에서 예수의 추종자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은 정말로 예수를 잘 알고 있었는가?
바울이 예수를 알았다면,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분의 삶과 사역과 교훈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가?
바울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교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아니면 그의 신학은 순전히 자기 회심경험에서부터 온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약학계에 커다란 문제로 던져져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문제’로 집약되어 토론되어 왔다.
앞의 질문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예수와 바울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주로 역사적 문제와 신학적 문제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 예수와 바울의 역사적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였고, 후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즉 바울의 신앙 대상이 역사적 예수였는지, 아니면 자기 신학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였는지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이제까지의 이 논쟁의 연속선상에 서서, 예수와 바울의 관련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왜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그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그는 진정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일까?
만일 이러한 바울의 침묵이 의도적이라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또한 예수의 선포와 바울의 복음은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복음이 예수의 선포를 더 발전시킨 것일까?
더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 이 둘 사이의 연속성은 있을까, 없을까?
그리고 만약 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면, 그 연속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과 근거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개연성 있는 답변을, 사회학적 해석(사회학적 방법론)을 통해 찾으려는데 있다.
간략하게 종합하자면, 바울이 예수의 종교를 조직, 발전시켰는가, 아니면 예수와 상관없는 새로운 신학을 수립했는가?
바울이 직면했던 특수한 상황들과 서신을 쓰게 된 상황, 바울의 의도와 목적 등을 토대로 한 사회사적 해석을 통해 다루면서, 예수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이 상반되는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신학이 예수의 사상을 적절하게 발전시킨 것인지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바울과 예수의 신학 사이에 구체적인 연속성이 있는가, 바울을 예수의 계승자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밝혀내야 한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성 연구, 전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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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학,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여행자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1-2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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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尹東柱 詩學 一般





尹東柱(1917~1945)는, 朝鮮人으로서 滿洲에서 태어나, 日本人의 땅에서 죽어간 詩人流配者이다.
詩人 尹東柱의 詩學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인간존재의 超然한 노래이다.
여기서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
기독교에서 하늘은 응당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太初에 최초로 發話된 말씀이다. 그 말씀으로서 하늘을 우러르는 자가 곧 ‘예수’다.
老子에게 하늘은 天地自然으로서 道다. 그런데 道可道非常道의 道이므로 서술된 언어로써는 묘사될 수 없고, 묘사되어서도 안 되는 하늘이다. 만약 언어로써 표현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늘 그러한 본래의 道일 수 없는 탓이다. 그래서 道는 詩로서만 노래될 수 있다.
孔子의 말씀은, 學而時習之不亦說乎로써 시작된다. 이는, 배움과 연습으로써 하늘의 말씀을 체득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늘의 말씀(仁)’을 체득한 자가 곧 ‘聖人’이다.
부처는 出生 후, 최초의 發話로써 天上天下唯我獨尊을 말씀했다. 홀로 선 自我가 곧 하늘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천지자연의 원리로서 道로써 말씀된 하늘인 존재, 그가 바로 詩人이다.
윤동주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지속된 流浪이었으며, 암울한 流配였다. 朝鮮, 滿洲, 日本, 그 어디에도 그의 故鄕으로서 조국은 不在하다. 그러한 故鄕(祖國)의 不在는, 그의 삶을 流配의 流浪으로써 點綴케 했다.
그래서 윤동주의 삶 자체는 비극이다. 그것은 한 인간존재로서는 不得已한 不條理였다. 조국이 日帝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현실을, 문학적 감성이 多分한 一介 인간존재가 어찌 하겠는가.
결국 윤동주는, 梅泉 黃玹처럼 義憤을 떨치며 자살할 수도 없었고, 勉菴 崔益鉉처럼 의병투쟁을 할 수도 없었고, 安重根처럼 敵의 首魁를 암살하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詩人으로서, 담담히 자기의 詩를 지어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인지 윤동주의 경우처럼, 역사 안의 시인들은 대체로 비극적 존재들이다. 詩라는 것이 喜怒哀樂의 여러 감정을 노래하지만, 아무래도 분노와 슬픔을 위주로 비극적 정서를 담아내야만 하고, 그러한 정서를 담아낼 때,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억지스럽게 비극적이고자 한다고 해서 悲劇性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윤동주 이후, 한국전쟁, 민주화투쟁, 노동운동 등의 상황에서 많은 시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 시대적 상황의 비극성이 자연스레 시인의 비극성을 북돋았던 탓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經濟大國이 되고 민주화된 이후에는, 이렇다 할 시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토록 갈구하던 고도의 산업화와 성숙된 자본주의를 실현한 시절이어서, 하물며 著名했던 어느 시인은, 지난날의 性醜聞이 온 세상에 까발려지며 역사에서 삭제되어버리기도 한다.
애당초 인류문명에 있어, 시인은 비극적 존재이고, 시는 비극을 노래하는 것이다. 물론 비극 이외의 어떤 테마라도 詩로써 노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詩들은 결국엔 시나브로 시들어버린다. 시를 읽으면서 굳이 기쁨, 즐거움, 幸福, 敬歎, 歡喜, 福樂 따위의 분위기를 목적하는 독자가 稀少한 까닭이다.
어느 著名한 喜劇俳優의 넋두리처럼, 인간존재의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죄다 비극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러한 天地自然의 理致를 體得했던 부처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인간존재의 삶을 ‘一切皆苦의 派瀾苦海’라고 규정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悲劇的 流浪의 詩人 윤동주의 詩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 가장 유력하게 기억되고 愛誦되는 까닭이다. 어쨌거나 시인은, 원하든 원하지 안든, 비극적 존재이고, 고독한 유랑자이기 마련이다. 비극적 상황에 내던져짐으로써 시를 지어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지어낸 시이므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음이다.
혹자는 윤동주의 詩學을, 아주 순수한 敍情主義나 宗敎主義에 입각하여 감상하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학은 애당초 본래적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時空間的 상황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표면적으로 어떠한 描寫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비극의 토대 위에서 작동할 따름이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윤동주와 같은 시인이 재현될 수 없음을 傍證하기도 한다.
물론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유토피아의 실현일 리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제사회의 형편에 비추어볼 때, 당최 비극적일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남북한이 분단되었다지만, 남한의 경제수준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수준에 있고, 한국전쟁 이후 어떠한 형태로든 평화적 休戰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절은 현실세계가 욕망과 충족으로써 작동할 따름이다. 그러니 頹廢的이거나 絶望的일망정 당최 悲劇的일 수 없다.
예컨대,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시뮬라크르, 히키코모리, 이지메, 판타지, 섹슈얼리티, 하드코어 따위가 그러하다.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悲劇도 喜劇도 아닌 不條理劇과 解體劇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제아무리 비극성을 담아내려고 해도, 근원적인 恨에 이르지 못하고, 기껏 個人主義的인 鬱憤이나 憂鬱의 차원에 머물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동주의 시절처럼, 대한민국이 식민지가 된다거나, 전쟁이 勃發해야 한다거나, 경제적으로 沒落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저 당분간은, 윤동주와 같은 詩人을 만날 수 없음을 是認해야만 한다.
필자는 時限附의 삶을 예정받았다. 그런 탓에 尹東柱詩學을 지어내는 時空間이 온통 조급함으로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당최 서두를 수 없는 노릇이다. 서두른다고 채워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담담히 시간 안에 내버려 둘 따름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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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 반하다

도서정보 : 김석 | 2019-01-21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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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왜 그토록 수없이 되새겨 읽히는 공감의 생명력을 가졌을까?
공자는 성인(聖人)일까, 속인일까, 진보주의자일까, 보수주의자일까?

2,500여 년 전 공자가 있었다. 공자는 혼돈의 춘추·전국시대에 천하를 주유하며 정치개혁과 사람됨을 가르치고 실현해보려 했던 관료이자 교육가, 사상가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다가 70이 다 되어 빈손으로 고국에 돌아와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마쳤다. 공자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스승의 깊고 높은 가르침을 받아 적거나 기억하고 되새기려 했다. 그들은 자신이 보거나 전해들은 스승의 말과 행적을 “선택”하여 아주 간략하게만 죽간이나 목간에 기록해 《논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논어》는 처음에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발화된 “말”이었지만 기록의 과정에서 정황과 대상, 주체가 생략되거나 관점과 강조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과 입과 생각을 거쳐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지면서 마침내 “경전”이 되었다. 이렇듯 《논어》는 하루아침에 쓰인 것도, 특정의 누군가 작정하고 쓴 것이 아니기에 이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주석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구절마다 편마다 다른 해석과 입장이 있고, 그 해석에 대한 주석과 주석에 대한 주석이 꼬리를 잇기에 종종 현대의 독자들은 길을 잃고 머뭇거리게 된다. 도대체 《논어》의 핵심적인 사상은 무엇이고, 어떻게 읽는 것이 정확한 ‘논어독법’이 되는 걸까?

오늘날에도 유효한 《논어》의 힘, ‘나의 나됨’과 ‘사회’를 생각하게 하는 고전,
풍요로운 지혜와 사색의 보고(寶庫) 《논어》에 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책은 한 법조인으로서 인간과 법, 정치가 엮어내는 삶의 현장에서 매일 해석과 판단의 갈림길에서 씨름하는 고민과 성찰 속에서 얻은 《논어》 읽기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논어》와 공자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럽게 한 축으로 풀어가며 잔잔한 집중과 심도 깊은 탐구의 재미를 제공한다. 공자가 마구간에 난 불을 보고 말과 사람에 대해 무엇이라 말했는지에 대한 논쟁에서부터 달항당 사람의 비아냥거림을 해석하는 것 등 《논어》의 여러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공자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통해 ‘만들어져가는 공자’, ‘신격화되어가는 공자’의 모습을 살펴보는 동안 흥미롭게 《논어》에 빠져들게 한다.
또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논어》의 주요 어휘인 인, 의, 예, 지, 덕, 도, 충, 효와 수기안인, 군자, 배움 등 여러 개념들을 따져 봄으로써 공자의 크고 넓은 철학적 뒷받침을 음미할 수 있게 한다. 독자들은 비록 주왕을 그리며 무너져 가는 봉건제와 혼란한 춘추 전국시대를 이상주의적으로 되살려보려 안간힘을 쓰는 한계를 보이는 공자를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 정치를 개혁하고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위해 노력해가는 공자의 인본주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엿볼 수도 있다.
공자를 알게 되면 《논어》를 이해하게 되고, 《논어》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공자의 철학에 닿는 지름길이자 동양사상의 한 핵심을 꿰뚫는 길이기도 하다. 이 책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열려 있는 공자의 철학, 끊임없이 나와 우리를 되새겨 보게 하는 사람됨의 거울이자 지성의 원천인 《논어》를 맛깔스럽게 다시 상찬해 놓았다는 공을 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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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 철학, 조선왕조 이단 사문난적 양명학 윤휴 박세당 정약용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1-1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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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王守仁의 陽明學



1. 主觀的 觀念論者 王陽明

王守仁(1472~1528)은, 중국 明나라의 정치인이고 교육자이며 사상가이다. 陽明學의 창시자이며, 心學의 集大成者로 꼽힌다. 號는 陽明, 字는 伯安이다. 明代(1368~1661) 中期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정치가이며, 주관적 관념론자이다.
明나라 초기에는 朱子學이 지배적이었는데, 이에 대해 그는 독자적인 儒學思想을 내세우고, 특히 陸象山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그의 사상은 知行合一, 靜座法, 致良知 등을 원리로 하는데, 이것들은 또한 그의 사상 발전의 단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의 사상을 통해 일관하고 있는 것은, 物의 理, 즉 우리의 마음이며, 우리의 마음 이외의 곳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 말에서 보이는 바처럼, 心卽理라는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이다.


2. 王陽明과 陸象山

陽明學을 불러일으킨 陸九淵(1139~1192)은, 중국 南宋의 사상가이다. 字는 子靜, 號는 象山, 諡號는 文安이다. 撫州 金谿縣(江西省) 사람으로, 兄인 九韶와 함께 학문으로써 이름을 남겼다. 1172년(乾道 8년)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지방관으로 종사하면서 자제교육에 종사했다.
陸象山 사상의 특색은 心卽理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理는, ‘천지가 천지여야 할 것’으로서, 그 입론의 기초는 宋代의 다른 사상가와 다른 바가 없다. 그런데 理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는, 北宋 이래 개개의 사상가에 따라서, 논리의 입증이 달랐다.
그것은 주로 그와 같은 존재의 窮極者(존재를 존재로 하는 것)와 ‘나’인 주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경향을 달리했던 것이다. 陸象山은 이에 대해서, 마음(心)은 一心이며, 理는 一理이다. 이 心은 이 理여서, 둘로 나뉘어 있는 一은 없다고 말하고, 우주 안의 一은 자신의 分內의 一이며, 자신의 분내의 一은 우주 안의 一이라고 했다.
다시 사람의 心은 지극히 靈(뛰어나다)하고, 이는 지극히 분명하다. 사람은 모두 이 心을 가졌고, 心은 모두 이 理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는 朱子가 格物致知論에서 주장한, 一物에 一理가 있고, 事事物物의 理를 밝힘으로써 만물의 일리를 얻는다는 논리와는 다르다.


3. 陸象山의 心卽理

陸象山의 理는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은 존재의 理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조정하는 바, 나의 마음 속에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나의 마음이 理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 즉 理는 내 마음의 理라고 하여, 心卽理를 설파한 것이다. 따라서 이 一心이 만물의 理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에는 여하한 물건도 부가할 필요가 없고, 마음을 가리고 있는 惡弊만을 제거하면 된다.
그래서 독서 강학이라든지 사색 등도 도리어 유해하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六經은 나의 註脚에 불과하다”는 말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太極圖說을 둘러싼 朱子와의 논쟁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朱子가 陰陽二氣와 道를 形而上下로 나누고, 無極이면서 太極인 것을 道, 즉 理라고 한 데 대하여, 象山은 無極은 老子의 말이니, 易의 太極이라는 말로 족하다고 하였다.
즉, 易에서 “一陰 一陽, 이를 道라고 한다”고 하였듯이, 그는 도설의 위작론을 더하여, 더욱 격렬한 논쟁으로 朱子에 대항하였다. 象山의 사상은 명대의 陳白沙를 거쳐 王陽明에게 영향을 끼쳤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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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알면 중국사가 보인다

도서정보 : 이나미 리쓰코 | 2019-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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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천 년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명장면들. 그 속에서 명군, 폭군, 영웅, 시인, 때로는 미인이 어우러져 함축적 의미를 지닌 다양한 말들이 탄생했다. 중국 고사성어는 매우 정제된 표현으로 당대의 역사적 주요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전해주며, 시대를 넘어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삶의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이 책은 다양한 고사성어를 소개하면서 그 탄생 배경인 중국사의 흐름을 더듬어본다. 중국사의 명장면 속에서 피어난 고사성어들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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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 정치철학, 수운 최제우, 안토니오 그람시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1-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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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守主義와 進步主義 그리고 大韓民國憲法


‘수운 최제우(1824~1864)’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서로 30여년의 時空間的 差異를 갖는다.
최제우가 퇴장하고서, 한 세대쯤 지난 후 그람시가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天地自然의 거대한 역사적 수레바퀴를 감안하다면, 거의 同時代를 체험했다고 해도 크게 그릇될 것은 없다.
進步는 退步와 대척되는 개념으로서, 발전적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그러니 天地自然 안에서 ‘온 존재와 온갖 것’들은 죄다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제우와 그람시를 통해 제시되는 進步主義라는 개념 역시, 지극히 相對的임을 유념해야 한다. 保守主義의 관점에서 對蹠的으로 분별할 때 진보주의인 것이지, 그러한 向心 자체는 지극히 본래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역사에서 ‘高句麗의 南下’라는 사건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그 의미규정은 달라진다.
新羅나 百濟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기들의 세력권을 침략하는 행위로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륙에서 세력을 다진 후, 해양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는 행위로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南韓人들은, 대체로 前者의 관점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朝鮮王朝를 거치면서 형성된, 韓半島만이 우리의 영토라는 半島史觀 탓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신라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시 분명한 우리 韓民族 先祖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적 변화야말로, 진보주의적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존재가 살아내는 동안, 얼마만큼의 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 탓에, 누구라도 막연한 羨望을 지닌다. 그러다보면 지극히 유치하고 사소한 일에도, 死生決斷 하듯이 임하게도 된다. 그런 것이 인생이니까.
지난 시절에 필자 역시, 그러한 상황들을 여실히 체험했다. 특별한 利害가 연관되지 않는데도, 그저 자기보다 많은 것을 누린다고 판단되면, 어떻게든 빌미를 잡아 집단적으로 비난을 쏟아내던, 잔뜩 腐敗되어버린 눈빛들, 그런 눈빛들이 당최 잊히질 않는다.
‘니체’의 선언처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일 따름임을 절감한다. 이러한 체험으로써, 필자에게 進步主義的 태도란, 天地自然 안에서 스스로/저절로 그러하게 淡然히 자기의 삶을 살아내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필자는 作家가 되었다.
필자로서는 當時가 回想되면, 무슨 까닭인지, 朝鮮王朝의 朋黨이라는 舊態的 ‘떼거리’ 정치와, 그에 얽힌 異端으로서 斯文亂賊이라 규정되어 排斥당한 尹?, 朴世堂, 丁若鏞 등이 연상된다.
또한 民主主義의 盲點인 多數決 獨裁에 의한 人民裁判 식의 作態도 그러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떠한 관점에서 활용되는가에 따라, 그것은 전혀 非民主的인 상황을 연출케 된다. 그러니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런 자들의 殘像으로서 기억되는 것은, ‘大衆 集團無意識’의 淺薄함과 殘酷함일 따름이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集團共同體의 生來的인 정치적 태도는 保守主義인 것으로 가름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태도를 지니는 것은, 어쩌면 人之常情이다.
제아무리 進步主義를 표방하더라도, 그러한 진보주의가 執權한 후에는, 이내 보수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했을 때, 그것을 簒奪하는 순간까지의 진보주의는 가능하지만, 집권한 이후의 진보주의는 不可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李成桂와 鄭道傳의 革命勢力은, 보수세력인 高麗王朝에 대하여 시대를 선도하는 진보세력이었다. 그래서 易姓革命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권하는 순간, 지극히 보수주의적인 정치적 태도를 드러낸다. 국제지향적이며 黃帝國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던 高麗王朝에 비한다면, 더없이 보수주의적인 態勢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금세 새로운 세력집단에 의해 政權을 찬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當代의 문제이며, 역사적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評價가 내려질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현대의 대한민국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保守主義는 미국과 일본을 爲始한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를 이념으로 삼는다. 進步主義는 중국과 북한을 爲始한 ‘무언가’를 이념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것이 현재로서는 不法하다는 비난에 처할 수 있으므로, 다소 침묵한다.
실상 남한의 진보주의가 추종하는 것은, 人民民主主義와 主體思想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보수주의의 입장에서는 결코 납득될 수 없는 대목이다.
비록 동일한 이념을 추종한다지만, 일본에 대한 역사적 悔恨을 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남한의 상황에서 북한의 체제를 추종한다는 것은 당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히 정리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적 상황은, 단지 정치적 요인만으로 연출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여기에는, 저 먼 古代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요인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역사적 요인은, 당최 明晳判明히 드러난 부문이 不在하다.
上古史는 五里霧中이며, 高麗史는 外勢가 왜곡하기 전에 조선왕조가 스스로 이미 철저히 왜곡해버렸고, 朝鮮史는 日帝에 의해 왜곡되어버렸다. 그리고 東北工程과 植民史觀에 의한 왜곡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역사적 요인은 이내 문화적 요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예컨대, ‘우리 민족끼리’라는 슬로건에 대해 異見이 紛紛한 것이다. 과연 民族이란 무엇이며, 누가 민족이며, 어떻게 민족인지의 여부가, 현재에 이르도록 마땅히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제적 요인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대립이, 卓上空論 식의 말싸움쯤으로 마감될 수 있다면 크게 우려할 바 없겠으나, 이러한 대립은 경제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경제라는 것은, 인간존재의 ‘生存의 利得’을 결정하는 분야이다. 이를 상실케 되면, 생명의 미래적 보장은 없다. 그래서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옷이나 집을 양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것은 나눠가질 수도 있다. 경제발전이 되면서 여벌의 잉여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의 문제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르다. 밥이란 것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존의 이득’이다. ‘三時 세끼’의 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生命(欲望)의 보장은 없다. 그러니 결코 양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양 측의 대립이 이러한 ‘밥의 영역(욕망의 영역)’을 건드리게 되면, 이내 ‘혁명적 충돌(戰爭)’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불과 몇 해 전에 체험한 바 있다. 그래서 아무리 순한 개라도, 제 밥그릇을 건드리면 문다고 하지 않던가.
政治란, 공동체 구성원의 밥을 보장해 주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人民의 밥(욕망)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政權은, 결국 권력을 빼앗기는 것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대립에 있어, 그 準據가 되어줄 것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大韓民國憲法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떠한 이론이나 논리이든, 대한민국헌법에 判斷尺度를 두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法律이라는 것은 言語로써 정립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해석과 적용이 문제가 된다.
언어라는 것이 분명히 공통하는 의미를 지정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목적을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어떠한 논쟁일지라도 현재 시행되는 대한민국헌법에 그 준거를 둠이 타당하다.
그리고 법률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이익(國益)’을 목적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국가공동체는 인간존재의 생존에 있어 가장 바탕이 되는 토대이다. 현재 시행되는 대한민국헌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韓民國憲法 前文
悠久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大韓國民은, 3·1운동으로 건립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民主改革과 平和的 統一의 使命에 입각하여, 正義·人道와 同胞愛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自由民主的 基本秩序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最高度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世界平和와 人類共營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上記한 헌법 전문에는 유념할 대목이 여럿 있다. 우선 大韓國民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말 그대로 大韓民國의 國民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각 개인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국민으로서, 生成的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국민이란,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지위가 가장 우선되는 존재임은 말할 나위 없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토대로서, 3·1운동, 大韓民國臨時政府, 4·19민주혁명 등을 摘示한다. 그 이전의 역사는, 悠久한 역사와 전통이라는 표현으로써 가름하고 있다.
유구하다는 것은 멀고 오래되었다는 의미다. 그 멀고 오래됨은, 東夷文明(遼河文明)으로부터 始原하여, 古朝鮮, 夫餘, 高句麗, 統一新羅, 渤海, 高麗, 朝鮮王朝로 이어지는 역사를 뜻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使命은, 民主改革과 平和的 統一이다. 南韓의 경우 민주개혁으로써 세계적인 民主化를 이루었으나, 北韓의 상황은 세계에서 최하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非民主的 상황에 있다.
이는, 평화적 통일이라는 사명과도 연관된다. 북한의 비민주적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평화적 통일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使命을 작동시킴에 있어, 이념적 토대가 되는 것은 自由民主的 基本秩序이다. 이는 곧 自由民主主義를 추종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대한민국헌법이 모범으로 삼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온갖 형태의 民主主義가 있는 탓이다.
예컨대, 북한의 人民民主主義도 민주주의의 한 형태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분명히 자유민주주의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기회균등, 능력발휘, 세계평화, 인류공영, 안전, 자유, 행복 등의 개념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렇게 거대한 이상주의적 개념들을 열거하는 까닭은, 각 국민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개념들은 지극한 理想들이다. 人類史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동시적으로 충족되는 이상사회는 실현된 바 없으며, 향후에도 그러한 이상사회의 도래를 예견키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헌법에 적시된 理想主義를 현실세계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現實主義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헌법이 지향하는 이상사회를 실제적으로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目的的 志向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본래 理想鄕이란 실현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상되기 위한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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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인문학, 조선왕조 진보주의 작가 허균 성소부부고

도서정보 : 탁양현 엮음 | 2019-01-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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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문에 관하여: 學論



학론(學論)

옛날의 학문하는 사람이란, 홀로 제 몸만을 착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체로 이치를 궁구해서 천하의 변화에 대응하고, 도(道)를 밝혀서 뒤에 올 학문을 열어주어, 천하 후세로 하여금, 우리 학문은 높일 만하고, 도맥(道脈)이 자기를 힘입어 끊어지지 않았음을 환하게 알리려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을 유자(儒者)의 선무(先務)로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씨는 역시 공변되지 않은가?
그런데 근세(近世)의 학자라고 말해지는 사람이란, 우리 학문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며, 또한 홀로 제 몸만을 착하게 하려고도 않는다.
입으로 조잘대고, 귀로 들은 것만을 주워 모아, 겉으로 언동(言動)을 꾸미는 데에 지나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도(道)를 밝히오. 나는 이치를 궁구하오.”
이러면서, 한 시대의 보고 들음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고찰해 보면, 높은 명망을 턱없이 거머쥐려던 것뿐이었고, 그들이 본성(本性)을 높이고, 도(道)를 전하는 실상에 있어서는, 덩둘하여 엿본 것도 없는 듯하니, 그들의 마음씨는 사심(私心)이었다.
그렇다면 공(公)과 사(私)의 분별이요, 참과 거짓의 판별이다.
어찌하여 수십 년 이래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某)는 학자이고, 모(某)는 진유(眞儒)다.” 하면서, 망령되게 서로 추켜주고 자랑하기에 바빠하는가? 그런 일 또한 미혹된 짓이다.
일찍이 보건대, 소위 진유(眞儒)란, 세상에 쓰이게 되면, 요(堯)ㆍ순(舜) 시대의 다스림과 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의 공적이 사업에 나타난 것들이 이와 같았고, 쓰이지 못하더라도 공(孔)ㆍ맹(孟)의 가르침과 염(濂)ㆍ낙(洛)ㆍ관(關)ㆍ민(?)의 학설을 책에 기록한 것들이, 또 이와 같아서, 비록 천만년이 지나도 이의(異議)를 제기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건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씨가 공변되어서다.
오늘날의 거짓 선비는, 실속 없고 근거 없는 말을 하여, 입을 열면 이윤(伊尹)ㆍ부열(傅說)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사업을 자신이 담당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가 쓰여지면 손과 발을 놀리지도 못하고 실패하여, 자신을 수습할 수도 없게 되어, 당세의 비웃음과 후세의 의논이 있기 마련이다.
약간 더 교활한 자들은, 이렇게 되리라고 미리 요량하고, 명망이 훼손됨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문득 나서지도 않고, 그의 졸렬함을 감춰버린다. 이런 것 역시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씨가 사심(私心)이어서다.
슬프다!
거짓이 참을 어지럽게 하여, 온통 이러한 극단에 이르게 하고는, 마침내 임금으로 하여금, 도학(道學)을 싫어하여 쓸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도록 하였다.
이는 거짓과 사심을 지닌 자들의 죄이지, 어찌 진유들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랴.
우리나라에도 이른바 도학(道學)한다는 선비들이 더러는 화란에 걸리고, 더러는 끝까지 그의 시정책을 펴지 못하기도 하였다.
모르기는 하지만, 당세 임금으로 있던 분들이, 과연 그들의 도(道)를 써서 시행했더라면, 공렬(功烈)을 옛사람에게 비길 수 있었고, 이 세상을 요ㆍ순의 시대와 같게 할 수 있었겠는가?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나뉨으로부터, 사사로움에 치우친 의논들이 무척 치열해져, 더러는 저들만이어야 한다고 이들을 헐뜯고, 더러는 갑(甲)만을 높이고, 을(乙)은 배척하여 소란하게 결렬되어서, 그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모두 사심으로 듣고 보아서 그렇게 되지 않음이 없으니, 어느 누구를 탓하랴!
얼마 전에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
당시 의논하던 사람들은, “다섯 분 이외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것도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어진이들이 어떻게 정해진 인원이 있다고, 반드시 다섯 분으로만 한정하랴.
만약 그렇다면, 이후에는 공자나 안자(顔子) 같은 학자가 있더라도, 배향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공자ㆍ안자 같은 분들의 탄생은 예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야은(野隱) 길재(吉再) 같은 충성심으로 우탁(禹倬)ㆍ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직접 전해 받았고, 서화담(徐花潭)의 초월한 경지를 혼자 터득함과, 이율곡(李栗谷)의 밝은 식견과 큰 아량까지를, 어떻게 후중함이 적으니 취할 게 없다고 하여, 전혀 거론하지 않는 것인가?
더러는 헐뜯는 사람도 있으니, 이점 또한 사심과 거짓의 해악이다.
만약 한훤(寒暄 金宏弼)과 일두(一? 鄭汝昌)가, 불행히도 1백 년 후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그러한 헐뜯김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랴.
또 율곡(栗谷)으로 하여금, 다행히도 1백 년의 앞에만 태어나게 했다면, 그분이 존숭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이건 마음씨의 공변되지 못함에서 연유되는 것이요, 관찰하기는 싫어하고, 남의 말 듣기만을 숭상하는 일반적인 세태에서 나오는 짓이다.
임금이 진실로 공(公)과 사(私)의 분별을 밝게 한다면, 참과 거짓도 알아내기 어렵지 않으리라.
이미 공과 사, 참과 거짓을 분별하면,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고 도리를 밝히는 사람이 나와서, 그들이 배운 것을 행하리라.
그들의 겉이나 꾸미는 자들은, 감히 그들의 계책을 행하지 못하여, 모두 깨끗이 거짓을 버릴 것이며, 나라의 커다란 시비(是非)도, 역시 따라서 정해지리라.
그렇다면 그러한 기틀[機]이 어디에 있을까?
임금의 한 몸에 있으며, 역시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라고 할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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