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철학, 고독한 유령 칼 마르크스의 철학사상

탁양현 | e퍼플 | 2019년 01월 1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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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제1장. 맑스철학 一般



實狀, 필자는 共産主義者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지금 여기’에서 철지난 ‘맑스철학’을 지어내는 까닭은, 共産主義나 社會主義를 알지 못하면 資本主義 역시 알 수 없는 탓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를 統治體制의 根幹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양한 不得已가 내재되어 있다.
自由民主主義나 資本主義가 완벽한 이데올로기인 탓에, 그것을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나은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革命이나 改革을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國際政治的 상황에서, 민족과 국가의 安危을 분별치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이 첨예한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각 진영은 서로의 이론과 논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고서 眩惑되거나 籠絡당한다면, 그 원통함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실상을 알고서, 오롯한 자기의 신념으로써 선택하였다면, 후회도 없을뿐더러, 혹여 어긋나도라도 그에 대한 책임의식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알지 못하고서 惑世誣民되어 附和雷同하였다면, 그저 억울하고 회피하고 싶을 따름일 것이다.
이는, 먼 역사를 거론할 것도 없이, 日帝强占이나 韓國戰爭의 상황 속에서, 각 個別者들의 不得已한 無知가 초래한 不條理를 回顧하면 쉬이 납득되는 상황인식이다.

필자는 철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십수년 동안 재학하며, 두 군데의 연구소에도 재직했다. 그러면서도 그곳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공산주의자와 빨갱이들의 據點인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사실을 無意識的으로 외면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필자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다만, 前衛的 前導者인 것은 아니다.
여하튼, 세월이 흐른 후 回想해보니, 왜 필자가 그들과 소통할 수 없어 소외되었는지, 다소 이해가 된다. 가장 근본적으로, 필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빨갱이가 절대다수인 곳에서, ‘빨갱이 아닌 자’는 ‘아무도 아닌 자’이기 십상이다.
필자가 전공삼아 공부한 中國哲學의 경우도 그러하다. 당시 그곳에는 빨갱이-親中主義者로서 중국철학을 대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빨갱이라거나 친중주의자로서의 삶이 그릇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필자는 빨갱이도 친중주의자도 아니다. 그저 동아시아를 주도했던 중국문명 自體에 대해 알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보니 學位와 硏究費를 무기삼아, 필자를 소외시키며 조작하려고 하는 세력으로부터 자연스레 疏遠해질 수밖에 없었다.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곳은 共産主義者와 親中主義者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 해, 학위논문에 대해 문의했더니, 지도교수라는 자는 당최 납득이 되지 않는 조건을 전제하며, 아주 卑劣한 거부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결국 공산주의자도 빨갱이도 친중주의자도 아닌 자의 학위논문은, 심사조차도 거부한다는 의미였다.
하긴 그런 곳에서 밥줄을 지켜내야 하니, 빨갱이보다 더욱 빨갛게, 어느새 그 분위기에 잘 적응한 듯하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었으리라.
여기서 共産主義者는 자기의 신념을 좇는 부류로서, 오롯이 혁명가나 사상가로서 살아내는 자들이다.
반면에, 빨갱이는 공산주의자 흉내로써 비굴한 생존을 도모하는 무리를 지칭한다. 마치 日帝强占期의 잠재적 親日派쯤으로 比肩될 수 있다. 그러니 이에 대해 명료히 분별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아무래도 博士學位論文 심사는 여러 여건을 思慮하여, 다른 대학원에서 도모하여야 할 듯하다. 하지만 빈곤한 필자의 형편으로서는, 당최 그 비용을 마련키 어렵다.
하긴 作家에게 박사학위라는 것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왕에 시작한 공부를 박사수료에서 마감하려니, 객관적으로 마무리 짓지 못하는 듯하여, 다소 찜찜할 따름이다.

-하략-

저자소개

Karl Heinrich Marx(1818~1883)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 創始者다.
맑스는,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共産黨宣言’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資本論’의 저자로써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Friedrich Engels(1820~1895)는, 마르크스와 함께, 자연과 사회에 대한 철학 이론, 즉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체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운동방식과 그 문제점을 규명하는 정치경제학 이론,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방법과 관련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여년 동안, 사상적, 실천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상들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였으며, 이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인물은, 엥겔스와 그의 사상적 동반자인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엥겔스에게도 수많은 찬사와 함께 비난이 쏟아졌다.
마르크스가 후기에 주로 경제학 연구에 집중하였다면, 엥겔스는 자연 과학의 철학적 문제 등 주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연구에 집중하였다.
또 엥겔스는, 마르크스주의를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데도 많은 힘을 쏟기도 하였다.
엥겔스는 이렇게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이론가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운동이나 사회변혁운동과 같은 실천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혁명가이기도 하였다.

1820년 11월 28일, 엥겔스는 독일의 Barm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주였기 때문에, 그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다.
엥겔스는 Elberfeld에 있는 Gymnasium에 입학하였으며, Bremen의 한 상점에서 견습생활도 하였는데, 이때 ‘청년 독일’ 그룹에 가입하여, 시사 평론적인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Berlin에서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강의를 들으면서 Hegel哲學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으며, 청년헤겔학파와 교류하면서부터, Feuerbach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 엥겔스는, 사상적으로 急進的 民主主義를 지지하였다.
1842년, 엥겔스는 영국 Manchester로 이주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공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영국의 노동운동의 지도자들과도 사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주장하는 共産主義者가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 당시에 쓰여진 저술들이다.
1844년에 그는 ‘독불 연보’에 발표한 ‘국민 경제학 비판 개요’에서, 사회주의 관점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1845년에는 ‘영국의 노동 계급의 상태’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물질적 생산활동이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階級鬪爭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엥겔스는 마르크스와의 만남 이전에도, 이미 歷史的 唯物論의 기본틀을 독자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1844년에 엥겔스는, Paris에서 마르크스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에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서로 협력하면서, 공동 작업을 하는 사상적 동반자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나중에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게 된 것도, 엥겔스와의 이러한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최초의 공동 작업으로 같은 해에 ‘신성 가족’을 썼는데, 이것은 Bruno Bauer를 비롯한 청년헤겔학파의 관념론적 견해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45년에서 1846년에 걸쳐서,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공동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관념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기존의 독일철학이나 사상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Die Deutsche Ideologie는, 1845년부터 1846년에 걸쳐 집필되었는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동 저작이다. 제목의 Ideologie라고 하는 것은, 觀念論의 의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 이래 독일 관념론적 견해에 대한 대립적 견해를 공동으로 정리하고, 그들 자신이 이전의 철학적 의식을 청산하려고 하였다.
이 공동작업은 1845년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독일 이데올로기’는 헤겔 이후의 독일철학과 독일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아무리 혁신적인 西歐思想도, 그것이 낙후된 독일에 들어오면, 그 사상을 낳은 사회기반으로부터 유리되어, 단지 이론적인 문제로만 취급되고 해석된다.
이 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철학적 의식)’가 추상적·비현실적이며, 具體性이 없는 철학적 空論에 빠지는 이유가 있다고 지적하며, 마르크스는 비판을 통해서, 실천적인 사회적·역사적 인간을 참된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역사는, 전체로서 어떠한 구조를 갖고 있는가?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품의 생산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관계, 그것이 역사의 기초이다. 그리고 이 기초를 근거로 하여, 종교·철학·도덕 등의 의식형태가 결정된다.
곧 意識으로부터 생활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생활로부터 의식의 여러 형태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련에서, 생산과정, 인간관계, 의식형태는 발전·전개되고 여러 단계를 밟게 된다. 역사를 이러한 발전단계로 파악하는 것이, 참된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확립한 역사적유물론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1845-6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저술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출판되지 못하다가, 1932년 소련의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W) 중의 한 권으로 출판된 것을 보면, 그 분량은 본문만 약 530쪽에 달하고 있으며, 부록이나 색인을 포함할 경우에는 600쪽을 넘을 정도로 상당히 방대하다.
이 책은 주로 그 당시의 청년헤겔학파인 Stirner를 논파하기 위해 저술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歷史的 唯物論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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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소개

▣ 목차





제1장. 맑스철학 일반
제2장. 맑스철학 총론
제3장. 맑스철학 각론
제4장. 고독한 유령


고독한 幽靈, 유령이 떠돌고 있다.
온 세상에, 지독히도 고독한 유령이 떠돌고 있다.
어느 理想主義者의 强辯처럼, 세상을 온통 집어삼키는 괴물로서, 너무도 거대한 유령이 떠돌고 있다. 그것은 마지막 유령이다.
하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너무도 많은 유령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일견 유령의 떠돎이, 우리가 흔히 아는 인류의 역사다.

쉼 없이 얼음이 녹아 흐른다.
백파이프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마치 향피리 소리처럼, 끊어질 듯 이어진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는다.
실상, 유령은 고독한 피에로다. 아니 고독과 비탄으로 가득한 피에로의 흔적이다.
대부분의 피에로에게, 슬픔 이외의 감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만약 슬퍼하지 않는 피에로가 실재한다면, 가장 먼저 그의 피에로로서의 자격은 박탈될 것이다.
그래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피에로의 흔적은, 이미 유령을 닮는다.
그대. 여전히 고뇌하는 자여! 이제 그대는 피에로다. 그렇다. 흔적뿐인 피에로의 유령이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거대 도시.
지친 고래의 영혼은, 그 거리의 표면을 유령처럼 떠돈다.
어두워지면 알 만한 얼굴들마저도, 금세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수십 년 전부터 여행자는, 거대 도시에서 그런 유령들을 만났다.
최초의 낯섦이나 놀람과 달리,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유령과의 만남은, 이제 지극히 권태로운 일상이 되었다.
여행자는, 아주 흔해빠진 유령의 일원으로서 숱한 유령들을 만난 것이다.
흔히 유령은, 거친 짐승처럼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상태의 사람을 닮았다.
다만, 그런 유령에게는 미래가 없다. 더구나 과거는 이미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유령으로서의 狀態的 지속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위의 God들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유령들의 어두운 코미디를 아주 재미나게 즐기고 있다.
만약 ‘인간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들은 천국에서의 무료한 일상을, 결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지전능하다는 신들이 보기에, ‘인간 유령’들의 삶은, 참으로 유치하고 천박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래서 아주 재미가 있다.
아득한 전설처럼, ‘인간 유령’의 소문이 떠돈다. 결국은 떠돌아야만 하는 ‘바람 같은 소문[風聞]’처럼, 현실세계 여기저기에서 ‘인간 유령’이, 다시 떠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왜 자꾸 거대 도시를 찾아오는 것일까.
거대 도시에서 여행자는 철저히 고립된다. 저토록 무수한 얼굴 가운데서, 아는 얼굴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극심한 고립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행자는, 그야말로 철저한 유령이다. 더욱 치열하게 유령으로서 선다. 누구도 지각할 수 없는 흐릿함으로서, 세상에 선다.
과연 이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여행자는 모든 상황이 막막하기만 하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장마와 함께, 현재를 마무리할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대인기피증은 말할 것 없으며, 소음공포증 역시 악화되고만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유령을 관념화시키는 것은, 아주 위험스런 일이다. 관념적 추상은, 곧잘 불가능을 넘어서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불가능을 넘어서는 현상 자체는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넘어섬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라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형이상학을 해체하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결국 여행자들의 여행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며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여행자들의 본성이며,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뇌까렸던 것이다.
“인간이여, 피하라! 가혹한 검은 개가, 너의 곁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저 무지한 자들은, 여전히 온갖 욕망의 흔적만을 쫓고 있다.”
욕망의 흔적은 좇는 자들은 유령 자체이며, 그런 유령의 곁을 어슬렁거리는 ‘검은 개’는, 유령의 흔적이다.
사는 동안 ‘니체’는, 시나브로 그러한 실상을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아주 많은 것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지금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행복은 좀 더 가까워진다.
그래서 ‘지금 여기’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작은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니.”
여행을 외면하는 많은 ‘인간 유령’은, 실로 불행한 존재다. 그런데 그 불행은, 그가 유령인 탓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외려 지금 그가 지나치게 행복하려고만 애쓰는 탓에, 불행해져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미 심장이 늙어버린 청춘들은, 자기의 그림자에게 화풀이를 한다. 어쨌거나 그들의 심장은, 너무 일찍 취해버렸다.

어느 곳에서든, 유령은 다만 관찰한다. 굳이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령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줄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령은 또 다른 유령을 만나서, 새로운 유령을 생산하고서는 아주 기뻐한다. 이제 자기만큼 고통스러워할 새로운 대상적 존재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령들은, 새로운 유령의 생성을 가장 위대한 작업으로 인식한다.
실상, 사는 동안 각 유령들의 유일한 단 한 번의 공동작업이, 섹스를 통한 새로운 유령의 생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유령이 탄생하는 순간, 유령들의 공동의 관계는 동시적으로 마감된다.
고통의 끈질긴 대물림.
이것이야말로 유령들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적절하며 가장 근접한 규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유령으로서 살아내는 자여.
그리고 그대, 또 하나의 유령이여.
애써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자 하지 말라.
그대가 누군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 역시 결코 그대를 이해할 수는 없다.
만약 누군가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착각일 따름이다.
본래 유령은,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이해는, 신의 영역에서나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령들은, 늘 신의 영역을 훔쳐보며 탐내지만, 결국 유령은 신의 영역에 들어설 수 없다. 신의 영역에 근접하려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흔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너는 무엇을 찾아 이곳에 왔느냐?”
‘하얀 노인’의 물음에, 여행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그러한 물음에, 누군들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침묵으로 답할 밖에.
먹이를 찢어발기는 하이에나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겨운 족속들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런 자들은 그들끼리 잘 어울리며, 도토리 키 재기하듯, 들쭉날쭉 잘도 살아간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유령은 음울하지만 홀가분한 미소를 짓는다.

여행자는 도시에 있다. 아주 거대한 도시에 있다.
거대 도시에 있는 인간의 대부분은 청년이다.
그 까닭은, 청년이 가장 왕성한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거대한 도시에서, 노동은 곧 자본이다. 노동은, 시간을 내어줌으로써 돈을 얻게 되는 교환적 현상이다. 그리고 돈은, 이내 소모적 상품으로 교환된다.
그런 것이 바로, 유령들의 삶 자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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