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1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6,100 원

삼국지 2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삼국지 3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삼국지 4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삼국지 5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삼국지 6

도서정보 : 나관중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글항아리판 삼국지의 특징
―모종강본 120회 완역본을 정사와 함께 읽다


『삼국지三國志』가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이미 여러 번역자가 여러 버전으로 책을 내놓은 바 있는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불변의 고전이다. 『삼국지』는 한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元年(184) 황건黃巾 기의起義부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 오吳의 멸망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이번 글항아리판 『삼국지』가 번역의 기본으로 삼은 판본은 가장 압도적으로 유행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세칭 ‘모종강본毛宗崗本’ 120회본이다. 2009년 펑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간행된 교리본 『삼국연의』(선보쥔沈伯俊 교리)를 저본으로 삼고, 부가적으로 2013년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나온 『삼국연의』(제3판)를 채택했다. 추가로 모종강毛宗崗의 비평이 실려 있는 펑황출판사의 모종강 비평본批評本 『삼국연의』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모륜, 모종강 점평點評 『삼국연의』(2009) 등 관련 서적들을 추가로 참조했다. 또한 글항아리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을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매회 말미에 【실제 역사에서는……】을 덧붙여 한 회를 읽고 바로 이어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인지, 혹은 ‘소설’로서의 창작인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삼국지』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는 작업에서 야사, 전설, 기타 개인적 저술이나 비평은 최대한 멀리 했으며 오직 정사正史 자료만을 참고했다. 소설과 역사가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들이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으며, 이에 대한 역자의 평가나 보론은 최대한 덧붙이지 않았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석,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와 이현李賢 주석,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편찬한 방현령房玄齡의 진晉 왕조 정사인 『진서晉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청 왕선겸王先謙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등을 참조했다. 또한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 소개를 위해 남조 송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일부 참조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료 등을 참고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는 내용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더하려다 보니,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되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주고자 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형주자사였던 유표가 자신의 아들 유종이 아닌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 리 없으며, 동오의 최고 전략가였던 노숙이 제갈량과 비교해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동오 정벌 때 목숨을 잃었다고 나오는 노장 황충은 건안 25년(220)에 병사했으므로 이미 죽은 사람이 동오 정벌(221년 7월)에 참가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사례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명, 관직명이 그 시기의 실제와 다른 경우도 많고, 정확한 연대나 등장인물의 한자 성명, 자와 직책, 출신 지역, 연령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가령 처음 방문을 붙여 군사를 모집했을 때 실제 24세였던 유비의 나이가 28세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실제 ‘상국相國’이었던 동탁을 승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초선은 사실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오류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는데, 실제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주석에서 ‘오류’라 명시하고, 교리본을 기초로 정사 자료를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실 등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이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소설 『삼국지』에서는 매회 두 구절의 제목을 제시하여 전체 줄거리를 예시했는데,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에서는 역자가 이를 대신할 간단한 제목을 새로 붙이고, 두 구절은 각 장 제목과 함께 제시해두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독자들이 삼국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애썼다.


삼국지 읽기―삼국지의 시작과 현재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통속 문학가이자 『동주열국지』의 저자이기도 한 풍몽룡馮夢龍은 명대의 네 가지 소설인 『삼국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를 합쳐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즉 명대의 사대 장편소설이라 했다. 이때 ‘기奇’에는 내용과 예술의 신기함과 더불어 창조적인 성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삼국지』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체제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사실 소설이 아닌 중국의 위魏(220~265), 촉蜀(221~263), 오吳(222~280) 삼국의 역사를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233~297)가 기전체紀傳體 형태로 기술하여 편찬한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지』다.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으로 소설 형태의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 진수의 『삼국지』에 ‘기전체의 체제로 편찬한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의미의 ‘정사’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엄밀하게 말해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도 『삼국지』라고 할 때는 당연히 정사 자료인 진수의 『삼국지』를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는 소설 형태의 『삼국지』는 일괄적으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혼용하는 것은 부적절함에 틀림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관습적으로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에 이번 글항아리 『삼국지』 또한 소설과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삼국지』’라는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연의演義 소설인 『삼국지』는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 형태로 기록한 역사서를 ‘연의’의 체제로 새롭게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연의’는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야사野史를 융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고 부연 설명한 일종의 통속 장편소설이다. 이렇듯 연의 소설인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그에 주석을 붙인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의 주注를 시작으로, 당唐대에 유행했던 사찰에서 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속강俗講’과 송, 원元 시기의 잡극雜劇이 더해져 탄생했다. 흔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의 근간은 원대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건안建安(푸젠福建성)의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다. 이를 개편하고 민간 전설과 희곡, 화본話本을 종합하여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 주의 사료들을 결합시켜 소설 『삼국지』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라는 것은 공인되고 정설로 굳어진 상태다.

그러나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명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에 목각 인쇄본으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출간되었다. 이는 ‘가정본嘉靖本(일명 홍치본弘治本)’이라 불리는데 첫 권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기록한 역사를 후학인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 정리하다晋平陽侯陣壽史傳, 後學羅本貫中編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모두 24권이고 각 권은 10절節로 되어 있는데, 절마다 칠언일구七言一句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모두 240회다. 이전에는 이 『삼국지통속연의』가 나관중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판본 혹은 나관중의 원본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리고 만력萬曆(1573~1619)에서 천계天啓(1621~1627) 사이에 여러 종의 『삼국지전三國志傳』 판본(약칭 ‘지전본志傳本’)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20권으로 되어 있고 권마다 12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출판된 여러 판본은 『삼국지통속연의』와 『삼국지전』의 양대 계통으로 공존하며 발전해나가면서 여전히 『삼국지』의 최초 판본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약칭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가 만력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2절을 합쳐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고 평론을 달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가 바로 청대淸代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이 그의 부친인 모륜毛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탁오평본’을 기초로 하여 개작하고 비평을 가한 120회의 세칭 ‘모종강평개본毛宗崗評改本(혹은 모본毛本)’이다. 이 모본의 처음 명칭은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이었고, 이 ‘모본’이 출판된 이후 기존의 다른 모든 판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모본’이 널리 전파되면서 조금씩 다른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기본은 여전히 모본이었고, 또 이 모본을 개정한 사람도 없이 대략 300여 년간 내용상 커다란 변동이 없었으니, 『삼국지』의 발전 과정 중 최후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소설 『삼국지』’는 바로 이 ‘모본’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판본은 세 가지 계통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지전본’ 『삼국지전』, 그리고 모종강 부자의 ‘평개본評改本’인 『삼국지』다.

그러나 이 모본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많고 문맥상 오류도 많다. 중국에서 이러한 오류들을 수정하고 교정-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런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의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출판되었고, 이후 삼국지 전문가인 선보쥔沈伯俊 선생에 의해서 재차 정오正誤 대조 작업을 거쳐 정리된 ‘교리본校理本’ 『삼국연의』가 중국에서 최종적으로 간행되었다.


소설 삼국지와 실제 역사 기록의 비교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성된 연의소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아예 무시하고 순수문학적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아마 소설 속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창조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신출귀몰하는 전략 등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 믿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고사성어 등 『삼국지』에 관련된 내용 상당수가 사실은 허구이거나 과장이다. 청대 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소설 『삼국지』의 내용 중에 “70퍼센트는 사실이고 30퍼센트는 허구”라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된다.


-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기록에 도원결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유비는 호탕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은이들이 앞다퉈 그를 따랐다”고 했고, 「촉서- 관우전」에는 “선주(유비)는 잠잘 때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정과 도의가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촉서- 장비전」에는 “젊었을 때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장비보다 몇 살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유엽전劉曄傳」에는 “관우와 유비가 의리로는 군신의 관계이나, 은혜는 부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듯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군신 관계 이상으로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촉서- 관우전」에 장료張遼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나는 이미 장군將軍(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군신간의 맹세라 할 수 있지 결의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믿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았다”거나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등의 기록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맺었다는 명백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도원결의는 엄밀히 말해서 허구라 할 수 있다.


- 관우는 정말 긴 수염에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을까?

『삼국지』 「위서- 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또한 배송지 주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사람 가운데는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고 했다. 『후한서』 「여포전」은 “여포는 평소에 좋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적토’라고 불렸으며 그 말은 성벽을 뛰어넘고 해자를 나는 듯이 건너뛸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토마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동탁이 여포에게 하사했고, 다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고 관우가 적토마를 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포가 패한 이후 적토마의 행방 또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적토마는 여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여포의 사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또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근본적으로 대도大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우는 볼 수도 없었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말을 채찍질하며 1만 명의 대군 속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顔良을 찌르고(자刺)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에는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나자고 요청하여 각자 자신들의 병사들을 백 보 밖에 멈춰 있게 하고 장군끼리만 단도를 지니고 함께 만났다……”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가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면 ‘참斬(베다)’ 혹은 ‘벽劈(가르다, 쪼개다)’ 자로 기록했어야 하는데, ‘자刺(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다)’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관우가 말 위에서 사용한 병기는 긴 자루의 대도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사용한 병기는 장비의 것과 같은 장모長矛(긴 자루 끝에 금속 창날을 장착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


- 조조는 정말 동탁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을까?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동탁의 침상에 들어가 뒤에서 몰래 보도로 그를 찔러 암살하려다 동탁에게 들통나 미수에 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동탁은 조조를 의심하게 되고 조조는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암살을 위해 동탁과 관계가 비교적 무난했던 조조를 참여시킨 것은 허구이며, 조조는 동탁을 토벌할 계획은 있었지만 직접 암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동탁은 표문을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천거하고 함께 큰일을 계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오솔길로 몰래 동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 주 『위서』에는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세어世語』에는 “태조가 스스로 동탁의 명을 어겼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무제기」 본문에 따르면 “동탁이 결국 하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태조는 진류군陳留郡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병을 모아 동탁을 죽일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은 초선은 실존 인물일까?

초선이란 인물과 왕윤이 연환계를 썼다는 것은 모두 허구다. 초선이란 이름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초선은 원래 한 왕조 내명부의 관직 명칭이었고 그 지위는 비빈妃嬪에 비해 훨씬 낮았다.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는 “동탁은 항상 여포를 시켜 중합中閤(내실의 작은 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여 그 일이 발각될까 마음이 불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시비侍婢(시녀)라고 표현했지만 『후한서』 「여포전」에서는 ‘부비傅婢(따라다니는 시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동탁과 여포 모두 여자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초선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은 아니어도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포와 동탁 간에 여자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유표는 정말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줬을까?

소설 『삼국지』 40회 형주의 유표가 병세가 위중해지자 현덕을 청해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했다는 장면에서, “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네. 그래서 특별히 아우님에게 두 아들을 부탁하고자 하네. 내 자식들은 재주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우님이 형주를 다스려주게나”라고 유비에게 형주를 아예 넘긴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삼국지』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영웅기』는 “유표는 병이 들자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임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송지는 유비에게 형주를 넘긴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표 부부는 평소에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려 했기에 그들의 정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임종 무렵에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 기록과 배송지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유표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촉서- 선주전」 배송지 주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에 “유형주(유표)가 임종 때 내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했다”고 한 유비의 말은 형주를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돌봐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정치적인 통치를 맡긴 것과 단순히 자식을 부탁한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조조는 여백사를 죽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지』 4회에는 조조가 진궁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여백사의 집에 머물다가 오해가 생겨 집안의 가솔들을 죽이고, 여백사마저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조조의 잔인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배송지 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서』에 “태조는 동탁이 끝내 실패하여 패망할 것이라 여기고 관직을 받지 않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따르던 몇 명을 데리고 알고 지내던 여백사가 있는 성고成?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손님들과 함께 태조를 위협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가 병기를 잡고 몇 명을 죽였다”고 했고, 『세어』에는 “태조가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외출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는데 손님과 주인의 예를 갖췄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의심하여 검을 들고서 밤에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에는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에 그들을 죽였다. 이미 일이 벌어졌기에 비통해하며 ‘차라리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차이는 있지만 『세어』와 『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조조 자신이 스스로 의심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죽인 것이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실제 역사에서는 삼고초려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소설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삼고초려는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찾아갔느냐와 정말 세 번째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 『위략』과 진수陣壽가 쓴 「제갈씨집목록諸葛氏集目錄」「촉서- 제갈량전」에는 “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기록들의 요점은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과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또한 세 번 찾아갔다면 세 번 모두 만났느냐 아니면 세 번째에서 비로소 만났느냐 하는 것도 쟁점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표문을 올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를 찾아와서 신에게 당시의 정세를 자문하셨습니다’라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비록 듣고 보는 말 중에 다른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기 서로 어긋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세 번 찾아간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 제갈량의 제6차 기산 출병의 진실은?

제갈량이 총 6차례에 걸쳐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는 “건흥12년(234)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야곡에서 출병했고 유마流馬를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운송했으며 무공 물가의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위수 남쪽 기슭)에서 대치했다. 그해 8월에 제갈량은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차 기산 출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갈량의 사망으로 종결된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실제로는 건흥 6년(228) 봄의 1차 출병과 건흥 9년(231) 봄의 5차 출병만 기산으로 출병했기 때문에 여섯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으며, 건흥 8년(230) 가을의 제4차 출병은 제갈량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위가 촉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의 여섯 차례에 걸친 기산 출병은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두 차례에 걸쳐 기산 출병을 단행했고, 북벌의 총 출병 횟수도 여섯 번이 아닌 다섯 번이었다.

구매가격 : 15,400 원

어른의 그림책

도서정보 : 황유진 | 2019-09-1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1.
“도서관에서, 동네책방에서, 카페에서, 육아 모임에서
우리는 그림책을 함께 읽는다”

“인생에서 휘청거리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고,
누구나 시련을 견디는 법이라고,
그림책은 물론, 함께 읽는 이들이 말해준다”

워킹맘, 직장인, 주부, 중년 남성, 노인, 교사, 프리랜서, 자영업자…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그림책테라피스트가
다양한 연령, 계층의 사람들과 진행해온 ‘그림책 함께 읽기’ 이야기

이 책의 저자는 한때 IT 통신회사에 10년간 다니며 두 번의 임신과 출산으로 복직과 퇴직의 기로에 섰던 워킹맘이었다. 깊은 불안에 휩싸여 있던 그에게, 서커스단 광대인 난쟁이 듀크와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의 여행담 『오리건의 여행』(라스칼 글·루이 조스 그림)이 마침내 새로운 길을 찾으라는 용기를 주었듯, 이제 그림책은 감정 치유와 위로를 넘어 어른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는 매체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마음을 위로하던 그림책들이 집 밖으로 나오고 있다. 도서관에서, 동네책방에서, 카페에서, 육아 모임에서 어른들이 그림책 앞에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책으로 위로 받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림책의 선한 영향을 전하기 위해 그림책테라피스트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었다. 그는 주로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어른들은 긴 세월 문자로 세상을 읽고 파악해왔기에 혼자 그림책을 보면 글만 읽고 그림은 스쳐 지나기 십상이다. 그런데 누군가 낭독해주는 그림책을 보면 눈은 그림에 귀는 이야기에 머무르면서, 눈과 귀가 함께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림책이 ‘누군가 읽어줄 때 빛을 발하는 매체’기 때문이다.

저자가 진행하는 그림책 함께 읽기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3, 40대 엄마들 비중이 높지만 직장인, 워킹맘, 중년 남성, 여성 노인, 교사, 프리랜서, 심리상담사처럼 세대, 직업, 결혼 여부, 처한 상황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연령, 계층의 사람과 그림책을 읽을 때 마음 돌봄 효과는 배가된다. 그림책 주인공들이 겪는 위기와 갈등은 대부분 누구나 겪는다. 함께 읽기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위기와 갈등을 재해석하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나누며 안도한다. 인생에서 휘청거리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고 누구나 시련을 견디는 법이라고, 그림책은 물론이고 함께 읽는 이들이 말해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림책과 사람에 기대어 마음을 돌보고, 소중한 이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갈 방도를 알려주는 ‘그림책 함께 읽기’의 마법을 전하는 가이드북이자 독서 에세이다.

2.
자아, 불안, 두려움, 용기, 기억…
나를 들여다보고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어른들을 위한 속 깊은 그림책 36권을 만나다

그림책이 어른들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서이다. 그림은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없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늘 절제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세상에서 그림책은 날것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문자 언어로는 하기 힘든 경험을 선사한다.

자아, 불안, 두려움, 용기, 기억…. 저자가 그림책 읽기 모임에서 나누는 주제는 참석자의 연령, 성별, 직업이 다르듯 다채롭다. 이 책에 소개한 책들은 모임에서 함께 읽고 서로의 세계를 확장시켜준 그림책들이다. 엄선된 서른여섯 권은 나를 탐구하여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고, 가족 친구 지인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알려주고, 너른 세상에서 힘껏 살아갈 용기를 주고, 어떻게 일하며 살아갈지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책들이다. 다양한 직군, 연령의 어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대표적인 그림책들을 살펴보자.

▶ 아침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워킹맘에게, 『엄마, 잠깐만!』(앙트아네트 포티스 글 그림)
기차 시간에 늦을까 봐 헐레벌떡 뛰어가는 엄마의 외투 자락을 붙잡으며 천진한 아이는 연신 “엄마, 잠깐만”을 외친다. 귀여운 강아지, 도로 공사하는 아저씨, 빨간 나비 한 마리, 하늘에 뜬 아름다운 쌍무지개에 다정하게 응답하는 『엄마, 잠깐만!』의 아이를 보면 내 아이의 손을 끌며 재촉하기보다 아이와 함께 멈추어 무지개를 바라볼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집 가기 싫어!” 하며 악을 쓰는 아이를 맡겨두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직장으로 향하는 모든 워킹맘에게 권하는 책이다.

▶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직장인에게, 『구덩이』(다니카와 šœ타로 글, 와다 마코토 그림)
『구덩이』의 주인공 히로는 어느 일요일 아무 할 일 없이 구덩이를 판다. 목적도 쓸모도 없다. 그저 땅을 팔 뿐이다. 자기에게 딱 맞는 구덩이를 판 다음, 그 안에 한참 웅크려 머물다가 해방감과 충족감을 느끼며 다시 구덩이를 메운다. 구덩이는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안온한 휴식처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강렬한 바람, 혹독한 일터에서 놓여나고 싶은 욕구가 많은 직장인에게 나만의 휴식처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나의 엄마』(강경수 글 그림)
‘엄마’라는 단어만으로도 눈물을 쏙 뽑아내는 책이지만, 친정엄마와 딸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책. 그림책 모임에서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주제인 ‘엄마와 딸’은 너무 가까워서 되레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다. 책을 읽고 각자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참석자들은 모녀 간 곪은 상처를 드러내기도 하고 이상적인 모녀 관계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 제 마음 들여다보기가 어색한 중년 아저씨들에게, 『나, 꽃으로 태어났어』(엠마 줄리아니 글 그림)
『나, 꽃으로 태어났어』는 꽃의 일생을 다룬 아름다운 팝업북이다. 프로젝트가 실패해 실망감이 크거나 회사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다독이고픈 중년 남성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면 참석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그림책을 접해본 적 없는 이들은 꽃잎 한 장 한 장을 넘겨보고 신기해한다. 제 마음 들여다보는 게 어색한 중년 아저씨의 마음을 무장해제하고 꽃의 화사한 에너지가 굳은 마음을 사르르 녹여주는 책이다.

▶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알사탕』(백희나 글 그림)
그림책을 접한 경험이 거의 없는 고3 선생님들과 『알사탕』을 읽으면 입시가 지상목표이다 보니 늘 학생들 말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한다. 『알사탕』과 『낱말 공장 나라』(아녜스 드 레스트라드 글, 발레리아 도캄포 그림)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 나누기’ ‘귀를 기울이기’라는 주제로 읽을 때 좋은 책이다.

▶ 시작이 두려운 모든 이에게,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사노 요코 글 그림)
호기심 많지만 막상 권하면 할머니라서 못 한다고 손사래 치는 아흔여덟 살 할머니. 아흔아홉 번째 생일 케이크에 초를 다섯 개만 꽂으면서 다섯 살이 되어, 드디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게 되는 이야기다. 무언가를 욕망하고 시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책으로 『용감한 아이린』(윌리엄 스타이그 글 그림)과 함께 ‘잃어버린 용기’ ‘새로운 시작’이라는 주제로 읽기 좋은 책이다.

▶ 내일이 불안한 자영업자와 프리랜서들에게, 『씨앗 100개가 어디로 갔을까』(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 글, 야라 코누 그림)
나무가 날려 보낸 씨앗 100개가 열 그루의 나무가 되는 이야기를 재치 있게 그려낸 책이다. 프리랜서와 자영업자들이 가장 큰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가늠하고 재기보다 더 많은 씨앗을 뿌려야겠다” 하고 또 다른 이는 “버티고 또 버텨볼게요” 하고 말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도 크게 호응한다. ‘우리 아이가 과연 싹을 틔울 수 있을까?’ 하는 조급증, 불안감에 사로잡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3.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함께 읽기’ 가이드

저자는 어른들과 함께 읽는 그림책이 ‘마음을 미리 재보는 온도계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떤지 돌아보고 보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으로 그림책 모임을 꾸리고 있다. 내 마음의 미묘한 온도 변화를 감지하려면 그림책을 읽은 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각 장 끝에는 저자가 다양한 그림책 모임에서 참석자들과 해온 ‘표현 활동’의 예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비밀은 나의 힘’이라는 주제로 모임을 하고 난 후 ‘자존감을 회복하는 나만의 비밀 처방전 만들어보기’나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비밀 장소 그려보기’와 같은 활동으로 ‘나도 몰랐던 나’를 탐구한다. 표현 활동은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통합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림책 함께 읽기 모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모임 방법도 안내한다. 부록 1에는 저자가 운영하고 있는 ‘그림책 37도’ 정기 모임의 진행 방식과 준비 사항을 꼼꼼히 설명했다. 함께 읽을 주제 선정하기, 주제별로 책 엮기, 모임 성격을 고려한 책 선정, 질문 만들기, 표현 활동 구성하기 등을 구체적으로 안내해 그림책 읽기 모임을 하려는 어른들이 참고할 수 있게 했다. 그밖에 각 장 끝에 ‘주제별로 함께 읽으면 더 좋은 그림책 목록’을 수록했고, 부록 2에는 ‘다양한 그림책 함께 읽기 모임’의 예도 제시했다.

구매가격 : 11,000 원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말아줘 : 마음의 상처를 끌어내며 치유하는 로드맵

도서정보 : 양성희 | 2019-09-0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나의 마음속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장애아 엄마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마음의 상처를 끌어내며
치유하는 법을 찾았다!
살아가는 일에는 늘 괴로움이 따른다. 몸이 편안하고 머리가 맑고 마음이 여유로운 상태를 두고 우리는 ‘건강하다’고 한다. 우리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며 마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한 엄마는 좋은 엄마, 씩씩한 엄마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삶에 왜 꼭 괴로움이 따르는지 알고 싶어 마음공부를 시작한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마음 치유의 길을 발견한다. 이 책은 일상이 괴로움으로 차 있다는 오해를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괴로움의 본모습을 찾아내고, 아주 독특하면서도 효과적인 글쓰기 심리 치유법을 자세히 소개한다.

▶ 1장에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왜 괴로움을 느끼는지, 분노하는 뇌를 다스리는 법과 생각을 지배하는 언어의 효과에 대해 알아본다. 또한, 시련을 행운으로 바꾸는 비결을 공개한다.

▶ 2장에서는 마음의 괴로움을 만드는 근원인 뇌의 구조와 역할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 괴로워하는 뇌의 구조를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바꾸는 방법에 대해 제시한다.

▶ 3장에서는 우리의 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분노하는 뇌를 다스리는 법과 생각을 지배하는 언어의 효과에 대해 알아본다. 또한, 시련을 행운으로 바꾸는 비결을 공개한다.

▶ 4장에서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도구로써 저널 치유를 소개하고 저널 쓰기의 구체적인 지침을 알아본다.

▶ 5장에서는 내면의 치유를 위한 실제적 대처법으로 글쓰기 수업을 소개하여 실제 적용해볼 수 있도록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구매가격 : 5,400 원

중국 식민주의 팽창주의, 타이완 홍콩 신장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동북3성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9-0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中國 植民主義 膨脹主義





1. 中國大陸 王朝의 平均壽命

‘東北(D?ngb?i)’ 또는 ‘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中國地理大區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한다. 과거에는 ‘滿洲(M?nzh?u)’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遼寧省, 吉林省, 黑龍江省의 3개 省이 포함되며, 내몽골 자치구 동북부 ?四盟地域(후룬베이얼 시, 싱안 맹, 퉁랴오 시, 츠펑 시)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瀋陽)’이며, 그 외에 ‘하얼빈(哈爾濱)’, ‘창춘(長春)’, ‘다롄(大連)’, ‘치치하얼(齊齊哈爾)’, ‘지린(吉林)’ 등의 도시가 있다.
檀君朝鮮, 高句麗, 渤海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200만 명 이상의 재중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우리 韓民族의 대표적인 故土 疆域이다. 즉, 반드시 收復해야 할, 우리 한민족의 영토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한민족의 영토를 상실해버린 원인은, 弱肉强食의 國際政治 구조 속에서, 전통적인 중국의 植民主義와 膨脹主義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이 故土를 收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한민족만의 力量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國際情勢를 이용하여, 適期에 도모한다면 실현될 수 있다. 즉, 중국공산당의 中華人民共和國이 崩壞될 때, 우리에게 준비된 역량이 있다면 가능하다.
21세기 중국의 一帶一路 式 팽창주의는, 自國 內 식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를 전제하지 않으면, 美中 패권전쟁까지 不辭하며 勝負手를 던지는 中國共産黨의 意中을 알기 어렵다.
본래 膨脹主義는 일반적으로 국가나 정부의 영토 확장을 지향하는 이념이나 정책을 뜻하며, 擴張主義 또는 伸張主義라고도 불린다. 보통 군사적 공격성을 띠며, 영토 분쟁과 같은 국경 분쟁은 팽창주의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軍事的 팽창주의보다는 經濟的 팽창주의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 중국의 경우는 물론이며, 현재 세계 최강의 覇權國인 美國 역시 팽창주의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팽창주의는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를 앞세우므로, 中國共産黨에 의한 팽창주의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19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은, 미국에 帝國主義的 팽창이 진행된 시기였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에 걸쳐 폭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이들 지역을 지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의 다른 경쟁국들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유럽 열강과의 투쟁 속에서 독립을 성취했고, 民主主義를 발전시켰던 미국의 독특한 역사 때문이다.
19세기 말, 미국이 팽창주의로 나선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국제적으로 그 시기는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였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경쟁적으로 잠식했고, 아시아에서는 독점적인 무역권을 따내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다투었다. 이 ‘Great Game’의 대열에는, 새로운 경쟁자 일본도 끼어 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헨리 캐벗 로지’ 그리고 ‘엘리휴 루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를 포함한 수많은 미국인들은,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열강들처럼 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견해는, 해군의 강력한 입장 표명에 크게 힘을 입었다. 해군에서는,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함대를 증강하고 바다 건너 세계 곳곳의 항구를 연결하는 海上網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최초로 대륙의 경계를 넘어서 감행한 모험은,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알래스카에는 이누이트족과 몇몇 토착 부족들만이 드문드문 살고 있었다.
미국인들 대부분은, 국무장관이던 ‘윌리엄 스워드’의 이 행위에 분개하거나 혹은 무관심했다. 그래서 당시 알래스카는, ‘스워드의 바보짓’ 혹은 ‘스워드의 아이스박스’라 불렸다.
하지만 30년 뒤,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 강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미국인 수천 명이 북쪽으로 향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알래스카에 눌러앉았다.
알래스카는 1959년에, 미국의 마흔아홉 번째 주가 되면서, 텍사스를 밀어내고 미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주가 되었다.
1898년의 스페인-미국 전쟁은, 미국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미국은 카리브 해와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그리고 아시아 대륙 가까이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통제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에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가, 한때 신대륙에서 광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스페인의 마지막 영토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의 필리핀 군도가 스페인의 새로운 핵심 식민지로 떠올랐다.
1898년의 전쟁이 터진 배경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귀족주의적인 스페인 지배에 대한 염증, 독립을 열망하는 이들 나라들에 대한 미국인의 동정심, 그리고 ‘징고이즘’ 혹은 애국주의적인 언론에 자극을 받아 새로이 일기 시작한, 단호하고 확고한 애국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이었다.
1895년에 쿠바에서 독립전쟁이 터졌다. 미국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推移를 살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독립을 열망하는 쿠바 인에 동조적이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중립을 지키리라 결심했다. 3년 뒤 매킨리 재임 기간 중 미국의 전함 메인 號가, 하바나 항에 정박해 있다가 파괴되었고, 이 사건의 내막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이 사고로 250명 이상이 사망했다.
국민들 사이에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선동적인 신문 보도에 의해 심화된 분노는 전국으로 퍼졌다. 매킨리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시간을 지연해봐야 아무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대 무장 개입을 선언하고 나섰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스페인에 신속하고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끝났다. 4개월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중요한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선전포고 1주일 후, 홍콩에 있던 조지 듀이제독은, 전함 6척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는 미국인 단 1명의 희생도 없이, 필리핀에 있던 스페인의 전 함대를 격파했다.
한편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가 산티아고 부근에 상륙해서, 여러 차례의 교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산티아고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산티아고 灣에 있던, 4척의 스페인 장갑 순양함은 몇 시간 후에 폐선으로 변했다.
산티아고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성조기가 물결쳤고, 환호성이 하늘을 울렸다. 신문사들은 쿠바와 필리핀으로 기자를 파견했고, 이들은 미국의 영웅들이 이룩한 개가를 보도했다.
이 영웅들 가운데 단연 돋보인 사람들은, 마닐라의 ‘조지 듀이’와 쿠바에서 자원 연대 ‘러프 라이더스’를 이끈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해군부의 차관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지원자를 모집해 ‘러프 라이더스’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스페인은 곧 협상을 제의했고, 1898년 12월 10일, 종전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 미국은 쿠바에 대한 권리를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았으며, 쿠바가 독립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쿠바를 점령하기로 했다.
또한 스페인은 전쟁 배상금으로,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미국에 양도했고, 필리핀은 권리금 2천만 달러에 미국에 넘겼다.
미국으로서는 바다 건너에 있는 영토를 갖는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국은 이 새로운 영토에 민주적인 자치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서,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투쟁이 일어나고, 이걸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던 과거의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필리핀은 1916년 상하 양원의 입법부를 수립할 권리를 얻었으며, 1936년에는 자율적인 필리핀 공화국을 수립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에,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룩했다.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개입한 지역은, 필리핀뿐만이 아니었다. 스페인-미국 전쟁이 勃發한 바로 그해에, 미국은 하와이 제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그 이전에도 하와이와 관계를 가지긴 했지만, 주로 선교사들이 관련되거나 일회성 교역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것이, 1865년 이후에 미국인이 하와이 제도의 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자원은 주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이었다.
1893년에 왕정이 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자, 미국의 기업인들이 하와이의 유력한 인사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이들이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이 정부는 곧바로 하와이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나섰다.
帝國主義的 膨脹과 식민지 지배에, 미국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 내에 반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의회는, 처음에는 하와이를 미국 영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스페인-미국 전쟁으로 비롯된 國家主義의 영향을 받아, 1898년 7월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하와이 제도를 미국의 영토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진주만이라는 중요한 해군 기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에 하와이는 미국의 쉰 번째 주가 되었다.
쿠바는 1902년, 미국 군대가 철수하면서 형식적으로는 독립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쿠바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놓지 않고 있었다.
1934년, 이 권리를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세 차례 걸쳐서, 미국은 이 권리를 행사했다. 하지만 쿠바가 완전히 독립한 이후에도,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은, 1959년까지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1959년에 ‘피델 카스트로’가 기존 정부를 전복하고, 소련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社會主義 정부를 수립했다.
쿠바 동쪽에 있는 푸에르토리코는, 쿠바나 필리핀과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1917년에 미국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에 입법부를 구성할 권리를 허락했다.
하지만 이건 쿠바나 필리핀과는 달랐다.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천명했으며, 또한 푸에르토리코 인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었던 것이다.
1950년에 연방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인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했다.
1952년의 국민투표에서, 푸에르토리코 시민들은, 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것 둘 다 거부하고, 共和政이라는 형태를 선택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 본토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수많은 푸에르토리코 인들이 미국 본토에 거주했으며, 미국의 시민들과 동일한 시민권을 획득했다.
미국과 중국의 팽창주의는 서로 차이가 크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그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정글 속에서, 地政學的으로든 國際政治學的으로든, 대한민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대표적인 국가이며, 그 상황판단에 의해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積弊淸算이나 親中反日 프레임에 의한 온갖 ‘정치공작질’을 볼 때면, 어쩐지 과거 마오쩌둥의 ‘제사해운동’을 回顧케 된다.
1958년, 마오쩌둥이 참새를 가리키면서, ‘참새는 해로운 새’라고 한마디 한 것 때문에, 참새잡이 狂風이 불어, 참새 개체수가 급락, 해충이 창궐하여 대흉년이 들었다. 이것을 ‘제사해운동’이라고 한다.
除四害運動, 打麻雀運動, 속칭 ‘참새 죽이기 운동(消滅麻雀運動)’은, 大躍進運動의 첫 번째 단계로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장려된 정책이다.
‘除四害’란 ‘네 가지 해충을 제거한다’라는 뜻으로, 그 네 가지 해충은 ‘들쥐, 파리, 모기, 참새’였다. 이 정책의 결과, 중국 참새의 멸종으로 인해, 생태학적 균형이 무너졌고, 農業害蟲이 猖獗하였다.
이 정책은, 애당초 마오쩌둥이 1958년에 들고 나온 衛生運動이었는데, 마오쩌둥은 ‘들쥐, 파리, 모기, 참새’를 멸종시켜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했다.
참새, 엄밀히 말해 ‘유라시아 나무참새’가 해충으로 언급된 이유는, 참새가 곡식 낟알을 먹으며, 인민에게서 그들의 노동의 결실을 도둑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국 人民大衆들은 참새를 撲滅하는 데 동원되었고, 참새가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계속 하늘을 날다가 지쳐 죽게 만들기 위해, 냄비와 후라이팬, 북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가했다.
참새 둥지가 허물어졌고, 알은 깨뜨려졌고, 새끼새들은 살해당했다. 어른 참새들은 하늘을 날던 도중에 총에 맞고 떨어졌다.
이런 조직적인 참새잡이의 결과, 중국의 참새들은 멸종 직전까지 내몰렸다. 학교, 작업반, 정부 기관마다 죽인 참새의 부피에 따라, 비물질적인 상과 표창이 주어졌다.
그런데 1960년 4월이 되어서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참새가 곡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대량의 해충도 잡아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제사해운동’의 결과 쌀 생산량은 늘어나기는커녕 급락했다. 그러자 마오는, ‘네 가지 해충’에서 참새를 슬쩍 빼고, 대신 빈대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天敵인 참새가 없어지자, 메뚜기 개체수가 급격하고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 메뚜기 떼가 중국 전역을 뒤덮으며, 더욱이 대약진운동의 벌목 및 살충용 독극물 오남용으로, 이미 난장판이 된 중국 생태계를 초토화시켰다.
생태학적 불균형은 3년 大飢饉을 촉발시켰고, 4,000만명 이상의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발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더욱이 이미 북한에서는 마오쩌둥 실절보다 더욱 赤裸裸하게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마오쩌둥’의 ‘제사해운동’이 ‘문재인 정부’의 ‘정치공작질’과 유사하다면,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박정희 정부’의 ‘개발독재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취임한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밝혀, 오늘날까지도 ‘중국식 시장경제’의 기본이념이 되고 있다.
덩샤오핑 개혁개방 사상의 캐치프레이즈가 ‘흑묘백묘론’과 ‘선부론’이다. 흑묘백묘론은, ‘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즉, 고양이 빛깔이 어떻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처음 언급한 때는, 1962년이다.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은, 중국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대약진운동은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주의적 노력동원 등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무리하게 추진됐다.
이로 인해, 자원배분의 歪曲과 가뭄 등이 겹치면서, 4,000만 명이 餓死하는 慘劇이 빚어졌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1962년 공산당 중앙서기처 회의석상에서, ‘흑묘백묘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는 흑묘백묘의 예를 들며, 자본주의적인 이윤동기를 동원해,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덩샤오핑에게, 체제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공산당 정권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체제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부,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정부의 開發獨裁論과 비슷한 발상이다.
그리고 ‘先富論(Getting Rich First)’은, 1985년경부터 덩샤오핑이 주창한 改革開放의 기본원칙이다. 그 내용은, “능력있는 사람으로부터 먼저 부자가 되어라. 그리고서 낙오된 사람을 도와라.”는 것이다.
‘선부론’은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연해부와 내륙부는 하늘과 땅 차이의 경제 격차가 있다.
중국 최대의 상업도시 상하이에서도 격차는 점차 확대되고 있어, 먼저 부자가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동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의 상황은, 빈부 격차가 점차 해소되기보다는 점점 심화되어, 분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쉽지는 않은 형편이다.
서부 대개발 등의 정책은,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보다는 빈곤 탈출 정도의 효과만 있었으며, 지역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는,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를 던지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체제에서 당최 해결되지 않는 難題 중의 난제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자본주의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정치경제적 사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향후에도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현재 中華人民共和國은 多民族 聯合國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그 중 많은 疆域이 植民地 상태에 있다. 티베트, 신장위구르, 내몽골, 동북3성, 홍콩, 마카오 등이 그러하다. 나아가 타이완 역시 ‘中國 植民主義’의 대상이다.
물론 中國共産黨은 ‘하나의 中國’을 주장하며, 이러한 상황을 억지로 隱蔽시키고 있다. 때문에 향후 美中 覇權戰爭의 勝敗에 따라, 중국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된다.
현재 ‘홍콩민주화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홍콩이 一國兩制의 체제 아래서 민주화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 ‘天安門민주화운동’의 사례를 통해서도 익히 검증된다. 그것은 중국문화의 獨尊儒術的인 歷史的 慣性 때문이다.
따라서 시진핑 중국공산당 왕조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제아무리 경제발전이 되어도 중국의 民主化는 不可하다고 예측된다. 그러한 상황은 티베트, 신장위구르, 내몽골, 동북3성 등이 모두 그러하다.
現在的 상황에서 미중 패권전쟁은, 有數의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른다면, 과거 蘇聯이나 日本의 경우처럼, 美國이 승리하여 미국의 패권이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中國大陸의 역사에 등장하는, 역대 왕조의 평균수명은 65년 가량이다.
1949년 共産黨이, 최후의 통일왕조 ?을 이은 中華民國의 國民黨政府를 타이완으로 축출하고,?‘中?人民共和?(People's Republic of China)’을 건국한지 70여 년이 지났으니, 이미 그 평균수명을 넘겼다.
때문에 미중 패권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과거처럼 中國大陸이 자연스레 分裂될 것으로 예견된다.
중국에서 古代國家의 체제가 완성된 것은, 漢나라(B.C. 202)다.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 존재한 크고 작은 왕조는 총 60개다. 이 60개 왕조의 존속기간이 평균 64.77년이다.
60개 왕조 중 가장 오래 존속한 국가의 순위를 매기면, 淸나라(296년), 唐나라(289년), 明나라(276년), 前漢과 遼나라(209년) 등이다.?
前漢과 後漢을 합하면, 漢나라의 전체 수명을 407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王莽이 세운 新나라에 의해 전한이 멸망했기 때문에, 전한과 후한의 수명을 합하는 건 무리다.
漢나라 이래로, 중국에는 300년을 넘긴 王朝가 하나도 없었다. 200년 이상 존속한 왕조는, 위의 다섯 뿐이다.
따라서 중국 통일왕조의 평균수명이, 韓民族의 통일왕조인 高麗(475년)나 李氏朝鮮(518년)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萬世一系를 주장하는 일본의 天皇朝라면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권력의 長短은, 나름의 一長一短을 갖는다. 길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짧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다.
고인물은 결국 썩기 마련이라서, 긴 세월 이어진 왕조의 末期的 현상은, 대체로 悲劇的이기 때문이다. 高麗나 李氏朝鮮의 末期를 回顧하면 쉬이 알 수 있다.
한편 100년 이상 존속한 나라로는, 前漢, 後漢, 東晉, 北魏, 唐나라, 北宋, 遼나라, 南宋, 金나라, 元나라, 明나라, 淸나라가 있다. 모두 12개 나라가 100년을 넘긴 것이다.
그런데 이 중 200년을 넘긴 다섯 왕조를 제외하면, 100~199년 존속한 왕조는 모두 7개다.?
10년도 못 채우고 短命한 왕조는 2개다. ‘5대 10국’ 시대에 존재했던 後漢(947~950년)과 後周(951~960년)가 그러하다. 이 중 불과 3년 밖에 존속하지 못한 後漢은, 한나라 이래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단명한 왕조다.?
일반적으로 중국대륙 왕조가, 한반도 왕조에 비해 수명이 짧다.?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이 있다.
12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 왕조들과 중국대륙 왕조들의 興亡盛衰에 일정한 상호연관성이 있었다. 그런데 12세기부터 그러한 상호연관성이 현저히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중국대륙이 ‘5호 16국’의 분열기에서 南北朝의 분열기로 압축될 때, 한반도 분열도 3국의 항쟁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남북조에 이어 수·당 통일제국이 출현하자,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 시대로 한층 더 압축되었다.?
뒤이어 중국대륙이 ‘5대 10국’의 분열기에 접어들자, 한반도에서는 後三國의 분열이 재연되었다.
그리고 趙匡胤이 중국을 통일하고 宋나라를 세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王建이 高麗를 세워 後三國을 통일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중국대륙에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면, 한반도에서도 유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중국대륙에서 분열 분위기가 생기면, 한반도에서도 어김없이 분열 분위기가 생겼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연관성이, 12세기부터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대륙에서는 북송-요나라, 남송-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통일왕조 혹은 대규모 왕조가 명멸했다.
하지만 한국측에서는 高麗에서 李氏朝鮮으로만 바뀌었다. 그렇게 한반도의 왕조가 장기간 지속된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중국대륙 왕조에 대한 事大主義 선언이다.
여기서 李氏朝鮮이라는 명칭은, 檀君朝鮮, 箕子朝鮮, 衛滿朝鮮 등의 사례에 비추어 타당하다. 朝鮮王朝라는 명칭이 일상적이지만, 이는 지나치게 李氏朝鮮 偏向的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李氏朝鮮을 건국한 李成桂와 鄭道傳의 國是는, 두 말할 나위 없이 明나라에 대한 事大主義였다. 그리고 명나라를 잇는 淸나라에 대해서도, 丙子胡亂 등의 迂餘曲折 끝에 사대주의를 선언한다.
현재에 이르도록, 중국에 대한 事大主義 문제나, 일본에 대한 植民主義의 문제는 당최 解消되지 않고 있다. 21세기 지금 이 순간에도, 韓中日의 관계는 첨예하게 얽혀 있다.
더욱이 현대사회는 北韓과 美國의 관계까지도 뒤엉켜 있다. 그러니 사대주의나 식민주의의 解消만으로는 解決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國際情勢에 대해 각별한 관심이 요구되는 시기라고 할 것이다.
중국 역사의 최초 기록은, 기원전 1,250년 武丁의 통치기인 商나라(기원전 1,600~1,046)로 거슬러 올라간다.
黃河文明은 여러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檀君朝鮮을 중심으로 하는 東夷文明(遼河文明)의 영향력이 至大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夏나라, 殷나라, 周나라 이래, 약 5,000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가 무수히 興亡을 반복해 왔다.
漢나라 때, 중화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漢族이라는 말이 성립되었고, 唐나라는 서방의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도 하였다.
漢나라 이후에 한족들은 취약해지고, 외국 민족들이 중국인들을 정복하며 北魏를 건국하고 나서부터는, 중국 대륙은 異民族의 무대가 된다.
북위부터 당나라까지 이어지는 이민족의 정복왕조는 중국을 계승하였고, 元나라 때는 몽골인들이 중국 전토를 손아귀에 넣는다.
漢族들이 건국한 宋나라 때에는, 중국 중세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女眞族이 세운 金나라에 의해 유린당하여 사라진다. 또한 여진족은 淸나라를 건국하여, 지배자로서 중국을 손에 넣고 통치한다.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전쟁과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중국 본토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대만과 만주는 일본제국에 지배당하고, 중국 한족 남조의 수도로서 상징적이던 난징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한다. 홍콩은 영국이 지배했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하였다.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太平天國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한족의 개혁파들에 의해,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힘이 없었고,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 인해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保守派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辛亥革命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共和制 國家 中華民國이 탄생했다.
하지만 日本帝國에 의해 포섭되기도 하는 각지의 軍閥에 의해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몽골, 티베트의 독립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혼란에 싸여 분열되었다. 이러한 離合集散은 21세기에도 예견된다.
근대 일본제국의 침략에 의해 중국 동부지역을 잃고, 난징이 유린을 당하며, 중국 자체가 붕괴되는 시기를 보낸다. 이러한 中國崩壞는, 중국 역사에서 日常的인 현상이다.
이 때 일본의 중국 정복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으나, 러시아 또한 중국에 租界地를 설치하고, 중국 영토로 남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른바, 국제정치적 ‘Great game’이 勃發한 것이다.
1930년대에는 國共內戰(解放戰爭)과 中日戰爭(抗日戰爭)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戰場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정부가 2개 이상인 때도 있었다.
많은 중국인 가난한 농민, 소작농 계급들로 구성된 中國共産黨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힘을 키운다.
그 후 중일전쟁 중에, 일본의 세력 아래에 있던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세력을 늘려 온 중국공산당은, 계속되는 오랜 내전으로, 군인들에 의해 반복되던 민간인에 대한 피해에 지친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는다.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고 나서, 중국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일어난 國共來電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운다. 중국대륙의 역사를 살핀다면, 이제 중국은 분열의 시기가 자연스레 到來할 것임이 自明하다.
植民主義는, 國家主權을 국경 외의 영역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확대하는 정책활동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고체계를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향력이나 지배력 곧 覇權의 확대를 뜻하는 帝國主義와는 달리, 식민주의는 영역 곧 국가 疆域의 확대를 꾀한다.
帝國主義(Imperialism)는, 특정국가가 다른 나라나 지역 등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 또는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엄밀히 정의하면, 영향력 즉 패권보다는 영역의 지배를 확대하는 정책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帝國主義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imperium(제국), imperator(황제)인데,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로마제국 再現 試圖’를 제국주의라 하였다.
-하략-

구매가격 : 4,000 원

근현대 한반도 전쟁사,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9-0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근현대 한반도 전쟁사

1. 근현대 한반도에서 벌어진 3차례 국제전쟁

근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역사는, 전쟁에 의해 현재의 상태에 배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물며 한국전쟁에 의해, 대한민국이라는 國家가 탄생하였다고 해도 그릇되지 않다.
그러한 관점에서 큰 관심을 유발하는 전쟁은 크게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전쟁이 勃發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별 어딘가에선 전쟁 중이다. 다만 그러한 전쟁들은, 위의 3개 전쟁에 비해 직접적이지 않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의 공통점은, 한반도라는 地政學的 要衝地를 무대 삼아 펼쳐진, 국제정치적 패권 다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을 통해, 당시의 李氏朝鮮이나 大韓民國에는 利得될 것이 없었다. 단지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았거나, 한반도를 먹잇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列强이나 隣接國들에 의해, 21세기 지금 이 순간에도 再發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국제정세에 銳意注視해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은, 국제정세에 의해 한순간에 변화될 수 있는 탓이다.
흔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그 명칭 탓에, 한반도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전쟁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런데 두 전쟁 모두 한반도에서의 利權을 목적하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그러니 정작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국가들보다 더 큰 피해는 한반도에 가해졌다. 결국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빼앗기지 않았는가. 따라서 이 두 전쟁에 대한 인식을 기존과는 달리 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역시 그러하다. 한국전쟁도 그 명칭 탓에, 전쟁 당사자가 한국에 국한되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 아니라, 그 배후 세력에 의해 진행된 전쟁이었다.
그리고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처럼,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반도에 가해졌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배치 때문이다.
그만큼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한 탓에 不得已하게 유발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별다른 전쟁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休戰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何時라도 전쟁이 勃發할 수 있는 지역이 한반도인 탓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國際情勢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근현대 3차례의 전쟁이 죄다 國際戰이었으며, 향후에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도 국제전일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불행하게도 전쟁이 발생한다면, 그 전쟁은 인접국들은 물론이며 세계열강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전쟁일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 그만큼 첨예하게 각 진영의 이권이 맞물려 있는 지역인 탓이다.


2. 청일전쟁(1894)

淸日戰爭은, 淸나라와 日本帝國이 李氏朝鮮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大淸國(Daicing Gurun)’은, 大淸帝國, 淸朝라고도 한다. 1618년에, 女眞의 ‘英明汗(Genggiyen Han)’이었던 ‘누르하치’가 건국한 ‘大金(Amba Aisin)’을 근간으로, 아들 태종 崇德帝는 대금에서 大淸(Daicing)으로 국호를 바꾼 뒤, 중국 대륙을 대표적으로 지배하는 육상 제국이 됐다.

-하략-

구매가격 : 3,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