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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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철학





흔히 인간존재의 삶은 고통이라고들 한다. 출생 이후 죽음의 순간까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얽매인 채, 고달픈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삶의 과정 자체의 고통스러움이야, 굳이 말할 바 없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살아내는 동안 이런저런 인연으로 인해 관계를 맺게 되는 주변의 온갖 인간존재들로부터, 인간존재에게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어떤 잔혹함을 체험하게 될 때이다.
만약 인간이 다만 동물적 차원에 머무는 존재라면, 그러한 잔혹함이 별반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저 자기自己의 이득을 위해 손해되는 온갖 대상을 적敵으로 삼고서 잔혹하게 제거해버리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동물적 차원을 넘어서야 하며, 적어도 넘어서려고 하는 탓에 인간일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삶의 과정 안에서 인간존재가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타자他者들은, 본성적인 잔혹함을 결국은 드러낸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삶의 부득이不得已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죄다 애당초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본래적인 본성이다. 그래서 결국 삶을 살아내는 동안 모든 인간존재는 숱한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 것이 인간존재로서 어찌 할 수 없는 삶의 부득이라면, 이제 인간존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근현대의 가장 유력한 심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칼 융Carl Gustav Jung은,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는 동안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예컨대 철저히 개별자個別者나 주관적主觀的인 관점에서 마음의 상처를 초월하거나 승화할 수도 있다. 또는 철저히 집단자集團者나 객관적客觀的인 관점에서 마음의 상처를 억제하거나 억압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방법론은 마음(정신)의 심리적인 상처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가장 일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만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철학(인문)치료자의 태도를 갖기는 어렵다.
개인을 우선하는 주관적인 태도나 집단을 우선하는 객관적인 태도는 모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존재자는 개별자나 공동체의 관점보다는, 그 마음 안에 자신의 관점만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치료자는 이미 규정되어 있는 기존의 어떤 관점을 제시하려는 억지스런 의도보다는, 내담자來談者 스스로가 자신의 상처를 성찰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해주어야 한다.

마음에 상처 입은 존재자들은 적어도 그 상처를 서로 공유하기만 하여도 충분히 치유될 수 있다.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자신의 말을 진실로 경청해주면서 그 속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준다면 대부분의 상처는 나아질 것이다.
현대적인 마음의 병들은, 대부분 각 개별자로서의 인간존재가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현상은, 각 개인들의 성격이나 성품이나 인격에서 비롯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사회구조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각 개인의 문제는 스스로 대안을 모색하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는다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不得已]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심리학이나 종교학이나 정신의학 등은 개인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뿐,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마땅한 해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제학 등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해명할 뿐, 개인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외의 많은 분과 학문들 역시 이러한 형태의 한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 하다.
그렇다면 사회라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시대와 상황 속에서, 각 개별자로서의 개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철학의 바깥에 있지 않다.
현대철학의 가장 유력한 실존주의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철학입문Einleitung in die philosophie에서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한다.

우리가 결코 철학의 바깥에 있지 않음은, 우리가 철학에 관한 어떤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 해도, 우리는 이미 철학 안에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자신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항상 이미 철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굳이 철학하지 않아도 이미 철학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가끔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실존하는 한 언제나 필연적으로 철학한다. 인간으로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곧 철학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God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만약 신이 철학한다면, 그 신은 이미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본질은 한 유한 존재자로서의 인간존재의 유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존재는 이미 ‘철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발언처럼, 인간으로서의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미 철학 안에 들어서 있다.
그런데 인간존재는 서로 상이한 가능성과 다양한 깨어 있음의 단계와 정도를 가진다.
때문에 그에 따라 철학 그 자체는 감추어져 있거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정치나 경제 등의 각종 다양한 방편으로써 드러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경우 일반적인 철학으로서 인식되지 않을 따름이다.

‘철학’이라는 대상과 ‘철학함’이라는 행위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쨌거나 인간존재가 철학하려는 까닭은 철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철학의 바탕 위에서 철학하는 행위 자체가 ‘철학함’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이 둘은 경중輕重이나 우열優劣이나 선후先後 따위의 이분법적 도식으로써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도 않으며 분리될 수도 없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하나이지만 하나이지 않고 둘이지만 둘이지 않은’ 비동시적 동시성의 지평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현실세계의 온갖 ‘철학함’은 아무런 사전 전제도 전제하지 않는 무전제無前提로부터 시작된다.
주역周易의 사유 역시 그러한 무전제로서의 무극無極인 태극太極으로부터 시작되어서, 다시 무극으로 되돌아가는 순환과 변화의 과정 안에서, 결코 아무런 전제도 하지 않는다.
이는, 혹자들이 왜곡하여 오해하듯이, 요행을 바라거나 우연에 기대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추구하는 결과가 아니다. ‘스스로·저절로 그러하는’[自然] 천지자연이라는 이 우주 자체의 법칙적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역의 원리는, 주역철학周易哲學이나 삼현철학三玄(易․老․莊)哲學으로써 철학(인문학)적인 상담·치료를 추구하며 실현코자 하는 철학치료자에게는 반드시 요구되는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세계에는 흔히 세 가지 형태의 시공간이 존재한다.
이데아와 같은 이상향적理想鄕的 시공간과 이미지와 같은 초세적超世的 시공간과 실제적 현실세계인 세속적世俗的 시공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향의 시공간은 ‘텅 빔’[無]의 토대다. 인간존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고향이라서 이상향理想鄕이다. 또한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Utopia이므로 ‘텅 빔’[無]이다.
유토피아라는 개념 역시 그리스어의 없는ou- 또는 좋은eu-에 장소toppos라는 말을 결합하여,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만들어낸 개념인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좋은 장소란 의미다.
반면에 세속의 시공간은 유有의 토대다. 세계가 실제적으로 이어지는 곳이라서 세속世俗이며, 실재하여 나타나므로 현실現實이다. 그런데 과연 이 셋 중에서 인간존재가 실제로 머무르는 시공간은 어디일까?
아마도 대부분은 쉬이 실제적 현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잠시만 되짚어 생각해 보면, 인간존재는 결코 현실적인 세속의 시공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인식하게 된다.
분명 실제적으로는 현실의 세속에 속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이상향을 꿈꾸는 동시적이며 이중적인 실제와 초월의 사이적[間的] 시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존재는 세속의 시공간에만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그는 분명 정신(마음)과 육체(몸)를 분리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정신으로부터 분리된 육체라면 충분히 세속의 시공간에만 머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정신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실재하지 않으니 없는 것인가?

몸과 마음으로서의 인간존재는, 없음도 아니며, 없지 않음도 아니고, 있음도 아니며, 있지 않음도 아닌, 그 사이[間]에 머문다. 부득이하므로 몸의 현실에 토대를 두면서도, 늘 영혼의 이상향으로 비상하는 이중적 사이의 시공간에 있는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 사이, 시간과 공간 사이, 사람과 동물 사이, 아이와 어른 사이, 신과 악마 사이, 하늘과 땅 사이. 그러한 온갖 변화와 순환 사이에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자신이 그러한 사이에 있다고 생각되면 아주 불편해 한다. 적어도 시작이 있었다면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이에서의 선택과 불안보다는 소속에서의 확신과 안정 속에 머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편에도 확고히 소속하지 못한/않은 채 사이를 떠도는 자라면, 누구라도 이내 방랑자나 이방인으로 간주해 버린다. 사이의 시공간은 아무래도 잠시 떠도는 곳이지, 오랫동안 머무는 곳은 아니라고 여기는 탓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안에서 생성적이며 창조적인 변화는 오히려 그러한 사이에서 비롯하였다. 때문에 그러한 사이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주역의 원리를 깨닫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마음(동시적인 몸)에 상처를 입어 상담이나 치유를 필요로 하는 내담자들의 대부분은 늘 그러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특히 철학상담자나 철학치료자는 그런 모든 사이를 배려하는 인식이 요구된다.
이는 곧 철학적(인문학적) 상담·치료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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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주자의 중용장구

도서정보 : 자사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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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 : 치우침 없는 일상





‘중용’은, 모름지기 명실상부 중국문명 최상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텍스트이다.
예컨대, 대학원에서 도가철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자연스레 유가철학의 텍스트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게 된다. 그런데 ‘중용’이나 ‘논어’의 경우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외려 ‘노자도덕경’이나 ‘장자’를 독서하는 듯한 감명을 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 가장 대립적인 철학사상을 공부하는 자마저도 감동시킬 수 있는 텍스트는, 결코 흔하지 않다. 아니 너무도 희귀하다. 그런 것이 바로 ‘중용’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중용’은,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중용’편을 송나라 때에 단행본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 주된 내용은, ‘주자’의 주석에서 여러 차례 거론되듯이, ‘논어(論語)’나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가르침을 ‘자사’가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사’의 조부(祖父)이면서 동시에 멘토(mentor)였던 ‘공자’는, 70세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를 실현했다. 이는, 자기의 의지나 욕망을 좇아서 행동하더라도, 결코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세상은 쉬이 ‘종심소욕’ 자체가 애당초 그릇된 것인 양 규정해둔다. 그리고서는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을 아예 ‘종심소욕’ 자체가 불가하도록 훈육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결국에는, 정작 자기의 마음이 무얼 욕구하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21세기의 현대인이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으며, 인간존재로서 참으로 비극적인 내몰림이라고 할 것이다.
‘종심소욕’은 ‘공자’와 같은 성인마저도 추구한 바이다. 그래야만 삶이 풍요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불유구’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 하다면, ‘종심소욕’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참극을 초래하고 만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각자 자기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해버린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도 그러하다면, 인류문명은 금세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불유구’할 수 있다는 것은, 삶 안에서 ‘중용’을 잘 실현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불유구’한다는 것은, 나와 너, 개인과 공동체 따위의 사이에서, 치우침 없는 일상으로서의 ‘중용’을 실천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공자’와 같은 삶을 살아낼 수는 없으며, 또 굳이 그러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각 인간존재의 삶은 각자의 몫이며, 각자의 것일 따름이다. 어쨌거나 ‘공자’ 이후로 ‘공자’와 같은 삶을 살아낸 자는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종심소욕불유구’는 이르기 어려운 경지인 탓이다. 어쩌면 그래서 ‘자사’는 ‘중용’을 찬술하였던 것이다.

‘중용’의 치우침 없는 일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곧 ‘종심소욕불유구’를 실천한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컨대, 그렇게 ‘종심소욕불유구’에 근접하는 ‘중용’의 가장 극단적인 실현으로서, 삶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 사이의 ‘중용’을 말할 수 있다. 서양의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이를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 사이의 중화(中和)라고 했다.
자기보존적인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이, 곧 에로스다. 그리고 공격적인 본능들로서 구성된 죽음의 본능이, 곧 타나토스다.
삶의 본능에서 성격발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 본능이고, 이것에 내재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바로 리비도(libodo)다. 이러한 삶의 본능은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고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도록 한다.
반면에, 죽음의 본능은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한다. 이는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파괴적 에너지가 바로 모르티도(mortido)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에도 쉼 없이 자신을 파괴하고 처벌하며, 타인이나 환경마저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하는 행동을 한다. 대표적인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전쟁일 것이다.
삶의 과정 안에서, 이러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서로 중화를 이루기도 하고, 서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러할 때, 서로 중화를 이룬다는 것은, 곧 ‘중용’을 실현한다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쉬이 삶은 무작정 좋은 것이고, 죽음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식으로 단정해버리고는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지금 여기’의 현실세계에서 인간존재가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궁극한 ‘중용’은, 모름지기 삶과 죽음의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삶도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며, 죽음도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삶은 더욱 삶다워지고, 죽음은 더욱 죽음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삶이란 무작정 좋다고 하기엔 너무나 예술적이고, 죽음이란 무조건 나쁘다고 하기엔 지극히 미학적이다. 그래서 ‘중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중용’ 말이다.

인간존재의 삶이란, 제아무리 제 멋에 겨워 떠들어대며 으스댄들, 유학자이면서도 ‘공자’와 ‘맹자’를 조롱하며 비판했던 이지(李贄, 卓吾, 1527~1602)의 표현처럼, 결국은 고작 ‘한 마리 길들여진 개’의 신세에 불과한 듯하다.
‘이탁오(李卓吾)’는 자기가 쓴 책의 제목을, ‘불살라버려야 할 책(焚書)’이라고 지은 인물이다.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지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분서’에서 ‘이탁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다. 그리고 ‘공자’를 존경하지만, 정작 ‘공자’의 어떤 면이 존경할 만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는 난쟁이가 사람들 틈에 섞여 연극을 구경하면서, 앞의 사람들이 잘 한다며 소리를 지르면 덩달아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다.”
또 이런 말도 한다.
“그림자를 보고서 개가 짖어대기 시작하니, 곁에 있는 개들도 아무런 전후사정을 알지 못 한 채 무작정 짖어대기 시작한다. 그림자에 놀라서 짖어대는 개를 따라 짖어대는 개들과 나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중국문명 안에서 ‘이탁오’는, 유학자로서 ‘공자’를 조롱하고 또한 ‘맹자’를 공격하고 나아가 ‘주자’마저도 철저히 비판했던, 거의 유일한 사상가이다.
그런데 그런 ‘이탁오’야말로, ‘공자’ 이후 독존유술(獨存儒術)쯤을 내세우며, 유가철학을 한갓 통치적 이데올로기로서나 이용하려는 집단권력에 의해 줄곧 왜곡되고 오염되어 가는, 유학(儒學) 자체의 ‘중용’을 처절하게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가철학을 통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아서 독재하게 될 때, 서민대중들의 고통은 실로 극심한 것이다. 예컨대, 그러한 방식으로 500여 년을 통치했던 역사가 바로 ‘조선왕조’다.
그런데 엄밀히 말한다면, ‘조선왕조’의 왕정(王政)은 대체로 사대부(士大夫)들이 주도하는 권력체제였다. 대표적인 사대부 세력으로서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부각되기 시작한 ‘노론(老論)’을 특별히 거론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물론이며, 현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특히,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李完用)’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왕조 말기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그 세력의 당수였다는 것은, 조선의 사대부라는 세력집단의 정체성을 엿보게 하는 지극히 자극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물론 사대부들 전부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는 순간에, 지역에서 의병항쟁을 하거나, 먼 이국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사대부도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21세기 민주정(民主政)의 시대를 살아내는 현대인인 탓에, ‘조선왕조’라는 체제 내에서 서민대중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잘 감각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현재에 이르도록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대식 세습왕조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다소 근접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굳이 필자가, ‘조선왕조’를 북한과 비유하는 까닭은, 현재 북한의 국호가 ‘조선 인민 민주주의공화국(朝鮮 人民 民主主義共和國)’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의 국호인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대한’은 과거의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취했고, ‘민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취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것처럼, 북한은 국호를 ‘조선왕조’에서 취한 것이다.
그런데 남한이나 북한의 국호 모두 그다지 그럴 듯한 것은 되지 못 한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말할 나위 없으며, ‘대한’이나 ‘민국’이라는 것도 그 이면에 얽힌 역사는, 우리 것이므로 무작정 자랑스럽다고만 하기엔 너무도 깊은 치욕과 회한이 서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탁오’는 그렇게 한갓 통치적 이데올로기로나 일그러져버린 유학사상을 비판했던 것이다.
‘종심소욕불유구’는 물론이며 ‘중용’ 또한, ‘이탁오’처럼 자기의 원초적인 생존적 토대마저도 부정하고 거부해버리는 치열함이 없고서는, 결코 그 실제적인 실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설령 ‘공자’나 ‘자사’처럼 살아 내거나 ‘이탁오’처럼 살아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삶의 끝 날까지 ‘중용’을 지향하며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세계의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이룰 수 있는 참으로 진솔하고 소중한 ‘중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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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서정보 : 니체 지음(탁양현 엮음)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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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이렇게 말했다






적잖은 시간 동안, 나의 청춘을 온통 지배했던, 고뇌와 비탄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를 여전히 추억한다. 지금껏 여러 이유로, 너무나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온갖 사상들을 알고서는 이미 망각해버렸지만, 아마도 내 죽음의 순간까지도, 니체의 추억만큼은 망각되지 않을 듯하다.
니체를 추억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제목에 드러나 있는 바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정작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려고 했던 최후의 발언은 ‘위대한 침묵’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이 지금 이 텍스트를 지어내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많은 이들은, 니체에 관해 이런 말들을 한다.
“비록 깊은 밤 숨죽인 도둑처럼, 니체의 고뇌와 비탄을 슬쩍 훔쳤을지라도, 니체를 읽지 않은 자와의 만남과 대화는 너무나 소모적이다.”
“결국 부득이한 생존을 핑계 삼으며, 니체의 본의本意를 짐짓 모른 체하고 외면해야만 하더라도, 니체를 알지 못 하는 자와 철학이나 문학을 논변論辯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아가 인문학 자체에 대해서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어쩌면, 이제 니체를 기억하거나 추억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21세기는 이미, 굳이 니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고뇌와 비탄에 찬 시대인 탓이다.
이제 내게도, 청춘의 시절처럼 니체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전집은 물론이며, 독일어판 원서까지 무작정 뒤적여대던, 무모할 정도의 열정은 이제 없다. 그런데 그렇게 강렬하던 열정이 식어버린 후, 외려 니체는 아주 선명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선다. 참으로 묘한 노릇이다.

누구에게나 니체를 고뇌했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삶 자체에 대해서 참으로 절실히 고뇌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일견 니체는 곧, 고뇌 자체다. 무릇 고뇌 자체로서의 니체다.
니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서, 스스로의 고뇌를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으로써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니체의 고뇌는,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으로써 마감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마감의 순간에, 정작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후,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은 줄곧 계속 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발언과 차라투스트라의 침묵, 발언하는 차라투스트라와 침묵하는 차라투스트라.
이러한 차이를 안다면,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뇌하지 않아도 된다. 이에 21세기는, 차라투스트라의 가혹한 발언 이후의 위대한 침묵을 새로이 고뇌해야 할 시절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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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1

도서정보 : 공자(탁양현 옮김)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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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전해주는
인간존재 본연의 감성 에세이







‘논어’가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아우르는 불멸의 고전이 된 것은, 인간존재 본연의 감성을 참으로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난해한 논술의 형식이 아니라, 일상세계의 체험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에세이 형식으로써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면서, 근대 이후 한동안 단지 ‘학술을 위한 학술’을 추구했던 서양사회의 인문학적 관성을 좇아, 마치 논문은 아주 고상하며 고급한 글쓰기이고, 반면에 에세이는 아주 유치하고 저급한 것인 양 인식하는 자들이 간혹 있다.
이는 특히, ‘장자’가 들려주는 ‘우물 안 개구리’ 우화에 등장하는 개구리처럼, 상아탑에 틀어박힌 채로 강단학술쯤이나 주도해보려는 자들에게서 곧잘 볼 수 있는 행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로서는, 과도한 전문용어나 학술용어 따위를 남발하는 글쓰기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여타의 글쓰기에 비해 보다 우월한 위치에 배치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 ‘논어’는 시대를 관통하는 가르침을 안겨줄 것으로 여겨진다. ‘논어’는, 언어를 통한 가장 위대한 소통은 그것이 지닌 진솔함과 소박함에서 기인한다는 본래적인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장자’에는, 제나라 ‘환공’의 책읽기를 비판하는 ‘수레바퀴 장인’의 예화가 기술되어 있다.
이야기 속에서 ‘수레바퀴 장인’은, 애당초 인간의 언어는 그 소통에 있어 본래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언어가 개별자로서의 각 인간존재들 사이에서 작동함으로써 인해 기인하는 한계다.
인류의 다양한 글쓰기 형태 중에서, ‘수레바퀴 장인’이 추구하는 참된 소통의 가능성을 실현해 주는 것은, ‘논어’의 경우처럼 에세이 형식으로써 기술된 텍스트들이며, 어쩌면 논문이라는 형식이야말로 ‘수레바퀴 장인’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가장 대표적인 ‘찌꺼기[糟魄]’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필자는 십여 년 동안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난다 긴다 하는 석학들의 무수한 논문들을 독서했고, 또한 필자 역시 자의반타의반으로 적잖은 논문을 기술했다.
그런데 그런 무수한 논문들이, ‘논어’처럼 인간 본연의 감성을 담아내는 소박한 에세이에 비해서, 과연 어떤 측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인지 당최 의문이다. 나아가, 시나 소설 형식의 글쓰기의 경우도 그러하다.
물론, 논문이라는 학술적 글쓰기 자체가 그릇되었다는 게 아니며, 어지간한 논문이나마 짜깁기해 내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필자 역시 오롯한 체험으로써 잘 알고 있다. 다만, 그저 논문에만 치우쳐버리는 편중된 성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더구나 논문이라는 형식 그 자체에만 매몰되다보면, 논문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논리성을 갖추기보다는, 그 사유가 한없이 경직되어버리고, 메마른 감성과 핏발선 이성쯤으로나 경도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선학(先學)들의 찌꺼기를 짜깁기해서 치졸한 논문 쪼가리나마 지어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들이라면, ‘논어’를 통해 인간 본연의 인문학적 텍스트가 전해주는 감동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인연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좋은 인연[善緣]’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살다보면, 선연보다는 악연이 좀 더 많은 것만 같다. 그래서 어떻게든 악연을 풀어보려는 의도 자체는 가상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악연이 선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서양의 어느 왕처럼 엉킨 매듭을 과감히 절단해버리는 것만이, 부득이한 악연을 대하는 유일한 해결책인지 모른다.
필자 역시, 삶의 부득이한 악연들의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보려는 시도를 수없이 해보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체험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공자와 제자들의 혈연을 넘어서는 애틋함과 끈끈함이, 지금 여기에서 더욱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듯하다.

‘논어’의 저자는 쉬이 ‘공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논어’를 실제로 기술한 것은 그의 후학들이며, ‘공자’ 자신이 아니다.
이는, 마치 ‘신약’의 4대 복음서들이 모두 그 저자가 다르지만, 죄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기술인 바와 흡사하다. ‘논어’ 역시 철저히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기술이며, 다만 그 저자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어’의 저자의 문제에 있어,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를 존중하여서 명확히 저자를 밝혔듯이, ‘논어’의 저자들 역시 ‘공자’를 존중하여서 실제의 저자를 밝히지 않았던 것이므로, 이는 단지 서양사회와 동양사회의 문화적 차이인 것으로 이해하면 족하다.
이에 대해서도 한가로운 호사가들은 온갖 사태가 유발되도록 갖은 말들을 지어내지만, 그런 것은 한없이 소모적인 한갓 허망한 지적 유희일 따름이다.

모름지기 ‘논어’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전통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텍스트다. 그러다보니 ‘논어’는, 그것이 저술된 이후 가장 많은 주석과 해설이 덧붙여진 텍스트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학문과 정치를 시도해볼 수 있는 천부적인 특혜를 보장받은 양반사대부로서, ‘논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더욱이 ‘논어’에 대한 ‘주자(朱子)’ 등의 유력한 주석이나 해설에 대한 이해 없이 과거시험에 급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런 탓에 ‘논어’는, 그 어느 텍스트보다도 본래의 원전이 지니고 있는 본의가 그만큼 더 많이 훼손되고 왜곡되어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하물며 21세기에 이르러서라면, 기존의 무수한 주석이나 해설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논어’ 본래의 담담한 언어를 접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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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2

도서정보 : 공자(탁양현 옮김)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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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전해주는
인간존재 본연의 감성 에세이







‘공자’의 삶을 대변하는 말은 ‘주유천하(周遊天下)’다. ‘주유천하’는 말 그대로 천하를 두루 여행했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여행자로서의 ‘공자’인 것이다.
필자도 대학원에서 중국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하면서, 중국의 전역을 몇 년에 걸쳐 다녀보았는데, 천하를 주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소나마 체감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다. 바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다. 이는 ‘공자’가 70세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경지였다.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철학사상을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논어’ 전체를 집약하는 한 마디 역시 ‘종심소욕불유구’라고 할 것이다.
‘종심소욕(從心所慾)’은 자기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불유구(不踰矩)’는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대로 해도 결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혹자는 이러한 경지가 자칫 일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 하거나, 자기의 마음을 억지로 억제하거나 억압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 지조차 잘 알지 못 하므로, 애당초 ‘종심소욕’에 해당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인간존재의 마음 안에는 온갖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서양의 심리학에 의한다면,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상태에서의 욕망을 지칭한다. 그러하다면 과연 그러한 욕망 자체가 죄다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불유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를 성인이라면서 숭앙하는 것이다. ‘공자’는 자기의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법도에 전혀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종심소욕불유구’를 논할 만한 나이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청춘의 시절을 이미 살아낸 필자로서는, 이제 자꾸 중년의 삶에 대한 ‘공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이 40에는 자기의 중심이 서서 현혹되지 않았고, 나이 50에는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그리고 ‘논어’ 양화(陽貨)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40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면, 그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공자’에 따른다면, 필자의 나이쯤에는 이미 자기 삶의 중심을 갖고서 세상사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고, 이내 하늘이 나에게 명령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여전히 온갖 세상사에 온통 휘둘리고만 있으며, 당최 몇 년이 흐른 후에도 천명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들만큼 잘 살아내지 못 하는 탓에, 늘 남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으니, 아무래도 끝장난 인생인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만이, ‘공자’의 소중한 가르침에 그나마 다소라도 부응하는 일이리라.

중국인들에게 ‘공자’는 무한한 민족적 자긍심을 주는 존재다.
예컨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야구선수들을 활약상을 볼 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민족적인 자긍심을 느낄 것이다.
박찬호, 추신수, 류현진, 강정호…. 이런 이름들을 들을 때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에게 어떤 실질적인 이득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공자’를 프로야구선수와 비유한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공자’의 존재는, 마치 현실세계를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문명에 가장 잘 적응하면서도 동시적으로 가장 잘 맞서는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처럼,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논어’를 독서하고 ‘공자’의 삶을 공부한다고 해서, 어떤 실제적인 이득이 발생할 리는 없다. 더욱이 현대처럼 첨예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목적하는 자본적 이익의 발생은 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논어’를 읽는 일은, 삶의 무한한 자긍심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논어’가 인류의 고전이 지닌 미학적 본질을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 현실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업의 형태는 경비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경비(警備)는 말 그대로 ‘경계를 갖춘다’는 의미이며, 경계(警戒)라는 것은 무언가를 주의하여 살피며 돌보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이 경비하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저 그 대상이 다양할 따름이다.
예컨대, 부모는 자식을 경비한다. 선생은 학생을 경비한다. 경찰은 시민을 경비한다. 군인은 영토를 경비한다. 자본가는 자본을 경비한다. 사업가는 사업을 경비한다. 금융가는 금융을 경비한다. 정치가는 정치를 경비한다.
비단 직업적인 활동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삶의 활동이라는 것이, 실상은 살피며 돌보는 일이 아닌 바가 없다.
그렇게 ‘공자’는 천하를 경비한 것이다. 다만, ‘공자’가 경비하는 대상이 일반적인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이 세계 자체였던 것이다.
인류사에 위인이나 성인으로서 기록된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공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 등, 인류의 영원한 리더로서 자리매김 된 인물들은, 대체로 천하로서의 세계 그 자체를 경비한 인물들이다.

필자는, 살아온 날들을 회상할 때면, 필자보다 먼저 살아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처럼, 지나온 삶에 대한 온갖 회한이 먼저 찾아든다.
그래서인지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회한으로나 기억되는 과거의 시절로, 굳이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별로 없다. 물론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과학기술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하튼 삶이란,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 교리적 바탕으로 삼는, 온갖 상상과 갖은 이론으로써 꾸며 둔 죽음 이후가 아니라, 다만 ‘지금 여기’의 일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 일이 어떠한 일이든,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이, 곧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공자’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죽음에 대해서 묻는 ‘계로(季路)’에게, “삶도 미처 알지 못 하는데,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未知生, 焉知死.]”고 대답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제, 삶의 청춘보다는 삶의 황혼이 좀 더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세월이 그만큼 흘러버린 것이다.
어지간히 살아낸 이들이라면, 대부분은 이러한 생각을 할 것이다. 시나브로 세월이 금세 흘러버렸다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좋은 인연[善緣]’은 선연으로, ‘나쁜 인연[惡緣]’은 악연으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게도 되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자잘한 삶을 살아내는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자잘한 ‘종심소욕불유구’를 실현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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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선사의 임제록

도서정보 : 임제선사(탁양현 옮김) | 2018-07-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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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여행자 ‘임제(臨濟)’





‘임제선사(臨濟禪師:?~867)’는 ‘당(唐)’나라의 ‘선승(禪僧)’이다. ‘임제종(臨濟宗)’의 ‘조부(祖父)’로서 ‘황벽희운(黃檗希運:?~850)’의 법맥을 이었으며, ‘사호(師號)’는 ‘혜조(慧照)’이다.
‘논어’가 철저히 ‘공자’의 언행을 기술한 텍스트이지만, ‘공자’가 실제적인 저자는 아니며, 그의 제자들이 기술한 것처럼, ‘임제록’도 철저히 ‘임제’의 언행을 기술하였지만, 실제적인 저자는 그의 제자 ‘삼성혜연(三聖慧然)’이다.

‘임제’의 언행록인 ‘임제록’은, ‘헐!(喝)’에서 시작하여 ‘헐!’에서 끝을 맺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일견 ‘임제록’에서 가장 인상적인 성음적(聲音的) 개념은 ‘헐!’이며, 현대적으로는 시대를 풍미한 유행어라고 할 수 있다. 요새 한국사회에서 ‘헐! 대박’이라는 유행어가 회자되는데, 역자(譯者)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주 기묘한 감회에 젖어들곤 한다.
‘헐!’은, ‘갈(喝)’이라는 한자(漢字)의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기존에는 대체로 이 글자를 ‘갈!’ 쯤으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주로 꾸짖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갈’이라는 한자어의 발음이 ‘hè’이므로, ‘할!’이나 ‘헐!’이라고 번역하여 표기하는 것이 타당하다.
중국어 발음은 ‘흐!’ 혹은 ‘흐어!’ 쯤으로 표기할 수 있다. 이를 고함지르듯 한다면, ‘할!’이나 ‘헐!’이라고 발음될 것이다. 더구나 ‘임제’는 ‘당’나라 중기에 살았던 승려로서 중국인이다. 때문에 그런 그가, ‘喝’이라는 글자를 ‘갈!’로 발음했을 리는 만무하다.
여하튼 ‘헐!’에는 무한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무한은 곧 텅 빔이다. 그래서 ‘헐!’에는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다. ‘헐!’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상황은 동시적으로 종결된다. ‘헐!’의 영역에서는,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인 것이다.
칼날 위의 여행자, ‘임제’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은, 마음이 영원한 여행 중에 있으면서도, 몸은 집을 떠나지 않는다.[有一人, 論劫在途中, 不離家舍.]
또 한 사람은, 몸은 집을 떠났지만, 마음이 여행 중에 있지 않다.[有一人, 離家舍, 不在途中.]
어느 쪽이 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한가?[那箇合受人天供養?]”

‘임제’에게 여행다운 여행은, 응당 마음의 여행이다. 제아무리 몸이 떠나본들, 마음이 여전히 묶여 있다면, 그 몸은 결코 떠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아무리 몸을 묶어 놓더라도, 마음이 이미 떠나버렸다면, 그 몸을 붙들어둘 방법은 없다.
물론 몸과 마음의 여행이 별개일 수는 없다. 마음이 자유롭게 떠나더라도 몸이 묶여 있다면, 묶여 있는 몸을 떠나도록 하는 데는 적잖은 세월과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그리고 몸이 떠났더라도 마음이 묶여 있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몸도 마음도 모두 얽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임제’는 마음의 여행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마음의 여행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마음과 몸은 늘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행승(修行僧)들이, 굳이 그러한 몸의 고행을 시도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제’는 여행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도’를 추구하는 벗들이여.[道流.]
‘불법’은 억지로 공로를 쌓은 작용이 아니다.[佛法無用功處.]
그저 평상시대로 자연스레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이다.[祇是平常無事.]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屙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어리석은 자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愚人笑我, 智乃知焉.]
그래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기 자신의 바깥을 지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라고 했던 것이다.[古人云, 向外作工夫, 總是癡頑漢.]
그대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의 주인이 된다면, 그대들이 서 있는 ‘지금 여기’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될 것이다.[儞且隨處作主, 立處皆眞.]”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어디를 가더라도 주인일 수 있는, 이러한 여행자의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자연스럽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존재가 자기 자신의 바깥을 지향하게 되면, 결코 이러한 여행을 실현하기는 어렵다.
물론, 인간존재가 자기 바깥의 세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가장 기초적인 생존이나 생계를 위해서라도, 바깥의 세상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러한 상태를, 현대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페르소나(persona)’라고 표현한다.
‘페르소나’는 우리 식으로 이해한다면, 체면치레나 예의범절쯤에 익숙하도록 훈육된 사회적 자아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페르소나’로서, 인간존재들은 사회적이며 집단적인 활동을 시도하고 지속할 수 있다.
그런데 ‘임제’는 일관되게 그러한 ‘페르소나’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 특히 ‘불도(佛道)’를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결코 자기 바깥을 지향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바깥을 지향하는 현상은, 지극히 고대적인 것이다. 예컨대, ‘공자(孔子)’의 철학사상을 일언이폐지하는 개념인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에서 잘 드러난다.
전통적인 유가철학은, ‘종심소욕불유구’가 하나의 개념인데도, 이를 자기 내면의 욕망을 좇는다는 ‘종심소욕(從心所慾)’과, 사회적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불유구(不踰矩)’로 분리한다.
그리고서는 ‘종심소욕’은 억압적으로 억제해버리고서, ‘불유구’의 측면만을 강제한다. 그래야만 집단권력이 공동체를 계층적으로 소유하고, 그 소유권을 유지하며 지속하는 데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유가철학에 관심을 갖는 자라면,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숙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수월치 않은 작업일 것이다. ‘공자’ 이후, 일관되게 편면적(片面的)으로만 치우치고 있는 역사적 관성을, 전면적으로 해체하고서 새로이 정립해 나아가야 하는 거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유가철학은 영원히 마치 조선시대의 집단주의적 유학처럼, 늘 시대와 상황 안에서 제거되어야 할 역사적 폐습으로서나 기억될 따름일 것이다.
아주 재미난 역사적 사실로서, ‘공자’ 역시 ‘임제’ 못잖은 여행자였음을 말할 수 있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이는, 지극히 고대적인 여행자로서 ‘공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공자’가 ‘정’나라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제자들을 잃어버리고서, ‘공자’ 홀로 성곽의 동쪽 문 옆에 서 있었다.[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자공’이 어느 ‘정’나라 사람에게 ‘공자’를 보았느냐고 묻자 그 행인이 대답했다.[鄭人或謂子貢曰.]
‘동문’ 옆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순’임금이나 ‘우’임금 같고, 어깨는 ‘자산’과 같았소.[東門有人, 其類似堯, 其項類皐陶, 其肩類子産.]
그런데 허리 아래로는, ‘우’임금에게 세 치쯤 미치지 못 하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주인 없는 ‘상갓집 개’와 같았소.[自然腰以下, 下及禹三寸, 廐廐若喪家之狗.]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문’으로 달려간 ‘자공’은 ‘공자’에게 방금 행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사실대로 고했다.[子貢以實告孔子.]
이야기를 듣고서 ‘공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孔子欣然笑曰.]
용모에 대한 형용은 정확하지 않지만,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말이다.[形狀末也, 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공자’의 삶을 대변하는 표현으로서 ‘주유천하(周遊天下)’는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렇게 두루 천하를 여행하면서까지, ‘공자’가 실현코자 했던 이상적인 정치를 이해하고서, ‘공자’를 등용해 주는 군주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 행색이, 결국에는 ‘상갓집 개[喪家之狗]’와 같은 상황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자들 앞에서 지어내야만 하는 ‘공자’의 웃음은, 지극히 씁쓸한 회한을 담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공자’의 ‘주유천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임제’의 ‘인물론(人物論)’은 아주 잘 들어맞는 논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로부터 뛰어난 선배일수록,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오히려 쫓겨나곤 했다.[自古先輩, 到處人不信, 被趁出.]
그리고서는 나중에야 비로소 그가 귀한 사람인 줄을 알게 된다.[始知是貴.]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면, 그런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若到處人盡肯, 堪作什麽.]”

‘임제’는 가는 곳마다 환영받으며 인정받는 자야말로, 정작 쓸모없는 자라고 논변한다. 위에서 기술한 ‘공자’의 상황에 아주 잘 들어맞는, ‘임제’의 담화라고 할 것이다. ‘임제’의 견해에 따른다면, ‘공자’가 쓸모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외려 ‘상갓집 개’의 신세가 되도록 인정받지 못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훈육된 대로 쉬이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응당 좋아하지 않는 자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다 자기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다보면, 정작 해야 할 말이나 행동을 하지 못 하게 되어버린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페르소나’의 치우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는 결코 여행자일 수 없다.
때문에 ‘임제’는, ‘부처’마저도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선종(禪宗)’의 문화에서는 지극히 기초적인 인식으로서 규정된다. 그런데 ‘부처’마저도 부정하고 비판하는, 그러한 극단적인 부정과 비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마치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다소라도 욕심이 있거나 욕망이 있다면, 이내 집착하게 된다. 그러한 미련을 지닌 상태라면, 결코 부정하거나 비판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러한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진보(進步)’는, 기존의 것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애당초 기성의 기득권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집단권력을 도모하기 위해 결집되는 것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보수(保守)’는, 기존의 것들을 고수하려고 한다. 그것이 자기에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득의 차원을 넘어서서, ‘보수’로서 기성의 기득권을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좀 더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수천 년의 역사 안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수’로서 참된 마음으로 공명정대하게 기성의 기득권을 부정하며 비판하는 인물은 아주 희귀하다.
인간존재가 살아내는 동안, 부득이하게 득표를 목적하는 정치인이나, 인기를 목적하는 연예인의 신분이 아니라면, 굳이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목적을 지니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결코 건강한 지향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임제’는, 온갖 일을 텅 비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사람이라고 논변한다.

“일이 없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사람인 법이다.[無事是貴人.]
그러니 억지로 조작하지 말고, 오로지 평상시 그대로 자연스레 살아가라.[但莫造作, 祇是平常.]
그대들이 자기 자신의 바깥을 지향하며, 주변을 찾아 헤매면서, 방편을 구해봐야 착각일 따름이다.[儞擬向外, 傍家求過, 覓脚手錯了也.]
다만 ‘부처’를 희구하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러한 ‘부처’는 그저 명칭이며 글귀에 불과할 뿐이다.[祇擬求佛, 佛是名句.]”

‘임제’는 자기의 바깥에 있는 것은, 그것이 설령 ‘부처’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명칭이나 글귀에 불과하다고 규정한다. 이는 참으로 치열한 자기 수행의 과정이다. 곧 칼날 위의 여행인 것이다.
나아가 ‘임제’는, 스스로가 그토록 가혹한 칼날 위의 여행길을 떠돌게 된 까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대들은 그렇게 무언가에 의지하여 이미 변화해버린 ‘불국토’ 안에서,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儞向依變國土中, 覓什麽物?]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과 ‘보살승(菩薩乘)’ 등의 ‘삼승’이나, ‘수다라(修多羅)’와 ‘기야(祇夜)’와 ‘수기(授記)’와 ‘가타(伽陀)’와 ‘우타나(優陀那)’와 ‘니타나(尼陀那)’와 ‘아파타나(阿波陀那)’와 ‘사타가(闍陀伽)’와 ‘비불략(毘佛略)’과 ‘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와 ‘우바제사(優波提舍)’ 등의 ‘십이분교’마저도, 죄다 똥 닦는 휴지일 뿐이다.[乃至三乘, 十二分敎, 皆是拭不淨故紙.]
‘부처’란 허깨비로 나타난 육신이고, ‘조사’란 늙은 ‘비구’일 뿐이며, 그대들에게는 어머니가 낳아 준 진짜의 육신이 있지 않는가.[佛是幻化身, 祖是老比丘, 儞還是娘生已否.]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희구하면, ‘부처’라는 ‘악마’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희구하면 ‘조사’라는 ‘악마’에게 얽매이고 말 것이다.[儞若求佛, 卽被佛魔攝, 儞若求祖, 卽被祖魔縛.]
그대들에게 만약 희구하는 것이 있다면, 죄다 고통일 따름이니, 아무런 일도 없느니만 못 할 것이다.[儞若有求皆苦, 不如無事.]”

‘임제’는, 대중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삼승’이나 ‘십이분교’마저도, 한갓 똥 닦는 휴지에 불과하다고 선언해버린다. 이렇게 과격한 선언이 가능한 것은, 그의 여행길이 그만큼 절실하였음을 반증한다.
고대의 ‘장자(莊子)’도 이와 유사한 논변을 한다. ‘장자’는 자기의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표현해 냄으로써, ‘소요유(逍遙遊)’를 실현한 철학여행자이다.
장자 「지북유(地北遊)」에는, 이러한 대화가 기술되어 있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東郭子問於莊子曰.] “이른바 도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所謂道, 惡乎在?]”
‘장자’가 대답했다.[莊子曰.] “있지 않은 곳이 없다.[無所不在.]”
‘동곽자’가 말했다.[東郭子曰.] “꼭 찍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期而後可.]”
‘장자’가 말했다.[莊子曰.]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다.[在螻蟻.]”
‘동곽자’가 말했다.[曰.] “어찌 그리 낮은 곳에 있습니까?[何其下邪?]”
‘장자’가 말했다.[曰.] “돌피나 피 따위에 있다.[在稊稗.]”
‘동곽자’가 말했다.[曰.] “어찌 더 아래로 내려가십니까?[何其愈下邪?]”
‘장자’가 말했다.[曰.] “기왓장이나 벽돌 조각에 있다.[在瓦甓.]”
‘동곽자’가 말했다.[曰.] “어찌 더욱 심해지십니까?[何其愈甚邪?]”
‘장자’가 말했다.[曰.] “똥이나 오줌 속에 있다.[在屎溺.]”
‘동곽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東郭子不應.]”

‘장자’는, ‘도가(道家)’철학에서 신(God)쯤으로나 여기는 ‘도(道)’가 똥 덩어리 속에나 들어 있다고 선언해버린다. 후대의 ‘임제’ 역시 ‘장자’와 유사한 사유방식을 지닌 탓에, 지극히 유사한 선언을 하였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야말로 칼날 위에 선 여행자들의 사유방식이 지닌 극단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인 판단이 없다면, 애당초 그들은 여행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임제’는, 여행자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오직 ‘도’를 추구하는 벗들의 눈앞에서, 지금 이 순간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唯有道流目前, 現今聽法底人.]
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삼악도’의 지옥에 들어가도, 마치 정원을 구경하며 노는 듯하고, ‘아귀’나 ‘축생’에 들어가도 그 업보를 받지 않는다.[入火不燒, 入水不溺, 入三塗地獄, 如遊園觀, 入餓鬼畜生而不受報.]

‘임제’가 판단하기에, 모름지기 여행자는 지옥에 들어가더라도, 마치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는 듯이 노닐 수 있는 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그렇게 어려운 경지에 이르러야 하기에, ‘임제’는 스스로를 칼날 위에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지옥에서라도 노닐 수 있었겠는가.
지옥은 그저 지옥으로서 체험될 따름인 역자로서는, 그러한 경지가 아득할 따름이다. 그러나 ‘임제’의 가르침대로, 자기 자신의 바깥을 지향해서는 결코 무엇도 이룰 수는 없으며, 정작 삶의 끝날이면 감당할 수 없는 회한에 처하고 말 것이다.
‘임제’는, 스스로를 칼날 위에 세움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결국 자기 삶의 여행길은 오롯이 자기 자신만의 몫일 수밖에 없음을, 몸소 체현(體現)해 주었다.
칼날 위를 여행하는 자는, 아마도 텅 빈 허공의 우주에서 지구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서, 이 세계를 바라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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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꽃타령

도서정보 : 차상찬 | 2018-07-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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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꽃타령』은 단편 잡지 기고문으로, 우리나라 대표 꽃으로 일컫는 9가지를 선별하여 원산지에 담긴 정서와 소견, 시구를 통해 대표할만한 우리 꽃의 진정한 정의를 조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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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탐색 및 직업 선택, 제3판

도서정보 : 박윤희 | 2018-07-11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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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커리어와 관련된 영역이다. 이 책은 대학생들의 커리어 설계와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집필하였다. 자신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에서부터 비전을 만들고 적합한 직업을 찾아 취업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을 커리어코치와 함께 진행하는 것과 같은 프로세스로 구성하였다. 특히 정부의 능력중심사회 구현 정책에 따라 향후 기업들의 능력중심 채용이 증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바, 직업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직업기초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도 함께 수록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설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구매가격 : 14,000 원

책 정리하는 법

도서정보 : 조경국 | 2018-07-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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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때문에 괴롭고 책 때문에 즐거운
세상의 모든 책 애호가를 위한 안내서

간편한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고집하나요? 집에 있는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책을 사지 않겠다는 결심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나요? 더 이상 책 둘 곳이 없어서 고민 중인가요? 정리 안 된 책 때문에 종종 가지고 있는 책을 또 사기도 하나요? 이사할 때 다른 무엇보다 책 옮기느라 고생하고 이삿짐센터 직원의 눈총을 받은 적은 없는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중에서 적어도 한 가지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나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방 한 구석에 쌓여 있는 책 더미를 바라보는 분도 있을 테지요. 자, 그런 분들을 위한 책입니다. 『책 정리하는 법』.

책을 유별나게 좋아해서 새 책, 헌책 가리지 않고 그러모으는 이가 있습니다. 저자 조경국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책을 쟁이기 시작한 애서가, 집 안 곳곳에 책이 쌓이자 아예 책방을 차린 헌책방 책방지기이자 장서가, 책 수렁에 빠졌다고 푸념하면서도 들어오는 책을 마다하지 않는 ‘책 덕후’입니다. 저자가 소장한 책과 용인의 한 헌책방을 인수하면서 생긴 책을 합치니 대략 2만여 권. 이 엄청난 분량의 책을 쌓아 두기만 한다면 결코 ‘책 덕후’라고 할 수 없겠죠. 명창정궤明窓淨?, 단출하고 정갈한 서재를 꿈꾸지만 책 욕심을 포기할 수 없는 저자가 도를 닦듯 책 정리 기술을 갈고 닦은 이유입니다.

책 정리의 첫걸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을 잘 파악해서 그에 맞는 서가를 찾는 일입니다. 서재 크기, 책 수량과 판형, 예산에 맞춰 서가를 고르거나 만들어야겠지요. 서가가 마련되면 본격적으로 책을 정리하기 위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사실 책을 정리하는 데에 정해진 법칙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면 좀 더 품격 있는 나만의 서재를 가질 수 있겠죠. 저자는 직접 적용해 본 다양한 정리 기준과 남의 서재를 엿보면서 배운 정리법을 알려 줍니다. 책 정리는 단순히 책을 분류하고 꽂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책을 정리하다 보면 버릴 책도 나오고, 손상된 책도 나오고, 당장 읽지 않을 책을 쟁여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헌책방 책방지기로 5년째 버티고 있는 데다 수많은 이사 경험으로 다진 저자의 책 짐 싸기 기술은 이럴 때 빛을 발하지요. 이 책에는 무거운 책을 손쉽게 옮길 수 있는 유용한 몇 가지 방법과 아끼는 책이 상하지 않도록 책을 싸고, 조금만 거칠게 다루어도 바스라질 것 같은 오래된 책을 보관하고, 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상한 책을 손보는 방법도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저자는 오랫동안 책과 고군분투하면서 터득한 온갖 책 정리법을 소개합니다. 저자의 친절한 안내 곳곳에는 저자가 직접 보고 듣고 읽은 서재 이야기도 녹아들어 있지요. 그야말로 다채로운 책으로 가득 찬 서재 같은 책이랄까요.

자신만의 서재 만들기에 관심 있는 분, 잔뜩 쌓여 있는 책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분에게는 이 책이 유용한 참고서가 될 겁니다. 꼭 책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루고 정리하는 법, 어떤 한 가지에 푹 빠진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에게도 이 매혹적인 이야기를 권합니다.

구매가격 : 8,400 원

장자 내편

도서정보 : 장자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7-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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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내편(內篇)


1편. 소요유(逍遙遊)

1장. 물고기와 거대한 새 13
1. ‘곤’과 ‘붕’
2. ‘붕’에 대한 ‘제해’의 발언
3. ‘곤’을 비웃는 작은 새들
4. ‘탕임금’과 ‘극’
5. ‘송영자’에 대한 평가
6. 바람을 조종하는 ‘열자’

2장. ‘요임금’과 ‘허유’ 17
1.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는 ‘요임금’
2. 천하를 물려받지 않겠다는 ‘허유’

3장. ‘막고야’ 산의 신인 18
1. ‘광접여’를 불신하는 ‘견오’
2. ‘견오’를 나무라는 ‘연숙’
3. 모자를 팔러 간 ‘장보’
4. 신인들을 만난 후 천하를 잊은 ‘요임금’

4장. ‘혜자’와 ‘장자’ 20
1. 거대한 박과 손 안 트는 약
2. 거대한 나무와 살쾡이


2편. 제물론(齊物論)

1장. ‘남곽자기’와 ‘안성자유’
1. 인뢰와 지뢰와 천뢰
2. 큰 지혜와 작은 지혜
3. 죽음에 가까이 가버린 마음
4. 온갖 감정이라는 것
5. 참된 주재자
6. 나는 무엇인가
7.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인생
8. 성심
9. 인간의 언어
10. 상대성과 동시성
11. 손가락과 말
12. 길과 이름
13. 도에 가까운 경지
14. 원숭이와 도토리
15. ‘소문’과 ‘사광’과 ‘혜시’
16. 있음과 없음
17. 하나와 둘과 셋

2장. 도에 관하여
1. 말하지 않는 언어와 도가 아닌 도
2. 열 개의 태양

3장. ‘설결’과 ‘왕예’
1. 참된 거처와 참된 맛과 참된 아름다움
2. 이로움과 해로움

4장. ‘구작자’과 ‘장오자’
1. ‘공자’의 제자 ‘구작자’의 물음
2. ‘장오자’가 들려주는 ‘여희’의 이야기
2. 꿈속의 꿈이라는 수수께끼
3. 논쟁에서의 승리와 패배
4. 천예의 옳음과 그름

5장. 그림자와 호접몽
1. 곁 그림자와 그림자
2. 나비의 꿈과 만물의 변화


3편. 양생주(養生主)

1장. 생명과 지식
1. 중도의 경지

2장. 양생의 도
1. ‘포정’의 칼놀림에 대한 ‘문혜군’의 경탄
2. ‘포정’이 들려주는 칼놀림의 미학

3장. ‘공문헌’과 ‘우사’
1. 외발이 ‘우사’
2. 연못가의 꿩

4장. ‘노담’의 죽음
1. ‘노자’의 장례식과 ‘진일’의 조문


4편. 인간세(人間世)

1장. ‘안회’와 ‘중니’
1. 위나라로 가려고 하는 ‘안회’
2. ‘안회’를 걱정하는 ‘중니’
3. ‘중니’를 설득하는 ‘안회’
4. 심재를 권하는 ‘중니’
5. ‘공자’가 논변하는 만물 교화론

2장. ‘섭공자고’와 ‘중니’
1. 사신으로 가는 ‘섭공자고’가 ‘중니’에게 묻다
2. 천명과 의리의 부득이함을 논변하는 ‘중니’
3. ‘중니’가 논변하는 떳떳한 말과 넘치는 말
4. ‘중니’가 논변하는 매사의 시작과 끝
5. 언어와 행동에 대해서 논변하는 ‘중니’

3장. ‘안합’과 ‘거백옥’
1. ‘거백옥’이 말해주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
2. 사마귀와 호랑이와 말에 관한 이야기

4장. 목수 ‘장석’의 이야기
1. ‘장석’과 상수리나무
2. 꿈에 나타난 상수리나무

5장. ‘남백자기’의 이야기
1. ‘남백자기’와 커다란 나무

6장. ‘형씨’ 땅의 나무들
1. 쓸모 있는 탓에 천수를 누리지 못 하는 나무들

7장. ‘지리소’의 이야기
1. 괴물 같은 외모의 ‘지리소’

8장. ‘공자’와 미치광이 ‘접여’
1. ‘접여’의 노래


5편. 덕충부(德充符)

1장. ‘왕태’와 ‘중니’
1. 절름발이 ‘왕태’
2. ‘왕태’의 경지를 의심하는 ‘상계’

2장. ‘자산’과 ‘신도가’
1. 절름발이 ‘신도가’

3장. ‘숙산무지’와 ‘중니’
1. 절름발이 ‘숙산무지’
2. ‘공구’에 대해서 ‘노담’에게 이야기하는 ‘숙산무지’

4장. ‘애공’과 ‘공자’
1. 추한 용모를 지닌 ‘애태타’
2. 덕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애태타’
3. ‘중니’가 이야기하는 완전한 재능
4. 덕으로써 벗이 된 ‘애공’과 ‘공구’

5장.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인지기리무신’
1. 잊어버려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2. 자연이 길러주는 네 가지 것들

6장. ‘혜자’와 ‘장자’
1. 인간의 감정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


6편. 대종사(大宗師)

1장. 천지자연의 도에 관한 이론
1.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지식
2. 옛날의 진인에 대한 설명
3. 진인으로서의 성인
4. 진인의 행동방식
5. 부득이한 삶과 죽음을 대하는 진인의 태도
6. 만물의 거대한 진실
7. 만물제동을 실천하는 진인

2장. ‘남백자규’와 ‘여우’
1. ‘여우’가 들려주는 ‘복량의’의 체도 과정
2. 도가 전해진 계보

3장. ‘자사’와 ‘자여’와 ‘자리’와 ‘자래’
1. 괴물처럼 변하는 병에 거린 ‘자여’
2. ‘자래’가 이야기해주는 천지자연의 변화

4장. ‘자상호’와 ‘맹자반’과 ‘자금장’
1. ‘자상호’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온 ‘자공’
2. 예법의 바깥에서 노니는 자와 예법의 안에 있는 자
3. ‘공자’가 의지하는 세계
4. 기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공자’

5장. ‘안회’와 ‘중니’
1. ‘맹손재’의 명성을 의심하는 ‘안회’
2. 천지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논변하는 ‘중니’

6장. ‘의이자’와 ‘허유’
1. ‘요임금’에게 처벌받은 ‘의이자’
2. ‘허유’가 들려주는 도의 세계

7장. ‘안회’와 ‘중니’
1. ‘중니’에게 묻는 ‘안회’
2. 좌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안회’

8장. ‘자여’와 ‘자상’
1. ‘자상’의 운명론


7편. 응제왕(應帝王)

1장. ‘설결’과 ‘왕예’
1. 인간의 경지와 자연의 경지

2장. ‘견오’와 ‘광접여’
1. 성인의 정치와 미물의 지혜

3장. ‘천근’과 ‘무명인’
1. ‘무명인’이 들려주는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

4장. ‘양자거’와 ‘노담’
1. ‘노담’이 들려주는 ‘명왕’의 정치

5장. ‘계함’과 ‘열자’와 ‘호자’
1. 용한 무당 ‘계함’
2. ‘호자’의 관상을 보다가 도망친 ‘계함’
3. ‘열자’의 변화

6장. 마음을 텅 비우는 일
1. 지극한 사람의 거울과 같은 마음

7장. ‘숙’과 ‘홀’과 ‘혼돈’
1. ‘혼돈’의 죽음

구매가격 : 3,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