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전자책

잊혀진 전쟁의 기억

도서정보 : 정연선 | 2019-06-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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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에게 한국전쟁은 어떤 의미였는가?
― 미국문학에 나타난 ‘잊혀진 전쟁’의 기억
―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70여 권의 미국소설을 분석한 국내외 첫 연구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 전쟁의 기억은 한국인들에게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은 한국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미군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도 한국전쟁을 가슴 아픈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연선 교수의 《잊혀진 전쟁의 기억》은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한국전쟁을 다룬 70여 권의 미국소설을 찾아내 당시 참전한 미군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한 한국전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오늘날 한국전이 어떻게 그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전쟁으로 남아있는지를 밝혀낸다. 한마디로 미국소설 속에 나타난 한국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문학적 반응을 통해서 한국전쟁이 과연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공식적 역사가 아닌 또 다른 역사 속에서 파악한다.

이 책의 저자 정연선 교수(육군사관학교 영어과 명예교수)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영문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육군사관학교 영어과 교수로 재직해온 미국소설과 전쟁문학 전문가이다. 정 교수는 한국전쟁을 다룬 미국소설을 통해, 미국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다시 돌아보고, 전쟁에서 치러진 그들의 희생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이 책은 한국전 미국소설을 다룬 단행본으로는 국내외 최초의 연구서로,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데 보다 폭넓은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한국전쟁은 과연 ‘잊혀진 전쟁’인가?
한국전은 3차 대전의 발발을 우려한 미 행정부가 극도로 조심하며 싸운 제한전쟁이었다. 2차 대전 직후에 발발한 전쟁에 또 다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정부는 총동원보다는 제한된 동원과 예비군을 소집하여 전쟁을 치렀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한국전의 존재를 이전의 전쟁만큼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대중 매체들의 관심도 덜해서 전쟁에 아들을 내보낸 가족들을 제외하면 한국전은 처음부터 크게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3년의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쟁 당사자인 한국군보다 더 많은 연인원 178만 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했고, 33,600여 명의 전사자와 10만 명 이상의 부상자, 그리고 7,000명 이상의 실종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지금도 비무장 지대와 북한의 격전지에 묻혀있는 미군 전사자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다. 유해가 돌아올 때마다 미국정부는 온갖 예우를 다 갖추어 봉안하고 있고 DNA를 통해 그 가족을 찾고 있다.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은 전쟁이다.

다른 관점에서 “망각과 기억은 서로 반대이면서도 상호적이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으로 잊혀진 전쟁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과거에 기억된 적이 있었고 또 기억 속에서 언제든 복원되기 위해 잠재해 있는 전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남가주 대학의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탄 응우엔 교수는 “모든 전쟁은 두 번씩 싸운다. 한 번은 전쟁터에서, 또 한 번은 기억 속에서 싸운다”라고 말한다. 포성이 멎은 지 70여 년이 흘렀지만 한국전은 여전히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싸워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낀 ‘작은 전쟁’이었지만 여전히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20세기 중엽 미국이 싸운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전 참전 병사들은 한국전쟁이 ‘제한전쟁’이니 ‘국지적 분쟁’이니 하고 불리며 격하되는 것에 분노를 표한다. 왜냐하면 한국전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그들에겐 엄청난 죽음을 초래한 참혹한 전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왜 미군 병사들은 알지도 못하는 이 조그마한 나라에 와서 싸웠는가?
소설 속에 묘사된 병사들의 참전동기
한국전 소설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제기하는 한결같은 질문은 우리는 왜 ‘들어보지도 못한’ 이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에 와서 싸워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전 소설들은 바로 이러한 미국 젊은이들의 참전 동기에 주목하면서, 한국전이 과연 싸울 가치가 있는 전쟁이었는지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소설 속의 미군 병사들에게 정부의 공식적인 전쟁 명분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다. 그저 국가가 보냈기 때문에 와서 싸울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간혹 자유와 세계평화라는 국가의 전쟁명분을 위해서이고 사회적 압박이나 개인적 모험심에서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생사가 걸린 전쟁터의 병사들에게 그러한 추상적 이념이나 낭만은 그들의 방어막이 되지 못한다. 소설 속 병사들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또는 전우를 위해, 부대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목적과 대의명분이 중요하겠지만, 실제 전투를 수행해야했던 병사들에게는 그러한 수사는 그저 공허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을 다룬 미국소설들은 한국전의 참혹했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의 인식 사이의 괴리를 증언하는 매개체가 된다.

미군 병사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어떻게 보았나?
한국전 미국소설은 당시 미국인들이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와 한국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한국은 어느 곳을 가든 인분 냄새가 진동하며 온갖 질병이 만연하는 곳이고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여인들로 넘쳐나는 나라로 묘사된다. 한 예로 제임스 히키의 소설 《눈 속에 핀 국화》에서 한 병사가 한국(코리아)을 성병(고노리아: 임질)과 질병(다이어리아: 설사)에 비유한다. 이 같은 비유는 실제로 한국전이 발발하기 전 서태평양 지역으로 가는 전 미군 장병들 사이에서 농담으로 퍼져있던 피해야 할 세 가지가 고노리아, 다이어리아, 코리아라는 것이었는데 작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리처드 셀저의 소설 《칼의 노래 한국》의 주인공인 군의관 슬로안도 ‘코리아’라고 하면 ‘코리어(Chorea)’라는 의지와 상관없이 온몸이 떨리는 무도병(舞蹈病)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한국인을 바라보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도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의 고정관념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서양인에게 고분고분한 동양인의 모습을 기대하면서도 때로는 사납고 포악하다고 생각하며 또한 더럽다고 무시한다. 많은 한국전 소설과 수기에서 미군 병사들은 한국인을 ‘국(gook)’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미-국”(mee-gook)이라고 부르는 한국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국”을 사용했지만 이는 점차 동양인을 비하하는 미군병사들의 은어로 변질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차후 베트남전 소설에서 베트남인들에 대한 경멸적인 언어로 심화된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한국전 기억은 어떠한가?
저자는 1, 2세대의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한국전 경험도 하나의 중요한 기억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그들은 미국 국적의 미국인들이기 때문에 한국계라는 지칭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한국전 기억은 참전병사들의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참전군인들은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나온 생존의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이지만 한국계 작가들은 인간을 극한의 모습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는 이념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이념의 차이가 어떻게 이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표피적인 고통만이 주된 소재가 되는 미군작가들과 달리 한국계 작가들은 분단으로 야기된 서로에 대한 배반과 복수, 반인륜적인 행위와 그 고통에 대한 고백과 후회 등 인간 내면의 심층적인 문제들이 주제가 된다. 자신들이 직접 전쟁을 경험하고 그 경험에 기초하여 소설을 쓴 이민 1세대의 김은국(Richard Kim), 박태영(Ty Pak), 최숙렬(Sook Nyul Choi) 등을 비롯하여 전쟁 중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인 전쟁 경험을 한 이민 2세대인 수산 최(Susan Choi)와 이창래(Chang-Rae Lee) 등의 작품이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다.

한국전은 미국 사회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미국전쟁소설에서 작가들은 전쟁과 군대에서 행해지는 관행을 때로는 미국사회의 병리적 현상과 병치시킨다. 다시 말하면 전쟁과 군대는 미국사회의 제반 문제들이 노출되고 갈등하는 현장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군대복무는 개인의 자유라는 미국의 진보주의적 전통과 상치되어 집단과 개인 간의 항상 갈등의 요소가 된다. 바로 전쟁과 군대는 미국사회의 축소판이며 그 경험은 미국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비록 1, 2차 대전소설 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한국전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한국전 당시 미군에서 시행된 흑백통합부대는 인종갈등이라는 미국의 뿌리 깊은 문제를 다시 한 번 노출시켰는데 이러한 인종문제가 많은 한국전 소설들의 주제가 되었고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한국전에서는 많은 흑인병사들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차별을 받았는데 결국 군대에서 진정한 흑백통합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을 해결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는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작가들은 던지고 있다. 전쟁을 치르는 나라에서는 “국내문제들이 병사들의 배낭 속에 넣어져 해외로 나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전쟁터에서 수행되었던 많은 일들이 “아주 튼튼한 시체 운반용 가방”에 넣어져 국내로 들어오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50년대 미국의 사회적 문제들이 미군병사들에 의해 한국의 전쟁터로 운반되었고 그곳에서 실험을 거친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한 마디로 한국전은 50년대 당시의 미국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이었다. 2012년 《고향》이라는 한국전 소설을 쓴 토니 모리슨은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나간 현 시점에서 한국전 소설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반공이념이 가져온 매카시즘의 공포와 흑인들에게 시련의 시대인 1950년대를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묘사한 한국전 소설
마치 한국전 미국소설은 한국전을 오직 냉전시대의 이념이나 정치 역학적 틀 속에서만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의 전쟁이다. 한국전 소설 또한 전쟁이라는 폭력 속에 내몰려 발가벗겨진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여느 전쟁소설들과 다르지 않다. 1, 2차 대전 소설들에서는 전쟁을 좀 더 부정적인 측면에서 묘사하는 반전소설들이 주를 이룬다면 한국전에 와서는 전쟁의 총체적 모습을 그린다는 면에서 이전 소설들과 차별화된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버려진 존재들로서 전쟁의 대의와는 상관없는 생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혹서의 낙동강 전선, 혹한의 장진호 전투, 그리고 지루한 중부전선의 고지에서 그저 생존을 위한 사투만을 벌릴 뿐이다. 그곳에서 이념이란 설 자리가 없다. 또한 전쟁은 사악한 폭력 앞에서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하는 극단의 상황이 전개되는 곳이다. 전쟁은 잔혹하고 비참하며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폭력도 용인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전우를 위한 사랑이 있고 희생이 있다.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지만 전쟁은 또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쟁은 스릴이 있고 남자들은 기묘하게 이끌리기도 한다. 한국전 소설들은 이러한 전쟁의 총체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국전 소설들이 다소 감상적이기는 하지만 전우를 위한 희생을 주제로 하는 휴머니즘 소설들이 많은 이유이다. 특히 흑백 병사간의 인종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위한 희생을 묘사함으로서 본국에서 행해지는 인종차별의 사악함에 대한 상징적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한국전의 포성이 멎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남아 치유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참전 작가의 전쟁의 글쓰기란 사실 자신의 전쟁경험에 대한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행위이다. 반면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기성작가들의 글쓰기는 냉전의 한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한 행위에서 비롯된다. 앞에서 언급한 토니 모리슨을 비롯해서 얼마 전 작고한 필립 로스 그리고 제인 앤 필립스 등과 같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작가들이 모두 2000년대 들어와 한국전에 대한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 이유이다. 전쟁을 싸운 군인이나 그 전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작가들에게 미국의 전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한국전은 기억할 가치가 있는 전쟁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전은 미국의 젊은이들의 도덕적 성장을 시험하는 하나의 무대이기도 했고 인종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병폐를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는가 하면 20세기 들어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한 미국이 새로운 이념적 세력의 도전을 받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한국전은 한반도라는 지구 한 모퉁이의 소국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미국사회는 물론 차후 전 세계의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신 냉전의 뿌리가 되기도 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공식/비공식 방법으로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한 예로 저자는 미국 버지니아주 밀포드시에 있는 캐롤라인 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한국전 기념공원을 주목한다(본문 410~411쪽). 북위 38도 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이 학교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싸운 한국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한국전 역사를 공부하던 어린 학생들이 주도하여 만든 공원이다. 20세기 중반에 벌여졌던 한국전쟁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미국인들의 기억 속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그 전쟁이 한반도에서 진행 중이며 전쟁의 여파가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 각 장의 주요 내용

1장에서는 한국전에 관한 미국인들의 기억을 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은 왜 한국전에 와서 싸웠으며, 한국과 한국전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태도가 어떠하였는지, 그 후 한국전은 왜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었는지, 그러면서도 왜 한국전은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기억되고 있는 전쟁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2장에서는 한국전 소설이 미국 전쟁소설의 전통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미국 전쟁소설의 전통적인 주제와 토픽이 한국전 소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또한 참전 미군 병사들의 전쟁 동기와 실제 그들의 전쟁 경험이 과거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선배들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도 살펴본다. 동시에 전쟁에 대한 인간의 심리 분석도 다양한 예를 통해서 다루고 있다.

3장에서는 한국전 소설들을 전통적인 미국 전쟁소설의 주제 및 한국전 특유의 전쟁 양상을 나타내는 주제별로 분류해 요약하고 분석한다. 한국전에 대한 미국의 문학적 반응을 친전과 반전이라는 범주로 묶어 분석하며, 또한 한국전 특유의 주제인 피난민과 포로문제를 다루는 소설에 주목한다. 특히 이 장에서는 중국계 미국인 작가 하진이 쓴 《전쟁 쓰레기》에 주목하는데 이 소설은 거의 모든 참전 작가들이 미군병사들의 포로 경험을 다루는데 반해 중공군 포로들에 관한 이야기로서 과연 우리의 상대방은 어떤 태도로 한국전을 싸웠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4장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쓴 소설들을 분석한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이민 1세대부터, 전쟁을 간접 경험한 2세대 작가들의 소설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1세대 작가로 김은국, 박태영, 최숙렬, 2세대 작가로 수산 최, 이창래 등의 작품을 다룬다. 이들은 모두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분단과 전쟁, 이산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속죄, 그리고 새로운 국가에서 정체성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희망을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5장에서는 한국전으로 인한 미국 가정의 비극과 귀환병들의 적응 문제, 그리고 미국 사회에 대한 한국전의 영향을 다루는 소설들을 통해 여전히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지지 않은 전쟁임을 밝힌다. 1950년대를 회고하면서 오늘날 미국 사회의 거울로서 당시 한국전쟁을 돌아보려는 토니 모리슨, 필립 로스, 제인 앤 필립스 같은 기성작가들의 소설들을 다루고 있다.

구매가격 : 16,000 원

시지프의 신화

도서정보 : 알베르 카뮈 | 2019-08-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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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량한 폐허에서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을 제시했던 카뮈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불후의 명저. 인간의 근원적인 사고와 삶을 지탱해주는 최초의 바탕인 동시에 최후의 논리적, 미학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도달점인 부조리로부터 반항·자유·정열 이 세 결과를 이끌어내고 이것들을 최대한으로 느낌으로써 인간은 삶을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고 카뮈는 말하고 있다. 온힘을 다해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면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올리도록 저주받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시지프를 통해 현대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구매가격 : 6,300 원

존재의 심리학

도서정보 : 아브라함 H. 매슬로 | 2019-08-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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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이달의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2005. 09. 01)

욕구 5단계설로 유명한 매슬로의 대표 저작!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은 누구나 학창 시절에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유명한 이론이다. 매슬로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다양한 이론은 지금까지도 심리학 학계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학, 경영 이론 등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수많은 저작 중 의외로 국내에 소개된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이번에 그의 이론을 집대성하여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매슬로의 가장 유명한 저작 《존재의 심리학Toward a Psychology of Being》이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존재의 심리학》은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매슬로가 자신이 강의한 내용 또는 여러 가지 논문을 모아 1962년에 처음으로 출판한 책이며, 일부 수정한 2판은 1968년에 발행되었고, 사후인 1999년에 3판이 출간되었다. 《존재의 심리학》은 심리학계에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책으로 아직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으며,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매슬로의 여러 가지 심리 이론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고, 매슬로의 인본주의 심리학과 욕구 5단계설의 깊은 사상적 뿌리를 반추할 수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Humanistic Psychology)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짓는 특질들, 특히 창조성, 유머, 놀이와 심리적 성장 등을 강조하는 심리학파. 행동주의 및 정신분석과 반대되는 것으로 '제3세력'으로도 불린다. 이 학파의 주된 창시자로는 고든 올포트, 아브라함 매슬로, 칼 로저스 등이다.

프로이트의 대척점에 서서 선량한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키우다!

매슬로는 인본주의적이면서도 개인을 초월하는 심리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러한 심리학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혐오나 좌절이 아닌 사랑과 연민에 근거한 심리학이다. 이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매슬로는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본성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착한 사람들이 모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기여할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자기실현’ 이론이나 ‘절정경험’ 이론은 개념의 보편 타당성을 확립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정통 과학주의에서 비주류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여러 가지 심리학 이론이 새롭고,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심리학으로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과학적 방법 및 과학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그의 사후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상에 대한 매슬로의 견해는 주류 심리학으로 편입되어 하나의 조류가 되었으며, 매슬로는 인간 본성 이론에 변화의 물결을 가져온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매슬로의 주요 이론 소개

(1) 욕구 5단계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에 대해 학계 최초로 학문적인 연구를 시도했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고 여기에 등급을 매겨 각각의 욕망이 어떻게 다른 욕망에 지배받는지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다. 매슬로가 정의한 5단계 욕망은 다음과 같다.

생리적(Physiological) 욕구⇒안전(Safety)에 대한 욕구⇒애정과 소속(Social) 욕구⇒자기 존중(Esteem) 욕구⇒자기실현(Self-Actualization) 욕구

(2) 자기실현
매슬로는 이 다섯 가지 욕구 가운데서 특히 자기실현 욕구를 중요시했으며, 이 자기실현 욕구란 “인간이 갖는 가장 최상위 욕망으로, 자기 계발과 목표 성취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라고 정의했다.
매슬로는, 자기실현 욕구는 다른 욕구와는 달리 일정한 한계점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자기실현 욕구는 욕구가 충족되면 될수록 더 강해지며, 이 욕구가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결핍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매슬로는 이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자기실현에 성공한 사람들의 심리적 특징을 직접 조사하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연구했다. 그는 링컨, 간디, 아인슈타인, 루스벨트, 스피노자 같은 위인들의 특징을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 결과 역사적인 위인이라고 해서 자기실현한 사람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으며, 자기실현이라는 가치 자체가 불완전한 것으로 평생을 두고 노력해야 하는 끝없는 과정이라고 설파하였다.

(3) 절정경험(Peak Experience)
부모가 되는 경험, 신비적 또는 광활함에 대한 경험, 자연에 대한 경험, 미학적 지각, 창조적 순간, 치료적 또는 지적 통찰력, 오르가즘의 경험, 특정 운동에서의 성취 등을 맛보는 순간이 있다. 이처럼 최상의 행복감과 완성감을 느끼는 순간에 이때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인지적 현상들을 한마디로 일반화하여 매슬로는 절정경험이라 부른다. 이러한 절정경험을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가를 매슬로는 자기실현 정도의 척도로 삼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도 절정경험을 경험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권한다.

구매가격 : 14,400 원

마음

도서정보 : 나쓰메 소세키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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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백미!
누구나 품고 있는, 인간의 마음속 고백을 들여다 보다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이들과
위태롭게 흔들리는 연약한 마음들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백미라 평가받는 《마음》은 1914년 4월부터 8월까지 도쿄와 오사카의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이후, 이와나미문고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 《마음》은 신문에 연재했던 〈선생님의 유서〉 부분만을 실었으나, 이후에 ‘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선생님과 유서’, 총 3부로 구성해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된 것이 우리가 현재 읽는 《마음》이다.
메이지유신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근대 문명의 발흥과 더불어 문명으로 야기된 거대한 재해를 경험하며 살아왔던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에서도 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간을 향한 신뢰를 주장한다. 특히 자신의 지난 과거를 생각하며 순수하고 젊은 ‘나’에게 어렵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선생님의 고백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감동과 깨달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

《마음》은 가마쿠라의 한 해변에서 주인공 ‘나’와 선생님이 만나며 시작된다. 혼잡했던 바닷가에서 유독 선생님에게 시선을 빼앗긴 나는, 며칠간의 일정 속에서 선생님과 친해져 도쿄로 돌아온 후에도 교류를 이어간다. 선생님을 동경하면서도 선생님에게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 나는, 그와 가까워지려 노력하며 선생님의 사상을 알기 위해 과거를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적당한 시기에 과거를 말하겠다는 선생님은 주인공이 아버지의 병환으로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돌연 ‘유서’로 보이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읽은 나는 위독한 아버지를 뒤로 한 채 급히 도쿄로 돌아간다.
‘죽음’은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다. 주인공과 선생님이 처음 만난 곳은 결핵 환자 요양소가 있는 걸로 알려진 유이가하마 해변이고, 선생님과 재회한 곳은 선생님의 친구 K의 묘지였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선생님은 사모님과의 대화에서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주인공의 아버지도 병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 말미에서 결국 아버지와 선생님이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때 주목할 것은 선생님과 아버지의 죽음이 메이지 천황의 붕어와 노기 대장의 순사(殉死)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들이 죽은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이들은 한 시대의 종말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갔고, 자신의 죽음을 순사로 받아들인다. 이들의 죽음과 메이지 시대의 종언 이후, 더 이상 순사는 가능하지 않으며 개인의 죽음도 더 이상 의미를 가지거나 명명화되지 않는다. 개인이 자신의 고독과 죽음을 온전히 감당해내야 하는 또 다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시대와 세대가 변해도
여전히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지 않던 선생님은 자결을 결심하고 ‘나’에게 유서로 보이는 편지를 남긴다. 선생님은 왜 ‘나’에게 자신의 마음속 고백을 전하려 한 걸까.
유서에는 선생님의 젊은 날 이야기가 담겨 있다. 타인에게 배신당하고, 내면의 고독에 힘들어하던 선생님과 친구 K는 서로를 의지하는 친구가 된다. 그러나 이 둘은 하숙집 주인의 딸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고, 질투의 감정에 휩싸인 선생님은 K를 배신하고 딸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이후 K는 자살하는데, 선생님은 그에 대한 죄의식으로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아간다. 순수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독한 ‘나’를 보며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린 선생님은 ‘나’에게 과거의 일을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새로운 시대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고독한 젊은 세대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윤리를 잃지 않기를, 그들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선생님은 ‘나’에게 편지를 남긴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이 그러했듯 또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문명과 시대의 변화로 더 외로워졌을 어떤 마음들에게, 윤리와 신뢰를 저버리고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아내야 했던 선생님의 마음, 친구의 연약한 마음을 조용히 품은 채 눈 감았던 K의 마음, 위독한 아버지를 뒤로한 채 선생님을 향해갈 수밖에 없던 자신의 마음을 담아 글을 쓴다.
시대가 변화하고 세대가 바뀌었지만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일렁인다. 도리어 더 위태롭거나 연약해졌다. 어쩌면 나쓰메 소세키는 더욱 고독해질 현대인의 내면을 미리 꿰뚫어보고, 시대가 지나도 여전히 유효할 메시지를 남긴 것 아닐까.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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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5판)

도서정보 : 에리히 프롬 | 2019-09-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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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닌,
결의이자 판단이고 약속이다!
? 《사랑의 기술》 개정 5판 출간
? 에리히 프롬의 마지막을 함께한 라이너 풍크 박사의
《사랑의 기술》 50주년 기념판에 부치는 글 수록

‘사랑’은 기술인가? 독일 태생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인류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프롬이 던진 이 질문은 《사랑의 기술》이 출간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랑의 기술》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1956년 첫 출간 이후 34개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우리 시대의 대표적 스테디셀러이자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문예출판사에서는 이번에 새로운 표지로 바꾼 《사랑의 기술》 개정판을 출간했다.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프롬은 사랑을 흔히 생각하는 ‘감정’의 영역이 아닌 ‘기술’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사회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이 자취를 감추고 ‘관습’과 ‘계산’이 대신 들어서 있다.

프롬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가 시장의 교환 원칙에 지배받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결국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사랑을 고갈시킨 외부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외부적 요인에 더해 프롬은 개인의 무의식층까지 파고들어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를 밝혀낸다. 프롬은 인간이 참된 자아를 상실한 것이 사랑을 상실한 원인이라 진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상실, 즉 사랑하는 능력의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천착이나 종교적 설교, 도덕적 교훈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나 자신, 타인, 인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고 외쳐도, 또 모든 사람이 이러한 외침에 진심으로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사랑의 부재 현상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랑에 실패하고 점점 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사랑하려는 노력의 실패는 사람에 대한 공포를 일으키고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은폐하기 위한 합리화에 급급하게 만든다. 분리 상태에서 불안과 고독이 두려우면서도 이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

그렇기에 사랑은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가 된다. 사랑은 신이 준 능력이므로 우리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안이한 대답을 하기에는 현대 사회와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교묘해졌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을 회복하는 데는 절실하게 기술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프롬은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진실한 사랑을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숙성에 있다고 말한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 점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사랑의 기술을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밝혀놓았다. 프롬은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다. 《사랑의 기술》에는 사랑에 대한 이론이나 사랑을 실천하는 기술 외에도, 뛰어난 정신분석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의 현대 문명과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전망도 담고 있다.

라이너 풍크 박사의 50주년 기념판에 바치는 글 수록
또한 이 책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사회심리학 및 윤리학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했고, 프롬의 마지막 조수이자, 프롬의 문헌과 관련된 저작권 및 사후 문헌의 유일한 관리자로서 프롬 전집을 발행한 라이너 풍크 박사가 《사랑의 기술》 50주년을 기념해 쓴 〈에리히 프롬의 삶과 사랑〉을 수록했다. 프롬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라이너 풍크 박사는 이 후기에서 프롬의 생애를 다루면서 프롬 자신은 어떻게 사랑했는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얼마나,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았는지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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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선원들

도서정보 : 모리스 톰슨 | 2019-09-0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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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화와 흑인 문화, 앵글로색슨 기반의 백인 문화 등이 혼합된 뉴올리언스의 신비한 분위기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한 미스터리 공포 단편. 낭만과 모험을 찾아 뉴올리언스로 온 뉴욕 출신 젊은이가 겪는 신비한 하룻밤의 경험이 주요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화려한 격투 씬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금방이라도 해적들의 유령이 튀어나올 듯한 뉴올리언스의 밤 분위기가 낭만적 배경을 제공한다."
- Mystr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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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중국철학, 홍수전 손문 모택동 시진핑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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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中國哲學思想은 무엇인가



1. 中國을 알아야 韓國이 산다

近代에 이르도록, 中國哲學은 크게 3개의 기둥으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흔히 儒佛道라고 지칭되는데, 儒家, 佛家, 道家는, 중국은 물론 漢字文化圈 國家인 韓國이나 日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朝鮮王朝는 철저히 儒家哲學에 의해 主導되는 사회였다.
근대 이후 중국은 社會主義 國家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主義와 마오쩌둥主義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에도 중국은 名實相符한 共産主義 國家이다.
淸나라 멸망 이후, 중국에는 마땅한 철학사상이 不在하다. 동아시아 漢字文化圈을 先導하던 中國哲學思想史를 思慮한다면, 다소 안타까운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자연스런 역사의 흐름이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중국을 主導하는 철학사상은 말할 나위 없이 마르크스주의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사 안에서, 이미 실패한 哲學思想이다.
그러한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중국은 자본주의적 개혁개방을 실행하였지만,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資本主義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르크스주의보다는 資本主義가 人間本性에 좀 더 符合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니 인류는 社會主義나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사상을 摸索해야 한다. 현재에도 자본주의는 散在하여 解決해야 할 문제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友邦에 대한 選別이 요구된다. 國際政治의 場에서 覇權國이 아니라면, 양다리를 걸치는 식의 國際關係는 不可하다. 반드시 어느 한 陣營을 선택하여 편가름해야만 한다.
국제정치는 영원한 敵도 영원한 同志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자기 편은 늘 流動的이다. 국제정치에서 ‘隣接國의 悲劇’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은 아주 결정적인 事例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徹天之怨?인 국가들이다. 근현대사를 살필 때, 일본은 壬辰倭亂이나 日帝强占의 역사로써 철천지원수다. 중국은 저 먼 古代로부터 무수한 侵略戰爭을 恣行했고, 조선왕조를 屬國으로 삼았으며, 다시 6.25전쟁으로써 침략을 해왔으므로 철천지원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두 隣接國에 대해, 이제는 어느 나라가 대한민국의 友邦國家인가를 판가름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自由民主主義 진영에 설 것인가, 중국과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共産社會主義 진영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複合的인 情況을 思慮해야겠지만, 선택에 대해 적잖은 指針과 尺度를 제공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현재 ‘문재인 정권’에서 떵떵거리며 勢道를 휘두르는 ‘曺國’은, 現職 서울대 敎授로서 休職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철밥통’인 교수자리가 위태해지자, 슬그머니 復職을 했다가 다시 휴직하면서, 교수자리를 保傳하고 있다.
과거에 그는, 敎授와 政治人을 병행해서는 안 된다면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런데 ‘내로남불’ 식으로, 제 밥그릇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실로 그런 것이 빨갱이 從北主義者들의 良心의 眞面目이다.
주둥이로는 革命, 解放, 民族, 平等, 平和, 人權, 分配, 正義, 正常, 理性 따위를 떠들어대며 ‘개돼지 群衆’을 선동하면서, 정작 제 욕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이 빨갱이들의 本性이며, 나아가 인간존재의 본성이다.
積弊淸算을 외치며 執權을 한 빨갱이 左派들은, 집권 이후 제 몫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인류의 역사는 늘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개혁세력의 집권은 不可하다는 것이다. 막상 권력을 얻게 되면, 금세 인간존재들의 野鄙한 本性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빨갱이 左派들 首腦部 대부분이, 富者이며 資本家라는 아이러니는, 쉬이 解明된다. 북한의 이너써클 1%만이 好衣好食하는 것처럼, 남한의 빨갱이들도 나름대로 이름깨나 날리면, 죄다 자본가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런 빨갱이 族屬 대부분이, 자기 子息들은 어떻게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지 않는가.
그러니 欲望과 慾心에 솔직한 資本主義體制가 좀 더 그럴듯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하는 ‘개돼지 군중’들만이, 그저 그들이 떠들어대는 虛無孟浪한 프로파간다에 놀아날 따름이다.
그렇다면 保守右派라는 者들은 또 어떠한가. 오죽 제 욕심을 채우며 不正腐敗를 일삼았으면, 현직 대통령이 彈劾당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겠는가. 그야말로 五十步百步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左右 進退兩難 속에서, 隣接强大國들의 四面楚歌에 휩싸여 바람잘 날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인접강대국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면한다면 朝鮮王朝 末期처럼, 그레이트 게임의 혼돈 속에서 나라를 팔아먹고 빼앗기는 難局에 처하고 말 것이다.
政治는 인간존재의 삶의 根幹이다. 인간존재의 삶 그 자체를 運用하는 天地自然의 원리가, 현실세계에서 顯現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한 정치를 살핌에 있어, 흔히 國內政治와 國際政治를 가름한다.
그런데 대체로 국내정치에 좀 더 관심을 갖기 십상이다. 아무래도 자기의 삶의 時空間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탓이다.
하지만 어떠한 국내정치일지라도, 결국은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 사례로써 쉬이 검증된다.
제아무리 국내정치적으로 執權하였더라도 국제정치의 外患이 발생하면,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韓國戰爭으로부터 日帝强占이나 丙子胡亂 등, 그 사례는 굳이 열거할 바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도 左派와 右派의 대립이 尖銳하다. 그러한 현상을 국내정치적 관점에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과거는 물론이며 현대에서는 어떠한 국내정치적 현상도, 그 動力이 국제정치의 時流에 의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현실세계의 어떠한 정치적 현상도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利益과 戰爭’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은, 古代로부터 掠奪, 征服, 植民, 冷戰, 覇權 등의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그 裏面에서 작동하는 근원적 작동원리는 ‘利益과 戰爭’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국제정치적 관점의 根底에는, 歷史가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역사가 바탕이 될 때, 국제정치적 판단은 正統性과 正當性을 획득할 수 있다. 여기서 그러한 역사가 ‘自國에 이익이 되는 역사’여야 함은 明若觀火다.
그리고 마땅한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역사를 歪曲하게 된다. 그런데 왜곡할 만한 역사조차 없는 경우에는, 이제 온갖 道德主義的 名分을 내세운다.
예컨대, 21세기에는 人權이라는 명분만큼 그럴듯한 명분은 없다. 물론 인권은 참으로 소중한 보편적 가치 개념이지만, 이렇게 한갓 명분으로써 악용되는 도덕은, Nietzsche가 비판한 ‘奴隷道德’ 部類쯤으로나 분별될 따름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國家의 구성원으로서 살아내는 인간존재의 삶은, 아무리 微細한 상황일지라도 국제정치의 거대한 흐름에 의한다.
마치 ‘Butterfly effect’처럼,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날씨 변화를 일으키듯이,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세상 理致다.
그러니 한 인간존재의 미세한 행위가, 거대한 국제정치적 사건으로 飛火될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필자는 그러한 국제정치의 作動原理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대적 사건으로서, 에너지 戰場인 一帶一路를 제시한다.
흔히 一帶一路를, ‘시진핑’이라는 중국의 현대판 皇帝 個人이 도출해 낸 執權政策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一帶一路의 中國夢은, 결코 ‘시진핑’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 夢想은 중국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전체를 搖動케 하고 있는 탓이다. 따라서 이를 살핌으로써, 현대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 역시 赤裸裸하게 분석할 수 있다.
美中 貿易戰爭이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도 一帶一路이며, 北韓의 핵무기와 무역제제에 관련된 문제들 역시, 一帶一路와 첨예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슈로서, 一帶一路는 가장 時宜適切하다고 할 것이다.
현대의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主唱하는 것은, 모름지기 中國夢이다. 과연 중국이 꿈꾸는 ‘중국의 꿈’은 실현될 것인가.
그런데 中國夢이 실현되든 실현되지 안든,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죄다 불안스럽고 불편하다는 점을 인식케 된다.
특히 一帶一路 式의 中國夢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대한민국에게는 惡夢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역사적 사례로써 익히 검증된다.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이 강력한 帝國으로서 정립되었을 때, 인접해 있는 만주대륙과 한반도는 늘 정복의 一順位였다. 그래야만 名實相符한 天子의 제국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一帶一路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장기적인 인프라 프로젝트는, 그 계획대로만 실현된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현재 100여 개 국가 및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으며, 30여 연선국가와 일대일로 공동 건설 관련 협약을 맺었다. 2017년 5월, ‘2017 일대일로 국제협력 고위급 포럼’에서는, 총 270여 개의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覇權國 미국은, 이러한 계획을 坐視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자칫 覇權을 중국에게 넘겨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과거에 소련이나 일본을 坐礁시켰듯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이며 중국의 몰락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 현대에 이르러서도, 지정학적으로 부득이하여 배척될 수 없는 중국이, 다시 中國夢을 꿈꾸기 시작한다는 일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 당최 불안한 미래에 대해 銳意注視해야만 하는 사안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중국이 모색하는 中國夢은, 과거 주변국들을 君臣關係로써 屈從시키던 짓을 꿈꾸는 것일까.
현대적인 自由民主主義 체제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서, 과거 獨尊儒術하던 儒敎文化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식의 재현을 꿈꾸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종교적인 온갖 것들을 죄다 獨裁하던 天子의 帝國을 부활시키려는 것일까.
그래서 그러한 과정에 걸림돌이라 인식했던 檀君朝鮮, 高句麗, 高麗, 渤海, 統一新羅, 朝鮮 등의 경우처럼, 주변국들이 자기들의 中國夢體制에 순응하고 굴종할 때까지, 침략과 정복을 자행하겠다는 것인가.
이러하니 가장 근접해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으로서는, 도무지 불안과 공포를 숨길 수 없다.
그러다보니 중국 자본을 受惠하는 親中主義者들도 多數 발생하는 상황이며, 그러한 자들은 과거 大東亞共營圈을 主唱하던 日本帝國을 좇아, 韓日合邦(庚戌國恥)을 주도했던 親日派들과 유사하게, 中國夢의 실현에 어떻게든 기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存續시키는 체제이론이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라는 점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그것을 견고히 유지할 때, 다소 나아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현상유지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是認해야만 한다.
이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生存의 利得’을 위한 不得已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解體하고서, 보다 나은 사회를 정립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면, 응당 그것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현재 暗?的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人民民主主義, 社會主義, 共産主義, 主體思想 따위가, 과연 그러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만 주의할 대목은, 人情的으로나 人道的으로 北韓의 同胞들에게 한 겨레로서의 민족적 共通感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國際社會라는 弱肉强食의 현장에서, 그러한 感性的 판단이 시의적절한 대안으로서 작동한 역사적 사례는 거의 不在함을 유념해야 한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로서 국제정치적 관점을 갖게 되면, 적잖은 인생의 의문이 해소된다.
혁명의 상황으로까지 치닫는 근원적인 사회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현실세계의 온갖 不合理와 갖은 不條理에 대해서도 理解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인간존재는 외부의 바람에 煽動당하지 않으며, 오롯한 자기의 삶에 충실할 수도 있게 된다. 世間의 인간존재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행복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자기에게 찾아든 苦難의 원인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서 나름의 대안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近代 이전에는 국제정치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위대한 先知者로서 숭앙되는 인물들의 텍스트였다.
예컨대, 老子, 論語, 大藏經, Bible, Quran, 그리스哲學書 등이 그러하다. 그런 先覺者들의 텍스트를 공부하면, 현실세계라는 ‘우물 안 개구리’ 상태를 극복하고서, 天地自然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살필 수 있게 된다.
곧 天地自然의 ‘그레이트 게임’을 인식하게 되는 탓이다. 그래서 그들의 著作이 현재까지도 인류의 古典으로서 숭앙받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직접적으로 天地自然의 상황을 살피는 시대이다. 예컨대, NASA에서 운영하는 인공위성 화면은 실시간으로 地球라는 行星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지구촌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관점을 지니지 못한다면, 각 개인의 삶의 문제 역시 마땅한 해답을 갖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미세한 상황일지라도 그 결정적인 원인은, 결국 거대한 ‘그레이트 게임’에 의한 逆나비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제정치적 관점의 培養과 思慮는 실로 중요한 삶의 태도라고 할 것이다.
제아무리 小乘的 깨달음을 얻어 解脫한다고 해도, 결국 현실세계에서 생존하는 한, 거대한 ‘그레이트 게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은 실로 不得已다.
이러한 본래적 사실을 是認하지 않는다면, 결코 삶의 現象은 죽음의 순간까지 나아지지 못한다.
‘中國哲學(Chinese philosophies)’ 중국에서 전개된 철학사상을 가리킨다. 중국철학은 主流思想의 변천에 따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7단계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百家爭鳴時期(기원전550~기원전110), 文獻經學時期(기원전110~기원후220), 老莊學·玄學時期(220~404), 佛敎主流時期(405~819), 新儒學·性理學時期(820~1644), 實學考證學時期(1645~1911), 社會主義·全體主義時期(1912~현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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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 헤겔, 법철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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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은 무엇인가


1. ‘法學’과 ‘法哲學’

法學은 實定法에 대한 학문체계이고, 法哲學은 自然法에 대한 학문체계이다.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실정법에 비해, 다소 荒唐無稽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문명의 歷史的 始作과 동시적으로 고뇌되어온 자연법에 대한 穿鑿이 없었다면,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실정법이 정립되었을 리 萬無하다.
그리고 法律이라는 것은, 明文化된 法條文만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解釋과 適用이 요구된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법률을 제정해 두었더라도, 그러한 법률을 이해하지 못하고, 준수하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한갓 ‘빛 좋은 개살구’로서 無用之物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한 법률의 해석과 적용의 과정에서, 법철학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법학과 법철학에 내재된 관계 방식은, 非但 법률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諸般狀況에서도 작동한다.
어떠한 상황이든, 그 裏面의 철학적 상황인식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흔히 ‘自己의 哲學’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허접한 개똥철학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존재는 자기만의 철학을 지니고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록 거렁뱅이의 貧困한 삶일지라도, 오롯한 自由人的 個人으로서 삶을 꾸릴 수 있다.
그런데 역사 안에서 旣得權的 支配權力은, 각 인간존재들이 자기의 철학을 지니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각 인간존재들이 자유롭게 ‘자기의 철학’을 지니게 되면, 마음대로 선동하여 조작할 수 없게 되는 탓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온갖 프로파간다로써 각 인간존재들의 ‘自己의 哲學’을 조작해대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문명이 高度化될수록 더욱 惡化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개돼지 群衆’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깨어나서 공부하여 ‘자기의 철학’을 保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존재들은 출생 이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결코 ‘개돼지 군중’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중국과 미국 사에에서 覇權競爭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후손들에게 韜光養晦를 강조하였다. 도광양회는 ‘빛을 감추고 어둠속에서 실력을 기른다’는 의미다.
만약 ‘덩샤오핑’의 遺言처럼, 중국이 섣부른 패권경쟁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세계의 패권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歷史는 무수한 變數에 의해 조작되기 마련이다.
‘시진핑(習近平)’이 등장하여, 이렇게 성급한 패권경쟁을 시작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러다보니 중국은, 오랜 세월 끝에 찾아온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는 상황에 있다. 아무래도 중국의 미래는, 과거 蘇聯의 前轍을 밟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접국의 상황은, 대한민국이나 북한 그리고 일본 등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昨今에 벌어지고 있는, 韓日 무역전쟁이 그러하다. 물론 이는, 역사적 배경을 갖는 현상이다. 日帝强占 역사에 대한 怨恨이, 反日 種族主義를 부추기는 것이다.
여기서 怨恨이라는 감정에 대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원한 감정은, ‘니체’의 주장처럼, 고작 奴隷道德으로서나 작동한다.
現下 빨갱이 정치권력의 프로파간다에 휩쓸리는 ‘개돼지 群衆’의 감정상태는 여실히 怨恨이다.
이러한 怨恨의 集團意識과 集團無意識에 의해 발현되는 도덕은 奴隷道德이며, 그러한 ‘떼거리 윤리도덕’이 실현하는 法體系는, 無法的 妄想에 의해 작동하는 虛張聲勢이기 십상이다. 당최 哲學이 없는 法體系의 作動인 것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발생하는 道德的 法律的 상황들은, 妄想的 奴隷道德이 아니라, 嚴正한 法律道德에 의해 인식되고 판단되어야 한다. 정치권력의 선동질이나 조작질에 놀아나는 ‘개돼지’로서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實存하는 個人’으로서 판단해야 한다.
法哲學的 理想이 현실세계에서 정립된 대상은 憲法이다. 구체적인 각 法律들은 법철학적 측면보다는, 현실세계를 실질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법학적 측면이 강조된다. 따라서 國家의 國民으로서 마땅히 헌법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憲法은 추상적 언어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最高一般法이기 때문에, 헌법이 직접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며, 憲法精神을 위배하는 하위 법규를 개정하거나 폐지하고, 입법부가 새로운 법규를 제정하도록 하고 있다. 憲法精神에 위배되는 법규는, 일반적으로 법원에 따라 효력이 상실된다.
그러나 憲法裁判所가 있는 국가에서는, 법원이 헌법재판소에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심사할 것을 청구하고, 헌법재판소가 이에 대해 심사하고 있다. 헌법의 제·개정 절차는, 일반 법률의 제·개정 절차보다 까다롭다.
이러한 憲法精神을 정립해내는 학문체계가 곧 法哲學이다. 그런데 법철학적 전통이 日淺한 대한민국의 경우, 최근 대통령 탄핵 사건을 경험했다. 이는 헌법적 사건으로서, 지극히 법철학적 판단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그 憲法的 判決에 대한 國論은 분열되었고,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도 헌법정신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저 旣得權勢力의 프로파간다에 煽動당하는 ‘개돼지 群衆精神’이 작동할 따름이다.
‘法哲學(philosophy of law)’이란, 법의 本質과 淵源 등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과 이론을 만드는 철학적 연구 분야이다.
일반적으로 哲學이 취하고 있는 기초이론에 입각하여, 법의 개념, 본질, 이념, 효력 등을 비롯하여, 법과 사회, 법과 국가의 관계의 근본문제를 다룬다. 즉, 올바른 法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모색하는 法哲學은 법과 관련된 철학이다.
이는 自然法과 實定法 등의 ‘法學(science of law)’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성찰하며, 現行法律이나 外國法律을 직접 대상으로 하지 않고, 법의 근본 원리를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2. 자연법

‘自然法(natural law)’은, 人爲的이 아닌 自然的 성질에 바탕을 둔, 普遍的이고 恒久的인 법률 및 규범을 의미한다.
實定法에 대비되는 법 개념으로서, 실정법이 민족이나 사회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것에 비해, 民族·社會·時代를 초월해 永久不變의 普遍妥當性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으며, 특히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실정법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異見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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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실천이성비판 도덕의 계보, 윤리학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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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은 무엇인가


1. ‘윤리학’과 ‘노예도덕’

대한민국의 倫理學은, 朝鮮王朝 시절의 歷史的 慣性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500여 년 넘도록 朝鮮民衆을 抑壓했던 그 윤리학은,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을 억압하고 있다.
朝鮮王朝의 윤리학은 철저히 실패하였고 해체되었다. 그런데도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韓民族에게 윤리학다운 윤리학은 없다.
日帝强占期의 倫理나 道德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左右 이데올로기 ‘쌈질’을 하던 시절은 어떠하며, 6.25 전쟁, 4.3 사건, 5.18 사건, 세월호 사건, 대통령 탄핵 사건 등의 상황에서는 어떠했는가.
21세기 지금 이 순간까지도, 倫理道德은 ‘利益과 戰爭’의 侍女일 따름이었다. 非但 우리나라의 역사만이 아니라, 人類史에서 倫理道德은 늘 그러했다.
그래서 ‘近代的 個人’으로서 인간존재들은 법률에 좀 더 의지케 되었다. 고작 奴隷道德쯤으로나 작동하던 道德主義의 역사적 弊害를 익히 체험한 탓에, 차라리 法律主義에 의지코자 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어쩐지 도덕주의를 법률주의보다 선호한다. 적어도 法律的 强制에 의해 統制당하는 것보다는, 道德的 良心에 의한 抑制가 좀 더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탓이다.
예컨대 서양세계에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주장하는 ‘德(arete)’을 목적한다든지, ‘실천이성비판’에서 주장하는 인간존재 내부의 絶對命令을 좇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自律의 상태를 추구한다. 때문에 자율적 양심은 더욱 여러모로 具色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실천이성비판’은, 啓蒙主義의 완성자로서의 칸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도덕의 원천은 ‘自律(Autonomie)’, 즉 意志의 自己立法性에 있다.
자율은 곧 ‘自由(Freiheit)’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近代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는 핵심 개념인 自由는, 칸트에 의해서 철학적 토대를 얻으며, 그 점에서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근대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인간존재의 本性은, 당최 윤리도덕으로써 良心的으로 통제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례로써 쉬이 검증된다. ‘倫理道德的 抑制’가, ‘法律的 統制’보다 인간존재에게 적합했다면, 이미 인류는 지극히 윤리적인 문명을 실현했을 것이다.
더욱이 國內政治의 場에서는, 윤리도덕이 그나마 억제력을 가질 수 있지만, 國際政治의 jungle에서는, 윤리도덕은 고사하고, 國際法마저도 별다른 통제력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國家 間에 國益의 衝突이 발생하였을 때, 결국은 軍事的 暴力에 의한 戰爭으로써 勝敗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은,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전혀 달라진 바 없다.
우리나라의 서양윤리학 도입은, 1924년 경성제국대학 윤리학과의 성립과, 1938년 金斗憲의 ‘윤리학개론’ 출판이 嚆矢이지만, 한국윤리학의 역사와 전통은 儒佛仙의 思想史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의 윤리사상은, 근본적으로 儒佛道의 經典에 뿌리박고 있으며, 서양 윤리학의 이론보다는, 그리스도교의 교세확장에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윤리학은 실상 有名無實하다. 기존의 윤리학은 죄다 실패했고 해체되어버렸으며, 정작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것은 法律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기의 旣得權的 利得을 목적하며, 윤리도덕을 법률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현혹함으로써, 旣往의 법률마저도 훼손하는 실정이다.
종래의 윤리학이 개인적이며 이론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면, 현대윤리학의 괄목할만한 중요한 특징은 ‘實踐的 倫理學(practical ethics)’ 내지 應用倫理學의 擡頭라고 말할 수 있다.
1990년대 윤리학의 새로운 동향은, 이론적인 規範倫理學에서는, 담론적 방법을 중시하는 構成主義的 倫理學(Schwemmer), 言語話用論的 윤리학(Apel) 및 意思疏通윤리학(Habermas)이 활발히 논의되고, 發生윤리학(Krings), 契約論的 윤리학(Rawls), 합의에 의한 도덕론(Gauthier) 등이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최근의 理論倫理學의 연구동향에서 특기할 것은, 권리와 의무에 중점을 두는 논의보다, 책임에 중점을 두는 논의가 활발하다는 것과, 他者를 중시하는 現象學的 倫理學(Levinas)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천적인 應用倫理學에서는, 특히 생명공학 및 유전공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파생하는 생명윤리의 문제들, 가령 인간복제, 인간과 동물의 교잡배, 유전자조작식품의 부작용, 인간게놈연구 등을 다루는 生命倫理學에 관한 연구가, 학계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전자매체기술의 발달에 의해 파생되는 사이버테러, 사이버 명예훼손과 사생활보호 등은 크게 주목을 받고 있으며, 생태학적 윤리학과 과학 및 기술윤리학에 관한 논의도, 자연 및 인간의 위기문제를 폭넓고 심도있게 다룸으로써, 윤리학의 관심을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시키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시도가 있으나, 지금 이 순간에 이르도록 별다른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윤리학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존재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것은 ‘法律主義 倫理學’이라고 할 것이다.
순수한 윤리학의 무수한 시도가, 죄다 별다른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그러한 시행착오를 체험했으면서도, 여전히 윤리도덕에 어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무모하다. 차라리 感性이 철저히 배제된 ‘법률주의 윤리학’이 여러모로 타당하다.
人類史의 거대한 체험을 思慮한다면, 이제는 憂鬱한 ‘도덕의 계보’를 극복하고서, ‘위버멘쉬의 윤리학’이 작동할 수 있는 시공간을 실현하여, 영원한 회귀를 모색하여도 妥當하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그러한 시공간은 실현된 바 없으며, 향후에도 그러한 실현가능성은 당최 五里霧中이다. 그러니 차라리 ‘윤리도덕의 虛無孟浪함’보다는 ‘법률의 明白함’이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경우, ‘법률의 명백함’마저도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조작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돼지 群衆’들은 여전히 허망한 윤리도덕을 渴求한다. 참으로 蒙昧한 노릇이다.
‘倫理學(ethics)’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와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道德哲學(moral philosophy)이라고도 불린다. 영어의 ‘ethics’는 ‘ethos’, ‘moral’은 ‘mores’라는 희랍어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리학에 관한 이론은, 처음에 종교적인 敎說의 형식에서 나타났다.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종교의 모든 경전 가운데에는, 神 또는 聖人의 교훈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규범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윤리학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고대 중국의 儒學은 오히려 倫理學이었으며, 이것들에 대표된 사상은, 그 후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로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어, 독자적인 倫理學史를 형성하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서, 기존의 도덕은 대체로 인간존재 스스로를 主人의 상태로 陶冶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奴?의 수준으로 一貫하는 상태이다. 그러한 윤리학의 수준을 극복코자 한 것이, ‘니체’의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論辨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現實世界의 道德을 主人道德과 奴隷道德이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주인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自發的 肯定에서 성장하고, 자기 스스로 價値를 설정하며, 스스로 善과 惡을 결정하는 자의 도덕이다. 따라서 주인도덕에서 ‘좋음(gut)’과 ‘나쁨(schlecht)’의 대립은, ‘高貴함(vornehm)’과 ‘輕蔑함(veracht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반면 奴隷道德은 復讐心, 怨恨勘定, 즉 反動的 集團本能에서 성장한다. 가치를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것 전부에 대해 죄다 否定하고 解體할 뿐인 자들의 도덕이다.
따라서 奴隷道德에서 ‘善(gut)’과 ‘惡(bose)’의 대립은 ‘위험하지 않음(ungefahrlich)’과 ‘위험함(gefahr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同情이나 憐愍에 대한 勸告 등은, 노예도덕의 표식이다. 이 두 가지 도덕은, 고도로 혼합된 문화체계 안에서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영혼 속에서도 공존하고 침투하며 중재되고 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유대인의 복수심이 고안해내었던 奴隷道德의 지반 위에서 성장했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소위 말하는 도덕적 가치라는 좀더 작은 영역에서는, 주인도덕과 그리스도교적 가치개념을 가진 도덕과의 대립보다 더 큰 대립은 찾아낼 수 없다.
후자는 徹頭徹尾 병든 토양에서 자란다. 복음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생리적 유형들과 똑같은 유형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반대로 로마적이고, 이교적이고, 고전적이며, 르네상스적인 주인도덕은, 제대로 잘 되어있다는 것에 대한 표현, 상승하는 삶에 대한 표현, 삶의 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이 본능적인 부정을 하듯이, 神, 彼岸, 脫我 등의 개념은, 한갓 否定일 뿐이다.
반면에 주인도덕은 본능적으로 肯定한다. 주인도덕은 자기의 충만함을 사물들에게 나누어준다, 그것은 世界像을 神聖化하고 아름답게 만들며 合理的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사물의 가치를 빈곤하게 하고, 창백하게 만들고, 추하게 만들어버리며, 세상을 부정한다. 세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욕지거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反響인 근대의 가치체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존경 없이, 단지 시장터 같은 사회적 삶에만 가치를 두는 반동적 힘을 발견한다.
니체는 근대세계를 노예도덕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근대세계를 허무적 세계로, 近代人은 終末人으로 이해된다.
니체는, 주인도덕을 통해서, 삶을 자기극복을 통해 조형시키는 강한 의지, 많은 욕구들의 긴장적 대립들을 제어하는 능력, 긍정적 자기긍정과 자기가치의 느낌을 새로운 善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善한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의식 속에서, 자기극복의 덕을 갖고 있는 자가 된다.
이런 인간은 곧 고귀한 인간, 귀족적 인간, 귀족적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 곧 ‘차라투스트라’가 찾던 강한 자이며, ‘위버멘쉬’的 존재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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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설교집 (제3권)

도서정보 : 우슬초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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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 탄생의 참된 의미>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1-2)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기 4:5)


오늘은 예수님 탄생의 참된 의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어요. 예수님의 탄생은 과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믿는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요?

먼저 알아볼 것은 여러분! 노아 할아버지가 방주를 만들었죠? 노아가 만든 방주는 크기가 어땠을까요?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였어요. 폭은 23m였고, 높이는 14m, 그리고 3층이었어요.

그러면 노아 할아버지가 방주를 다 만들고 나서 몇 사람이 방주 속으로 들어갔을까? 8명이죠. 누구누구예요?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 3명과 며느리 3명, 다 합해서 8명 맞죠? 그런데 노아의 세 아들은 이름이 뭐더라? 셈, 함, 야벳이죠. 그중 셈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었으며, 우리 주 예수님의 조상이 된 사람이에요.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람은 남녀 4쌍, 짐승은 정결한 짐승은 암수 7쌍, 부정한 짐승은 암수 2쌍을 방주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그러자 하늘에서 40일 동안 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새 없이 쏟아졌어요. 그 결과 온 천하가 다 물에 잠겨버렸어요. 그리고 그 물이 150일 동안 즉 다섯 달 동안이나 온 천하를 다 덮었어요.

다섯 달이 좀 지난 후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물렀는데요, 이 아라랏산은 터키와 이란과 아르메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산인데 그 높이가 얼마냐? 5,165m나 된대요. 다섯 달 동안이나 물이 빠졌는데도 아직도 물이, 높이가 5,165m나 되는 아라랏산을 덮고 있었대요.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 무슨 산인지 알아요? 백두산이죠? 백두산은 높이가 몇 m나 될까? 옛날에는 2,744m였는데 최근에 재니까 2,750m래요. 그런데 아라랏산은 5,165m니까 백두산보다 약 2배나 높아요. 그렇죠? 그러므로 그때 우리나라는 완전히 물에 잠겨버렸었겠죠?

그런데 여기서 알아보고 싶은 것은요, 홍수가 나자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방주 안에 있던 동물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지만요, 방주 밖에 있던 자들은 모두 다 심판을 받고 죽었어요. 그렇죠? 그리고 방주로 들어간 동물들도 하나님이 보내 주셨죠? 자기들이 스스로 방주를 찾아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어요. 노아가 나가서 아무 동물이나 주워온 것도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만이 교회라는 방주로 찾아 나와요. 아무나 찾아 나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이렇게 방주인 교회로 나왔으니, 여러분을 선택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노아의 방주가 있어서 믿고 나온 8명을 구원했지만, 오늘날은 예수님의 방주가 있어서 믿고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어요. 오늘날 예수님의 방주는 무엇일까요?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방주인 것입니다.

멀지 않아 이제 심판의 불이 임할 거에요. 노아 때는 물로 심판했지만요, 마지막 때는 불로 심판하신대요. 그때도 예수님의 방주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데,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불의 심판을 결코 피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없어져 버리고 마느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죽는 그 순간! 사람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맞이할 것입니다.


1. 악인에게 주는 의미

오늘 알아볼 것은 첫 번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악인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요, 악한 자들과 사탄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극렬한 풀무불 같은 심판의 날이래요. 그리고 그 심판의 불이 악인들을 불살라 버린대요.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은 악한 자들과 사탄에게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래요.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오신 날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선포된 날이에요.

2. 의인에게 주는 의미

두 번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의인들,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랬어요. 여러분!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나와서 뛰는 것 본 사람 있어요? 누가 한 번 나와서 송아지처럼 뛰어 볼 사람?

송아지요?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소를 길렀기 때문에 잘 알아요. 매일 송아지를 보면서 살았어요. 외양간 안에는 엄마 소, 아빠 소가 있죠. 여물통에는 여물이 많고, 저 들에 가도 먹을 풀이 많고, 아무 걱정도 없고,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픈 곳도 없어요. 그리고 어리기 때문에 주인이 일도 안 시키죠. 살이 안 쪄서 몸도 무겁지 않고 얼마나 좋은지, 날마다 즐거움을 참지 못하고 좋아서 뛰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의로운 태양이 떠오른 거예요. 그 태양 빛이 비치자 곰팡이가 말라버리고, 축축하던 것들이 다 마르고, 병균도 다 죽어버리고, 죽은 영혼이 살아 일어나고, 병든 자가 치료를 받아 일어나고, 바야흐로 지옥과도 같던 이 세상에 하늘나라가 임했단 말이에요.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교가 좋은 줄 알았어요. 사두개교가 좋은 줄 알았어요. 제사장이고 서기관이면 다 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셔서 그들을 가차 없이 심판하셨어요. 오늘 우리 교회에 오신 예수님도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잘못을 지금 우리의 양심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지적하고 계셔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십자가에 못 박았나 생각해 보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정말로 예수님 때문에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우리 모두 세례요한이 되자.

세 번째로, 하나님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하셨어요.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나 예수님이 오신다고 전파하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어요. 예수님의 길을 미리 닦았어요.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오셔서 진짜 천국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셨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가족들을, 우리 이웃을, 우리 친구들을 찾아가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세례요한이 되어 주님이 그 사람에게 가시기 전에 먼저 가서 주의 길을 예비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가실 그 길을 미리 평탄하게 닦아 드리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 때문에 태어나실 수 있었어요. 만일 마리아와 요셉이, 천사를 통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태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가정에 수없이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마음속에 날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태어나기만 하면요,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누가복음 2:49)


예수님을 낳은 사람이 누구죠, 여러분? 마리아죠. 그럼 마리아의 남편은 누구? 요셉이죠.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니면 믿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예. 요셉과 마리아는 신앙이 아주 훌륭했어요. 주위에 본이 되는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해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절기들을 잘 지켰어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의 이야기예요. 그 해에도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갔어요. 유월절 하루를 지키고 나서 요셉과 마리아는 같이 갔던 사람들과 함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났어요. 고향 사람들과 재미있게 대화를 하며 하루를 걸은 후 갑자기 생각이 나서 찾으니 아들 예수가 없어진 거예요.

“설마! 어딘가 있겠지” 하며 아무리 찾아도 예수님은 보이질 않았어요. 같이 왔던 친척들에게 물어보아도 못 봤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던 길로 되돌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보아도 봤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요셉과 마리아는 올 때는 하루 걸려 온 길을, 여기저기 다니며 예수를 찾느라 3일 후에야 예루살렘에 도착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곧장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 성전 안에 계셨을까, 안 계셨을까? 예! 예수님은 바로 그곳 성전에 계셨어요. 성전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 기도했을까요? 아니에요. 그럼 전도했을까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말씀 읽었나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무엇을 하셨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같이 앉아서 그들에게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그들과 같이 계셨어요. 예수님이 그때 몇 살이라고요? 열두 살!

여러분이 열두 살이면 5학년인가요? 5학년밖에 안 되는 여러분이 목사님들과 같이 앉아서 말씀을 주제로 대화를 할 수 있나요? 하고 싶어도 알아야 하지. 그렇죠?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살에 벌써 성경 지식이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어요. 요셉과 마리아는 “혹시나” 하고 왔는데 예수님이 거기 계시잖아요?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가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어요.
“예수! 왜 여기 남아 있었어? 따라오는 줄 알았는데... 걱정이 돼서 이렇게 3일간을 찾아다니다가 이제야 겨우 찾았구나.”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인 이곳 성전에 있어야 될 줄을 정녕 알지 못 하셨단 말입니까?” 하고 반문하셨어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내용이에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된 단 하나밖에 없는 기록이에요. 오늘 이 말씀 외에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아야 하겠어요.

1. 예수님을 잃어버림

첫 번째로,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 갈 때는 예수와 함께 갔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자기들끼리만 돌아왔어요. 자기들끼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가다가 예수가 따라오는지 안 따라오는지 무관심했어요.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교회 올 때는 예수님과 함께 왔는데, 예배드리는 동안에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 집에 돌아갈 때는 친구와 이야기하느라고, 간식 먹느라고 예수님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까? 오늘 모인 여러분 중에는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을 다시 찾음

두 번째로, 요셉과 마리아는 3일 후에야 예수님이 그들 곁에 없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어떻게 했어요? 가던 길을 그대로 갔어요? 아니죠. 그럼 어떻게 했나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예수님을 찾기 위해 오던 길로 되돌아갔어요. 그들은 조금 가다가 포기하지 않았어요. 하루 가보고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틀 가보고 포기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다시 찾을 때까지, 끝까지 갔어요. 그 결과 3일 만에 예수님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와 어울려 다니느라고, 만화 가게나 오락실에 푹 빠져 있느라고, TV 보느라고, 친구나 동생과 싸우느라고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 그리고 “아!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처럼 어디서 예수님을 잃어버렸는지 마음속에서 생각해봐야 해요. 생각을 더듬어 올라가 봐야 해요. 다시 찾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있는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지, 만일 잘못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즉시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이켜야 해요. 그럴 때 예수님이 다시 여러분 곁에 오시고, 여러분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3. 예수 안에 있는 자유>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0-11)


여러분! 한 가지 물어보겠어요. 어릴 때는 네 발로 걷고, 커서는 두 발로 걷다가, 늙어서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있어요. 뭘까요? 사람이죠. 아기 때는 두 손과 두 발 그러니까 네 발로 걷고, 커서는 두 발로 걷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으니까 세 발이죠. 이와 같이 사람은 걷는 데 있어서 세 가지 과정을 거치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에도 이러한 세 가지 과정이 있어요. 그 세 가지 과정, 세 가지 단계가 무엇인지 한 번 알아보겠어요.


1. 구약의 단계

첫 번째 신앙의 단계는 구약의 단계예요. 예수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시대를 구약시대라고 하거든요. 이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였어요.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해놓은 법이에요. 예를 들면 십계명이 대표적인 율법이죠. 그 외에도 굽이 갈라져 족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토끼나 약대, 돼지 같은 짐승은 먹지 말고, 그 죽은 시체도 만지지 말라 하셨는데 이런 것들이 다 율법이에요.

구약시대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데요, 누구를 믿어야 구원을 얻었을까요? 오실 메시야 즉 오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신 뒤인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누구를 믿어야 구원받아요? 오신 그리스도 즉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해요. 그러니까 결국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누구를 믿어야 구원받아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아요. 알겠습니까?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성경이 아직 다 기록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예언을 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인쇄기술이 없어서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썼거든요. 그러니 1년 내내 쓴다 해도 몇 권이나 쓸 수 있었겠어요? 그뿐만 아니라 다른 책을 베껴 쓰다 보니까 틀리기도 하고, 또 제사장들은 율법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참뜻인 사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신앙이 좋았겠어요, 안 좋았겠어요? 안 좋았겠죠?

하나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여호와가 하나님인지 바알이 하나님인지 구분도 못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고, “아! 이건 해야 해. 아! 이건 하면 안 돼” 그게 고작이었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하나님이 누군지, 예수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믿음도 없고 그럴 때는
“교회에 나오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밥을 먹을 때도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기도할 때는 꼭 눈을 감아야 해. 눈을 뜨면 안 되는 거야. 또 주일날은 교회에 나와야 해. 그리고 동생을 때리면 안 돼.”
그런 식으로 그 속뜻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한다고요.

사실은 그런 것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나는 누구며, 나와 하나님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게 더 중요한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고 교제하고 사귀는 게 훨씬 더 중요한데도 말이에요.

이와 같이 속뜻은 알지 못하면서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라니까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신앙, 이러한 신앙을 구약의 단계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2. 신약의 단계

두 번째 신앙의 단계는 신약의 단계예요. 신약시대는 예수님이 오신 후의 시대를 말하거든요. 지금이 바로 신약시대예요.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예요. 신약시대에는 이제 예언도 끝나고, 성경도 다 기록되었고, 인쇄기술이 발달하여 성경을 얼마든지 살 수 있죠?

게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의 비밀들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이제 신약시대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도 알고요, 껍데기보다 알맹이를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도 다 알아요.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와는 달리 이미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이젠 이미 오신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해결돼 버려요.

여러분! 엄마가 아빠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쌀이 떨어졌어요. 반찬도 다 떨어졌어요. 애들 학원 등록도 해야 해요. 애들 신발도 다 해어지고 옷도 다 해어졌어요.”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빠가 뭐라고 합니까? 미련한 아빠 같으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렇지만 지혜로운 아빠 같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래? 별거 아니네 뭐. 돈만 있으면 되겠네.”
그러면서 수표 한 장을 주시네. 수표 한 장이 얼마예요? 집마다 다르겠지요? 돈만 있으면 간단하게 해결되잖아요? 그렇죠?

“마음이 답답합니다. 일이 잘 안됩니다. 기분도 별로예요. 걱정스럽습니다. 근심스럽습니다. 잠이 잘 안 오고, 몸도 좋지 않고, 잠만 들면 꿈에 귀신이 나타납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한 가지만 하면 되겠네 뭐. 뭐하면 돼요? 예수 안에 들어오면 돼요.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내 속에 들어오셔서 둘이 하나가 돼버려요.
그러면 만사 OK죠. 알겠어요?

예수 안에 자유가 있어요. 예수 안에 평화가 있어요. 예수 안에 기쁨이 있어요. 예수 안에 사랑이 있어요. 예수 안에 들어오면요, 그래서 성령님이 내 속에 계시면요, 형식이 필요 없어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모양새가 필요 없어요.

잘 모르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나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리 앉으세요. 뭘 드릴까요?”
이런 예의가 필요하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런 게 뭐 필요 있어요? 눈빛만 봐도 마음을 다 아는데. 눈으로 말하는데. 그렇죠?
“왜 이리 늦었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한 마디 속에 모든 뜻이 다 들어 있잖아요? 그 말 속에는
“보고 싶었다. 안 와서 혹시 무슨 사고나 나지 않았나 하고 걱정스러웠다.”
그런 내용이 다 들어 있어요. 사랑한단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도 그 한마디 속에 사랑의 감정이 가득 들어 있잖아요? 그렇죠?

이러한 신앙의 단계는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이미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고 있는 위대한 믿음이에요.

3. 새 예루살렘의 단계

세 번째 신앙의 단계는 새 예루살렘의 단계예요. 역사는 구약이라는 어린아이의 시대를 지나 지금은 어른인 신약시대인데, 이 신약의 시대가 끝나면 영원한 천국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요.

신약시대에는 성령님이 내 속에 계시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죄를 안 지어야 되는 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죄도 많이 지었어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그러나 새 예루살렘의 신앙은요, 우리 마음이 이미 천국에 올라가 있어요.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죄도 안 짓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 매일 그런 생각만 하고 사는 믿음! 이것이 새 예루살렘의 단계의 신앙이에요. 우리는 이러한 단계를 향하여 날마다 노력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는 신약의 단계의 신앙을 성화(聖化)라고 불러요. 이것은 거룩하게 되려고 매일 노력하는 단계에요.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단계의 신앙을 영화라고 불러요. 이것은 이미 거룩하게 된 단계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대개 구약의 단계와 신약의 단계의 신앙을 거쳐요. 그리고 죽으면 즉시로 새 예루살렘의 단계로 들어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새 예루살렘의 단계까지 올라가는 사람도 있긴 있어요.

자! 우리는 모두 구약의 율법적인 신앙, 의무적으로 하는 신앙을 버리고 예수 안에 들어와서 참 자유를 누려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참 자유를 얻어 굳세게 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4. 오늘도 일하시는 성령님>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온 백성들을 다스리셨어요. 그때에는 이 세상에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 같은 사람들에게만 성령을 부어 주셨어요.

그러다가 지금부터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살다가 죽으셨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 10일 만에 성령님이 오셨어요.

옛날 구약시대에는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 중 몇 명만이 성령을 받았는데요, 이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그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요.

오늘 알아보고 싶은 것은 성령님은 오늘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1. 성도에게 말씀하신다.

첫 번째로, 성령님은 믿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셔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읽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셔요. 또한 길을 걸을 때도 문득 내가 지은 죄가 생각나게도 하시고, 그래서 길가면서 회개 기도를 하게도 하셔요.

또한 어려운 성경 구절이 깨달아지게도 하셔요. 그리고 어려운 문제의 해답이 문득 생각나게도 해 주셔요. 뿐만 아니라 갑자기 기발한 아이디어나 좋은 생각이 나게 해 주시기도 하고. 그래서 떼돈 번 사람도 많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너 ○○하고 싸웠지? 싸울 때 너 걔한테 욕했지? 걔를 모욕했지? 걔는 지금 너 때문에 아주 마음이 아프단다. 믿는 네가 먼저 가서 사과하지 않겠니?”
“너 지난 주일날은 교회에 안 갔지? 이번 주에는 꼭 교회에 가.”
성령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시고, 계시해 주신단 말이에요. 하늘에 속한 비밀스러운 일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요. 이런 것들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들이에요.

2. 예수님을 증언하신다.

두 번째로, 성령님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시고 믿어지게 해 주셔요. 아무나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게 아니에요.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만 믿음을 주셔요. 여기 오신 여러분은 모두 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여기 와 앉아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택함을 받지 못한 어린이들은 여기 안 와요. 만화 볼 시간인데 미쳤어요? 따분하고 시간 아까운데 교회에 가게? 그렇죠?

성령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남에게 복음을 전하게도 하시지만요,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그 마음속에 교회에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셔서 결국 교회로 나오게 만들어 주셔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셔요.

그러므로 이런 말은 틀린 말이에요.
“성령님은 육신이 없으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해라.’ 하고 시켜서 일도 하시고 전도도 하시지, 성령님 스스로는 일을 하거나 전도를 하지 못 하신다.”
그런 말은 거짓말이에요. 성령님은 믿는 우리들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요, 성령님이 직접 일하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요.

아빠가 여러분에게 “얘야! 문 좀 닫아라.” 그렇게 명령을 하셨는데 여러분이 노느라고 문을 안 닫으면 아빠가 직접 닫으시죠? 마찬가지예요.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 뭔가를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님이 직접 하셔요. 성령님이 직접 전도를 하신다니까요. 성령님이 직접 사람을 찾아가서 교회로 나오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신다니까요.

제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요, 고3 때 4월 어느 주일 오후에 큰길을 걷고 있었어요. 사춘기가 와서 마음이 갈급한, 목마른 상태였어요. 요즘은 초등학교 때 사춘기가 오지만 우리 때는 고2~3 때 왔거든요. 고2 때 허무주의에 빠져서 “공부는 해서 뭐해. 모든 것은 공(空)으로 돌아간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고3이 되었는데, 아직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중이었어요.

길을 걷고 있는데 큰길 옆에 교회가 있는 거예요. 물론 전에도 거기 그 교회가 있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 거기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들어갔어요. 들어갔더니 마침 중고등부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계속 교회를 다녔어요. 누구를 통하지 않고 성령님이 직접 교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3. 성도를 위로해 주신다.

세 번째로, 성령님은 성도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 마음을 위로해 주셔요. 평소에는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잘 알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그때에는 성령님의 위로가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돼요. 성령님이 우리를 얼마나 위로해 주시는지. 마음속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셔요.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슬퍼하지 말아라. 네 부모는 혹시 너를 버릴는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용기를 가져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아라. 무궁한 하늘나라를 내가 너에게 유업으로 주리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내가 너에게 주리라.”

세상 것은 무엇이든지 나 죽으면 그만이에요. 여러분! 연필, 지우개, 장난감, 크레파스 같은 것 때문에 동생을 때리고, 언니에게, 오빠에게, 형에게, 누나에게 대들고 그러죠? 그까짓게 뭔데. 세상 떠날 땐 그보다 훨씬 더 귀중한 자기의 몸, 육체도 다 내버려 두고 가는데. 그렇죠? 세상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성도를 책망하신다.

네 번째로, 성령님은 성도들을 책망하는 일을 하셔요.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죄를 가르쳐 주시고 죄를 꾸짖는 일을 하셔요. 우리 속에는 양심이 있죠?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님이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죄를 지적해 주셔요.
“너 지난 주일 까먹었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했는데 죄짓고 살았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기도도 안 했지? 회개해.”
“한 주일 동안 찬송 한 번도 안 했지? 전도도 안 했지? 말씀도 안 읽었지? 회개해.”
자꾸만 이렇게 찔러요, 양심을 통해서.

이와 같이 성령님은 우리 양심 속에 직접 역사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요.

찬송가에도 있죠?
♬ 기도하고 말씀보며 하나님께 더가까이
찬양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께 더가까이
하나님께 더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겐 복이라네
오늘도 내일도 가까이 더 가까이 ♬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안 되겠죠?

5. 성령으로 충만하자.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해요. 이것은 명령이에요, 성령 충만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에베소서 5:18에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하고 명령하고 계셔요.

여러분! 밤에 잠잘 때 가위눌릴 때가 있죠? 가위눌리는 게 뭐냐구요? 목 졸리는 거죠. 저는 몇 년 전에 밤에 잠을 자는데 갑자기 누가 와서 목을 조르는 것 같아요. 왝왝거리면서 이것을 뿌리치려고 해도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 거예요. 손도 움직일 수가 없고.

그럴 땐 어떻게 해요? 마음속으로 기도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줄줄 흘리는 것을 머릿속에 생각하면서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입에서 막 기도가 나와요. 실제로는 아닌데 입도 안 열리는데 마치 꿈결과도 같은 상황에서 기도가 나와요. 그러자 내 입에서 불에 빨갛데 달군 것 같은 붉은 색의 바늘, 침핀이 수백 개, 수천 개가 밖으로 마구 쏟아져 나가요. 그러자 마귀의 권세가 다 흩어지고 목이 괜찮아졌어요.

여러분! 성령 충만해야 이런 것도 물리치죠,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이런 것 물리치지 못해요. 가위눌리면 잘못하면 죽거든. 잠자다가 죽는 사람들이 왜 죽어요? 가위눌려 죽든지 심장마비로 죽든지 그렇죠?

그리고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때 아프죠? 저도 아파서 될 수 있으면 주사를 안 맞으려고 하는데요, 주사를 맞아야 약만 먹는 것보다 더 빨리 나아요. 주사를 맞을 때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으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히고 창에 심장이 찔리기까지 하셨는데 내가 이까짓 주사 하나 못 참겠습니까?”
하고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그러면 아파도 참을 수가 있어요.


모두 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자세만 되어있으면 기도하는 즉시 성령님이 여러분을 충만하게 채워주셔요. 찬송할 때 성령님이 여러분을 채워주셔요.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이 여러분을 충만하게 채워주셔요. 그리고 오늘도 일하시는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셔요.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전도하고, 성령으로 말씀 보고, 성령으로 승리하는 ○○교회 어린이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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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설교집 (제2권)

도서정보 : 우슬초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1.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열왕기상 18:24)


지금으로부터 약 290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울에서 다윗으로, 그리고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던 이스라엘 통일왕국은 솔로몬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우리나라처럼 둘로 갈라지고 말았어요.

솔로몬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하나님의 성전도 짓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여인을 1000명이나 왕비로 맞이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등 하나님 앞에 죄를 많이 범했어요.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으나, 신하 장수였던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 결과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은 10지파가 모인 여로보암의 북 이스라엘과, 2지파만 남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남 유다로 분열되고 말았어요.

오늘 이야기는 10지파가 모인 북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이며, 북이스라엘의 왕 중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 때의 이야기예요.

1. Story

아합 왕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신을 섬겼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바알신을 섬겼다니까요? 인터넷에 ‘바알신’ 이라고 쳐보세요. 어떤 모습인지. 바알신은 우상이에요.

이세벨은 이스라엘 전국에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국고로 생활비를 대주면서 그들을 길러냈어요. 그뿐만 아니라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어요.

그래서 혼자 남은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는 마침내 아합 왕을 찾아갔어요. 찾아갔더니 아합 왕이 엘리야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열왕기상 18:17에 보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그랬대요. 그러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말했어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그런즉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온 이스라엘 백성과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 모아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러자 아합 왕이 엘리야의 말대로 그들을 갈멜산으로 모아주었어요.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말했어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그러나 백성들은 대답이 없었어요. 백성들은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정말 몰랐어요. 그러자 엘리야가 또 백성들에게 말했어요.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 혼자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나 된다. 자, 양쪽에 나무를 쌓고, 송아지 두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한 마리씩 양쪽 나무 위에 얹어놓자. 그러고 나서 각자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자. 나는 여호와께 기도할 테니 바알의 선지자들은 바알신에게 기도하기로 하자.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시다.”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이 옳소! 하고 박수를 쳤어요.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말했어요.
“너희 숫자가 더 많으니 너희가 먼저 해라.”

그래서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기도했어요. 응답이 있었을까요? 없었어요. 그러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했어요.
“너희 신이 묵상하는가보다. 아니 잠깐 나갔거나 길을 걷고 있는 중인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잠이 든 모양이니 빨리 깨워 봐라.”

여러분! 신이 잠을 자요? 잠자는 신도 있나요? 가짜 신이죠? 바알 선지자들은 그 규례를 따라, 즉 바알 신을 섬기는 예배법을 따라 피가 흐르도록 창과 칼로 몸을 상하게 하며 뛰놀면서 기도했어요. 그래도 응답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녁까지 시간을 연장해서 기도를 했어요. 그래도 응답이 없었어요.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됐어요.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말했어요.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리하라. 그리고 나무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 송아지와 나무 위에 물을 충분히 부어라.”

그러자 백성들이 그대로 했어요.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어요. 저녁때 엘리야가 기도했어요. 그러자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서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도 다 태웠어요.

그것을 본 백성들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고 회개했어요. 그러자 엘리야가 백성들과 함께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다 잡아 기손 시냇가로 끌고 가서 처형했어요.

2. 교훈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교훈이에요.

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첫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셔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불로 임하시고 불로 응답하셔요.

갈멜산은 우리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어요. 우리의 마음속에서 마귀와 하나님이 대결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셔요. 성령의 뜨거운 불이 우리 마음속에서 더러운 흑암의 세력들과 죄를 다 태우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엘리야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모두 850명을 이겼다.

둘째, 엘리야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쳐서 850명을 이겼어요. 성경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한 사람이 천을 당하고, 두 사람이 만을 당한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도 한 사람이 천을 당할 수 있는, 엘리야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뭐 할 때? 기도할 때! 기도하면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귀신을 1000마리 이상 물리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마귀는 기도를 가장 무서워하거든요.

그러므로 기도하면 돼요. 나는 약해도 누가 강하니까? 하나님이 강하시니까. 예수님이 강하시니까.

♬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

그러므로 “엘리야의 제단을 태운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의 제단도 태워주세요. 죄와 흑암의 세력을 태우고, 성령의 생수가 우리 심령 속에 강물같이 흐르게 해주세요. 엘리야처럼 기도의 용사가 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 (다니엘 3:27)


1. Story

1) 느부갓네살의 꿈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바벨론에서 있었던 이야기에요. 그 당시 바벨론 왕은 느부갓네살 왕이었는데 아주 용감한 왕이었어요. 그는 주변의 모든 나라를 쳐서 자기 나라로 만들었어요. 유대 나라도 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어요. 그런데 잡혀간 사람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도 있었어요. 세 친구의 이름이 뭐냐? 바로 오늘 제목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예요.

그런데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어요. 너무너무 무서운 꿈이었어요. 깨어보니 이마에는 땀이 나 있고 등에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몸은 자신도 모르게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는 꿈을 기억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생각이 나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온 나라의 무당들과 점치는 사람들을 다 불러서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어젯밤에 너무너무 무서운 꿈을 꾸었다. 그런데 잠이 깬 후 그 꿈을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들은 꿈도 알아맞히고 그 해석도 해주기 바란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다 죽이겠다.” 그랬어요.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아는 자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꿈과 해석을 알아냈어요. 그래서 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왕이 꿈에 큰 우상 하나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우상의 머리는 황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동, 종아리는 철, 발은 철과 진흙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산에서 돌이 날아와서 그 우상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 우상은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그 우상을 친 돌은 태산과 같이 되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습니다. 이 우상은 지금부터 앞으로 있을 각 나라를 나타내는데요, 이 우상의 황금 머리는 바로 당신!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킵니다.”

왕은 다니엘의 말을 들으면서 “옳거니!” 하고 무릎을 쳤어요. 자신이 꾼 꿈이 새록새록 생각났기 때문이에요. 꿈이 맞으니 해석도 맞을 것으로 생각하고, 다니엘에게 귀한 선물을 주고 모든 도를 다스리는 총리로 세웠어요. 그리고 다니엘이 추천한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도지사로 임명했어요.

2)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라는 이름을 가진 들판에다가 금으로 큰 우상을 만들어 세웠어요. 그가 꿈속에서 본 우상은 머리만 금이었어요. 그리고 그 머리가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라고 다니엘이 말했는데요, 왕은 “그럴 수는 없지. 모든 나라가 다 내 꺼야.” 하면서 우상 전체를 금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우상의 크기를 보니까요 높이가 약 30m예요. 10층짜리 아파트 높이죠? 그리고 너비가 약 3m 정도 되었어요.

그리고 그 우상을 금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햇빛이 비치면 그 금빛이 번쩍번쩍 비쳤어요. 멀리서도 황금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장엄한 광경이었어요.

3) 느부갓네살의 우상숭배 강요

느부갓네살 왕은 우상을 아주 자랑스럽고 만족스럽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우상을 자신의 신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르기도 우상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상(神像)이라고 불렀어요.

신상을 만들었다는 기념으로 낙성식을 하게 되었는데요, 신상을 두라 들판에 세워놓고 모든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및 고급 공무원들을 불러 모았어요. 서울에 있는 총리, 장관들, 재판관들, 법률사들도 모두 다 불렀어요. 그래서 왕이 그 신상 밑에 앉고, 신상을 중심으로 모든 신하가 줄을 지어 서고, 그 옆에는 여러 가지 악기를 든 찬양대가 서 있었어요.

드디어 낙성 예식이 시작되자 사회자가 말했어요.
“너희는 찬양대가 악기를 연주할 때 이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해라. 만일 절을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즉시로 극렬히 타는 저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
옆에 시뻘겋게 불타고 있는 풀무불을 가리키며 그렇게 호령을 했어요.

악기 소리가 나자 모든 사람이 신상에 절을 했어요. 그런데 갈대아 사람들이 고자질을 했어요. 갈대아는 바벨론 지역의 땅 이름이에요.
“대왕 폐하! 유대 사람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신상에 절을 안 했대∼요.”

그 말을 듣고 느부갓네살 왕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져서 말했어요.
“그들을 끌고 오너라.”
그들이 끌려오자 왕이 말했어요.
“너희가 정말로 내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절을 하기만 하면 살려 주겠다. 하지만 만일 절을 하지 않으면 저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겠다. 그리되면 과연 어떤 신이 너희를 불 가운데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

그러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만일 왕이 우리를 풀무불에 던져 넣으면 우리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을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왕은 마음속에 분이 가득하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말했어요.
“여봐라! 다른 날보다 풀무를 일곱 배나 뜨겁게 불을 때라.”
그러고 나서 가장 용감한 군사를 몇 사람 골라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밧줄로 묶어서 세 사람을 풀무불 속에 던져 넣었어요.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던진 군인들을 불길이 삼켜버렸어요.

불쌍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을까요?
사람들이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던져 넣을 때는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걸어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전혀 뜨거운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불 속을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네 명 중 세 명은 사람 같은데 한 명은 온몸에서 찬란한 영광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게 신들의 아들 같아 보였어요.

왕은 그 광경을 보고 겁이 덜컥 났어요. 그래서 풀무 입구로 가서 그들을 불렀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풀무에서 나와서 이리로 오라.”

4)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영광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왔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 아까는 분명히 네 명이었는데 한 명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세 사람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 옷도 타지 않았고, 몸도 불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머리털 하나도 타지 않았고, 불탄 냄새조차도 없었어요.

왕이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왕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을 당하고 나니 하나님이 두려워졌어요. 그래서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어요.

“이제부터 하나님께 거만하고 무례하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자는 전 가족을 죽이겠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온 가족을 다 죽이겠대요.

2. 교훈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어요.

1)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를 건져 주신다.

첫 번째로,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에게는 결코 절하지 않는 사람을 어려움에서 건져 주셔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 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교회도 잘 안 나오고 말썽만 부리는 사람, 교회에서 “이렇게 합시다.” 하는데 항상 “음 헤헤헤,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저렇게 해야 해” 하는 꼭 염소 같은 사람, 일주일 내내 기도 한 번 안 하고, 말씀 한 번 안 읽는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한 후 그때 가서야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면 도와주시겠어요? 평소에 잘 해야죠, 그렇죠?

2) 하나님 때문에 고난받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두 번째로,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께서 보좌를 박차고 일어나서 그 풀무불로 뛰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풀무불의 뜨거운 열을 없애고 따뜻한 아랫목처럼, 포근한 이불 속처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이 명절에 조상의 묘에 절하지 않았다고, 밥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고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을 바로 그때, 하늘에서 예수님이 뛰어 내려와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상에게는 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납치해서 산속에 있는 절로 데리고 가서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너! 저 돌부처님께 절해. 안 하면 이 칼로 목을 그냥 캭! 찔러버리겠어” 그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나님! 딱 한 번만 눈을 감고 계셔요. 죄인 줄 알지만 한 번만 절하고 나중에 하나님 일 더 많이 할게요. 하나님 생각에도 제가 죽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죠? 내 머리 어때요? 좋죠?”
그럴지 모르겠어. 저도 자신이 없어요, 그런 상황이 온다면.

여러분!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상에게는 절하지 않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인 것입니다.

십계명 중 1계명과 2계명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2계명,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그렇죠?
모두 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주의 어린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는 우리 어린이들이 모두 다 천국에서 그대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사람의 본분>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3-14)


오늘 제목이 ‘사람의 본분’인데요, ‘본분’이 뭐예요? 본분이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 행하여야 할 직분, 의무를 말합니다. 그럼 성경이 말씀하는 사람의 본분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첫 번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한자어를 풀어보면 ‘경’은 존경, ‘외’는 두려움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존경하며 두려워한다는 말인 거죠? 하나님을 존경하며 두려워하는 사람이 주일날 예배 안 드리고 놀러 갈까요, 아니면 교회 나와 예배드릴까요?

2.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사람의 본분 두 번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뭐예요? 하나님의 명령은 어디에 나와 있어요?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나와 있죠? 즉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을 항상 좋으신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은 다 이해하실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물론 좋으신 하나님이시지만,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해야 할 분이셔요.

3. 사람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사람의 본분이 뭐라고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죠? 그럼, 사람이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따라서 합니다. “심판을 받는다.” 네, 심판을 받아요.

성경을 보니까 최후심판 때는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했어요. 여기 선악 간에 심판한다는 말씀은요, 선인지 악인지 심판한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히브리 관용어인데요, 무엇이든 심판한다는 말씀이에요. 우리나라에도 관용어가 있지만 히브리어에도 관용어가 있어요.

우리말 관용어의 예를 들어볼까요? 발등에 불 떨어졌다는 말은 무슨 말? 급하다는 말이죠? 이런 걸 관용어라고 하는데요, 히브리어에도 이런 말이 많아요. 예를 들어볼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무슨 뜻일까요? 비옥한 땅이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무슨 뜻? 정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뜻이에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무슨 뜻? 이스라엘의 전 영토라는 뜻이에요.
선악을 안다! 무슨 뜻? 모든 것을 안다. 전지(全知)하다는 뜻이에요.
그럼 선과 악! 무슨 뜻? 모든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럼 ‘선악 간에’는? ‘선에서 악에 이르기까지’ 즉 ‘무엇이든’이라는 뜻이에요.

이와 같이 최후의 심판 때는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을 심판하셔요. 그 심판에서 누가 죄가 하나도 없어서 천국에 갈 수가 있겠어요? 아무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어요. 그래서 모두 다 심판을 받고 지옥 가야 할 운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살길을 마련해 놓으셨죠? 그것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태어나시고, 우리의 죄를 그 몸에 짊어지고 피를 흘리고 죽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그러면 죄인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가 있어요. 아멘?

4. 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뭘까요? 잘 먹고 잘 살라고 지으셨을까요? 아니에요. 그럼 뭘까요?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첫 번째 목적은, 따라서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어요.

2)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두 번째 목적은, 따라서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어요.

1주일에 몇 번 찬송할까요? 날마다 해야죠. 기쁠 때만 해야 할까? 아니요. 기쁠 때도 하고, 슬플 때도 하고, 괴로울 때도 해야 해요. 찬송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안 좋은 일은 좋게, 그리고 좋은 일은 더 좋게, 하나님이 만들어 주셔요.

우리가 천국 가면 뭐할까? 아는 사람?
일할까? 공부할까? 싸움할까? 숨바꼭질할까? 뭐할까요? 우리가 천국 가면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들도, 성도들도, 생물들도 하나님을 찬송했어요.

찬양을 하는데 세상에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이 있지만요, 천국에는 수없이 많은 선율이 있어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대요. 그래서 마치 바다 위에 누운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고, 풀밭이나 구름 위에 누운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라고 해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창조하셨어요.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사탄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면 창조된 목적에서 빗나간 사람이죠? 그런 사람 어떻게 되겠어요? 돌이키라고 촉구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폐기처분 해야겠죠? 폐기처분 해서 어떻게 해요? 불에 던져서 태워버리죠? 무섭지 않습니까?

추석, 설날을 맞아 방 아랫목에 밥상 차려놓고 절하는 것! 그리고 조상의 산소에 절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어린이들이 그런 일이 있었다면 회개해야 해요. 왜냐? 이것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거든.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계셔요.

십계명 중 제1계명이 뭐예요? 제2계명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첫머리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할 것과 우상에게 절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주의 어린이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멘?





<4. 사탄의 정체>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2:9)


우리는 마귀 또는 사탄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죠? 어쩐지 기분 나쁘고 음산하고 차갑고 그런 느낌이죠? 그것은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악하고 더럽고 죄악 된 행위만을 일삼는 마귀에게는 저절로 거부감이 들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요. ‘붉은 악마’니 ‘귀여운 악마’니 ‘마녀’니 하는 말들을 자신의 닉네임으로 쓰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여러분! ‘붉은 악마’ 하면 뭐가 떠올라요? “대∼ 한민국!” 이게 떠오르죠? 한국 축구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무서운 말씀이 있어요. 한번 볼까요?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12:3 말씀!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2:9 말씀!

붉은 용이 마귀이고 사탄이며 악마예요. 우리가 축구 응원한다고 무슨 짓을 한 거죠? 우리가 스스로 붉은 악마인 사탄이 됐던 거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붉은 악마’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옛날에 이라크에 사담 후세인이라는 대통령이 있었는데 미국과 전쟁을 해서 져서 죽었어요. 요즘 어린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유명했었죠. 그런데 ‘사담 후세인’이라는 이름에서 ‘사담’이 대적자라는 뜻이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기 쉽게 말하면 ‘사탄 후세인’인 거죠? 왜 하필이면 이름을 사탄이라고 짓는지 모르겠어?

어떤 사람은 아들 이름을 김일성이라고 지어요. 또 어떤 사람은 김정일이라고 지어. 옛날에 군대에서 같이 훈련받던 한 사람은 이름이 ‘병신’이었어요. 그러면 친구들이 부를 때 뭐라고 불러요? “야, 병신아!” 그렇게 불러야죠? 이름을 왜 그렇게 짓는지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이름을 잘 지어야 해요. 부르기 좋고 뜻도 좋은 이름으로.

그러면 오늘은 마귀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1. 사탄의 탄생

사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사탄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천사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음속에 자신이 천사들 중에서 가장 잘 났고, 자신이 하나님보다도 더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 1/3을 유혹하여 자기편으로 만든 후,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러나 사탄은 실패하고 잡혀서 결국은 하늘에서 쫓겨났어요. 그 결과 자신이 생각해도 가장 아름답게 생긴 천사였던 사탄은 벌을 받아 가장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의 사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어요. 여러분! 꾸밈없이 맑고 밝게 생긴 아기의 얼굴을 천사 같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흉측하고 악하게 생긴 사람을 마귀 상이라고 하죠? 우리도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얼굴이 아주 예쁘고 아름다워지지만, 죄지을 생각, 더러운 마음을 품으면 얼굴이 밉게 일그러져요. 그러므로 모두 다 아름다운 생각, 예수님 생각만 하시기 바랍니다.

♬ 주님만 생각할래 딴 생각은 않을래
주님만 따라갈래 딴 덴 가지 않을래
주님만 따라가면 죄 사함을 받겠네
주님만 따라가면 하늘나라 가겠네 ♬

2. 사탄의 역사(Work of Satan)

다음은 사탄은 무슨 일을 하는 놈이냐 하는 것입니다. 나중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곳에서 하와를 만들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잘 살아가자 그것을 본 사탄은 배가 아팠어요.
“어? 왜 이리 아랫배가 아프지? 사촌이 땅을 샀나?” 하면서 시기심이 가득했어요.

오늘날도 남이 잘되는 걸 보면 배가 아픈 사람이 있어요. 혹시 여러분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나요? 남이 잘되는 걸 보면 배가 아픈 것!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사탄이 주는 마음일까요?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잘되는 걸 보고 배가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게 했어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것을 먹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그렇게도 아름다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쫓겨나, 이젠 하나님께서 더 이상 아담과 하와를 지켜 주시지 않게 되었어요. 그러자 힘센 사탄은 힘없는 아담과 하와뿐만 아니라 그 후손까지 모두 다 종처럼 부려먹고 괴롭혔어요. 뿐만 아니라 사탄은 수많은 거짓 종교를 만들었어요. 사탄을 믿으라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으니까 불교를 만들고 유교를 만들고 이슬람교를 만들고... 수년 전 어느 주지 스님이 “부처의 마음은 사탄의 마음이다.” 하고 방송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불교도 결국은 사탄의 종교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그렇게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하늘에서 이런 광경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은 마음이 너무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결심하셨어요.
“내가 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살려 주어야겠다.”
이렇게 결심하신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어요.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사탄은 그것도 모르고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본디오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을 죽이는 데 성공했어요. 예수님을 죽인 사탄은 좋아서 춤을 추었어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죽었으므로 이제 사람들은 완전히 자기의 종이 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수님의 피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면 메시아 왕국을 세워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줄 알고 그러기 전에 예수님을 죽였는데,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을 살린 것이 되고 말았어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사탄은, 천사들에 의해 쇠사슬로 온몸이 꽁꽁 묶여 무저갱, 끝도 없는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 사탄은 밑 없는 구덩이인 무저갱 속에 갇혀 있어요.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유혹하는 존재들은 사탄 자신이 아니라 사탄의 졸개들인 악한 영들이에요.

4. 사탄의 운명

그럼 사탄은 장차 어떻게 될 운명인가? 사탄은 나중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마지막 심판을 받고 영원히 불타는 연못, 불못에 떨어질 것입니다. 믿지 않던 모든 사람들은 그때 그곳에서 사탄을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가면 안 되겠죠?

5. 사탄의 영향

그럼 사탄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수천 년 동안 사탄이 세상에 끼친 영향은 너무너무 커요. 서양 사회는 일찍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발달했어요. 그러나 동양 사회는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탄의 문화가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갔어요.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온 지 20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사탄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어요.

오늘 성경을 보니까 마귀, 사탄을 큰 용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용은 언제나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이에요. 그래서 기독교가 먼저 들어간 서양에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천사나 성인들이 창으로 용을 찔러 죽이는 그림들이 많아요. 그런데 미신과 불교, 유교가 수천 년을 지배해 온 우리나라와 동양에서는 용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아 있어요.

옛날 임금님의 얼굴을 뭐라고 했어요? 용안이죠? 임금님의 얼굴을 용의 얼굴이라고 했다니까요. 신하가 왕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듯 용안을 우러러 뵈오니 신 등은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전하!” 사극에 보면 이런 대사가 많이 나와요.

또 임금님이 앉는 의자를 뭐라고 해요? 용상! 용이 앉는 의자래요.
“어서 용상에 오르소서. 전하!” 그러죠?

그리고 오늘날도 사장이나 부장, 과장 등 간부들의 책상 위에는 명패가 있죠? 명패 가운데는 사장 누구누구, 부장 누구누구, 과장 누구누구 하고 글씨가 쓰여 있고, 그 좌우에는 용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어요. 본 적 있나요?

또 옛날 10,000원짜리 지폐에는 용이 3마리, 용이 되려고 하는 이무기가 2마리 그려져 있었어요. 용꿈을 꾸면 가장 좋은 꿈 꾸었다고 하죠? 이렇듯 좋은 것은 모두 다 용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목사님들의 책상 위에 있는 명패에는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요? 아는 사람? 목사님 명패에도 용이 그려져 있을까요? 아니에요. 포도 넝쿨이 그려져 있어요. 왜 그럴까? 성경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포도나무이므로 목사님들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포도 넝쿨을 명패에 그려요.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유심히 보세요. 그렇다고 매주 다른 교회 가서 목사님 책상 위만 보고 다니지 말고...

6. 뱀과 용

다음은 뱀과 용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겠어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던 그 조그맣던 뱀은 6000년이 지난 지금은 거대한 용으로 몸집도 커지고 힘도 세어지고 형체도 변했어요. 뱀은 이무기의 과정을 거쳐 용으로 변한다고 하죠? 색깔도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러면 뱀만 변했느냐? 아니죠. 에덴동산도 변해요. 에덴동산도 교회시대를 거쳐 새 예루살렘으로 변해요. 그리고 2명밖에 안 되던 아담과 하와도 6000년 동안,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수백억의 자손이 생겨났어요.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숫자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이제 우리는 사탄에 대해서 배웠어요. 사탄을 알면 알수록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고맙게 느껴질 거예요.

사탄과 악령, 귀신의 세력들은 기도하는 어린이, 찬송하는 어린이, 말씀 읽는 어린이, 전도하는 어린이를 가장 무서워해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기왕 믿을 바엔 힘 있게 믿고 강하게 되어서 마귀가 두려워 떠는 어린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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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설교집 (제1권)

도서정보 : 우슬초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1.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30:8-9)


지금부터 2900년 전에 이스라엘에 솔로몬이라는 왕이 있었어요. 솔로몬은 누구의 아들일까요? 네, 맞아요. 다윗의 아들이에요. 오늘 읽은 본문은 솔로몬 왕이 기록한 잠언이에요.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에요. 한 번 따라서 읽어보겠어요.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30장 8절부터 9절까지 말씀!

길게 읽었지만 솔로몬 왕은 두 가지를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무슨 무슨 내용일까요?

1. 첫 번째 기도

솔로몬 왕은 두 가지를 기도했는데 그 첫 번째는 영적인 거예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이 말씀은 번역을 이렇게 했지만 우상을 멀리하게 해 달라는 기도예요.

요나서 2:8을 보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 ‘거짓되고 헛된 것’이란 우상을 말해요.
오늘 말씀도 ‘헛된 것과 거짓된 것’을 내게서 멀리해 달라는 뜻인데, 역시 우상을 멀리해 달라는 뜻으로 볼 수 있어요.

여러분! 예를 들어 여기 파리들이 날아다닙니다. 그러면 엄마가
“얘야, 파리 좀 잡아라.”
그러시죠? 아무것도 없는데 엄마가 “얘야, 파리 좀 잡아라.” 그러실까요? 파리가 날아다니니까 그런 거죠?

솔로몬도 마찬가지예요. 아무 일도 없는데 “우상을 멀리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을까? 아니죠. 솔로몬에게는 왕비가 700명, 후궁이 300명이나 됐어요. 많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중에 많은 수가 이방 나라에서 온 여자들이에요. 이웃의 다른 나라 여자들인 거죠. 그런데 그 이방 여자들이 고향에서 믿던 대로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솔로몬은 이방 출신의 왕비와 후궁들을 통해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한 거예요.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셔요. 우리 어린이들은 우상 숭배를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겠죠?

2. 두 번째 기도

그리고 솔로몬이 했던 두 번째 기도는 이거예요.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가난뱅이도 되지 말고 부자도 되지 말게 해 달래요. 다만, 굶지 않고 하루 세끼 밥만 먹고 살게 해 달래요.

왜 부자가 되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했느냐? 부자가 되면 배가 불러서요, “하나님? 나 그런 분 몰라. 그게 누구야? 성이 하씨야? 기억이 안 나는데” 할까 봐...

사실이에요.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고...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컴퓨터 한 대만 주시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어요.

그런 후 교회에 가니까 선생님이 “얘, 너 다음 주 특송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해요?
“싫어요. 나 노래 못해요. 음치라고요.”

그러자 선생님이 “너 기도 응답받으면 뭐든지 다 한다고 했잖아?”
그럽니다. 그러자 속으로 뭐라고 해요?
“지가 뭐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말씀해야 순종하지.”
그럽니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분식집이 하나 새로 생겼는데, 처음 손님이 없을 때는 어린이가 가도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하고 친절히 대해 주는데, 얼마 후 사람이 많아지고 돈도 좀 벌고 배가 부르니까 이젠 어린이들이 가면 본 척도 안 하고, “얘, 아무 데나 가서 앉아.”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인심을 잃어 쫄딱 망해버리고 나서 후회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죠?

그다음, 왜 가난뱅이가 되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했느냐?
가난하면 가난을 견디지 못하여 도둑질할까 봐. 도둑질 해 가지고 경찰서에 잡혀가면,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예요.

옛날 얘긴데요, 높은 자리에 있던 공무원들이 뇌물로 깨끗하지 못한 돈을 받아 경찰서에 잡혀가서 검찰로 넘어가고 법원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았는데, 그 돈 몇천만 원을 어떻게 했느냐고 하니까 교회에 헌금했대. 이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인 겁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에요.

여러분! 그런 돈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어요? 그런 것은 부정한 제물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제물이에요. 하나님은 말라기 3:3에서 분명히 “의로운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옛날 시골에 어떤 할머니가 살았는데 그 할머니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새벽기도를 갔다 오다가 남의 밭에 심어놓은 무가 탐이 났답니다. 다 자라서 거둘 때가 된 무를 보자 욕심이 난 거예요. 그래서 “저 무를 뽑아가야지.” 결심하고 무밭에 들어가 몇 포기를 뽑았답니다. 그러고는 “성공이다.” 하고 좋아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밭에서 나오다가 그만 주인한테 들키고 말았어요.

주인이 “왜 남의 무를 훔쳐가요, 할머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요?
“온 세상이 우리 하나님 거야. 이 무밭도 우리 하나님 거지. 우리 아버지 거 내가 몇 포기 뽑았기로 뭐 잘못됐나?”
하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답니다. 야! 말 된다. 그쵸? 그러면 안 돼요. 그런 행동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요 부자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가난한 건 믿음이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가르쳐요. 부자가 되는 게 믿음이 좋은 거래. 아니에요.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하셨어요.

사람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져요. 100원을 가지면 1,000원을 가지고 싶고, 1,000원을 손에 넣으면 10,000원을 갖고 싶고, 10,000원을 갖고 나면 20,000원을 갖고 싶고, 그렇죠? 또 뛰고 있으면 걷고 싶고, 걷고 있으면 서고 싶고,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있으면 자고 싶고, 그렇죠? 이것이 인간의 욕심인 거예요.

성경은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십계명 중 제2계명에서 명령하고 있어요. 우상 숭배는 동상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 숭배가 아니에요. 탐심, 탐욕, 그리고 정도(正道)를 넘는 욕심이 우상 숭배라고 골로새서 3:5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믿으시면 아멘!


분수를 넘는 욕심을 버리고, 욕심이 있던 자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시기 바랍니다. 주의 보혈로 마음을 씻어내고 참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발 주일날 예배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우리 속사람인 영혼이 자라요. 여러분이 집에서 성경을 매일 읽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매주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기라도 해야 해요. 알겠지요?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예요. “맨날 들어도 다 잊어버리는데 들으면 뭐합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콩나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아요? 콩나물시루에다 콩나물을 기르는데, 하루 수십 번씩 그릇으로 물을 퍼부어요. 그러면 물은 다 빠져 나가버려도 콩나물은 매일 쑥쑥 자라요. 알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말씀을 들으면 다 잊어버려요. 그러나 걱정할 것 없어요. 말씀을 다 잊어버려도 우리 영혼은 콩나물처럼 날마다 자라요.

자! 앞으로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하고, 매주 주일을 잘 지키는 복 있는 어린이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 2. 가정생활과 신앙생활 >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에베소서 6:1-3)


신앙생활은 가정생활과 비슷합니다. 가정은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형제자매들과 우애 있게 사는 것이 가정생활이죠? 신앙도 위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형제자매 된 성도들과 사이좋게 교제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다른 점이 있다면 가정의 부모님은 눈으로 볼 수 있으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죠. 우리 가정은 우리 집에 조그맣게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가정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가족인 거예요. 그럼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의 공통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1. 말씀을 잘 들어야

첫 번째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해요.
가정생활은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죠? 그리고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해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듣지요? 먼저, 성경을 읽음으로써 직접 들을 수 있어요. 다음은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수 있어요. 설교를 듣는 것은 큰 형이 동생들에게 “얘들아, 아빠가 그러는데 오늘 외식한대.” 하고 아버지의 뜻을 전해주는 것처럼, 목사님이나 선생님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 전해주는 거예요. 그다음은 요즘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계시를 받는 방법이에요.

부모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을 때 가장 정확하게 들으려면 어떤 방법으로 듣는 것이 가장 좋을까?
① 직접 듣는다.
②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는다.
③ 전화로 듣는다.
답은 몇 번? ①번이죠?

하나님께 말씀을 들을 때 가장 정확하게 들으려면 어떤 방법으로 듣는 것이 가장 좋을까?
① 성경을 읽는다.
② 설교를 듣는다.
③ 계시를 받는다.
답은 몇 번? ①번이죠?

여러분! 집에서 아빠가 말을 많이 합니까? 대개는 많이 안 하죠? 하나님은 어떠실 것 같아요? 하나님은 아주 자상하신 분이셔요. 자상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셔요. 성경 보세요. 얼마나 말씀을 많이 그리고 자세하게 하셨는지.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2. 때로는 내 뜻을 말씀드리기도 해야

두 번째로는, 때로는 내 뜻을 말씀드리기도 해야 해요.
가정생활에서는 내 뜻을 부모님께 얘기해야 하죠? 매일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기는 항상 아무 말도 안 한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항상 웃기만 한다. 그럼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어렸을 때 여러분이 너무 말을 안 하면 부모님이 걱정하셔요.
“아빠! 오늘 멋있어요.”
“엄마! 사랑해요.”
“필통 하나 갖고 싶어요.”
등등 필요한 말을 하고 살아야지 그렇지않으면 서로 답답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내 뜻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해요. 이것을 뭐라고 하죠? 내 뜻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걸 뭐라고 해요? 기도라고 하죠? 다들 기도를 어려워하지만 기도는 쉬운 거예요.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기도예요. 기도는 쉽게 해야 해요.

① 엄마! 오늘 반찬 맛있었어요.
② 금일 모친께서 지어 주신 조반은 진실로 보편적 미각을 초월한 진미였어요.
둘 중 어떤 말을 엄마가 더 쉽게 알아듣고 좋아할까? ①번? ②번?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쉬운 말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형식이 필요 없어요. 그러므로 편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리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높고 높은 보좌에 앉으시사 낮고 천한 우리를 하감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우리를 눈동자같이 살피시고 주님의 장중에 붙드시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부탁드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어렵게 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알았지요?

그럼 어떻게? 이렇게 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저는 하나님이 좋아요.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요 하나님, 제가 말씀드릴 게 한 가지 있어요. 제가 머리가 좀 안 좋거든요. 공부를 좀 열심히 하게 해 주세요. 머리도 좀 좋아지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렇게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도예요. 아멘?


3. ‘은혜 감사합니다.’ 하고 가끔 선물도 드려야

세 번째로는, ‘은혜 감사합니다.’ 하고 가끔 선물도 드려야 해요.
가정생활에서는 어때요? 어버이 주일 같은 때에는 부모님께 조그마한 정성이라도 드려 500원짜리라도 선물을 드리면 좋겠죠?

엄마 아빠 지갑 보면 항상 몇만 원씩 가지고 다녀요. 여러분이 드리는 선물을 값으로 따지면 아빠 지갑에 든 돈의 100분의 1도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이 조그마한 것이라도 선물을 드리면 아빠는 기분이 좋아져. 선물보다도 여러분의 그 마음을 보시고 기분이 좋아지는 거예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도 ‘은혜 감사합니다.’ 하고 드리죠. 이것이 돈일 경우는 뭐라고 해요? 헌금, 물건일 경우는? 헌물. 우리가 조그마한 물질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면 기뻐하셔요. 하나님은 부자예요, 아니면 가난해요? 부자죠? 어느 정도로 부자예요?

우리는 어떤 물건의 소유자를 뭐라고 해요? 주인이라고 하죠? 하늘과 땅의 주인이 누구예요?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부자세요. 그런 부자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서 사람에게 헌금 내라고 하시겠어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나 보시려고 그러는 거예요. 헌금의 액수보다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아! 얘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기뻐하시는 거예요.

4. 형제자매와 우애 있게 지내야

네 번째로는, 형제자매와 우애 있게 지내야 해요.
가정생활에서는 부모님 말고도 위로는 형, 누나, 오빠, 언니가, 아래로는 동생이 있어요. 그런데 동생이 형, 누나, 오빠, 언니에게 빡빡 대들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형, 누나, 오빠, 언니가 동생을 매일 괴롭히면 돼요, 안 돼요? 안 되겠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믿는 형제자매와 친하게 지내고 대화도 자주 하고 그렇게 친교를 해야 해요. 먼저 믿은 사람은 나중 믿은 사람을 잘 이끌어 주고, 나중 믿은 사람은 먼저 믿은 사람을 본받고...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은 사람에게 본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5. 남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다섯 번째로는, 남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해요.
가정생활에서는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사는 집이 많지요?
같은 아파트, 같은 연립에 살면서도 얼굴을 모르니까 서로 인사도 안 하고... 우리 가족끼리뿐만 아니라 남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해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성도들과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해요.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돼야 해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예수 믿는 사람이 저래가지고서야. 쯧쯧쯧” 손가락질당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죠?

그러나 친구들이 “야! 나쁜 짓 하러 가자” 할 때 “싫어”하고 단호하게 말하세요. 친구들이 “쟤는 맘에 안 들어.” 그렇게 해서 미움받는 게 훨씬 나은 거예요. 알겠지요?


우리의 집은 이 세상에 있고, 우리 가족은 건물로 된 우리 집 안에서 같이 삽니다. 그러나 좀 다르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이 세상을 집으로 삼고, 이 우주적인 집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함께 살고 있어요. 가정에는 엄마, 아빠가 계시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셔요. 우리는 엄마, 아빠께 효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충성해야 해요. 하나님께 하는 효도는 효도라고 하지 않고 충성이라고 해요. 가정과 교회에서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믿음의 어린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 3. 거듭나 새사람 되자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1. 에스겔과 마른 뼈 이야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선지자 에스겔을 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너무 오래돼서 말라빠진 뼈가 가득했어요. 무슨 뼈일까요? 죽은 사람의 해골들이었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뼈들 사이로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어요. 여러분 어때요? 해골들 사이로 다니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우선 무섭겠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말씀을 대언하라.”
해골들 사이로 다니면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해골들에게 말씀을 대언했어요. 생명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뭐라고 전했느냐?
“너희 뼈들 위에 근육이 붙고 살이 붙고 가죽이 덮여라.”
그랬어요.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요? 죽어서 살은 다 썩고 뼈도 말라비틀어졌는데 거기에 근육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피부가 생기라니...

그런데 에스겔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소리가 나는 거예요.
“또드락 또드락”
무슨 소리예요? 뼈 붙는 소리죠. 뼈가 서로 연결되더니 근육이 붙고 살이 붙어 방금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어요. 그런데 살아나지는 못했어요.

그때 에스겔이 또 한 번 외쳤어요.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죽은 자들을 살려내라.”
그러자 시체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오늘 이 말씀은 비유로 하신 말씀이에요. 무엇에 대한 비유일까요? 마른 뼈는 죽은 육체가 아니라 죽은 영혼을 상징하고 있어요. 믿지 않는 영혼을 상징하고 있어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대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뜻해요. 그리고 생기는 하나님의 영(靈)인 성령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시체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다는 것은, 죽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역사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난다. 즉 구원받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큰 군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 즉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해요.

2. 거듭나야 구원받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아요. 따라서 합시다.
“거듭나야 구원받는다.”
거듭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거듭’이라는 말은 ‘다시’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 두 번째 태어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원어로 보면 좀 달라요. 신약성경이 어느 나라 말로 쓰였는지 알아요? 고대 그리스어예요. 고대 그리스어로 하면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 ‘하늘로부터 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거듭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물었어요.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또 들어갔다 나옵니까?”
어떻게 두 번째 태어나요?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해요? 아니에요. 잘 들으세요.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영혼이 죽었어요.

여러분! 죽음을 다른 말로 하면 뭔지 알아요? 사망 말고...
죽음을 다른 말로 하면 ‘분리’예요. 육체의 죽음이란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 죽음이에요. 그러면 영혼의 죽음은 뭘까요? 영혼에서 하나님의 영(靈)이 떠나시면 죽음이에요.

하나님이 항상 사람의 영혼과 같이 계셨는데 선악과를 따먹자 하나님이 떠나셨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시자 영혼이 죽은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 모든 사람은 영혼이 죽은 상태로 태어났어요. “응애!” 하고 태어났을 때 육체는 밝은 태양 빛을 보지만, 영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버려진 상태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 영혼이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하고 암흑 속에 살다가 죽어요. 하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다시 오셔서 함께 계셔요. 죽은 영혼이 살아난 것입니다. 떠나셨던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해요. 믿습니까?

우주에는 태양이 2개가 있어요. 하나는 보이는 태양, 하나는 안 보이는 태양. 보이는 태양은 지구로부터 1억 5천만km 떨어져 있으며, 표면 온도가 6000°C인 불타는 별인 저 하늘의 해예요. 그리고 안 보이는 태양은 우주의 태양이신 하나님이셔요. ‘민족의 태양이시며 위대한 수령이신 김일성 동지께서는’ 죽으셨죠? 태양이 죽어요? 가짜 태양인 거죠.

3.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럼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철수가 길을 가다가 납치를 당했어요. 범인들이 철수를 사방이 철창살로 꽉 막힌 창고에 가뒀어요. ‘철창살’ 발음이 어렵죠?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검찰청 철창살” 한 번 더. “검찰청 철창살”

사방이 꽉 막혀놓으니까 아무것도 안 보여요. 대낮인데도 칠흑같이 어두워요. 그런데 전깃불을 켜면 환해지죠? 주위를 둘러봤더니 자기 말고도 다른 사람도 잡혀 온 게 보여요.

이와 같이 암흑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듯이, 마음속이 암흑처럼 변해버린 죽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시고 성령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면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거예요. 거듭나는 것은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만나는 거예요.

그럼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듭나는 것은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나의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죽은 내 영혼을 살려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고 싶으면 뭐해야 해요? 기도해야죠. 왜요?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해주셔야 하니까요. 그렇지요?

4. 거듭난 후에는 어떻게 되나?

그럼 거듭난 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거듭나고 나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거듭난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 남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듯이 예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사랑에 빠져 본 사람 있어요? 어때요? 항상 그 애가 생각나죠?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애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지죠? 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가요.

거듭나도 마찬가지예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누군가에게 이 기쁨을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요. 그리고 기도가 줄줄줄 나와요. 기도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 돼요. 길가면서도 기도하고, 친구와 얘기하면서도 맘속으로는 기도하게 돼요.

아기가 처음 태어날 때는 “응애!” 하고 태어나요. 왜 울어요? 슬퍼서 우는 거예요.
“아이고! 고생문이 열렸구나! 응애!”
하고 우는 거랍니다. 그러나 두 번째 태어날 때, 즉 거듭날 때는
“이제 영혼의 고생이 끝났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나면 새사람이 돼요. ‘내가 먼저’에서 ‘예수님이 먼저’로 바뀝니다. ‘내 가족이 먼저’에서 ‘하나님이 먼저’로, ‘친구가 먼저’에서 ‘성령님이 먼저’인 생활로 바뀌어요. 뿐만 아니라 ‘죄의 삶’에서 ‘죄를 회개하고 후회하는 삶’으로 변화되고, 죄를 지었을 때 원통해 하고 회개하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나의 연약함을 한탄하게 돼요.

5. 거듭나 새사람 되자.

우리는 거듭나 새사람이 돼야 해요. 여러분, 거듭나고 싶어요? 거듭나고 싶은 사람!

거듭나기 전에는 내 맘대로 삽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성령님이 내 맘속에 계셔서 나를 인도해 주셔요. 우리 육체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공기가 우리와 함께해 주는 것처럼, 우리가 거듭나서 죽은 영이 살아나는 순간부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담대한 믿음이 생겨요. 제가 다니는 병원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은 항상 칠흑같이 캄캄해요. 그런데 두세 발자국 밑으로 계단을 내려가면 센서에 의해 자동으로 점등이 돼요. 그걸 알기 때문에 계단이 아무리 캄캄해도 저는 불이 켜질 줄 믿고 계단을 내려가는 거예요. 천국 가는 길도 마찬가지예요. 앞길이 안 보여도 하나님을 믿고 발자국을 옮기는 것입니다.

먹구름이 낀 날은 온 세상이 어둡고 맑은 하늘도 안 보입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10km 상공으로 올라가면 어때요? 먹구름은 한참 저 아래에 있고 시야에는 푸른 하늘이 가득 들어오죠? 비행기 조종사는 저 먹구름 위에는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도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앞날을 전혀 몰라도 천국이 있음을 믿기에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중에는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성령이 오시면 다 해결돼요. 산에 가서 큰 돌을 옮겨보면 그 밑에 풀이 누렇게 변해버린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계속 햇볕과 공기를 쐬면 곧 푸른 빛으로 변하죠? 오랫동안 마귀에게 눌린 사람도요, 교회에 나와서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햇볕이 돼주시고 공기가 돼주셔서 여러분을 푸른색으로 파릇파릇 자라게 해주셔요.

그리고 거듭나기 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는데 거듭난 후에는 성령님이 나의 주인이 돼 주셔요. 전혀 새로운 사람,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으므로 새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 새사람이 돼야 해요. 거듭나 새사람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어요. 교회에 놀러 나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이 내 속에 계시는 새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 4. 거룩한 피할 곳 >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이사야 8:13-14)


여러분!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이나 살인을 한 사람이 경찰에게 쫓기고 있어요. 이 사람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이 어디겠어요? 동굴 속이요? 무장공비처럼 땅속에 비트를 파고 숨어요? 그렇게 하면 며칠 후에는 배가 고파서 못 견디죠?

영화를 보니까 방 벽 속에 골방을 만들어놓고, 문을 열고 그 속에 들어간 뒤 문을 닫으니까 감쪽같아. 전혀 눈치를 못 채더라고요. 벽 속에 분명히 방이 있는데 밖에서 보면 그냥 벽이거든. 그 속에 숨어 있다가 뒤쫓는 사람들이 다 가고 난 뒤에 가족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음식을 넣어 주고...

그러나 이런 생활을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죠? 이와 같이 죄를 지은 사람이 숨을 곳은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죄가 없는 사람이 쫓기고 있을 때는 숨을 곳이 많죠? 어디로 가서 숨으면 돼요? 경찰서나 파출소로 가면 되죠? 경찰서로 가서 “경찰관 아저씨! 저 사람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와요. 좀 도와주세요.” 그러면 경찰관 아저씨가 나쁜 사람을 잡아서 혼내 주죠?

1. 도피성

옛날 우리 역사를 보면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있던 때가 있었어요. 이때를 무슨 시대라고 하죠? 삼국시대죠.

그런데 삼국시대 초기에 삼한이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이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 셋을 합하여 삼한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삼한 시대 때는요, 정치는 군장이라고 부르는 왕이 담당하고, 종교는 천군이라고 부르는 제사장이 담당했는데요, 이 제사장 천군이 사는 곳을 소도라고 했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이 소도로 도망쳐 들어오면 잡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거룩한 곳에 세상 권력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창과 칼을 들고 거룩한 곳에 들어와서 피를 흘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옛날 이스라엘에도 이런 제도가 있었어요. 도피성이라는 게 있었는데요, 잘못해서 실수로 살인을 한 사람이 도피성에 들어오면 그 사람을 죽이지 못했어요.

도피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도=도망하여, 피=피하는 성, 도망하여 피하는 성이라는 뜻이에요. 도피라는 말이 도망하여 피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도피성을 왜 만들었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6개 성읍을 도피성으로 만들어라. 도피성을 6개를 만들어라.”
하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도피성이 6개가 있었어요.

2.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는 하나님

그런데요, 오늘 성경을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도피성이 돼 주시겠대요. 이사야 8:13-14을 읽어볼게요.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

이 말씀을 개정되기 전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할 곳이 돼주신대요.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죄인의 피할 곳이 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죠? 거룩하신 예수님이 피할 곳이 돼 주시니까 거룩한 피할 곳이지요. 살인죄나 강도죄만 죄가 아니에요. 살인죄나 강도죄보다 더 무섭고 더 큰 죄가 있는데 그게 무슨 죄인지 알아요? 예수 안 믿는 죄예요.

예수를 안 믿던 자, 살인자, 강도, 도둑질을 한 자라도 예수님께로 믿고 나오면 예수님이 사탄의 협박과 시험에서 그를 지켜주시는 거룩한 피할 곳이 돼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는 예수 안에는 자유가 있어요. 예수 안에 평화가 있어요. 예수 안에 기쁨이 넘쳐요.

♬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할렐루야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

여러분! 지은 죄가 생각납니까? 회개하고 예수 안에 숨으세요. 분명히 죄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예수 안에 숨으세요. 예수 안에 숨어 있으면 사탄이 아무리 힘이 세도 어찌하지 못해요. 믿습니까?

3. 여호와이신 예수님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볼지 모르겠어요.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한 피할 곳이 된다고 했는데 왜 예수님이 피할 곳이 된다고 합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여러분! ‘여호와’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출애굽기 3:13-14에 보면요,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란 말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사야 40:3에 보니까요, 하나님 아버지만 여호와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여호와래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거룩한 피할 곳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죠, 그렇죠?

4. 사탄에게 피하는 자들

그런데요, 예수님께 피하지 않고 사탄에게 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추석이나 설날 밥상 차려놓고 절하고, 조상의 묘에 가서 절하고 온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이다음 명절에는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번 주에는 교회에 가고 다음 주에는 절에 가고.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뭐라고 대답하는지 알아요? 천국에 못가면 극락에라도 가야 할 것 아니냐고 그래요. 한쪽 발은 천국에, 한쪽 발은 극락에 올려놓고 있다가, 예수님이 오시고 세상이 끝나고 천국과 극락이 위아래로 쫙 갈라질 때 이 사람은 어떻게 돼요? 천국은 위로 솟아오르고 극락은 아래로 꺼진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몸이 기울어지면서 “어? 어? 어?” 하고 머리부터 밑으로 떨어지죠? 그러면 어디로 가요? 극락 가죠? 극락이 어디예요? 따라서 합시다.
“극도로 낙심하는 곳이 극락이다.”
그렇습니다. 극도로 낙심하는 곳이 극락이에요. 끝없이 실망하는 곳이라고요.

부처님도 결국은 사탄이 만들어놓은 우상에 불과하고요, 극락도 결국은 지옥을 아름답게 포장해 놓은 것에 불과해요. 무덤을 시멘트로 아름답게 포장하고, 무덤 앞에 대리석으로 제사상을 만들어놓고, 또 큰 비석을 세우고, 칭찬하는 글을 수십 줄 비석에 기록하고 그래 놓았을지라도 무덤 속에 든 것은 뭐에 불과해요? 죽은 송장에 불과해요.

사탄이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무리 착하게 보이도록 치장을 해도, 그리고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속여도 그것은 사탄일 뿐이에요.

♬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지옥을 아무리 극락이라 우겨도 지옥은 지옥이다 ♬

지옥을 아무리 아름답게 이야기를 꾸며놓고 극락이라고 우기며 손짓을 해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불 바람이 몰아치는 불못 지옥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우리는 속으면 안 돼요. 사탄에게로 피하면 안 돼요.
우리 영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셔서 우리 대신 6시간 동안이나 손발에 못이 박혀 고난을 받고 우리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와계시고 우리 속에 와 계신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피난처, 거룩한 피할 곳으로 삼는 ○○교회 어린이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구매가격 : 5,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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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보 : 돈스피크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란 그 사람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는지의 능력 문제이며 내가 만약 오늘 당장 일을 그만둔다면 나는 며칠을 더 살 수 있을까?’ 라는 것이 부의 척도라고 말했다.

내일 당장 금융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얼마만큼의 부가 준비되어 있는가? 나와 내 가정, 소중한 자산을 지킬 수 있는 방식이 얼마만큼 있는가?


경제위기를 기억하는가? 1998년 IMF 2008년.글로벌 금융위기.

나의 10대, 20대는 위기 속에서 지내왔다. 무슨 주기설을 갖다 붙여도 2019년 현재 돌아가는 상황은 절대 개인이든 대한민국이든 유리하지 않은 상황으로 펼쳐지는 중이다.

개인의 미래를 국가가 보장 못하는 시대인데 우리는 과연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2020년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기정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온갖 경제수치는 지난 IMF당시의 수치를 갈아엎고 있다. 사상최고의 실업률, 자영업 폐업율, 수출부진, 경제전쟁은 앞으로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하고 있다. 2020년 몇날 며칠에 위기가 닥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가 언제 재림할지를 알아맞추는 것처럼 어리석다.

다만 위기는 확실히 온다는 것이고, 이 오게될 위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산을 어떻게 지켜내야하는지 를 고민해야 한다.

나의 컨틴전시 플랜은 비트코인이다. 디지털 자산시장으로 펼쳐질 부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경제위기는 기존 화폐, 자산가치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꿀것이다. 세상 최고의 달러가 추락하고, 듣도 보도 못한 디지털 화폐가 새로운 화폐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블록체인기반의 화폐는 이미 기술적 여건상 충분하나 아직까지 쓰여지지 못하는 이유는 기존 중앙은행들과의 신경전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기존 금융권력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들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암호화폐 시장의 금융권력이 되고 싶어한다.

기존 화폐경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금융위기는 이번에 종이와 돈 등 물리적 화폐의 형태를 대대적으로 탈피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비트코인 자산집중시대는 바로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세계 금융투자기관들이 저마다 디지털자산관리 서비스를 준비, 제공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라본 미래가 결코 화폐중심의 금융경제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 비트코인 유튜버 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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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방전

도서정보 : 김기순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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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전쟁사 시리즈 중 노르망디 상륙에 이어 프랑스 해방 전투를 다룬 역사서

구매가격 : 9,800 원

노르망디 상륙작전

도서정보 : 김기순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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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시리즈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상세히 서술한 역사 소설

구매가격 : 6,000 원

객관식 민법 채권법 각론 지문 요약집(~2013.)

도서정보 : 김재호 변호사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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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까지 객관식 채권법 각론 대표 지문을 요약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계약총론
1. 행정관청의 인가를 받은 여객운송약관=고객요청시 사본을 고객에게 교부의무.
2. 약정취지를 명백히 하기 위한 확인적 규정=설명의무 없음.
3. 가족운전자 한정운전특별약관=명시설명의무의 대상.
4. 보험자의 명시설명의무 위반+보험계약자의 약관에 규정된 고지의무 위반=보험자는 계약해지 불가.
5. 약관내용해석=개개 체결자의 의사나 구체적 사정 고려 안함
6. 피보험자가 통지기한내에 미통지하여 보전조치에 실질장애 초래에 한하여 면책취지 해석
7. 무면허운전면책조항은 지배관리가능상황에 한하여 적용되는 것으로 수정해석, 제3자X.

구매가격 : 3,000 원

객관식 민법 채권법 총론 지문 요약집(~2013.)

도서정보 : 김재호 변호사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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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까지 객관식 채권 총론 대표 지문을 요약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채권법 서론
1. 금전으로 산정불가 급부: 채권 목적o
2. 투숙객의 근친자가 숙박계약상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 불가.
3. 부제소합의·파산절차에서 면책된 채무: 자연채무/ 강제집행 하지 않기로 특약=책임 없는 채무임.
4. 채권자의 초과수령 이자에 관한 반환채무: 강제집행 가능=자연채무 아님
5. 상속의 한정승인: 책임이 한정되는 채무
6. 이행보조자┃주된 채무의 이행·종된 의무의 이행┃의 과실의 정도=채무자의 주의의무를 기준으로 판단.

구매가격 : 3,000 원

객관식 민법 물권법 지문 요약집(~2013.)

도서정보 : 김재호 변호사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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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까지 객관식 민법 물권법 대표 지문을 요약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물권의 변동
1. 물권변동은 공시방법을 갖추지 않으면 당사자·제3자사이에서 효력 발생x.
2. 관습법에 의하여 물권이 인정되는 경우: 공시는 관습법이 정하는 방법으로 충분.
3. 공시의 원칙: 부동산물권의 등기, 채권양도에 관한 통지, 광업권의 등록, 동산의 현실인도, 인지에 있어서의 신고.
4. 물권행위의 독자적 존재여부: 사실에 대한 인식의 문제. 부정설=물권행위 무인성을 인정할 여지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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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식 민법총칙 지문 요약집(~2013.)

도서정보 : 김재호 변호사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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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까지 객관식 민법총칙 대표 지문을 요약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종선고
30. 호적부 기재=진실 추정=원칙상, 실종선고를 할 수 없음
31. 실종선고 취소시=공시최고 불요.
-동일인에 대해 2차례의 실종선고가 내려진 경우, 후에 확정된 실존신고를 기초로 상속관계를 판단한 것은 잘못임
32. 오늘날 사람이 95세까지 생존한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특별한 자정이 없는 한 현재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사실은 상대방이 입증해야 함.

-관리인이 소제기 후 계속중에 실종선고가 확정되어 소제기 이전에 사망간주: 실종선고확정시 소송중단. 실종자를 피고로 하는 판결이 확정된 후에 실종선고가 확정된 경우에도 당사자능력이 없는 자를 상대로 한 판결로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님.

-피상속인과 피대습자가 동시사망: 대습상속이 인정됨.
33. 실종선고의 취소=실종선고로 생긴 법률관계=소급하여 무효.


-실종선고의 취소: 실종선고 후 취소 전에 선의┃쌍방선의설이 다수설. 엄폐물이론 적용┃로 한 행위의 효력에 영향없음. 상대적 효력설. 절대적 효력설/ 신분행위의 경우 일방이 악의이면 전혼이 부활하여 후혼은 중혼으로 취소사유. 전혼에는 배우자의 부정 등의 이혼원인이 생김.

-실종선고의 취소시: 실종선고를 직접원인으로 재산취득자가 선의이면 현존이익반환의무.
-실종자의 재산을 취득한 자에게 취득시효의 완성·선의취득·매장물발견·부합 등 다른 취득원인이 있으면 실종선고가 취소되어도 재산을 반환당하지 않음.
-재혼당사자의 일방이 악의이면 전혼이 부활: 후혼은 중혼이므로 혼인취소사유. 전혼은 재판상 이혼원인.

구매가격 : 2,500 원

흙수저 성공기

도서정보 : 김재호 변호사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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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금수저가 되는 세상만 보이시나요? 흙수저로 태어나 금수저가 된 사람들의 성공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외국에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기업 회장, 스타트업 대표, 가수, 개그우먼, 정치인, 고위 행정직 공무원, 외국사례 등 흙수저로 태어나 금수저가 된 사람들의 성공기를 알려드립니다. 수저계급론은 허상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이 시대의 흙수저는 누구이며 수저계급론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떠할까? 금수저가 된 흙수저의 성공기를 읽으면서 미래의 금수저가 되는 지혜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구매가격 : 5,000 원

집단상담의 기초 문제

도서정보 : 김한중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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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상담의 기초 문제' 라는 책은 집단상담의 이론을 이해하고 학습자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 기초문제 335개 출제하였다. 각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맨 뒷편에 수록하였다.
집단상담 문제를 풀어 본 후 학습자가 스스로 평가해 봄으로써 한층 더 나은 학습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구매가격 : 8,400 원

수업설계 10모형

도서정보 : 김한중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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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설계 10모형' 이란 책은 10가지 수업설계 모형에 대한 이론을 정리한 책이다.
교사는 학교 수업설계 시 본인이 설계하는 수업설계 모형이 본 책에서 제시하는 10가지 중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이해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 수업설계 모형 중 어떤 수업설계 모형으로 교수학습과정안을 계획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적용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10가지 수업설계 모형을 적용하여 수업하길 기대해 본다.

구매가격 : 7,100 원

동훼이 중국 풍광 사진선집1

도서정보 : 동훼이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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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풍광사진선집1’은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중심으로 역사철학적 포인트를 잡아본 것이다. 특히 중국의 역사적 얼굴이라고 하는 5대 도시부터 안내해 보려고 한다. ‘순간의 시공간 역사성’우선 큰 그림의 주제는 자금성(북경), 오다도(천진), 외탄(상해), 성해광장(대련), 불교적 보물(서안) 등부터 시작해 보았다.

구매가격 : 8,000 원

지심도의 봄

도서정보 : 양재성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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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한 때 문학을 한답시고 들뜨기도 했었고 그러다 습작노트 열 댓 권을 어설픈 핑계로 내던지고 떠
난 기억이 있다. 이후 법학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법을 직업으로 하면서도 문학에의 미련을 완전히 떨칠 수
는 없었던 것 같다. 이상과 현실과의 모순과 괴리는 내면의 갈증을 증폭시켰고 결국 침 뱉고 떠난 우물을 찾
듯 불혹에 다시 문학의 꼬리를 붙들게 되었다. 하지만 문학은 여전히 미로 그 자체였고 언제까지 헤매게 될
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부딪히고 깨어져도 앞으로 나아갈 것만은 분명하다.
그 동안 제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외숙 심종선 시인님, 졸고의 해설을 맡아주신 강희근 교수님과 표문을
써 주신 경남문인협회 고영조 회장님께 큰절을 올린다. 그리고 표지그림을 제공해 주신 최판선 작가님, 현대
문학 출판사 0000 님과 여러 문우들께도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오늘은 부모님과 가족들 보기에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멀리서 지켜보고 계실 할머님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12년 겨울 양 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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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도서정보 : 권태주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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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20대 문학청년으로 산과 들을 헤매며
시인의 길을 걸어왔는데
어느덧 60이라는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는데
아직 가슴 속에는 세상과 맞서서 헤쳐 나가는
연어의 힘찬 몸짓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은 1부와 2부는 최신작을, 3부는 첫 시집의 작품들이 들어있고 4부는 산문을 실어보는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해 봅니다.
2019년7월10일본오서재에서권태주

구매가격 : 8,000 원

너무나 깊은 골목

도서정보 : 김영숙 | 2019-08-16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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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시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일들과 들에게서 시인 나름대로 새로운 깨달음을 해 간다. 그 새로운 터득 속에서 얻은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윤석산(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시인협회 회장)
_김영숙 시인의 「시집 너무나 깊은 골목」에서 시인은 일상에서 노치기 쉬운 미시적 세계를 날카로운 직관으로접사하고있다. 이때 시인의 직관은 사금파리처럼 날이 서있어「바닥論」「유리창」「나목의 봄」「커튼 속의 女子」「공」「셀링게디」「이름찾기」등에서“아내”와“어머니”라는 굴레를 벗어나 바깥의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중략)
-금기의 문턱에 가로막힌 한 여성의 내면 갈등의 풍경이 우리 가슴에 칼자국처럼 서늘하게 펼쳐진다. ---서안나(시인)

구매가격 : 4,000 원

바다의 점이 되어

도서정보 : 이향숙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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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언론인이면서 생각을 많이 하는 한 시니어의 삶을 보여준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그 본질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고 도출해낸 흔적들이 도처에 숨어있다. 제목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소소한 듯하지만 자연을 소재로 한 것들이 대부분이며, 글 하나하나마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록을 곁들여서 일반인들이 모르고 있는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촛불의 역사라든가 보석의 역사 유래 등이 그 예다.
또 마지막 몇 작품은 작가의 종교 세계를 쓴 글이지만 불교를 알리기보다는 누구나 공감하는 삶의 방향과 진리를 불교관에 의해서 설명함으로써 비 종교인도 저항감 없이 공감할 수 있게 했다.
@

구매가격 : 8,000 원

민낯 3

도서정보 : 김귀순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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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귀순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화엄(華嚴)의 문제를 줄기차게 싸워왔다. 2십대 청순한 신혼생활에서부터 현재 7순에 이르기까지 약50년간 ‘한국여성’을 그린 것이다. 그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한 생애를 그린 한국사회 속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 태어난 작가는 6.25 속에 동화(童話)도 잃어버리게 된다. 처절한 고독과 고난을 ‘반야심경’ 속에 의지하기도 했다.
제1부는 1970년대 중반 신혼생활을 구파발 끄트머리에서 시작한다. 고교 교사인 남편을 따라, 오로지 현모양처로서의 한 평생을 살아낸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독서와 시와 수필을 노트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가의 꿈을 꾼 것이다. 큰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다시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 가게 된다.
안산에 예술인아파트를 새로 분양하면서 좀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안산에서 서울과는 다른 대부도의 숲, 바다, 바람 등 대자연의 고귀함을 읽어낸다. 안산은 작가의 4십대부터 지금까지 약30여년간 황금시기를 보낸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고잔동 협궤열차 기적소리와 함께 살아왔다.
제2부 이후는 영국과 중국 등 외국에 관한 기억들이다. 남편이 중국의 대학에 교환교수 파견되면서 따라갔다가 찍어온 렌즈들이다. 두 차례 뤄양외대(1994년)와 톈진외대(2006년) 등 중국 캠퍼스에서 틈만 나면 대륙의 속살을 만져보았다. 중국문화는 껍질을 벗길수록 그 수액과 냄새가 다른 수수께끼 민족이다. 한국과는 반만년 형제이자 원수로서 애증을 같이 해온 운명적 이웃이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김장 담그듯 오래 묵혀두었던 시편(詩篇) 그리고 수필 살덩어리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겨울날 깊은 흙 속의 무청뿌리를 털어내듯 ‘공즉시색’ 존재론적 화두(話頭)도 치열하게 보인다. 불면의 고통스런 시간을 훔쳐내어 세상의 틈새를 내다본 것이다. 유마경(維摩經) ‘한 순간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바람도 된다.’ 출판사에서는 고심 끝에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읽어낸 한 가정주부의 삶을 독서바다에 내던져 보기로 결정했다.
***

구매가격 : 4,000 원

민낯 2

도서정보 : 김귀순 | 2019-08-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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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귀순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화엄(華嚴)의 문제를 줄기차게 싸워왔다. 2십대 청순한 신혼생활에서부터 현재 7순에 이르기까지 약50년간 ‘한국여성’을 그린 것이다. 그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한 생애를 그린 한국사회 속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 태어난 작가는 6.25 속에 동화(童話)도 잃어버리게 된다. 처절한 고독과 고난을 ‘반야심경’ 속에 의지하기도 했다.
제1부는 1970년대 중반 신혼생활을 구파발 끄트머리에서 시작한다. 고교 교사인 남편을 따라, 오로지 현모양처로서의 한 평생을 살아낸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독서와 시와 수필을 노트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가의 꿈을 꾼 것이다. 큰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다시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 가게 된다.
안산에 예술인아파트를 새로 분양하면서 좀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안산에서 서울과는 다른 대부도의 숲, 바다, 바람 등 대자연의 고귀함을 읽어낸다. 안산은 작가의 4십대부터 지금까지 약30여년간 황금시기를 보낸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고잔동 협궤열차 기적소리와 함께 살아왔다.
제2부 이후는 영국과 중국 등 외국에 관한 기억들이다. 남편이 중국의 대학에 교환교수 파견되면서 따라갔다가 찍어온 렌즈들이다. 두 차례 뤄양외대(1994년)와 톈진외대(2006년) 등 중국 캠퍼스에서 틈만 나면 대륙의 속살을 만져보았다. 중국문화는 껍질을 벗길수록 그 수액과 냄새가 다른 수수께끼 민족이다. 한국과는 반만년 형제이자 원수로서 애증을 같이 해온 운명적 이웃이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김장 담그듯 오래 묵혀두었던 시편(詩篇) 그리고 수필 살덩어리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겨울날 깊은 흙 속의 무청뿌리를 털어내듯 ‘공즉시색’ 존재론적 화두(話頭)도 치열하게 보인다. 불면의 고통스런 시간을 훔쳐내어 세상의 틈새를 내다본 것이다. 유마경(維摩經) ‘한 순간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바람도 된다.’ 출판사에서는 고심 끝에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읽어낸 한 가정주부의 삶을 독서바다에 내던져 보기로 결정했다.
***

구매가격 : 4,000 원

민낯 1

도서정보 : 김귀순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작가 김귀순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화엄(華嚴)의 문제를 줄기차게 싸워왔다. 2십대 청순한 신혼생활에서부터 현재 7순에 이르기까지 약50년간 ‘한국여성’을 그린 것이다. 그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한 생애를 그린 한국사회 속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 태어난 작가는 6.25 속에 동화(童話)도 잃어버리게 된다. 처절한 고독과 고난을 ‘반야심경’ 속에 의지하기도 했다.
제1부는 1970년대 중반 신혼생활을 구파발 끄트머리에서 시작한다. 고교 교사인 남편을 따라, 오로지 현모양처로서의 한 평생을 살아낸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독서와 시와 수필을 노트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가의 꿈을 꾼 것이다. 큰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다시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 가게 된다.
안산에 예술인아파트를 새로 분양하면서 좀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안산에서 서울과는 다른 대부도의 숲, 바다, 바람 등 대자연의 고귀함을 읽어낸다. 안산은 작가의 4십대부터 지금까지 약30여년간 황금시기를 보낸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고잔동 협궤열차 기적소리와 함께 살아왔다.
제2부 이후는 영국과 중국 등 외국에 관한 기억들이다. 남편이 중국의 대학에 교환교수 파견되면서 따라갔다가 찍어온 렌즈들이다. 두 차례 뤄양외대(1994년)와 톈진외대(2006년) 등 중국 캠퍼스에서 틈만 나면 대륙의 속살을 만져보았다. 중국문화는 껍질을 벗길수록 그 수액과 냄새가 다른 수수께끼 민족이다. 한국과는 반만년 형제이자 원수로서 애증을 같이 해온 운명적 이웃이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김장 담그듯 오래 묵혀두었던 시편(詩篇) 그리고 수필 살덩어리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겨울날 깊은 흙 속의 무청뿌리를 털어내듯 ‘공즉시색’ 존재론적 화두(話頭)도 치열하게 보인다. 불면의 고통스런 시간을 훔쳐내어 세상의 틈새를 내다본 것이다. 유마경(維摩經) ‘한 순간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바람도 된다.’ 출판사에서는 고심 끝에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읽어낸 한 가정주부의 삶을 독서바다에 내던져 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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