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불멸론

도서정보 :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 2024-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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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본: 『井上円了 妖怪学全集』 제4권(柏書房)(靈魂不滅論)(통속강의)
세속적인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름이 떠다니듯이 일시적이며, 죽음은 연기가 사라지고 구름이 흩어지듯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죽음 이후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썩어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별다른 근거나 이치 없이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 논리는 오히려 영혼의 불멸을 증명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구름이나 연기가 한번 흩어져서 형태를 잃어도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날 다시 형태를 드러낼 수 있다.(중략)
우리의 힘으로 죽음 이후의 상황을 명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혼이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대에 걸쳐 불멸해야 하는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죽음 이후 현세의 일을 알 수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불멸의 문제를 먼저 결정하고 나서 그 후에 논의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영혼이 멸망한다는 주장을 위한 구실이 될 수 없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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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 해석

도서정보 :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 2024-01-1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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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본: 『井上円了 妖怪學全集』 제4권」 柏書房(迷信解)
일본의 미신과 귀신 요괴이야기!!
일본의 규슈에는 카와타로(河太郎)(갓파河童의 다른 이름)라 불리는 것이 있고 시코쿠에는 원신(猿神), 즉 원숭이 신이 있다고 한다. 또한 비젠 지역에는 이누가미(犬神), 즉 개신이 있다고 한다. 비젠(備前)과 비추(備中)에는 히노미사키(日御崎)라 불리는 것이 있고, 비추와 빙고에는 토뵤(トウビョウ)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을 따라다니며 괴롭힌다고 하는데, 이를 고려해 보면 이름은 다르지만 실제로는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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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도서정보 : 장훙제 | 2024-01-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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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황제인가, 실패한 황제인가
사료로 고증하고 분석한 건륭성패!
CCTV 백가강단 인기 강연!

인류 역사상 실질적인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63년 4개월) 제왕이자, 가장 장수한(89세) 군주 중 하나. 인자하면서도 잔인했고, 상냥하면서도 냉정했으며, 검소하면서도 사치스러웠고, 겸손하면서도 거만했던 인물. 일생 동안 위대한 정치적 업적을 쌓았고, 재임 기간에 태평성대를 이룬 성공한 황제이자, 말년에 정치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범하면서 스스로 태평성대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아편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은 실패한 황제. 그는 바로 청나라의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 정치가와 학자, 시인, 여행가, 사냥꾼 등 다양한 모습이 합쳐져 있는 별종 황제에 대하여 가까이 다가가 그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한다.
장훙제의 『건륭: 63년 4개월의 절대 권력』(원제: 乾隆成敗)은 청淸나라 6대 황제 건륭(재위 1735∼1795)의 초년 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 거의 80여 년에 달하는 기간을 밀착하여 취재하듯이 모든 것을 세밀하게 지켜보는 책이다. 숨죽이며 마련된 무대에 올라간 건륭이라는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의 억양, 이마에 맺힌 땀방울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세계 제1의 제국을 통치한 지도자의 내면과 사생활, 즉 다양한 취미생활, 심리적 콤플렉스와 경향성, 공부와 학습의 역사 등은 물론 주요 정책들이 결정되고 시행된 과정, 청나라 만주족 권력의 생리, 관료체제의 운영,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권륭이라는 한 권력자의 성공과 실패를 조목조목 짚어보고 있다.
그를 위해 총 23개의 강의로 이뤄져 있으며, 황위를 물려받기 전 살떨리는 경쟁 시스템에 대한 소개와 타고난 사주팔자의 행운, 일찍이 강희제의 눈에 들어 부친 옹정제의 황위 등극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점, 황위에 오른 뒤에는 부친이 시행한 큰 정책들을 과감하게 폐지하는 모습, 대신들을 다루는 방법, 황후의 사망에 따른 중년기의 고통, 태평성대의 절정에 이르는 과정까지가 책의 전반부를 이룬다. 나머지 후반부는 변화와 위기, 기이한 사건들,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이를 상징하는 화신이라는 인물의 등장, 신하들과의 대결 국면, 영국의 통상요구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대응 끝에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드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의 주요 내용

건륭제의 성은 청나라 황실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이며 본명은 홍력弘曆이다. 청나라 초기에는 황족 이름을 짓는 데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 그래서 황족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족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강희제康熙帝는 황자皇子와 황손皇孫들의 이름을 짓는 규칙을 마련했다. 이제 황자들은 이름 첫 글자는 반드시 윤胤자로 쓰고, 두 번째 글자는 보일 시示 변이 있는 자를 써야 했다. 그래서 윤진胤禛, 강희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옹정제雍正帝의 이름 등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황손들은 이름의 첫 번째 글자는 반드시 홍弘, 두 번째 글자는 날 일日 변이 있는 글자를 써야 했다. 건륭의 이름인 홍력의 ‘역’은 ‘曆’이다.
건륭의 생일은 강희 50년인 1711년 음력 8월 13일이다. 띠는 토끼띠이고 별자리는 천칭자리다. 태어난 곳은 베이징 옹화궁雍和宮으로 알려졌지만 이를 두고는 이론이 분분하다. 건륭의 아버지는 알려진 대로 옹정제고, 어머니는 만주족 유호록鈕祜祿 씨다. 혈통으로 보면 건륭제는 만주족 피 81.25퍼센트와 몽골족 피 6.25퍼센트, 한족 피가 12.5퍼센트 섞인 사람이다. 건륭의 외모는 외국인의 기록이 신뢰할 만하다. 건륭제 말년에 영국의 사신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눈짐작으로 건륭제의 키가 약 5.2피트 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60센티미터 정도다. 자금성에는 건륭이 여름에 입었던 십이장十二章, 중국 황제의 예복에 붙어 있던 열두 가지 장식 조포朝袍가 남아 있는데 이 옷을 근거로 했을 때 그의 키는 166센티미터 정도였을 거라고 본다.
건륭제는 평생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바꿔 말하면 건륭제의 주요 업적과 역사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건륭 말기 중국 인구 3억…그 전대보다 2배 늘어

첫째,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청나라 이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인구수는 아무리 많아도 700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일정 시점에는 중국의 인구수가 잠시 1억을 돌파한 때도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데 건륭제 초기인 건륭 6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중국의 인구수는 이미 1억4000만 명에 달했다. 건륭 60년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얼마나 나왔을까? 3억에 가까웠다. 건륭제가 나라를 다스린 50여 년 동안 중국의 인구수가 몇 배나 늘어난 것이다. 이는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둘째, 경제 규모가 세계 제일을 차지했다.
건륭제 시기 중국의 GDP는 전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중국 제조업의 총 생산량은 영국의 여덟 배, 러시아의 여섯 배였다. 1990년대에 독일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안드레 귄터 프랑크Andre Gunder Frank는 『리오리엔트』에서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서도 막강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셋째, 청나라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건륭 24년 중가르准噶爾, Jungar, 17세기 초에 일어나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몽골 오이라트족의 부족집단과 그 국가를 평정한 뒤 청나라 영토는 14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현재 중국의 면적이 960만 제곱킬로미터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다. 또한 중국의 역대 왕조와 황제들이 회유하거나 느슨한 제도로 변방을 거느렸던 것과 달리 건륭은 변방을 정치적 관할구역에 포함시키고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다. 역대 다른 황제들은 전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넷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문화적 기록을 남겼다.
건륭제 때 만들어진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중국 역사상 글자 수가 가장 많은 책이다. 책은 약 8만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자는 9억 9600만 자에 달한다. 중국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총서라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기록은 건륭제가 중국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황제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한다. 경제와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와 문화 방면에서도 그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최장 재위기간, 최장수, 신친 7대…기록 갱신의 제왕

이 외에도 건륭은 몇 가지 특별한 역사적 기록을 만들어냈다.
우선, 그는 전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이 가장 긴 군주였다. 건륭제는 60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고, 그 후 3년간 태상황太上皇, 자리를 물려준 뒤 살아 있는 황제의 부친 자리에 올라서도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정리하자면 건륭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청나라를 통치한 기간은 63년 4개월로, 이는 전 세계 통치자들 중 가장 긴 기간이다.
강희제의 통치 기간이 더 긴 것이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연호가 강희는 61년, 건륭은 60년까지였다. 하지만 강희는 태상황에 오르지 않았고, 또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겨우 여덟 살이었기 때문에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실질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55년에 그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72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왕위에 올랐을 때가 겨우 다섯 살이었고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실제 통치 기간은 50년에 불과하다. 이란의 국왕 샤푸르 2세Shapur II는 총 70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그가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는 아직 어머니 배 속에 있었다. 따라서 실제 정치에 참여한 기간은 60년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기간이 64년이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국은 이미 군주입헌제를 택했기 때문에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군주일 뿐 권력은 중국 황제와 비교되지 않는다.
건륭은 또 세계에서 장수한 왕들 중 하나다. 중국 역사상 나이를 고증할 수 있는 황제는 500여 명인데, 그중 일흔 이상 살았던 왕은 아홉 명, 여든 이상 왕은 네 명이다. 바로 양나라 무제武帝, 무측천武則天, 송나라 고종, 건륭이다. 건륭은 여든아홉까지 살았으니 네 명 중 가장 장수했다.
하지만 전 세계로 범위를 확대해보면 그는 두 번째가 된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Ramesses II가 건륭보다 한 살 많은 아흔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건륭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신친 7대身親7代’를 경험한 황제다.
‘신친 7대’란 자신을 포함한 7대를 모두 직접 만났다는 의미다. 위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래로는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까지 보았고, 거기에 건륭 자신을 합치면 7대가 된다. 이 기록은 역대 제왕들 중 유일무이하며 누구도 이를 뛰어넘은 적이 없다. 황실에서 유일할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역사 기록을 조사해보니 수천 년 동안 당나라 시인 전기錢起에서 명나라 화가 문징명文徵明까지 겨우 여섯 명만이 신친 7대를 이루었다.
이런 몇 가지 기록을 제외하고도 건륭에게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부분이 또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문무文武 겸비

그중 하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많았다는 것이다. ‘무武’ 방면에서 건륭은 기초체력이 아주 뛰어났다. 평생 건강한 신체와 체력을 유지했으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문文’ 방면에서는 아이큐가 높아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았고 만주어, 한어漢語, 한족의 언어로 지금은 중국어를 뜻함, 몽골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다섯 가지 언어를 구사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었다. 평생 시를 몇 수 남겼을까? 총 4만3630수나 된다. 『전당시全唐詩』에는 당나라 시대에 활동했던 2000명이 넘는 시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모두 합쳐도 4만8000수가 채 되지 않는다. 건륭 한 사람이 당나라 시인 2000명의 시 선집만큼 시를 지은 것이다. 이 역시 흥미로운 기록이다.
또한 운이 좋았다. 건륭제는 즉위 과정이 순조로웠는데, 옹정제가 비밀리에 태자를 세우는 제도를 마련해놓은 덕분에 그는 황위를 두고 다른 황자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옹정제가 건륭을 후계자로 정한 뒤 일찍 세상을 떠나 건륭은 젊고 혈기왕성한 스물다섯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즉위했을 때는 정치적 기초도 아주 잘 다져져 있었다. 강희제와 옹정제가 7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아주 안정된 상태였고, 나라 안팎으로 특별한 우환도 없었다. 말하자면 정치라는 무대 위의 모든 세트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
마무리도 완벽했다. 역사상 유종의 미를 거둔 황제는 많지 않다. 중국 황제가 횡사橫死, 즉 정상적이지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확률은 44퍼센트나 되었다. 정말이지 고위험군에 속하는 직업이다. 이에 반해 건륭은 6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성공적으로 의식을 거행해 자신이 고른 후계자 가경嘉慶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 후에도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말년의 탐욕, 지나친 문자옥, 자만과 폐쇄정책

‘시비是非’와 ‘공과功過’를 모두 따져보자면 건륭제의 ‘잘못’을 이야기해야 한다.
건륭의 첫 번째 잘못은 말년에 태평성세에 취해 탐욕을 부리며 부패를 만들어내고 청나라를 쇠락의 길로 내몬 것이다. 그는 화신和珅을 중용해서 황실 수입을 늘리도록 했고 대신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공물로 바치라고 강요했다. 이 바람에 청나라 정계에는 횡령과 부패가 성행했고, 결국 백련교白蓮敎, 송·원·명·청나라에 걸쳐 유행했던 신흥종교로 청나라 가경제 때 가장 큰 반란을 일으킴의 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두 번째 잘못 역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이다. 바로 ‘문자옥文字獄’이다.
건륭은 훌륭한 일을 역사적 기록으로 많이 남겼지만 일부 잘못도 역시 기록으로 남았다. 그는 중국 역사상 문자옥을 가장 많이 일으킨 황제다. 청나라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예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삼대에 걸쳐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그래도 강희제는 열 차례에 그쳤지만 옹정제는 스무 차례에 달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얼마나 되었을까? 130여 차례나 되었다.
건륭의 또 한 가지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바로 폐기한 책의 권수다. 그는 『사고전서』를 만들며 문화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런데 실상은 그 기회를 틈타 청나라 왕조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책을 모두 불살랐는데,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 양이 적어도 6∼7만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사고전서』를 만들면서 또 다른 ‘사고전서’를 불태운 셈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문화적 재앙의 하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잘못이다. 바로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외교방식을 택한 점이다. 건륭이 살던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다. 물질적으로는 건륭이 즉위한 이듬해인 1733년 영국인 케이John Kay가 플라잉셔틀flying shuttle, 직조기계의 씨실을 넣는 장치로 직물 생산을 능률화 한 발명품을 발명하며 산업혁명의 서막이 올랐고, 건륭 34년(1769)에는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해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문화적으로는 건륭의 나이 마흔넷이 되던 건륭 19년(1754)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명작을 발표했고, 말년인 건륭 54년(1789)에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시민들은 「인권선언」을 발표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정신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여든다섯이 된 건륭이 아들 가경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에 오른 이듬해인 1796년,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연임하지 않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은 연임할 수 없다는 관례가 생겼다. 이 두 역사적 거물이 보인 권력에 대한 태도에서 당시 청나라와 서양 정치문명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건륭은 서양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기본적으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는 ‘청나라는 위대하며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던 때에 오히려 문을 닫고 나라를 봉쇄했다. 학자들은 건륭의 이런 뒤처진 외교적 사고가 청나라 몰락과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복잡한 인간, 건륭

저자는 한 단어로 건륭의 성격을 표현해야 한다면 ‘복잡複雜’을 고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인자하고 선량한 면이 있었다. 옹정은 임종 전 남긴 조서에서 건륭을 ‘천성이 인자하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나 개가 죽으면 반나절을 울곤 했다는 것이다. 또한 건륭은 나라의 재난 현장을 보고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어느 해에는 안후이성 타이후현에 심한 기근이 닥치자 먹을 것이 없어진 백성이 들로 나가 ‘흑미黑米’라는 것을 파먹으며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흑미란 오래되어 검게 변한 곡식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건륭은 이 소식을 듣고 관리들을 시켜 흑미를 가져오도록 했다. 도대체 무엇을 먹는지 직접 보려고 한 것이다. 흑미가 오자 그는 맛을 보았다. 그런데 입안에 넣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그것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흑미를 황자들에게 나눠주며 백성의 힘든 생활을 가슴에 새기도록 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정확한 것을 좋아한 건륭은 유독 재난 복구 과정에서만큼은 ‘낭비’를 허락해주었다. 설령 관리들이 일부러 상황을 부풀려 보고하는 한이 있어도 모든 백성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는 매우 인자한 황제다.
하지만 그에게는 폭력적인 면도 있었다. 『청대문자옥당淸代文字獄檔』을 살펴보면, 건륭 18년에 정문빈丁文彬이라는 자가 저장성에서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부孔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더니 며칠 전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자신에게 공부의 두 딸을 주시겠다고 했으니 이 집 사위가 되겠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바로 관아로 끌고 갔다. 관리들이 몸을 수색하니 책이 한 권 나왔는데 표지에 알 수 없는 연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관리에게 자신의 귓가에서 천자가 될 운명이라는 말이 자꾸 들린다며, 그 목소리를 따라 이 연호를 적었다고 말했다. 관리들은 이 사실을 바로 건륭에게 보고했다. 건륭은 그가 그저 정신 나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 ‘미치광이’를 거리로 끌고 나와 백성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하고 산 채로 몸을 3600번 베게 했다.
건륭이 이런 처벌을 내린 까닭은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우민愚民’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건륭은 인자함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도 그에게는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 사교적이고 기품 있으며 주변 사람이 ‘봄바람과 따뜻한 기운’을 느낄 만큼 온화했지만, 매우 오만해서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깔보았으며 정책을 시행할 때는 엄격하고 냉정했다. 또 절제되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지키며 평생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극도로 사치스러워서 여섯 차례나 남쪽지방을 순행하며 엄청난 경비를 지출했다. 젊어서는 총명하고 겸손하며 신중한 성격으로 청나라를 태평성세에 올려놓았지만 말년에는 고집불통에 기고만장해서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고 스스로 그 성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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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상)

도서정보 : 사마천 | 2023-12-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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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주三家注’를 넘어 최신 연구 성과까지
『사기』의 모든 주석을 망라한 결정판!

그동안 국내『사기』 번역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등 ‘삼가주三家注’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었다.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다.

글항아리에서 펴낸 이번『사기열전』 상·하는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삼가주三家注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같이 검토함으로써 풍부한 주석의 세계를 선보였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한 뒤에 가장 옳다고 생각한 내용을 번역에 반영했으며, 아울러 독자들도 다양한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분량 또한 방대해졌다.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런 부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때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가 뒤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범위한 연구 성과 반영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사기』의 판본은 상당히 많다. 『사기』의 각본刻本은 북송 때 시작되었고, 이후에 가장 유명한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합친 ‘삼가주합각본三家注合刻本’이 출현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평론을 숭상하는 기풍에 따라 평림본評林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 평론은 구절과 단락을 나누어 평론한 것도 있고 편 전체를 평론한 것도 있다. 청대에 와서는 송나라 판본을 보충한 백납본百衲本이 출현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잔본殘本들을 모아 완성시킨 것으로 백납본白衲本 『사기』라 부른다.
이후 현대에도 많은 『사기』가 간행되었지만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2013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點校本二十四史修訂本 『사기』’를 이번 번역 작업의 저본으로 삼았다. 이 책은 1959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 『사기』와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5)에 금릉서국에서 간행한 『사기집해색은정의합각본史記集解索隱正義合刻本』 130권을 저본으로 삼아 『사기』 문헌학의 권위자인 자오성췬趙生群 난징사범대학 교수의 교감과 수정을 거쳐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정한 ‘수정본 『사기』’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각 「열전」 말미에 ‘교감기’를 통해 본문의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소개했는데, 역자는 이번 번역본에서 이를 참고하고 인용할 때 주석에서 ‘교감기’라 하지 않고 ‘수정본’이라고 밝혀두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사기』 번역본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삼가주三家注’(남조南朝 송宋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특히 『사기』의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이러한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삼가주’의 중요한 주석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들의 견해를 주석을 통해 설명하며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삼가주’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출처를 밝혔다. 역자가 참조한 대표적인 저작물은 명대 능치륭凌稚隆의 『사기평림史記評林』을 비롯해 청대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가운데 「독사기잡지讀史記雜志」, 곽숭도郭嵩燾의 『사기찰기史記札記』, 그리고 근대의 저작물인 추이스崔適의 『사기탐원史記探源』 , 천즈陳直의 『사기신증史記新証』, 일본 학자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등과 왕수민王叔岷의 『사기각증史記斠證』, 현재 『사기』 연구의 최고 전문가라 평가받는 한자오치韓兆琦의 『사기전증史記箋證』(2015년 수정판), 그리고 장다커張大可, 딩더커丁德科의 『사기통해史記通解』(2015)를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들 외에도 번역 중 검토했던 주요 자료 목록을 참고문헌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사마천의 오류 집중 분석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의 출판물에서는 이러한 오류 부분에 대한 지적과 설명,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되고 타당한 견해들을 소개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채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오류 이외에 『사기』에는 또한 『전국책』 『한서』 등과 비교해 내용이 상이하거나 시대 순서의 오류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 또한 『전국책』 『한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소개했고, 『전국책』 『한서』와 관련된 많은 역사 저작에서 『사기』와 상이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석에 소개하고 각각의 오류를 검증하고 바로잡았다.
그 외에 사마천은 『사기』를 기술하면서 제자백가와 사서오경 등 여러 고대 저작물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글항아리판 이번 번역에서는 사마천이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 상이하거나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까지도 비교 검토하여 주석에 상세히 소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판된 기존의 『사기』 번역서에서 심각한 번역 오류라 판단된 경우에는 이들 번역이 왜 오류인지 근거와 함께 바른 번역을 제시했다.
『사기』는 중국 최고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중국 역사의 고찰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천天’이 아닌 ‘인人’, 그리고 ‘민民’으로 더욱 구체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들 평민 백성의 사적과 역할을 기술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혼란한 시대 상황과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분노했다.

구매가격 : 32,300 원

사기열전 (하)

도서정보 : 사마천 | 2023-12-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삼가주三家注’를 넘어 최신 연구 성과까지
『사기』의 모든 주석을 망라한 결정판!

그동안 국내『사기』 번역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등 ‘삼가주三家注’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었다.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다.

글항아리에서 펴낸 이번『사기열전』 상·하는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삼가주三家注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같이 검토함으로써 풍부한 주석의 세계를 선보였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한 뒤에 가장 옳다고 생각한 내용을 번역에 반영했으며, 아울러 독자들도 다양한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분량 또한 방대해졌다.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런 부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때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가 뒤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범위한 연구 성과 반영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사기』의 판본은 상당히 많다. 『사기』의 각본刻本은 북송 때 시작되었고, 이후에 가장 유명한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합친 ‘삼가주합각본三家注合刻本’이 출현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평론을 숭상하는 기풍에 따라 평림본評林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 평론은 구절과 단락을 나누어 평론한 것도 있고 편 전체를 평론한 것도 있다. 청대에 와서는 송나라 판본을 보충한 백납본百衲本이 출현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잔본殘本들을 모아 완성시킨 것으로 백납본白衲本 『사기』라 부른다.
이후 현대에도 많은 『사기』가 간행되었지만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2013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點校本二十四史修訂本 『사기』’를 이번 번역 작업의 저본으로 삼았다. 이 책은 1959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 『사기』와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5)에 금릉서국에서 간행한 『사기집해색은정의합각본史記集解索隱正義合刻本』 130권을 저본으로 삼아 『사기』 문헌학의 권위자인 자오성췬趙生群 난징사범대학 교수의 교감과 수정을 거쳐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정한 ‘수정본 『사기』’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각 「열전」 말미에 ‘교감기’를 통해 본문의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소개했는데, 역자는 이번 번역본에서 이를 참고하고 인용할 때 주석에서 ‘교감기’라 하지 않고 ‘수정본’이라고 밝혀두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사기』 번역본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삼가주三家注’(남조南朝 송宋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특히 『사기』의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이러한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삼가주’의 중요한 주석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들의 견해를 주석을 통해 설명하며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삼가주’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출처를 밝혔다. 역자가 참조한 대표적인 저작물은 명대 능치륭凌稚隆의 『사기평림史記評林』을 비롯해 청대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가운데 「독사기잡지讀史記雜志」, 곽숭도郭嵩燾의 『사기찰기史記札記』, 그리고 근대의 저작물인 추이스崔適의 『사기탐원史記探源』 , 천즈陳直의 『사기신증史記新証』, 일본 학자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등과 왕수민王叔岷의 『사기각증史記斠證』, 현재 『사기』 연구의 최고 전문가라 평가받는 한자오치韓兆琦의 『사기전증史記箋證』(2015년 수정판), 그리고 장다커張大可, 딩더커丁德科의 『사기통해史記通解』(2015)를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들 외에도 번역 중 검토했던 주요 자료 목록을 참고문헌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사마천의 오류 집중 분석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의 출판물에서는 이러한 오류 부분에 대한 지적과 설명,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되고 타당한 견해들을 소개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채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오류 이외에 『사기』에는 또한 『전국책』 『한서』 등과 비교해 내용이 상이하거나 시대 순서의 오류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 또한 『전국책』 『한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소개했고, 『전국책』 『한서』와 관련된 많은 역사 저작에서 『사기』와 상이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석에 소개하고 각각의 오류를 검증하고 바로잡았다.
그 외에 사마천은 『사기』를 기술하면서 제자백가와 사서오경 등 여러 고대 저작물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글항아리판 이번 번역에서는 사마천이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 상이하거나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까지도 비교 검토하여 주석에 상세히 소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판된 기존의 『사기』 번역서에서 심각한 번역 오류라 판단된 경우에는 이들 번역이 왜 오류인지 근거와 함께 바른 번역을 제시했다.
『사기』는 중국 최고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중국 역사의 고찰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천天’이 아닌 ‘인人’, 그리고 ‘민民’으로 더욱 구체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들 평민 백성의 사적과 역할을 기술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혼란한 시대 상황과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분노했다.

구매가격 : 35,300 원

조선통치의 회고와 비판

도서정보 : 김슬옹, 신한준 | 2023-11-0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일본인들이 직접 쓴 일제강점기 조선(한국) 이야기,
읽을수록 섬세하고 섬뜩한 이야기.
비판과 성찰이 아니라 주로 자화자찬식 회고!
그 속에 담긴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래서 더욱 읽어야만 한다. 똑같은 역사를 반복할 수는 없기에, 그래서 이 책은 역(逆) 징비록이다.

고통스러운 번역, 꼭 알아야 하는 역사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조선(한국 통치 25주년을 맞이하여 1934년 무렵 조선신문에 90명이 쓴 90편의 글을 모아 1936년에 출판한 책이다.

짤막한 글모음이지만 90편이나 되므로 분량이 적지 않다. 학술적이지 않은 에세이 형식이라 편찬 의도도 분명하다. 두루두루 많이 읽게 하려고 만든 책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 글꼴 크기와 책값까지 세밀하게 고려한 책이다.

책 일러두기에서 “이 책을 6호 활자체(8pt)로 인쇄한 이유는, 수록된 자료가 조선 통치에 관한 문헌으로서 귀중하므로 풍부한 내용을, 될 수 있는 대로 가격을 높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소개하려 고심한 끝에 준비한 때문이다.”라고 스스로 그런 점을 밝히고 있다. 풍부한 내용을 싼값에 많은 대중들이 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조선통치 25주년’의 의미를 강조하고 홍보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피지배 한국으로서는 피가 솟는 얘기들이지만 저들의 글에는 일본 우월주의에 의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넘쳐난다. 회고만 있고 당연히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없다. 비판이 있다면 통치 방식과 결과에 대한 일본 내부에서의 비판일 뿐이다. 가타야마 시게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 결국 비판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통치 찬양이요 자화자찬의 연장이다.

구매가격 : 46,000 원

세계 문화 여행_일본(개정판)

도서정보 : 폴 노버리 | 2023-10-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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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풍습, 역사, 문화, 생활, 삶

이 책은 『세계 문화 여행』 시리즈의 일본편으로 일본의 풍습, 역사, 문화, 생활, 삶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업차 일본을 방문하든 단순한 여행이든, 일본에서 더욱 풍성하고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현지 풍습과 전통, 역사와 종교와 정치, 일본인의 가정과 직장과 여가, 의식주, 의사소통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구매가격 : 9,100 원

미국이 길러낸 중국의 엘리트들

도서정보 : 장융전 | 2023-09-1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낙후된 초나라의 인재를
선진국 진나라에 보내라!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 엘리트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사람이 되어 돌아왔는가
그리고 중국의 사회,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미국이 길러낸 중국의 엘리트들: 미국의 중국 유학생들, 1872-1931』(원제: 礎材晉育)은 미중 양국의 인재 교류의 양상을 살펴본 책이다. 『중국유미학생월보』를 주된 자료로 삼고, 1902년에 창립했다가 1931년 해체한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 활동을 중심으로 중국인 미국 유학생을 조명했다. 이 단체는 중국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전국 유학생 조직으로, 룽훙이 주도한 어린 유학생들은 포함되지 않으며 그들이 본국으로 소환된 이후의 ‘과도기 세대’ 유학생들이 중심이다. 그렇게 볼 때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는 미국 유학이 유행한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미국 유학생을 이해하려면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를 이해해야 하며 선구자 세대부터 과도기 세대로 연결되는 역사의 전체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이 책의 서술은 1872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전미중국유학생연합회가 해체된 1931년까지의 기간을 담고 있다.
중국이 수천 년 주변 국가들로부터 유학생을 받아오다가 처음으로 바깥에 유학생을 내보낸 곳이 바로 미국이었다.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2020년 현재 미국의 중국 유학생은 37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미국의 전체 외국인 유학생 중 35퍼센트를 점하는 수치로, 실로 놀라운 양적 성장이다.
200여 년 사이에 양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무역과 인재로 활발하게 교류했지만 그 과정은 한순간도 순탄하지 않았다. 대국 간의 교류는 다면성과 복잡성을 포함하고 있어 항상 주변국들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역사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작금의 상황에 매몰된다면, 전체적인 모습을 놓칠 수밖에 없다.
동치 중흥이래 미국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롤 모델이었다. 단지 ‘물건의 신기함’ ‘물질적 안락’ ‘질서정연함’ 때문이 아니라 서방 열강들의 무차별한 침략 속에서 미국만이 정치적으로 가까운 우방이며 보호자라는 믿음이 있었다. 미국에 유학했던 많은 중국 인재가 한편으로 미국을 신앙처럼 여기며 중국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이 중국인을 배척하는 법안을 만들면서도 중국 유학생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친미 성향의 지도층과 광대한 소비층을 배양하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당시 왕징춘王景春은 미국 유학 경험을 통해 “중국은 이 세계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놀랄만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이 이룬 현대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다. 내일의 중국은 명석한 두뇌와 식견을 가진 지도자의 영도아래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켜 세계 시장에 다양한 원료를 제공할 것이다”라고 희망을 쏘아 올렸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심각한 갈등 속에서도 많은 중국인은 미국을 이상향으로 여기고 있고, 미국 역시 중국이라는 광대한 시장에서 발을 뗄 수 없다.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일부 영역에서 롤 모델에 근접하거나 넘어서다보니 롤 모델이 이에 놀라서 당황하는 초유의 형국이 되었을 뿐이다. 섣부른 예측론자들은 또 다양한 통계수치를 들어 오래지 않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해서 G1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학자로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같은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국이 전통 속에서 그리고 현대화 과정에서 쌓아온 풍부하고 많은 자산과 경험은 쉽사리 소진되지 않을 것이고,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지 미국으로 간 중국 유학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시기는 늦었지만 수많은 한국 인재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 유학을 떠났고, 그렇게 연결된 고리를 통해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 계단으로 이용했으며 사회 전반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그 사이에 있는 우리는 역사 속에서 꾸준히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1872년 룽훙容宏이 최초로 어린 유학생들을 데리고 미국에 간 것을 시작으로 중국의 미국 유학 역사의 막이 올랐다. 당시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의 상소문에 따르면 “오랑캐의 기술을 익혀 오랑캐를 제압한다師夷之長技以制夷”는 명제 아래 “총명한 아이들을 선발해 서양 여러 나라에 보내어 군정·선박·수학·제조 등 학문을 배우게 한다. 약 10여 년의 교육을 마치고 서양인의 장점을 중국에 접목하여 익히면 강해질 것이다”라는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중국을 강국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이루는 순간 중단될 계책이기도 했다.
맨 처음 중국 정부가 미국에 유학생을 보내는 정책을 수립한 목적은 “초재진육楚材晉育”(춘추전국시대 낙후된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화법」이 활성화되던 1882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중국 유학생은 감히 미국에 남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법안이 폐지된 후, 특히 1965년 매년 2만 명의 이민이 허용되면서부터 비로소 유학생에게 ‘배움이 뛰어나면 남을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해졌다. 결국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교육시키는 “초재진육”은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등용하는 “초재진용楚材晉用”의 수단이 되었고, 인재 유출 현상의 단초를 제공했다.
지나친 ‘서양화’는 늘 골칫거리였다. 룽훙이 데리고 간 120명의 어린 유학생은 1872년부터 187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공부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15년간 투자하여 중등 교육부터 기초를 다진 뒤 군대·선박 분야의 인재로 육성할 계획이었으나 1881년 여름, 10년도 못 채우고 모든 유학생을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그 까닭은 이들이 지나치게 서양화되어 학업을 완수해도 중국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서양화는 곧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당시의 유학이 사회적 투자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학생들이 과도하게 서양화되었다는 지적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다. 즉 개인 차원을 넘어 국가와 사회 전체와 관련된 사안이므로 사회적 자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득실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 젊은 유학생이 전반적으로 유학 교육에 대해 비판한 바 있었다. 후스胡適는 1910년 2차 경관 국비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1913년 초 그는 「비유학편非留學篇」을 발표해 “유학을 간다는 것은 나라의 큰 수치다留學者, 吾國之大恥也”라며 비판했다. 중국은 낙후되었으니 유학생을 태평양 너머로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배워 우리의 부족함을 메워야 하지만 “유학 정책은 유학을 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이 목표가 없으면 유학 정책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게 후스의 입장이었다.
후스가 유학하던 무렵은 중국이 유학생을 파견한 지 40여 년이 흐른 시점인데 어째서 일본과 달리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해 후스는 “정부의 잘못된 교육 방침과 유학생의 잘못”을 지적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국내 교육을 장려하기보다 그저 유학 보내는 데 중점을 둠으로써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비판했고, 유학생에 대해서는 취득한 학위를 생계 수단으로 삼은 것, 산업만 중시하고 인문학을 경시한 것, 근본을 무시한 것 등을 비판했다.
유학생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을 지적했다. 1) 자존심이 없다. 다른 나라의 물질문명에 취해 우리 전통을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2) 문명은 수입할 수 없다 중국 문자는 문명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돛帆과 타舵, 삿대篙와 노櫓 등 차이를 모르면 가르칠 수 없고 책도 쓸 수 없다. 유학생들이 설사 천하에 없는 지식을 익혔다 한들 한자를 모르고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후스는 많은 결점을 안고 있으나 유학 자체를 폐지할 수는 없으니 개혁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중국을 ‘잠자는 사자’로 비유했으나 후스는 ‘잠자는 미인’에 빗대어 입맞춤으로 잠자는 미인을 깨어나게 한 왕자는 바로 현대 서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을 신중하게 선발하고, 국내 고등교육 기관의 증설’이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때 이후로 후스는 생각이 바뀌어 더 이상 「비유학편」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누군가 중국을 ‘고대 문화가 발달한 나라’ ‘문학의 우아함, 역사적 영광, 민족의 돈후함’ 등으로 표현하면 그는 오히려 ‘과대망상’ ‘미몽’ ‘반동’이라며 비웃곤 했다. 후스는 유학의 목표는 훗날 유학할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여러 회의 자리에서 지속적인 유학생 파견을 주장했다. 그 자신 귀국 이후 엘리트주의에 매몰되어 교육의 질을 높이려면 인력, 재력, 에너지를 고급 학부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에 선 것이다.
후스가 「비유학편」을 쓰던 1913년은 룽훙의 어린 유학생들이 소환되던 1881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시기다. 그러나 룽훙의 어린 유학생에 대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본래의 모습을 잃었고 커다란 성과도 없었다’는 비판과 ‘현재 유학생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근본을 무시한 것’이라는 후스의 지적을 비교해볼 때, 세월의 편차에도 유학생에 대한 비판의 축은 달라지지 않았다. 30년 세월의 간극을 지우는 비판의 결론은 결국 자신이 중국인임을 잊을 만큼 서양화됐다는 사실이다. 후스는 사상적으로 성숙해진 이후 ‘비非’유학을 말하지 않고 유학이 중국의 엘리트 교육 발전과 연구의 지름길임을 강조했다.
룽훙부터 지금까지 150년간 여론과 (미국을 포함한) 학계에서는 유학 교육에 대해 비판적 태도가 우세했다. 후스의 「비유학편」 외침은 마치 드넓은 벌판에서 부는 호각소리가 흩어지는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가 1920년대 이후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모두 서양화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좌파와 우파,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중국에서 교육 받은 자와 귀국 유학생을 막론하고 서양화된 유학 교육이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하나같이 비판했으며 유학 자체를 폄하하기도 했다. 이는 서양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비판은 세 방향으로 모아졌다. 첫 번째는 맹목적 답습으로, 유학생들은 서양의 꽃을 가져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중국 나무에 이식했다는 비판이다. 두 번째는 그들이 배운 것은 모두 이론뿐으로 이론에 상응하는 응용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유학생들이 지나치게 서양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1920년대 학계에서도 유학생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수신청舒新城의 『근대중국유학사』는 시간적으로 룽훙의 어린 유학생부터 1920년대 중기까지, 공간적으로 일본부터 유럽까지 유학의 전체 과정(국비, 자비, 경관과 그 이후 칭화대학 유학생 및 기독교 학교 유학생)을 조명했다. 수신청의 비판은 정부의 실책, 즉 청조 말부터 일관되지 않은 유학 정책과 통일된 집행기구의 부재, 느슨한 선발 시험 등에 집중되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자비 유학생에 대한 자격 제한이 지나치게 느슨해 기본 테스트조차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정부가 사회 자원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출세만 바라는 허영심”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칭화대학 졸업생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었으나 돌아온 성과가 너무 적어 ‘경제적’으로도 실패했다고 보았다. 칭화대학 출신 유학생들은 국내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 ‘중국인도 서양인도 아닌不中不西’ 존재가 많았다. 수신청은 “유학 교육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면서도 스스로 이 비판이 “지나치게 격렬”하여 “유학생들이 이룬 공헌을 지워버리는” 면도 있다고 한 반면, 왕이쥐의 비판은 수신청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그는 근대 중국의 유학 정책은 정치·사회·경제·문화 모든 방면에서 악몽이자 비극이었다고 했다.
왕이쥐의 연구는 유학생을 겨냥한 잘 조사 정리된 기소장과 같았다. 그는 몇몇 특별한 인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학생에 대해 난감함에 가까운 평가를 내렸다. 안하무인으로 교만하며, 지나치게 서양화되어 중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서양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지식은 실질적이지 못해서 중국 사회의 요구에 들어맞지 않았고, 쉽게 출세하려는 야심으로 오직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할 뿐 사회적으로 갖춰야 할 도덕의식과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학생들이 야구를 하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교회를 다니는 등 지나치게 미국 문화에 젖어들게 방치하여 감독 교사를 무시하는 일은 둘째 치고 중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초창기 유학생들은 학업 성적도 좋지 않아서 본국으로 소환될 무렵 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단 2명뿐이고, 10명 미만이 갓 대학에 입학한 상태며 나머지는 아직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고 했다. 1854~1954년까지 100년 동안 대략 미국에서 유학한 중국인 학생은 2만2000명이었는데 50~60퍼센트만이 학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중국 학계에서는 근대 미국 유학에 대해 이전과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내놓았다. 대표적인 연구는 리시쒀李喜所의 『근대 중국의 유학생近代中國的留學生』(1987), 쑨스웨孫石月의 『중국 근대 여성유학사中國近代女子留學史』(1995)다. 개혁개방의 물결에 따라 미국 유학생에 대해서도 서양 제국주의의 문화 매판이라는 정치 선전 형태의 평가를 거둬들이고 대신 중국 근대화의 애국적 선구자로 칭송했다. 물론 그들이 서양 문화를 숭배하거나 군벌과 반동세력에 부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열심히 공부해서 곤경에 처한 중국의 출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 세 편의 연구로 이어졌다. 2001년 예웨이리葉維麗가 출간한 『중국을 위한 현대적 길찾기: 미국 내 중국 유학생들 1900~1927』, 2004년 스테이시 비엘러의 『애국자인가 반역자인가?: 미국의 중국 유학사』, 1999년 한예룽의 박사논문 「세계 일부로서의 중국: 1920년대 미국의 경관자금 반환이 중국 학술기관 설립에 미친 영향」이다. 그러나 이 연구들 역시 ‘애국자와 매판’ 또는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
가장 의미 있는 작업은 타이완 학자 쑤윈펑蘇雲峰이 1996년에 출간한 『칭화학당에서 칭화대학까지 1911~1929』라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그는 1981년 출간한 『칭화대학사고淸華大學史稿』가 칭화대학을 ‘노예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했다면서 재조명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초기에 칭화대학은 외교부 관할이었는데 미국 공사의 간섭을 받는 등 국격 손상에 해당하는 일이 있었으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귀국 유학생 출신이 교육부보다 외교부에는 더 많아서 안정적인 편이었다고 평가했다. 적어도 그들은 현대 지식인이었고 이념적으로 미국과 근접하여 비교적 소통이 원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칭화대학은 미국 문화와 사회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영어 교육을 중시하고 중국어 교육을 소홀히 했으나 얼마 후 이를 개진하여 융합을 꾀했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칭화대학이 충분한 재원을 바탕으로 미국식 하드웨어를 갖추고 교수와 엘리트 학생들에게 건강하고 활발한 캠퍼스 생활을 제공했다. 졸업생들은 미국 여러 대학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차별받는 환경에서도 강렬한 애국심으로 ‘변방의 지식인周邊知識人’으로서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개명한 입장에서 중국 문화와 사회에 합리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창조적인 공헌을 발휘했음을 통계 수치로 소개했다.
수신청과 왕이쥐가 비판한 근대 중국의 유학 교육 문제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로 종합된다. 첫째는 자원 분배의 불균등이다. 즉 근대 중국은 전체적으로 교육 자원을 균형 있게 분배하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고등 교육을 중시하고 초등 교육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한 예로 1931년 당시 중국은 대학생 한 명당 초등학생 한 명의 200배에 달하는 교육비를 지출했다. 같은 시기 유럽 국가의 비율은 1대 8 정도였다. 이러한 불균등한 구조보다 더 기형적인 것은 대학들이 상하이, 베이징, 난징, 광저우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1922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30퍼센트의 대학과 41퍼센트의 대학생이 모두 베이징에 있었고, 1932년의 다른 통계에서는 상하이의 대학생이 전국 대학생의 2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연해에 위치한 몇몇 도시에 대학이 집중된 현상은 유학생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1925년의 통계에 따르면 귀국 유학생 584명 중 34퍼센트, 1937년의 다른 통계에 따르면 귀국 유학생 1152명 중 28퍼센트가 상하이에 머물렀다. 게다가 교육비용이 갈수록 비싸지면서 농민과 빈민 계층은 교육의 기회로부터 멀어졌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졌고 내륙 지역의 개발이 더딘 곳일수록 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간혹 농촌에 사는 극소수 학생이 간신히 도시에 와서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에 정착했다.
쑤윈펑은 교육 자원의 분배와 정치·사회적 영향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칭화대학을 설립한 목적은 지역 간 불균형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한 지역 간 형평성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장쑤·저장·푸젠·광둥 연해 성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쑤윈펑은 학생들의 출신 환경과 관련해 56퍼센트의 학생 배경을 조사해 “지주, 관료, 자산계층 출신이 44퍼센트”에 달한다는 결과를 확인함으로써 근대 중국 교육 자원의 분배가 균등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런 자원 분배의 불균등을 당시의 사회현상으로 해석하면서도 수신청·왕이쥐가 제시한 불균등이 근대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수신청·왕이쥐가 제기한 두 번째 비판은 유학생들이 전공한 학문의 활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본 그들은 많은 통계자료를 검토한 결과 정부가 유학 정책을 수립하지 않았거나 실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선발과 관리와 관련된 문제였다.
정책을 수립하지 않았거나 지켜지지 않은 결과 학생들의 전공은 사회적 수요와 거리가 있었고 귀국 후에 자신의 전공을 활용할 수 없었다. 1925년 조사에 따르면 34.5퍼센트에 달하는 귀국 유학생이 전공을 활용하지 못해 실업자나 가정주부가 되었다고 했다. 왕이쥐의 조사 결과 귀국 유학생들의 사회 진출은 정계와 학계에 집중되었는데 1917~1934년에는 32~40퍼센트가 교육계에서, 16~42퍼센트가 정계에서 직업을 구하고 있다. 문제는 두 분야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유학생들이 귀국 후 자기의 전공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교육계로 진출한 이들은 주로 인문학과 농업 전공자였다. 이과 전공자는 연구할 기회를 얻지 못해 학교 밖에서 길을 찾아야 했는데 소수는 정계에 진출했지만 역시 연구나 기술직이 아닌 사무직이었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농학 전공자로, 1925년 통계에서는 70퍼센트가 교육계에서 일하고 일부가 정계로 진출했을 뿐 농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무했다. 경제계나 금융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전공과 무관한 일을 했다.
경제 및 공학 전공자도 자신이 배운 바를 활용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첫째, 상경대를 졸업한 유학생은 대부분 은행에 근무했으며 창업자는 없었다. 둘째, 564명의 경제계 인사 중 10명만 귀국 유학생 출신이며 그중 9명이 은행에 근무했다. 셋째, 40명의 공업계 인사 중 30명은 엔지니어이고 18명이 귀국 유학생이었는데, 유학생들은 전공과 무관하게 국영 기업의 관료로 일했다.
이런 결과는 단순히 교육 투자의 차원을 떠나 깊은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유학 출신들이 전공을 활용하지 못한 데는 그들이 남에게 굽힐 줄 몰랐다거나 농촌으로 가기를 꺼려했다는 심리적 요인 외에도 중국 사회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만한 응용지식이 부족하거나 불가능했거나 원하지 않았다는 요인이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학계에 남든 정계에 뛰어들든 ‘배움이 뛰어나면 관직에 나간다’는 전통 가치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1930년대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유학생의 태도도 변했고 학문적 수준도 향상되었으나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수신청·왕이쥐의 세 번째 비판은 “미국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왕이쥐는 룽훙을 비롯한 많은 유학생은 미국인이 되고 싶어 했을 뿐이라고 평했다. 그 예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귀화 경향도 높은 점을 들었는데, 어린 유학생 중 8명이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중 4명이 미국인이 되었다. 학위를 얻지 못한 100여 명 중에서는 단 한 명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미국인으로 귀화하는 경향은 계속 이어져 1937년 출간된 『칭화동창회록淸華同學錄』에는 21명의 졸업생이 이미 14년 이상 미국에 장기 거주하고 있었다.
왕이쥐는 선발 과정을 거쳐 출국한 유학생들이 엄격한 이민법 심사에 통과해 미국에 남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 이들이 미국에 남는다는 것은 유학 정책에 대한 투자를 회수하지 못하는 것이자 가장 우수한 인재를 잃는다는 점에서 두 배의 손실이었다. 귀화는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유학은 가족 전통과 관계되어 있다. 부친이 유학하면 아들도 유학을 간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중국 문화에 대한 소속감은 멀어지고 3대째가 되면 귀화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린다.”
중국 학생들의 미국 유학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서 사회적으로 유학 교육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수신청부터 왕이쥐까지 근대 중국의 유학 교육은 단지 교육사의 주제를 넘어 중국 근대사 전체 맥락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중국 근대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적 맥락에서 미국 유학 교육이라는 문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유학한 중국 학생에 관한 연구에서 수신청·왕이쥐의 비판을 진지하고도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번안사학자들처럼 ‘애국-매판’ 또는 ‘전통-현대성’이라는 이원대립의 사고 틀에 갇히고 만다. 우리는 반드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즉 21세기의 시각으로 21세기의 문제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21세기의 언어와 개념으로 분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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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 2 – 동아시아 편

도서정보 : 괴담실록 | 2023-09-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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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괴담실록’이 들려주는
더 으스스하고 괴이하며 기묘한 이야기

한때 ‘빨간 마스크를 한 여자’에 대한 괴담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빨간 마스크를 한 여자가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 질문을 던지고 해코지한다고 알려져, 실제 등교 거부 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괴담으로 유명하다. 이 괴담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에 엄청나게 퍼졌고,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이다.

공포와 두려움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감정이라는 말이 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은 ‘이야기’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기록에서 기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튜브 채널 ‘괴담실록’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대표적인 채널로, 조선시대 괴담을 담은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에 이어 한·중·일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괴담을 엮은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 2》를 출간하였다.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괴담실록 2》는 한·중·일을 넘나드는 동아시아의 이야기로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옛사람들의 괴이한 이야기를 접하고, 은유와 암시에 가려진 그들의 두려움을 엿보며 상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중·일의 정서를 담은 괴담에 ‘괴담실록’만의 해석을 녹여 더욱 흥미롭게 엮었기에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를 단지 괴담이 아닌 옛사람들의 미지에 대한 고군분투이자 때론 희망과 지혜를 얻기 위한 유산으로 받아들인다면 더욱 매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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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6-안사의 난

도서정보 : 이중톈 | 2023-09-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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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안녹산과 황소가 칼날을 세우고
밤에는 이백과 두보가 노래를 읊은
피와 시의 시대

“초겨울에 열 고을 양갓집 자제들
죽은 피가 진도 못 속 물을 이뤘네
휑한 들판 맑은 하늘 싸우는 소리도 없는데
사만의 의로운 군사가 같은 날 죽었네”

중국 최고의 고전 해설가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16권. 이번 권에서 이중톈은 당나라 멸망의 진실을 파헤친다. 안사의 난은 한때 세계제국으로 군림했던 당나라가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시발점이다. 이민족 출신의 변방 장수였던 안녹산은 어떻게 이 거대한 제국에 균열을 냈고, 이 균열은 왜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이어졌을까? 당나라의 멸망은 양귀비의 뛰어난 미모 때문도, 환관의 폐해나 조정의 붕당, 군벌의 배신, 이민족의 침략 때문도 아니었다. 당나라는 스스로 무너졌다! 무덤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 것은 안녹산이었고 무덤을 판 것은 황소였지만 그 길을 걷고 관에 직접 못질을 한 것은 당나라 제국 자신이었다.

당 현종과 양귀비, 안녹산과 황소, 이백과 두보 등 당나라의 흥망을 함께한 다양한 인물 군상과 당나라를 둘러싸고 격동했던 세계정세가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당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황하만큼이나 길고 굽이진 중국사의 줄기를 경쾌하고 유려한 필치로 써내려온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16권. 이번 권에서는 당나라 몰락의 전초가 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한때 세계제국의 위용을 떨쳤던 당나라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걸었는지 서술한다. 이중톈이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써내려간 당나라 멸망사에는 황제와 재상, 환관, 신하, 장수, 비빈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이 중에는 당 현종과 양귀비 그리고 안사의 난의 주인공 안녹산처럼 역사에 이름을 새긴 쟁쟁한 인물도 있으며,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당나라가 한 발자국씩 차근차근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때에도 이 나라에는 명군과 훌륭한 재상, 어진 신하, 뛰어난 장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안사의 난 당시 재위에 있었던 당 현종은 무측천이 한 차례 흔들었던 당나라를 다시 굳건하게 다진 명군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명철했을 뿐 아니라 요숭과 송경 같은 명재상을 적재적시에 등용해 당나라의 재부흥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당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 사람을 후보로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을 때는 명군이었으나 집권 말기에 양귀비의 미모에 미혹되고 간신 이임보에게 놀아난 당 현종이 첫째 순위고, 그런 당 현종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군벌들의 난립을 조장한 이임보 또한 혐의를 비껴갈 수 없다. 안녹산은 당 현종 앞에서는 충성을 맹세하고 뒤로 돌아서는 칼을 꽂아 제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환관 구사량 등은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몰두해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지방의 군벌 이희열 등은 곳곳에서 제국에 반기를 들며 일어나 칭왕, 칭제하면서 당나라를 너덜너덜하게 찢어놓았고, 조정 신하 이덕유 등은 자기들끼리 패거리 짓기에 몰두하면서 나라의 힘을 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아랍 제국의 아바스 왕조는 당나라의 세력권을 침범해 들어오며 그 세계제국으로서의 위신을 크게 꺾었고, 마지막으로 황소는 이미 껍데기만 남은 당나라에 마지막 치명타를 날렸다.

다시 한번 묻자면, 그렇다면 누가 망국의 주범인가. 이중톈은 단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중톈이 분명히 하는 점은 당나라가 스스로 몰락했다는 것이다. 지리멸렬한 내분이 지속되는 가운데 당나라의 유수한 인재들은 허송세월하며 국력을 낭비했고, 분쟁에 휘말린 백성만이 도탄에 빠진 채 고통을 겪었다. 그 결과 “허약하고 쇠락한 왕조는 심지어 자기 무덤을 팔 힘도 없었고 외래 세력에 의지해 관뚜껑을 닫아야 했다”(192쪽).


당나라의 성쇠를 함께한
찬란한 문학사의 별―이백과 두보

‘당시(唐詩)’는 ‘당사(唐史)’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중톈은 당나라의 시로 당나라 역사 서술의 마침표를 찍는다. 당나라에서 시(詩)는 유독 비범한 의미를 가졌고, 시를 읊고 노래하는 것이 당나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이자 최신 유행, 아이덴티티였다. 당나라에서는 사대부 등 상류계급은 물론 저잣거리의 사람들, 화류계 여성까지 참여해 모두 시를 읊고, 듣고, 즐겼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아직까지도 한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두 인물 시성(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백은 구속받지 않는 당나라의 시대정신 그 자체였으며, 두보는 당나라가 가장하는 태평성대 아래 움트던 부패와 고통을 꿰뚫어본 시인 겸 역사가였다. 그래서 이백의 시는 유독 드높고 호방하며 즉흥적이고 자유로우며, 두보의 시에는 연민과 슬픔, 휴머니즘의 정서가 배어 있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 이후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위대했던 당나라의 기상은 이백과 두보 이외에도 왕유, 잠삼, 두목, 이상은 등 위대한 시인을 배출했으며 이들 모두의 시는 이백과 두보의 시가 그러했듯 그 자체로 당나라의 정신 혹은 역사가 되었다. 당나라는 쇠하여 사라졌으나 이들의 시는 여전히 별처럼 빛나며 그 시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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