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여행자들 2017

도서정보 : 탁양현 | 2018-07-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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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Nietzsche, 외줄 타는 배우와 화가 ▫ 9
2. 장자莊子, ‘하늘 연못’으로 아주 큰 새 날다 ▫ 21
3. 들뢰즈Deleuze, 差異와 反復 사이에서 ▫ 35
4. 노자老子, 스스로/저절로 그러하는 철학함의 자체 ▫ 47
5. 중론中論, 否定論理學의 極限 ▫ 57
6. 미셸 푸코Foucault, 狂氣와 感性의 시대 ▫ 65
7. 논어論語, ‘하늘 사람’의 철학 에세이 ▫ 73
8. 원효元曉, 그 새벽은 ▫ 81
9.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철학적 탐구의 완성 ▫ 85
10. 주역 易, 변화적 철학함 그 순간 ▫ 97
11. 보드리야르Baudrillard, 원본 없는 이미지들 ▫ 107
12. 이탁오 卓吾, ‘탁월한 나’는 비로소 철학을 알았다 ▫ 115
13. 데리다Derrida, 그 시절 그림 꽃 해체 ▫ 121
14. 왕필王弼, 注釋이라는 부질없는 창작 ▫ 129
15. 메를로-퐁티Merleau-Ponty, 虛靈한 現象의 知覺 ▫ 133
16. 중용中庸, 간혹 치우침 없음을 따라 ▫ 141
17. 바타이유Bataille, 에로티즘의 거친 逆說 ▫ 147
18. 최제우 水雲, 물과 구름의 혁명 ▫ 159
19. 법정法頂, 텅 빈 충만 ▫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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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와 사회사상

도서정보 : 손진태 | 2018-07-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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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는 이 종족적 군소국가로부터 점점 봉건적 귀족국가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발전된 것이 소위 춘추열국시대이며, 그 가장 활발하고 화려한 시대가 전국시대이었다.
맹자의 본질적 철학사상에 관해 간략히 기술한 것으로 정신적 이론가며 사상가인 그의 유가의 정치적 윤리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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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만큼 꽃은 피는가

도서정보 : 윤무중 | 2018-07-06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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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중>>
우리는 한평생 사는 동안 모든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된다면, 아마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실망하고 방황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많다. 그래서 실패한 삶, 재미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짜증스런 일들을 겪게 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가끔 이를 생각해 보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 알면서부터 왜 진작 시를 쓰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시를 쓰는 것도 어설프기만 하였다. 그러나 삶의 역경과 경험을 토대로 나름대로 느끼는 진실한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으니 더 좋지 않겠는가, 시는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순수한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과 함께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등, 모든 사물에 대한 생각을 시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한 일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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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심리학 (인스타라이브러리)

도서정보 : 김문성 | 2018-07-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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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가장 큰 호기심은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라도 알아내려고 하는데서 심리게임은 시작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맺고 온갖 감정을 겪는다. 가장 근원적인 부모 자식 관계부터 시작해 친구, 연인, 회사 동료, 고객, 상사, 부하 직원 등 여러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관계에서 자존감, 애정, 질투, 좌절, 망설임, 분노 등을 맛본다. 이러한 관계와 일련의 감정들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지, 또한 상대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향후 관계와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구매가격 : 7,920 원

욕망의 인간관계 (인스타라이브러리)

도서정보 : 김문성 | 2018-07-0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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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하는 말과 감동을 전하는 메시지에 힘이 없다면 상황을 원하는 대로 이끌 수 없다. 설득은 주도권을 가져오거나 유리한 상황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책은 사안의 중요함을 긴급성으로 바꾸어 설득하는 법, 공동의 적을 만들어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는 법, 상대를 유형별로 설득하는 법, 집단을 공략하기 위해 필요한 각 개인 설득법 등 설득의 메커니즘과 효과적인 설득법을 소개한다. 또한 상대도 나도 모두에게 좋은 것이 감동의 효과이다. 삶에 지쳤을 때 얻는 감동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생각한다면 감동의 중요성은 더욱 여실히 느껴질 것이다. 이 책에서는 상대방을 설득해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고 감동을 전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을 모색한다. 작은 행동에서부터 전하는 감동이 큰 반향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매가격 : 7,920 원

어떻게 일할 것인가

도서정보 : 아툴 가완디 | 2018-07-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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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다루는 것이 나의 일이라면, 얼마나 잘해야 충분한 것일까?”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자기 일을 대하는 최선의 태도를 묻다

“정답과 최선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괴리를 두려울 정도로 솔직하고 적확하게 써냈다.”
_남궁인(응급의학과 의사, 『만약은 없다』 저자)

의학계의 계관시인 올리버 색스를 잇는 작가로 평가받는 외과의 아툴 가완디는 그동안 네 권의 책을 출간했고, 네 권 모두 독자와 언론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첫 책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부터 『어떻게 일할 것인가』와 『체크! 체크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아툴 가완디는 한결같이 현대 의학의 성과와 한계를 성찰하고 더불어 의료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왔다. 2014년 출간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존엄한 죽음의 방식에 관한 화두를 던지며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독자에게 아툴 가완디의 이름을 각인했다.

『어떻게 일할 것인가』는 아툴 가완디가 자신의 업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더 나은 의료의 가능성을 찾아 헤맨 기록이다. 임상 외과의로서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풀어놓은 유려한 에세이인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탐구심의 소유자로서 의료 현장의 다양한 관점과 시도를 취재해 녹여낸 뛰어난 논픽션이기도 하다. 이라크 전장의 야전병원, 인도의 소아마비 소탕작전, 독극물 주사를 사용하는 사형집행장, 의료 소송이 벌어지는 법정, 제왕절개 수술이 한창인 분만실… 저자는 다양한 의료 현장의 이슈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해 성공과 실패의 사례와 그 안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이 책은 특히 무거운 위험과 책임이 뒤따르는 자신의 일에서 성과의 본질을 묻고,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맨 집요하고도 낙관적인 어느 직업인의 기록이다. 의료를 넘어 어느 분야에서건 새로운 선택과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 핵심이 되는 요소 세 가지-성실함, 올바름, 새로움-를 어떻게 구현해 나갈지 또한 탐구한다. 저자는 그 어느 것도 정답이라 말하지 않지만, 최고를 능가하는 최선이 있으며 그것에 이르는 길은 무궁무진하다는 메시지를 흡인력 강한 글 솜씨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구매가격 : 10,500 원

시경 국풍 번역

도서정보 : 탁양현 옮김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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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편. 나라의 풍류[국풍國風]

1장. ‘주’나라의 남쪽[주남周南] 17
1. 물새[관저關雎, 요조숙녀]
2. 칡덩굴[갈담葛覃, 후궁 사씨]
3. 도꼬마리[권이卷耳, 출세 못 한 자]
4. 굽은 나무[규목樛木, 즐거워하는 군자]
5. 메뚜기[종사螽斯, 수많은 자손]
6. 어린 복숭아[도요桃夭, 시집갈 처녀]
7. 토끼 그물[토저免罝, 용감한 무사]
8. 질경이[부이芣苢, 노동자]
9. 너른 ‘한수(漢水)’[한광漢廣, 놀러 나온 여자]
10. ‘여수(汝水)’의 제방[여분汝墳, 남편 없는 여자]
11. 기린의 발자국[린지지麟之趾, 출세한 자]

2장. ‘소’땅의 남쪽[소남召南] 31
1. 까치집[작소鵲巢, 시집올 새아씨]
2. 머위를 뜯네[채번采蘩, 말단 벼슬아치]
3. 풀벌레[초충草蟲, 님을 그리워하는 여자]
4. ‘네가래’를 뜯네[채빈采蘋, 제주가 된 아가씨]
5. 팥배나무[감당甘棠, 문왕의 아들 소백]
6. 이슬에 젖은 길[행로行露, 감옥에 갇힌 자]
7. 어린 양[고양羔羊, 말단 공무원]
8. 잦은 그 우레[은기뢰殷其靁, 남편 없는 여자]
9. 매실이 떨어지네[표유매摽有梅, 몸 파는 여자]
10. 작은 별[소성小星, 말단 벼슬아치]
11. 강에도 갈림길이 있다네[강유사江有汜, 시집간 아가 씨]
12. 들에서 죽은 노루[야유사균野有死麕, 아가씨와 선비]
13.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울까[하피농의何彼襛矣, 아름다 운 여자]
14. 기마병[추우騶虞, 사냥꾼]

3장. ‘패’나라의 풍류[패풍邶風] 47
1. 잣나무 배[백주柏舟, 출세 못 한 자]
2. 천민의 연녹색 저고리[녹의綠衣, 옛 연인을 그리워 하 는 자]
3. 제비들[燕燕, 연연이 시집가버린 자]
4. 해와 달[일월日月, 공부하는 선비]
5. 하루 종일 부는 바람[종풍終風, 고독한 자]
6. 북을 울리네[격고擊鼓, 직업군인]
7. 마파람[개풍凱風, 불효자]
8. 장끼[웅치雄雉, 남편 없는 여자]
9. 표주박에는 쓰디쓴 잎이 난다네[표유고엽匏有苦葉, 연 인을 기다리는 남자]
10. 계곡의 바람[곡풍谷風, 소박맞은 여자]
11. 쇠약해져 가는데[식미式微, 군주가 된 자]
12. 언덕[모구旄丘, 궁지에 몰린 군주]
13. 오만하구나[간혜簡兮, 서쪽 지방의 미인]
14. ‘천수’ 땅이 그리워[천수泉水, 후궁으로 팔려간 여자]
15. 북문을 나서며[북문北門, 고달픈 가장]
16. 북녘 바람[북풍北風, 여행자]
17. 청순한 아가씨[정녀靜女, 사랑에 빠진 남자]
18. 새로운 누대[신대新臺, 꼽추에게 시집간 여자]
19.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가네[이자승주二子乘舟, 님 그 리는 여자]

4장. ‘용’나라의 풍류[용풍鄘風] 71
1. 잣나무 배[백주柏舟, 미남자를 짝사랑하는 처녀]
2. 담장을 ‘남가새’ 풀이 덮었네[장유자牆有茨, 비밀스런 대화]
3. 남편과 백년해로[군자해로君子偕老, 아름다운 신부]
4. 뽕나무밭에서[상중桑中, 바람둥이와 세 여자]
5. 메추라기가 날아오르네[순지분분鶉之奔奔, 남편이 불 만스런 여자]
6. 북극성이 정중앙에 뜨면[정지방중定之方中, 성실하고 착한 부자]
7. 무지개[체동蝃蝀, 섹스를 밝히는 자]
8. 쥐를 보면[상서相鼠, 위엄과 절제와 예의가 없는 자]
9. 쇠꼬리 깃발[간모干旄, 미인에게 선물하는 자]
10. 말 달리며[재치載馳, 임신 못 하는 여자]

5장. ‘위’나라의 풍류[위풍衛風] 85
1. ‘기수’ 강물의 벼랑 끝[기오淇奧, 미남자에게 반한 여자]
2. 은거할 집[고반考槃, 은둔자]
3. 덕 있는 여자[석인碩人, 집안 좋은 여자]
4. 얼굴도 모르는[맹氓, 버림받은 여자]
5. 대나무 낚싯대[죽간竹竿, 시집간 여자]
6. 박주가리[환난芄蘭, 뿔송곳을 허리에 찬 소년]
7. ‘황하’가 넓다고 하는데[하광河廣, 여행자]
8. 남편에게[백혜伯兮,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자]
9. 여우가 걸어가네[유호有狐, 가난한 아내의 근심]
10. 모과[모과木瓜, 말단 벼슬아치]

6장. ‘왕’의 풍류[왕풍王風] 101
1. 찰기장이 늘어지고[서리黍離, 근심하는 자]
2. 부역을 나간 남편[군자우역君子于役,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
3. 남편은 의기양양하게[군자양양君子陽陽, 남편을 자랑 하는 여자]
4. 흐르는 물[양지수揚之水, 변방의 직업군인]
5. 골짜기의 ‘익모초’[중곡유퇴中谷有蓷, 남편과 이별한 여자]
6. 토끼의 여유로움[토원兎爰, 인생이라는 고통]
7. 칡덩굴[갈류葛藟, 입양된 아이]
8. 칡을 캐러 가네[채갈采葛, 나물 캐는 여자]
9. ‘대부’의 수레[대거大車, 첩으로 팔려간 여자]

7장. ‘정’나라의 풍류[정풍鄭風] 115
1. 검은 먹물 옷[치의緇衣, 살림하는 여자]
2. 둘째 아들에게[장중자將仲子, 연애하는 여자]
3. 아저씨가 밭에 나가니[숙우전叔于田, 아저씨를 짝사랑 하는 처녀]
4. ‘대숙’이 사냥을 나가니[대숙우전大叔于田, 사냥하는 남자]
5. ‘청읍’ 사람[청인淸人, 직업군인]
6. 염소가죽 옷[고구羔裘, 고급관리]
7. 큰 길에 나서네[준대로遵大路, 옛 인연을 그리워하는 여자]
8. 아내가 닭이 울었다고 말하네[여왈계명女曰雞鳴, 금슬 좋은 부부]
9. 아가씨와 함께 수레에 오르니[유녀동거有女同車, 아름 다운 ‘강씨’네 큰 딸]
10. 산에는 ‘부소’나무가 자라네[산유부소山有扶蘇, 재수 없는 여자]
11. 말라서 떨어지는[탁혜蘀兮, ‘백이’와 ‘숙제’]
12. 교활한 아이[교동狡童, 계모와 아이]
13. 치마를 걷고서[건상褰裳, 짝사랑하는 여자]
14. 풍채 좋은[봉丰, 잘생긴 사내]
15. 동문 밖 집터[동문지선東門之墠, 외로운 여자]
16. 비바람[풍우風雨, 님을 만나 여자]
17. 그대의 옷깃[자금子衿, 님을 그리워하는 여자]
18. 느릿하게 흐르는 물[양지수揚之水, 두 형제]
19. 동문을 나서니[출기동문出其東門, 눈이 높은 남자]
20. 들판의 덩굴풀[야유만초野有蔓草, 아름다운 미인]
21. ‘진수’와 ‘유수’[진유溱洧, 연애하는 남녀]

8장. ‘제’나라의 풍류[제풍齊風] 139
1. 닭이 우네[계명雞鳴, 벼슬아치]
2. 날렵함[환還, 사냥하는 사내들]
3. 기다림[저著, 연인들]
4. 동녘의 태양[동방지일東方之日, 연인의 밀회]
5. 동녘은 아직 밝지 않았네[동방미명東方未明, 말단 공 무원]
6. 남쪽 산[남산南山, 인간의 욕망]
7. 넓은 밭[보전甫田, 노처녀]
8. 사냥개 방울[노령盧令, 사냥개와 주인]
9. 낡은 그물[폐구敝笱, ‘제’나라 여자]
10. 수레를 운전하네[재구載驅, ‘제’나라 사람]
11. 성대함이여[의차猗嗟, ‘제’나라의 영웅]

9장. ‘위’나라의 풍류[위풍魏風] 153
1. 칡 신발[갈구葛屨, 연인을 걱정하는 여자]
2. ‘분수’의 제방[분저汾沮, 아름다운 여자]
3. 정원에 열린 복숭아[원유도園有桃, 자유로운 선비]
4. 민둥산에 올라[척호陟岵, 부역에 끌려간 자]
5. 작은 밭[십무지간十畝之間, 가난한 자의 여유로움]
6. 박달나무를 베어서[벌단伐檀, 먹고사는 일]
7. 큰 쥐[석서碩鼠, 고통스런 현실]

10장. ‘당’나라의 풍류[당풍唐風] 163
1. 귀뚜라미[실솔蟋蟀, 어진 선비]
2. 산에는 우나무가 있네[산유우山有樞, 삶을 즐기지 못 하는 자]
3. 느릿하게 강물이 흐르고[양지수揚之水, 버림받은 여 자]
4. 산초나무[초료椒聊, 덕 있는 자]
5. 꼼꼼히 준비하다[주무綢繆, 미인을 만난 남자]
6. 우뚝 선 팥배나무[체두杕杜, 고아]
7. 염소가죽 옷[고구羔裘, 연인을 그리워하는 자]
8. 능에[보우鴇羽, 부역에 끌려간 자]
9. 옷이 없겠는가[무의無衣, 벼슬아치]
10. 우뚝 선 팥배나무[유체지두有杕之杜]
11. 칡넝쿨[갈생葛生,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
12. 복령을 캐네[채령采苓, 소문은 믿을 수 없다]

11장. ‘진’나라의 풍류[진풍秦風] 179
1. 수레가 가네[거린車鄰, 지금 즐기지 않는다면]
2. 4필의 말[사철駟驖, 사냥하는 풍경]
3. 전쟁용 수레[소융小戎, 님을 그리워하는 여자]
4. 무성한 갈대[겸가蒹葭, 강을 건너며]
5. ‘종남산’에서[종남終南,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며]
6. 꾀꼬리[황조黃鳥, 임금과 함께 죽은 자들]
7. 쏙독새[신풍晨風, 님을 만나지 못 한 여자]
8. 옷이 없더라도[무의無衣, 직업군인]
9. ‘위수’의 남쪽[위양渭陽, 외삼촌을 배웅하며]
10. 처음에는[권여權輿, 처음과 달라진 대우]

12장. ‘진’나라의 풍류[진풍陳風] 193
1. ‘완구’ 언덕[완구宛丘]
2. 동문 밖 느릅나무[동문지분東門之枌, 춤추는 여자]
3. 초라한 집[형문衡門, 은둔자]
4. 동문 밖 연못[동문지지東門之池, 아름다운 ‘숙희’]
5. 동문 밖 버드나무[동문지양東門之楊, 만나자는 약속]
6. 무덤 문[묘문墓門, 불량한 남편]
7. 제방의 까치 둥지[방유작소防有鵲巢, 누가 내 님을 속이는 가]
8. 달이 뜨네[월출月出, 고뇌하는 자]
9. ‘주’ 지역의 숲[주림株林, ‘하남’을 쫓아가다]
10. 연못의 제방[택피澤陂, 미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

13장. ‘회’나라의 풍류[회풍檜風] 205
1. 염소가죽 옷[고구羔裘, 나태한 벼슬아치]
2. 흰 관[소관素冠, 장례식장에서]
3. 진펄의 가시나무[습유장초隰有萇楚, 홀로 사는 즐거움]
4. 바람 불어서가 아니네[비풍匪風, 고향을 그리워하는 여자]

14장. ‘조’나라의 풍류[조풍曹風] 211
1. 하루살이[부유蜉蝣, 마음의 근심]
2. 심부름꾼[후인候人, 벼락출세를 한 자]
3. 뻐꾸기[시구鳲鳩, 어진 군자]
4. 샘물이 흘러내려[하천下泉, 백성을 위로한 왕]

15장. ‘빈’나라의 풍류[빈풍豳風] 217
1. 만수무강을 빌며[칠월七月, 농사의 노래]
2. 올빼미[치효鴟鴞,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
3. 동쪽 산[동산東山, 재혼한 남자]
4. 부서진 도끼[파부破斧, ‘주공’의 정벌]
5. 도끼자루를 베려면[벌가伐柯, 장가드는 방법]
6. 작은 그물[구역九罭, 돌아오지 않을 자]
7. 늙은 이리가 넘어지네[랑발狼跋, 흠 없는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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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1

도서정보 : 박지원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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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 : 연암 박지원의 중국 여행기 1






왜 살아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회한에 빠져드는 것일까? 왜들 그렇게 설움에 북받쳐 눈물을 쏟아낼 만큼 한스러워 하는 것일까?

필자 역시 어느 정도 살아내고 보니, 그런 마음이 대체로 공감이 된다. 인생이란 제아무리 노력을 하며 최선을 다하더라도 결국은 후회될 따름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인생을 그나마 의미 있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로서는 그런 것이야말로, 응당 여행이라고 판단한다.
‘연암’도 적잖은 나이에 중국 땅을 처음 여행하면서, 그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적어도 여행을 하면, 회한의 분량은 적잖이 줄어들게 된다.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체험하다 보면, 시나브로 그런 다양한 삶에 내재된 고통과 회한이 유사하다는 판단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은, 삶의 황혼에 가까울 무렵이면 너무도 많은 추억을 제공해 준다.
흔히들 나이 들수록 남는 것은 추억뿐이라는 말들을 한다. 맞는 말이다. 분명, 별달리 추억할 게 없는 인생인 탓에 아쉬운 회한에 젖게 되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수십 년을 살아냈지만 마땅히 회상되는 추억이 별로 없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그러할 때 가장 인상 깊은 추억을 남겨주는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이다.
여행을 나서는 순간에 일상의 시공간으로부터 일탈적 탈주가 시작된다. 그리고 지금껏 전혀 접하지 않았던 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니 그 기억은 당최 잊히기 어려운 것이다.

굳이 자본주의나 시장경제 따위의 논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존재의 삶은 하나의 소모품으로서 소모되어 가는 과정임이 자명하다. 그래서 어떻게 소모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야말로, 삶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이나 동물을 막론하고서,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소모되는 부모의 모습은 얼마나 숭고한가. 공동체나 역사를 위해 소모되는 모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소모될 수 있을 때에, 인간존재는 자기의 삶에 대해 적잖은 만족을 갖게 되며, 설령 한갓 소모품에 불과한 삶일지라도, 극단적인 회한으로 내몰리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필자로서는 그러한 삶의 행태로서 가장 그럴 듯한 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여행하면서, 여행자로서 살아내는 삶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소모이며, 가장 의미 있는 소모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 이외에도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소모는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박지원’이 살아낸 조선왕조 시대는 무려 5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를 가질 수 있는데, 필자로서는 단 하나의 유일한 왕조가 장기간 지속될수록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정체되고 부패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런 사회에 소속된 서민대중들은 더욱 큰 고통 속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라고 판단된다.
예컨대,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경우도 그러하다. 단 하나의 유일한 신을 신봉하는 거대종교의 폭압은 얼마나 잔혹한가. 그러한 종교적 방식의 교리는 대체로 철저하게 편향된 이데올로기이기 십상이다.

나아가 조선왕조 시대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때문에 양반사대부의 혈통을 지니지 못 한 자는, 애당초 그 신분적 한계 탓에 아주 많은 것들을 천부적으로 제약당해야만 했다.
물론 21세기라고 해서, 시쳇말로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는’ 부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왕조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다.
왕정(王政)이라는 체제가 철저한 ‘1인 독재’나 ‘계층 독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왕권의 유지를 위해서 단 한 순간도 극악한 경계의 끈을 결코 늦추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가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라고 해야 마땅할 듯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선조들의 역사를 죄다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며,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대의 민주정(民主政)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필자로서는, 유년기와 청년기의 군부독재의 기억만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서민대중에게 고통을 유발하는가를 여실히 체험했던 탓에, 하물며 왕정에 의한 독재의 시대를 살아내야만 한다면,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그저 끔찍할 따름이다.
게다가 조선왕조가 통치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성군(聖君)에 의해 통치되는 군자(君子)들의 주자학적 이상사회를 실현하지는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제를 억지스레 5백년이나 지속하였다면, 도대체 얼마나 극단적인 방편을 동원했던 것인지를 상상해 보면, 그저 아찔할 따름이다.

여하튼, 그러한 시대에 ‘박지원’은 여행을 나선 것이다. 때문에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독자로서는, 다소 낯선 묘사들이 곧잘 등장한다.
예컨대, 아주 원초적인 스포츠로서의 육상이나 수영 등을 보는 소박한 역동성을 느끼도록 한다.
인류의 문명이 복잡화되고 고도화되면서 스포츠 역시 자연스레 그러한 시류를 좇게 마련이다. 그래서 현대에 이를수록, 축구나 야구의 경우처럼 아주 복잡한 룰에 따르며 많은 장비를 요구하는 스포츠가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인간존재들의 사유방식이 고대에 비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많은 이들의 주장처럼, 무작정 발전이라는 개념으로서 규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현대적인 스포츠로서 기계식 엔진에 의존하는 스포츠나, 급기야는 컴퓨터에 의해 사이버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스포츠까지 등장하는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일수록 ‘연암’의 여행기처럼 소박한 감성을 내포한 글을 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연암’은 결코 시대정신으로부터 탈주를 시도한 지식인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자기에게 부여된 시대를 살아내는 자로서 부득이하며 마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나마 ‘연암’은, 분명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적인 지식인이었다.
온갖 기술문명적인 방편으로써 치장한 현대적인 스포츠들의 경우처럼 이러저러한 측면들이, 21세기를 살아내는 필자로서, ‘연암’보다는 다소 나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기묘한 충족감을 갖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암’의 시대에 비해서 현대사회 자체가 특별히 나아졌다는 생각은 별반 들지 않는다.
한 시대는, 다만 그 시대의 몫일뿐이다. 그러니 인간존재는 그 시대 안에서 최선을 다 해야 할 따름이다. 애당초 인간존재로서 자기가 살아낼 시대를 선택할 수 있는 방편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신라의 승려 ‘혜초(慧超: 704~787)’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여행에 대한 체험을 ‘루스티첼로(Rustichello)’가 듣고서 기록한 ‘세계에 대한 기록(Divisament dou Monde)’, 즉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은 널리 아주 알려진 여행기들이다.
‘열하일기’ 역시 그런 여행기들에 비해 빼어난 수작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여러 이유로 그 실제적인 내용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한자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 대중들로 하여금 큰 거리감을 주는 것으로 판단되며, 기존의 희소한 번역서들이 한문 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한 점을 감안하여, 보다 현대적인 어투로서 번역하는 일이 의미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필자가 직접 ‘열하일기’ 루트를 답사하여서 21세기 식의 새로운 여행기를 기술한다거나, 역사적 맥락을 좇아 좀 더 이른 시기로 치올라서, 조선 전기 ‘최부(崔溥: 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을 새로이 번역해서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생각도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아무런, 별다른 기약도 없다.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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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2

도서정보 : 박지원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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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 : 연암 박지원의 중국 여행기 2





21세기 현재의 ‘지금 여기’에서, ‘연암’과 같은 시각으로서 중국 땅을 살필 수 있는 방편은 아무래도 없을 듯하다.
우선, ‘연암’의 시각은 철저히 몸의 체험에 의하고 있다. 예컨대, ‘연암’은 직접 말을 타고서 여정을 꾸렸다. 나아가 하인이나 마부들은 제 발로 걸어서 그 여정을 소화해 냈다.
그런데 현재에 이르러 도보로서 ‘열하일기’의 여정을 답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며, 또한 굳이 그러한 방식으로 여행하려는 자도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비행기를 타고 ‘심양’이나 ‘대련’쯤으로 가서, 줄곧 자동차쯤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북경’이나 ‘천진’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여정을 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연암’과 현대인의 시각차를 엿보이는 사실만은 아니다. 모름지기 문명의 변화는, 그 시대를 살아내는 인간존재들의 마음까지도 결정지어버리기 십상이다.
따라서 자동차나 비행기가 상용화된 시대를 살아내는 자는, 결코 말이나 수레가 상용화되던 시대를 살아내던 자의 감성에 접근할 수는 없다. 물론 굳이 그러해야 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걷거나 말이나 수레를 타고서 그 땅의 풍취를 온 몸으로 체감하는 여행과, 깔끔하고 세련된 현대식 이동수단 속에 몸을 감추고서 바깥의 대지와 차단된 채로 행해지는 여행은, 분명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열하일기’와 ‘표해록’의 번역을 계획하면서, ‘타이베이’, ‘하노이’, ‘교토’ 등을 다녀왔다. 이는 모두 위의 원전들과 다소 연관이 있는 지역들이며, 번역작업에 보다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그 여정들은 참으로 고독했고 지극히 여유로웠으며, 그럼으로써 ‘박지원’이나 ‘최부’의 감성에 좀 더 접근해보고자 했다.
이제 ‘열하일기’의 번역을 실제로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열하일기’의 루트를 직접 여행해 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아마도 ‘열하일기’의 번역이 진행되는 동안,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중국의 동북지역을 수차례에 걸쳐 여행하게 될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다시 여행을 나설 생각을 하면, 이내 설렌다. 하지만 그 설렘은 한없이 고독하며 지극히 여유로운 설렘이다. 고독하면서 여유롭다니. 이는 아주 현묘(玄妙)한 감정상태임이 자명하다. 여행길을 나서지 않는다면, 당최 체험할 수 없는 현묘함인 것이다.
그러한 현묘함으로서, ‘열하일기’를 번역하는 동안 필자는 늘 그 여행길에 있다. 얼굴 한 번 본적 없으며, 말 한 마디 나눈 적 없는 ‘연암’과 동행하며, 항상 그 여행길에 있다.

인간존재의 삶이란 다만 ‘지금 여기’의 상황일 따름이다. 물론 분명히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나 미래는, 죄다 ‘지금 여기’의 현재에 포괄될 따름이다. 실상 어떠한 경우에도, 과거나 미래는 단지 인간존재의 인식 안에서만 작동하는 하나의 개념이거나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존재는 모름지기 항상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야만 한다. 과거라는 것의 누적된 결과로서 현재가 작동하는 것이며, 그러한 현재가 누적되어 미래가 작동할 것이다. 그런데 미래는 하나의 예측일 따름이며, 결코 실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예컨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인간존재의 현재가 제아무리 미래에 근접하더라도, 그 미래는 이미 현재보다는 나중일 것이므로, 결국 그 미래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는 결코 궤변이 아니다.
더욱이 여기서 ‘웜-홀’이라거나 ‘다중 우주론’ 따위를 논변코자 함이 아니므로, 우리는 어쨌거나 인간존재로서 ‘지금 여기’의 현재에 집중하면 된다. 그렇게 현재의 ‘지금 여기’의 상황에 가장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집중하는 방편 중 대표적인 것이라면, 아무래도 여행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흔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여행을 미룬다. 그러한 핑계들은 나름대로 타당한 사유를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돈을 벌어야 한다거나, 자식을 양육해야 한다거나, 건강에 적잖은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데 그러한 핑계를 앞세우다 보면 결국 여행길은 나설 수 없는 법이며, 그렇게 하루하루 쫓기며 살아내다 보면, 시나브로 늙음과 죽음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여행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여행의 자리에 꿈이나 이상이나 목표 따위를 대체해도 무방하며, 그 외에 또 다른 실천적 가치 개념을 대입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만약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고 하자. 그런데 그 고백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결국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사랑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혹여 ‘이심전심(以心傳心)’이나 ‘심심상인(心心相印)’쯤을 말하고자 한다면, 다만 그런 말들은 당최 이러한 상황에 걸맞은 표현이 아니라고만 말해 두고 싶다.
인간존재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어떠한 실현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충분한 심사숙고가 선행되어야 함은 실로 자명한 노릇이다.
어쨌거나 어떤 방식의 여행이 모범답안일 수는 없다. 게다가 21세기에 굳이 ‘연암’의 방식을 좇아 걷거나 말을 탄다고 해서, 그 당시를 체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역사나 문화를 살필 때에는, 반드시 부득이하거나 불가피한 시공간적 차이에 대한 인식과 배려가 반드시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다만 ‘연암’의 시대가 나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21세기가 그 시대에 비해서 나은 것도 없다. 인간존재라면 누구라도 부득이하게 자기의 시대적 상황 안에서 살아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상황을 억지로 벗어날 수 있는 방편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하일기’의 ‘속재필담’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나오는 학문이니, 지금 향교나 서당에서, 그저 글을 읽기에만 힘쓸 뿐, 그 의미를 강론하지는 않으므로, 귀로는 똑똑히 들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아득하기만 한 것입니다.[是所謂口耳之學, 現今黌塾之間, 慣是念書, 不曾講義, 故耳聞了了, 目視茫茫.]
그러니 입으로는 제자백가의 이론이 모두 술술 풀려 나오더라도, 손으로 글을 지어내려면 한 글자도 어려운 것입니다.[口宣則百家洋洋, 手寫則一字戛戛.]”

무릇 대부분의 학문 활동은 귀로 듣는 것이 주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입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열하일기’에 따르면, 그러한 과정은 눈의 활동과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학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나 입에만 치우치지 않는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귀와 입과 눈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체험을 통해서라야만 한다. 그러한 체험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말하라면, 필자는 응당 여행을 말할 것이다.
여행이야말로 귀와 입과 눈이 동시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나아가 몸과 마음이 유기적이며 종합적으로 작동해야만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같은 곳에는 이러한 기술도 있다.

“귀에는 ‘대유산(大酉山)’과 ‘소유산(小酉山)’이라는 ‘이유’의 동굴 속에 천권의 책을 간직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눈으로는 ‘고무래 정’자도 보지 못 한답니다.[耳藏二酉, 眼無一丁.]
하늘에 글 모르는 신선은 없으며, 속세에는 말 잘하는 앵무새가 있는 법이지요.[天上無不識字神仙, 世間還有能言之鸚鵡.]”

제아무리 많은 책을 간직하고서 그것을 독서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학문이 될 수 없다. 그저 독서하거나 암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위는 한갓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부를 했으며, 공부를 하고 있다면, 쉴 새 없이 지어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듯한 작품을 지어낼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지어내는 연습을 결코 멈추지 않을 때, 그 학문은 제대로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늦은 나이에 전문적인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지어내는 연습을 결코 쉬지 않고 있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앵무새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무리 소질을 지녔더라도, 처음부터 걸작이나 명작을 지어낼 수는 없는 법이다. ‘플라톤’의 발언처럼, 반드시 ‘미메시스(mimesis: 模倣)’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인간존재가 지닌 본래성이다.
그런 탓에 필자의 작품들이 간혹, 다소 기존의 작품을 흉내 낼 경우, 아주 별스런 비난을 해대는 자들을 본다. 그런데 그런 자들의 저작을 찾아보려고 하면, 지어낸 것이 거의 없다. 자기는 전혀 지어내지 못 하면서, 다른 이의 저작에는 온갖 험담을 해대는 것이다.
그러한 비난이 혹여 어떤 개인적인 반감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공부를 하려는 자라면, 그러한 비난을 일삼기보다는 스스로 지어내는 일에 매진하려는 마음이 요구된다.

예컨대, 필자는 대학원에 재학하는 동안, 그러한 캐릭터의 족속들을 참 많이 보았다. 그곳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려는 마음보다는, 잠시 허울 좋은 대학원이라는 시공간에서 삶의 고통을 피해보려는 자들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자들치고 그럴 듯한 소논문 한 편 스스로 지어내는 자를 보지 못 했다. 그러면서 관점이 바뀌었다느니, 아직은 시기상조라느니, 갖은 핑계로 너스레를 떤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자들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제 명의로 된 텍스트는 결국 지어내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자들 대부분은, 자기의 작품을 고뇌하며 지어내야 할 시간에, 무리지어 다니면서 이런저런 소문을 곱씹는 것으로 소일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자기의 관점이 생성될 수 있겠는가. 아니 한낱 앵무새 역할이라도 해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필자는, 대학원 시절에 참으로 많은 공부를 하였다지만, 늘 어쩌다가 내가 그런 곳에 머물게 되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제 그곳을 떠나 이렇게 내 삶의 여행길에 있으니, 더없이 홀가분하다.

‘열하일기’의 시절은 말할 나위 없으며, 이는 지극히 고대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직접 저작이 없다.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가 모두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경지가 손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저 그렇다는 얘기다.
그만큼 자기의 작품을 스스로 지어내는 일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공부하려는 자라면, 어떻게든 자기의 작품을 스스로 지어내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릴없는 무작자(無作者)들의 경우라면, 어떻게든 자기의 작품을 지어내는 자들의 노력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시간에, 자잘한 습작이라도 지어내 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공부다운 공부일 것이다.
나아가 무언가를 흉내 내는 앵무새의 수준에라도 이르려고 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수년을 대학원에 재학하고서도 소논문 한 편 지어내지 못 한다면, 도대체 어느 누가 그러한 행위를 학문이라고 판단하겠는가.

그리고 7월 15일의 여정에서는, ‘중국’의 산하를 본 ‘조선인’들의 반응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벼슬이 높은 자들은 섭섭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바꾸면서, 쉬이 이렇게 말한다.[上士則愀然變色, 易容而言曰.]
“도무지 볼 것이 없더군.[都無可觀.]”
그래서 왜 아무런 볼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何謂都無可觀, 曰.]
“황제가 머리를 깎았고, 장수와 재상과 대신들 모두가 머리를 깎았으며, 선비와 서민들까지도 모두 머리를 깎았다.[皇帝也薙髮, 將相大臣百執事也薙髮, 士庶人也薙髮.]
비록 그 공덕이 ‘은나라’나 ‘주나라’와 같고, 그 부강함이 ‘진나라’나 ‘한나라’를 넘어선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아직껏 머리를 깎은 천자는 없었다.[雖功德侔殷周, 富强邁秦漢, 自生民以來, 未有薙髮之天子也.]
또한 비록 ‘육롱기’나 ‘이광지’의 학문이 있고, ‘위희’나 ‘왕완’이나 ‘왕사진’의 문장이 있고, ‘고염무’나 ‘주이준’의 박식함이 있다고 한들, 한번 머리를 깎으면 곧 ‘되놈’이고, ‘되놈’이면 곧 개나 양 같은 짐승이니, 우리가 그런 짐승들에게서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雖有陸隴其李光地之學問, 魏禧汪琬王士徵之文章, 顧炎武朱彛尊之博識, 一薙髮則胡虜也, 胡虜則犬羊也, 吾於犬羊也何觀焉.]”
그러면서 이것이야말로 곧 으뜸가는 의리라고 주장하므로, 이야기하는 자도 잠잠하고, 듣는 자도 옷깃을 여민다.[此乃第一等義理也, 談者默然, 四座肅穆.]

이는 특히 벼슬이 다소 높은 자들의 반응인데, 그저 ‘청나라인’들의 변발 풍습을 무작정 억지스럽게 비하하는 발언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논리는 참으로 천박하다. 머리를 깎으면 무조건 ‘되놈[胡虜]’이고, ‘되놈’이면 무작정 짐승이라는 것이다.
필자도 여러 해 전, 최상위의 교육기관에 부속된 어느 연구소에 재직하는 동안, 이와 동일한 용어로써 교묘히 필자의 주장을 비난하는 논문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논문을 기술한 저자는 필자와 일면식은커녕 이름조차도 알지 못 하는 자였으며, 지금 역시도 그 이름 따위는 기억되지 않는다. 때문에 당시 필자로서는 당최 그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당시 여러 이유로 은둔 중이던 필자의 행동에 대한 온갖 소문들이 유발했던, 무조건적인 집단적 반감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쯤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그저 자기의 비위를 건드렸으며, 그러니 ‘되놈’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필자 역시, 그러한 짓을 하는 논문의 저자를 그저 한갓 ‘되놈’보다도 못 한 놈이라고만 치부해버렸으며,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 저자의 논문이 학술지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니, 그 저자의 죽음 이후에도 그 기록은 남겨질 것이다.
다만 그 비난의 대상이 왜 ‘되놈’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대학원의 연구소나 학계를 떠나버렸으며, 오래지 않아 필자의 기억에서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므로, 사실대로 밝혀지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듯하다. 이에,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이 지니는 부득이한 편면성을 늘 유념해야 한다는 생각도 아울러 되새기게 된다.

‘열하일기’의 한 대목을 번역하면서, 왜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연암’의 시대나 21세기나, 나름대로 학식이나 지위를 지녔다는 자들의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쉬이 부화뇌동하는 작태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후문에 의하면, 그 자가 ‘중국’의 어느 명문대학에서 수학하였다고 하니, 필자로서는 그 기억이 더욱 허망하게만 여겨진다. 고작 시류를 좇아 이득이 될 만 한 일이라면, 그것이 한갓 소문에 불과할지라도 핏발을 세우며 무작정 비난하고 보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렵사리 공부한 결과인 것일까?
현재에 이르도록 필자의 주장들이 다소 파격적이고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와 유사한 부류들은 여전히 익명의 무리를 지어 온갖 수단으로써 그러한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21세기의 ‘한국인’들이 ‘조선인’들의 후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같은 곳에서 ‘연암’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나와 같은 하류의 선비들은, ‘장자(莊子)’처럼 ‘중국’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다고 말하며, 또한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余下士也, 曰壯觀在瓦礫, 曰壯觀在糞壤.]”

어쩌면 이것이, 정작 ‘연암’이 시대 안에서 외치고 싶었던 참소리일 것이다. 물론 ‘연암’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의한다고 할 수 있는 측면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청나라’에서일망정 배울 것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기와 조각이나 똥 부스러기에 불과하더라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쉬이 주장하기 어려운 지극히 실용주의적이며 실리주의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연암’은,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 ‘장자’의 ‘지북유(知北遊)’편을 인용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지극히 비판적인 사유방식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모름지기 ‘한나라’ 독존유술(獨存儒術)의 전통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를 가장 잘 신봉한 국가공동체가 바로 ‘조선’이다. 그럼에도 ‘연암’은 보란 듯이 ‘장자’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처럼 악독한 것이 있을까. 그런데 또한 사람의 마음처럼 선량한 것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총욕약경(寵辱若驚)’을 말했던 것이다. ‘총욕약경’은 사랑받거나 모욕당하거나 죄다 놀란 듯이 반응하라는 뜻이다.
인간존재는 쉬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상대에 대해서는 호의를 갖으며, 자기를 모욕하는 상대에게는 악의를 갖는다. 이는 비단 인간존재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온갖 만물이 지닌 일종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차원의 보편성일 따름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좋아하고, 자기에게 해악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일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지라도, 그것이 무조건 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아가 적어도 인간존재로서 동물의 차원을 극복하였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응당 이득이 되거나 해악이 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에 필자로서는, 그렇게 ‘총욕약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행이 배려하는 고독과 여유가 참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필자는 늘, 풍족한 관광이 아닌 긴박한 여행을 다니는 탓에, 그 과정은 실로 쪼들리며 고달프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나선 여행은, 아주 고독하며 또한 아주 묘하게도 한없이 여유롭다.

여하튼, 학문이 귀와 입과 눈과, 나아가 몸과 마음의 동시적인 작용으로서 작동했을 때, 그것은 참된 학문일 수 있다.
예컨대, 동시대를 살아내는 인간존재일지라도, 그의 공부가 참되지 못 하다면, 그 결과는 국가나 민족은 물론이며, 인류의 거대한 고통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한 예로서, ‘최제우(崔濟愚: 1824~1864)’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경우를 거론할 수 있다. 거의 동시대를 살아낸 두 사람은, 모두 시대의 거대한 사상가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된 공부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최제우’는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儒彿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을 종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는데, 기본적으로 동학은 서학(西學)에 저항하기 위해 태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후대 ‘최시형’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시천(人是天)’이나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그리고 ‘손병희’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런데 ‘요시다 쇼인’은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존왕파(尊王派)로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인 사상가이다. 그는 ‘유수록(幽囚錄)’을 저술하여서 정한론(征韓論)이나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등을 주창하였는데, 그것은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주장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홋카이도’의 개척, ‘오키나와’의 일본 영토화, ‘조선’의 식민지화, ‘만주’, ‘타이완’, ‘필리핀’ 등의 점령을 주장하였고, 현재에 이르도록 일본 우익의 교조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동시대에 노도처럼 밀려드는 서양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생존하기 위하여 고뇌했던 두 사상가는, 많은 차이를 지닌 사상적 결과물을 생산한 것이다.
‘최제우’의 사상은 그 토대를 하늘이라는 천지자연에 둠으로써, 민족이나 국가는 물론이며, 나아가 항상 인류 그 자체와 우주까지도 사려(思慮)한다. 그런데 ‘요시다 쇼인’의 철저히 일본이라는 국가에만 몰두하며, 그 국가공동체를 위해 주변의 국가공동체들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 점령하고자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과거에 전쟁에 미쳐 날뛰던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에 의한 인류의 고통은 말할 나위 없으며, 그것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면서, 그들의 자리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대체되었다. 현실세계의 서민대중으로서는, 단지 그 대체세력들이 과거의 전쟁광(戰爭狂)들처럼 미쳐 날뛰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나마 다소 안도할 따름이다.
현대의 ‘대한민국’은 우선 ‘미국’과 ‘중국’이라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익을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한 민족이면서도 분단되어 있는 ‘북한’의 문제도 있다. 게다가 여전히 과거 전쟁광의 시대를 은밀히 회고하는 ‘일본’도 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라도, 부득이하게 생존해야만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삶이며,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삶이다. 그러한 삶의 지향을 모색할 때, 지난날 시대로부터 앞서 간 사유방식을 지니고서 살아낸 한 여행자의 삶은, 현대의 우리에게 적잖은 지침이 되어준다.
어쨌거나 기껏해야 몇 십 년을 살아내는 인간존재로서, 아주 다양한 삶의 체험을 갖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한 번 몸과 마음에 익숙해져버린 것들을 변화시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더욱이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굳이 그러한 변화를 추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삶이 머뭇거릴 때, 여행은 새로운 열정을 유발시켜 준다는 사실만큼은 인식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열하일기’를 독서해 보면 익히 알 수 있겠지만, ‘연암’ 역시도 필자와 유사한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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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3

도서정보 : 박지원 지음(탁양현 옮김) | 2018-06-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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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 : 연암 박지원의 중국 여행기 3





모름지기,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문체계는 과학이다. 그러다보니 어떠한 학문일지라도, 결코 과학적인 사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문학 역시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 고유의 특성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해서도 안 된다. 다만, 무작정 인문학의 고유성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인 사유방식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어떠한 가치부여에도 초연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가치중립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과학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 그것은 대체로 가장 합리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판단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이러한 과학의 특성을 닮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과학과 동일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더라도 가치중립성은 어떠한 학문이든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지향점인 것으로 여겨진다.
삶의 과정 안에서, 인간존재라면 누구라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언행하게 된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대목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이 육체가 지닌 본래성이지만, 그것은 어떤 정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팔이 안으로만 굽은 상태에서 정지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일종의 장애이며, 온전한 팔의 작용을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는 없다. 어쨌거나 안으로 굽는 팔은, 이미 바깥으로 펴질 것을 동시적으로 예상하고서 작동하는 것이, 몸의 본래성이다. 나아가 그런 것이 곧 ‘천지자연의 자연스러움[無爲自然]’이기도 하다.

그러한 자연스러움 안에서, 한 가지쯤의 일을 평생 동안 줄곧 해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내 새로운 일을 찾아 다양한 삶을 꾸려내는 사람도 있다. 어떠한 삶의 방식이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삶의 모양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라면, 필자는 후자에 속하는 부류다. 어릴 적부터 필자는 늘 새로운 일을 찾아나서는 타입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비슷한 연배에 비한다면, 아주 다양한 삶의 체험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시나브로 여행자의 삶을 살게 되어버린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정도 여행하는 삶이 익숙해진 이후에는, 이제 굳이 목적지마저도 정하지 않는다. 실로 떠도는 나그네로서의 여행방식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누군가 이끌어주는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철저히 홀로 떠도는 홀가분한 여행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것이 여행자의 본색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어차피 인생은 홀로 가는 여행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느 시대든, 상대적으로 소유하지 못 한 자들의 삶은 버겁기 마련이다. 그것은 첨단의 21세기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필자의 생활 역시, 사회적으로 최하층인 계층에 소속되어서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가난의 상황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마치 살얼음판을 건너는 것과 같을 수밖에 없다. 어제도 그러하고, 오늘도 그러하며, 내일도 그러할 듯하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에 내던져진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필자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여행이다.
그러한 삶의 여정 중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숱한 체험을 한다. 오늘도 아주 많은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는 늘 적잖은 선택의 순간에 세워진다. 그런데 그 선택은 늘 생존을 지향한다. 그것이 인간존재로서 죽음의 순간까지 지닐 수밖에 없는 본성의 명령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매순간의 선택이라는 근심을 해소해 가는 일, 아마도 그런 것이 인생이리라.

흔히 여행자의 삶을 유목민의 삶에 빗대며,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하기도 한다. 실로 유목민의 삶은, 그 자체가 여행이며 이동이므로 마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은 철저히 생존을 위해 이동하는 것이며, 여행자처럼 노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유목민의 이동’과 ‘여행자의 노닒’이라는 차이를 인식할 필요는 있다. 곧, ‘생존을 위한 이동’과 ‘노닒을 위한 이동’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차이는 ‘열하일기’ 안에서도 쉬이 드러난다.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유목민의 경우처럼 생존이나 생계를 위해 이동하는 부류다.
마부나 하인들의 경우는 물론이며, 사신 일행에 벼슬아치로서 참여한 자들 역시 그러하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에게 부여된 업무이며, 그러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암’의 경우는 다르다. ‘연암’은 굳이 그 여정에 참여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물론 그것이 양반사대부로서의 특권을 지닌 자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함은 분명하지만, 양반사대부라고 해서 죄다 ‘연암’과 같은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연암’이 지닌 여행자로서의 기질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런 탓에, 필자는 노니는 자로서의 ‘연암’의 미학적인 삶에 대한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미학적인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다분히 예술가적인 기질을 생래적으로 지닌 자들이다. ‘연암’ 역시 그러하다고 판단된다.

지금 가만히 회상해 보면 필자의 지난 삶은, 그 과정이 자의반타의반이었을망정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학문적 활동을 할 만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30대 초반에서야 어렵사리 대학원에 진학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공부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대학원에서의 체험이 필자의 여행자로서의 삶을 이끈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석사와 박사과정 동안 늘 연구의 주제가 되었던 ‘장자미학(莊子美學)’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자철학’이 논변하는 ‘소요유(逍遙遊)’야말로 두 말할 나위 없는 여행자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매순간 배회하며 고뇌하는 존재다. 그래서 여행자에게는 유별난 과거도 없고, 별다른 미래도 없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여행자로서 노닐 따름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를 노닐며 살아 낸다는 것은, 곧 ‘장자’가 논변하는 ‘소요유’와 다름 아니다.

또한 여행자의 노닒으로서의 여행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지극히 상식적인 여론을 좇는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예컨대, 예로부터 민의(民意)를 외면하면서 지속될 수 있었던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흔히 권력이라고 하면, 아주 거창한 정치학적 개념쯤을 상상하지만, 굳이 권력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의 현실세계에서 각 인간존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자격이나 역량 그 자체가 곧 권력이다. 그러니 필자의 삶 역시, 늘 권력 그 자체의 유지이며 지속이었을 따름이다. 그러한 권력 안에서 살아냄에 있어, 주변의 여론을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이다.
예컨대, 이렇게 자연스런 권력의 지속을 가장 선명하게 천명한 철학자가 바로 ‘노자(老子)’다. ‘노자’의 철학사상을 대변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야말로, 민의를 거슬러 억지로 하지 않으며, 다만 천지자연의 자연스런 흐름을 좇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물며 ‘노자’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필자로서, 억지스런 삶을 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름지기 민의나 여론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지각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될 뿐이다.
때문에 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삶의 상황 안에서 아주 민감하게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죄다 깨어 있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렇더라도 필자로서는 나름의 최선을 다 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늘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이 무언가를 고심한다. 그리고 그것은 늘 주변인들의 여론에 적극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고심이다. 그렇게 고심이 거듭되다가, 필자는 늘 동일한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바로 여행길이다.

필자의 판단으로서는, 주변의 여론을 거스르지 않으며, 타자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일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십 수 년 동안이나 여행을 지속하고 있다. 그렇게 여행길을 계획하거나, 여행길에 나설 때면, 여행은 늘 필자로 하여금, 주변인들의 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사려토록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늘 죄스런 마음이 앞선다.
물론, 필자가 어떤 특별한 범죄행위를 자행해서가 아니다. 그저 천지자연과 인류의 자연스런 배려를 인식하지 못 하고서, 잠시잠깐 이기적이거나 극단적인 외곬의 마음을 지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세계의 인간은, 어쨌거나 홀로이면서도 결코 홀로일 수 없는 탓에, 항상 ‘이중적 동시성’을 사려해야만 하는 존재인 탓이다.
역사 안에서 민의의 여론을 거스르는 경우, 그 결말은 늘 비극적이기 마련이었다. 이를 잘 아는 필자로서, 여하튼 여론을 거스르는 언행을 자행할 순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것이 지금껏 노장(老莊)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한 필자로서는, 비록 필자가 한없이 가난하고 더없이 고독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죽음의 순간까지 어겨서는 안 될 신념이라고 판단한다. 그러한 인식마저도 지니지 못 한다면, 지난 시절의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필자보다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렸던 ‘연암’의 삶을 회고하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고단함을 잠시 잊어볼 따름이다.

필자는 ‘열하일기’를 번역하면서, 아주 재미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연암’의 학문 수준이,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중국인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별반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분명히 ‘연암’은 조선인이다. 그리고 한자는 분명히 ‘중국’의 문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의 한자 실력은 물론이며, ‘중국’의 학문에 대한 이해 역시 여느 중국인을 능가하고 있다.
비록 한자가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문자로서 사용되고 있다지만, 어쨌거나 중국인들에게는 모국어이고, 우리 민족에게는 외국어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의 이해가 가능할 텐데, 필자로서는 외국의 문자를 현지인들보다 더 능란하게 사용하는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 어쩌면 참으로 지독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조선인’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세기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문자인 한글이 그나마 대접을 받았던 시대인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지금의 21세기는, 말할 나위 없이 또 다시 영어라는 외국어가 득세하는 시절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한글이 세계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지 못 하는 한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도 여전히 한자로 된 선조의 텍스트를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작업이 다소 씁쓸함을 갖도록 한다.
다만 필자의 작업은, 한자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한글을 위한 작업임을 밝혀두고 싶다. 필자로 하여금, 동양학을 공부하는 동안 늘 불만 섞인 한숨이 새어나오도록 했던 일은, 기존의 번역서들 대부분이 한글을 위한 번역이 아니라 한자를 위한 번역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정작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한자 투인 탓에 당최 알 수 없는 문장들이 허다했다. 때문에 그런 것을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따라서 앞으로도, 필자의 번역작업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 아주 결정적인 기회인데도 결국 그 기회를 점수로 만들어 내지 못 하거나, 설상가상으로 병살타를 쳐버리는 선수들이 있다. 그럴 때면, 관중들 대부분은 그 선수를 비난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선수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어쨌거나 정작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득점타를 치고 싶은, 가장 강렬한 열망을 지닌 사람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바로 그 선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은 비단 프로야구 경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삶을 살아내는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늘 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면서 자기의 삶을 꾸리기 마련이다.
다만 그러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하고, 때론 당최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는 탓에, 결국 일정한 성취에 이르지 못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의 노력 자체가 문제될 일은 아니다.
예컨대, ‘지금 여기’에서 생계를 꾸려내고 있는 거의 모든 서민대중들은,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치열할 만큼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실세계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은, 저 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이 천지자연 안에서, 공짜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필자의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든 해코지를 하려는 자들이 적잖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며, 일면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필자의 텍스트들을 검색하고서는 무작정 해코지를 해대니, 당최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그러려니 할 따름이다. 아마도 필자가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기로 결정하고서,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면서부터는, 늘 그러했던 것 같다.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일들이, 결코 제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며,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쩌다가 필자의 언행이 몇몇의 비위를 건드린 모양이지만, 그렇더라도 필자로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편이 없으며, 굳이 반응할 까닭도 없다. 필자의 삶이 그런 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런 자들 대부분은, 인터넷 바다의 허망하고 천박한 일군의 누리꾼들처럼, 어떠한 빌미로든 꺼리를 만들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지 않은가.
그런 자들의 면면이 다소 추측되기는 하지만, 그저 그럴 시간에 제 나름의 삶의 공부에 진력하라는 당부쯤을 해볼 수 있을 뿐, 필자로서는 그들의 삶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없으며, 실상 관심을 가질만한 자격 또한 없다.
다만, 당장이라도 그 악연의 끈을 홀가분하게 싹둑 잘라버리고 싶지만, 살아내는 동안이라면 그런 자들과 부득이하게 얽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존재의 삶에 내재된 본래적인 업(karma)일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그러한 업은 인간존재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테지만, 실천적 현실주의자인 필자로서는 그러한 이론을 그다지 수긍하진 않는다.

어느 뇌 과학자는, 아주 고도의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그 순간이 곧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아주 고도로 발달되어서,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어떤 지능적 존재가 탄생된다면, 이내 이 지구별 안에서 인간존재가 설 자리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최초에 지구별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점유하기 시작한 계기라면, 흔히 언어나 도구의 사용을 거론한다. 맞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인류는 의식적인 노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노동의 결과로서, 21세기에 이르도록 대단한 인류의 문명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러한 노동을 대체하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주 속편한 누군가는, 그렇게 인공지능존재에게 노동의 영역을 전가시키고서, 인류는 더욱 고상하고 아름다운 작업을 수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정도의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들에 의해 인류의 노동에 대한 대체는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공상과학영화의 흔한 스토리처럼, 그런 인공지능 기계들은 결국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고서는, 어쩌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될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실상 이 천지자연은 인류에게 별다른 애정을 갖지 않는다. ‘노자’의 주장처럼, ‘천지자연은 결코 인자하지 않은 존재[天地不仁]’일 따름인 것이다.
인류가 제아무리 어떤 신적인 존재적 이미지를 창조하여서, 억지로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강변하더라도, 그런 것은 결국 지극히 인간 중심주의적인 주장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실상 지극히 수더분한 상식에 의하더라도, 도대체 하늘이나 땅이 무슨 까닭으로, 아주 특별히 인간만을 사랑한단 말인가. 이야말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유아적(幼兒的/唯我的) 착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필자 역시 인간인 까닭에, 이 천지자연이 지구별 안에서 가장 특별한 역량을 지닌 인간존재만을 각별히 사랑해 주기를 바라며, 이러한 바람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그저 인간존재만의 바람일 따름이다. 제아무리 인류가 억지를 부려도, 천지자연은 늘 그러하게 만물을 대할 따름이다. 그래서 천지자연은 굳이 인자한 척 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사랑하고 저것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이것을 선택하고 저것을 버리는 법도 없다. 그런 것이 천지자연의 실상 그 자체인 것이다.

필자로서는, 굳이 천지자연에게 사랑을 애걸하지 않을 만큼 홀가분해 질 수 있을 때, 인공지능의 고도화에 대한 문제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간존재의 지능적인 마음이, 천지자연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마음으로 제작하는 인공지능 역시 그러한 마음을 닮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인류가, 인류의 멸망 이전에 그러한 마음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 실현여부는 불투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인류의 마음이 본연의 본래성으로 회귀된 상태를,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천명했다.
‘무위자연’은 말 그대로, 어떠한 억지스러움도 없는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러할 때, 현대의 인류가 불안해하는 미래적 재앙은 다소나마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무위자연’의 상태에 다가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론으로서, 필자는 여행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여행은, 홀로인 서로들이 동시적 이중성의 시공간 안에서 복합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하는 여행일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으로서는 쉬이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 지구별의 모든 것들이 죄다 파괴되는 미래를 이미 예견하면서도, 망연히 손 놓고 있다거나, 지난 역사 동안 지나치게 일그러져버린 온갖 가치체계들이 무조건 옳다며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필자로서는, 인류의 미래가 그다지 희망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군의 페미니스트나 니힐리스트들의 주장처럼, 그저 암담하기만 한 것으로 판단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늘 어떤 사이[間]에나 머무는 존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열하일기’ ‘일신수필’의 ‘장대기’에서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대개 ‘장대’에 오를 때에는, 그저 앞만 보고서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가므로, 그 위험함을 알지 못 하다가, 내려오려고 눈을 한번 들어 밑을 내려다보면,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게 되니, 그 허물은 죄다 눈에 있는 것이다.[蓋上臺時, 拾級而登, 故不知其危, 欲還下則一擧目而臨不測, 所以生眩, 其崇在目也.]
벼슬살이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에는, 한 계단의 절반이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두려운 나머지, 간혹 남을 밀어젖히면서까지 앞서려고 다툰다.[仕宦者, 亦若是也, 方其推遷也, 一階半級, 恐後於人, 或擠排爭先.]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及致身崇高, 懾心孤危.]
하지만 이미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進無一步, 退有千仞, 望絶攀援, 欲下不能.]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서 모두 그러하다.[千古皆然.]”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서, 높이 오른 자들은 불안한 법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떠한 짓을 자행했으며, 자기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 역시,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짓이라도 자행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을 강점하고서 수십 년간 높은 지위에 군림하던 ‘일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선인’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항세력은 물론이며, 일반 백성들이나 심지어 ‘일제’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던 친일파에 대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응당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판단을 해볼 수 있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니 항상 불안했을 것이므로, 설령 그가 친일파일지라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잘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 뻗고 자기 위해, 맞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굳이 때릴 일도 아닐 것이다. 정신적인 장애로 인해 극단적인 폭력성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남을 때리는 일이 어찌 맘 편한 일이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늘 되풀이되곤 했다. 다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역사적으로 ‘중국’은 늘 선진국이며 강대국의 지위에 있었고, ‘한국’이나 ‘일본’은 후진국이며 약소국의 지위에 있었다. 더욱이 ‘일본’은 항상 ‘한국’보다도 뒤처지는 입장이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게 있어, ‘중국’은 천자의 나라라고 하여 받들어 섬기는 사대(事大)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은 왜구(倭寇)쯤으로 불리며 오랑캐 중에서도 오랑캐인 족속으로 비하되었다.
그러던 상황이 근대에 이르며 서구 제국주의와 얽히면서 반전되었고, 그래서 ‘한국’은 물론이며 ‘중국’도 침략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양차대전이 끝난 후, 패망했던 ‘일본’은 이내 경제대국이 되었고, ‘남한’ 역시 경제부국이 되었다. 이제는 ‘중국’도 예전의 영화를 되찾으려고 하는 시절이다.

여하튼, 전통적으로 ‘중국’은 늘 ‘때리는 놈’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게 크게 한 방 맞고 말았다. 크게 한 방을 휘두른 후, ‘일본’은 이제 어떻게든 ‘때리는 놈’의 지위에 있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맞는 놈’의 지위에만 있으며, 어쨌거나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따름이다.
이러한 국가 간의 역학관계는 개인들의 관계에서도 별반 다를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때리는 놈’과 ‘맞는 놈’이라는 두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혹 ‘노니는 놈’도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말할 나위 없이 대표적인 ‘노니는 놈’이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출생 이후 줄곧 ‘때리는 놈’과 ‘맞는 놈’밖에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식으로 훈육 받는다. 그런데 오롯한 필자의 체험에 따른다면, ‘노니는 놈’으로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으며, 그 삶이 다른 놈들에 비해서 더욱 충만하며 행복할 수 있다고도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세 부류 이외에도, 어떤 놈이든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놈으로서 주변인들에게 해코지 않으며 살아내고 있다면, 또한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연암’의 여정을 좇아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며칠 동안 소나기가 마음을 심란케 하더니, 오늘은 모처럼 맑게 개었다. 말 그대로 가을 초입의 하늘이다. 파란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여행길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당분간은 꼼짝없이 매인 몸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여비도 마련되어야 한다. 제아무리 필자의 여행길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능하다고 한들, 대부분 타국 땅에서의 여행인 탓에, 그 최소한의 비용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는 모양이다. 지금으로서는 ‘열하일기’의 번역을 마치고서, 조속한 시일 내에 직접 그 루트를 답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21세기 방식으로 새로이 기록될 것이다. 그야말로 ‘21세기 열하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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