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시대의 문화인류학, 제4판

도서정보 : Barbara Miller | 2019-09-10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이 책은 세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융합과 문화다양성 그리고 인간적 삶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또한 인류의 문화적 삶의 다양한 형태와 그 저변에서 작동하고 있는 인간적 삶의 보편성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게 함으로써 보다 지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문화인류학 입문서로서 이 책은 세계 여러 문화에 대한 풍부하고 흥미로운 정보들을 제공하고 비판적인 사고력과 사색적인 학습을 고취한다. 이 책은 총 13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존의 인류학적 사례, 용어 정의, 질문, 글상자와 더불어 제4판에서는 새로운 글상자와 사진, 최신의 사례, 지도, 통계자료들이 추가되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타문화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문화적 삶을 성찰하며 인류학과 일상적인 삶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에 보다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글로벌시대와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걸맞은 문화적 감수성과 지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8,900 원

백범의 길 하

도서정보 : 심지연, 김주용, 리셴즈, 은정태, 이신철, 푸더민 | 2019-08-3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광활한 중국 대륙에 퍼진 김구의 굳센 기개
오직 독립만을 위한 임시정부의 험난한 노정




201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가 생생하게 전하는 임시정부의 항일 루트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혹독한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만큼은 명확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몸으로 임시정부와 동지들의 안전을 살피고, 한국광복군 창설과 통합 정부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구와 독립을 꿈꾸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선열들의 행적을 좇았다. 일본군의 공습과 폭격으로 천신만고의 피란길을 헤쳐 나간 임시정부 대가족들의 행로를 찾아내어 그대로 체험코자 했다.
-「발간사」 에서







◎ 도서 소개

2019년 6월 26일 김구 서거 70주기
길고 험난했던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한·중 역사 전문가가 꼼꼼하게 되밟다

1919년 3일 1일. 전국에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퍼져 나간 이후,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하와이로 투쟁의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굳센 항일 정신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함께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해외 독립 투쟁 여정은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한커우, 창사, 광저우, 우저우, 구이핑, 류저우, 이산, 우산, 구이양, 치장, 충칭을 거쳐 시안으로,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펼친 정치·외교 활동과 일제의 공습을 피해 최대한 몸을 숨기며 생활을 했던 고난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 11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리고 가족들의 발자취를 샅샅이 더듬어 그들이 걸어간 항일 노정을 되밟았다. 그 길은 비록 꽃길이기보다는 진창길이었지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 가족들의 항일 정신과 독립을 향한 투지는 한결같이 드높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하권에서는 우한에서 시안으로, 그리고 다시 상하이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치 활동과 피난 생활의 흔적을 따라가며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고 변했으며 또 사라졌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수많은 자료와 회고록, 여러 전문가·관계자·현지인 인터뷰를 통해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묻혔던 것은 들춰내고, 새로운 것은 보태”며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을 기리려 했다.

중국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한 독립 투쟁
쓰라린 아픔이 깃든 피난의 길을 따라가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하권은 우한, 창사, 구이핑, 류저우, 충칭, 시안에 남아 있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되밟는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해 국민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우한에서 항전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난징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우한으로 이동했다. 우한은 1938년 5월 7일 3당 통합 회의 도중 김구가 이운한에게 피격당한 사건인 ‘남목청(난무팅)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며, 윤봉길 의거 이후 군대를 양성해 항일 투쟁의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던 김구의 계획으로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가 세워지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약 반년 동안 곡물 가격이 싸고 한국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고 있는 창사에 머물기도 했다.
1938년 7월 19일,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200여 명은 창사를 떠나 또다시 피난길에 오른다. 3일 동안 기차를 타고 광저우로 갔다가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포산으로 옮겨 갔다. 광저우는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데, 쑨원의 도시로 신해혁명이 시작된 곳이며, 신규식이 1921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겸 외부총장의 자격으로 쑨원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얻어낸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의 결과로 중산대학과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졌는데, 혁명적인 대학과 현대식 군관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중국 거주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광저우로 모여들게 되어 한국 독립운동과 더욱 긴밀히 연결되었다.
포산에서의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이 광둥성에 상륙하면서 임시정부 가족은 짐을 꾸려 싼수이에서 류저우로, 다시 충칭으로 가게 된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근교 공동묘지의 방공호로 피신하거나 위펑산 동굴에 들어가 공습을 피하는 위험천만한 생활이 이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민족진영 3당 청년들이 통합을 모색하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는 등 항일 의지를 다져 나가기도 했다. 김구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중국정부의 지원을 얻어, 투차오에 임시정부청사와 한인촌을 꾸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하고 한국광복군을 성립해 정식 군대를 꾸려 충칭과 시안에서 훈련을 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항복 의사가 전해지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는 환국을 준비한다.

한중 우호와 연대를 기념하는 장소들의 기록
김구의 중국 활동 내용을 더해 연보 보강

충칭은 1940년 4월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근거지였던 데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보존되어 있어 해마다 많은 한인들이 찾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마저 없었다면 중국 중서부 대륙에서 한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표지판도 기념석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중한호조사, 한국광복궁 전진사령부 기지, OSS훈련지 등 역사적인 한중 우호와 국제 연대를 엿볼 수 있는 장소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알아보고 책에 담으려 노력했다. 또한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에 실린 연보에서 중국에서의 활동상을 보강하여 더 충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는 기획에서 출간까지 꼬박 2년이 걸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한국과 중국의 학자와 전문가 11명이 권역별로 답사를 하고, 연구하고, 취재했으며,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서로 내용을 체크하여 오류가 없도록 하는 데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애쓴 흔적들을 꼼꼼히 담아 독자들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찾아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기획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조직된 ‘고 백범김구선생국민장위원회’의 위원장 오세창, 부위원장 김규식, 조완구, 이범석, 김창숙, 조소앙, 최동오, 명제세 등의 위원을 중심으로 1949년 8월 6일에 창립한 협회이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전시와 교육, 역사 자료 수집과 편찬 등 의미 있는 기획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 책 속에서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시작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그 당시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각 단체들 사이에 연합전선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형성되었다. 그중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은 무장 부대 조직과 대일 항전 참여를 목표로 하였다. 조선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양군관학교 싱쯔분교 졸업생들이 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장 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규모상의 문제로 무장 부대를 ‘군’보다는 ‘대’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우한·창사-우한 국민정부청사 p. 15



포산에서 임정 가족들의 생활은 그동안 누려 왔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국이라고는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일자리가 있어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끼니 걱정은 그럭저럭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산에서는 일자리를 전혀 구할 수 없었다. 수입이 없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늘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나마 임시정부가 가족 수에 맞춰 생활비를 나누어 주었기에 간신히 기본적인 생계는 이어 갈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언제 또다시 피난을 가야 할지 몰라 늘 짐을 쌀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이러한 불안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는데,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일본군이 10월 초 광둥성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광저우 함락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더 이상 포산에 머무를 수 없어, 임시정부는 짐을 꾸려 일단 싼수이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정정화는 당시의 상황을 『장강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광저우·포산-포산 임시정부 가족 거주지 p. 100



구이핑을 거쳐 류저우에 온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모두 120명 정도였다. 각종 기록에 나오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의 거주지는 장시후이관, 징시로 10호, 타이핑시가 18호, 칭윈로 109호, 그리고 랴오레이공관,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기념관이 위치한 러췬서 등등이었다. 초기부터 분산 수용되었고, 류저우를 떠날 때까지도 변화는 없었다. 류저우에는 잠시 동안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 4월에 충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교통편이 그때서야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즉, 류저우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인 판공처를 설치해 운영했다기보다는 조만간의 이동에 대비해 잠시 대기하던 곳이라 하겠다.

구이핑·류저우-류저우 임시정부기념관 p. 129



김효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기와집 주변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 모두들 이곳에 텃밭을 일구어 그동안 중국 땅에서 누려 보지 못했던 농촌의 전원생활을 누렸다 한다. 윤봉길이 의거를 감행한 후 임시정부는 8년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치장에 머물던 일 년 반 동안에도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들은 일본군의 대공습에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는데, 그나마 이곳 투차오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당시 김효숙은 어린아이들을 한데 모아 한국어와 한글, 동요 등을 가르쳤다. 임시정부 직원의 부인이나 모친들도 허투루 나날을 보내지 않고, ‘한국여성혁명동맹’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한인촌이 있던 산비탈 아래에는 둥칸폭포가 있었다. 폭포수는 비교적 맑고 깨끗하여 그 물이 흘러 화시허를 이루었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화시허의 물을 길어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김자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신체가 강건했던 김신은 매번 투차오에 올 때마다 물 긷는 일을 도왔다 한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종종 화시허에서 잡은 물고기로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고, 더운 여름날이면 이곳에서 수영도 즐겼다.

충칭·시안-충칭, 투차오와 허상산 pp. 150-151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 중화민국 항전4 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에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 영수 장개석 원수의 한국 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국가의 해방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자 왜적에 대한 무장투쟁의 준비는 그의 도덕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발표된 「한국광복군선언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성립된 이후 정식 군대를 조직한 것에 대한 감격과 중국과의 공동 항전을 천명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해방과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항전할 것임을 대내외에 선전한 것이다. 이 선언문의 발표는 한국광복군 창설의 복잡다단한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용대가 1938년 10월 우한에서 창설된 이후 경쟁적인 관계가 고착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라는 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을 완성해야 할 임시정부로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고 결국 한국광복군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충칭·시안-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pp. 172-173



한국광복군은 다양한 계기와 조건 속에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과정 속에서 확대되었다. 초창기에는 30여 명 인원에 장교급 인사만 참여하여 ‘사병들은 거의 없는 군대’였다. 그러나 차츰 초모 활동과 한청반 훈련 과정에 성과를 드러내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통합되면서 큰 규모로 확장되었고, 다시 충칭의 조선의용대와 합쳐졌다. 그러나 중국 측의 지휘 통제 요구로 한국광복군은 다시 재편되었고 시안 소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충칭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전진사령부로서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충칭·시안-한국광복군 전진사령부 기지 p. 197



학도병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이 이들의 존재에 착안하여 대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안을 구상했는데, 이를 위해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중심이 되어 한인지하공작원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작전을 마련했다. OSS는 한국광복군이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출신이 다수라는 사실에서 한반도 침투 임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임시정부도 OSS훈련을 받은 한국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국내 침투 공작을 전개하는 것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1945년 4월 15일 한국광복군 사령부와 주중국 미군 사이에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광복군을 대상으로 3개월간 비밀 훈련을 실시하고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미군의 상륙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미군은 인적이 드문 시안 교외의 미퉈구쓰라는 절 뒤편에 있는 산악 지대를 한국광복군의 훈련지로 택해 5월부터 훈련을 실시했다.

충칭·시안-OSS훈련지 미퉈구쓰 p. 203

구매가격 : 20,000 원

이이화의 명승열전

도서정보 : 이이화 | 2019-08-3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삶을 산 17명의 승려
신간 『명승열전』에서 저자는 그의 시선을 한국불교사 속 인물을 향해 돌려 열일곱 명의 승려를 오늘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는 시대정신에 투철했고, 불교적으로는 중생 제도의 신념에 충실했다. 지은이는 이러한 승려들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어쩌면 이 책이 내세울 개성이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승려는 모두 열일곱 명. 이 가운데는 우리 불교계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도 있고, 승려이지만 잘 조명되지 않았던 방외(方外)의 인물도 있다.
저자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선정된 이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승과 속의 경계를 허물고 번뇌 가득한 세간에 뛰어든 승려이다. 그리하여 당대의 현실 문제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몸소 실천하려 했다. 또한 전쟁이나 귀족의 횡포 등에 신음하는 민중을 위한 주의?주장을 펴기도 했으며, 사회 개혁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한국불교사’
그동안 우리 불교사의 ‘위대한’ 승려를 다룬 책은 당대는 물론 다음 세대에 의해 ‘고승(高僧)’이라 불리는 인물을 조명한 예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그들의 행보, 그들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들은 그들의 사상적 바탕에서 기술된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이 책은 불교라는 종교적이거나 사상적인 측면을 기반으로 한 도서라 보긴 힘들다. 오히려 역사교양서로서 한국불교사, 넓게는 한국사에서 주목해야 할 승려의 행적을 전하고 재평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물론 ‘화쟁(和諍)’과 같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상적 맥락에 관해선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것의 드러냄이 이 책의 궁극적 목표는 아닌 것이다.
저자가 고백한바, 자신은 ‘불교사상사의 지식이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밝힌 것이라기보다 승려를 대상으로 한 다른 시각의 역사적 해설을 진행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더욱이 ‘이야기체 역사서의 시초’,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조금은 낯선 이 열일곱 명의 승려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기록상 남겨진 그들의 행보와 그들이 남긴 문집, 그들과 관련된 민간 설화와 현대 자료 등의 전 방위적 검토에 더불어 저자의 확고한 역사관을 통해 해당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귀한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한국불교 대표 고승,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그들 생애의 찰나
- 원효(元曉), 의상(義湘), 의천(義天), 보조(普照), 일연(一然), 무학(無學), 경허(鏡虛)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승려 일부는 불자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위인으로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인 기행(奇行)은 물론 그들의 한계까지 서슴없이 기술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끝에 도달한 저자의 평가가 기존의 긍정적인 데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도 이러한 방식은 신선하다. 한편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그들이 어떠한 실천적 면모를 보였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그들의 현실적 행보가 보인 한계에 대해 논하기도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시대의 영웅, 선방(禪房)을 박차고 나서다
- 서산(西山), 사명(四溟), 백용성(白龍城), 송만공(宋滿空), 한용운(韓龍雲)
저자가 소개하는 열일곱 명의 승려 중에는 우리 역사 속 암흑기라 일컬어지는 시기에 선방을 박차고 나와 동분서주했던 영웅적 인물도 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의 혼란한 가운데 현실로 뛰어들어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고자 창과 칼을 든 서산(휴정)과 사명(유정),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독립의 목소리를 한껏 높였던 백용성, 송만공, 한용운도 이 책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저자는 승려로서뿐만 아니라 현실 구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정치가로서, 그리고 시대의 짐을 짊어지고 고뇌하던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함께 살피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케 한다.
비록 이들의 행적이 계율을 어기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위기의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은 그들의 행적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특히나 2019년 삼일운동 100주기를 맞이하며 이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지금 그들의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국불교사의 방외(方外) 인물
- 도선(道詵), 묘청(妙淸), 변조(遍照), 설잠(雪岑), 천호(淺湖)
이 책을 특징짓는 지점에는 또한 다섯 승려가 있다. 도선, 묘청, 변조, 설잠, 천호가 그들이다. 이들은 우리 불교계에서 조명한 경우가 드물거나 없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승가에 귀의한 승려였다는 점, 그리고 우리 역사의 문제적 인물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도선의 경우 그 행적이 미묘하지만 그가 제창한 풍수지리설, 비보설 등은 신라 말기 혼란한 시기에 고려 건국이라는 개혁의 정당성을 부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에 대한 『고려사』 등의 기록이 고려 건국 세력이 지어낸 허구일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말이다. 한편 김시습이란 속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설잠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승려가 되었다. 그의 생은 기행의 연속이었지만 지조 있는 삶을 살았고, 자신의 절개와 애민정신이 투영된 많은 시편을 남기기도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인물은 묘청, 변조(신돈), 그리고 천호(이동인)이다. 신채호는 자신의 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서경천도운동을 벌인 묘청을 자주진보파 승려로 평가한 바 있다. 한편 변조는 양민과 천민들 사이에서 성인이라 불렸으며, 고려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정치적 행보를 늦추지 않았다. 천호의 경우 조선의 근대화에 관심을 두어 왕실과 일부 귀족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을 넘나든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 세 승려는 역사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이야기되거나 그에 관한 흔적이 미미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관련된 기록과 자료를 통해 이들의 행적을 재구성한다. 그 가운데 저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만 또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도 한다. ‘당신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이다.

구매가격 : 12,600 원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1년

도서정보 : 이한우 | 2019-08-2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출판사 서평

난세를 치세로 바꾼 18년의 역사,
그 치열한 기록이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형제들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 조선의 설계자라 평가받는 정도전을 죽인 ‘냉혈한’… 그에 대한 이해는 즉위 이전의 비정한 면모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자취를 좇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저자는 최근 역사 저술가로서 매진하며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밝혀줄 고전 번역에 힘쓰고 있다.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인 『대학연의』를 비롯해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사서삼경’ 등을 번역해온 저자의 시선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로 이동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집필했다. 이러한 행보에서 나아가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종실록』을 번역한 이유는 그만큼 태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주는 군주인 까닭이다.



나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방대한 실록 번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왕이 되기까지 냉혹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상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 전략을 펼치고 관제개혁에 힘쓰는 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태종에 집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곳곳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밑바탕이 된 민본정치의 기조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예리한 시각으로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며 태종의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세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태종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우리 역사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군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올바른 번역, 치밀한 해석, 섬세한 역주…
우리에겐 친절한 실록 완역본이 필요하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실록 원문의 편년체 서술을 따라 1년 단위로 책을 구성하여 재위기간 18년의 기록을 18권의 책으로 엮는 방대한 시리즈이다. 실록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 번역 과정을 친절하게 담았고,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ㆍ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기존 번역물의 오류를 바로잡고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냈다. 번역본과 함께 한문 원문을 책에 실었고, 독자들에게 한문 읽기의 묘미를 전하고자 ‘원문 읽기를 위한 도움말’을 통해 저자만의 번역 노하우를 소개한다.



기존의 공식 번역은 한자어가 너무 많고 문투도 낡았다. 게다가 역주가 거의 없어 불친절하다. 전문가도 주(註)가 없으면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실록이다. 특히 실록의 뛰어난 문체가 기존 번역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_본문 중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논문 표절과 무단인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저자는 최근 연구부정행위검증 민간기관인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실시한 논문표절 예비검증에서 모범 사례로 꼽혔다. 특히 인용문 번역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번역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결과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태종에 대한 탐구를 넘어『조선왕조실록』을 편집ㆍ요약본만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기존 공식 번역에 아쉬움을 느껴온 독자들 모두에게 실록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의 진면목이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전을 만나다

“또 이르기를 ‘공양군(恭讓君-공양왕) 때를 당해 용사(用事)하는 자들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라고 했으니 그때 우리 태조께서는 나라의 수상(首相)이 됐으므로 모르긴 하지만 용사자(用事者)란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
_본문 중에서



명나라 진련이 이색의 비명을 지어 보냈는데, “공양군 때를 당해 용사하는 자들은 공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태종은 이 ‘용사자’가 태조가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고, 비명의 찬자인 하륜은 지탄받게 된다. 하륜은 이숭인과 이종학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정도전, 남은에게 탄핵이 집중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왕조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정도전은 폐서인이 되었다. 태종 11년에 발생한 이색 비명 논쟁은 사실상 태종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태종은 이 사건으로 많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군주의 덕목은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고전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우리의 고전에 담긴 선조들의 살아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구매가격 : 28,640 원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2년

도서정보 : 이한우 | 2019-08-2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 출판사 서평

난세를 치세로 바꾼 18년의 역사,
그 치열한 기록이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형제들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 조선의 설계자라 평가받는 정도전을 죽인 ‘냉혈한’… 그에 대한 이해는 즉위 이전의 비정한 면모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자취를 좇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저자는 최근 역사 저술가로서 매진하며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밝혀줄 고전 번역에 힘쓰고 있다.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인 『대학연의』를 비롯해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사서삼경’ 등을 번역해온 저자의 시선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로 이동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집필했다. 이러한 행보에서 나아가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종실록』을 번역한 이유는 그만큼 태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주는 군주인 까닭이다.



나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방대한 실록 번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왕이 되기까지 냉혹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상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 전략을 펼치고 관제개혁에 힘쓰는 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태종에 집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곳곳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밑바탕이 된 민본정치의 기조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예리한 시각으로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며 태종의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세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태종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우리 역사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군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올바른 번역, 치밀한 해석, 섬세한 역주…
우리에겐 친절한 실록 완역본이 필요하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실록 원문의 편년체 서술을 따라 1년 단위로 책을 구성하여 재위기간 18년의 기록을 18권의 책으로 엮는 방대한 시리즈이다. 실록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 번역 과정을 친절하게 담았고,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ㆍ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기존 번역물의 오류를 바로잡고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냈다. 번역본과 함께 한문 원문을 책에 실었고, 독자들에게 한문 읽기의 묘미를 전하고자 ‘원문 읽기를 위한 도움말’을 통해 저자만의 번역 노하우를 소개한다.



기존의 공식 번역은 한자어가 너무 많고 문투도 낡았다. 게다가 역주가 거의 없어 불친절하다. 전문가도 주(註)가 없으면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실록이다. 특히 실록의 뛰어난 문체가 기존 번역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_본문 중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논문 표절과 무단인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저자는 최근 연구부정행위검증 민간기관인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실시한 논문표절 예비검증에서 모범 사례로 꼽혔다. 특히 인용문 번역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번역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결과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태종에 대한 탐구를 넘어『조선왕조실록』을 편집ㆍ요약본만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기존 공식 번역에 아쉬움을 느껴온 독자들 모두에게 실록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의 진면목이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전을 만나다

“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집을 그리워해 다퉈 한강(漢江)을 건너다가 생명을 상할까 염려된다. 마땅히 각 도의 차사원(差使員), 총패(摠牌) 등으로 하여금 운(運-단위)을 나눠 요란(擾亂)하지 못하게 하라.”
_본문 중에서



태종은 환도 후 개천 굴착공사와 정비를 계속했지만, 개천 범람으로 인한 수해는 계속되었다. 이에 태종 12년 1~2월에 대대적인 공사를 시행한다. 5만 2천 8백 명의 인부가 투입되어 하천의 바닥을 파고, 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았다. 또 개천을 가로지르는 흙다리들을 돌다리로 바꾸는 대공사를 실시했는데, 이때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혜정교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시전의 행랑을 정비했다. 태종의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조선은 행정적?정치적 체계 뿐 아니라 새로운 수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이 정비한 개천, 즉 청계천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을 관통하며 서울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군주의 덕목은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고전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우리의 고전에 담긴 선조들의 살아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구매가격 : 23,840 원

근현대 러시아, 레닌 스탈린 고르바초프 푸틴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23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구매가격 : 4,000 원

근현대 일본, 이토 히로부미 후쿠자와 유키치 이마니시 류 아베 신조

도서정보 : 탁양현 | 2019-08-23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구매가격 : 3,500 원

백범의 길 상

도서정보 : 김광재 도진순 윤은자 이종수 이혜린 | 2019-08-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광활한 중국 대륙에 퍼진 김구의 굳센 기개
오직 독립만을 위한 임시정부의 험난한 노정




201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가 생생하게 전하는 임시정부의 항일 루트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혹독한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만큼은 명확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몸으로 임시정부와 동지들의 안전을 살피고, 한국광복군 창설과 통합 정부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구와 독립을 꿈꾸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선열들의 행적을 좇았다. 일본군의 공습과 폭격으로 천신만고의 피란길을 헤쳐 나간 임시정부 대가족들의 행로를 찾아내어 그대로 체험코자 했다.
-「발간사」 에서







◎ 도서 소개

2019년 6월 26일 김구 서거 70주기
길고 험난했던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한·중 역사 전문가가 꼼꼼하게 되밟다

1919년 3일 1일. 전국에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퍼져 나간 이후,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하와이로 투쟁의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굳센 항일 정신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함께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해외 독립 투쟁 여정은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한커우, 창사, 광저우, 우저우, 구이핑, 류저우, 이산, 우산, 구이양, 치장, 충칭을 거쳐 시안으로,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펼친 정치·외교 활동과 일제의 공습을 피해 최대한 몸을 숨기며 생활을 했던 고난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 11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리고 가족들의 발자취를 샅샅이 더듬어 그들이 걸어간 항일 노정을 되밟았다. 그 길은 비록 꽃길이기보다는 진창길이었지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 가족들의 항일 정신과 독립을 향한 투지는 한결같이 드높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상권에서는 상하이에서 전장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치 활동과 피난 생활의 흔적을 따라가며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고 변했으며 또 사라졌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수많은 자료와 회고록, 여러 전문가·관계자·현지인 인터뷰를 통해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묻혔던 것은 들춰내고, 새로운 것은 보태”며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을 기리려 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
상하이에서 시작해 난징에서 새 국면을 맞이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상권은 상하이,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 전장에 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의 흔적을 되밟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처음엔 교민단 사무소를 빌려 쓰다가 1919년 8월 초 샤페이로 321호로 이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자리 잡은 상하이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고인에 대한 장례를 치르며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고취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구는 상하이 거주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들을 상하이에 불러들였는데, 가족과의 화목한 시절도 잠시, 김구의 부인인 최준례를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마랑로 푸칭리 4호로 청사를 이전한다. 이때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 자리에 오르지만 경제적으로는 극히 곤궁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의 도맡아 일제 처단을 위한 작전을 감행한다.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을 일본으로 파견하고, 최홍식, 유상근을 다롄으로 파견하는 등 필사적으로 의거를 추진한다. 일본 헌병이 한인 거주지를 포위하고 한인들의 출입을 경계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근거지였던 만큼 일본총영사관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압박했다. 김구를 체포하고자 하는 계획도 여러 차례 실행되었지만 실패하고, 결국 김구에게 60만 원이 현상금이 걸리는 등 위태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는 삼엄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의거는 한인 독립의지를 선양하면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열강에 충격을 주는 효과를 낳았다. 중국인들은 한인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고, 중국국민당도 한인의 항일 활동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난징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렇듯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 투쟁은 중국국민당과 중국 국민들의 지지와 기대를 얻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한국인들의 굽힐 줄 모르는 독립 의지에 공감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미국인 가족도 있었다. 이러한 국제연대의 역사를 피치 목사와 추푸청 가족과의 일화를 통해 자세하게 다루었다.

최초로 밝히는 김구의 상하이 탈출 루트
지도로 본 상하이와 난징의 활동 장소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 상권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활과 활동상에 대해 자세히 싣고 있다. 김구가 상하이에 입성할 때 이용한 부두가 어디였는지, 상하이 우정총국과 요코하마쇼킨은행이 독립 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흥미롭게 추적한다. 또한 상하이병공창 창장으로 지내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쑹스뱌오와 김구를 비록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몸을 숨겨 주고 자싱으로의 피난을 도운 피치 부부를 조명함으로써 독립 거사의 실행에 한 사람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1932년 5월 중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를 탈출해 자싱으로 향했던 탈출 루트를 소개해 당시의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한다. 또한 난징에 남아 있는 김구와 관련된 사적 위치를 지도로 보여 줌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징에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는 기획에서 출간까지 꼬박 2년이 걸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한국과 중국의 학자와 전문가 11명이 권역별로 답사를 하고, 연구하고, 취재했으며,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서로 내용을 체크하여 오류가 없도록 하는 데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애쓴 흔적들을 꼼꼼히 담아 독자들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찾아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기획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조직된 ‘고 백범김구선생국민장위원회’의 위원장 오세창, 부위원장 김규식, 조완구, 이범석, 김창숙, 조소앙, 최동오, 명제세 등의 위원을 중심으로 1949년 8월 6일에 창립한 협회이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전시와 교육, 역사 자료 수집과 편찬 등 의미 있는 기획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 책 속에서

1922년 김구는 국내의 가족들을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김구로서는 상하이 생활이 그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운동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920년 1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이핀샹에서 신년축하회를 할 때만 해도 다음 해의 신년축하회는 서울에서 열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낙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1921년 기대를 걸었던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않으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열기는 빠르게 식어 갔다. 김구도 이 점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결국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생활이 안정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이 곁에 있어야 했다.

상하이(1)-마랑로 임시정부청사 pp. 51-52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김구는 무엇보다도 안중근의 아들로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처벌하고자 하였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명예를 더럽힌 안준생의 행위는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안준생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도 상하이에 잔류하였다. 1939년 10월 상하이 한인들의 ‘만선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에 들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함으로써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된 바 있었다. 그때 중국 대륙을 전전하다 막 충칭에 도착한 김구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연출된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 아들의 ‘화해극’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안중근의 정신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김구는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았다.

상하이(1)-카이쯔얼로 경무국 p. 104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에 대해서도 일본총영사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거 당일 상하이총영사는 육군·해군 등과 협의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 검거를 프랑스 측에 요구”하기로 하였고, 밤 8~9시경에 일본 헌병 사복대 등 수백 명은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한인의 출입을 경계하였다. 다음 날인 30일 오전 4시 영사관의 아카키 사무관 지휘하에 70명에 이르는 검거반을 출동시켜, 오전 5시 프랑스 공무국 경찰대와 현지에서 회동하여 한국인들을 검거하게 하였다. 이후 프랑스 조계의 한인 사회는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암흑천지로 변하였고, 결국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1 1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물론 김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5월 2일 상하이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에 의하면, 헌병대장과 협의하여 “경찰 20명, 헌병 10명, 총 30명의 체포대”를 조직하여 김구 체포 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김구 체포를 위해 헌병대 100명을 대기시켰고 박춘산이라는 첩자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체포에 일화 2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다시 일본외무성과 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군사령부 등과 합동으로 6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상하이(2)-황푸 강변, 일본총영사관, 애스터호텔, 부두 pp. 121-122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로 위축되었다. 1926년 12월 김구가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령이 되었고,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골몰하면서 열혈 청년에 의한 의열 투쟁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금이 필요했다. 이에 김구가 채택한 것은 해외 동포들에게 편지로 후원을 요청하는 이른바 ‘편지정책’이었다. 그 결과로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답지하였는데, 김구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백범일지』에는 후원자 30여 명의 실명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자금은 대부분 우편환으로 송금한 것이었으니,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상하이에 답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적 우편 체제 덕분이었다. 해외 동포들의 후원금이 머나먼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상하이우정총국이었다. 당시 우정총국은 공공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후원금을 수령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구가 직접 수령할 수는 없었고, 대리인을 파견하여 찾아야 했다. 임시정부 초기에는 피치 목사가 수령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한 사실도 있다. 이 상하이우정총국을 통해 들어온 자금으로 김구는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기획하여 성사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도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상하이(2)-상하이우정총국과 쇼킨은행 pp. 142-143



1925년 쑹스뱌오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국민당 정부의 병공兵工관계 일에 참여하였다. 특히 1932년 1월 28일 상하이사변 직후, 그는 상하이병공창장으로서 반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의 휘하에 있는 병기주임 왕웅(김홍일)은 19로군 차이팅카이 부대의 후방 정보국장도 맡고 있어서 일본군 동향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일본총영사관과 가까운 쑤저우허와 황푸강 합수지점에 일본 해군의 기함인 이즈모호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매일 오전 11시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군 대장과 고급장교들이 선상 회의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쑹스뱌오와 왕웅은 폐기된 수뢰 껍데기를 부뢰로 개조하여 2월 12일 잠수부를 통해 이즈모호를 폭파시키고자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쑹스뱌오와 왕웅은 이처럼 반일 연대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쑹스뱌오의 상하이병공창은 이봉창 의거에도 수류탄을 제공하였고, 윤봉길 의거에는 20여 차례 시험을 하며 정성껏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만들어 왕웅 주소지로 배달하였던 것이다.

상하이(2)-김구와 쑹스뱌오의 한중폭탄연대 pp. 180-181



1932년 피치 부부와 김구의 운명적 인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 독립운동에는 단순히 한국인들만의 반일투쟁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은 물론, 미국인 등 서양인들과도 같이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분명히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자유, 생명에 대한 존중, 민족을 넘어서는 인류애 등 약소국의 민족운동은 이러한 보편적인 토대와 결합되어야만 세계사적 의미가 있고, 또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상하이(2)-생사기로에서의 국제연대 p. 218



김구의 자싱 생활은 한 중국인 가족이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인 사회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동정 여론이 일어났다. 게다가 김구가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하자 중국 신문들은 그를 ‘조선 혁명의 수령’으로 일컬었다. 이런 정황에서 국민당 정부도 김구의 신변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당시 장쑤성 주석으로 있던 천궈푸는 부하 샤오정에게 김구와 관련 인물들이 상하이를 탈출할 수 있도록 하고 이후에 필요한 것들을 해결해 주도록 지시했다. 한국 측에서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던 박찬익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을 위한 교섭에 나섰다.

자싱·하이옌·항저우-자싱, 메이완가 p. 223



김구는 이처럼 난징의 친화이허 화이칭교에서 주아이바오와 동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혹심한 공중폭격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였고, 한편으로는 장제스를 만나는 등 독립운동을 영도하였다. 자싱에서 시작하여 난징으로 근 5년을 주아이바오와 같이 살고 난 이후인 1937년 여름,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김구와 임시정부도 중국의 국민정부를 따라 난징을 떠나 유랑의 길에 올랐다.

난징·전장-친화이허 화이칭교 p. 285



김구를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이 시기 치루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장제스와 만나 재중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한중연합항일 방안을 모색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중일전쟁 개시 이전 장제스는 비록 국내 정치의 안정을 당면 과제로 삼고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면서 항일에 소극적이었지만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나누면서 지원을 약속하고 협력 방향을 논의하였다. 당시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 중 첫 번째 방문자는 김구였다.

난징·전장-치루와 중앙판뎬 p. 299



신해혁명 이후 쑨원은 군벌과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국민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24년 1월 국공합작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북벌을 실행할 군 인재를 배양하고자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원명 중국 국민당육군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황푸군관학교는 약소민족의 연합과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을 제창한 쑨원의 뜻에 따라 한인 청년들의 입학을 격려?우대하였다. 재중 한인 독립운동가와 단체들 또한 독립 투사와 인재 양성을 위해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하였다. 황푸군관학교의 한인 입학은 1925년 7월에 입학한 3기생부터 시작하여 이후 6기까지 총 43명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27년 말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에는 200여 명의 한인이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한. 상도, 1994, 163~166쪽)

난징·전장-한인애국단과 중양육군군관학교 p. 310



김구가 장제스와 면담하고 중양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훈련반 입교생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김구의 거처와 활동의 중심이 난징으로 옮겨졌다. 이후 김구가 난징에서 전개하는 모든 활동의 조직적 기반은 한인애국단이었다. 한인애국단은 일본 군정요인과 친일파에 대한 암살 임무 외에도 비밀리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와 협력하여 대일 정보 수집 공작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김구가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을 진행하거나 대외 활동을 벌이는 데 있어서 한인애국단이 공식적인 단체로서 언급되었다. 실제로 김구가 난징에서 운영한 조직과 단체에 대한 실무는 안공근 등 한인애국단의 간부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난징 지역 초기 한인애국단 간부로는 안공근?안경근?노태연?오면직?노종균?이마석 6인이 있었다. 이들 중 이마석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은 모두 김구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일찍이 상하이에서 장기간 특무 활동에 종사했던 인물들이다.

난징·전장-한인애국단과 중양육군군관학교 p. 318



1935년 1월 조선총독부 파견 상하이 사무관 나카노가 밀정 오대근을 시켜 김구 암살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오대근은 난징에 도착한 후 특별공작원 7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 전 전원이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김구 암살 공작은 그 이후에도 다시 한 차례 시도되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나카노의 후임으로 파견된 히토스기 도헤이 사무관이 1935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밀정 임영창을 통해 김구 암살을 실행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윤대원, 2018). 『백범일지』에도 이와 관련한 언급이 보인다. 김구가 11월 초 자싱에 가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한 후 난징으로 돌아왔는데 난징 경비사령관 구정룬이 김구에게 일본이 고액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를 교섭해 왔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경관 일곱이 푸쯔먀오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 것은 이때의 암살 시도와 관련이 있다. 이렇듯 계속되는 일본 측의 암살 공작 속에서 김구는 활동상의 안전과 편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이전에 자싱에서 뱃사공으로 자신을 도왔던 주아이바오를 데려와 난징 푸쯔먀오 구역에 있는 화이칭교 부근에 거주하면서 고물상 부부로 위장하였다.

장닝-김구의 은신처 p. 340

구매가격 : 20,000 원

스페인 내전사

도서정보 : 김기순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2차대전 전쟁을 다룬 전쟁사 시리즈 중 스페인 내전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 역사서

구매가격 : 6,000 원

프랑스 해방전

도서정보 : 김기순 | 2019-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2차대전 전쟁사 시리즈 중 노르망디 상륙에 이어 프랑스 해방 전투를 다룬 역사서

구매가격 : 9,8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