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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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마리스

도서정보 : 코맥 매카시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1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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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
『로드』 이후 16년, 그가 남긴 마지막 걸작

『패신저』와 함께 작가 인생 60년을 집대성한 결정체

2023년 6월 13일,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서부의 셰익스피어’ ‘포크너와 헤밍웨이의 계승자’라 불리며 해마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작가 코맥 매카시가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는 2022년 매카시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이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로드』 이후 16년 만에 남긴 장편소설로, 삶과 죽음, 세계의 절대적 진리와 유한한 인간 존재 등 그가 작가 인생 60년에 걸쳐 쌓아온 작품세계가 집대성된 결정체와도 같은 작품이다.
1980년대부터 구상해왔다고 알려지며 무성한 소문 속에서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들의 정체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2015년, 그의 데뷔작 『과수원지기』 출간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였다. 작업중인 작품에 대해 거의 밝힌 적이 없던 매카시의 신작 제목 ‘패신저’와 몇몇 구절이 공개된 것도 놀라웠지만 평생 노출을 극도로 꺼리며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던 그가 작품의 등장인물을 직접 소개했다는 사실은 독자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고, 그로부터 7년 뒤 공개된 연작 형식의 두 장편소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는 대작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만드는 데 일조한 과학자 아버지를 둔 남매가 각각의 주인공인 두 작품은 작가가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온 수학과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가 평생 천착해온 주제의식을 총망라하면서도 새로운 획을 긋는 이 작품들은 “이미 걸출한 작품 목록에 더해지는 훌륭한 신작이자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매카시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다는 증거”(NPR) 등의 극찬과 함께 출간 즉시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60년에 걸친 작가로서의 여정에 묵직한 마침표를 찍었다.

세계 저편에 어른거리는 절대 진리와
닿을 수 없는 빛을 향한 위태로운 열망의 기록

『스텔라 마리스』는 웨스턴 남매의 여동생 얼리샤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로, 마치 정신과 상담치료의 녹취록처럼 1972년 위스콘신주에 위치한 정신의학 시설 ‘스텔라 마리스’의 문턱을 제 발로 넘은 얼리샤가 의사와 나눈 일곱 차례의 대화로 구성된다. 편집성 조현병을 진단받고 장기간 시각·청각적인 환각 증상을 겪으며 이미 두 차례 이곳에 입원한 적이 있는 얼리샤는 스무 살의 시카고대학 수학과 박사과정생이다. 어릴 때부터 가족에게조차 두려움을 안길 만큼 천재적인 지능을 타고난 그녀는 세계의 절대적 진리를 담고 있는 듯한 수학의 경이에서 구원을 얻고자 했지만, 인간인 이상 그 진리에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씩 무너져내리며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지기를 바란다.
얼리샤의 병리학적 증상이 학문적 좌절과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한 의사는 그녀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끈질기게 대화를 시도하며 상담을 계속해나간다. 한때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가 결국 절망을 안긴 수학과 그녀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기이한 환각, 그리고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얼리샤의 내면으로 조금씩 들어가는 사이 그녀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를 떠나려는 오빠 보비라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모든 인간 존재와 세상을 향해 건네는 거장의 마지막 악수

보통의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지능의 소유자 얼리샤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때문에 지극히 인간적인 질문에 맞닥뜨린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고 그 한계는 어디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수(數)와 음(音)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듯 인간이 인지하기 전부터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해온 영역에 매혹된 얼리샤는 숨겨진 진리를 찾고자 하지만 그녀가 맞닥뜨린 것은 허망한 결론뿐이다. 인간이 아무리 정교한 이론과 섬세한 악기를 만들어내도 수와 음의 비밀을 완벽히 파헤칠 수는 없다는 것. 그 경이를 인간의 언어로 포착해 명명하는 순간 절대성이 상실된다면, 어떠한 천재도 세계 저편에서 어른대는 진리를 손에 넣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동시에 혈육을 향한 자신의 사랑 또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사실 역시 그녀로 하여금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문장부호를 비롯해 많은 것을 덜어낸 특유의 건조한 문체로 결코 닿지 못할 저 너머의 빛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한 편의 서늘한 비가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마지막을 예감하는 한 인간이, 그 모든 존재를 향한 작가의 연민이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무자비한 세계의 폭력성과 인간의 가장 어두운 본성에 대해 그려오던 코맥 매카시가 절망이 가득한 채 무너져내리는 세계에서 마침내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던 『로드』를 거쳐 이 작품에 이르러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건네는 악수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눈에서 마지막 빛이 희미해져 새카매지고 그와 더불어 모든 사변을 영원히 가져갈 때 나는 심지어 이런 진리들이 그 마지막 빛 속에서 딱 한 순간 빛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둠과 추위가 모든 걸 차지하기 전에. 본문에서

구매가격 : 11,900 원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도서정보 : 스가 아쓰코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20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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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일본과 유럽, 두 공간을 살아낸
1세대 코즈모폴리턴
스가 아쓰코 에세이 국내 첫 출간

예순이 넘어 비로소 첫 작품을 발표했고 팔 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를 출간했음에도 세월이 지날수록 재평가되며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작가가 있다. 1960년대 패전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일본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라 십삼 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했고, 귀국 후에는 연구자이자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왕성히 활동했던 스가 아쓰코다.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베네치아의 종소리』가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다. 모두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사유한 한 청춘의 기록이자, 2차대전 직후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가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이다.

“발에 꼭 맞는 신발만 있다면,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사유 속에서 의연하게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춘의 기록

비행기를 이용한 해외여행조차 일반적이지 않고, 여학교 졸업 후에는 신부수업에 전념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 도쿄의 유복한 사업가 집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스가 아쓰코는 타고난 환경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런 이질감은 더욱 뚜렷해져, 결국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일본 최초의 여자대학으로 문을 연 세이신 여자대학에 1기로 입학한다. 이어서 사회학부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삶과 진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여자가 여자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고 학문을 계속하려면, 혹은 결혼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 싫으면 수도원에 들어가든가.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을 때도 반발심이 들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시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문장이 나를 동요시켰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대성당까지」, 『베네치아의 종소리』에서)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학문적 호기심을 안고 파리, 뒤이어 로마로 향한 스가 아쓰코에게 이번에는 이국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여러 고민이 닥친다. 경제적 곤란부터 종교와 문화의 차이, 이론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서구식 개인주의 등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뒤엎는 격랑 속에서 그녀는 여성으로서, 외국인으로서 혼자 힘으로 설 자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앙에 기초한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에 감명받아 밀라노로 건너간 뒤, 당시 가톨릭 학생운동의 활동 거점이었던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과 운명 같은 연을 맺는다.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에는 주위에서 이들을 떠받치는 커다란 우정의 고리가 있었다. 오후 여섯시가 지나면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차례차례 서점으로 찾아왔다. 작가, 시인, 신문기자, 변호사, 대학교수, 고등학교 선생, 성직자 등. 그중에는 가톨릭 사제도, 프랑코의 압정을 피해 밀라노로 망명한 카탈루냐 수도승도, 왈도파 프로테스탄트 목사도, 유대교 랍비도 있었다.(「은빛 밤」,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모인 코르시아 서점의 일원으로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내며, 스가 아쓰코는 비로소 밀라노라는 낯선 땅에 정착하고 국적을 넘어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난다. 비록 교회 당국의 탄압과 내부 분열로 코르시아 서점이 문을 닫고, 서점 동료이자 남편이었던 페피노와의 결혼생활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오 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십삼 년간의 밀라노 생활은 스가 아쓰코에게 ‘지울 수 없는 궤적’을 남겼으며 귀국 후에도 꾸준히 학문과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문학적 자양분을 안겨주었다. 상실과 좌절의 경험 역시 귀중한 자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예순이 넘어 정식으로 등단했을 당시 ‘이미 완성된 작가’라는 평을 들은 것은, 언젠가 글로 쓰이기를 기다리던 기억과 사색의 문장들이 오랜 침묵 속에서 무르익어갔던 덕분인지도 모른다.

병명을 안 뒤로 나는 밤낮없이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듯한 그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죽음에 대항하며, 죽음의 손에서 그를 떼어놓으려다 지쳐버린 나를 남겨놓고, 나보다 더 지친 그는 어느 초여름 밤 아무 말 없이 홀로 떠나버렸다. (「아스포델 들판을 지나」, 『베네치아의 종소리』에서)

독립적인 삶을 꿈꾸며 바다 건너 이국으로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인생의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공명하기 충분하다. 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고국에서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세계를 향해 동경을 품었던 이들이라면 1960년대에 이미 유학과 국제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했던 작가의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듯 섬세하게 기억을 더듬어가는 문장들은 단순히 근대의 ‘신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피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삶을 개척해나가고자 했던 의지를 행간 곳곳에 드러낸다. 그것은 움베르토 사바, 알레산드로 만초니 등 스가 아쓰코가 젊은 날 심취하고 동경했던 문호들이 다루었던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디로도 선뜻 발을 디딜 수 없는 중간지대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에서, 혹은 책 속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나지막하고도 의연한 목소리로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은 작은 등대이자 하나의 기적이었다.”

1960년대 밀라노, 가톨릭 신부이자 시인 다비드 투롤도를 중심으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며 코르시아 서점에 모인 젊은이들. 시내 번화가의 산카를로 성당 한구석을 빌려서 문을 연 이 서점은 계급적인 중세 교회제도를 쇄신하려는 ‘새로운 신학’ 사상과 2차대전 당시의 저항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수도원과 구별되는 종교적 공동체를 모색하던 이들이 모여 활발히 교류하던 장이었다. 십여 년간 서점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작가는 이방인의 감각으로 관찰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자유, 소박한 일상 사이로 엿본 이탈리아 귀족사회의 일면 등을 담담하게 펼쳐놓는다. 서점의 비밀스러운 후원자였던 상류층 노부인 테레사(「입구 옆 의자」), 출판 분야를 도맡으며 사상적인 중추 역할을 했지만 개인 사정으로 서점을 떠나야 했던 가티(「어린 여동생」), 교회 당국의 압박으로 결국 이름을 바꾸고 이전한 뒤에도 서점의 정신을 이어가려 애썼던 루치아(「보통의 짐」) 등, 젊은 날의 꿈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헤어진 이들의 이야기 열한 편이 하나하나 단편영화처럼 섬세하게 그려진다.

젊은 우리는 각자 마음속 서점의 모습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외곬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우리의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지니고 살아야 하는 고독과 이웃하고 있으며,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독을 확립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젊은 날 마음속에 그린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을 서서히 잃어감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_본문에서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은 슬픈 이야기다. 한 사람 한 사람 나이를 먹으며, 어떤 이는 죽고 또 어떤 이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그래도 스가 아쓰코는 그리운 얼굴들을 품안 가득 껴안고 삶에 대한 기쁨을 곱씹는다.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문장 구석구석에서, 행간에서 들을 수 있다. 몇십 년의 세월을 거쳐 그녀의 기억에서 불려나온 이들의 모습은 더없이 단단하고 눈부시다.
_마쓰야마 이와오(평론가)

구매가격 : 10,500 원

밤은 내가 가질게

도서정보 : 안보윤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0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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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빛을 표현하는 작가
안보윤 단편소설의 정수

더 조용한 속도로, 더 조심스러운 각도로
감춰진 마음의 겹을 들추는 섬세한 손길

2023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 「애도의 방식」
2023 현대문학상 수상작 「어떤 진심」
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 「완전한 사과」 수록

상처 입은 이들의 시선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가혹한 진실을 들여다보며 아픔을 어루만지고 회복의 길을 열어온 작가 안보윤의 세번째 소설집 『밤은 내가 가질게』가 출간되었다. 『소년7의 고백』 이후 오 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소설집에는 2023년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 「애도의 방식」을 비롯해 현대문학상 수상작 「어떤 진심」, 김승옥문학상 수상작 「완전한 사과」가 수록되었다. 환상과 실재의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표상하고 인물의 심리를 파고들며 그 솜씨를 인정받았던 안보윤은 최근 완성도 높은 서사, 인물의 입체적 면모를 드러내는 촘촘한 묘사, 익숙한 흐름을 답습하지 않는 시선으로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아왔다.
일곱 편의 단편소설에서 안보윤은 일상이 파괴될 만큼 커다란 고통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다음 삶으로 이행해가는지 그 행로를 좇는다. 사이비종교 집단에 더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않음에도 남아 있기를 택한 신도(「어떤 진심」), 범죄자인 오빠 때문에 직장을 잃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여동생(「완전한 사과」), 돌봄방 아이들을 학대한 혐의를 받는 엄마를 위해 정작 자신이 받은 학대를 묻어두고 대신 합의를 진행해야 하는 딸(「미도」) 등, 안보윤의 인물들은 모두 막다른 길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가늠하며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자신을 옥죄던, 동시에 자신의 전부였던 세상을 잃은 그들은 과연 현실에 맞설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안보윤은 선과 악으로 이분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사정을 끈질기게 따라가며 그들이 말하거나 말하지 않은,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심을 소설적 현실에 담아낸다.

어떤 진심은 꿈을 짓밟고 어떤 진심은 모멸감을 준다. 어떤 진심은 효용을 감지한 후에야 위로의 말을 건넨다.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하는 마음도 진심이고 속이는 마음도 진심이라면, 그때의 진심이란 얼마나 섬뜩하고 무서운가. 무엇보다 누군가를 외면할 때의 진심과 이후 그 순간이 야기한 죄책감을 되새기는 마음은 얼마나 가까운가. 안보윤은 이처럼 여러 겹의 진심으로 다양한 마음의 결과 행방을 되새기며 진심의 쓸모를 캐묻는다. 좋은 소설은 인간의 얼굴을 사면상처럼 묘사하기 마련이다. 각도에 따라 한 사람의 안색이 달라 보이게 마련인데, 안보윤이 「어떤 진심」에서 그려낸 인물의 얼굴이 그러했다. _편혜영(소설가), 현대문학상 심사평에서


“이 세상은 공평해. 네가 선을 가지면 저쪽이 악을 가져.”

표제작 「밤은 내가 가질게」는 매서운 현실에 맞서 더 냉담해지기로 결심한 인물이 진정한 사랑과 공감의 형태를 알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학대 피해 아동 주승이를 담당하게 된 어린이집 선생님 ‘나’는 주승이가 등원할 때 한 번, 하원할 때 한 번 아이의 옷을 벗겨 상처가 없음을 보호자에게 확인시킨다. 불필요한 누명을 쓰지 않으려 행하는 이 방어기제는 그동안 폭력에 가까운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들을 상대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5세 반 점심 반찬으로 시금치가 나왔었거든. 다음날 애 아빠가 들이닥쳐서는 자기 딸한테 시금치를 먹였다고 멱살을 잡더라고. 그걸 먹고 애가 체해서 응급실에 다녀왔다나. 무릎 꿇고 빌라고 난동을 피우다가 난데없이 시금치 한 통을 꺼내는 거야. 시금치가 그렇게 몸에 좋으면 니가 다 먹으라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당장 다 먹으라고.
먹었어요?
먹었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궁금해. 애가 아팠다면서 그 이른 시간에 시금치 무쳐 올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다른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지런해질 수 있었을까.(본문 중에서)

이 세상은 공평해. 네가 선을 가지면 저쪽이 악을 가져. 네가 만만하고 짓밟기 좋은 선인이 되면 저쪽은 자기가 제멋대로 굴어도 되는 줄 안다고.(본문 중에서)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인 사고뭉치 언니가 있다. 언니가 이번에는 사이비 명상 집단의 꼬임에 넘어가 전세금을 날리는 바람에, ‘나’는 그녀와 동거하는 처지가 된다. 언니는 ‘나’의 연인 이선과 친해져 함께 유기견 봉사를 다니기 시작하는데, ‘나’는 그것이 탐탁지 않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언니가 약한 존재에게 측은지심을 갖는 동안, 자신은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설상가상으로 언니는 나이들고 병든 유기견을 입양하겠다고 선언하고,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불편한 속마음을 말했다가 이선과도 갈등한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으로 ‘나’는 자기 안의 상냥함을 발견한다. 등원한 주승이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아이의 몸에서 오랜 학대의 흔적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경찰에 신고한다.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했던 돌봄과 배려가 냉정을 뚫고 나오자, ‘나’는 언니와 이선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마음이 자신을 섬세하게 감싸안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유기견을 집으로 데려오던 날, 언니가 개의 목에서 팬던트를 떼어내면서 속삭인 “밤은 내가 가질게”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개의 이름이 ‘밤톨이’에서 ‘토리’가 된다는 말일뿐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의 어둠을 흡수하여 다정함으로 빛나는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구매가격 : 11,200 원

베네치아의 종소리

도서정보 : 스가 아쓰코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2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1960년대 일본과 유럽, 두 공간을 살아낸
1세대 코즈모폴리턴
스가 아쓰코 에세이 국내 첫 출간

예순이 넘어 비로소 첫 작품을 발표했고 팔 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를 출간했음에도 세월이 지날수록 재평가되며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작가가 있다. 1960년대 패전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일본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라 십삼 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했고, 귀국 후에는 연구자이자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왕성히 활동했던 스가 아쓰코다.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베네치아의 종소리』가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다. 모두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사유한 한 청춘의 기록이자, 2차대전 직후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가톨릭 학생운동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이다.

“발에 꼭 맞는 신발만 있다면,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사유 속에서 의연하게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춘의 기록

비행기를 이용한 해외여행조차 일반적이지 않고, 여학교 졸업 후에는 신부수업에 전념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 도쿄의 유복한 사업가 집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스가 아쓰코는 타고난 환경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런 이질감은 더욱 뚜렷해져, 결국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일본 최초의 여자대학으로 문을 연 세이신 여자대학에 1기로 입학한다. 이어서 사회학부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삶과 진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여자가 여자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고 학문을 계속하려면, 혹은 결혼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 싫으면 수도원에 들어가든가.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을 때도 반발심이 들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시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문장이 나를 동요시켰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대성당까지」, 『베네치아의 종소리』에서)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학문적 호기심을 안고 파리, 뒤이어 로마로 향한 스가 아쓰코에게 이번에는 이국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여러 고민이 닥친다. 경제적 곤란부터 종교와 문화의 차이, 이론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서구식 개인주의 등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뒤엎는 격랑 속에서 그녀는 여성으로서, 외국인으로서 혼자 힘으로 설 자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앙에 기초한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에 감명받아 밀라노로 건너간 뒤, 당시 가톨릭 학생운동의 활동 거점이었던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과 운명 같은 연을 맺는다.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에는 주위에서 이들을 떠받치는 커다란 우정의 고리가 있었다. 오후 여섯시가 지나면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차례차례 서점으로 찾아왔다. 작가, 시인, 신문기자, 변호사, 대학교수, 고등학교 선생, 성직자 등. 그중에는 가톨릭 사제도, 프랑코의 압정을 피해 밀라노로 망명한 카탈루냐 수도승도, 왈도파 프로테스탄트 목사도, 유대교 랍비도 있었다.(「은빛 밤」,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모인 코르시아 서점의 일원으로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내며, 스가 아쓰코는 비로소 밀라노라는 낯선 땅에 정착하고 국적을 넘어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난다. 비록 교회 당국의 탄압과 내부 분열로 코르시아 서점이 문을 닫고, 서점 동료이자 남편이었던 페피노와의 결혼생활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오 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십삼 년간의 밀라노 생활은 스가 아쓰코에게 ‘지울 수 없는 궤적’을 남겼으며 귀국 후에도 꾸준히 학문과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문학적 자양분을 안겨주었다. 상실과 좌절의 경험 역시 귀중한 자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예순이 넘어 정식으로 등단했을 당시 ‘이미 완성된 작가’라는 평을 들은 것은, 언젠가 글로 쓰이기를 기다리던 기억과 사색의 문장들이 오랜 침묵 속에서 무르익어갔던 덕분인지도 모른다.

병명을 안 뒤로 나는 밤낮없이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듯한 그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죽음에 대항하며, 죽음의 손에서 그를 떼어놓으려다 지쳐버린 나를 남겨놓고, 나보다 더 지친 그는 어느 초여름 밤 아무 말 없이 홀로 떠나버렸다. (「아스포델 들판을 지나」, 『베네치아의 종소리』에서)

독립적인 삶을 꿈꾸며 바다 건너 이국으로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인생의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공명하기 충분하다. 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고국에서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세계를 향해 동경을 품었던 이들이라면 1960년대에 이미 유학과 국제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했던 작가의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듯 섬세하게 기억을 더듬어가는 문장들은 단순히 근대의 ‘신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피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삶을 개척해나가고자 했던 의지를 행간 곳곳에 드러낸다. 그것은 움베르토 사바, 알레산드로 만초니 등 스가 아쓰코가 젊은 날 심취하고 동경했던 문호들이 다루었던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디로도 선뜻 발을 디딜 수 없는 중간지대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에서, 혹은 책 속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나지막하고도 의연한 목소리로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두 나라, 두 언어의 골짜기에 끼여 발버둥치던 그 시절.”

일본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시행착오로 가득했던 유학 초기에서 예순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한 현재까지, 인생의 한 시기 찾아왔다가 사라져간 사람과 장소들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에세이. 학회 참석을 위해 향한 베네치아의 호텔에서 아련한 종소리와 오페라의 선율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베네치아의 종소리」, 전쟁의 상흔이 남은 가톨릭계 기숙학교에서의 추억을 재치 있고 생생하게 그려낸 「기숙학교」, 첫 유학지인 파리의 기숙사에서 만났던 독일인 친구와 삼십 년 만에 재회하는 「카티아가 걷던 길」, 병상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등, 총 열두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스가 아쓰코의 작품 중에서도 구성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책 전체에 감도는 애수 어린 분위기와 함께 가족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갑자기 나 자신이 큰 파도에 키가 휩쓸린 조각배같이 느껴졌다. 이곳에 존재하는 서양의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고국의 현재에도 수용되지 못하는 나는 대체 어디로 향해야 할까. 두 나라, 두 언어의 골짜기에 끼여 발버둥치던 그 시절에는 사방에 두꺼운 벽만 가로놓인 기분이라, 그저 몸을 움츠리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_본문에서

스가 아쓰코는 예순한 살로 문단에 등장할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작가였다. 그리고 불과 팔 년 사이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이며 주옥같은 작품세계를 일구어냈다. 유럽과 일본에서의 시간을 부드러운 실로 자유롭게, 동시에 면밀하게 엮어낸 이 책은 ‘잃어버린 시간’과의 융화이자 인생에서 지나쳐간 사람들에게 내미는 화해의 제스처다. 또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그려낸 뛰어난 교양소설이기도 하다. _세키가와 나쓰오(소설가)

구매가격 : 11,200 원

지지 않는 달

도서정보 : 하타노 도모미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08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스토커는 순간의 틈을 노리고 찾아와요.
경찰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피해자의 공포와 가해자의 심리를 치밀한 서사로 그려낸
스토킹 범죄 소설의 압도적 걸작

“헤어지고 싶어”라는 나의 한마디 말이
그에게는 스토커로 돌변해 날아오를 활주로가 되었다.

내 남자친구에서 이제 섬뜩한 스토커가 된 그는
마치 ‘지지 않는 달’처럼 늘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가 언뜻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을 때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야 했을까?
사람들은 내게 잘못이 없다고 하지만
매일 그 두려움을 견디는 건 나의 몫이다.
아무리 어둠으로 도망쳐도 돌아보면 달은 늘 그곳에 있다.
도무지 헤어나올 길이 보이지 않는 이 악몽에서
어떻게 나는 벗어날 수 있을까……


젊은 세대의 삶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는 하타노 도모미
현대인의 ‘생존과 행복’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작가

하타노 도모미는 젊은 세대와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는 작가다. 도시 여성들의 고단한 일상을 섬세하게 그린 『감정8호선』의 드라마화로 주목받았고, 작가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까지 십 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고를 겪었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를 그린 『신을 기다리고 있어』로 일본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지지 않는 달』은 하루아침에 스토킹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되어버린 한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피해자의 공포와 가해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낸 하타노 도모미의 대표작이다. 총 10장 구성의 이 소설은 홀수 장을 피해자인 여성 주인공의 시점으로, 짝수 장을 가해자인 남성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린다. 이는 동일한 사건을 정반대의 시각으로 거듭 교차시켜 보여줌으로써 매우 공포스럽고 섬뜩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식 차이를 예리하게 드러낸다. 책 말미에 수록된 해설은, 일본에서 스토커 500명 이상을 카운슬링한 스토킹 범죄 전문가 고바야카와 아키코의 실질적인 조언들을 담고 있다.


꿈같은 연애의 장면이 순식간에 사고의 현장으로
그는 왜 스토커가 되었을까?

가와구치 사쿠라(여, 28세)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아픈 곳을 치유해주는 직업적 보람에 매력을 느껴 마사지사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 도쿄의 한 마사지숍에서 일하고 있다.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 자신의 마사지숍을 여는 것을 꿈꾸고 있다. 출퇴근을 반복하며 늘 똑같은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자신의 단골 고객 ‘마쓰바라’로부터 사귀고 싶다는 고백을 받는다.

마쓰바라 요시후미(남, 31세)
큰 키에 호감 가는 외모, 미식을 즐기는 등 세련된 취향을 지녔다. 직장인 출판사의 일이 적성에 맞진 않지만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다. 엄격한 집안의 외아들이고, 인간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다. 과로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다니는 마사지숍에서 밝고 다정한 사쿠라에게 반해 먼저 고백을 한다.

평범해 보이는 두 사람의 연애는 “헤어지고 싶어”라는 사쿠라의 말 한마디로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이별 통보를 납득할 수 없는 마쓰바라의 집착적 행각은 하루에 1~2백 건에 달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해, 몰래 미행하거나 감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전 여자친구의 직장이나 지인에게까지 위해를 가하는 지경에 이른다.
일을 그만두고 증발하듯 조용히 부모님의 집으로 피신한 사쿠라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 가족과 함께 안전을 위한 대비책을 세운다. 하지만 이제 스토커가 된 전 남자친구는 마치 어딘가에 늘 떠 있는 ‘지지 않는 달’, 이 상황은 결국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악몽’일 거라는 생각 역시 지울 수 없다.

내가 다시 사귀겠다고 말할 때까지 마쓰바라 씨는 나를 따라올 것이다. 경찰을 찾아가도 헛수고일 것이다.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왔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항상 지켜봐줄 것도 아니고, 공격에 대비한 요새에 살 수도 없다. 마쓰바라 씨가 체포되어 감옥에 갈 만한 짓을 저질렀다고 한들, 몇 년만 지나면 나온다. 마쓰바라 씨나 나,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이 생활은 계속될 것이다. 설령 마쓰바라 씨가 찾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두려움은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본문 319p)

작가는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완성한 치밀한 서사 위에 피해자 사쿠라가 느끼는 공포를 여실히 그려내는 한편, 가해자 마쓰바라의 자기합리화와 모순적인 심리 전개를 섬뜩할 정도로 세밀히 보여준다. 그 분열적 행보의 끝에는 마쓰바라의 분노와 집착이 진정으로 향한 대상이 누구였는지, 그 처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스토커와 연을 맺지 않기 위해, 혹은 스토커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누구에게 공감하는가?

사쿠라는 경찰에 찾아가 전 남자친구의 스토킹 행위를 신고하지만 ‘하루에 수백 건씩 메시지를 보내와도 살인이나 협박을 암시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요즘은 스토킹 행위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정식 사건으로 접수하기 어렵다거나, 법적·제도적 장치가 부족해서 적극적인 보호 조치가 어렵다는 답변을 들을 뿐이다. 다들 그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위로하지만, 매 순간 스토킹의 공포를 견디는 건 그녀의 몫이다. 매우 치밀하게 준비해서 자신을 감시하는 스토커보다 훨씬 더 노력해서 스스로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밖에 없다.

“상대를 만나서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기 위해 스토커는 노력합니다. 경찰보다, 피해자보다 더 많이 노력해요. 운은 평등해서 노력하는 자의 편을 들어줍니다. 설령 그것이 그릇된 노력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경고를 받아도 멈추지 않는 스토커는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지 않아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주위에서 만류해도 계속 무시해요. 그러는 동안 주변에는 자기편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됩니다.” (…) 세타가야 경찰서에 갔을 때 야마나카 씨는 이렇게 말했다. “스토커는 순간의 틈을 노리고 찾아와요.” 그 틈을 만드는 것이 바로 스토커의 유일한 아군인 ‘운’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일본의 스토킹 범죄 전문가 고바야카와 아키코는 해설에서 스토킹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처법을 안내한다. 작중에서 사쿠라가 잘 대처한 일과 그러지 못한 일을 설명하고, 마쓰바라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소설이기에 더 생생하고 선명하게 실감할 수 있었던 스토킹 범죄의 현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소설에는 두 주인공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자신이 누구에게 공감하고 누구의 심리에 동의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스토커는 교제중에 상대가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자유를 빼앗고 그것이 정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떠나면 “돌아와주기만 하면 모든 게 잘 해결될 것이고,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강렬한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비뚤어진 사고를 한다. 아무리 오래 말로 설득해도 스토커의 생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고 싶다고 하지만, 막상 만나면 마지막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대화는 15분 안에 끝낸다. (…) 하지만 그렇게 해서 스토킹 행위가 멈췄더라도 안심해선 안 된다. 스토커에게 ‘풍화’는 없다. 스토커가 자취를 감췄을 때야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카운슬링이나 치료를 받지 않는 한, 스토커가 욕구를 포기하거나 줄이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상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12,300 원

진(세계문학전집 237)

도서정보 : 알랭 로브그리예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24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누보로망’의 선구자이자 전방위 예술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실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진』은 20세기 중반 파격적인 문학 실험으로 ‘누보로망(새로운 소설)’을 선도한 프랑스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가 198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양성적 매력을 지닌 젊은 여성 진Djinn에게 이끌려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활동하다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년 시몽 르쾨르의 기묘한 행적을 강렬한 필치로 그려냈다. 수수께끼의 인물이 거듭 등장하고, 방향 감각을 잃은 이미지와 혼란스러운 시공간이 펼쳐지는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주인공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점점 가중시키면서 압도되어가는 느낌을 선사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프랑스어 교수 이본 레너드의 요청을 받아, 미국 대학생들을 위한 프랑스어 문법 교육용 텍스트로 집필한 『면접』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여 새로이 펴낸 소설이라는 점이 특이한데, 총 여덟 장으로 구성되어 프랑스어 문법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렇듯 애초에 프랑스어 문법 학습서로 집필되었으나 오락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소설로 탈바꿈한 『진』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은 로브그리예의 실험정신이 낳은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어 문법을 소설의 원동력으로”
마침내 실현된 로브그리예의 오래된 프로젝트, 『진』

누보로망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고무지우개』로 1954년 페네옹상을 수상하고 『엿보는 사람』으로 1955년 비평가상을 수상한 이래 『질투』 『미궁 속으로』를 발표하며 누보로망의 대표 작가로 자리잡은 알랭 로브그리예. 줄거리의 명시적 전개나 성격의 주관적 묘사, 연대기적 질서 없이, 사물과 인물을 시각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전지적 작가를 전제하는 전통 소설에 반기를 들어, 앙티로망(반反소설)이라고도 불리는 누보로망의 기수로 일컬어진다. 당시로선 생경한 문학 실험으로 열렬한 호평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그는 누보로망을 대변하는 작가이자 문학이론가로서 세계 각국을 누비며 강연 활동을 벌여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한국에도 1978년과 1997년에 찾아와 각각 ‘누보로망과 누보시네마’ ‘누보로망에서 새로운 자서전으로’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을 정도다. 『진』은 로브그리예의 이런 국경을 넘나드는 활약에서 비롯한 작품으로, 그가 예순을 앞둔 1981년에 출간되었다.
2001년 발표한 『여행자, 텍스트와 한담 그리고 인터뷰』에서 그는 『진』의 집필 계기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처음에는 무모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저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현대소설에 관한 강의를 했었어요. (……) 거기서 저는 미국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데 사용되는 책에 대한 문학적인 관심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프랑스어 교수들을 만났죠. 난이도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문법을 소개하기 위해 위대한 작가들의 텍스트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15년 이상 떠올려온 제 오래된 프로젝트들 중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어 문법을 소설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었어요.”
결정적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프랑스어 교수 이본 레너드의 요청을 받은 로브그리예는 프랑스어를 익히려는 미국 대학생들이 활용할 만한 일종의 ‘교과서’로 『면접』을 집필하고 1981년 미국에서 출간했다. 학기당 8주에 해당하는 여덟 장에 걸쳐서 프랑스어의 문법적 난이도가 규칙적으로 증가하고, 이야기가 문법 활용과 맞물려 전개되는 이 책에는 각 섹션마다 연습문제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면접』에서 연습문제를 덜어내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앞뒤로 덧붙인 후 제목을 ‘진’이라 바꾸고는 프랑스의 미뉘 출판사를 통해 다시 선보였다. 프랑스어 학습용 교과서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전개로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진』은, 집요한 묘사가 지속되어 지루하다거나 읽기 난해하다고들 하는 누보로망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이색적인 걸작이다.


“시간을 벗어나, 나 자신 행방불명이다”
나와 너, 꿈과 현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

다른 이름으로 된 여권과 구십구 쪽 분량의 타자 원고를 남기고 시몽 르쾨르라는 청년이 파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라진다. 미국인 학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가르치다가 돌연 종적을 감춘 그가 남긴 문제의 원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몽은 구인 광고를 보고 약속 장소인 어느 황폐한 창고에 찾아가 보스턴 악센트를 지닌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미국 여성 진을 만난다. 그녀는 시몽에게 자신이 속한 조직(기계화에 대항하는 비밀조직)을 위해 미션을 수행할 것을 지시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즉시 밝혀지진 않는다. 진의 지시에 응한 시몽은 임무를 수행하려 파리 북부역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걷다가 소년 장이 불쑥 뛰어나와 넘어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죽은 듯 쓰러진 장을 품에 안고 건물에 들어간 시몽은 장의 누이인 소녀 마리를 만난다. 장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한다며 황당무계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마리는 진의 편지를 시몽이 읽게끔 유도하고, 진의 지령에 따라 두 아이는 시몽을 레스토랑에 데려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는데……

여성인지 남성인지 혹은 마네킹인지 로봇인지 모를 모호한 캐릭터의 등장, 거울 속에서처럼 반복되는 이미지, 과거와 현재, 미래의 혼재 등이 특징인 『진』은 독자들에게 혼란스럽고 혼미한 시공간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런 느낌을 더욱 심화시키는 데는 특유의 시점과 프랑스어의 시제 변화도 일조한다.
이 소설의 프롤로그가 누구인지 모를 ‘나’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졌다면 제1장에서는 1인칭 화자(시몽 르쾨르)가 현재시제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현재시제에다 제2장에는 복합과거, 제3장에는 반과거, 제4장에는 단순과거와 대과거 시제가 등장하며, 문법 난이도를 높여가는 식으로 서술된다. 제6장과 제7장은 제5장까지와는 다르게 3인칭 과거 시점으로 시작했다가 1인칭 현재 시점으로 바뀌고, 다시 3인칭 과거 시점으로 돌아온다. 제8장에서는 느닷없이 여성 화자가 등장해 1인칭 시점으로 여러 시제를 구사하며 이야기를 전개시키기도 한다. 프롤로그와 마찬가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 ‘나’의 내레이션이 담긴 에필로그로, 이 소설은 풀리지 않은 의문을 독자에게 수수께끼로 남긴 채 마무리된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으로도 일세를 풍미한 로브그리예의 작품답게 『진』은 강렬하고 인상적인 상황 연출과 신비로운 분위기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선글라스를 착용한 인물, 폐기 처분된 상품과 고장난 기계장치로 가득한 마네킹 창고, 폐가들 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길 등의 이미지가 거듭 등장하거나 혼령 같은 캐릭터가 무시로 출몰하며 독자들의 뇌리에 잊히지 않는 잔상을 새기는 식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곡가 린지 비커리는 『진』에서 영감을 받아 어둡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오페라 누아르 〈면접〉(2001)을 만들어 상연하기도 했다.
『진』은 1993년 세계사에서 발간한 『어느 시역자』에 표제작과 함께 ‘진느’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 있는데, 이 책은 무려 30년 만에 선보이는 새로운 번역이다. 2011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엿보는 자』 이후 12년 만에 번역 출간된 로브그리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구매가격 : 8,400 원

사무실의 도른자들

도서정보 : 테사 웨스트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1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더이상 불평하거나, 숨막혀하거나,
이직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뉴욕대 사회심리학 교수가 전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일하는 법

도른자는 특별하지 않다,
평범하게 당신 옆자리에서 일하는 그 사람이
‘사무실의 도른자들’ 중 한 명일 수 있다!

최근 SNS나 소셜미디어에서 ‘맑눈광’ ‘기존쎄’ ‘꼰대 상사’ 등 직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또는 이해하기조차 싫은 사람들, 소위 ‘사무실의 도른자들’을 풍자하는 콘텐츠가 대세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들에게 시달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시장조사기관에서 진행한 설문(2022년)에서 퇴사 사유의 압도적 1위로 ‘직장 내 갑질 등 상사·동료와의 갈등’이 꼽히기도 했다. 업무가 아닌 사람 때문에 퇴사를 결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직장 내 관계 스트레스가 소수가 아닌 대부분의 직장인이 겪는 심각한 문제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느새부터 직장은 ‘일’보다 ‘사람’이 힘든 공간이 되어버렸고, 오늘도 고군분투중인 직장인들은 혼자 삭이거나 커뮤니티에 하소연할 뿐이다.
뉴욕대 사회심리학 교수이자 이 책의 저자 테사 웨스트 역시 ‘도른자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며, 나아가 이들과의 관계야말로 직장생활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갉아먹는 이들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 직장에서 그들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라도 스트레스 없이 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20년간 인간관계와 소통 방식을 연구해온 저자는 『사무실의 도른자들』을 통해 암흑 같은 직장생활에 한 줄기 빛을 비춰준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심리학의 도구로 분석하고 이들을 7가지로 유형화하며, 마침내 우리가 도른자들에게 맞설 무기를 쥐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은 더이상 도른자를 피하느라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심리학자인 나는 지금껏 20년 가까이 사람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사람들이 협상하고, 협업하고, 효과적으로 논쟁하고, 성공적으로 서로를 회피하는 전략들을 관찰했다. 상호작용이 엉망이 될 때 사람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그 스트레스가 신체에서 어떻게 발현되며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빨리 퍼져나가는지 측정해왔다. 일터에서 인간관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우리 삶의 모든 면에―우리가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부터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느끼는 연결감까지―스며들어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 나는 수없이 목격했다. _본문 중에서

“그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알’ 필요는 있다, 그래야 당하지 않으니까!”
도대체 왜 저럴까 싶은 돌아이들의 민낯을 까발리다!

도른자들을 상대하려면 우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저자는 도른자에게 대처하는 것이 마치 연쇄살인범을 프로파일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도른자들이 대체 왜 돌아버렸는지를 먼저 심리적 차원에서 살펴보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는지에 대해 행동 방식적 차원에서 낱낱이 분석함으로써 그들에게 대처할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너머 숨겨진 심리를 파악해야 한다.

돌아이에게 대처하는 건, 말하자면 연쇄살인범을 프로파일링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무엇을 동력으로 행동하는지 알기 위해, 일단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봐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희생자를 고르는가? 어떻게 적발당하지 않고 넘어갔는가? 그들의 행동으로 (은연중에) 이득을 보는 타인이 있는가? _본문 중에서

저자가 백화점 신발 판매팀에서 일하던 시기에 발령받아 온 데이브의 사례를 보자. 데이브는 다른 지점에서 판매 성과금으로 자동차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판매 사원이었고, 저자와 일하던 백화점에 와서도 이내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것은 정당한 성과가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외모든 성과든 재산이든 사회적 가치를 기준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회비교 지향성’이라는 특질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어느 순간에는 비교를 멈추고 자신의 삶을 살기 마련이다. 반면, 강약약강형 인간은 비교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견줄 대상과 권력자들 앞에서 안전하게 비판할 수 있는 먹잇감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성과를 올릴 기회를 착취하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악용한다. 강약약강형 인간은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강약약강형은 스위치를 끄지 못한다.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과, 특히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강박적으로 끊임없이 비교한다. 직책, 집안, 사무실 크기, 뭐든 하나라도 강약약강형 인간과 같은 게 있으면 긴장하라. 분명히 그들에게 주기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을 테니. 여러분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싶은 사람을 경계하라. 최근 연봉 협상 때 여러분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는지 끝자리 수까지 아는 사람, 여러분이 자기보다 같은 직무를 몇 달(또는 며칠) 늦게 시작했는지 아는 사람. 이런 데 집착하는 사회비교 탐정들은 자기가 아는 내용을 재료로 삼아 파괴적인 경쟁 구도를 영리하게 만들어낸다. 데이브 같은 사람은 동료들 앞에서 여러분의 전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상사에게 달려가 사소한 우려들을 보고할 것이다. _35쪽

강약약강형 인간인 데이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팀으로 온 지 오래지 않아 데이브는 팀원들의 서열을 간파했다. 그러고는 상대에 따라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창고의 신발을 제멋대로 정리하여 손님이 원하는 사이즈의 신발을 다른 직원들이 찾지 못하게 만드는 등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판단한 동료들에게서 손님을 가로채기 시작했다. 반면, 권력자와 상사들 앞에서는 실적이 낮은 직원과 자신의 판매량을 비교해가며 성과를 어필하는 데 노력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형 돌아이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셈이다.

20년간의 연구, 3천여 명의 인터뷰 분석, 7가지 유형화
강약약강형·성과 도둑·불도저·무임승차자·통제광·불성실한 상사·가스라이팅형

“돌아이들의 ‘심리’를 해부하자 비로소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끝을 모르는 사회비교 지향성은 데이브와 같은 강약약강형 인간의 무기인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으로도 작용한다. 강약약강형 인간이 비교를 멈추지 않는 이상 그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을 들키기 마련이다. 그 가면이 벗겨지는 때야말로 우리가 반격할 차례라고 저자는 말한다.
먼저 저자는 데이브의 민낯을 목격한 사람들을 찾아낸 다음, 데이브가 주도하는 예기치 못한 비교 상황 또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그의 시도를 목격하면, 함께 반발하거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 데이브보다 지위가 높은 상사에게 보고했다. 강약약강형 유형을 상대할 때는 그들이 권력자나 상사에게까지 가면 뒤 얼굴을 내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모두에게 민낯을 들켜버리고 더이상 비교 우위를 점할 대상이 없음을 깨닫고 절망할 때까지.

얘기를 들어보니, 데이브가 괴롭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로써 첫번째 목표가 달성되었다. 데이브 문제가 사내에 널리 퍼져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 나는 다음으로 데이브의 행동을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어보라고 강조했다. (...) 나는 데이브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가볍게 언급하고, 그의 구체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리는 데이브에 대한 비판을 썩 흥미롭게 듣진 않았지만, 대놓고 반박하지도 않았다._ 본문 중에서

저자는 데이브와 같은 강약약강형 인간을 포함하여 성과 도둑, 불도저, 무임승차자, 통제광, 불성실한 상사, 가스라이팅형까지 7가지 유형으로 ‘사무실의 도른자들’을 분류했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심리적 요인과 동기로 인해 ‘돌아이’처럼 행동한다. 앞에서 살펴본 강약약강형 인간은 높은 사회비교 지향성과 지위 예민성 등의 사회심리학적 특질을 무기 삼아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 다른 이들을 착취하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의 심리적 동인으로부터 그를 상대할 방법을 찾아낸다.
『사무실의 도른자들』에서 저자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돌아이 유형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분석해 대처법을 제시한다. 불도저 유형을 예로 들면, 그들은 의사결정권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한다고 느껴야 만족한다. 저자는 불도저가 원하는 대로 그들이 일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을 제안한다. 다만,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업무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을 쥐어주는 식이다. 그저 신나게 달린 불도저가 엔진을 식히며 뿌듯해하도록.
이처럼 『사무실의 도른자들』은 흥미로운 실제 사례와 20년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심리학의 주요 개념을 설명하고, 도른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실용적인 전략을 담아냈다. ‘돌아이 백과사전’처럼 읽히기도 하고, ‘돌아이 공략집’처럼 읽히기도 하는 이 책은 직장 내 관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모든 이들에게 일과 행복을 지키기 위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혹 제목을 보고 뜨끔한 독자가 있다면 책의 부록으로 실린 도른자 진단 테스트를 권한다. 친절한 해설을 통해 당신만의 오답 노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13,200 원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시인선 202)

도서정보 : 고선경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3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구겨진 뒤축 같은 오늘을 딛고
끝내 내일이라는 약속을 지켜내는 이십대의 초상

체념과 무기력만 남은 듯한 세상에 희망이라는 농담을 던지며 자신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는 청년 세대를 그리는 시인, 고선경의 첫번째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문학동네시인선 202번으로 출간한다.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할 당시 이문재, 정끝별 시인으로부터 넘치는 “시적 패기”로 써나갈 시의 힘이 기대된다는 평을 받은 시인은, 이십대의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수상 소감에서 밝혔듯 “무궁무진하고 이상한 미래”로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시편들을 선보여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오래된 테이프를 재생하듯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요소들을 배치해 읽는 이를 공감과 향수로 가득한 시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딴청과도 같은 회상이 끝나고 돌아온 현재는 그러나 지고 또 지는 게임의 연속이다. 시인은 자조적이면서도 능청스러운 유머로 청년들의 고단한 현실을 비틀고, 미지의 내일에 향기롭고 경쾌한 상상을 덧입힌다. 너머를 상상할 수 있기에 앞으로를 다짐하고, 사랑을 약속하며, 끝없는 소망을 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편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꿈꿈으로써 또 한번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

우리의 교환일기는 늦여름 더위를 먹고 다 타버렸지

심야 산책중 주운 나뭇잎들과 너의 깨진 안경알 잡동사니 불길한 애정 모든 게 따분해졌는지 몰라 선풍기가 고장난 빈 교실에서 있었던 일 기억해? 그날의 일기에는 귀여운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두었잖아 너의 펜촉은 유창한 주삿바늘이었어 알록달록한 감정들을 주입했지 통통하게 부푼 마음을 찔릴 때마다 나는 향기로워졌어
_「유통기한이 지난 약은 약국에 버려주시면 됩니다」에서

고선경의 시들은 교환일기를 쓰고 무한궤도와 패닉, 다프트 펑크를 듣던 그리운 한낮의 오후로 시간을 되돌린다. 귀엽고 감미로운 기억의 조각들은 화자와 읽는 이를 노스탤지어에 잠기게 한다. 그러나 시의 후반부에 이르러 교환일기를 쓰던 화자는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되어” 친구의 곁에 누워 있고, 부드러운 바람은 낡아가며 빗방울에는 녹이 슨다. 커져가던 회상을 과감히 떠나보내고 화자는 현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빚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이십대 청년으로 돌아와 중국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시작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젊음의 모습은 고선경의 시에 없다. 필터 없는 카메라와 에코 없는 마이크처럼 고선경의 시는 날것 그대로의 화소로 어딘가 어설픈 청년의 일상을 포착한다. 그런데 해고를 당해도, 시가 팔리지 않아도 고선경의 화자는 섣불리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조적인 유머로 상황을 비틀고 자신의 처지를 재차 환기한다. 자기를 연민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무게를 정확히 대면하는 패기가 고선경의 시편 곳곳에 어려 있다.

아르바이트를 잘리고 가게를 나서기 전
얼음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물었다
물을 마시면서
세상에는 야무지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겁니다
쯧, 훈수를 둔 뒤 사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

밤이
방까지 몰고 온 안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나는 빚이 있단 말이야 바보야 빚은
푹신푹신하다
_「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에서

조금만 견디면 더 나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이 시대의 청년들은 어떻게 현재를 견뎌내고 있을까. 고선경은 무궁무진한 상상을 덧입혀 눈앞의 삭막한 풍경을 경쾌하게 바꿔버린다. 잠 못 이루게 만들던 빚은 베개처럼 푹신푹신해지고, 도시는 색색의 비로 젖어들며, 비탈에는 빨간 토마토가 데굴데굴 굴러간다. 이러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고민은 떠나가고 마음은 가뿐해진다. 비록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상상이라는 해방구를 열어두는 자세에서 시대가 아닌 자신을 믿고 다독이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고선경의 핍진한 시선과 발랄한 상상력은 사랑을 말하는 시편들에서 혼합되며 독특한 반전을 만들어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일 때, 운동화의 구겨진 뒤축은 웃는 표정으로 바뀌어 보인다. 소다수의 기포처럼 연약하고 유한한 것들은 단단해지고 무한해진다. 이제 세상은 그 자체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현관에 놓인 신발의 구겨진 뒤축이 웃는 표정을 닮았어 너는 침대에 누워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청보리밭에 가고 싶다 멸종된 기억을 가지고 싶다 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릴 때 나는 사라진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아침의 어둠이 이젠 익숙해
그래도 같이 씻을까
산책을 갈까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_「샤워젤과 소다수」에서

시인 고선경의 재능은 이렇듯 쓰러진 풍경 너머를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때 빛을 발한다. 체념과 무기력에 잠식당하기 쉬운 지금,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온 고선경의 문장들은 “우리 여기 남아 삶을 더 지속해보자”(해설)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 삶의 무게를 떨쳐내고 미지의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청년의 초상이 『샤워젤과 소다수』의 사랑스러운 향기를 따라 그려지는 듯하다.

구매가격 : 8,400 원

독립기념일 2(세계문학전집 170)

도서정보 : 리처드 포드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03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현대인의 고뇌를 가장 설득력 있는 목소리와
풍부한 뉘앙스로 풀어내는 작가, 리처드 포드의 걸작

결혼, 가족, 공동체가 붕괴된 자리에서 짓궂은 웃음과
가슴 저린 슬픔으로 이룬 한 개인의 독립선언서

퓰리처상, 펜/포크너상, 박경리문학상 수상작

“수년간 나온 작품 중 최고다. 웃기고 가슴 저리도록 슬픈,
한 아버지와 아들의 처절한 여행.” _가디언

“비영웅적 삶 속의 영웅적인 삶,
거대 서사가 없어진 곳에서 찾아낸 작은 거대 서사.”

_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2018 박경리문학상 심사평 중에서


‘일상적 삶의 사실주의’의 정수이자 ‘가장 미국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 리처드 포드의 대표작 『독립기념일』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9, 170번으로 출간되었다. 포드의 문학적 페르소나이며 미국문학사상 가장 현실적인 인물 프랭크 배스컴을 주인공으로 한 ‘배스컴 4부작’ 중 두번째 작품이다. 포드는 『독립기념일』로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을 수상하고 장편소설로 이 두 상을 수상한 첫 사례가 되며 명실공히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들어선다.

2018년 박경리문학상 수상은 포드가 “이 시대의 가장 작가다운 작가”이며 그의 작품이 범세계적 보편성을 갖추었음은 물론 국내 독자들에게도 큰 울림과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들은 포드와 그의 작품에 대해 “비영웅적 삶 속의 영웅적인 삶, 거대 서사가 없어진 곳에서 찾아낸 작은 거대 서사”(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진지하고 성실한 작가, 판단하고 주장하기보다는 보여줌으로써 일련의 경험이 독자의 것이 되게 하는 원초적인 의미에서 소설의 기능을 능란하게 사용하는 작가”(최윤 소설가) “포드가 부단히 성찰하고 그려내는 것은 변질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로 인해 가정과 공동체가 해체된 후, 소외와 상실감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외로움이다. 리처드 포드의 문학세계가 범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고 평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죠.”

『독립기념일』의 주인공 프랭크 배스컴은 한때 스포츠 저널리스트였고, 단편집을 펴낸 적도 있는 소설가이지만, 첫아들의 죽음과 이혼 등 여러 시련을 겪은 후 이제는 부동산중개인이 되어 미국 뉴저지주의 해덤 지역에서 홀로 살고 있다. (해덤은 원래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지명이다. 리처드 포드의 작품 공간으로 종종 등장하는 ‘나무가 많은 도시’ 뉴저지주 해덤은 그가 창조해낸 가상의 공간이다.) 배스컴은 고객과 함께 매물을 살펴보고 자기 소유의 집에 사는 세입자에게 월세를 받으러 방문하고, 아들 폴과 모처럼 여행을 떠나며 독립기념일 주간을 보낸다.
전처 앤과 함께 사는 아들 폴은 정서불안을 겪고 있으며 얼마전 슈퍼마켓에서 콘돔을 훔치다 걸려 경비원과 몸싸움을 벌인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다. 폴의 재판은 독립기념일 바로 다음날로, 배스컴은 여행을 통해 아들의 속마음을 알아보고 진정한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일깨워줌으로써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고자 한다. 그러나 아들과의 여행은 시작도 하기 전에 삐걱대기 시작한다.

우울과 허무가 퍼졌고, 사람들은 ‘이런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범죄 통계와 동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동안 얼마나 안전불감증에 걸려 지냈는가를 다들 실감했다. _본문 중에서

아들을 데리러 앤의 집으로 가는 길, 장시간 운전에 지친 배스컴은 어느 모텔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모텔 주차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경광등을 밝히고 있고, 경찰관과 사복 경찰, 구경꾼들로 어수선하다. 독립기념일 휴일을 맞아 여행을 떠나온 어느 가족의 가장이 십대 소년의 칼에 맞아 숨진 것이다. 살해 동기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였다. 이에 배스컴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쳐올지 모를, 누군가의 일상을 단번에 앗아갈 수 있는 사건사고와 재앙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자녀와 함께 보낸 어떤 시간도, 뒤돌아보면 가장 슬픈 시간이기도 하다. 밝고 생생한 삶이 지나가버렸다는 슬픔, 매 순간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슬픔이다. _본문 중에서

배스컴은 그 공포감을 가슴 한켠에 간직한 채 아들 폴과 여행길에 나선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대화 시도에 아들은 가벼운 말장난으로 일관하며 갖은 기행을 일삼는다. 배스컴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아들과 불안하고 위태로운 여행을 이어간다. 형의 죽음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방황하는 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어디로 튈지 모를 아들이 나쁜 일에 휘말리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서인지, 그는 이번 여행이 마치 아들과의 마지막 여행이라도 되는 양 불안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의 불안감은 급기야 현실이 되고 만다.

“당신은 결코 죽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산다.”

배스컴은 이혼 후 ‘존재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존재의 시기’란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별로 신경쓰지 않는’ 시기이자 ‘싫어하는 것, 꺼림칙하고 복잡해 보이는 것들을 무시하고 흘려보내는’ 시기다. 그는 그 누구와도 깊게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로운 삶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앤과의 결혼과 이혼, 그에 따른 아쉬움과 후회가 이따금 그의 가슴을 찔러오고, 아들 폴의 문제적 행동이 점점 심상치 않게 느껴지고, 연인 샐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만 만나는 것’과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것’의 기로에 서게 되면서 ‘존재의 시기’에 위기가 찾아온다.

예전에 느꼈었고 또 느끼고 싶은 그 감정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약간의 흔적과, 커다란 궁금증뿐이다. 그 감정은 어디로 갔을까. 다시 돌아오기는 할까. 즉, 그 감정은 무효가 되었다. 누군들 움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고 무엇도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당신은 결코 죽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산다. _본문 중에서

배스컴은 독립기념일 주간 동안 전처 앤, 여자친구 샐리와 각각 불화를 빚었다가 모호한 화해를 거듭한다. 앤과의 결혼생활에서 배스컴은 “시간이 지나면 나는 전혀 남지 않고, 오직 상대와 화학적으로 결합된 나만 남으리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이혼 후에도 앤과의 관계, 혹은 그녀와 함께했던 과거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샐리와의 관계는 다르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그와 그의 행동,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행동만이 있다. 그러나 배스컴은 ‘유대감’이나 ‘소속감’이라곤 전혀 없는 샐리와의 관계에서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는 그는 앤과 샐리, ‘유대감’과 ‘자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간다.

“집이란 우리에게 작가적 권능을 휘두른다.”

배스컴은 수달째 마크햄 부부에게 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버몬트주에서 온 마크햄 부부는 그중 어느 집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집은 그리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돈으로는 그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침내 마크햄 부부가 마음에 드는 집을 찾지만, 그들이 구매를 망설이는 사이 그 집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구매하는 대신 임차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임대주택을 보러 가서도 여전히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 것인 양 모든 것을 철저하게 확인하려 들며 또다시 장고의 조짐을 보인다.

집을 사는 것은 결국,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걱정하게 될 일들을 부분적으로 결정해준다. _본문 중에서

내가 볼 때 부동산 거래에 관한 두려움(마크햄 부부가 지녔던 그 순수하고 단순한 두려움)은 사실 주택 구매 자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주택 구매는 인생에서 가장 희망적인 선택을 하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비록 돈을 날려버릴 위험이 있긴 하지만 유독 부동산 거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실 진정한 공포는 모든 미국인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냉정하고도 달갑지 않은 어떤 깨달음이다. 우리 모두, 똑같은 소원을 소원하고 좌절된 욕망을 욕망하며 바보스러운 공포와 환상에 몸을 떠는 멍청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 판박이처럼 똑같은 틀에서 찍혀나온 존재라는 것. 그리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시점이 다가옴에 따라, 즉 거래가 마무리되어 법원에 기록이 남을 순간이 다가옴에 따라, 자신이 한 문화의 틀 속에 더 깊이, 더 익명화된 존재로 파묻히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_본문 중에서

나는 안다. 어떤 이들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 집을 구입하고, 가구를 옮기고, 그리고 이 주 안에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런 후에야 더 나은 인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다시 부동산 매물을 확인하고, 같은 부동산중개인과 의논하고, 운송비를 지불하고, 대부금의 조기상환에 따른 위약금을 부담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즉 실수와 보완이라는 과정을 통해 경제는 계속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동산 거래란 당신이 꿈에 그리던 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를 처분하는 행위가 된다. _본문 중에서

배스컴도 ‘집’이 누군가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래서 구매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점검과 숙고 과정에 무척이나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통해 가족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의 면면은 물론 그들 사이의 관계, 그들이 함께 혹은 각자 살아갈 미래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배스컴은 마크햄 부부가 그 임대주택에서 완벽하지 않더라도, 행복과 불행이 뒤섞인 일상을 오래오래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집’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물질적 요소가 한 사람의 정체성이 되고 그의 인생을 뒤흔드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부동산 구매를 위한 일련의 의사 결정과 그에 필요한 이런저런 점검과 정리 과정들에 대한 서술은 흡사 일상 전반에 대한,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한 하나의 환유처럼 읽히기도 하며, 마크햄 부부와 매클라우드 부부 등 배스컴이 ‘부동산중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맞닥뜨리는 인물들과의 장면에서는 사실적 묘사와 서술을 통해 공감의 여지가 한층 증폭되어, ‘일상의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라는 평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존재의 시기에서 진정한 독립의 시기로

결혼, 가족, 공동체와 같은 정신적 기반, 그리고 집, 돈, 직업 같은 물리적 기반이 무너진 자리에서 프랭크 배스컴과 등장인물들은 방황과 사색을 거듭한다. 그 과정에서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고 좌절하기도 한다. 리처드 포드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기반들이 붕괴했을 때, 우리가 설 자리를 잃었을 때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와 단계로 풍부하게 그려낸다.
‘존재의 시기’를 지나가며 배스컴은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해 현재를 흘려보내지 말 것,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지도 말 것. 언제나 ‘나’로 존재하되, 소중한 사람과 마음을 나눌 줄 알면서도 그 사람도 언제나 타인일 수밖에 없음을 간과하지 않을 것. 공동체적 유대감이 주는 만족감을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공동체라는 허상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 것.
기반이 사라진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각자의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 결론은 잠정적이다. 완전한 정착과 완벽한 결론은 없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인생은 ‘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포드는 『독립기념일』을 통해 “고통과 비극을 멀리할 수 없는 보통의 삶”과 그 속의 일상적 불안과 소외, 상실감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통해 성실한 삶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촘촘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구매가격 : 10,200 원

오믈렛(문학동네시인선 203)

도서정보 : 임유영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3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붙잡아두어도 될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보이지 않게 두어도 될까.
따뜻한 거 먹이고 싶다.”

시적인 것이 아닌 듯한 문장들의 배합으로 만들어낸 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은 오믈렛, 그 이상한 충만감

한국시의 새로운 이름으로 기억될 임유영의 첫 시집 『오믈렛』 출간

2020년 시 쓰는 이들의 문학적 열망이 담긴 6천여 편의 시가 응모된 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의 심사대에는 ‘아침’이라는 제목의 연작시 한 묶음도 올랐다. 9편 중 8편의 제목이 모두 ‘아침’인 이 응모작은 저마다의 개성을 부각시키려는 다양한 고투가 엿보이는 시편들 사이에서 오히려 심사자들의 눈에 띄었다. 무심하리만치 심상한 동일 제목의 시편들을 제출한 이 비범한 패기를 지닌 시인의 시는,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박상수로 하여금 “뭐야, 이게 시인가? 근데 왜 자꾸 생각나지?”(심사평)라는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죽음 앞에 선 인간, 혹은 이미 죽어본 경험이 있는 자의 내면을 펼쳐 보이는 ‘아침’ 연작은 기존의 익숙한 시와는 어딘가 다른, 낯선 목소리의 힘을 발했다. 이 응모자는 곱씹어 읽을수록 “어느 한 편 빠지는 작품이 없이 굉장한 디테일과 안정적인 이미지”를 구사하면서 “마치 한 권의 완결된 시집을 읽은 듯한 만족감”(시인, 문학평론가 박상수)을 준다는 감상을 불러냈고, “고유한 음악이 들렸다”(시인 박연준)는 소회를 불러일으켰으며, “삶의 표면을 따라 부드럽고도 유려하게 이어지는 아름답고 쓸쓸한 세계”(시인 황인찬)를 구축해냈다는 평까지 얻으며 그해 시단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시인 임유영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작품활동을 시작한 임유영은 부지런히 신작 시를 발표하면서 독특한 리듬과 이야기성을 지닌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정확한 죽음의 시각을 기록하기」 외 5편이 “시가 끝난 후 시 전체를 시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들어올”(문학평론가 이광호)린다는 평을 받으며 2021 문지문학상 후보로, 「호수관리자들」 외 5편이 “깊은 통찰력”과 “감각적인 예지력”(시인 김행숙)을 겸비했다는 평을 받으며 2022 문지문학상 후보로 연달아 선정되면서 문단의 기대와 신뢰를 받고 있음을 증명해냈다.
『오믈렛』은 그런 임유영의 첫 시집이다. 죽음과 탄생, 이야기와 다성성, 시쓰기에 대한 의식과 여성성 등이 알알이 녹아 있다. 1부(‘살아 계신 분을 묻어드릴 수도 없었고’)는 임유영식 시쓰기의 기원에 대한 힌트를 엿보게 하고, 2부(‘가서 돌 주우면 재미있을’)는 꿈인 듯 현실인 듯 아름답고도 쓸쓸하고 그만큼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3부(‘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는 그 강렬했던 ‘아침’ 연작에 새로운 제목을 달아 선보이며 죽음 이후 다시금 깨어나는 듯한 반복과 각성의 장면들을 더욱 긴장감 있게 펼쳐 보이고, 4부(‘어디 가는 어린애와 어디 갔다 오는 개’)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협업한 결과로 탄생한 시의 색다른 창조성을 느끼게 한다.

구매가격 : 8,4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