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도서정보 : 정세랑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3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시선으로부터,』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이 선보이는 본격 역사 미스터리 모험담!
언제나 우리에게 놀라운 재미와 따뜻한 감동을 동시에 전해주는 작가, 정세랑이 『시선으로부터,』 이후 3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로 돌아왔다. 한번 손에 쥐면 순식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흡인력 있는 전개와 사랑스럽고 생동감 있는 인물들, 읽는 이를 빈틈없이 감싸안는 온기 어린 시선으로 독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아온 정세랑은 자신만의 분명한 목소리를 지니면서도 폭 넓은 스펙트럼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왔다. 『시선으로부터,』로는 모계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가족상을 제시해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1위, 조선일보, 경향신문, 문화일보 등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고, 같은 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이경미 연출, 정유미·남주혁 주연) 또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스토리텔러로서의 저력을 여실히 증명한 바 있다.
그런 정세랑이 이번에는 본격 명랑 역사 미스터리 소설을 선보인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정세랑이 펴내는 첫 역사소설이자 첫 추리소설, 그리고 첫 시리즈인 ‘설자은 시리즈’의 1권이다. ‘설자은 시리즈’는 통일신라시대의 수도 금성을 배경으로, 왕실의 서기로 일하는 설자은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권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어린 시절 죽은 오빠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설자은이 금성으로 돌아온 뒤, 망국 백제 출신 장인 목인곤을 식객으로 들여 함께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을 해결하다 왕의 눈에 띄어 월지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되는 과정까지를 그린다. 정세랑이 만들어낸 또하나의 환상적인 세계, 당시의 모습을 눈앞에 펼쳐 보이듯 생생하게 그려낸 7세기의 먼 과거에서 매력적인 인물들이 벌이는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모험담. 오래도록 독자들을 사로잡을 장대한 이야기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천년왕국 통일신라의 휘황찬란한 수도 금성,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황금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 대수사극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큰 전쟁이 끝나고 세 나라가 하나가 되어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맞이했지만 내부에는 붕괴의 조짐이 도사리고 있던 통일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는 두뇌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간파하는 비상한 추리력을 가진 설미은은, 여성으로 태어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당나라 유학이 내정될 만큼 명석했던 오빠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삶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가족을 휩쓴 수많은 죽음 때문에 셋째였지만 맏이가 된 큰오빠 설호은이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비범한 능력을 지닌 미은을 이용하기로 한 것. 호은의 책략에 의해 미은은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죽은 오빠 ‘자은’의 이름으로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그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부를 끝마친 설자은은 다시 자신의 고향,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이에게는 비범한 사건이 찾아오는 법일까? 자은은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기이한 사건들을 마주치게 된다.
자은은 당나라의 등주에서 신라의 당은포로 향하는 배 위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을 만나고, 금성의 대저택에서는 연유를 알 수 없는 업화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 이른 전쟁 영웅에 얽힌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며, 신라 육부 여인들의 길쌈 대회에서 일어난 사건의 범인을 추적한다. 이윽고 자은의 명석함은 신라의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왕이 주최한 연회에 초대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쯤 월지에서 엎드린 채 죽어 있는 시신이 떠오른다. 사건의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기 전까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돌아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 왕, 왕의 눈에 들 수 있도록 자은에게 재주를 드러내기를 종용하는 호은,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자은. 과연 자은은 그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나는 피하지 않는다.”
왕이 답했다. 자은은 돌연 왕이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저리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지? 뻐근할 법도 한데 처음의 자세 그대로였다.
“그대들도 이 일의 수면 아래를 볼 때까지 돌아가지 못한다. 마침 재주가 있다 하는 이들을 불러모았으니 그 재주를 써 명명백백한 바닥을 드러내라.”
수면 아래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밤의 월지, 검은 물을 손으로 퍼내라는 명처럼 들렸다.
_「월지에 엎드린 죽음」
정세랑이 탄생시킨 또하나의 독보적인 캐릭터, 설자은
“네가 쓰이지 않으면 신라가 잃는 것이라고 했지.
자, 내가 네게 쓰일 기회를 주겠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설자은은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에 이어 정세랑이 탄생시킨 또하나의 독보적인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7세기에 탐정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신라 탐정 설자은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을 설자은이 지닌 진짜 능력은, 일어난 일의 구조를 간파하는 뛰어난 추리력이 아니라 사람의 안쪽을 깊이 헤아리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탐정들과 설자은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그 따뜻한 마음에 있다. 설자은 외에도 이 이야기에는 매력적인 인물들로 가득하다. 언제나 생긍생글 웃는 얼굴로 능청을 떨지만 부탁한 건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손재주를 지닌 망국 백제 출신 장인 목인곤, 뛰어난 머리를 지녔지만 어딘지 한군데가 고장난 듯한 윤리관을 지닌 설호은, 산학에 능하며 반듯한 균형 감각을 가진 설도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마음을 지닌 산아, 그리고 보는 이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왕까지. 이처럼 개성 강한 인물들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우러져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설자은 시리즈’를 읽는 또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자은은 열흘 안에 네 여자 중 누가 간절히 금전의 모가 되고 싶어하는지, 그중에 또 누가 어떻게 베틀을 부술 수 있었을지 밝혀내야 했다. 길쌈 대회가 끝나면 여자들은 원래대로 집안으로 숨겨질 테고,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기 십상일 터였다. 다음 여름이 될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곪은 채로 둘 수는 없었다. 염을 품고는 좋아하는 일도 좋아할 수 없고, 아끼는 이도 아낄 수 없다. 처음엔 도은을 위해서 시작했지만, 자은의 염려는 어느새 육부 여자들 전체에게로 번지고 있었다.
_「보름의 노래」
대학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한 정세랑은 오래전부터 본격적으로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소망을 비춰왔다. 작가는 통일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을 구상하고 경주로 첫 조사 여행을 떠난 것이 2016년이라 밝혔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의 첫 에피소드이자 ‘설자은 시리즈’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갑시다, 금성으로」가 미스터리 소설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에 게재된 것이 2018년이니,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가 완성되기까지 최소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금성의 흔적을 찾아 경주로 수차례의 답사를 다녀오고, 수년간의 자료 조사를 거친 뒤에야 시리즈의 첫 권을 내놓을 수 있었다.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먼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이 우리 앞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게 된 것이다. 정세랑은 ‘작가의 말’에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을 쓰고자 했을 때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며, “풍요 속에 숨어 있는 붕괴의 씨앗”을 품은, “한껏 융성을 향해서 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기 시작”(‘작가의 말’)한 시대를 거울삼아보고 싶었다고 썼다. 그 말대로 평화로우면서도 혼란이 잠재되었던 시기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펼쳐지기에 안성맞춤인 무대일 것이다.
정세랑의 마법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추리소설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적 쾌감을 주는 트릭들도 물론 등장하지만 정세랑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작품의 배경은 680년대 후반, 1300년이나 과거의 이야기임에도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현재의 우리를 비춰보며 그 시대의 사건들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설자은 시리즈’는 최소 세 권으로 기획된 시리즈로 2권 『설자은, 불꽃을 쫓다』(가제), 3권 『설자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가제)가 이어 출간될 예정이다. 작가는 열 권 이상의 시리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자 희망을 밝혔다. 앞으로 오래도록 이어질 새로운 시리즈의 탄생을 함께 지켜봐주시길 바란다.
“이 책을 집어든 분들이 한순간만이라도 시간 여행의 감각을 느끼신다면 좋겠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직접 간 듯한 낯선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다. 모두가 부를 줄 알았으나 이제는 한 마디도 남지 않은 노래를 함께 흥얼거릴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노래가 천 년 후에도 잊히지 않는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_「이야기가 발생한 틈새들─‘설자은 시리즈’가 탄생하기까지」, 『정세랑 작가 노트』에서
구매가격 : 11,800 원
오믈렛(문학동네시인선 203)
도서정보 : 임유영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31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붙잡아두어도 될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보이지 않게 두어도 될까.
따뜻한 거 먹이고 싶다.”
시적인 것이 아닌 듯한 문장들의 배합으로 만들어낸 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은 오믈렛, 그 이상한 충만감
한국시의 새로운 이름으로 기억될 임유영의 첫 시집 『오믈렛』 출간
2020년 시 쓰는 이들의 문학적 열망이 담긴 6천여 편의 시가 응모된 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의 심사대에는 ‘아침’이라는 제목의 연작시 한 묶음도 올랐다. 9편 중 8편의 제목이 모두 ‘아침’인 이 응모작은 저마다의 개성을 부각시키려는 다양한 고투가 엿보이는 시편들 사이에서 오히려 심사자들의 눈에 띄었다. 무심하리만치 심상한 동일 제목의 시편들을 제출한 이 비범한 패기를 지닌 시인의 시는,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박상수로 하여금 “뭐야, 이게 시인가? 근데 왜 자꾸 생각나지?”(심사평)라는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죽음 앞에 선 인간, 혹은 이미 죽어본 경험이 있는 자의 내면을 펼쳐 보이는 ‘아침’ 연작은 기존의 익숙한 시와는 어딘가 다른, 낯선 목소리의 힘을 발했다. 이 응모자는 곱씹어 읽을수록 “어느 한 편 빠지는 작품이 없이 굉장한 디테일과 안정적인 이미지”를 구사하면서 “마치 한 권의 완결된 시집을 읽은 듯한 만족감”(시인, 문학평론가 박상수)을 준다는 감상을 불러냈고, “고유한 음악이 들렸다”(시인 박연준)는 소회를 불러일으켰으며, “삶의 표면을 따라 부드럽고도 유려하게 이어지는 아름답고 쓸쓸한 세계”(시인 황인찬)를 구축해냈다는 평까지 얻으며 그해 시단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시인 임유영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작품활동을 시작한 임유영은 부지런히 신작 시를 발표하면서 독특한 리듬과 이야기성을 지닌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정확한 죽음의 시각을 기록하기」 외 5편이 “시가 끝난 후 시 전체를 시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들어올”(문학평론가 이광호)린다는 평을 받으며 2021 문지문학상 후보로, 「호수관리자들」 외 5편이 “깊은 통찰력”과 “감각적인 예지력”(시인 김행숙)을 겸비했다는 평을 받으며 2022 문지문학상 후보로 연달아 선정되면서 문단의 기대와 신뢰를 받고 있음을 증명해냈다.
『오믈렛』은 그런 임유영의 첫 시집이다. 죽음과 탄생, 이야기와 다성성, 시쓰기에 대한 의식과 여성성 등이 알알이 녹아 있다. 1부(‘살아 계신 분을 묻어드릴 수도 없었고’)는 임유영식 시쓰기의 기원에 대한 힌트를 엿보게 하고, 2부(‘가서 돌 주우면 재미있을’)는 꿈인 듯 현실인 듯 아름답고도 쓸쓸하고 그만큼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3부(‘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는 그 강렬했던 ‘아침’ 연작에 새로운 제목을 달아 선보이며 죽음 이후 다시금 깨어나는 듯한 반복과 각성의 장면들을 더욱 긴장감 있게 펼쳐 보이고, 4부(‘어디 가는 어린애와 어디 갔다 오는 개’)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협업한 결과로 탄생한 시의 색다른 창조성을 느끼게 한다.
구매가격 : 8,400 원
엑소시스트
도서정보 : 윌리엄 피터 블래티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09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영원한 호러 고전, 불멸의 스테디셀러
출간 40주년 기념 에디션 공식 한국어판
독자들이 이 판본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_윌리엄 피터 블래티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메릴랜드 열네 살 소년의 악마 빙의 사건’을 소재로 쓴 첫 장편소설. 엑소시즘이라는 개념을 처음 대중적으로 알리며 북미 대륙에 충격을 몰고 온 이 작품은 1973년 영화로 제작되어 할리우드 최고 박스오피스 기록을 경신하며 사회적 열풍을 일으켰고, 그해 오스카상 각색상, 골든글로브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러 편의 속편과 TV시리즈가 탄생했으며,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리부트 3부작이 2023년 <엑소시스트—믿는 자>를 시작으로 공개될 예정이다(국내 개봉 2023년 10월 18일). 문학동네에서는 출간 40주년을 맞아 작가가 직접 가필 수정한 판본(2011)을 저본으로 삼은 공식 한국어판을 출간한다.
신앙에 대한 의문과 초자연적 현상의 서스펜스
시대와 장르를 넘어선 불멸의 오컬트 호러 걸작!
이라크 북부, 유물 발굴 현장에서 괴이한 악마 형상의 조각을 발견한 노신부 메린은 오랜 적 파주주가 다시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 열한 살 딸 리건과 살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 맥닐의 집에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 알 수 없는 힘에 사방으로 요동치는 침대, 한겨울 바깥처럼 냉기가 감도는 방안,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리며 성인 남성의 목소리로 욕설을 퍼붓는 소녀. 의사들은 신경질환의 일종으로 진단하지만 각종 치료로도 딸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크리스는 의학 대신 종교의 도움을 구한다. 정신의학을 전공한 예수회 사제 데이미언 캐러스는 어머니의 죽음 후 믿음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크리스의 청을 받고 고민하지만, 몇 번 소녀를 대면하는 사이 그 안에 또다른 존재, 사악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고, 과거 엑소시즘 경험이 있는 메린과 함께 구마 의식을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침대에서 공중부양하는 소녀의 몸, 180도 비틀려 뒤를 돌아보는 머리, 자해와 자위의 도구로 이용되는 십자가, 뒤집어진 자세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스파이더 워크’. 영화 <엑소시스트>는 수십 년이 지나도 관객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충격적인 장면들을 탄생시켰다. 개봉 당시 극장가에는 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하는 관객들이 속출했으며,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상영 금지를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주요 방송사에서 ‘워터게이트’ 사건보다 앞서 보도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총 수입 1억 9천만 달러가 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역겨움과 공포 역시 대중적으로 수용 가능한 오락 코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악마 빙의와 엑소시즘, 구마사제, 나아가 희생으로 끝맺는 선과 악의 대결 구도는 그뒤 여러 매체에서 변주되며 대중의 말초적인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골 소재로 사로잡았다.
『엑소시스트』는 1949년 미국 메릴랜드주에 살던 열네 살 소년이 악마에 빙의되어 두 달간 구마 의식을 받고 해방된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예수회 소속인 조지타운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윌리엄 피터 블래티는 신문 기사를 통해 이 이야기를 접하고, 악의 본성에 대한 종교적 견해와 해석, 철학적 고찰을 더한 첫 장편소설의 영감을 받았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실제로 이 영화를 관람하고 내린 호의적인 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엑소시스트』는 악령의 존재를 단순한 공포의 대상으로 그릴 뿐 아니라 희생과 순교에 대한 종교적인 메시지로 이어간다. 때문에 소설은 귀신 들린 소녀의 기행과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그려내는 한편, 그에 맞서는 사제들의 내면 묘사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악령은 이곳에, 너희와 함께 있다
말초적 공포의 이면에 담아낸 인간 드라마
『엑소시스트』에서 악마에 맞서 분투하는 두 사제, 메린과 캐러스는 각각의 방식으로 신앙과 신념을 지키고 있는 인물들이다. 정신과의사로서 동료 사제들의 상담사 역할을 해온 캐러스는 아픈 어머니를 방치한 채 홀로 죽음을 맞게 한 것에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응답 없는 기도는 믿음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고, 딸에게 씐 악마를 쫓아달라는 크리스의 요청을 받고도 그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고 결정을 미룬다. 실제로 과거 악마 빙의의 증거로 여겨졌던 많은 현상이 조현병, 간질, 틱 장애 등 의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병증임이 밝혀진바, 악령의 존재를 쉽게 믿지 못하는 캐러스의 갈등은 보이지 않는 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다. 한편 과거 이미 엑소시즘 의식에서 악마 파주주와 맞섰던 경험이 있는 메린은 좀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를 설득한다. 구마 의식을 선함, 즉 인간다움을 되찾으려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마귀의 목표는 빙의자가 아니라네. 그건 바로 우리야…… 관찰자들……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목표라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거겠지.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도록.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짐승으로 인식하게 하려는 거야. 사악하고 부패하고 추악하고 무가치하며 존엄이라고는 없는 존재로 말이지.” (본문 460쪽)
2000년 공개된 영화 감독판 <엑소시스트─디렉터스 컷>에는 개봉 당시에는 불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삭제되었던 두 신부의 대화 장면이 더해졌다. 악령의 목적이 리건 한 사람만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이들의 신을 부정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메린의 대사는 소설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2011년 소설 출간 40주년을 맞아 기념판을 내면서 작가는 캐러스의 꿈 장면을 적지 않은 분량으로 추가했다. 뤼카라는 이름의 신부가 찾아와, 엑소시즘을 실행하려는 그의 결단이 신성모독으로 이어질 수 있을뿐더러 맥닐 모녀의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선과 악,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고뇌하며 올바른 결말을 찾아가려는 그들의 결단을 이 판본에서는 좀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엑소시스트』 40주년 기념판에는 전반적으로 내용을 다듬는 과정에서 새로운 표현과 문장이 더해졌다. 첫 출간 당시에는 시간과 자금의 한계로 미처 담지 못했던 부분들이다. 독자들이 이 판본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윌리엄 피터 블래티
구매가격 : 12,600 원
순교자(세계문학전집 041)
도서정보 : 김은국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3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남과 북의 이념 대립이 만들어낸 열두 명의‘순교자’
‘죽은 자’들을 둘러싼‘살아남은 자’의 진실 게임
이야기는 1950년 11월, 육군본부 정보처 평양 파견대의 장대령과 이대위가 6·25전쟁 직전에 일어난 목사 집단 처형 사건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보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열네 명의 평양지역 목사들이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되었고, 그중 열두 명이 처형당했다. 살해된 목사의 숫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그들이 죽어간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이 사건을 둘러싼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사건 해결의 책임을 맡은 장대령은 열두 목사들이 북한 괴뢰정권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며, 진실은 외면한 채 그들을 영웅적이고 성스러운 ‘순교자’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사건을 정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대위는 “우리의 선전 목적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비틀 수는” 없다고 말하며, 진실은 그것이 추악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한다고 맞선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순교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신목사이다. 그가 열두 목사의 처형 현장에 있었다고 알려진 후, 장대령은 과연 신목사가 순교자들에 대한 진실을 세상에 드러낼지 관심을 보인다. 장대령과 신목사 모두 처형 현장의 진실을 감추려고 하지만, 신목사의 의도는 장대령과 전혀 다르다. 진실이 진실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다.
“이 작품의 분위기는 아주 엄숙하다. 그러나 이 책의 열정은
그 엄숙함의 거칠고 메마른 표면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다.” _ 필립 로스
『순교자』는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의 대표작이다. 6·25전쟁 당시 평양을 배경으로, 이념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나가며 그 과정에서 겪는 신앙과 양심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건을 인간의 실존과 보편적 운명이라는 세계문학적 주제와 연결시켰으며, 이를 추리소설적 요소를 이용해 풀어낸 흡입력 강한 수작이다. 1964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20주 연속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고, 세계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경희대 영문학과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도정일이 기존 번역본의 오류를 수정해 새로운 번역으로 선보인다.
작가 김은국은 1932년 함경남도 함흥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해방을 맞이했고, 1947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가족 전체가 남한으로 내려와 목포에 정착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 미군 사령관 아서 G. 트루도 소장의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제대 후 1955년 트루도 소장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이오와 대학교, 존스 홉킨스 대학교 등에서 문학 및 창작 석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 강의와 소설 집필을 병행하던 그는 1964년 첫 소설 『순교자』를 발표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14년, 작가가 한국을 떠난 지 9년 만의 일이었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이념의 대립이 만들어낸 열두 명의 ‘순교자’를 둘러싼 진실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추적해나가는 이 작품은 출간 즉시 미국 언론과 문단의 관심을 끌었다. 작가 펄 벅은 “신앙을 갈망하는 데서 비롯되는 의혹과 고뇌를 다루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한국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건을 인간의 실존과 보편적 운명이라는 ‘세계문학적’주제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순교자』의 의미는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7,700 원
용의자의 야간열차(세계문학전집 138)
도서정보 : 다와다 요코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2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를 걷는 작가 다와다 요코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일로 떠났고, 독일어와 일본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 다와다 요코. 그는 독일에 자리잡고 있지만 일 년 중 한 달은 일본에서, 한 달은 미국에서 보낸다. 주로 사용하는 두 언어, 독일어와 일본어를 모두 낯설게 두기 위해서다.
다와다 요코는 모국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행위를 비겁함, 무능함으로 해석한다. 익숙한 언어에 종속된 채 성찰 과정 없이 물 흐르듯 쏟아져나오는 말은 결코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모국어 단어로 불러왔던 어떤 개념을 낯선 외국어 명칭으로 부를 때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연필을 연필이 아니라 독일어 단어 블라이슈티프트(Bleistift)라고 부를 때, 머릿속에서 블라이슈티프트라는 단어와 연필이라는 개념을 연결시키는 과정을 한번 더 거쳐야 한다. 그 순간 느끼는 이질감이 바로 다와다 요코의 문학을 이루는 요소다.
다와다 요코는 작품의 초점을 언어에 둔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그 사회의 규범까지도 제약한다. 모국어라는 보호막은 그 밖에 있는 다른 것들을 아예 생각하거나 느끼지도 못하게 차단해버리는 장벽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다와다는 30년 넘게 독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독일어를 자신의 새로운 모국어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모국어인 일본어 역시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은 편하고 자연스러울 때는 문제를 느끼지 못하다, 낯선 것을 마주하고 나서야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다와다 요코는 바로 이런 순간이 자기 문학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다와다의 작품은 낯설게 느껴지고, 심지어 조금 불편할지도 모른다. 익숙함에 머무르는 한 경계에는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낯설게 만든 언어로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를 사유하는 것, 그것이 다와다 요코가 문학에서 추구하는 길이다.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새로운 여행
다와다 요코의 작품에는 열차가 자주 등장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로 떠날 때, 다와다는 비행기가 아닌 열차를 선택했다. 비행기는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하기 위한 교통수단이며 한번 올라타면 목적지를 바꿀 수도, 자리를 옮길 수도 없다. 반면 열차는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며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여정을 변경할 수도 있으며 여행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는, 불확실한 교통수단이다.
『용의자의 야간열차』에서 ‘당신’은 야간열차를 타고 유럽과 아시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시기도 배경도 명확하지 않으며 여행자가 누구인지, 목적지가 어디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저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넘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관념을 뒤흔든다. ‘당신’은 갖고 있던 인식이 계속해서 어긋나는 경험을 한다. 지역 이름을 듣고 자동적으로 떠올린 이미지는 현지에서 매번 무참히 배반당한다.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며 추측한 이야기는 항상 빗나간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못된 이야기를 만들어 오해받기도 하고, 전혀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이 같은 어긋남과 불확실함은 ‘당신’이라는 대명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당신’이 등장하면서 독자는 ‘당신’과 ‘당신’을 관찰하는 또다른 화자를 인식하고, 이 흔치 않은 호칭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과 화자 사이의 거리를 느끼게 된다. ‘당신’과 화자의 관계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다와다 요코가 기존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정체성을 넘어서려 시도한 작품이다. 고정관념의 틀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인식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맛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낯선 사유가 불러오는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익숙한 공동체의 규범과 모국어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여행 그 자체와도 닮아 있다.
모든 놀라운 문학은 당신이 어떤 문화, 어떤 장소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에 탄생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특별한 상황, 매우 문학적이고 시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뿐이죠. _다와다 요코
나라와 언어에 얽매이지 않는 세대의 문학
이주자 문학은 대부분 사회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환경과 상황 탓에 강제로 이주민이 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타향에서 느낀 문화적 괴리감, 차별과 소외감, 그 과정에서 겪은 폭력 등 아픈 경험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다와다 요코는 다른 방향을 향한다. 그는 태어난 일본을 스스로 떠나 독일에 자리잡았다.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국적이 더는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면서, 이주자들의 경험과 고민은 개인의 차원으로 넓어지고 있다. 문화와 문화,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고 몸에 익어 있던 사유가 깨져나가면서, 수많은 이주자들은 혼란 속에서 새로운 인식을 마주한다. 다와다의 작품이 이주자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은 모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아티스트나 지식인이 무척 많은 시대입니다. 외국어를 혀에 올릴 때의 감촉은 이제는 ‘시대를 대표하는 감촉’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외국어를 말할 때면 구멍이 뚫리거나 꺾이거나 쪼개지거나 부서지거나 휘거나 하는 부분이 생깁니다만, 그런 부분에서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알 가치가 있는 속사정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_다와다 요코
이 같은 다와다의 작품 세계는 이미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1987년 첫 책을 출간한 이래 독일에서 레싱 문학상, 샤미소 상, 괴테 메달 등을, 일본에서 아쿠타가와상, 이즈미 교카 상,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이토 세이 상, 요미우리 문학상, 무라사키 시키부 상, 노마 분케이 상 등을 받았다.
구매가격 : 8,400 원
익사(세계문학전집 128)
도서정보 : 오에 겐자부로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2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오에 겐자부로 문학의 원점, 아버지
1957년 등단 이후 아쿠타가와상,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노벨문학상 등 여러 상을 받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우리 시대의 소설가라 인정받는 일본 현대문학의 거장 오에 겐자부로.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한 상황과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 천황제와 군국주의, 평화와 공존 등을 주제로 많은 글을 발표했고, 스스로 ‘전후 민주주의자’라 칭하며 국내외 여러 사회 문제에 참여해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왔던 작가가 자신의 인생과 문학 세계를 돌아보는 작품 『익사』를 발표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 중 아버지를 다룬 작품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작가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미미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아버지의 부재’가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신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말한 바 있다. 언젠가 반드시 쓸 테지만 “그 소설을 쓸 수 있을 만큼 수련을 쌓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껴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익사』는 오에 겐자부로가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는 소설이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갑자기 죽어버렸을까, 계속 생각해왔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_오에 겐자부로
『익사』의 주인공은 이미 오에 겐자부로의 예전 작품들에 여러 번 등장했던 작가의 페르소나 조코 코기토다. 그에게는 유년 시절 강에서 아버지가 탄 배가 뒤집히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과거가 있다. 군인들과 궐기를 준비하던 아버지가 홍수로 갑자기 불어난 강에 배를 띄웠다가 죽은 일은, 코기토에게는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 있다. 그는 육십 년이 넘도록 아직도 그 장면을 꿈에서 보곤 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익사 소설’은 코기토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소설가로서의 목표다. 그러나 어머니가 남긴 ‘붉은 가죽 트렁크’를 참고로 ‘익사 소설’을 집필하려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아들 아카리와의 사이도 틀어지고 만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생각과 고민은 결국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한때 아들이었던 작가는 이미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익사』의 근저에 있는 것은 ‘늙음’을 둘러싼 작가의 고뇌다. 한때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보았던 소년 조코 코기토는 이제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느끼는 노인이다. 그에게는 마찬가지로 노화 탓에 신체능력이 저하되어가는 아들 아카리가 있다. 코기토는 아버지로서 장애인인 아들을 ‘산으로 오르게’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면서도 아카리가 악보를 더럽힌 일을 계기로 아들에게 심한 말을 퍼붓는다. 아버지와의 화해뿐 아니라 아들과의 화해 문제까지 안게 된 것이다.
코기토가 아카리에게 저지른 언어폭력으로 아들뿐 아니라 코기토 자신 역시 상처를 입는다. 코기토는 그 갈등을 극복하고 자신과 아들을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익사』는 아버지와 코기토, 코기토와 아들이라는 두 부자지간의 과제를 풀어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드럽지만 강한 여자들의 싸움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 안에서 여성은 종종 짓밟히면서도 굴하지 않는 존재로 나타났다. 『익사』의 여자들 역시 남자들이 만든 ‘근대’ ‘국가’를 비판하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익사 소설’을 쓰는 데도 실패하고 아들과도 문제가 생겨 실의에 빠진 코기토를 다시 붙들어주는 것은 연극배우 우나이코다. 우나이코가 ‘익사 소설’을 완성시키는 협력자로서 등장하는 필연성은 바로 여성이라는 데 있다. 남자들의 중요한 논의, 즉 국가를 둘러싼 ‘정신’적 이야기의 장에서 여자들은 배제되어왔다. 그러나 배제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오히려 비판적 시점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비판은 남자/국가의 폭력으로 훼손된 자연을 회복하는 힘이 된다.
우나이코가 ‘산속 집’으로 오는 것은 남성들에게 배제되고 유린당하면서도 자연이 들려주는 풍요로운 이야기를 품어온 여성들에게 공동체로서의 ‘골짜기의 산’을 되찾아주는 일을 상징한다. 이는 『익사』가 ‘국가’ 이전에 존재했던 원래의 모습을 되돌리는 방식으로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소설임을 의미한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하여
코기토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익사 소설’을 쓰는 데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가 남긴 ‘붉은 가죽 트렁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트렁크 안에 남아 있던 자료는 어머니의 생각을 뒷받침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제자 다이오가 등장하고, 코키토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 그 죽음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게 된다.
다이오는 ‘전후 일본’에 대해 늘 위화감을 가진 채 이념에 휘둘리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코기토와 우나이코를 만나고 함께 지내면서, 일생의 스승이었던 조코 선생의 뜻을 잇기로 결심한다. 국가가 내세우는 이념에서 자유로운 ‘골짜기의 산’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나무’를 발견하고자 한 의지. 이는 바로, 일생의 테마였던 ‘인간 구원’과 ‘근대 일본’의 문제를 겹쳐놓고 고민한 오에 겐자부로가 마침내 선택한 길인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평생에 걸쳐 완성한 걸작
『익사』 초반부에서 작가의 페르소나인 조코 코기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때가 오면 ‘익사 소설’을 쓸 거다. 그 소설을 쓰기 위한 수련을 하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로서 쓰기 시작해 강 아래 물살에 흐르는 대로 몸을 내맡기다가 드디어 이야기를 끝낸 소설가가 단번에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버리는, 그런 소설…… _본문 중에서
작가에게 ‘익사 소설’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소설가로서는 평생의 과제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 위한 작품이며, 개인으로서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마침내 이해하기 위한 작품이다. 이는 아버지를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아버지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다. 아들로 살아온 시간보다 아버지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더 긴 작가에게, ‘아버지’와 ‘죽음’에 대해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는 일 그 자체다.
『익사』에는 『우리의 시대』부터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 이르는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대표작들이 인용되어 있다. 『익사』가 작가로서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쓴 소설임을 알 수 있는 방증이다. 작가로 살아온 오십여 년 동안 줄곧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마침내 소설로 완성한 것이다.
구매가격 : 10,500 원
몰락하는 자(세계문학전집 078)
도서정보 : 토마스 베른하르트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3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바흐만,한트케와 함께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죽음, 절망, 고통, 파멸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그가 그려낸 이상적 예술 앞에서 절망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바흐만, 한트케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78번)을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절망, 고통, 파멸, 죽음이라는 테마에 천착했고 쇼펜하우어와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베른하르트는 생전에 카프카와 자주 비견되었고, 동시대에 활동했던 베케트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몰락하는 자』는 실존 인물인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등장시키며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글렌 굴드라는 천재와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파멸해가는 베르트하이머라는 인물이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의 이유를 찾는 과정이 작품 전체에 걸쳐 그려진다. 예술의 절대성과 완벽성에 대한 주인공의 강박관념을 잘 드러낸 이 작품은 『벌목』『옛 거장들』과 함께 베른하르트의 예술 3부작으로도 불리며 유럽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인 프레미오 몬델로 상(1983)을 받았다.
‘둥지를 더럽히는 자’ ‘조국에 침을 뱉는 자’라는 비난에도
망명 대신 작품 활동으로 조국에 맞섰던 비판하는 지성 베른하르트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바흐만, 한트케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독일어권 작가 중 가장 중요한 한 명으로 꼽힌다. 1957년 사망하기까지 60편 이상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으며 소설뿐만 아니라 시, 희곡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베른하르트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전쟁의 경험으로 죽음, 절망, 고통, 파멸이라는 테마에 천착했다. 주인공의 파멸과 죽음의 과정을 그린 『몰락하는 자』 역시 이러한 베른하르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는 또한 나치에 협력한 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긴 작품들로 ‘둥지를 더럽히는 자’ ‘조국에 침을 뱉는 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망명을 택했던 것과 달리 그는 철저하게 조국에 맞서며 작품을 통해 비판하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베른하르트의 소설은 분위기와 내용 면에서 본다면 지극히 절망적이고 음습하며 불안하다. 베른하르트가 어느 수상 소감에서 “죽음은 나의 영원한 테마”라고 밝혔듯,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이 존재한다. 한 인물이 죽기까지의 정서적 혼란이 본인 또는 제 3자에 의해 독설과 냉소에 찬 어조로 광기에 가까운 장광설로 서술된다. 이러한 개인의 파멸 과정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사고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부조리 속에 놓인 인간 보편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독자를 사로잡는다.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신화를 창조한 소설
『몰락하는 자』는 캐나다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소설에 등장시키며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소설에서의 글렌 굴드는 분명 허구적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베른하르트의 독특한 서술 방식을 통해 허구와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당시 글렌 굴드를 둘러싼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몰락하는 자』는 이야기보다는 1인칭 화자의 회상과 성찰이 중심을 이룬다. 챕터 구분도 단락 구분도 없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하였고, 이것은 베른하르트의 특징인 장광설의 문체와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산문의 언덕 너머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고 말하는 베른하르트는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장과 언어 파괴를 주요 기법으로 사용하는 그는 과장이야말로 글쓰기의 필수 요건이며 과장을 통한 현실 파괴와 언어 해체의 작업만이 상투적인 현실 고발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는 특별한 사건 전개가 없고 (남자) 주인공이 주로 내적 독백을 통해 고립된 자아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만을 유일한 생존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양면적 태도를 보이는데, 『몰락하는 자』의 주인공 베르트하이머 역시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글렌 굴드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파멸해가면서도 불행이 자신을 떠나는 것을 걱정하는 베르트하이머, 그의 죽음의 과정을 회상하고 성찰하며 ‘몰락’하지 않고 살아남은 ‘나’, 『몰락하는 자』는 이 둘을 통해 글렌 굴드라는 이상적 예술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절망에 빠져 끊임없이 몰락하는 인간을 위한 한 편의 진혼곡이 되어준다.
구매가격 : 7,000 원
만년양식집(세계문학전집 232)
도서정보 : 오에 겐자부로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27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2023년 3월에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행동하는 양심
오에 겐자부로가 작가 인생을 성찰하며 쓴 마지막 소설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 이후 오에 겐자부로가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일본을 무대로 잡지에 연재한 이야기를 묶은 책. 당시 작가가 겪은 현실과 과거, 앞서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 발표해온 작품들 속 허구가 뒤섞이며 편지와 인터뷰, 대담 등 여러 형식으로 전개되는 자전적 소설이다. 집필 과정을 소상히 드러내는 한편, 여러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중첩시킨 메타소설이자 다성소설로, 오에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담아냈다.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파국적이고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 세대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오에 겐자부로. 그가 남긴 마지막 소설 『만년양식집』은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로 하여 반발과 논쟁이 격화된 지금, 더욱 절실하고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대가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마지막 발자취
작가 인생을 치열하게 되짚어간 메타소설이자 다성소설
1957년 등단한 이래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온 한편, ‘전후 민주주의의 기수’로서 반전과 반핵을 역설해온 오에 겐자부로. “곤경에 처해 있는 현대 인류의 불가사의한 모습”을 형상화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인정받아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현실 참여적 지식인으로서 왕성히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작품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확장해나갔다. 특히 노년의 나이듦과 미학에 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등단 50주년 기념작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2007), 필생의 숙원 프로젝트로 마침내 아버지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익사』(2009)에 이어,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혼돈을 그린 『만년양식집』(2013)은 오에의 만년 작업을 대표하는 소설 3부작이라 할 수 있다. 오에가 2023년 3월 3일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스스로 여러 차례 공언해온 바대로 『만년양식집』은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2015년 3월 ‘연세-김대중 세계미래포럼’ 참석차 내한했을 당시, 오에는 『익사』 한국어판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인간 오에 겐자부로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으로 세 권을 꼽고 싶다.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 그리고 『만년양식집』이다. 『만년양식집』에는 노인이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소설을 어떻게 써왔는가’ 자문하는 내용을 담았다.”
오에가 대표적인 르포르타주인 두 작품과 함께 언급한 『만년양식집』은 원래 문예지 『군조群像』에 2012년 1월부터 2013년 8월까지 1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인생을 회고하며 소설 쓰는 과정을 노출하는 실험적인 메타소설로,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의 전모를 파악하게 해준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등장한 오에의 페르소나 ‘조코 코기토’를 중심 화자로 서술해나가며, 그의 소설에서 “일방적으로 묘사되어온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하곤 했던 ‘세 여자’(여동생 아사, 아내 치카시, 딸 마키)의 비판과 반론도 담아낸다. 여성들의 냉철하고 준엄한 비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코기토는 자신이 발표해온 작품들이 빚어낸 오해에 맞서 해명하고, 잘못했거나 허술했다고 지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인정하며 성찰한다. 또한 코기토가 따랐던 스승 같은 존재였으나 비극적으로 죽고 만 기 형의 아들 기 주니어가 도중에 등장해 코기토와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로써 각기 다른 입장과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드는 다성소설의 면모가 더욱 심화된다. 코기토의 삶과 작품을 다각적으로 회고하며 여러 인물이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는 식으로, 일종의 푸가처럼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는 음악이 주요 모티프로 다뤄지기도 한다. 코기토의 고향인 시코쿠 산골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숲의 신비’ 전승에 기반해, 아들 아카리(오에의 맏아들로, 지적 장애를 지닌 작곡가 히카리가 모델이다)가 만든 〈숲의 신비의 음악〉이 줄곧 거론되며, 암으로 작고한 음악가 다카무라 도루가 언급되곤 한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만년양식집』에는 오에의 주요 작품들이 다수 거론된다. 장애를 지닌 아들의 탄생을 계기로 쓴 「하늘의 괴물 아구이」와 『개인적인 체험』,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에 대표작으로 언급된 『만엔 원년의 풋볼』, 기 형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그리운 시간에 보내는 편지』, 고교 때부터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인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의 자살을 계기로 집필한 『체인질링』, 두 노인의 모의 테러 사건을 그린 『책이여, 안녕!』 등인데, 작가로서 거둔 성과를 집대성하는 동시에 자기 비평을 시도함으로써 작가 인생을 되돌아보고 총결산하려는 오에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 만큼 『만년양식집』은 오에의 작품을 읽어온 이들에게는 그간 쌓아온 의문을 풀며 작가의 의도를 새삼 깨닫게 해줄 것이고, 오에를 처음 접한 이들에게는 이 소설에 나온 주요 작품들을 통해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앞서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삶 속에서
파국을 뛰어넘어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
소설 속에서 노년의 작가 ‘나’(조코 코기토)는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서고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노트에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노트에 백혈병으로 타계한 친구인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W. 사이드의 『만년의 양식에 대해서On Late Style』에 착안해 ‘만년의 양식으로 살면서In Late Style’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만년양식집’이라는 제목을 단다. 한편 아사(여동생), 치카시(아내), 마키(딸)는 ‘세 여자’라는 그룹을 결성해 내가 지금까지 발표한 소설에 대한 반론과 각자 품어온 생각을 써서 보내온다. 나는 내 글과 ‘세 여자’의 글을 합쳐서 일종의 사가판私家版 잡지 『‘만년양식집’+알파』를 만들기로 한다.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나와 관계가 서먹서먹해졌지만, 지적 장애를 지닌 아들 아카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오염된 현황을 취재한 TV 특집 방송을 보고 충격받아 소리 내어 운 나를 걱정하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진 속에서 동요하던 아카리 자신도 간질 발작을 일으키며 고통을 겪게 된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지자 마키는 “아빠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서 오빠 아카리와 함께 도쿄 집을 떠나 코기토의 고향인 시코쿠 숲속의 집으로 이주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긴다.
한편 『그리운 시간에 보내는 편지』에 등장하는 ‘기 형’의 아들로, 미국에 살던 기 주니어가 일본에 온다. 그는 후쿠시마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대지진과 원전 사고라는 ‘파국’을 취재하는 다큐 작업도 진행한다. 그 일환으로, ‘파국 위원회’라는 단체를 결성해 아버지 기 형, 자살한 영화감독 하나와 고로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는 그 증언자인 나와 아사, 치카시와 인터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류머티즘이 재발해 힘들어하던 치카시를 간병하기 위해 마키가 상경하고, 그 대신 내가 시코쿠로 가서 아카리와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갈등을 차츰 해소해나가던 나와 아카리는 아카리가 작곡하고 마키가 선곡한 CD 〈숲의 신비의 음악〉을 숲속에서 함께 들으며 감동을 느끼고, 내가 일흔 살에 쓴 시를 바탕으로 한 곡을 아카리가 만드는 계획으로 옮겨간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를 살아가며 ‘노년의 곤경’을 겪는 작가의 일상과 과거 회상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만년양식집』에서는 조코 코기토와 주변 인물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옛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기 주니어의 인터뷰에 응하면서부터 코기토는 일찍이 작가로 활동하며 실제로 겪은 일에 기반해 써온 작품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는다. “앞서간 친구들이 어떤 식으로 인생의 마지막 정리를 했는지” 깨달아가던 그는, 차츰 절망과 우울에서 빠져나와 세상과 제대로 마주한다. 다음 세대가 살아갈 미래를 위해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며 희망을 꿈꾸게 된 것이다. 장애를 지녀서 마흔 후반의 나이에도 자립하지 못한 아들 아카리는 아버지 코기토를 더욱 불안하게 하지만, 코기토에게 중요한 테마인 ‘숲의 신비’ 전승에 영감받아 만든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치유와 화해의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세 여자’도 코기토를 그저 비판만 하는 게 아니라 코기토를 대변하고 변호하는 역할을 자처하며 포용하고 연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마지막에 코기토가 첫 손자의 탄생을 계기로 쓴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난다. 특히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는 시 속 구절은 본인이 죽은 후에도 삶을 이어갈 다음 세대에 거는 긍정적인 기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파국에 맞서려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를 다시금 보여준 오에 겐자부로는 『만년양식집』 출간 당시에 소회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아마도 마지막 소설이 될 『만년양식집』을 나는 원숙한 노작가로서가 아니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빚어낸 파국에 내몰리는 심정으로 써나갔다. 그러나 일흔 살 때 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를 새롭게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했다는 것도, 죽은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다.”
구매가격 : 11,900 원
잔해(세계문학전집 070)
도서정보 : 쥘리앵 그린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25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내 삶은 다른 곳에 있다.”
고독한 운명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
모리아크, 베르나노스와 함께 20세기 프랑스 가톨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쥘리앵 그린이 1932년에 발표한 소설로,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되는 작품이다. 쥘리앵 그린은 수많은 저서에서 인간 운명의 나약함과 신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종교적 주제를 형상화했는데, 『잔해』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실존주의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그의 문학적 여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내 삶은 다른 곳에 있다”고 느끼며 가정과 사회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현실의 언저리를 맴도는 어느 무기력한 남자, 파리라는 도시에서 부유하는 ‘인간 잔해’의 정신적 방황을 통해 존재의 고독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 운명의 무상함을 그려냈다. 이 작품은 사르트르나 카뮈의 작품에 앞서 실존주의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르트르, 카뮈의 작품에 앞서 실존주의 경향을 보여준 작품
190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한 쥘리앵 그린은 20세기 전체를 가로지르며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문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 영역에서 지난 세기의 가장 큰 화두를 실존주의적 사유와 현실 참여라고 한다면, 쥘리앵 그린의 삶에서는 다른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실 문제에 대한 치열한 대응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대의 흐름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그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작품화한 작가이다. 가장 20세기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비극적 실존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쥘리앵 그린의 삶을 지배했던 두 가지는 바로 종교와 글쓰기이다. 20대 초반에 중편소설을 쓰기 시작해 많은 소설과 희곡을 집필한 그린은 26세부터 사망 직전까지 거의 1년에 한 권씩 저서를 선보였고, 청년 시절부터 써온 일기로 16권의 일기 모음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인간 운명의 나약함과 신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는데, 1932년에 발표한 『잔해』는 그린이 한동안 종교 생활과 멀어져 있을 때 집필한 작품으로, 다른 작품과는 달리 종교적 색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초기 3부작이자 그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몽시네르』 『아드리엔 므쥐라』 『레비아탕』에서 나타나는, 억압받는 현실에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잔해』의 주인공인 필리프는 현실의 권태로움을 온몸으로 자각하는 무기력하고 소심한 부르주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필리프는 자신의 삶을 비롯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드러내고 현실과 유리되어 떠돌아다니는 ‘이방인’이자 ‘잔해’이다. 이는 사르트르의 『구토』나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이 보이는 삶의 태도와 비슷한 양상이다. 존재의 무상함과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잔해』는 쥘리앵 그린의 문학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며, 사르트르, 카뮈의 작품에 앞서 실존주의 경향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상의 언저리를 맴도는 ‘인간 잔해’의 자아 찾기
쥘리앵 그린은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9년 어느 날의 일기에 『잔해』에 대해 ‘우리 시대의 파리에서 밤의 모험을 찾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소설은 필리프라는 서른한 살의 남자가 어느 날 밤 파리의 센 강변을 산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살인 장면을 목격한 필리프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인식하고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필리프는 그 자신이 부르주아이며 부르주아의 도시인 파리에 살면서도 그 세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습관에 갇혀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삶이 이미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려는 욕망도 갖지 못한다. 가정과 사회,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세상의 언저리를 떠도는 ‘인간 잔해’인 그는 센 강변에서 살인 장면을 목격한 이후 변화를 겪게 된다.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비겁한 본능과 무기력함을 인식한 필리프는 극심한 내면의 고통 속에서 존재의 고독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 운명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정화의 매개체를 찾아 나서는데, 작품 전체를 가로질러 흐르는 센 강이 그 역할을 한다. 센 강은 필리프의 의식에서 계속 모호한 양상으로 드러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필리프의 상징적 재생을 돕는 기제가 된다. 결국 센 강을 따라가는 필리프의 여정은 고독한 운명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다.
구매가격 : 8,400 원
계간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통권 116호
도서정보 : 문학동네편집부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10일 / EPUB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문학동네』는 문학동네에서 펴내는 계간지다.
통권 116호 2023년 가을호
주간 권희철
편집위원 강지희 김건형 오은교 인아영
구매가격 : 7,5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