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식민주의 팽창주의, 타이완 홍콩 신장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동북3성

탁양현 | e퍼플 | 2019년 09월 06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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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 中國 植民主義 膨脹主義





1. 中國大陸 王朝의 平均壽命

‘東北(D?ngb?i)’ 또는 ‘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中國地理大區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한다. 과거에는 ‘滿洲(M?nzh?u)’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遼寧省, 吉林省, 黑龍江省의 3개 省이 포함되며, 내몽골 자치구 동북부 ?四盟地域(후룬베이얼 시, 싱안 맹, 퉁랴오 시, 츠펑 시)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瀋陽)’이며, 그 외에 ‘하얼빈(哈爾濱)’, ‘창춘(長春)’, ‘다롄(大連)’, ‘치치하얼(齊齊哈爾)’, ‘지린(吉林)’ 등의 도시가 있다.
檀君朝鮮, 高句麗, 渤海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200만 명 이상의 재중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우리 韓民族의 대표적인 故土 疆域이다. 즉, 반드시 收復해야 할, 우리 한민족의 영토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한민족의 영토를 상실해버린 원인은, 弱肉强食의 國際政治 구조 속에서, 전통적인 중국의 植民主義와 膨脹主義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이 故土를 收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한민족만의 力量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國際情勢를 이용하여, 適期에 도모한다면 실현될 수 있다. 즉, 중국공산당의 中華人民共和國이 崩壞될 때, 우리에게 준비된 역량이 있다면 가능하다.
21세기 중국의 一帶一路 式 팽창주의는, 自國 內 식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를 전제하지 않으면, 美中 패권전쟁까지 不辭하며 勝負手를 던지는 中國共産黨의 意中을 알기 어렵다.
본래 膨脹主義는 일반적으로 국가나 정부의 영토 확장을 지향하는 이념이나 정책을 뜻하며, 擴張主義 또는 伸張主義라고도 불린다. 보통 군사적 공격성을 띠며, 영토 분쟁과 같은 국경 분쟁은 팽창주의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軍事的 팽창주의보다는 經濟的 팽창주의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 중국의 경우는 물론이며, 현재 세계 최강의 覇權國인 美國 역시 팽창주의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팽창주의는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를 앞세우므로, 中國共産黨에 의한 팽창주의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19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은, 미국에 帝國主義的 팽창이 진행된 시기였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에 걸쳐 폭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이들 지역을 지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의 다른 경쟁국들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유럽 열강과의 투쟁 속에서 독립을 성취했고, 民主主義를 발전시켰던 미국의 독특한 역사 때문이다.
19세기 말, 미국이 팽창주의로 나선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국제적으로 그 시기는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였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경쟁적으로 잠식했고, 아시아에서는 독점적인 무역권을 따내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다투었다. 이 ‘Great Game’의 대열에는, 새로운 경쟁자 일본도 끼어 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헨리 캐벗 로지’ 그리고 ‘엘리휴 루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를 포함한 수많은 미국인들은,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열강들처럼 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견해는, 해군의 강력한 입장 표명에 크게 힘을 입었다. 해군에서는,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함대를 증강하고 바다 건너 세계 곳곳의 항구를 연결하는 海上網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최초로 대륙의 경계를 넘어서 감행한 모험은,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알래스카에는 이누이트족과 몇몇 토착 부족들만이 드문드문 살고 있었다.
미국인들 대부분은, 국무장관이던 ‘윌리엄 스워드’의 이 행위에 분개하거나 혹은 무관심했다. 그래서 당시 알래스카는, ‘스워드의 바보짓’ 혹은 ‘스워드의 아이스박스’라 불렸다.
하지만 30년 뒤,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 강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미국인 수천 명이 북쪽으로 향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알래스카에 눌러앉았다.
알래스카는 1959년에, 미국의 마흔아홉 번째 주가 되면서, 텍사스를 밀어내고 미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주가 되었다.
1898년의 스페인-미국 전쟁은, 미국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미국은 카리브 해와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그리고 아시아 대륙 가까이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통제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에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가, 한때 신대륙에서 광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스페인의 마지막 영토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의 필리핀 군도가 스페인의 새로운 핵심 식민지로 떠올랐다.
1898년의 전쟁이 터진 배경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귀족주의적인 스페인 지배에 대한 염증, 독립을 열망하는 이들 나라들에 대한 미국인의 동정심, 그리고 ‘징고이즘’ 혹은 애국주의적인 언론에 자극을 받아 새로이 일기 시작한, 단호하고 확고한 애국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이었다.
1895년에 쿠바에서 독립전쟁이 터졌다. 미국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推移를 살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독립을 열망하는 쿠바 인에 동조적이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중립을 지키리라 결심했다. 3년 뒤 매킨리 재임 기간 중 미국의 전함 메인 號가, 하바나 항에 정박해 있다가 파괴되었고, 이 사건의 내막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이 사고로 250명 이상이 사망했다.
국민들 사이에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선동적인 신문 보도에 의해 심화된 분노는 전국으로 퍼졌다. 매킨리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시간을 지연해봐야 아무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대 무장 개입을 선언하고 나섰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스페인에 신속하고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끝났다. 4개월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중요한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선전포고 1주일 후, 홍콩에 있던 조지 듀이제독은, 전함 6척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는 미국인 단 1명의 희생도 없이, 필리핀에 있던 스페인의 전 함대를 격파했다.
한편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가 산티아고 부근에 상륙해서, 여러 차례의 교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산티아고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산티아고 灣에 있던, 4척의 스페인 장갑 순양함은 몇 시간 후에 폐선으로 변했다.
산티아고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성조기가 물결쳤고, 환호성이 하늘을 울렸다. 신문사들은 쿠바와 필리핀으로 기자를 파견했고, 이들은 미국의 영웅들이 이룩한 개가를 보도했다.
이 영웅들 가운데 단연 돋보인 사람들은, 마닐라의 ‘조지 듀이’와 쿠바에서 자원 연대 ‘러프 라이더스’를 이끈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해군부의 차관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지원자를 모집해 ‘러프 라이더스’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스페인은 곧 협상을 제의했고, 1898년 12월 10일, 종전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 미국은 쿠바에 대한 권리를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았으며, 쿠바가 독립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쿠바를 점령하기로 했다.
또한 스페인은 전쟁 배상금으로,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미국에 양도했고, 필리핀은 권리금 2천만 달러에 미국에 넘겼다.
미국으로서는 바다 건너에 있는 영토를 갖는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국은 이 새로운 영토에 민주적인 자치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서,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투쟁이 일어나고, 이걸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던 과거의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필리핀은 1916년 상하 양원의 입법부를 수립할 권리를 얻었으며, 1936년에는 자율적인 필리핀 공화국을 수립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에,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룩했다.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개입한 지역은, 필리핀뿐만이 아니었다. 스페인-미국 전쟁이 勃發한 바로 그해에, 미국은 하와이 제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그 이전에도 하와이와 관계를 가지긴 했지만, 주로 선교사들이 관련되거나 일회성 교역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것이, 1865년 이후에 미국인이 하와이 제도의 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자원은 주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이었다.
1893년에 왕정이 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자, 미국의 기업인들이 하와이의 유력한 인사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이들이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이 정부는 곧바로 하와이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나섰다.
帝國主義的 膨脹과 식민지 지배에, 미국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 내에 반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의회는, 처음에는 하와이를 미국 영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스페인-미국 전쟁으로 비롯된 國家主義의 영향을 받아, 1898년 7월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하와이 제도를 미국의 영토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진주만이라는 중요한 해군 기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에 하와이는 미국의 쉰 번째 주가 되었다.
쿠바는 1902년, 미국 군대가 철수하면서 형식적으로는 독립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쿠바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놓지 않고 있었다.
1934년, 이 권리를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세 차례 걸쳐서, 미국은 이 권리를 행사했다. 하지만 쿠바가 완전히 독립한 이후에도,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은, 1959년까지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1959년에 ‘피델 카스트로’가 기존 정부를 전복하고, 소련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社會主義 정부를 수립했다.
쿠바 동쪽에 있는 푸에르토리코는, 쿠바나 필리핀과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1917년에 미국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에 입법부를 구성할 권리를 허락했다.
하지만 이건 쿠바나 필리핀과는 달랐다.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천명했으며, 또한 푸에르토리코 인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었던 것이다.
1950년에 연방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인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했다.
1952년의 국민투표에서, 푸에르토리코 시민들은, 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것 둘 다 거부하고, 共和政이라는 형태를 선택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 본토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수많은 푸에르토리코 인들이 미국 본토에 거주했으며, 미국의 시민들과 동일한 시민권을 획득했다.
미국과 중국의 팽창주의는 서로 차이가 크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그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정글 속에서, 地政學的으로든 國際政治學的으로든, 대한민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대표적인 국가이며, 그 상황판단에 의해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積弊淸算이나 親中反日 프레임에 의한 온갖 ‘정치공작질’을 볼 때면, 어쩐지 과거 마오쩌둥의 ‘제사해운동’을 回顧케 된다.
1958년, 마오쩌둥이 참새를 가리키면서, ‘참새는 해로운 새’라고 한마디 한 것 때문에, 참새잡이 狂風이 불어, 참새 개체수가 급락, 해충이 창궐하여 대흉년이 들었다. 이것을 ‘제사해운동’이라고 한다.
除四害運動, 打麻雀運動, 속칭 ‘참새 죽이기 운동(消滅麻雀運動)’은, 大躍進運動의 첫 번째 단계로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장려된 정책이다.
‘除四害’란 ‘네 가지 해충을 제거한다’라는 뜻으로, 그 네 가지 해충은 ‘들쥐, 파리, 모기, 참새’였다. 이 정책의 결과, 중국 참새의 멸종으로 인해, 생태학적 균형이 무너졌고, 農業害蟲이 猖獗하였다.
이 정책은, 애당초 마오쩌둥이 1958년에 들고 나온 衛生運動이었는데, 마오쩌둥은 ‘들쥐, 파리, 모기, 참새’를 멸종시켜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했다.
참새, 엄밀히 말해 ‘유라시아 나무참새’가 해충으로 언급된 이유는, 참새가 곡식 낟알을 먹으며, 인민에게서 그들의 노동의 결실을 도둑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국 人民大衆들은 참새를 撲滅하는 데 동원되었고, 참새가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계속 하늘을 날다가 지쳐 죽게 만들기 위해, 냄비와 후라이팬, 북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가했다.
참새 둥지가 허물어졌고, 알은 깨뜨려졌고, 새끼새들은 살해당했다. 어른 참새들은 하늘을 날던 도중에 총에 맞고 떨어졌다.
이런 조직적인 참새잡이의 결과, 중국의 참새들은 멸종 직전까지 내몰렸다. 학교, 작업반, 정부 기관마다 죽인 참새의 부피에 따라, 비물질적인 상과 표창이 주어졌다.
그런데 1960년 4월이 되어서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참새가 곡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대량의 해충도 잡아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제사해운동’의 결과 쌀 생산량은 늘어나기는커녕 급락했다. 그러자 마오는, ‘네 가지 해충’에서 참새를 슬쩍 빼고, 대신 빈대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天敵인 참새가 없어지자, 메뚜기 개체수가 급격하고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 메뚜기 떼가 중국 전역을 뒤덮으며, 더욱이 대약진운동의 벌목 및 살충용 독극물 오남용으로, 이미 난장판이 된 중국 생태계를 초토화시켰다.
생태학적 불균형은 3년 大飢饉을 촉발시켰고, 4,000만명 이상의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발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더욱이 이미 북한에서는 마오쩌둥 실절보다 더욱 赤裸裸하게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마오쩌둥’의 ‘제사해운동’이 ‘문재인 정부’의 ‘정치공작질’과 유사하다면,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박정희 정부’의 ‘개발독재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취임한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밝혀, 오늘날까지도 ‘중국식 시장경제’의 기본이념이 되고 있다.
덩샤오핑 개혁개방 사상의 캐치프레이즈가 ‘흑묘백묘론’과 ‘선부론’이다. 흑묘백묘론은, ‘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즉, 고양이 빛깔이 어떻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처음 언급한 때는, 1962년이다.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은, 중국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대약진운동은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주의적 노력동원 등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무리하게 추진됐다.
이로 인해, 자원배분의 歪曲과 가뭄 등이 겹치면서, 4,000만 명이 餓死하는 慘劇이 빚어졌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1962년 공산당 중앙서기처 회의석상에서, ‘흑묘백묘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는 흑묘백묘의 예를 들며, 자본주의적인 이윤동기를 동원해,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덩샤오핑에게, 체제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공산당 정권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체제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부,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정부의 開發獨裁論과 비슷한 발상이다.
그리고 ‘先富論(Getting Rich First)’은, 1985년경부터 덩샤오핑이 주창한 改革開放의 기본원칙이다. 그 내용은, “능력있는 사람으로부터 먼저 부자가 되어라. 그리고서 낙오된 사람을 도와라.”는 것이다.
‘선부론’은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연해부와 내륙부는 하늘과 땅 차이의 경제 격차가 있다.
중국 최대의 상업도시 상하이에서도 격차는 점차 확대되고 있어, 먼저 부자가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동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의 상황은, 빈부 격차가 점차 해소되기보다는 점점 심화되어, 분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쉽지는 않은 형편이다.
서부 대개발 등의 정책은,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보다는 빈곤 탈출 정도의 효과만 있었으며, 지역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는,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를 던지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체제에서 당최 해결되지 않는 難題 중의 난제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자본주의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정치경제적 사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향후에도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현재 中華人民共和國은 多民族 聯合國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그 중 많은 疆域이 植民地 상태에 있다. 티베트, 신장위구르, 내몽골, 동북3성, 홍콩, 마카오 등이 그러하다. 나아가 타이완 역시 ‘中國 植民主義’의 대상이다.
물론 中國共産黨은 ‘하나의 中國’을 주장하며, 이러한 상황을 억지로 隱蔽시키고 있다. 때문에 향후 美中 覇權戰爭의 勝敗에 따라, 중국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된다.
현재 ‘홍콩민주화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홍콩이 一國兩制의 체제 아래서 민주화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 ‘天安門민주화운동’의 사례를 통해서도 익히 검증된다. 그것은 중국문화의 獨尊儒術的인 歷史的 慣性 때문이다.
따라서 시진핑 중국공산당 왕조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제아무리 경제발전이 되어도 중국의 民主化는 不可하다고 예측된다. 그러한 상황은 티베트, 신장위구르, 내몽골, 동북3성 등이 모두 그러하다.
現在的 상황에서 미중 패권전쟁은, 有數의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른다면, 과거 蘇聯이나 日本의 경우처럼, 美國이 승리하여 미국의 패권이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中國大陸의 역사에 등장하는, 역대 왕조의 평균수명은 65년 가량이다.
1949년 共産黨이, 최후의 통일왕조 ?을 이은 中華民國의 國民黨政府를 타이완으로 축출하고,?‘中?人民共和?(People's Republic of China)’을 건국한지 70여 년이 지났으니, 이미 그 평균수명을 넘겼다.
때문에 미중 패권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과거처럼 中國大陸이 자연스레 分裂될 것으로 예견된다.
중국에서 古代國家의 체제가 완성된 것은, 漢나라(B.C. 202)다.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 존재한 크고 작은 왕조는 총 60개다. 이 60개 왕조의 존속기간이 평균 64.77년이다.
60개 왕조 중 가장 오래 존속한 국가의 순위를 매기면, 淸나라(296년), 唐나라(289년), 明나라(276년), 前漢과 遼나라(209년) 등이다.?
前漢과 後漢을 합하면, 漢나라의 전체 수명을 407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王莽이 세운 新나라에 의해 전한이 멸망했기 때문에, 전한과 후한의 수명을 합하는 건 무리다.
漢나라 이래로, 중국에는 300년을 넘긴 王朝가 하나도 없었다. 200년 이상 존속한 왕조는, 위의 다섯 뿐이다.
따라서 중국 통일왕조의 평균수명이, 韓民族의 통일왕조인 高麗(475년)나 李氏朝鮮(518년)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萬世一系를 주장하는 일본의 天皇朝라면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권력의 長短은, 나름의 一長一短을 갖는다. 길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짧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다.
고인물은 결국 썩기 마련이라서, 긴 세월 이어진 왕조의 末期的 현상은, 대체로 悲劇的이기 때문이다. 高麗나 李氏朝鮮의 末期를 回顧하면 쉬이 알 수 있다.
한편 100년 이상 존속한 나라로는, 前漢, 後漢, 東晉, 北魏, 唐나라, 北宋, 遼나라, 南宋, 金나라, 元나라, 明나라, 淸나라가 있다. 모두 12개 나라가 100년을 넘긴 것이다.
그런데 이 중 200년을 넘긴 다섯 왕조를 제외하면, 100~199년 존속한 왕조는 모두 7개다.?
10년도 못 채우고 短命한 왕조는 2개다. ‘5대 10국’ 시대에 존재했던 後漢(947~950년)과 後周(951~960년)가 그러하다. 이 중 불과 3년 밖에 존속하지 못한 後漢은, 한나라 이래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단명한 왕조다.?
일반적으로 중국대륙 왕조가, 한반도 왕조에 비해 수명이 짧다.?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이 있다.
12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 왕조들과 중국대륙 왕조들의 興亡盛衰에 일정한 상호연관성이 있었다. 그런데 12세기부터 그러한 상호연관성이 현저히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중국대륙이 ‘5호 16국’의 분열기에서 南北朝의 분열기로 압축될 때, 한반도 분열도 3국의 항쟁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남북조에 이어 수·당 통일제국이 출현하자,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 시대로 한층 더 압축되었다.?
뒤이어 중국대륙이 ‘5대 10국’의 분열기에 접어들자, 한반도에서는 後三國의 분열이 재연되었다.
그리고 趙匡胤이 중국을 통일하고 宋나라를 세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王建이 高麗를 세워 後三國을 통일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중국대륙에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면, 한반도에서도 유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중국대륙에서 분열 분위기가 생기면, 한반도에서도 어김없이 분열 분위기가 생겼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연관성이, 12세기부터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대륙에서는 북송-요나라, 남송-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통일왕조 혹은 대규모 왕조가 명멸했다.
하지만 한국측에서는 高麗에서 李氏朝鮮으로만 바뀌었다. 그렇게 한반도의 왕조가 장기간 지속된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중국대륙 왕조에 대한 事大主義 선언이다.
여기서 李氏朝鮮이라는 명칭은, 檀君朝鮮, 箕子朝鮮, 衛滿朝鮮 등의 사례에 비추어 타당하다. 朝鮮王朝라는 명칭이 일상적이지만, 이는 지나치게 李氏朝鮮 偏向的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李氏朝鮮을 건국한 李成桂와 鄭道傳의 國是는, 두 말할 나위 없이 明나라에 대한 事大主義였다. 그리고 명나라를 잇는 淸나라에 대해서도, 丙子胡亂 등의 迂餘曲折 끝에 사대주의를 선언한다.
현재에 이르도록, 중국에 대한 事大主義 문제나, 일본에 대한 植民主義의 문제는 당최 解消되지 않고 있다. 21세기 지금 이 순간에도, 韓中日의 관계는 첨예하게 얽혀 있다.
더욱이 현대사회는 北韓과 美國의 관계까지도 뒤엉켜 있다. 그러니 사대주의나 식민주의의 解消만으로는 解決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國際情勢에 대해 각별한 관심이 요구되는 시기라고 할 것이다.
중국 역사의 최초 기록은, 기원전 1,250년 武丁의 통치기인 商나라(기원전 1,600~1,046)로 거슬러 올라간다.
黃河文明은 여러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檀君朝鮮을 중심으로 하는 東夷文明(遼河文明)의 영향력이 至大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夏나라, 殷나라, 周나라 이래, 약 5,000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가 무수히 興亡을 반복해 왔다.
漢나라 때, 중화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漢族이라는 말이 성립되었고, 唐나라는 서방의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도 하였다.
漢나라 이후에 한족들은 취약해지고, 외국 민족들이 중국인들을 정복하며 北魏를 건국하고 나서부터는, 중국 대륙은 異民族의 무대가 된다.
북위부터 당나라까지 이어지는 이민족의 정복왕조는 중국을 계승하였고, 元나라 때는 몽골인들이 중국 전토를 손아귀에 넣는다.
漢族들이 건국한 宋나라 때에는, 중국 중세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女眞族이 세운 金나라에 의해 유린당하여 사라진다. 또한 여진족은 淸나라를 건국하여, 지배자로서 중국을 손에 넣고 통치한다.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전쟁과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중국 본토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대만과 만주는 일본제국에 지배당하고, 중국 한족 남조의 수도로서 상징적이던 난징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한다. 홍콩은 영국이 지배했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하였다.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太平天國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한족의 개혁파들에 의해,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힘이 없었고,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 인해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保守派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辛亥革命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共和制 國家 中華民國이 탄생했다.
하지만 日本帝國에 의해 포섭되기도 하는 각지의 軍閥에 의해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몽골, 티베트의 독립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혼란에 싸여 분열되었다. 이러한 離合集散은 21세기에도 예견된다.
근대 일본제국의 침략에 의해 중국 동부지역을 잃고, 난징이 유린을 당하며, 중국 자체가 붕괴되는 시기를 보낸다. 이러한 中國崩壞는, 중국 역사에서 日常的인 현상이다.
이 때 일본의 중국 정복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으나, 러시아 또한 중국에 租界地를 설치하고, 중국 영토로 남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른바, 국제정치적 ‘Great game’이 勃發한 것이다.
1930년대에는 國共內戰(解放戰爭)과 中日戰爭(抗日戰爭)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戰場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정부가 2개 이상인 때도 있었다.
많은 중국인 가난한 농민, 소작농 계급들로 구성된 中國共産黨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힘을 키운다.
그 후 중일전쟁 중에, 일본의 세력 아래에 있던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세력을 늘려 온 중국공산당은, 계속되는 오랜 내전으로, 군인들에 의해 반복되던 민간인에 대한 피해에 지친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는다.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고 나서, 중국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일어난 國共來電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운다. 중국대륙의 역사를 살핀다면, 이제 중국은 분열의 시기가 자연스레 到來할 것임이 自明하다.
植民主義는, 國家主權을 국경 외의 영역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확대하는 정책활동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고체계를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향력이나 지배력 곧 覇權의 확대를 뜻하는 帝國主義와는 달리, 식민주의는 영역 곧 국가 疆域의 확대를 꾀한다.
帝國主義(Imperialism)는, 특정국가가 다른 나라나 지역 등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 또는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엄밀히 정의하면, 영향력 즉 패권보다는 영역의 지배를 확대하는 정책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帝國主義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imperium(제국), imperator(황제)인데,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로마제국 再現 試圖’를 제국주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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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탁양현

≪인문학 여행자의 동아시아 여행기≫
≪그리스비극 철학사상≫
≪삶이라는 여행≫
≪노자 정치철학≫
≪장자 예술철학≫
≪들뢰즈 철학≫
≪데리다 철학≫
≪미국 철학≫
≪일본 철학≫
≪공자 철학≫
≪원효 철학≫
≪니체 철학≫
≪헤겔 철학≫
≪맑스 철학≫

목차소개

▣ 목차





◈ 중국 식민주의 팽창주의

1. 중국대륙 왕조의 평균수명
2.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
3. 타이완, 양안관계
4. 홍콩, 일국양제
5. 신장위구르, 이민족 식민지
6. 티베트, 임시 망명 정부
7. 내몽골, 칭기스칸의 치욕
8. 동북3성, 중국붕괴 고토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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