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의 정수, 주역 음양가 음양사 음양오행, 동이문명의 음양철학

탁양현 | e퍼플 | 2018년 09월 28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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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東夷文明의 陰陽哲學과 現代文明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陰陽論은 인류 最古의 우주론이며 세계관이다. 동아시아 문명은, 그러한 음양의 사유방식을 좇아 역사를 꾸려왔다. 전통적인 음양의 사유방식에 결정적인 변화가 초래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학문체계가 수용된 以後다.
그런데 서양의 사유방식이 수용된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세계에서 陰陽 개념이 가장 현저히 드러나는 부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政治다. 祭政一致政이든, 王政이든, 民主政이든, 인류 역사에서 정치가 작동하기 시작한 이래, 정치적 권력을 중심으로 離合集散하는 상황 그 자체가, 곧 음양의 변화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론과 소론,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여당과 야당 등의 음양론적 樣相은, 不得已한 相生相剋的 변화의 과정 안에 있음은 明若觀火다. 그런데 다만, 보수는 보수다워야 하고, 진보는 진보다워야 한다. 여타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면 변화다운 변화의 자연스러움을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변화를 생성하지 못하면, 이내 革命, 叛亂, 政變, coup d’État, 戰爭 따위의 부자연스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인위적인 상황도 변화의 한 樣態이지만, 그러한 변화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다보니 부자연스런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代價를 치르게 된다. 그러할 경우, 가진 게 많은 기득권층이나, 가진 게 별로 없는 서민대중이나, 오롯이 고통 앞에 내던짐은 매한가지다. 물론 특별한 사정에 따라, 그 고통의 정도는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陰이나 陽의 한 측면만이 獨裁的으로 부각되어, 변화가 不可한 경우도 문제이다. 예컨대, 과거 共産陣營의 국가들에서 共産黨만이 독존하던 상황이 그러하다. 이미 대부분의 국가들은 공산당 독재를 포기하고서 쇠락했다가, 개방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는, 여전히 한 측면만이 독재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 참상은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음양의 자연스런 상생상극의 변화를 무시하고서, 白頭血統이나 勞動黨 따위를 내세워, 억지스럽게 자기의 기득권을 위한 한 측면만을 존속시키기 때문이다.
남한의 경우에도, 과거 군사독재의 체험으로써, 한 측면만이 독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것인가를 여실히 체험했지 않은가. 여하튼,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음양 개념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요구된다. 음양의 원리마저도 알지 못한다면, 이제 현실세계에서의 고통은, 감내하기 힘든 것이 되어버릴 수 있는 탓이다.
어쨌거나 현대사회는,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주도되는 시대다.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는, 그나마 음양의 자연스런 운행방식이 유사하게 작동하는 체제이다. 그래서 분명 인민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비해서 여러모로 나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분명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本來的인 사유방식이 있다. 현실적인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외래적인 사유방식을 추종하더라도, 자기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본래적 사유방식이 삶의 저변에서 작동해야만 한다. 그러할 때, 사회는 보다 건강하고 건전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상황을 억지로 거부하거나 부정해버린다면, 삶의 현실 역시, 이내 억지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특히 인간존재의 삶을 직접적으로 조작하는 정치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음양 개념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이론들은, 국가공동체의 향방이나 정치권력의 向背를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 현대사회에서 비견한다면, 국가정보원, CIA, KGB, Mossad, Iilluminati, Freemason 등과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고대사회의 샤머니즘 역시 그러하다. 당시에는 샤먼이 곧 집권하기도 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예컨대, 현재 일본의 수상인 ‘아베 신조(あべしんぞう, 安倍晋三)’의 경우, 헤이안 시대 중반(10세기)에, ‘아베(安倍)’ 가문이 대표적인 陰陽師 가문으로서 국가 요직에 중용되었고, 그러한 흐름은 현재의 ‘아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음양철학을 이해하여 운용할 줄 아는 자를 자기 편으로 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음양철학을 이해하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는 展望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기존의 음양철학은 惑世誣民하는 신비주의철학 쯤으로 치부되어 매장되어버렸다. 이는 다소 부득이했다지만,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물론 새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지 않으면, 당최 설 곳이 없는 법이라서, 그러한 대립과 배척의 과정이 人之常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근대화 과정에서 유입된 서양학문과 기독교문화 등을 추종해야만 민족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었다. 그래서 생존을 빌미 삼아, 기존의 ‘것’들 중 자기와 부합되지 않는 것은, 죄다 弊習으로서 규정하고 배척해버려야 했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는, 분명 부득이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천지자연의 흐름은 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그런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穿鑿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역시 현재의 생존을 도모키 위함이다.
과거에 생존을 위해 중국문화를 추종했듯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도록 생존을 위해 서양문화를 추종했지만, 生來的으로 東洋人이며 韓國人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생존적 사유방식을 추구함은 실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래서 샤머니즘이나 음양철학에 대한 연구가 再起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분명 그리스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요하문명이나 고조선문명에 뿌리를 둠이 明若觀火이고, 그러한 문명의 기반이 된 철학사상이 샤머니즘이나 음양철학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陰陽’ 개념의 토대가 되는 철학사상으로서 ‘周易’은, ‘河圖’에서 비롯되었고, ‘洪範’은 ‘洛書’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倉頡說’이나 ‘史皇說’ 등이 일반적이지만, ‘河圖洛書’로부터 문자가 비롯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河圖’는, 게재된 도면처럼 古代 ‘伏羲氏’ 시대에, ‘黃河’에서 ‘龍馬’가 지고 나온 55개의 點으로 구성된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복희씨’가 ‘말[馬]’의 등에 박힌 점이나 얼룩을 보고서, 철학적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들이 東西南北中으로, 1~9까지의 일정한 개수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복희씨’는 ‘上古時代’의 ‘東夷族 始祖’로서 ‘太皞’라거나, ‘東方의 天帝’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상고시대’는 歷史 이전인 탓에, 현재에 이르도록 그 史實性을 검증하기가 容易하지 않다. 게다가 현대에 이르러 ‘遼河文明’이나 ‘紅山文化’ 등이 발굴되면서, 기존의 견해와 다른 主張도 제시되고 있다.
아울러 ‘東夷族의 始祖’라는 점에 대해서도, 현대에 이르러 ‘중국의 東北工程’이나, ‘대한민국의 古代史 재정립’의 문제 등과 얽혀 다양한 異見들이 紛紛한 상황이다.
‘洛書’는, ‘夏’나라 ‘禹王’이 나라 안의 홍수를 다스렸을 때, ‘洛水(黃河支流)’에서 나온 ‘거북[龜]’의 등껍질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거북’의 등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서 철학적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판단된다.
‘하도’와 비교해보면 그 변화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낙서’가 ‘書經 洪範’의 연원이 되었으며, ☰乾, ☷坤, ☳震, ☴巽, ☵坎, ☶艮, ☱兌, ☲離, 여덟 종류의 부호로 구성된 ‘八卦’의 법칙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거북’의 등에 그려진 ‘낙서’도 ‘하도’처럼, 1~9까지의 숫자를 점의 개수로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 수들의 배열을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合하더라도, 그 합계가 항상 15로서 동일하다. 이것을 ‘마법적인 배열’이라는 의미에서 ‘魔方陣(magic square)’이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귀하게 여겨 ‘낙서’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河圖’는 ‘황하에서 얻은 그림’이라는 의미다. ‘洛書’는 ‘낙수에서 얻은 문자’라는 의미다. 따라서 최초 그림의 단계로부터 문자의 단계로 진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흔히 알려진 ‘하도’와 ‘낙서’의 이미지에는, 여러 문자와 숫자가 附記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하도’와 ‘낙서’는 문자나 숫자의 실제적 활용 이전에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된 도면처럼, 문자와 숫자가 없는 상태의 이미지가 가장 原形에 가까운 본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이나 ‘홍범’은 모두 ‘周’나라 시대에 확립된 철학체계들이다. ‘주역’이란 ‘周’나라의 ‘易’이라는 의미이고, ‘홍범’은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전해주면서 ‘홍범구주’로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주역’ 이전에 ‘夏’나라에는 ‘連山易’이 있었고, ‘商’나라에는 ‘歸藏易’이 있었지만 전하지 않으며 ‘주역’만이 전해진다. ‘홍범’의 경우도 ‘상’나라의 ‘기자’에 의해 기존의 정치철학이 ‘홍범구주’로서 정리되어 ‘무왕’에게 전해졌고, ‘기자’는 ‘조선’에 제후로 책봉되어 ‘홍범’을 현실정치에 적용하였다.
따라서 ‘주’나라 이전에 기존의 ‘易’체계가 있었지만 ‘주역’으로서 확립되었고, ‘주’나라 이전에 기존의 ‘洪範’체계가 있었지만 ‘洪範九疇’로서 확립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여기에 想像과 思惟가 누적되어 더욱 복잡하고 정밀한 思惟體系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부호 이미지’의 구성이, 歷史 이후 문자체계가 完備되고 숫자체계가 附加되며, ‘陰陽’, ‘相生’, ‘相剋’, ‘五行’ 등의 다양한 철학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더욱 심화된 철학적 체계를 정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철학적 체계의 정립 과정 자체는 큰 의미를 가진다.
‘조선왕조’ 後期 ‘李瀷’은 ‘洪範說’에서, ‘하도낙서’의 연원에 대하여 기술한다. ‘이익’에 따르면, 거대한 홍수가 범람하던 시대에 ‘堯舜’이 왕으로 있었고, ‘禹’가 왕명을 받아 홍수를 다스리자, 하늘이 가상히 여겨 ‘洪範九疇’를 내려 주었으니, ‘九疇’는 곧 ‘洛書’다.
그러면서 ‘이익’은,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홍범과 낙서’의 연원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공자’의 발언을 제시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河水’에서 ‘圖’가 나오고, ‘洛水’에서 ‘書’가 나왔는데, ‘성인’이 이를 본받았다고 하였으니,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람이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어서 서로 전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가령, ‘하수’에서 ‘圖’가 나오자 ‘伏羲’가 연역하여 ‘卦’를 만들었고, ‘낙서’가 ‘홍범’이 된 것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낙서’로부터 연원하여 ‘홍범’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하여, ‘南宋’의 ‘蔡沉’은 ‘書經集傳’에서 각 典據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채침’에 따른다면, ‘홍범’의 실질적인 저자는 ‘우임금’이고, ‘기자’는 그 원전의 내용을 敷衍增益한 註釋者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현재로서 이에 대해 마땅히 확증할 방법은 없다. ‘홍범’이 ‘焚書坑儒’ 이후 ‘今文’과 ‘古文’에 모두 존재함은, ‘秦始皇’으로서도 ‘홍범의 정치철학’은 굳이 死藏시킬 까닭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조선왕조’ 後期 ‘李瀷’은 ‘星湖全集’에서, ‘홍범’의 연원에 대해서 묻는 ‘黃得甫’와의 문답을 기술해 두고 있다. ‘이익’과 ‘황득보’의 문답 역시, 原作者와 註釋者의 여부, ‘금문’과 ‘고문’의 여부 등을 문제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익’의 주장처럼, ‘낙서’로부터 ‘홍범’이 구성되는 시기에는 문자가 본격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았음을 유념해야 한다. 기껏해야 甲骨文字의 수준을 넘어서서, 象形文字나 形聲文字 형태로서 문자의 시원이 태동하였을 것이다.
또한 ‘하도‘는 그림 단계이므로, ‘낙서’의 문자 단계 이후에, 문자는 실제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홍범’은 ‘周’나라 ‘文王’ 이후에 비로소 현대에도 사용되는 문자로써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철학체계도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다만, ‘箕子’ 이전에 ‘홍범’에 대한 철학적 思惟體系 자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며, 현재 전해지는 ‘홍범’이 ‘문왕’ 이후에 문자로 明文化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우왕’이 ‘홍범’의 原作者라는 說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아주 먼 옛날의 일이므로, 그에 대한 검증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래서 ‘書經集傳’을 저술한 ‘蔡沉’ 역시, 고대의 文件을 대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토로하고 있다. ‘書經’에는 ‘二帝三王’의 ‘大經大法’이 모두 실려 있지만, 수천 년 후에 태어난 식견 얕은 자로서, 그것을 강론하여 밝힌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는 것이다.
-하략-

저자소개

‘檀君朝鮮’과 ‘箕子朝鮮’ 등에 얽힌 ‘古代史’의 문제들은, 현대에 이르러 특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만큼 그 문제에 내재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에 관한 ‘상고사’ 재정립의 문제는, 역사문제라는 것이 결국은 정치철학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케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기자조선’을 ‘역사적 事實’로 규정했다. 그래서 ‘기자의 홍범’을 國是로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한 ‘政治史的 史實’에 대해서,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기자조선’의 실체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왕조’나 ‘조선왕조’에서는,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의 眞僞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왕조’는 역사적 史料에 대한 인식이 다소 부족했다지만, ‘조선왕조’는 역사에 대해 각별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인식 탓에 예컨대, ‘세조’ 때는 ‘受書令’으로써, ‘古記’로 분류되는 일련의 서적들을 강제로 수거하여 없애버린다. ‘세조의 수서령’은 ‘기자조선’의 역사를 事實로써 확정하는 데 장애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歷史書를 대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현재로서는 당시 逸失된 서적들에 기술되었던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지목된 서적들의 제목으로써 유추할 때, 그 서적들의 대부분이 우리 민족의 ‘上古史’에 관련된 歷史書인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적 史實’의 문제이므로, 역사학의 所管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역사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철학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적 事實’이 歷史書에 史實로서 기술되어, 하나의 歷史가 정립되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半島史觀’, ‘日帝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등에 의한 역사는, ‘역사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역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흔히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을 ‘日帝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 명령에 抗命하며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선언할 때 작동한 ‘사관’이야말로 ‘반도사관’이다.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던 ‘요동’을 포기하고서,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남의 ‘韓半島’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러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역사관’에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은 뭉뚱그려질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명확히 분별하여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식민사관’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神功皇后’의 新羅征服說과 任那日本府說, 滿鮮史論 등을 내세우다가, 20세기 초 朝鮮侵略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他律性論, 停滯性論, 黨派性論 등을 제시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李丙燾 등이 대표자들이다. ‘일제’의 ‘朝鮮史編修會’에 재직하던 ‘申奭鎬’는 解放 이후 ‘국사편찬회’의 회장이 된다. 이후 이러한 계통을 잇는 ‘植民史學派’는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美軍政’, ‘左右對立’, ‘韓國戰爭’ 등의 이유로 인해 친일파 處斷을 엄정하게 실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은,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인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중국’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다. 이러한 정책은 우리 민족의 ‘古朝鮮史’, ‘高句麗史’, ‘渤海史’ 재정립 문제와 첨예하게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므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서 銳意注視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 最古의 史書는 ‘三國遺事’인 것으로 판단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위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산해경’에서는 ‘무엽산’이라 하였고, 또 ‘백악’이라고도 하였는데, ‘백주’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백악궁’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바로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고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종종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그래서 ‘천부인’ 세 개를 주며,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지금의 ‘묘향산’이다.)’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그곳을 ‘신시’라고 불렀다. 그가 바로 ‘환웅천왕’이다.
‘환웅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여기서 ‘삼국유사’에 인용된 ‘三韓古記’의 첫 문장은 원래 ‘昔有桓國’이며, ‘일제 강점기’에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昔有桓因’으로 조작되었다고 하여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현재까지도 명확히 규명되지 못 하고 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 ‘桓因’이라는 표현은 ‘세종’ 때부터 10여 차례 등장하지만, ‘桓國’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 後期 ‘南九萬’의 ‘藥泉集’이나 ‘李種徽’의 ‘修山集’에서는, ‘桓國’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에, 이 문제에 대해 현재로서는, 각계의 보다 명확한 검증 이후의 연구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6일 壬寅日 2번째 기사(1439년, 明 正統 4년)에는, ‘司憲府’에서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이 기술되어 있다. ‘동방’에서 ‘단군조선’은 ‘요임금’ 때에 시작하였고, ‘기자조선’은 ‘주’나라 ‘무왕’ 때에 책봉되었으므로, 군신의 상하와 예악과 문물을 유지하여, 서로 전한 것이 오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종실록’은 ‘단군조선’이 ‘요임금’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정도전’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고려왕조 末’과 ‘조선왕조 初’에 모두 文臣으로서 살아낸 ‘權近’이 쓴 ‘三國史略 序文’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인식을 살필 수 있다. ‘고려왕조’ 말기부터 ‘조선왕조’ 초기에, ‘단군조선’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문명을 지니지 못 했고, ‘기자’가 책봉되어 건국한 ‘기자조선’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문명이 胎動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왕조실록’이나 ‘권근’의 例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현실세계의 표면에서 작동하는 주류적 인식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事大主義的 상황 인식은 후대에 보다 심화되어 ‘小中華主義’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무오일 1번째 기사(1481년, 明 成化 17년)의, ‘梁誠之의 上言’에서는 ‘단군조선’의 素朴性과 ‘기자조선’의 文明性을 넘어서서, ‘조선왕조’에 이르는 3,900년의 역사가 모두 ‘작은 중국[小中華]’의 실현이라고 선언해버린다.
그러나 어떻게 3,900년의 역사가 죄다 事大의 체제를 추종하는 ‘소중화’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무분별한 역사인식은 ‘역사적 事實’에 대한 지향이 아니며, 多分히 정치적인 인식의 결과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사대주의 역사관’에 대하여, 후대의 ‘申采浩’는 ‘朝鮮上古史’에서 강한 비판과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朝鮮上古史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하나는 가짜 중의 가짜이니, 예를 들면 ‘竹書紀年’은 진본이 없어지고 僞作이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사학가들은 늘 ‘古記’의, “檀君興堯竝立於戊辰.”이라고 한 글에 의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임금’의 연대에 비교코자 하며, ‘요임금’의 연대를 찾는 이는, ‘續綱目’에 考準한다.
그러나 ‘周召’의 ‘共和’ 이전의 연대는, ‘중국’ 역사가의 大祖라고 할 만한 ‘司馬遷’도 알지 못 하여, 그의 ‘史記’ 연표에 쓰지 못 하였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요원한 ‘요임금’의 연대라니.”
‘조선왕조’는, ‘기자조선’이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제후로 책봉을 받아 건국되었으므로, ‘조선왕조’는 응당 ‘기자조선’을 추종한다는 사대주의적 정치신념을 왕조의 정통성을 정립하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그리고서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러한 基調는 ‘日帝’에 의해 국권을 簒奪당한 ‘大韓帝國’에 이르도록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신채호’는 異見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채호’가 굳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當代의 상황을 개혁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조선왕조’ 말기에 賣國奴 세력의 행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事大의 대상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어도 ‘조선’으로서는 그 정치적 입지가 별다를 게 없다는 사대주의적 思惟方式의 위험성이, ‘조선왕조’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홍범구주’가 ‘단군조선’ 시대에 ‘단군’의 아들 ‘부루’에 의해 ‘하’나라 ‘우임금’에게 전해진 ‘金簡玉牒’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朝鮮上古史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夏禹’를 ‘塗山’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또 ‘吳越春秋’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唐堯’ 때에 9년 동안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禹’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 하고 매우 걱정하여, ‘南嶽’, ‘衡山’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玄夷’의 ‘蒼水使者’라 일컫고, ‘우’에게 말하기를, ‘九山’ 동남쪽의 ‘도산’에 ‘神書’가 있으니, 석 달 동안 齋戒하고서 그것을 꺼내보라고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金簡玉牒’이라는 ‘신서’를 얻어 ‘五行通水’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州愼’의 덕을 잊지 못 하여 ‘井田’을 제정하고, 律度量衡의 제도를 세웠다.” 고 하였다.
‘玄夷’는 당시 ‘조선’의 동, 남, 서, 북, 중 ‘오부’를 ‘藍’, ‘赤’, ‘白’, ‘玄(黑)’, ‘黃’으로 별칭 했는데, 북부가 곧 ‘玄部’이니 ‘지나인’이 ‘현부’를 가리켜 ‘玄夷’라고 한 것이요, ‘蒼水’는 곧 ‘滄水’이고, ‘州愼’, ‘肅愼’, ‘稷愼’ 혹은 ‘息愼’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夏’라 하고, ‘수두’의 교를 흉내 내어 ‘도산’에서 받은 ‘神書’를 ‘洪範九疇’라고 이름하여 신봉하였다.
‘하’가 수백 년 만에 망하고 ‘商’이 뒤를 이어 또한 수백 년 만에 망하고, ‘周’가 일어나서는 ‘周武王’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殷’의 왕족 ‘箕子’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서 ‘조선’으로 도망하니, 지금 ‘尙書(書經)’의 ‘洪範’이 그것이다.
…‘天乃錫禹洪範九‘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天’이라 하고, ‘단군’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천’이 주었다고 함이다. 이는 ‘수두’의 교의에서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商’이 ‘周’에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漢書’에서, 거북이가 문자를 등에 지고 ‘洛水’에서 나왔으므로, ‘禹’가 ‘洪範’을 연술하였다고 했지마는, ‘易’의 ‘繫辭’에, “河出書, 洛出書, 聖人則之.”라고 하여 분명히 ‘河圖’와 ‘洛書’가 다 ‘易卦’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다. 그런데도 이제 ‘낙수’ 거북의 글씨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랴(위 일절은 淸儒 ‘毛奇齡’의 설을 채택함).
‘오월춘추’에 의거하여,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음이 옳고, 또 ‘楚辭’에 의거하여 ‘東皇太一’ 곧 ‘단군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湖北’, ‘浙江’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대개 ‘하우’가 ‘형산’에서는 하늘에 자세하고, ‘도산’에서는 ‘부루’에게 ‘신서’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조선왕조의 半島事觀’, ‘일제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上古史 재정립’ 등의 문제들이 뒤얽혀 명확한 일반론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근래에 이르러 이러한 분야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으므로, 보다 정확하고 바람직한 ‘단군조선’의 역사가 정립되기를 희망한다.
‘조선왕조’가 ‘단군조선’을 배제하고 ‘기자조선’을 선택한 데는, 필연적인 정치적 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기자조선’의 위상을 부각시키려다보니, 부득이하게 상대적으로 ‘단군조선’을 배제한 것이다. 현실정치에서, 역사적 史實이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자의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쉬이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근래에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발생한 사건 중에서 우리 민족에게 인상적인 사건으로서, ‘일본’의 現任天皇인 ‘아키히토(明仁, あきひと)’가 천황의 母系血統이 百濟系라고 언급한 사건이 있다. 이는 旣定된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 목적에 의해 時宜를 좇아 활용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하략-

목차소개

▣ 목차





1. 동양철학과 음양철학
東洋學, 非科學性, 素朴性, 陰陽, 五行, 氣, 天人關係, 戰國時代, 儒家, 墨家, 呂氏春秋,
諸子百家, 天地人 三才, 人事, 天人合一, 陰陽五行家, 陰陽家, 鄒衍, 月令, 刑德, 災異,
天地人 三位一體, 道家, 醫學, 天文學, 董仲舒, 說文解字, 稷下陰陽家, 春秋學, 公羊傳,
春秋繁露, 天人相應, 天論, 韓醫學, 命理學, 思想律, 先民觀天察地, 禮法, 德主刑輔,
象數學派, 義理學派, 陰陽漁太極圖, 陰陽의 待對流行, 木火土金水, 相勝, 德의 消息,
五德終始說, 秦漢時代, 史記 曆書, 五德, 孟子荀卿列傳, 河圖, 洛書, 夏, 殷, 周, 數,
理, 象, 陰氣, 陽氣, 中和氣(沖氣), 三元論, 中國道敎, 逸周書, 夏小正, 黃帝四經, 災異,
祥瑞, 土德說, 大一統, 漢帝國, 寒洲 李震相, 性理學, 李滉, 李珥, 理氣二元論, 心卽理說,
主理派, 太極圖說, 太極圖說解, 太極動靜, 大源頭, 動靜者陰陽之本也, 茶山.

2. 한국문화와 음양철학
五方色, 命課學, 陰陽科, 觀象監, 日歷, 命學, 占學, 擇日, 太極紋, 太極旗, 君主旗, 周敦頤,
太極圖, 檀君歷史, 風流道, 天地人 三才, 太極, 陰陽太極, 三太極, 三元太極, 太極元氣,
函三爲一, 太極圖說, 性理學, 鄕校, 喪禮, 葬禮, 宗廟, 祭祀, 治民, 亡者, 魂, 祖上神, 喪主,
初喪, 葬事, 祭享, 皇極經世書, · ㅡㅣ, 天圓, 地平, 人立, 訓民正音 解例本, 制字解,
樂, 歌, 舞, 登歌, 軒架, 陰呂, 陽律, 風水, 氣, 天文學, 曆學, 陰陽五行, 感應, 人事 災異,
發福, 道詵, 密敎, 裨補思想, 畵道, 書道, 筆墨體驗, 書畵創作, 一陰一陽, 書畵, 調和美,
形式美, 秋史, 陰陽對待, 相反相成의 和諧美, 陰陽流行의 妙化美, 整合性, 陰陽互藏的 妙化,
一列作隊, 左旋回舞, 五方作隊, 處容舞, 宮中假面舞, 鄕樂呈才, 靑-東, 紅-南, 黃-中央,
白-西, 黑-北, 風水地理學, 四柱學, 奇文命理, 韓醫學, 建築, 衣服, 飮食, 吉凶禍福, 易學,
相生原理, 相剋原理, 祭式原理, 太極, 陰陽, 八卦, 丹學修練, 韓國仙道, 弘益人間, 理化世界,
天符經, 三一神誥, 參佺戒經, 精, 氣, 神, 東醫寶鑑, 藥食同源.

3. 주역철학과 음양철학
周易, 卜筮書, 思想書, 時中, 時宜適切, 訟卦, 否卦, 同人卦, 渙卦, 大過卦, 革卦, 泰卦,
大有卦, 謙卦, 豊卦, 尊陽卑陰, 易經, 易傳, 善惡, 是非, 扶陽抑陰, 對待, 還精補腦,
房中養生, 道德經, 莊子, 內丹學, 老莊, 道, 虛, 靜, 無, 精, 氣, 神, 凝神, 守一, 坐忘, 心齋,
周易參同契, 黃帝陰符經, 同類施功論, 悟眞篇, 丹經, 乾坤, 坎離, 精氣, 煉丹, 龍虎交合, 眞鉛,
外藥, 內藥, 取坎塡離, 純陽, 坎離交論, 爐鼎, 李元龜, 乾坤, 陰陽相涵論, 抑陰尊陽, 乾道,
Libido, Sigmund Freud, 虛飢本能, 攻擊本能, 性的本能, 王弼, 周易注, Numinosum, anima,
animus, persona, 蘇東坡, 東坡易傳, Mannweib, imago, Seele, projektion, 賢人之德, 賢人之業,
繫辭傳, 無意識, Selbst, complex, neurosis, hysterie, stress, double conscience, 以人補人,
Dissoziation, antinomy, aporiā, Faust.

4. 명리학과 음양철학
四柱八字, 萬歲曆, 太陽曆, 太陰曆, 10天干, 12地支, 管子, 呂氏春秋, 春秋繁露, 淮南子,
黃老學, 道家, 法家, 黃帝, 老子, 氣化宇宙論, 天人感應論, 鄒衍, 尙書, 天文訓, 墬形訓,
相生關係, 相剋關係, 地形訓에, 五行相治, 時則訓, 寅申, 卯酉, 辰戌, 巳亥, 午子, 未丑,
對待關係, 六合, 地支 三合, 旺相休囚死, 壯生老囚死, 十二運星法, 陽胞胎法, 十二運星法,
五臟, 五時體係, 大禹謀, 泰族訓, 五行大義, 肩劫格, 食傷格, 財星格, 官殺格, 印綬格,
納音五行, 天輕地重說, 寅月歲首, 算命, 窮通寶鑑, 抑强扶弱, 氣候物類論, 陰陽 一進一退,
紫微斗數, 子平, 萬育吾, 三命通會, 陳素庵, 命理約言, 旋相爲宮, 同類娶妻, 隔八生子,
下生上生, 納音, 一辰含五音, 同類娶妻, 隔八生子, 下生上生, 十二律, 納音法, 納音五行,
一辰含五音, 同類娶妻, 隔八生子, 下生上生, 三元之理, 金音爲先, 六十花甲, 12胞胎法,
地藏干, 鄒衍, 董仲舒, 五格, 周敦頤, 梁啓超.

5. 한의학과 음양철학
Shamaism, 巫醫, 馬王堆 漢墓, 醫書, 陰陽脈死候, 素間 靈樞, 難經 氣絶, 脈診法,
陰陽脈死候死證, 臟腑理論, 死證, 經脈, 十二經脈遍診法, 黃帝內經, 理發氣隨, 氣發理乘,
人身, 陰平陽秘, 臟象論, 五臟, 情志, 十二支化氣, 地支, 五行屬性, 正化對化, 陰陽 四時,
消長, 素問·陰陽應象大論, 陽生陰長, 陽殺陰藏, 陽中之陽, 陽中之陰, 陰中之陽, 陰中之陰,
一陽→二陽→三陽, 一陰→二陰→三陰, 子午少陰君火, 丑未太陰濕土, 寅申少陽相火,
卯酉陽明燥金, 辰戌太陽寒水, 巳亥厥陰風木, 三陰三陽, 四時消長, 延年益壽, 東醫寶鑑,
補益藥物, 補陽藥物, 補陰藥物, 補氣藥物, 補血藥物, 活人救世, 修己治人, 五色素論,
溫凉寒熱論, 臟象學說, 氣, 經絡, 經穴.

6. 현대문명과 음양철학
儒敎, 心性, 四端, 仁義禮智, 佛敎, 三毒, 貪嗔痴, 修道, 男尊女卑論, 陽尊陰卑論, 武道,
氣功, 養生, 디자인, 기업이론, 조형이론, 건축이론, 언어학, 마케팅, 風水, 인테리어,
陰陽空間, 신앙, 풍속, 예술, 사회적 제도, 문학, 미술작품, 미술치료, 심리치료, Gest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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