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국제정치, 남한산성과 인조, 병자호란 2권

조선왕조실록(탁양현 엮음) | e퍼플 | 2018년 08월 3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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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大義的 名分 혹은 實利的 國益



朝鮮王朝(1392~1910) 執權 519년 동안에, 壬辰倭亂(1592~1598), 丁酉再亂(1597), 丁卯胡亂(1627), 丙子胡亂(1636) 등의 전쟁이 집중적으로 20~30여 년 간격으로 일어난 시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비록 갖은 受侮를 당했을망정 멸망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청나라가 조선왕조의 멸망을 목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조선을 점령하여 王權 자체를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조선을 점령하지 않더라도, 청나라는 자기네 領土로 삼을 영역은 이미 많았다. 더욱이 청나라는 명나라를 내몰고서 중원대륙을 점령하고자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병자호란은, 단지 더 큰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한 前哨戰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예컨대 三國時代에서 高麗王朝로,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권력이 이동하는 시절에는, 별다른 다툼도 없이 기존의 집권세력이 멸망해버린다. 그 이유는,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易姓革命的 권력투쟁의 경우 執權 자체를 목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不可避한 경우 전쟁도 不辭하겠지만, 政權만 확실히 簒奪하면 더 이상의 武力的 충돌은 없다.
人類史에서 대부분의 집단 간에 충돌하는 전쟁의 경우, ‘收奪的 利得’을 목적하므로, 굳이 그 집단 자체를 붕괴시킬 필요가 없다. 나아가 기존의 집단을 유지시키면서,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수탈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득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는 물론이며 현대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현대의 전쟁이란 대부분 에너지나 자본을 수탈하려는 覇權에 얽힌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청나라 황제가 인조에게 보낸 國書로서, 인조 15년 1월 28일의 기사이다. 여기에는 丙子胡亂이 收奪戰爭이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짐이 만약 明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步兵·騎兵·水軍을 조발하여, 혹 수만 명으로 하거나, 혹 기한과 모일 곳을 정하면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水兵·槍砲·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犒軍하는 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聖節·正朝·冬至 中宮千秋·太子千秋 및 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內官에게 명하여 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箋文의 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陪臣이 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軍中의 포로들이 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사로잡은 사람이니,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諸臣과 혼인을 맺어 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刷還해야 마땅하다.
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조칙으로 보이는 바이다.
崇德 2년 정월 28일.
歲幣는 黃金 1백 兩, 白銀 1천 냥, 水牛角弓面 2백 副, 豹皮 1백 張, 鹿皮 1백 張, 茶 1천 包, 水㺚皮 4백 장, 靑黍皮 3백 장, 胡椒 10斗, 好腰刀 26把, 蘇木 2백 斤, 好大紙 1천 卷, 順刀 10파, 好小紙 1천 5백 권, 五爪龍席 4領, 각종 花席 40령, 白苧布 2백 匹, 각색 綿紬 2천 필, 각색 細麻布 4백 필, 각색 細布 1만 필, 布 1천 4백 필, 쌀 1만 包를 定式으로 삼는다.

다만, 아주 특수한 경우로서, 상대방 집단의 붕괴 자체를 목적하게 되면, 그러한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해진다. 대표적으로 理念戰爭이나 宗敎戰爭 따위가 그러하다. 그런 형태의 전쟁은 별다른 이득을 목적하지 않으며, 오로지 抹殺을 목적하는 탓이다. 따라서 그런 형태의 전쟁만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적어도 민족이나 국가 자체가 멸망하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다.
여하튼, 21세기에 南韓이나 美國의 입장에서, 北韓이 핵문제를 비롯하여 여러모로 걸리적거린다면서, 북한이 1인 독재체제이므로 金正恩을 암살하여버리면 북한체제를 붕괴시키고 점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섣불리 기존의 체제를 붕괴시켜버리면, 그 집단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거나,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급격히 감소해버릴 수밖에 없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收奪戰爭처럼, 인류사의 대부분의 전쟁은 수탈전쟁이다. 가장 거대한 전쟁이었던 世界大戰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저마다의 이득이 相衝하여 발생한 전쟁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전쟁의 원리를 명확이 인식해야 한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 등의 관계에서 유발될 수 있는 전쟁적 상황 역시, 이러한 수탈전쟁의 원리를 좇을 것임은 明若觀火다. 그러니 名分이 아닌 實利를 선택해야 하며, 그러한 실리는 곧 國益임을 유념해야 한다.
혹여 우리 민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그러한 시절은 인류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21세기에는 지구별 어느 곳이라도 속속들이 노출되어 있는 탓에, 그러한 想像共同體가 실현되기는 실로 어렵다.
병자호란의 시절에는 어떠했는가. 현대에 비한다면, 그 시절에는 그나마 鎖國的 집단공동체의 실현이 다소 가능했다. 그런데도 결국 국제정치의 狂風을 피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覇權國이 아닌 이상, 君臣關係를 맺고서 事大하는 패권국이 몰락해가고, 새로이 패권이 변동하는 상황에서, 그 영향력으로부터 고립될 방편은 없는 것이다. 멀리 바다 너머에 있던 日本 역시도, 결국 그러한 국제정치적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다음은 인조 15년 1월 30일에, 전쟁에 패배하여 신하의 신분으로서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禮를 행하는 장면을 기술한 記事다.

龍骨大와 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上(仁祖)의 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揖하는 예를 행하고, 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翰林·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侍講院·翊衛司의 諸官을 거느리고, 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汗이 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方陣을 치고 좌우에 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汗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大君 이하가 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汗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汗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나라 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의 여러 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衛率 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進饌하고 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桑田에 나아가 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昌慶宮 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위의 記事에 여실히 드러나듯이, 전쟁에서 패배한 자는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나을 정도의 갖은 恥辱을 堪耐케 된다. 仁祖는 청나라의 汗에게 3번 절하고 9번 조아린다. 그리고서 한은 시종들에게 개를 끌고 오도록 하여 고기를 던져준다. 그야말로 조선왕조의 王이 개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 왕비들이 한에게 절을 올린다. 한 나라의 왕비들이 敵의 王에게 절을 올린다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위안부나 매춘부로 내몰리는 여성들의 신세와 별다르지 않다. 국가공동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그러한 치욕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략-

저자소개

-상략-
두 차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의 지배층은, 청에 대한 적대감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나라를 쳐서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효종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상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과 함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修築하고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청이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對中國 지배를 공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였으므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조선으로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청과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여, 경제상ㆍ문화상 자주 교류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청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여 적극으로 수용하였고, 이 무렵 러시아가 침략해오자, 청은 이를 격퇴하려고 조선에 원병을 명하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전쟁은 국제정치를 작동시키는 가장 유력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전쟁은, 전쟁 자체로서 전쟁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2차례의 世界大戰이다. 이후 人類는 전쟁 자체에 대해 심각히 熟考케 된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도록 전쟁을 代替할만한 별다른 수단은 발명되지 않았다.
國際政治的 전쟁에 대비하여, 가장 중요한 상황의 判斷尺度는 모름지기 名分과 實利의 分別이다. 병자호란도 그러하다. 기존 光海君의 中立外交가 時宜適切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仁祖反正의 쿠데타 세력인 西人이 주장하는 名分重視 역시 적절한 국제정치 전략은 아니다.
어쨌거나 人類史를 통털어 검증되는 事例로써 살필 때, 국제정치는 철저히 實利를 목적하여 작동하여야 하며, 그러한 실리는 곧 國益을 의미함을 부정할 수 없으며, 결코 부정해서도 안 된다. 그러했다가는 西人勢力의 ‘南漢山城의 비극’을 재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국제정치는 覇權을 목적하여 작동하는 법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동아시아의 패권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이동하는 시절이었다. 그러한 변화의 시절에는, 국제정치적 時流를 분석해내는 일이 急先務다. 이를 명확히 해내지 못하면, 결국 弱小國은 온갖 피해를 입게 된다.
물론 애당초 高句麗와 같은 强大國으로서 覇權國을 도모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패권국이 되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어차피 세계의 패권국은 단 하나일 수밖에 없는 탓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高麗王朝 이후 單一民族的 국가공동체를 槪念的으로 유지하게 되면서, 우리 민족은 패권국의 꿈일랑은, 꿈으로서도 가질 수 없는 형편에 머물고 있다. 高麗王朝, 朝鮮王朝, 大韓帝國, 日帝强占, 大韓民國, 죄 그러하다.
여하튼 중국의 中國夢의 경우처럼, 패권국의 꿈을 꿀 수 없는 형편이라면, 이제 어떻게 하면 국가공동체를 적어도 전쟁의 慘禍로 내몰지 않으며, 나아가 경제를 부흥시켜 養民할 수 있는가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할 때 국제정치의 場에서 요구되는 것은, 응당 ‘實利的 國益’이다. 그러니 국제정치의 현실세계에서 大義, 名分, 正義, 人權, 이러한 것들은 실상 허울좋은 外交的 rhetoric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라고 해도, 병자호란의 상황과 별반 달라진 바 없다. 쉬이 과거에 비해 아주 多樣化되고 多角化된 듯하지만, 결국 그 패권국은 미국이거나 중국인 탓이다.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위상은 여전히 확고부동한 세계 1등이다. 그저 2등의 자리에 여러 이유로 러시아, 일본, 중국 순서로 배치될 따름이다.
그런데 과연 2등이 1등으로 浮上할 수 있을까. 지난 現代史를 살필 때, 당최 그러한 상황 발생하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그 선택은 지극히 선명하다. 응당 대한민국의 國益을 목적해야 한다. 그래야만 병자호란의 비극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목차소개

▣ 목차





1. 인조 15년 1월 19일
이조참판 정온의, 최명길이 나라를 팔아 넘겼다는 내용의 차자

2. 인조 15년 1월 20일
김수현 등이 ‘신하’란 글자에 대해 진달하니, 영의정에게 하문하다

3. 인조 15년 1월 20일
오랑캐가 답서를 보내어,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보내라고 하다

4. 인조 15년 1월 21일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묶어 보내기 어렵다는 내용의 국서

5. 인조 15년 1월 22일
김수현 등이 결전의 글을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6. 인조 15년 1월 22일
김류·이성구·최명길이 입대하여, 신하를 묶어 보내는 것에 대해 아뢰다

7. 인조 15년 1월 22일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8. 인조 15년 1월 23일
채유후, 이명웅, 황일호 등이 세자의 출성에 대해 아뢰다

9. 인조 15년 1월 23일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겠다는 국서

10. 인조 15년 1월 23일
시강원 설서 유계의 적극 싸울 것을 청한 상소문

11. 인조 15년 1월 26일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에게 보낼 것을 청하다

12. 인조 15년 1월 26일
대신 및 최명길이 청대하자, 성을 나가기로 결정하다

13. 인조 15년 1월 27일
황제의 약속을 확인하려는 국서

14. 인조 15년 1월 28일
삼공이 청대하여, 세자의 출성 여부와 결박해 보낼 신하의 수를 아뢰다

15. 인조 15년 1월 28일
용골대가 ‘한’의 글과 ‘상’의 용포 착용 문제를 전하다

16. 인조 15년 1월 29일
윤집과 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17. 인조 15년 1월 30일
이조참판 정온의 차자

18. 인조 15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서,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19. 인조 15년 2월 1일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가 고려옥인을 가져오다

20. 인조 15년 2월 2일
철군하는 청나라의 ‘한’을 전송하다

21. 인조 15년 2월 2일
제도의 군사를 파하다

22. 인조 15년 2월 8일
철군하면서 왕세자,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23. 인조 15년 2월 9일
대신들과 최명길을 인견하여, 명나라와의 문제를 논의하다

24. 인조 15년 2월 13일
도승지 이경석이 일반 백성의 속환을 대신해 주길 청하자 윤허하다

25. 인조 15년 2월 18일
회은군 이덕인을 사은 부사로 삼아, 포로가 된 종실을 쇄환하도록 하다

26. 인조 15년 2월 19일
중앙과 지방의 군사와 백성에게 교유한 글

27. 인조 15년 2월 28일
청에 빼앗긴 교서와 신주의 개조 문제에 대해, 최명길이 아뢰다

28. 인조 15년 2월 28일
비국이 모든 문서에, 숭덕의 연호 쓰기를 청하다

29. 인조 15년 3월 20일
가도 공략 문제와 청과 일본의 통신 문제를 의논하다

30. 인조 15년 4월 4일
이조판서 최명길이, 신하들이 벼슬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해 아뢰다

31. 인조 15년 4월 21일
포로를 속환하는 문제에 대한 최명길의 차자

32. 인조 15년 5월 15일
최명길의, ‘상’이 국가를 지키었다는 내용과 문제를 다룬 차자

33. 인조 15년 6월 1일
북경에서 돌아온, 동지사 김육과 서장관 이만영을 소견하다

34. 인조 15년 7월 4일
사은사에게 청나라의 실정과 삼학사 등의 일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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