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세시대의 암흑시대,제1기.The Dark Ages, Period 1, 476-918, by Charles Oman

도서정보 : Charles Oman | 2020-04-2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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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세시대의 암흑시대,제1기.The Dark Ages, Period 1, 476-918, by Charles Oman

THE DARK AGES .제1기.

476- 918
BY
CHARLES OMAN, M.A., F.S.A.
FELLOW OF ALL SOULS COLLEGE
AND LECTURER AT NEW COLLEGE, OXFORD
AUTHOR OF ‘A HISTORY OF GREECE,’
‘THE ART OF WAR IN THE MIDDLE AGES,’ ETC.
PERIOD I
RIVINGTONS
KING STREET, COVENT GARDEN
LONDON
1898
Third Edition

中世 暗黑時代 , Dark Ages.

로마 가톨릭의 부패로 1천 년 동안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 대략 A.D.500-1500년. 사실상으로는 A.D.590년그레고리1세, 교황권 확립 부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까지를 중세 암흑시대. 영의 세계는 빛을 잃고 로마 가톨릭의 교권과 부패가 만연했던 시기 시대.

중세 암흑시대 中世 暗黑時代, Dark Ages

구매가격 : 36,000 원

(Liberte 프랑스 혁명사 10부작-09) 공포정으로 가는 길

도서정보 : 주명철 | 2020-04-2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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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은 시리즈 초반에 지적했던 일본 의존적 학술용어 번역에 대한 문제점을 좀더 확장해 아직도 관성적으로 쓰이는 중요 용어 몇 가지를 짚어보며 글을 시작한다. ‘삼부회’가 아니라 ‘전국신분회’, ‘면죄부’가 아니라 ‘면벌부’, ‘자유·평등·박애’가 아니라 ‘자유·평등·우애(또는 형제애)’가 올바른 용어인 것처럼, ‘사회집단이 공유하는 정신세계’를 뜻하는 ‘망탈리테’를 무조건 일본 학계의 권위를 믿고 ‘심성사’, ‘집단심성’으로 옮기는 일에 주명철 교수는 “자존심 상한다”고 토로하며 ‘집단정신자세(의 역사)’가 정확한 의미라고 밝힌다. 이 시리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성직자 시민헌법’이나 ‘구국위원회’를 과거 일본인이 원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지도 않고 엉뚱하게 번역한 ‘성직자 민사기본법’이나 ‘공안위원회’로 여전히 별 문제의식 없이 갖다 쓰는 행태에 대해서도 주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일본어에 능통한 한국의 역사가가 반자동적으로 가져와서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대물림하는 현실, 부끄럽지 않은가?”

지난여름 전국을 뜨겁게 달군 ‘NO JAPAN’ 운동과 이 시리즈의 완간을 기회로 우리 학계의 일부 집단이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자발적인 예속’에서 과감히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이제 현명한 독자들은 식민지 지식인의 노예근성에 언제라도 “NO!”를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본문에서는 1792년 8월 10일에 일어난 제2의 혁명 이후 입법의회로부터 군주정을 정지하고 새 헌법의 제정을 위임받은 국민공회가 공화국을 선포한 뒤 반년 동안 국내외의 반혁명세력과 싸우면서 국방위원회를 좀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구국위원회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을 두루 살펴본다.

정치적으로는 지롱드파와 몽타뉴파의 대립이 극에 달한 과정,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전쟁과 봉기들, ‘인민의 친구’로 불리던 급진적 성향의 마라가 살해당한 사건,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먼저 보낸 뒤 하루하루 온갖 모욕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과 지롱드파를 이끌던 주요 인물 21명의 처형 등이 중심을 이룬다.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떠안고 사형을 언도받은 퀴스틴 장군이 다음 날 오전에 단두대에 오른 것 외에도 국내 반란에 가담한 자, 거동이 수상한 자들을 탄압하는 분위기가 1793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렇듯 국가 위기 극복이 급선무였기에 공포정이 국민공회의 의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다각도로 짚어본다. 당시는 단두대에서 스무 명을 처형하는 데 불과 26분밖에 걸리지 않은 시대였다.

경제적으로는 혁명의 도화선이 된 식량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필품 값은 날로 치솟고 투기와 매점매석 행위도 줄어들지 않자 ‘최고가격제법’을 실시해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또한 공화국 탄생에 어울리는 ‘공화력’의 제정과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도량형의 표준화 작업 등을 중심으로 사회문화적 변화의 큰 흐름도 짚어본다.

9권에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를 직접 들어보자.

“절대군주제의 신성성을 민주주의의 신성성이 대체하는 과정이 혁명이었다. 절대군주가 법의 원천으로 행사하던 신성성을 국민의 대표들이 무너뜨리면서 국민주권이라는 새로운 신성성을 창조하는 과정이 바로 혁명이었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과 비교할 만한 사례를 많이 가졌다. 그 하나가 ‘박정희 신화’이며, 그것이 딸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무너지고 있다. 유신헌법 시절에는 대통령을 비방하면 중벌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대통령에게 온갖 상스러운 욕을 퍼붓고도 무사하다. 우리는 대통령이 절대군주, 아니 폭군이던 시절을 벗어나 국민이 진짜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구매가격 : 14,000 원

고대왕국의 연대기.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 by Isaac Newton

도서정보 : Isaac Newton | 2020-04-21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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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왕국의 연대기.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 by Isaac Newton
영국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시작함. 유럽의 지중해와 아랍의 고대 왕국을 설명. 유럽의 처음 기억이 있는 것들로부터 알렉산더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의 연대기를 기술. 각장마다 기술내용은 그리크의 처음 시대의 연대기, 이집트왕국,앗시리아의 왕국, 바빌로니아와 메데스의 두왕국, 유다민족의 솔로몬의 사원, 페르시아 왕국. 등을 기술함.
Title: 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
To which is Prefix'd, A Short Chronicle from the First
Memory of Things in Europe, to the Conquest of
Persia by Alexander the Great
Author: Isaac Newton

구매가격 : 22,000 원

용어로 이해하는 세계사(중세 시대)

도서정보 : 이지로 | 2020-04-1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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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였어요. 로마 말기에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채택되면서 그리스도교는 중세의 종교로 이어지게 되죠. 유럽의 중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세워진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인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루어져요. 세계사를 처음 이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설명이 많이 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했어요. 짧은 분량이지만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에요.

구매가격 : 2,000 원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국가들의 연대기.The boy's Froissart, by Jean Froissart and Alfred Kappes, and

도서정보 : Jean Froissart and Alfred Kappes, and Sidney Lanier | 2020-04-07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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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국가들의 연대기.The boy's Froissart, by Jean Froissart and Alfred Kappes, and Sidney Lanier
영국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국가들의 관습및 전투 즉 유럽의 각각 국가간의 전쟁에 대해서 프로이사트 등이 쓴책.
THE CHRONICLES OF
ENGLAND, FRANCE, SPAIN, &c.
Title: The boy's Froissart
Author: Jean Froissart

Alfred Kappes,

Sidney Lanier
Language: English
SIR JOHN FROISSART’S CHRONICLES
OF
Adventure Battle and Custom in
England France Spain etc.
EDITED FOR BOYS WITH AN INTRODUCTION
BY
SIDNEY LANIER
EDITOR OF “THE BOY’S KING ARTHUR”
Illustrated by Alfred Kappe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895

구매가격 : 22,000 원

미국, 제국의 연대기

도서정보 : 대니얼 임머바르 | 2020-03-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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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 영토territory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미국의 국제관계, 세계사, 지성사 등을 강의하는 소장학자 대니얼 임머바르 교수는 착안점을 달리해서 이 문제를 생각보자고 말한다. 그는 지난해 출간해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낸 저서 『미국, 제국의 연대기: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원제: How to Hide an Empire)에서 ‘영토territory’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미국은 두 종류의 영토가 있다. 나쁜 짓을 하면 처벌을 받는 영토와 그렇지 않은 영토, 법적 규준을 준수해야 하는 영토와 그렇지 않은 영토로 말이다. 전자는 북아메리카 미국 본토이고, 후자는 전세계에 점조직으로 퍼져 있는 다수의 미국령 섬과 제도, 기지들이다. 점묘주의 제국 미국은 식민지, 미국령 등에서 다양한 자원을 획득해왔고, 그곳의 사람들을 활용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지로 하여 전 세계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그런 영토의 존재가 그간 미국을 얘기할 때는 잊혀졌거나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 지도는 50개주로 구성된 익숙한 모습이다. 실제 영토는 이와는 매우 다르다. 우선 알래스카와 하와이, 괌이 빠져 있다. 이게 전부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푸에르토리코, 미국령 사모아·버진아일랜드, 태평양과 카리브해에 퍼져 있는 섬들 등 훨씬 많은 영토와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에 미군 기지는 800개가 넘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그 외의 모든 나라가 보유중인 기지를 다 합쳐도 30개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 책엔 ‘로고 지도logo map’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미국을 한정시킨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지도다. 그러나 그 다음 페이지에는 1941년 무렵 미국 영토였던 곳까지 포함시킨 확장된 미국 지도가 제시된다. 알래스카, 하와이, 괌, 미국령 사모아, 푸에르토리코,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섬들이 모두 포함된 지도다.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

미국이 섬들을 점령한 이유는 대부분 군사적 필요 때문이다. 하지만 로고 지도는 대규모 식민지든 아주 작은 섬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배제한다. 게다가 그런 지도는 진실을 호도한다. 로고 지도만 보면 미국은 정치적으로 균일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각각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자발적으로 편입된 주들로 구성된 연합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사실이었던 적도 없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조약이 비준된 그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주와 영토의 집합으로 이뤄진 국가다. 각각 서로 다른 법이 적용되는 두 영역으로 나뉜 분할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20세기의 중반을 지날 무렵 ‘식민지’들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업그레이드된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이 이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

◆ 영토-농업-산업화-군사력-기술력의 연결고리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미국 초기 영토 확장의 역사를 다룬다. 앞서 서술한 최초 정착과 원주민 구역의 강탈부터 시작해, 과도한 농지 개발로 손상된 지력을 회복시켜줄 해조분(새똥 비료)을 얻기 위해 여러 섬을 점령하는 과정, 농업을 기반으로 해서 성장한 산업화, 산업화가 키워낸 군사력,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기존 식민 열강들과의 대결에서 거둔 승리, 그를 통해 확보한 자원과 인력을 다시 내지와 연결하는 방식 등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필리핀이라든지, 푸에르토리코 같은 인구 밀도가 높은 식민지를 통치하는 미국 특유의 방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자세하게 풀어낸다. 먼저 필리핀을 3개 챕터를 할애해 다루면서 스페인에서 빼앗은 필리핀이라는 섬나라가 어떻게 미국에 저항하고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식민지화되어갔는지가 전개된다.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 노예제 문제, 의회에서의 의견 대립, 잔인한 토벌작전 등으로 이어지는 모습에서 필리핀에 대해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푸에르토리코는 처음엔 하버드대 유학생으로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청년이었던 페드로 알비수 캄포스가 어떻게 반미 운동의 선봉에 나서게 되는지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다뤘다. 핵심은 하나다. 필리핀인과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국인이 되길 바랐으나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차별되었다.

◆ 미국, 유럽을 상대로 표준전쟁에서 승리하다

제2부 점묘주의 제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미국의 탈식민 정책을 쓰면서 전세계를 리모트 컨트럴 하는 점묘주의 제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표준’을 다룬 부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특별한 지위에 놓였다. 부유하고 막강한 데다 화학자와 공학자들 덕분에 식민지 건설 없이도 해외 영토를 좌지우지하는 수단을 보유하게 됐다. 이것 말고도 전쟁 덕분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좀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진행됐다. 바로 표준에 관한 것이었다. 모두가 표준을 원했다. 각 기업은 자사 방식이 표준으로 채택되도록 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표준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설비를 교체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되면 고가의 새로운 기계를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유럽에게 승리했다. 표준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허버트 후버의 활약이 다뤄진다. 제국의 표준화란 머나먼 땅에서도 식민 지배자의 관행이 지켜진다는 의미였다. 제국은 새로운 법과 아이디어, 언어, 스포츠, 군사 협정, 패션, 도량형, 예의범절, 화폐, 업계 관행 등을 식민지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실제로 식민지 관리들은 이러한 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다시 말해, 영국의 도량형 체계(피트, 야드, 갤런, 파운드, 톤)가 제국주의 체계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도량형은 영국 제도를 넘어 대영제국 전체에 동일한 단위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보급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영제국’의 모든 자리에 ‘미국’이 들어가 모든 것을 미국식 표준으로 대체해버렸다. 일단 표준이 확고하게 정해지면 이를 없애기란 어렵기 때문에, 예를 들어 독립 후에도 필리핀은 미국 중심의 간호 실무에 치중하게 됐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왜 루스벨트는 필리핀이란 단어를 뺏을까

이 책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문 초고 사진이 실려 있다. 직접 펜으로 교정을 본 초고에서는 필리핀이 지워져 있고 하와이가 부각되었다. 연설의 내용은 일본의 미국 공격을 규탄하는 것이다. 필리핀을 지워버린 이유는 당시 미국인들은 필리핀을 전혀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와이는 달랐다. 미국과 가까웠고, 백인의 거주 비율이 높았다. 실제로는 필리핀이 훨씬 거대한 면적과 인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전쟁에 대한 여론을 고취시키기 위해 필리핀을 없애고 하와이를 부각시켰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가 미국의 해외 영토인 푸에르토리코를 덮쳐 큰 피해를 입힌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푸에르토리코가 미국 땅이라는 걸 아는 미국인은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고, 30세 이하에서는 37퍼센트에 그쳤다. 그러나 실상은 전 세계가 미국의 영토나 기지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특히 미국인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게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미국 영토 확장의 역사: 왜 식민지를 포기했을까

확장된 미국 영토의 역사는 세 가지 면에서 기술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서부로의 확장이다. 국경선을 서쪽으로 넓히는 과정에서 북미 원주민을 쫓아냈다. 두 번째는 아메리카 대륙 외부에서 일어난 일로, 빠르게 시작됐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로고 지도의 모양을 완성한 지 3년이 되자마자 미국은 새로운 해외 영토를 합병하기 시작했다. 1867년에 알래스카를 점유했고 1898~1900년에 스페인의 해외 영토 대부분(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및 괌)을 흡수하고 스페인령이 아닌 하와이섬과 웨이크섬, 미국령 사모아를 합병했다. 1917년에는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사들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그 영토들은 확장된 미국 영토의 육지 면적에서 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 이곳 인구의 합계는 1억3500만 명이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 과정은 놀라웠다. 전쟁에서 이긴 후 영토를 포기한 것이다. 최대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독립했다. 미국은 점령지에서 빠르게 철수했고 (인구가 희박한 미크로네시아 군도 중) 단 한 곳만 미국령에 합병됐다. 다른 영토는 독립하지는 못했으나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 푸에르토리코는 ‘연방Commonwealth’이 되면서 강압적인 합병이 표면적으로는 동의를 거친 것처럼 보이게 됐다. 하와이와 알래스카는 수십 년간의 인종차별주의적인 결정을 극복하면서 주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측면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은 왜 권력의 정점에서 식민지 제국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했을까? 저자는 그 질문을 자세히 파고들고 있다. 우선 피식민자들이 저항하며 식민지 제국을 몰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한 세계 역사의 추세였다. 또 다른 답은 기술과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실제로 식민지를 보유할 필요 없이 제국의 수많은 이점을 실현할 수 있는 놀라운 기술들을 개발했다. 플라스틱과 기타 합성소재를 이용해, 열대작물로 만든 기존의 제품을 인공물로 대체했다. 비행기, 라디오, DDT 덕분에 합병할 필요 없이 손쉽게 미국의 상품과 아이디어 및 인력을 외국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정치적 경계를 넘어 자국에서 만든 대다수의 물건과 관행(나사 부품에서 도로 표지판과 영어에 이르기까지)을 표준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금 물리적 통제를 벗어난 장소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기술들은 형식상 제국이라는 익숙한 모델에서 미국을 분리시켰다. 기술 덕분에 식민지화가 세계화로 대체된 것이다.

세계화를 만들어낸 새로운 기술들은 어느 날 불쑥 등장한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대다수는 미국이 영토를 새롭게 관리할 수 있도록 1940년대에 단기간 내에 미군이 개발한 것이다. 놀랍게도 불과 몇 년 후 미군은 전 세계에 걸친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했는데, 놀라운 점은 식민지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무역, 교통 및 운송, 통신이 한 국가, 즉 미국에 극도로 집중됐다는 사실도 놀랄 만한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의 시대에도 영토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식민지 시대 영토의 일부(수백만 명의 인구 포함)를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도상의 크고 작은 수많은 섬을 점유하고 있다. 미국의 주요 활동 무대이자 발판이며 비축기지일 뿐만 아니라 망루인 동시에 연구실인 것이다. 이러한 영토는 역사가이자 지도 제작자인 빌 랭킨의 개념을 빌리자면 ‘점묘주의 제국pointillist empire’을 구성하고 있다. 오늘날 그런 제국은 전 지구에 뻗어 있다.

◆ 미국은 왜 스스로의 제국 지위를 부정하는가

영국은 대영제국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제국을 기리는 대영제국의 날Empire Day을 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알제리가 프랑스령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자국의 국경을 고질적으로 혼동해온 것은 미국뿐이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은 스스로를 제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제국주의 항쟁 속에서 탄생했으며, 히틀러의 천년제국인 라이히와 일본제국에서 소비에트연방의 ‘사악한 제국Evil Empire’에 이르는 여러 제국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타지 세계에서도 미국의「스타워즈」는 은하제국에 맞섰다. 이처럼 공화국을 자처하는 미국의 자화상은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런 비용의 대부분은 식민지, 점령 지역 및 군사기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지불해왔다. 로고 지도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넣었고, 이는 거주하기에 위험한 곳이었다. 미 제국에 사는 사람들은 종종 총격을 당하고 폭격을 입고 기아에 시달리고 억류되고 고문당하고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 2019년 미국 지성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책

『퍼블리셔스 위클리』 2019년 최고의 책, 『시카고트리뷴』 2019년 10대 도서, 『뉴욕타임스 북리뷰』 주목할 만한 도서, NPR 편집자 초이스 등 2019년 수많은 상을 휩쓴 이 책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다. 우선 미국의 팽창주의 역사를 다룬 책은 많지만 임머바르의 이 책은 “훌륭한 구상과 독창적인 발상, 읽을수록 빠져드는 재미, 때로운 냉소적이고 묵직한 진지함까지 갖췄다”(앤드루 바세비치)는 점을 평가받고 있다. 새뮤얼 모인 예일대 교수는 “북미 대륙 밖에서 미국의 식민 제국이 발흥하는 과정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에서 세계화로 선회한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을 빼앗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일반 대중과 학자 모두에게 널리 읽히는 새로운 고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데이비드 홀린저 UC버클리 교수는 “미국이 그저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아주 뚜렷한 특색을 지닌 제국이며, 이런 면은 지금까지 대부분 무시되어왔음을 잘 보여준다”며 이 책이 “세계사 속 미국 역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꿔놓는다”고 격찬했다.

왜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이토록 놀랍다는 듯이 반응하는 것일까. 저자는 미국이 2세기가 넘도록 ‘법’을 다르게 적용하는 두 개의 영토로 분할된 거대 제국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식민지 영토는 오늘날 대중이 거의 알지 못하는 자치령들이다. 초창기에 아메리카 대륙 변경의 원주민 영토들이었던 이들 자치령은 이후 한동안은 하와이, 알래스카, 필리핀이었다가 오늘날은 푸에르토리코, 괌, 버진아일랜드를 포함한 지역으로 변해왔다. 나아가 해외 군사기지와 경제의 글로벌화 같은 강력한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은 다른 종류의 제국 건설에 나섬으로써 제국 중의 제국다운 면모를 다져왔다고 말한다. 놀라운 통찰력을 통해 주류 교육 및 지성계에서 거의 완벽히 배제된 미국 역사의 단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많은 언론이 저자의 글쓰기 능력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저자는 착취와 폭력으로 점철된 무거운 내용을 소개하면서도 동시에 팽창주의적 야심과 숨김없는 자부심 사이에서 벌어진 부조리한 틈을 조명해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안다. 『뉴욕타임스』는 “임머바르의 놀라운 스토리텔링 능력은 이 책을 통해 생생히 드러나는데, 나사를 표준화하려는 후버의 노력을 다룬 부분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러나 숱한 일화와 감춰진 이야기를 넘어, 이 책은 때로는 더욱 심오하고 거대한 내용을 제시한다. 날렵하면서도 방대하고 폭넓으면서도 아주 꼼꼼하게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결과 상상 속 모습이 아닌 실제 미국 역사를 흥미진진하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실체로 구현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스펙테이터』는 “부조리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닌 이야기꾼의 솜씨로 미국 및 세계 속의 미국을 고찰하는 뛰어난 논고를 세상에 내놓았다”라고 보았다.

◆오바마, 트럼프는 모드 식민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이상하게도 미국은 제국주의라는 비난에 자주 시달렸으나 영토 차원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미국을 로고 지도로 나타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나머지, 제국을 부르짖으며 열렬히 비판하는 전문가들조차 해외 영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확장된 미국 영토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영토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나 기지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 중요한 문제다. 미국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영토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군기지에서 시작됐다.

영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식민주의는 정치적 배경에서 그 존재가 가장 두드러진다. 매케인, 페일린, 오바마 그리고 트럼프는 모두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는 이상하고도 놀라운 사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놀라움을 뛰어넘어 미국의 역사는 제국의 역사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매가격 : 26,300 원

초기 로마제국의 종교들의 대립.The Conflict of Religions in the Early Roman Empire, by T. R. Glover

도서정보 : T. R. Glover | 2020-02-19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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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풍속/신화 > 서양사


초기 로마제국의 종교들의 대립.The Conflict of Religions in the Early Roman Empire, by T. R. Glover
고대로마종교 스토이학파 프루타그 ,예수와그의제자들,초대교회 기독교와 유다교 대립,신과 아톰과학,셀시우스,알렉산드리아,테툴리안 등등에대해서 기술.
PREFACE
A large part of this book formed the course of Dale Lectures delivered in
Mansfield College, Oxford, in the Spring of 1907. For the lecture-room the
chapters had to be considerably abridged; they are now restored to their full length,
while revision and addition have further changed their character. They are
published in accordance with the terms of the Dale foundation.
To see the Founder of the Christian movement and some of his followers as
they appeared among their contemporaries; to represent Christian and pagan with
equal goodwill and equal honesty, and in one perspective; to recapture something
of the colour and movement of life, using imagination to interpret the data, and
controlling it by them; to follow the conflict of ideals, not in the abstract, but as
they show themselves in character and personality; and in this way to discover
where lay the living force that changed the thoughts and lives of men, and what
it was; these have been the aims of the writer,―impossible, but worth attempting.
So far as they have been achieved, the book is relevant to the reader.
The work of others has made the task lighter. German scholars, such as
Bousset, von Dobsch?tz, Harnack, Pfleiderer and Wernle; Professor F. C. Burkitt
and others nearer home who have written of 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Boissier, Martha and Professor Samuel Dill; Edward Caird, Lecky, and Zeller;
with the authors of monographs, Croiset, de Faye, Gr?ard, Koziol, Oakesmith,
Volkmann; these and others have been laid under contribution. In another way Dr
Wilhelm Herrmann, of Marburg, and Thomas Carlyle have helped the {vi} book.
The references to ancient authorities are mostly of the writer's own gathering, and
they have been verified.
Lastly, there are friends to thank, at Cambridge and at Woodbrooke, for the
services that only friends can render―suggestion, criticism, approval, correction,
and all the other kindly forms of encouragement and enlightenment.
ST JOHN'S COLLEGE,
CAMBRIDGE,

February 1909.

구매가격 : 29,000 원

카르타고명장 하니발 알프스산을 넘다.Hannibal Crosses the Alps, by Cecil Torr

도서정보 : Cecil Torr | 2020-02-18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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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풍속/신화 > 서양사

카르타고명장 하니발 알프스산을 넘다.Hannibal Crosses the Alps, by Cecil Torr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또는 기원전 181.
지중해 그리스아래 크레타섬의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카르타고 명장 하니발이
로마제국과 싸우기 위해서 지중해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을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는 과정을 지도로 설명함.
한니발 바르카,라틴어: Hannibal Barca,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지도자로, 대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들 중 하나로 평가.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제국, 마케돈 및 시라쿠사,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국가들 모두 얼키고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간 것. 이탈리아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 한니발은 세 차례의 전투,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에 전투)에서 승리.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강약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의 동맹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역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함.
PREFACE
I HAVE heard this question discussed ever since I was a child,
but have never yet written anything about it except in my
Small Talk at Wreyland. In the First Series, page 75, I was
talking about travelling on the Continent, and I said:
“ Plenty of people went to Switzerland at the time when I
first went―1869―far more than when my father went there
thirty years before, but nothing like the crowds that go there
now. They kept more to peaks and passes then; and they
were always talking of Hannibal’s passage of the Alps.
Junius was talked out: Tichborne and Dreyfus were yet to
come; and Hannibal filled the gap. I used to hear them at
home as well as there; and they all had their pet routes for
Hannibal―Col d’Argenti?re, Mont Gen?vre, Mont Cenis,
Little Mont Cenis, Little St Bernard and Great St Bernard, and
even Simplon and St Gothard. In 1871 I went looking for
traces of the vinegar on the Great St Bernard. My father
upheld the Cenis routes as the only passes from which you
can look down upon the plains of Italy. I doubt if Hannibal
did look down. I think he may have shown his men their line
of march upon a map, just as Aristagoras used a map to
show the Spartans their line of march 282 years earlier.”
vi I wrote Anaxagoras by mistake for Aristagoras, and
passed it in the proofs; and it was printed in the first
impression of the First Series, though corrected in the
second impression. I mentioned my mistake in the Se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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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014-모네

도서정보 : 허나영 | 2020-02-0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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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지 우주가 내게 보여주는 것을
붓으로 증명하려 했을 뿐이다”


미술사의 흐름을 뒤바꾼 인상주의 혁명
그 시작과 끝에 ‘빛과 색을 쫓는 사냥꾼’ 모네가 있다

빛의 인상을 쫓는 여정을 시작한 르아브르 해안에서 구세대 미술에 도전장을 내민 파리를 거쳐
대표작 <수련>을 피워낸 지베르니 정원까지 빛으로 가득한 모네의 화실을 찾아 나서다





◎ 도서 소개

인상주의자 모네의 ‘예쁜 그림’에 담긴 아방가르드 정신
회화가 나아갈 길에 새로운 빛을 제시한 그의 삶과 예술로의 여행

프랑스의 근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에펠탑이라면, 미술에는 인상주의 회화가 있다. 둘 다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탄생했고, 처음 발표된 당시에는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예술사에서 확고부동한 가치와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만국박람회를 통해 에펠탑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인 1889년에 모네는 로댕과 함께 각각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와 조각가로서 2인전을 열었다. 르누아르, 드가 등 동료 화가들과 의기투합해 첫 인상주의 전시를 열고 〈인상, 해돋이〉를 발표한 지 꼭 15년만이었다. 그 후로 현재까지 모네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랑받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모네와 인상주의를 주제로 한 전시는 거의 예외 없이 성황을 이루고, 201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모네의 1890년작 〈건초더미〉가 낙찰가 신기록을 세웠다.
모네가 이토록 큰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그림이 대중에게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그의 작품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그저 ‘예쁜 그림’으로만 봐도 좋은 것일까? 1874년에 〈인상, 해돋이〉를 보고 루이 르루아가 내린 ‘인상밖에 없는 그림’이라는 평가는 명백한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 회화를 모범으로 삼는 아카데미와 살롱의 기준에서 이 그림은 아름답기는커녕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그림이었다. 모네는 기존 회화가 추구하던 이상화된 형태와 색, 실제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인상’을 그렸다. 안개 낀 날과 맑은 날 센강의 물빛이 다르고, 공기와 햇빛의 질에 따라 그림자조차 수백 혹은 수천 가지 다른 색을 띤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이런 시각적 차이를 그림으로 구현한 최초의 화가들이 모네와 인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아직 옛것에 얽매인 당대의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결국 역사는 모네와 인상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존 주류 미술에 대항해 시대를 앞선 새로운 미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는 혁명이고 아방가르드다. 이 혁명을 모네는 ‘빛’과 ‘색’으로 이루어냈다. 그는 자신의 눈에 실제로 보이는 자연의 빛을 그린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그가 말년에 시력을 잃어가면서 그린 작품들에 나타난 왜곡된 형상과 색채조차 그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모네는 천재라기보다는 예민한 시각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으며, 빛과 색에 관한 그의 집요한 탐구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를 조각하는 장인과 같았다. 모네의 발자취를 쫓는 이 책은 불가해하리만치 집요한 그 열정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가까이에서 이해해보려는 시도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르아브르에서부터 본격적인 화가 생활을 시작한 파리를 거쳐 아르장퇴유, 베퇴유, 루앙, 지베르니 등으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저자 허나영은 종종 멈춰 서서 화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모네의 삶과 예술을 추동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헤아린다. 르아브르 바닷가에서는 화가의 길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한창 인상주의 전시 준비로 바쁜 와중에 이곳을 찾은 그의 심경을 상상해보고, 파리 생라자르역의 철골 지붕을 바라보며 삶의 무게와 이루고 싶은 꿈 사이에서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분주하고 고단했던 그의 30대를 돌아본다. 첫사랑이었던 아내 카미유를 떠나보낸 뒤 새로운 사랑 앞에서 주저하던 마음과 그럼에도 끝내 그 사랑을 지켜낸 용기까지, 이 책에는 모네의 그림만큼이나 다채로운 빛깔을 띤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시대의 인상을 넘어 회화의 현대성을 포착하다

저자는 모네의 삶과 예술을 이끈 두 가지 배경을 19세기 파리 사회와 미술사의 흐름에서 찾는다. 프랑스혁명으로 주춤했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경제 발달이 본격화된 19세기 중후반의 파리는 ‘모던’이라는 구호 아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격렬하고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오스만 남작의 도시 개조 프로젝트에 따라 무질서한 중세도시가 현대도시로 탈바꿈하고, 새로운 교통수단인 기차가 프랑스 전역을 핏줄처럼 연결했다.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들은 시누아즈리나 자포니즘 같은 이국적인 문물에 환호했다. 달라진 생활 방식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했고, 이를 재빠르게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의 그림은 한마디로 유행을 담은 그림이었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인 ‘벨 에포크’가 모네의 작품 속 화려한 색채로 나타났다. 모네 자신의 삶 역시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가 지베르니에 정착해 정원을 가꾸며 〈수련〉 연작을 그리던 무렵, 인상주의는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며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회화가 신화, 종교, 역사 같은 고전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일상과 현실에 주목하게 되면서, 화가들이 이젤을 들고 화실 밖으로 나가게 된 것도 19세기의 일이다. 사실주의 운동을 이끈 쿠르베, 농민의 삶과 자연을 다룬 바르비종파 화가들,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며 그리라는 가르침을 준 부댕과 용킨트 등이 모두 모네의 스승이자 선배다. 이 같은 경향은 좀 더 앞선 시기에 영국에서 터너와 컨스터블의 풍경화로 나타났고, 모네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을 피해서 간 런던에서 터너의 그림을 접하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미술을 향한 시대적 흐름은 이미 형성되고 있었고, 모네는 그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이에 부응하기 위해 뜻이 맞는 동료와 후원자 들을 모아 인상주의라는 본격적인 길을 냈다. 그 길을 타고 회화는 대상에 대한 정형화된 재현에서 예술가의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한다. 미국의 모더니즘 비평가 그린버그는 인상주의가 이미 지나간 세대의 미술이 되어버린 1950년대에 모네의 현대성을 재발견했다. 특히 색으로 가득한 평면에 가까워진 모네의 후기 작품들이 회화라는 매체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고 보았고, 인상주의를 현대미술의 출발로 평가했다.


빛과 색으로 가득한 거대한 평면, 대장식화 〈수련〉의 탄생

흔히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모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두 개의 키워드는 ‘덮개’와 ‘연작’이다. 루앙대성당을 그릴 때 그는 성당이라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자신 사이에 있는 덮개를 그린다고 했다. 공기, 바람, 안개, 온도, 습기, 시간 그리고 빛과 같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 쉽게 지각되지 않던 것들이 모네의 그림을 통해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덮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날씨와 시간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담기 위해 그의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연작 형식으로 발전했다. 에트르타 해안에서 모네와 어울렸던 모파상에 따르면, 그는 하늘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개의 캔버스를 바꿔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는 건초더미나 런던의 국회의사당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빛과 색을 쫓는 사냥꾼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상을 포착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빛과 함께 모네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물’이다. 말년에 그는 화가보다 정원사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지베르니의 정원을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 특히 연못을 중심으로 한 물의 정원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작품이자, 대장식화 〈수련〉 연작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이 연작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실 수련이 아니라 수련이 떠 있는 연못의 수면이다. 모네는 여타의 대상을 모두 밀어내고 오로지 거대한 수면만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수련〉이 전시된 오랑주리미술관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물과 빛으로 이루어진 덮개에 감싸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그림뿐 아니라 전시 공간까지도 그의 의도대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꽃의 수족관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는 둥근 벽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전시실을 주문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제작했다. 평론가 앙드레 마송은 모네를 미켈란젤로에 빗대어 오랑주리미술관을 ‘인상주의의 시스티나성당’이라고 불렀다. 기념비적인 크기와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놓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한 비유다.

86세로 삶을 마감한 모네는 한 미술 사조의 시작과 끝을 모두 함께한 드문 인물 중 하나다. 인상주의라는 혁명을 시작하고 그 ‘마지막 생존자’가 된 모네는 말년에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탐구의 집약체이자 그것을 뛰어넘어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대장식화 〈수련〉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리고자 했지만, 그 집요한 탐구의 끝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에 드러난 표면적인 아름다움 그 이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과 함께하는 여정이 또 다른 영감과 울림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주를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을 더욱 깊고 정교하게 만들어준다”
-조르주 클레망소





◎ 책 속에서

◆ 모네에게 야외 화실은 그 어떤 화가에게보다도 큰 의미를 지닌다. 결코 실내에서는 담을 수 없는 소재를 화폭에 담기 위해 야외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빛’이다. 모네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태양의 빛과 그에 따라 변하는 만물의 색을 그리기 위해 화구를 들고 센강 변으로 갔다.
-〈프롤로그〉 중에서

◆ 모네의 삶과 예술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은 르아브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노르망디 바다를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 수 있게 도움을 준 스승 외젠 부댕을 만났을 뿐 아니라, 모네에게 인상주의자라는 이름표를 붙여준 〈인상, 해돋이〉를 그린 곳이기 때문이다.
- 〈1장 여명 - 노르망디 바닷가에 이젤을 세우다〉 중에서

◆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급변하는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바로 19세기 젊은 예술가들이 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모네를 비롯하여 이후 인상주의자라고 불리게 되는 화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파리의 삶을 각자의 개성을 살려 표현한 ‘도시의 화가들’이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모네가 주로 그린 것은 자연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모네의 발걸음이 닿았던, 소위 ‘모네의 화실들’은 파리지앵들이 기차를 타고 나가 여가를 즐기던 확장된 파리라고 볼 수 있다.
- 〈2장 일출 - 미래를 향해 달리는 도시와 화가들〉 중에서

◆ 당시 모네를 포함해 인상주의자라고 불린 이들의 상당수는 30대 혹은 40대였다. 이미 가정을 이루었거나 적어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몫을 해야 하는 나이였다. 살롱으로 대표되는 미술 제도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기성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버리는 것은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로 뭉쳤던 것이다. 비록 당시의 보수적 시각에서는 쓸데없는 아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인상주의자들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모네를 인상주의자로 기억하는 것이 그 증거다.
- 〈3장 아침 햇살 - 인상주의자의 탄생〉 중에서

◆ 모네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붓을 잡은 것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한편,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음을 고백한다. 카미유와 함께 바다에 갔을 때, 아르장퇴유의 들판을 산책했을 때, 그녀가 마당에서 아들과 노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모든 순간을 그림에 담고자 했던 모네이기에 이렇게라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 〈4장 정오 - 두 번의 죽음을 넘어서〉 중에서

◆ 모네가 지베르니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가꾸고 있을 때, 비록 인상주의는 해체되었지만 뒤랑뤼엘은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인상주의자들도 당시에 모르던 것이 있다. 그들에게 세계 미술과 문화의 중심은 파리였다.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 20세기에 들어서서 발발한 두 번의 전쟁으로 세계 경제와 정치뿐 아니라 예술의 중심 역시 미국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 파리지앵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부를 얻어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파리에 집을 사두고 살롱을 열어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교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뒤랑뤼엘은 미국 본토에서도 미술 시장이 새롭게 열릴 것이라 예측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 〈5장 오후의 태양 - 지베르니에서 맞이한 벨 에포크〉 중에서

◆ 프랑스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1891년 뒤랑뤼엘갤러리에 전시된 〈건초더미〉 연작을 ‘진정한 사실을 그린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흔히 사실적인 묘사라고 여겨지는 사물의 껍데기가 아니라, 빛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 모네의 그림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 〈5장 오후의 태양 - 지베르니에서 맞이한 벨 에포크〉 중에서

◆ 그토록 시각에 의존하던 화가가 정상적이지 않은 시력으로 그림을 계속 그린다는 것이 범부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네의 그런 열정 덕분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색다른 작품이 탄생했다. 그가 반복해서 다뤄온 동일한 일본식 다리와 장미 아치를 그렸음에도 형상은 불분명해지고 색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붓질은 거칠면서도 강한 마티에르가 드러난다. 그래서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파악하려다가도 강렬한 색과 붓질에 압도당하고 만다. (...) 실제 대상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떠나 오로지 색과 질감만으로 훌륭한 회화가 된다는 점에서 이 시기 모네의 작품은 훗날 미국 추상표현주의와도 연결된다.
- 〈6장 노을 - 〈수련〉, 꿈의 완성〉 중에서

◆ 분명 멀리서 보았을 때 보이던 꽃과 나무, 물비늘이 그림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형태가 흩어지고 대신 다양한 색의 붓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모네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중 하나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꽃이든 사람이든, 설사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성당이라 하더라도 모네의 손에서는 그저 붓자국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는 여인의 아름다운 속눈썹이나 성당의 성스러운 조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햇빛이 자연과 사람을 비출 때 보이는 색에 집중했고 그것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빛 그 자체였다.
- 〈6장 노을 - 〈수련〉, 꿈의 완성〉 중에서

◆ 지금 우리 눈앞에 놓인 모네의 ‘예쁜 그림’ 뒤에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힘겨운 노력과 투쟁이 있다.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물길의 당연한 흐름에 모네가 커다란 돌을 던졌다. 물론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인 쿠르베와 마네가 있었고 후배 격인 고흐와 쇠라가 있었다. 또한 이 예술가들의 전위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해준 뒤랑뤼엘과 같은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네가 던진 돌 옆에 또 다른 돌을 던져주고 흙을 옮겨주자 물길이 바뀌었다. 이들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인상주의는 그렇게 서양미술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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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의 창조

도서정보 : 로이 포터 | 2020-01-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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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는 혁명에 맞설 예방주사였는가
그것은 인류를 수렁에 빠트렸는가 꽃길로 이끌었는가
계몽주의의 진정한 발상지는 영국이었다

로크, 뉴턴, 하틀리, 흄, 스미스, 프리스틀리, 페인, 벤담, 고드윈, 울스턴크래프트…
18세기 영국의 지적인 삶에 대한 탁월한 서술, 서양 근대 지성사의 우뚝한 성취
영국 계몽주의의 선구적 위상에 주목한, 울프슨 역사상 수상작!

귀중한 논제를 던지는 눈부시게 창의적인 저작! _뉴욕 타임스
포터의 책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 _피터 게이,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우리 모두는 ‘계몽의 자식들’이다
근대 유럽의 18세기는 ‘계몽의 세기’ 또는 ‘이성의 시대’라고 불려왔다. 종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나 인간 정신의 해방과 진보를 추구한 계몽의 사상가들은 한낱 이성을 앞세운 몽상가들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정치나 사회를 변혁했던 것일까? 계몽이란 그저 지식의 해방운동에 그쳤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 심성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던 것일까? 이 책은 인류 사상의 역사에서 돋보이는 영국 계몽주의의 선구적 위상에 주목한다. 저자는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의 사고를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무엇이 그들을 움직였는지 이해하고자 한다. 저자는 영국 계몽주의가 가증스러운 것을 타파하라고 부르짖지도 않았고 혁명을 불러오지도 않았다면서, 영국에는 볼테르가 투옥된 바스티유 감옥이 존재하지 않았고 비국교도는 신앙의 자유를 누렸으며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장작단의 불은 진즉에 꺼졌다고 지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18세기 영국 사회는 이미 계몽을 이룩했고, 그렇게 이룩된 체제를 정당화하고 수호하는 작업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저자 로이 포터는 여기에 영국 계몽주의만의 ‘영국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타도나 전복만이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창출과 정당화에도 헌신하는 계몽주의, 혁명에 대한 ‘예방주사’와 같은 계몽주의다.

영국 계몽주의의 출발점은?
저자 로이 포터는 스튜어트 왕가를 몰아내고 의회의 제한을 받는 군주정이라는 혼합 정체를 수립한 1688년 명예혁명에서 영국 계몽주의의 출발점을 찾는다. 또한 그후의 ‘혁명적 협정’은 인신과 소유의 안전을 보장하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폭넓은 관용과 여러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헌정 체제를 사실상 자유화했다고 본다. 1697년 출판에 대한 사전 검열이 폐지됨에 따라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로크는 종교적 관용을 설파했고, 합리성으로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정제했으며, 이러한 작업은 다시금 다음 세대의 이신론과 더 나아가 무신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 세상은 세속화되고 탈주술화되었다. 베이컨은 새로운 학문 연구 방법론을 역설했고, 뉴턴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과학은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세계에도 적용되는 새로운 해석틀로 기능하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양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홉스 등의 철학자들은 감각주의와 경험주의를 토대로 인간의 본성과 자연, 도덕과 사회에 대한 새롭고 급진적인 시각들을 제시하면서 심리학, 인류학, 경제학과 같은 새로운 학문의 초석을 놓았다.

장기 18세기 영국 사회의 근대성
또한 ‘장기 18세기’ 영국 사회는 절대왕정의 전복과 더불어 상업화, 산업화, 소비사회의 출현과 같은 근대성의 여러 측면을 경험했다. 계몽주의는 이러한 근대적 변화들을 가져오고, 이해하고,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때로는 문제화하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화는 새로운 딜레마를 야기했다. 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 독립적 시민들의 덕성virtu과 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공공선을 강조한 고전 공화주의나 시민적 인문주의 전통은 더이상 활력 넘치는 상업사회를 뒷받침해줄 수 없었다. 여기서 흄은 상무정신과 공무 참여 같은 시민적 덕성보다는 사치스러운 쾌락, 즉 사적 욕망의 추구가 근면을 낳고, 근면이야말로 학문과 예술, 상업, 다시 말해 문명을 낳는다고 역설함으로써 새로운 상업사회를 옹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제어되지 않는 개인들의 사적인 목표 추구가 도덕의 붕괴나 공적 질서의 전복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즉 ‘자기애’와 ‘상호 의존성’의 결합은 사적 이익의 추구가 자연스럽게 공공선을 도모함을 입증해보였다. 이로써 영국 계몽주의는 자기 해방과 쾌락 추구를 긍정하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행복 추구를 보장하는 사회적 안정과 조화, 균형을 약속했던 것이다.

철저한 개인주의야말로 영국 계몽주의 한 특징
영국 계몽주의가 프랑스나 독일의 계몽주의와 구별되는 또다른 점은 철저한 개인주의다. 로크는 통치자에 맞서 개인적 권리들을 역설했고, 흄은 시민적 덕성보다 사적인 삶을 더 중시했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사적인 선을 공공선으로 유도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유로운 시장에서의 개인 행위자를 옹호했다. 벤담은 모두가 평등하며 각자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판단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적인 쾌락 계산의 공리를 정식화했다. 그렇듯, 계몽인들은 인류 행복의 추구라는 꿈을 꾸었지만 그저 ‘꿈꾸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길을 모색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들어가던 세계는 우리가 물려받은 세계, 바로 오늘날 우리 대다수가 동참하는 세속적 가치 체계, 인류의 하나됨과 개인의 기본적 자유들, 그리고 관용과 지식, 교육과 기회의 가치를 옹호하는 세계였다. 우리는 모두 ‘계몽의 자식들’이며, 그들 계몽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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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정치적 렌즈를 통해 사후적으로 계몽주의를 바라보는 태도는 치명적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목적론을 낳는다. (…) 최근의 연구 동향은, 순수하고 단일한 운동이라는 과거의 본질주의적 전제들을 (…) 전성기 다원주의로 대체하는 해체적 분위기다. 몇몇 슈퍼스타들에 대한 오래된 강조 대신에 이제는 계몽된 더 넓은 집단이 E. P. 톰슨의 ‘영국인의 특이성’을 설명하는 시각에서 연구되고 있다. 오늘날 무신론과 공화주의, 유물론의 전사들만이 ‘계몽된’이라는 형용사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다름 아닌 톰슨이 분명히 말했을 법한 대로, ‘후세의 어마어마한 우월적 태도’로부터 영국 계몽주의를 구해낼 때가 무르익었다. _1장에서

프랑스 혁명과 이후 19세기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혁명들의 진통을 피해 간 영국에는 계몽주의 전통이라고 부를 만한 게 과연 존재할까? 본서 『근대 세계의 창조』는 여기에 힘주어 ‘예’라고 대답하는 책이다. 1783년, 베를린 수요 클럽이 토론 주제로 던진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칸트는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무지라는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는 답변했다. 그것은 ‘감히 알려고 하는’ 자세, 독립적으로 사고하려는 자세다. 우리가 칸트의 답변을 계몽주의에 대한 정의로 받아들인다면, 이미 ‘누구의 말도 믿지 마라’는 모토를 채택하여 설립된 영국의 왕립학회는 칸트가 말한 계몽을 추구하고 또 구현하고 있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_역자 후기에서


언론 리뷰

호화롭고 자극적인 책. 포터는 능수능란하다. _워싱턴 포스트 북 월드

‘영국 계몽주의’ 같은 용어는 모순어법일까? 이 책이 지닌 힘의 일부는 독자가 그와 같은 질문을 첫 장章에서부터 더이상 던지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포터는 논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훌륭하게 선별한 증거를 확실하게 주지시킨다. _가디언

그 시대의 지적인 삶에 대한 탁월한 안내서. 엄청난 양의 학구적 정보를 부담스럽지 않게 전달한다. 그 시대를 이해하고, 선명하게 바라보며, 당당하고 눈부신 당시의 시대정신을 사랑하고 공감하는 보기 드문 미덕을 지닌 책. 뛰어나고 명료하며 경탄스럽다. _옵저버

훌륭하다. 포터는 논제를 활기차게 제시하며 적절한 인용으로 서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_선데이 텔레그래프

늘 그렇듯이 눈부시고 활기 넘친다. 뛰어난 스타일로 긴 분량을 이끌고 가며, 인상적인 학식이 돋보이는 대단히 풍성한 책. _파이낸셜 타임스

도발적이고 통찰력 있는 책. 지금과 같은 웹 시대에, 최초로 ‘근대적’인(비록 전적으로 계몽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세기의 서로 맞물린 활기찬 네트워크를 되돌아본다. _선데이 타임스

로이 포터는 그가 계몽주의의 프랑스화라고 보는 것으로부터 계몽주의를 구해내고, 계몽주의에 대한 영국의 기여를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사명을 띠고 있다. 그는 그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다. 현명한 구성과 명료하고 매력적인 스타일, 일반화와 사례 간의 적절한 균형, 그리고 미묘한 차이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갖춘 즐거운 책이다. _포트워스 모닝스타 텔레그램

최상의 지성사. _리치먼드 타임스 디스패치

놀랍도록 생산적이며 인상적인 커리어의 정점. _스코츠먼


책 속으로

테리 캐슬은 “포스트모더니즘 연구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18세기는 이성의 시대가 아니라 편집증과 억압, 광기의 조짐이 보이는 시대다”라고 냉담하게 평가한다. 1997년 에릭 홉스봄은 유사한 맥락에서 “요즘에는 계몽이 피상적이고 지적으로 순진한 것에서부터 서구 제국주의에 지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 가발을 쓴 죽은 백인 남성들이 기획한 음모로 치부되기도 한다”고 언급했다. 볼테르는 역사를 우리가 죽은 자들을 골탕 먹이는 각종 수법들로 가득한 상자에 비유했고, 누구도 객관성이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푸코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독해는 의도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믿으며, 어째서 그리고 왜 그러한지를 아래에서 보여주겠다. (18∼19쪽)

우리 시대는 복잡한 수정주의가 특징이다. 오랫동안 ‘이성의 시대’는 영미 학자들에 의해 무미건조하거나 젠체하는 막간, 볼테르 같은 똑똑이들과 루소 같은 괴짜들의 시대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더 근래에 들어서 계몽주의는 근대성의 형성에 결정적인 운동으로서 인정을, 때로는 악명을 얻어가는 중이다. 미국 역사가 피터 게이는 필로조프들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근대적 삶의 문제들과 씨름한, 두려움을 모르는 비판가들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계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 풍요로워졌다. 우리는 이제 계몽주의가 게이가 기린 ‘일단의 필로조프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임을 안다. 오늘날 문화사가들은 신문과 소설, 인쇄물과 심지어 포르노그래피에 자극받은 독서 대중 전반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끓어올랐음을 지적한다. (30쪽)

대륙의 석학들은 정치와 윤리, 인식론, 미학, 심지어 문학 분야에서 영국의 혁신으로 크나큰 자극을 받았다. 디드로는 ‘영국인이 없었다면 프랑스에서 이성과 철학은 지금도 매우 한심한 유아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36∼37쪽)

근대성을 형성하는 데 영국 사상가들이 수행한 역할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문인들과 그들의 독자들 사이의 접촉과 순환 회로에 대한 훌륭한 지도 작업이 필요하다. 런던과 에든버러, 더블린 사이, 메트로폴리스와 지방 사이,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 사이, 종교적 문화와 세속적 문화 사이, 남성 문화와 여성 문화 사이 순환 고리 모두를 추적해야 한다. (42쪽)

전체적으로 클럽과 동호회, 지부의 급증은 언론 매체와 싸구려 글쟁이들의 증대와 맞물려, 각양각색의 공중 전반에 서비스를 제공하며 융성하는 인쇄술 기반 정보통신 사업으로서 문화를 신장시켰다. 런던은 근대적 생각과 가치들을 선보이고, 정치적·예술적 신조를 과시하고, 새로운 것을 홍보하는 무수한 여타 공적인 플랫폼을 지원했다. 근대성을 홍보하는 이러한 연단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극장이었다. (80∼81쪽)

그러한 확신들을 형성하는 데 인쇄 매체는 비록 양날의 검이긴 해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인쇄된 말은 예를 들자면 입에서 입으로, 대대로 전해지는 가르침에 내재한 부정확성과 불안정성, 과장과 대조적으로 명백하고 안정적인 사실을 보증하는 것으로 칭송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쇄된 말은 단단하고 견고한 사실로 이루어진 베이컨적 과학을 보완했다. 그러나 인쇄된 책은 쉽게 맹목적 숭배의 대상이 되고 저자들은 권위로 화석화되었다. (107쪽)

출판물의 폭발적 인기는 새로운 부류의 문인들을 낳았다. 노동 분업의 이론가 애덤 스미스는 “부유한 상업 사회에서는 사고하거나 추론하는 일도 다른 모든 고용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하나의 특정 사업이 된다”고 생각했다. 부상하는 새로운 직업 유형 가운데에는 비평가, 즉 저 문필 공화국의 판관이자 검열관, 개혁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비방의 대상이기도 했다. (152쪽)

계몽주의는 자연의 구조 자체에 대한 새롭고 급진적인 설명의 승리를 확보했다. 1660년 이후로 대학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원소와 체액, 실체와 성질, 목적인으로 이루어진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그리고 그 경쟁 학설인 영적 우주에 관한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적 비전과 비의적 비전은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체의 운동이라는 자연 모델에 마침내 밀려났다. 이 기계론적 철학의 등극, ‘과학혁명’에서 핵심 패러다임의 전환은 다시, 계몽된 사고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권리 주장을 승인했다. (229쪽)

정념들의 문명화 능력에 대한 흄의 신뢰에서 계몽된 낙관주의가 공공연히 드러난다. 통치와 자유는 불화하지 않는다. 권위가 없다면 자유도 없다. 따라서 흄의 비전에서 문명의 진전은 성인이나 영웅을 요구하지 않는다. 비인격적 힘들이 누구도 개인적으로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인간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성취하게 이끈다. (315쪽)

우리가 여기서 막스 베버가 ‘세계의 탈주술화’라고 부른 것을 선취하게 된다 할지라도, 지구 행성은 아직 테니슨과 여타 빅토리아 시대 정직한 의혹자들을 얼어붙게 만든, 무의미한 마그마 응고 덩어리로 환원되지는 않았다. 포프를 안내인 삼아 조지 왕조 시대 사람들은 자연을 신적인 기교의 걸작품으로 독해했다.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 자연의 신을 우러러보았다. (456쪽)

그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새로이 발견된 태평양 섬들의 원주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는 원시인들을 함이나 카인의 이교도 자손들로 간주해왔고, 그러한 멸시적 태도는 쉽게 세속화되고 합리화될 수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유목 생활은 그들을 스코틀랜드 철학의 4단계 문명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놓은 한편, 로크주의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농업을 발달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확연하게 허비한 토지를 유럽인들이 몰수해도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543쪽)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직원들의 행복을 백배로 증대하고픈 그 기업가의 소망을 반영하여 학교와 박물관, 음악당, 무도장이 건설되었다고 사우디는 언급했다. 그러므로 오언은 산업화라는 기획 안에서 포괄적이고 자애로운 통제를 상상하고 실현하며 교육과 규율로써 그의 ‘인간 기계’들에 대해 엘베시우스적 관심을 드러내는바, 그것은 계몽사상의 논리적 종착점이었다. (654쪽)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과 그 기원들에 관한 탐구를 재개했다. 언제, 왜, 어떻게 ‘근대적’ 자아와 ‘근대적’ 사회가 생겨났는가?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자기 형성’ 인간으로까지 뿌리를 거슬러가야 할까, 아니면 우리의 탐구를 더 후대로 끌어와야 할까? 이 책은 근대적 정신 상태의 탄생에서 18세기가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영국의 사상가들이 그러한 과정에서 두드러졌고 아닌 게 아니라 시기적으로 일렀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의 계몽주의를 운위하는 것은 말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난센스일 것이다. (717쪽)

그러한 회의론자들에 맞서, 나는 (…) 로크와 뉴턴, 애디슨과 스틸, 흄과 스미스, 하틀리와 벤담, 프라이스와 프리스틀리, 그리고 여타 많은 이들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새로움을 두고 다투는 어떤 경쟁에서든 영국의 작가들은 확실히 대륙의 동료들과 견줄 만하다. 만약 계몽주의에 ‘아버지’가 있다면 로크의 친부 주장이 다른 누구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이 있으며, 벤담은 전 세계적인 호소력을 발휘할 운명인 공리주의의 가장 혁신적인 주창자였다. 앤서니 콜린스보다 더 자유로운 자유사상가도 없었고, 조지프 프리스틀리보다 더 고집 센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자도 없었으며, 한편으로 아나키즘의 창시자인 윌리엄 고드윈은 제일 원칙들로부터 정치적·도덕적 삶을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재고하는 놀라운 임무를 자처했다. (7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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