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봉의 도시산책

도서정보 : 권기봉 | 2015-04-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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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도 알지 못했던 서울의 역사와 문화 95장면!

외국에서 또는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서울에 놀러 와 명동이나 남대문시장, 북촌이나 가로수길 말고 가볼 만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어떨까? 꽤나 당황스러울지 모른다. 누구나 찾는 유명 관광지가 아닌, 그 이상의 장소를 생각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서울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수도로 정한 이후 600여 년이 넘도록 그 지위를 이어오고 있다. 아니 한성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2,000여 년 이상 수도로서 기능해온 셈이다. 이처럼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임에도 오늘날 서울의 역사나 문화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아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라는 커다란 단절을 경험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게다가 경제성장기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서울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서울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크고 작은 역사사건의 현장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예술적 향취가 그윽한 공간이 숨어 있고, 다른 누구보다 특별한 삶을 살다간 이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시다. 그중에서도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의 흔적들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욱 오롯하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간직한 서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일어났던 숭례문 방화사건 때부터였다. 이 사건은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큰 충격을 안겼는데, 이를 계기로 서울의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다큐멘터리 방송이나 광고를 비롯해 서울 관련 도서도 이때 여럿 출간되었다. 그러나 ‘소비의 공간’ ‘의도된 관광지’로서의 서울을 넘어 그 내면을 비춰주는, 서울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맥락을 밀도 있게 짚어내고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권기봉 작가의 전작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2008)와 《다시, 서울을 걷다》(2012)는 우리 삶의 현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꽤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았다.

박제된 공간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도시 서울을 만나다
이번 신작 《권기봉의 도시산책》은 그 연장선상에서 특별히 ‘서울의 일상’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 범위를 더 넓힌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다채로운 모습들을 95꼭지에 담아낸 것이다. 이 글들을 읽다 보면 서울이 얼마나 깊이 있고 역동적이며 매력적인 도시인지 새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95꼭지에서 담아낸 장소들이 단지 지나간 공간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만나는 곳들은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좋든 싫든 이 시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나, 또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권기봉의 도시산책》은 서울이 과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단편적인 정보만 나열하고 있는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임을 새삼 재발견하게 만든다.

서울의 일상과 역사를 돌아보며 새로운 서울을 그리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예술과 권력 그리고 서울’에서는 경복궁에 남아 있는 불교 유물인 부도, 세종문화회관, 공간건축 사옥과 김수근 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왜 예술과 권력이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묘하게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2장 ‘사라져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사라질 운명에 처했거나 이미 사라져버린 소중한 역사 현장과 뒤늦게라도 원형복원에 나서고 있는 여러 장소를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문화재 보전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3장 ‘그날의 현장을 찾아서’에서는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 삼풍백화점 터, 마지막 임시정부청사인 경교장같이 중요한 역사사건이 벌어졌던 곳을 둘러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히고 있는 장소의 의미를 되새긴다. 4장 ‘함께 사는 서울을 꿈꾸며’에서는 서울역 앞 쪽방촌, 황학동 도깨비시장, 청계천 공구상가처럼 화려함 뒤에 가려진 서울의 이면을 들춰내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은 어디인지 짚어낸다. 마지막으로 5장 ‘변화의 기로 위에서’에서는 상암동 석유비축기지, 옛 구의취수장, 명동예술극장 등 과거의 역할을 내려놓고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장소나 건물들을 찬찬히 톺아본다.
지은이 권기봉은 “도시를 걷는, 그리고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가늠하는 산책에 이 책이 작지만 충실한 지침서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 그리고 이웃의 삶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찬찬히 대면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곳곳에서 또다른 서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이끈다. 정치인 노회찬의 서평처럼 “저자의 부지런한 발걸음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우리는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0,080 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5-03-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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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주년, 왜 다시 현대사를 알아야 하는가?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책머리에’에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

2015년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아 웅숭깊은 역사책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와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가 함께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가 그것.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우선 1차분으로 두 권이 선보였다. 1권에는 ‘해방과 분단, 친일파’, 2권에는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터뷰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뉴라이트를 앞세운 보수 세력의 이념 공세, 역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되면서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고, 보수 세력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바로잡고 있다. 또한 진보 세력에게도 역사와 구체적인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야만 이 어두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야기 마당’ 구성이다. 보통 역사책은 연대기 구성을 따르고 있는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연대기적 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서술 방식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야기 마당’ 형식을 취했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충실히 다루면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폭넓게 짚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역사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학자들은 사실 관계 규명에만 주력하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평가 내리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중석 교수는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명시하면서 단호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의 진실,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극우 반공 세력은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교육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자료에 접근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다. …… 극우 반공 세력은 초지일관, 현대사에 관심을 못 갖게 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 근현대사가 굉장히 축소되고 왜곡되고 아주 부정적인 게 돼버렸다.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는 데에도 얼마나 역동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했나. 아 그걸 ‘박정희 혼자 다 했다’는 식으로 하니 너무 단순하고 단조롭지 않나. 그런 역사를 무엇 때문에 자세히 알고 싶겠나.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라는 건 다면적이어야 한다.”(1권)
서중석 교수는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을 ‘역사의 죄인’으로 부르고 있다. 소위 뉴라이트들은 8·15를 ‘건국절’로,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신성화하며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 전쟁’을 부추기고, 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성과들을 지우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들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친일파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부터 극우 반공 세력이 기득권을 잡았다. 그들은 반대파를 너나없이 ‘빨갱이’로 몰아대며 공포에 질식된 사회를 만들어왔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반공주의가 내면화된 사회가 만들어졌다. 극우 반공 세력들은 이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이라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정권을 잡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심하게 훼손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말하는 역사란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 진실은 곧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중석 교수는 역사, 특히 지금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발분하여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며 거듭 당부하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권)
“한국의 뉴라이트나 수구 세력의 뿌리는 친일파, 그것도 매국 활동, 황국 신민화 운동, 군국주의 침략 전쟁 찬양 행위를 한 사람들로 거슬러 올라간다.”(1권)

어느 날 갑자기 온 해방?
우리는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

1권 ‘해방과 분단, 친일파’ 편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공간에서부터 한반도가 분단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맞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끊임없이 항일 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곧 ‘정의로운 바보’들이다.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것과 관련해 ‘우리한테는 무엇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지, 성공 여부를 가지고 얘기해선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 난 모든 독립 운동자에 대해 단재의 이야기가 맞다고 본다. 당장에 성공하길 바랐다면, 강력한 일본에 대항해 싸우는 것처럼 바보가 없었다. 그런데도 재산을 전부 탕진해가면서, 자식들을 가르치기는커녕 굶주리게 하면서 독립 운동에 그야말로 몸을 던져 그 많은 고초를 겪고 죽음에 이르고 한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대의, 그것 때문 아닌가.”

서중석 교수는 ‘해방’을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으로 꼽는다. “해방은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획기적인 대변화를 가져왔다.” 해방이 되면서 모두가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혁명이 이루어졌고, 농지 개혁 등이 시행되면서 경제적 혁명도 이루어졌다. 더불어 문화적 혁명, 사회적 혁명도 이루어졌다. 유사 이래 이렇게 큰 변화를 한꺼번에 맞이한 순간은 없었다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싸워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가와 연관시켜서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도 뉴라이트는 해방을 몹시 폄하한다.”

역사를 바꾼 신탁 통치 논쟁
좌우익은 왜 그토록 싸웠는가

해방 공간의 결정적 국면 하나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친탁’ 대 ‘반탁’ 논쟁이다. 서중석 교수는 “친탁 대 반탁은 적절한 규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익이 반탁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반탁은 맞다. 그러나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을 중심에 놓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 이렇게 나왔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찬탁, 반탁’ 식으로 교육을 받아왔다.” 곧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탁 통치를 하고 임시정부를 세운다’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고 신탁 통치는 나중 문제’라는 것이다.(모스크바3상회의 제1항 임시정부 수립, 제2항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제3항 신탁 통치) 그러니까 신탁 통치 문제로 이렇게까지 좌우익이 싸울 문제가 아니었는데, 나중에 분단까지 가는 명분으로 작용해서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넉 달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가 모스크바3상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결정한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서 문제가 커져갔다. 싸움에 기름을 부은 건 동아일보의 왜곡 기사.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고 출처도 없이 보도한 것이다. 우익은 “반탁에 협력하지 않으면 민족 반역자”라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반탁 투쟁을 시작했다. 여기에 친일파까지 가담했다. 마치 자신들이 애국 세력인 양 신분 세탁을 하고 우익과 함께 반탁 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에 반해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지지’ 투쟁을 전개했는데 방법이 서툴렀다. 대중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연합국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결정한 것이니 좋은 거다’는 식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러면서 좌우익은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정의로운 바보’들이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한반도는 왜 분단이 되었는가

“좌우 합작, 남북 협상을 주도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활동을 통일 독립 운동이라고 했다. 독립 운동의 연장이라고 이야기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합작만이 민족의 살길임을 아주 강한 신념으로, 쉬지 않고 역설했다.”
서중석 교수는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의 활약을 크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여운형은 대중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해방 후 실시된 첫 여론 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 항목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이런 여운형을 뉴라이트와 반공 세력은 친일파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성사되도록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은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극좌와 극우가 협조를 해주지 않았고 미국 측도 소극적이어서 미소공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한반도는 급격히 분단으로 치달았다.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 협상은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최후의 노력이었다. 김구는 ‘분단이 된다는 건 우리 몸을 두 동강 내는 것과 똑같다’고 신체에 비유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는 곧 암살되었고, 남한에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대거 등용한 미군정의 힘을 얻어 노골적인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쳤고, 결국 초대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무엇보다 미국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키운 것이 분단으로 가게 하는 큰 문제를 불렀다고 서중석 교수는 지적한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모시자고?
이승만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

뉴라이트가 ‘국부’라고 칭송하고 있는 이승만은 해방 공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 진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했을까?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이 권력을 잡기 위해 친일 세력과 손을 잡았으며, 한반도가 분단이 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또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지도 않았다. 1948년 4·3사건 때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학살했고, 여순사건 때도 이른바 빨갱이 사냥을 했다. 그 결과 1949년에는 국가보안법 피의자라든가 사상범으로 감옥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1949년 6월에는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일으키고 김구가 암살되는 사건도 일어난다. 또한 선거 때마다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으며 극단적인 반공 국가를 만든 초대 대통령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단적으로 독재자라고 하고 있고,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얼마나 심한 부정 선거가 자행됐나. 선거는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기본이다. 이런 부정 선거의 노하우가 쌓이고 이승만의 권력 의지가 작동해 3·15 부정 선거가 일어나고 결국 이승만이 물러나지 않았나. 이 점에서도 건국의 아버지라고 볼 수 없다. 어떻게 이런 분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나. 초대 대통령이었다고 말하면 된다.”

친일파 세상,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나

“친일파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하는 건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친일파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못한 데서 잘 드러난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 그랬다. 극단적인 극우 반공 체제를 유지하던 시기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해방이 되고 친일파를 등용시킨 건 미군정이었다. 미군은 좌익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친일파를 중용했다. 하도 친일 경찰과 관리들이 미군정에서 다시 큰소리를 치니 해방의 감격이 점점 약화되고 혼란도 심해졌다. 1946년에는 이런 친일파들 때문에 10월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이 항쟁은 친일 경찰의 횡포, 권력 남용 등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4·3사건과 여순사건이 일어난 것도 친일파 문제가 대단히 중요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런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심해졌고, 서민을 억압했다. 이러니 정의롭게 사는 것이 올바르다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3·1절이나 광복절에 친일파가 단상에 딱 버티고 앉아 있고, 서민들은 억압당하고,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고달프게 살고 핍박받으며 피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의롭게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겠나. 정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 ‘고문관’ 취급밖에 못 받는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자, 기회주의자, 출세주의자, 정상배 같은 자들이야말로 그 사회의 성공한 자들로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었다.”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은 분단을 초래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분단을 심화시키고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중석 교수는 ‘친일파가 대한민국을 위해 뭔가 한 게 있다’는 식의 논리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올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도 친일파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청산 대상이어야 할 친일파가 오히려 권력을 잡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으니 한국 사회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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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도서정보 : 서중석, 김덕련 | 2015-03-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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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주년, 왜 다시 현대사를 알아야 하는가?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책머리에’에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

2015년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아 웅숭깊은 역사책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와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가 함께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가 그것.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우선 1차분으로 두 권이 선보였다. 1권에는 ‘해방과 분단, 친일파’, 2권에는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터뷰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뉴라이트를 앞세운 보수 세력의 이념 공세, 역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되면서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고, 보수 세력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바로잡고 있다. 또한 진보 세력에게도 역사와 구체적인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야만 이 어두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야기 마당’ 구성이다. 보통 역사책은 연대기 구성을 따르고 있는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연대기적 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서술 방식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야기 마당’ 형식을 취했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충실히 다루면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폭넓게 짚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역사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학자들은 사실 관계 규명에만 주력하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평가 내리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중석 교수는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명시하면서 단호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의 진실,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극우 반공 세력은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교육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자료에 접근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다. …… 극우 반공 세력은 초지일관, 현대사에 관심을 못 갖게 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 근현대사가 굉장히 축소되고 왜곡되고 아주 부정적인 게 돼버렸다.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는 데에도 얼마나 역동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했나. 아 그걸 ‘박정희 혼자 다 했다’는 식으로 하니 너무 단순하고 단조롭지 않나. 그런 역사를 무엇 때문에 자세히 알고 싶겠나.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라는 건 다면적이어야 한다.”(1권 306~307쪽)
서중석 교수는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을 ‘역사의 죄인’으로 부르고 있다. 소위 뉴라이트들은 8·15를 ‘건국절’로,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신성화하며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 전쟁’을 부추기고, 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성과들을 지우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들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친일파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부터 극우 반공 세력이 기득권을 잡았다. 그들은 반대파를 너나없이 ‘빨갱이’로 몰아대며 공포에 질식된 사회를 만들어왔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반공주의가 내면화된 사회가 만들어졌다. 극우 반공 세력들은 이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이라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정권을 잡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심하게 훼손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말하는 역사란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 진실은 곧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중석 교수는 역사, 특히 지금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발분하여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며 거듭 당부하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권 233쪽)
“한국의 뉴라이트나 수구 세력의 뿌리는 친일파, 그것도 매국 활동, 황국 신민화 운동, 군국주의 침략 전쟁 찬양 행위를 한 사람들로 거슬러 올라간다.”(1권 308쪽)

분단으로 치달은 한반도,
한국전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2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편은 참으로 내용이 어둡다. 민간인 집단 학살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 뒤 분단으로 치달은 한반도에는 결국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이 한국전쟁은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보다는 국제전의 성격이 강했다. 민족 내적인 이유, 곧 분단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지만, 곧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태였고, 한국도 16개국의 전투 지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1950년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에 동의했다. 단 중국의 동의 없이는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베이징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 그리고 6월 25일 38선을 넘었다. 북한은 7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남한에 있는 혁명 세력들이 봉기를 해 전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남한에는 이미 그런 세력이 파괴되어 있어서 북한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곧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고, 이어서 중국도 뛰어들었다.
한국전쟁은 피스톤 전쟁, 대패 전쟁이라고도 불렸다. 북한이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고, 이번에는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다가 또 중국군한테 한강 이남까지 밀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고 국토가 파괴되는 등 굉장히 큰 희생이 일어났다.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전쟁 초기에 제대로 대응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을 가기 바빴고, 미국은 전쟁 초기 북한의 이동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가 확립되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고 끝이 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주 계급은 힘을 잃었고, 양반·노비·쌍놈을 따지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원조 물자를 받으면서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마련되었고, 여성의 지위도 급격히 상승했다.
그러나 사회는 극도로 단순화한 극우 반공 체제가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이 체제가 내면화된 것이다. 사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반공주의가 그렇게 먹혀들지는 않았다. 1950년 5·30선거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세력은 참패하고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됐다. 그런데 극우 반공주의가 전쟁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제일 큰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간인 집단 학살 때문. 도처에서 학살이 일어나면서 정부 비판, 이승만 반대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돼버렸다. 그렇게 비판을 하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연좌제도 아주 심해서 부역자 가족은 감시를 받았고 취직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선 이승만 정권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 순응주의가 공포감과 결합하면서 강력한 극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을 버리고 간 대통령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것.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잘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게 서중석 교수의 평가다. 1949년 2월경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했으면서도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전쟁 직전 장교들을 잇달아 인사 이동시켜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더군다나 군 경력이 전혀 없는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에 앉혔다.
그렇다면 전쟁이 터졌을 때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보호하고 적절한 지휘를 했을까? 이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부터 갔다. 그는 전쟁이 터지고 이틀 뒤인 6월 27일 새벽에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 서울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대전에 도착해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몇 차례 내보낸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있으라는 것. 이 거짓말 방송이 나간 직후 28일에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피란을 가지 못했다. 이때 도강파와 잔류파가 생겼는데, 피란을 가지 못했던 잔류파는 석 달 동안 굶주리면서 부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7월 1일에 또다시 대전을 떠나 목포로,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쳤다. 전쟁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고, 국민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며 피신만 하고 다닌 것이다. 더군다나 6월 28일 부역자들을 증거 없이 처벌할 수 있는 비상조치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국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곧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거창, 산청, 함양, 남원, 고창, 함평 등지에서 국군에 의한 큰 규모의 학살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승만은 부산에서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으면서 영구 집권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난 이승만 대통령이 잘한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뭔가 한 것처럼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나게 문제가 심각했다. 초기의 패배에 대통령 책임이 너무나 컸다.”(45쪽)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민간인 집단 학살의 진실

“우리가 해방을 감격스럽게, 꿈같이 맞이하지 않았나. 그런데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분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참혹한 학살은 인간 사회에서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부 극우는 신생 국가에서는 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141쪽)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민간인 집단 학살은 1948년 11월(제주 4·3사건 당시 학살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기)부터 1951년 봄까지 일어난다. 전쟁 때에는 주로 1951년 1~2월(거창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때가 1951년 2월이다)까지 일어난다. 100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0만에서 50만 명 사이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많이 학살당한 사람은 국민보도연맹원이다.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 인민위원회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조선청년총동맹(전총), 조선부녀총동맹 등 좌파로 분류되는 단체나 각종 문화 예술 단체, 조선공산당, 남로당, 좌파로 분류되는 정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지역별로 보도연맹 가입 할당 인원 같은 게 작용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일종의 관제 빨갱이 비슷한 식으로 됐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보호해준다’, ‘여러 편익을 준다’ 이런 얘기 때문에 가입한 경우도 있다. 이 양민 학살은 1988년 월간 《말》에 보도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수십 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학살이 일어났는데, 사람에겐 양심이란 게 있는 건데, 학살처럼 무섭고 잘못된 게 없는 건데, 그런 큰 학살이 일어났는데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두려운 일이다. 이런 사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153쪽)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빨갱이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극우 반공 세력의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군인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
‘빨갱이는 씨를 말려 죽여야 한다’

대부분 규모가 큰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일어났다. 4·3사건은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가 주도하기도 했다. 미군도 학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노근리에서 학살을 자행했고, 전국 각지에 폭격을 가해 피란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 작전권은 미국에게 있었으므로 학살에 대한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큰 학살을 미국이 방조했다는 건 미국 스스로 내세우는 민주주의, 자유, 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 미라이 마을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자,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분노하지 않았나. 그런 미라이 마을 학살의 수백 배 규모의 학살이 한국에서 벌어졌고 미국이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것에 분노하고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거다. 이건 한국전쟁 때 미국이 북한을 막은 것과는 구분해서 봐야 하는 문제다.”(186쪽)
특히 김종원이 이끄는 11사단은 악명이 높았다. 거창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뒤 거의 같은 시기에 산청, 함양, 영덕, 거제 지방의 여러 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산청, 함양에서 500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는데, 반수가 여자였고 노인네와 아이들이 많았다. 또 거창 양민 학살 때 잡혀온 이들 중 대다수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였다. 여순사건 때 김종원은 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치다가 지치면 총으로 처형하기도 했던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은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큰 책임이 있다. 학살에 이승만 정권이 직접 관여한 측면도 있으며, 대부분 군경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적에게 대단히 가혹했다. 특히 비판 세력, 반대 세력을 ‘빨갱이’와 연관시켰다. 4·3사건이나 여순사건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엄벌주의로 대응했다. 거창사건으로 인해 3년형을 선고받은 김종원을 곧 풀어주기도 하면서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학살 위에 세워진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

민간인 집단 학살을 자행한 세력은 철저한 극우 반공 체제를 만들었다. 정부를 비판하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비판을 하지 못했고, 국가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극우 반공 세력의 큰 부분은 친일파다. 이자들은 새 나라를 세우려 한 게 아니라 일제 유산을 답습한 거다. 일제 것을 이어받아 구舊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정말 못된 자들이었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다.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가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3·15 부정 선거도 이자들이 저지르는 것 아닌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33쪽) 그리고 이 체제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심해졌다. 독재 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분단을 최대한 활용해 독재를 강화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뉴라이트나 극우들이 얘기하는 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극우 반공 세력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 아닌가. 뉴라이트는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상당히 있지 않나.”(229쪽)

구매가격 : 10,500 원

한국의 역사 17. 대한제국

도서정보 : 이현희 | 2014-12-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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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17권에서는 대한제국 시대를 다룬다. 제국주의 침략은 점차 노골화되고, 이 때문에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의 암투가 치열해졌다. 청과의 전쟁에서 이긴데다 눈엣가시였던 명성황후까지 살해한 일본은 기세등등하게 조선 땅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이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지만, 이미 식민지가 될 운명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한편, 커피, 전차 등 서양 문물이 서서히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서당 대신 신식 학교가 설립되는 등 개화의 길을 맞이하게 된다.

구매가격 : 4,500 원

한국의 역사 18. 국권 피탈과 독립운동

도서정보 : 이현희 | 2014-12-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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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고 1910년에는 우리의 국권마저 빼앗기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이어진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18권에서는 이 시기의 복잡한 국내외적 정세와 더불어, 조선총독부의 헌병경찰통치에 맞서 목숨을 바쳐 독립을 염원했던 애국지사들의 삶을 다룬다. 600년을 이어 온 왕조가 몰락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비극적 운명을 살펴보자.

구매가격 : 4,500 원

한국의 역사 19. 3·1운동과 일제의 폭압 정치

도서정보 : 이현희 | 2014-12-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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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1919년, 3월. 독립에 대한 부르짖음이 조선 각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곳곳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조선의 국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의 절규를 총과 칼로 제압했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19권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난 과정과 경과, 이후에 이어지는 일제의 조선 통치를 다루고 있다. 또 한편으로 국외에서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수단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의미 있는 투쟁을 엿볼 수 있다.

구매가격 : 4,500 원

한국의 역사 20. 대한민국 독립을 위하여

도서정보 : 이현희 | 2014-12-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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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20권에서는 대한민국 독립의 이야기를 다룬다. 1920년대 중반,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는 등 항일투쟁은 지속되었다.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는 등 침략전쟁을 가속화하고, 조선에는 민족말살정책을 취했다. 갖가지 수단으로 조선인을 수탈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하는 등 일제는 조선을 전체주의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36년을 식민지로 살아 온 조선에서는 이로써 반쪽짜리나마 독립의 기운이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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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 일제의 패망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도서정보 : 이현희 | 2014-12-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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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21권에서는 일제의 패퇴부터 조선 독립, 그 이후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일본의 수탈은 점점 심해지고 전쟁은 심화되어 갔으나,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조선은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을 맞게 되지만, 미군과 러시아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고 곳곳에 약탈이 자행하는 등 해방 직후의 풍경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해진다. 한반도가 둘로 나뉘어 현재까지 분단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던 과정을 함께 들여다보자.

구매가격 : 4,500 원

한국의 역사 22. 6·25 전쟁

도서정보 : 이현희 | 2014-12-2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비극이자 잔혹했던 역사인 6·25전쟁, 그 참혹한 순간을 살펴본다. 6·25전쟁은 대내적으로 보면 동족상잔의 아픔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국제적인 싸움이었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22권에서는 북한군이 무방비 상태의 남한에 전면적 도발을 개시한 시점부터 유엔 측과 공산 측이 2년여에 걸친 회담 끝에 정전협정을 체결하기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밀도 있게 다루었다.

구매가격 : 4,500 원

한국의 역사 23. 대한민국의 성장

도서정보 : 이현희 | 2014-12-2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23권에서는 이승만이 종신 대통령을 꿈꾸며 벌인 온갖 부정과 폭력,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작을 알린 4·19혁명과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기 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다룬다. ‘못 살겠다, 갈아 보자’를 외치며 정권 교체를 목전에 두고 쓰러진 민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로 등장했다 간첩죄라는 명목으로 사형당한 조봉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자유당의 이인자 이기붕 등 다양한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뼈아픈 민주주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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