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도피한 이승만, 죽어간 국민들

서중석, 김덕련 | 오월의봄 | 2015년 03월 16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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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제2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도피한 이승만, 죽어간 국민들 편》. 인터뷰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뉴라이트를 앞세운 보수 세력의 이념 공세, 역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 두 번째 특징은 ‘이야기 마당’ 구성이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충실히 다루면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폭넓게 짚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역사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소개

저자 서중석은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자 김덕련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신문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역사 관련 책 작업을 함께해왔다.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2》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남북협상: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조봉암과 1950년대》(상·하) 《비극의 현대 지도자》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이승만과 제1공화국》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6월항쟁》 등이 있다.

목차소개

책머리에
연표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한국전쟁,
어디부터 잘못 꿰어졌나

두 번째 마당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대통령
“잘한 게 없다”

세 번째 마당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요동치는 전선, 평화는 멀고도 멀었다

네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
한국전쟁 공포 때문”

다섯 번째 마당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민간인 집단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
참 무서운 한국”

두 번째 마당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네 번째 마당
추종자 아니면 모두 적
무서운 ‘빨갱이 만들기’

다섯 번째 마당
국민 목 친 학살자들이
오히려 출세하는 세상

여섯 번째 마당
민간인 학살 위에 세워진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

일곱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왜
합동 묘지를 파헤쳐야 했나

나가는 글

출판사 서평

해방 70주년, 왜 다시 현대사를 알아야 하는가?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책머리에’에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

2015년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아 웅숭깊은 역사책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와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가 함께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가 그것. 서중석 교수는 이 시리즈를 통해 1945년 해방 공간에서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주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우선 1차분으로 두 권이 선보였다. 1권에는 ‘해방과 분단, 친일파’, 2권에는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터뷰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뉴라이트를 앞세운 보수 세력의 이념 공세, 역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되면서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고, 보수 세력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바로잡고 있다. 또한 진보 세력에게도 역사와 구체적인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야만 이 어두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야기 마당’ 구성이다. 보통 역사책은 연대기 구성을 따르고 있는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연대기적 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서술 방식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야기 마당’ 형식을 취했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충실히 다루면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폭넓게 짚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역사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학자들은 사실 관계 규명에만 주력하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평가 내리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중석 교수는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명시하면서 단호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의 진실,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극우 반공 세력은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교육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자료에 접근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다. …… 극우 반공 세력은 초지일관, 현대사에 관심을 못 갖게 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 근현대사가 굉장히 축소되고 왜곡되고 아주 부정적인 게 돼버렸다.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는 데에도 얼마나 역동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했나. 아 그걸 ‘박정희 혼자 다 했다’는 식으로 하니 너무 단순하고 단조롭지 않나. 그런 역사를 무엇 때문에 자세히 알고 싶겠나.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라는 건 다면적이어야 한다.”(1권 306~307쪽)
서중석 교수는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을 ‘역사의 죄인’으로 부르고 있다. 소위 뉴라이트들은 8·15를 ‘건국절’로,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신성화하며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 전쟁’을 부추기고, 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성과들을 지우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들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친일파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부터 극우 반공 세력이 기득권을 잡았다. 그들은 반대파를 너나없이 ‘빨갱이’로 몰아대며 공포에 질식된 사회를 만들어왔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반공주의가 내면화된 사회가 만들어졌다. 극우 반공 세력들은 이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공 투쟁이라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정권을 잡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심하게 훼손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말하는 역사란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 진실은 곧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중석 교수는 역사, 특히 지금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발분하여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며 거듭 당부하고 있다.
“극우 반공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권 233쪽)
“한국의 뉴라이트나 수구 세력의 뿌리는 친일파, 그것도 매국 활동, 황국 신민화 운동, 군국주의 침략 전쟁 찬양 행위를 한 사람들로 거슬러 올라간다.”(1권 308쪽)

분단으로 치달은 한반도,
한국전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2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편은 참으로 내용이 어둡다. 민간인 집단 학살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 뒤 분단으로 치달은 한반도에는 결국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이 한국전쟁은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보다는 국제전의 성격이 강했다. 민족 내적인 이유, 곧 분단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지만, 곧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태였고, 한국도 16개국의 전투 지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1950년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에 동의했다. 단 중국의 동의 없이는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베이징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 그리고 6월 25일 38선을 넘었다. 북한은 7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남한에 있는 혁명 세력들이 봉기를 해 전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남한에는 이미 그런 세력이 파괴되어 있어서 북한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곧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고, 이어서 중국도 뛰어들었다.
한국전쟁은 피스톤 전쟁, 대패 전쟁이라고도 불렸다. 북한이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고, 이번에는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다가 또 중국군한테 한강 이남까지 밀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고 국토가 파괴되는 등 굉장히 큰 희생이 일어났다. 서중석 교수는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전쟁 초기에 제대로 대응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을 가기 바빴고, 미국은 전쟁 초기 북한의 이동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가 확립되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고 끝이 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주 계급은 힘을 잃었고, 양반·노비·쌍놈을 따지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원조 물자를 받으면서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마련되었고, 여성의 지위도 급격히 상승했다.
그러나 사회는 극도로 단순화한 극우 반공 체제가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이 체제가 내면화된 것이다. 사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반공주의가 그렇게 먹혀들지는 않았다. 1950년 5·30선거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세력은 참패하고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됐다. 그런데 극우 반공주의가 전쟁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제일 큰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간인 집단 학살 때문. 도처에서 학살이 일어나면서 정부 비판, 이승만 반대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돼버렸다. 그렇게 비판을 하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연좌제도 아주 심해서 부역자 가족은 감시를 받았고 취직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선 이승만 정권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 순응주의가 공포감과 결합하면서 강력한 극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을 버리고 간 대통령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것.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잘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게 서중석 교수의 평가다. 1949년 2월경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했으면서도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전쟁 직전 장교들을 잇달아 인사 이동시켜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더군다나 군 경력이 전혀 없는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에 앉혔다.
그렇다면 전쟁이 터졌을 때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보호하고 적절한 지휘를 했을까? 이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부터 갔다. 그는 전쟁이 터지고 이틀 뒤인 6월 27일 새벽에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 서울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대전에 도착해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몇 차례 내보낸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있으라는 것. 이 거짓말 방송이 나간 직후 28일에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피란을 가지 못했다. 이때 도강파와 잔류파가 생겼는데, 피란을 가지 못했던 잔류파는 석 달 동안 굶주리면서 부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7월 1일에 또다시 대전을 떠나 목포로,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쳤다. 전쟁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고, 국민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며 피신만 하고 다닌 것이다. 더군다나 6월 28일 부역자들을 증거 없이 처벌할 수 있는 비상조치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국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곧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거창, 산청, 함양, 남원, 고창, 함평 등지에서 국군에 의한 큰 규모의 학살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승만은 부산에서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으면서 영구 집권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난 이승만 대통령이 잘한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뭔가 한 것처럼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나게 문제가 심각했다. 초기의 패배에 대통령 책임이 너무나 컸다.”(45쪽)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민간인 집단 학살의 진실

“우리가 해방을 감격스럽게, 꿈같이 맞이하지 않았나. 그런데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분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참혹한 학살은 인간 사회에서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부 극우는 신생 국가에서는 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141쪽)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민간인 집단 학살은 1948년 11월(제주 4·3사건 당시 학살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기)부터 1951년 봄까지 일어난다. 전쟁 때에는 주로 1951년 1~2월(거창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때가 1951년 2월이다)까지 일어난다. 100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0만에서 50만 명 사이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많이 학살당한 사람은 국민보도연맹원이다.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 인민위원회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조선청년총동맹(전총), 조선부녀총동맹 등 좌파로 분류되는 단체나 각종 문화 예술 단체, 조선공산당, 남로당, 좌파로 분류되는 정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지역별로 보도연맹 가입 할당 인원 같은 게 작용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일종의 관제 빨갱이 비슷한 식으로 됐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보호해준다’, ‘여러 편익을 준다’ 이런 얘기 때문에 가입한 경우도 있다. 이 양민 학살은 1988년 월간 《말》에 보도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수십 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학살이 일어났는데, 사람에겐 양심이란 게 있는 건데, 학살처럼 무섭고 잘못된 게 없는 건데, 그런 큰 학살이 일어났는데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두려운 일이다. 이런 사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153쪽)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빨갱이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극우 반공 세력의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군인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
‘빨갱이는 씨를 말려 죽여야 한다’

대부분 규모가 큰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일어났다. 4·3사건은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가 주도하기도 했다. 미군도 학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노근리에서 학살을 자행했고, 전국 각지에 폭격을 가해 피란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 작전권은 미국에게 있었으므로 학살에 대한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큰 학살을 미국이 방조했다는 건 미국 스스로 내세우는 민주주의, 자유, 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 미라이 마을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자,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분노하지 않았나. 그런 미라이 마을 학살의 수백 배 규모의 학살이 한국에서 벌어졌고 미국이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것에 분노하고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거다. 이건 한국전쟁 때 미국이 북한을 막은 것과는 구분해서 봐야 하는 문제다.”(186쪽)
특히 김종원이 이끄는 11사단은 악명이 높았다. 거창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뒤 거의 같은 시기에 산청, 함양, 영덕, 거제 지방의 여러 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산청, 함양에서 500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는데, 반수가 여자였고 노인네와 아이들이 많았다. 또 거창 양민 학살 때 잡혀온 이들 중 대다수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였다. 여순사건 때 김종원은 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치다가 지치면 총으로 처형하기도 했던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은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큰 책임이 있다. 학살에 이승만 정권이 직접 관여한 측면도 있으며, 대부분 군경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적에게 대단히 가혹했다. 특히 비판 세력, 반대 세력을 ‘빨갱이’와 연관시켰다. 4·3사건이나 여순사건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엄벌주의로 대응했다. 거창사건으로 인해 3년형을 선고받은 김종원을 곧 풀어주기도 하면서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학살 위에 세워진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

민간인 집단 학살을 자행한 세력은 철저한 극우 반공 체제를 만들었다. 정부를 비판하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비판을 하지 못했고, 국가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극우 반공 세력의 큰 부분은 친일파다. 이자들은 새 나라를 세우려 한 게 아니라 일제 유산을 답습한 거다. 일제 것을 이어받아 구舊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정말 못된 자들이었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다.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가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3·15 부정 선거도 이자들이 저지르는 것 아닌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주장을 접하면 소름이 끼친다. 극우 반공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나. 오랫동안 정말 힘들게 싸우고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233쪽) 그리고 이 체제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심해졌다. 독재 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분단을 최대한 활용해 독재를 강화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뉴라이트나 극우들이 얘기하는 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극우 반공 세력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 아닌가. 뉴라이트는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상당히 있지 않나.”(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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