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이사차기 2

조익 | 소명출판 | 2009년 06월 30일 |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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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여기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함께 갖춘 하나의 명저가 있다. 바로 청(淸)나라의 초기 대학자 조익(趙翼)이 저술한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가 그것이다. 이 책은 높은 학문적 수준과 함께 중국사(先秦時代에서 明代까지)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성도 아울러 갖춘 보기 드문 저작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 이름대로 ‘이십이사’라는 각 정사(正史)의 잘?잘못을 검토함과 동시에 재미있고 유익한 역사적 사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역사학에 접근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료의 정확한 해독이다. 역사 특히 중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역대 학자들이 가장 관심과 정력을 쏟았던 것은, 어떻게 하면 그 많은 사료를 섭렵하고 그것을 정확히 해석해내느냐 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 글자 한 글자의 뜻풀이에서부터 글자의 탈루, 오자의 발견과 판본에 따라 나타나는 표현의 차이 등을 정확히 고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전통적인 훈고학(訓?學)이나 고증학(考證學) 등의 학문을 생성시켰다. 고증사학자인 조익이 지은 ‘이십이사차기’는 우선 이런 역사학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중국사의 연구 자료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각 왕조의 정사(正史)일 것이다. 중국 왕조의 정사에는 1920년대 가소민(柯??)이 새롭게 수찬(修撰)한 ‘신원사(新元史)’를 포함하여 모두 ‘25사’가 있다. 그러나 대개 중국 역대 정사를 일컬을 때 흔히 ‘24사’라 한다. ‘사기(史記)’를 비롯하여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남사(南史)’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그리고 ‘명사(明史)’가 바로 그것이다. 조익의 ‘이십이사차기’는 ‘22사’라 하였지만, 사실은 ‘신당서’와 ‘구당서’, 그리고 ‘신오대사’와 ‘구오대사’를 비교 고찰함으로써 실제 다룬 정사는 24개사이다. 그러니 그 서명을 오히려 ‘이십사사차기’라고 해도 잘못이 없다. ‘이십이사차기’는 조익의 생존 당시까지 전해진 모든 정사를 바탕으로 쓴 중국통사이다. ‘24사’는 청을 제외한 중국 역대왕조의 가장 기본적인 사서로 총 3,243권으로 되어 있다. 중국사를 연구하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책이지만, 그 방대한 양의 책을 모두 통독하기란 중국사 전공자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24사’에 기록된 역사적 흐름의 대강을 파악하는 데는 이만큼 유익한 책도 없다. 청말의 장지동(張之洞)도 “‘이십이사차기’를 읽는 것으로 정사 통독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이 책을 읽는다면 실제 ‘24사’를 거의 섭렵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4사’의 찬자가 저지른 실수나 의도적인 왜곡까지도 교감하고 바로잡았으니, 24사를 읽을 적에 반드시 옆에 두고 참조해야 할 책이 바로 이 ‘이십이사차기’인 것이다. 조익의 ‘이십이사차기’는 왕명성의 ‘십칠사상각(十七史商?)’, 전대흔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와 함께 청 건륭(乾隆)?가경(嘉慶)시대 고증사학의 3대 명저라고 칭해지고 있다. ‘이십이사차기’는 여러 정사에 보이는 기록들을 비교하여 사실의 진위(眞僞)를 고증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먼저 정사의 작자, 편찬 경과, 책의 성립 연대를 소개하고 사료의 내원과 그 진위, 사료가치 등을 충실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은 논의와 고찰을 가하고, 여기다 역사를 관통하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자서에도 나타나 있듯이 “고금의 풍상이 점차 변하고 정사가 자주 바뀜 등에 대해서는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흥기함과 쇠퇴함의 원인”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고 있는 것이 조익의 책의 특징이다. ‘이십이사차기’에 수록된 578편의 글은 모두 다채로우면서도 수미일관한 하나의 논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들은 사료의 정확한 읽기를 바탕으로 하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십이사차기’를 통해서 그 자체만으로도 ‘22사’를 거의 섭렵하고 중국사학사를 통람하는 지식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중국사를 분석하는 시각까지도 배우게 된다. ‘이십이사차기’는 세계 어디에도 아직 제대로 된 번역이 없는 상태이다. 1945년 이전 일본에서 ‘국역한문대성(國譯漢文大成)’ 제7권 `속경자사부(續經子史部)` 제3집에 ‘이십이사차기’에 대한 세천종랑(笹川種郞)과 공전연태랑(公田連太郞)의 역병주(譯幷注)본이 출판되었다. 일본의 것은 번역이라 하나 토와 약간의 주를 단 것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중국 대륙에서조차 번역본 내지 역주본이 나와 있지 않다. ‘이십이사차기’의 역주로 중국사 연구자들에게 청대 고증학자의 중국 정사에 대한 독해와 이해를 우리글로써 전달함으로써 연구 진작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십이사차기’는 단지 중국사의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유용한 책임에 틀림없다. ‘이십이사차기’는 중국사학사(中國史學史)와 중국통사(中國通史)의 두 가지 특징을 아우르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간행된 저명한 중국사학사나 중국통사 관련 교양서를 뛰어넘는 수준을 확보하고 있다. ‘이십이사차기’를 통해서 중국사의 흐름과 중국인의 역사인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저자소개

저자:조익 淸 양호(陽湖:江蘇省 武進縣) 사람으로 자는 운송(耘松), 호는 견북(甄北)이다. 관은 광서(廣西) 진안(鎭安) 지부(知府)에 까지 올랐으나 그의 관력보다 시인으로서 역사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시로서는 원목(袁牧), 장사전(蔣士銓)과 함께 건륭(乾隆) 3대가라 칭해졌다. 사학 방면에는 건가(乾嘉)시대 고증사학의 3대 명저의 하나인 본 ‘이십이사차기’ 외에 ‘해여총고(?餘叢考)’, ‘황조무공기성(皇朝武功紀盛)’ 등이 있다. ‘청사고(淸史稿)’ 권485와 ‘청사열전(淸史列傳)’ 권72에 그의 열전이 있다.

목차소개

역자 서문 권6 85. 『후한서』와 『삼국지』의 서술방법이 같지 않은 부분 86. 『삼국지』의 서술 방법 87. 『삼국지』에는 말을 돌려 비호하는 것이 많다 88. 『삼국지』에서 실상을 얻어 일을 기록한 내용 89. 『삼국지』에서 열전을 만드는 데에 번잡하고 간략함이 같지 않은 내용 90. 『삼국지』에서 틀린 내용 91. 순욱전 92. 순욱과 곽가의 두 열전에서 억지로 갖다 붙인 부분 93. 제갈량에 대한 진수의 평론 94. 배송지의 『삼국지』주석 권7 95. 한나라에서 옛 아홉 주를 다시 두다 96. 관우와 장비의 용맹 97. 형주를 빌려주었다는 주장의 잘못 98. 삼국의 군주들은 용인술이 각각 같지 않았다 99. 선대(선양을 통한 왕조교체) 100. 위나라와 진나라의 선대는 같지 않았다 101. 구석문 102. 한 사람이 두 사서에 각각 열전이 있는 경우 103. 『진서』 104. 『진서』2 105. 왕도, 도간 두 사람의 열전은 포폄에 마땅함을 잃었다 권8 106. 팔왕의 난 107. 『진서』에 기록된 괴이한 이야기 108. 동진에는 어린 군주가 많았다 109. 진나라 황제는 형이 죽고 아우가 잇는 경우가 많았다 110. 민제와 원제의 즉위 111. 멋대로 제위에 앉은 여러 군주들에게 학문적 재능이 있었다 112. 구품중정 113. 육조시대 청담의 풍습 114. 청담에는 주미를 썼다 115. 추우번 116. 건업에는 세 성이 있었다 117. 남조에서는 한인이 기밀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118. 무덤자리를 살피는 법 119. 당나라 사람들이 피휘한 방법 권9 120. 『송서』에는 서원이 지은 구본이 많다 121. 『송서』에서 동진·송 혁명 무렵에 대해 쓴 것 122. 『송서』에서 송제 혁명 무렵에 대해 쓴 것 123. 『송서』본기의 서술 방법 124. 『송서』『제서』의 대서법 125. 『송서』에서 북위의 일을 기록한 것은 오류가 많다 126. 『송서』와 『남사』에는 모두 심전자, 심림자 열전이 없다 127. 『제서』구본 128. 『제서』에서 없어진 한 권 129. 『제서』서술 방법에서 신경을 쓴 부분 130. 『제서』에서는 유서법이 가장 좋다 131. 『양서』는 모두 국사에 의거해 열전을 지었다 132. 『양서』열전 편찬에서 올바른 법식을 잃은 부분 133. 『양서』에는 죽음을 아름답게 꾸미는 조칙을 실은 것이 많다 134. 『양서』에는 지족전이 있으나 방기전이 없다 135. 고문은 요찰로부터 비롯했다 136. 『진서』에는 피휘한 것이 많다 137. 소자현과 요사렴은 모두 아버지를 위해 열전을 지어 정사에 넣었다 138. 여덟 왕조의 정서는 송대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퍼졌다 권10 139. 『남사』는 진수가 쓴 『삼국지』의 체례를 모방했다 140. 『남사』와 『북사』에서 열전에 자손들을 덧붙인 예 141. 『남사』에서는 『송서』를 삭제한 것이 가장 많다 142. 『남사』에서 지나치게 간략함을 추구한 실책 143. 『남사』에서 틀린 부분 144. 『남사』에서 『제서』를 증보한 부분 「왕검전」 「저연전」 「정경아전」 「왕경칙전」 「유세륭전」 「장괴전」 「주봉숙전」 「왕광지전」 「예장왕 (소)억전」 「무릉왕 (소)엽전」 「강하왕 (소)봉전」 「의도왕 (소)갱전」 「하동왕 (소)현전」 「경릉왕 (소)자량전」 「어복후 (소)자향전」 「진안왕 (소)자무전」 「건안왕 (소)자진전」 「남해왕 (소)자한전」 「파릉왕 (소)자륜전」 145. 『남사』와 『제서』가 서로 다른 내용 146. 『남사』에서 『양서』에 보태거나 삭제한 내용 147. 『남사』에서 『양서』를 삭제한 부분 148. 『남사』에서 『양서』를 증보한 것 가운데 중요한 부분 「무제기」 「원제기」 「서비전」 「소명태자전」 「남강왕 (소)회리전」 「무릉왕 (소)기전」 「임하왕 (소)정덕전」 「소의전」 「소조전」 「임천왕 (소)굉전」 「남평왕 (소)위전」 「파양왕 (소)회전」 「심약전」 「범운전」 「임방전」 「서면전」 「주이전」 권11 149. 『남사』에서 『양서』에 보탠 잡다한 내용 「무제기」 「간문(제)기」 「원제기」 「치황후전」 「정귀빈전」 「소명태자전」 「남강왕 (소)회리전」 「여릉왕 (소)속전」 「무릉왕 (소)기전」 「임가왕 (소)정덕전」 「소앙전」 「소업전」 「소조전」 「영양왕 (소)부전」 「남명왕 (소)위전」 「범운전」 「강엄전」 「임방전」 「왕승유전」 「호승우전」 「음자춘전」 「두안전」 150. 『양서』와 『남사』두 사서가 서로 다른 부분 151. 『남사』는 『진서』에 대해 심하게 더하거나 삭제한 것이 없다 152. 『남사』와 『진서』가 서로 다른 내용 153. 송나라와 제나라에는 방탕한 군주가 많았다 154. 송나라 궁중 여인들의 무례함 155. 송나라 황실 자손들이 도륙된 참혹함 권12 156. 군주는 즉위하면서 하얀 비단 모자를 썼다 157. 제나라와 양나라 군주들은 재주와 학식이 많았다 158. 제 명제는 고제와 무제의 자손들을 죽였다 159. 제나라 제도에서는 전첨의 권한이 매우 중요했다 160. 남조에서는 꿩을 쏘는 것으로 사냥을 했다 161. 강좌의 권세 있는 가문에는 공신이 없었다 162. 양 무제는 제나라 황실의 자손을 남겨두었다 163. 진 무제는 적장을 많이 등용했다 164. 제, 양나라 때 대사의 폐해 165. 육조시대에는 반어로 참언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166. 애책문 167. 남조에서는 진나라의 땅이 가장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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