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의 길 - 조국의 산하를 걷다 2권

강원・충청・전라・경상 편

도진순, 신복룡, 김상기, 한규무, 김용달 | arte | 2018년 08월 23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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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
— 김구


201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 기념

역사·정치 분야 전문가가 김구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역사 여행기

멀고도 험난한 노정이었다. 길도, 안내인도, 등불도 없었다. 백범은 스스로 길을 내고 등불을 밝히며 고단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하며 보이지도 않는 저 아득한 곳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조국의 산하와 중국 대륙 곳곳에 피땀으로 얼룩진 얼과 혼을 새겼다. 우리는 그 길을 되밟기로 했다. 발자취를 더듬고 흔적을 헤아리며 백범의 숨결과 체온을 느끼려 했다. “진실은 현장에 있다”는 신념으로 백범이 걸어간 길 위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행동, 그리고 사상을 되짚어 보려 했다.
-「발간사」 에서







◎ 도서 소개

행동하는 이상주의자, 꿈꾸는 리얼리스트
백정범부의 길에서 삶의 이정표를 만나다

2019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자 스스로 민족의 문지기가 되고자 했던 김구가 서거한 지 7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 없는 백성으로 억압과 설움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 김구는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대표로 우뚝 자리매김하고 있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을 하며 조국과 민족의 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백범 김구. 그래서 김구의 발길은 조국의 산하 구석구석에 이르렀으며 드넓은 중국 대륙을 종횡무진 활보하였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었으나 단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한 이후, 미소 냉전으로 재편되는 복잡한 세계 질서와 해방 후의 혼란한 국내 정세 속에서 국토의 분단을 막고자 애썼던 그의 행보는 삼팔선 이남은 물론 이북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선 뒤, 김구가 고심하고 해결하려 한 남북 분단의 상황은 김구의 서거 70주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남북정상회담이 희망의 기운 속에서 성사되고 미국과 북한의 대표가 65년 만에 만난 역사적인 이 시기에, 당시 김구가 바랐던 나라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냉전 시기를 한참 지나 왔지만 이제야 얼어붙어 있던 남북 관계가 회복되어 가는 듯하다. 이러한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 『백범의 길』의 필자들은 김구가 걸어간 길 위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행동과 사상을 돌아보았다. 이는 김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조망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백정범부의 삶을 지향했던
김구라는 인물의 크고 깊은 그늘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영향력이 큰 것이 먼 데까지 미친다는 뜻이다. 『백범의 길』을 보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김구라는 한 인물의 그늘에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백정과 범부를 지향하는 한 인물의 크기와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이라는 한 궁벽한 골짜기에서 시작한 그의 발자취는 충청도 보은 장안의 대도소에서 동학의 교주 해월 최시형,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의 안태훈 진사와 그의 아들 안중근으로 이어지고, 만주의 의병 김이언 부대를 거쳐,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치하포사건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로 이어진다. 인천감옥과 탈옥, 은신과 방랑의 길을 거쳐 마곡사의 승려 생활, 다시 전덕기, 이동녕, 최재학 등과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뒤이어 교육운동에 투신한다.
안악사건, 105인사건 등 크고 작은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김구라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다. 이후 김구는 임시정부의 여러 직책을 맡아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그야말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지기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패를 환국하는 날까지 지켜왔다. 임시정부의 주석이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여 74세에 경교장에서 눈을 감기까지 어느 한 순간 개인적인 평온함과 안정을 추구한 적이 있었을까, 김구의 인생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공인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위태롭고 엄격한 삶이었다. “나라를 위해 왜놈이 죽을 일은 했어도 내 민족에게 죽을 일은 안 했다”라고 말했던 김구는 같은 민족인 국군 장교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눈을 감았다.
『백범의 길』은 김구라는 한 인생의 역정을 더듬어 감으로써 사람 냄새 나는 그의 모습을 젊은이들에게 보여 주고자 마련된 전기이자 답사기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세종의 뒤를 이어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사의 위인으로, 김구는 왜 우리의 가슴에 그리 깊이 각인되었는가? 서문을 쓴 신복룡 선생은 그의 삶과 투쟁이 훌륭한 바도 있지만 『백범일지』라고 하는 불후의 자서전이 “사료라기보다는 철학서요, 경세서이며 고백 문학의 백미”로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민족지도자의 사료적 가치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시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백범의 길』 여덟 명의 필자들은 김구의 발끝에서 시작해 정신으로 다져진 그의 인생 역정을 보여 주는 이정표가 될 책이 되길 바라며 이 역사 여행기를 썼다.

티끌처럼 돌멩이처럼 떠돈 수만 리 길
역사‧정치 분야 전문가가 김구의 길을 따라 걷다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에는 김구와 관련한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의 전문 연구자 여덟 분이 참여하였다. 연구자들은 저마다 권역을 나누고 사진도 직접 찍으며 김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김구의 체취가 서려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는 국내 편으로 기획되어 서울‧경기‧인천 지역을 다루는 1권, 강원‧충청‧전라‧경상 지역을 다루는 2권으로 구성된다.
김구는 자신이 말했듯이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길 위에서 삶의 자세를 배웠다.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 2권에서는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곳곳에 배어 있는 김구의 흔적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19세에 명성왕후 시해 사건에 분노해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 후, 인천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한 김구의 애국심과 비범함을 알아본 유완무, 이시발, 성태영 등이 그를 민족 지사로 키우기 위해 비밀리에 회동을 벌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무주와 김천에 남은 흔적을 통해 상상해 본다. 또한 신분 고하에 따른 차별에 반대해 동학에 심취하여 ‘애기 접주’라는 칭호로 불리며 활약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피신하게 된 마곡사.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고자 하기도 했지만 결국 속세로 돌아온 그의 깊은 고민을 헤아려 본다.
특히 환국 후 한국독립당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작한 지방 순회 길은 그가 젊었을 적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보은의 길과 맞물려 김구의 인생 역정을 돌아보는 흥미로운 여정이 되었다. 순천, 보성, 함평, 김제, 전주가 바로 그런 지역이다. 이 밖에도 전재민에 대한 구호의 손길과 충무공 시비, 촉석루 등 항일 정신이 깃든 장소를 방문해 나라를 빛낸 위인들을 찾은 김구의 발걸음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편에 이어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는 한국과 중국 학자들의 합작으로 중국 편을 낸다. 또한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김구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망명 전까지 머물면서 일제에 항거했던, 또 환국 이후 통일을 열망하며 삼팔선을 넘었던 북녘 땅 답사기를 낼 계획이다.


◎ 책 속에서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정부의 탄압을 피해 태백산 등 여러 곳에서 피신 생활을 했는데, 이곳 국사봉 서남쪽 끝자락에 있던 가섭암에서도 숨어 지냈다고 한다. 1898년 6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사형당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늦가을, 최시형으로부터 접주 임명을 받은 김구가 피신 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마곡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남쪽 산꼭대기에 오르니,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누릇누릇 불긋불긋하였다. 가을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 백범일지』 151쪽)



김구는 마곡사에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위 글은 마치 어느 수필집의 한 구절같이 유려하다. 비록 소설가 춘원의 손을 거쳐 나온 문장이라지만, 김구의 심사가 잘 나타난다. 필자가 김구의 자취를 찾고자 마곡사에 간 것이 11월 어느 날 오후 4시경이었다. 120년 전 김구가 왔던 시각도 비슷한 때였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남아 있는 단풍도 잎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김구가 느꼈을 쓸쓸함이 밀려왔다.

「공주 마곡사-출세간의 길을 가다 」 (37~39쪽)



김구의 사상이나 종교의 편력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유교 사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에 관서의 유학자인 고능선(高能善, 1842~1922)을 만난 것이 그의 운명을 갈랐다. 김구는 자신이 그를 만난 것은 “젖을 주리던 아이가 젖엄마를 만난 것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능선의 학맥은 화서학파華西學派로 이어진다. 호는 후조後凋이다. 그는 1880년대 후반에 3년간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의 가정서사柯亭書舍에서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화서학파 안에서 그리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 무렵 고능선은 유중교의 집안 조카인 의암 유인석을 만났다. 고능선과 유인석은 동문수학을 한 동갑내기로서 그 사이가 자별했다.
고능선이 어떤 인연으로 춘천을 찾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1893년, 그러니까 50세가 넘은 초로에 고능선은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인 안태훈安泰勳의 초청으로 황해도 신천에 정착하여 청계동에서 학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김구는 황해도 팔봉 접주로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한 뒤 안태훈의 주선으로 청계동에 피신하러 가면서 안태훈을 통하여 고능선을 만났다. 김구의 충의를 들은 고능선도 그를 각별히 아꼈다. 이때 김구는 고능선에게서 『화서아언華西雅言』과 『주자백선朱子百選』을 배웠다. 그 뒤 안태훈 일가와 종교적 문제로 갈등하다가 단발령을 계기로 고능선은 청계동을 떠났다. 고능선은 김구를 손주사위로 삼을 생각을 할 만큼 그를 사랑했으나 인연은 거기에서 그쳤다.
고능선은 김구에게 이제 청나라의 복수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니 이때를 이용하여 국모를 죽인 일본에게 항전할 의병 활동을 권고하면서,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함과 더럽게 망함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서로 붙잡고 울 때도 있었다.

「춘천 가정리 유인석 묘소-존경과 그리움의 여정」(81~83쪽)



쇠실마을 주민들은 마을 입구의 도로를 수리하고 솔문을 세워 김구를 환영했는데, 당시 국민학교 2학년생 김경회는 가가호호 쌀을 걷어 음식을 장만했다고 회고했다. 김구는 은거 당시 식사했던 바로 그 마루에서 음식을 대접받았다. 김광언은 이미 사망했고, 7세 때 김구가 글공부하던 자리에서 놀았다는 여성과 김판남이란 주민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김구는 주민들에게 휘호를 써 주면서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한편 김구는, 자신이 48년 전 쇠실마을을 떠날 때 붓 주머니를 선물했던 선계근이 생각났다. 다음은 『백범일지』의 내용이다.



그중에 또 잊지 못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닌 48년 전 동갑되는 선씨 한 사람이 있어, 나와 격의 없이 지내다가 내가 그 동네를 떠날 때, 그 부인의 손으로 만든 필낭筆囊 하나를 작별 기념으로 내게 주었던 일이 눈에 선하다. 그 선씨에 대해서 물으니 “선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부인과 가족은 보성읍 부근에 거주합니다. 그 노부인 역시 옛일을 잊지 않고 지금 가시는 보성읍으로 마중 나온다 합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날 그 동네를 떠나 보성읍에 도달하니, 과연 그 부인이 전 가족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 광경은 참으로 감격에 넘치었다. 만나는 자리에서 나이를 물으니 나와 역시 동갑이라, 과거사를 잠깐 토론하고 헤어지는 예를 마치었다.



『백범일지』를 읽다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한둘이 아니지만, 필자는 이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다. 40여 일 남짓 머물다 떠나는 생면부지 낯선 타지인에게 정성스럽게 만든 붓 주머니를 이별의 선물로 건네준 선씨 부부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22세 꽃다운 나이 때 만난 동갑내기들이 48년이 지나 70대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장면이 떠올라서다. “그 부인이 전 가족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 광경은 참으로 감격에 넘치었다”라는 짧은 구절이지만 서로에게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이었을까. 이들을 비롯한 쇠실마을 주민들이야말로 김구를 민족의 지도자로 키워준 수많은 민초民草들이 아닐까.

「보성 김광언 가옥-쇠실마을에서 추억에 잠기고 」(187~189쪽)



김구가 전주를 다시 찾은 시기는 1949년 봄이다. 환국 후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여잡고 살았다.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환국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삼팔선을 경계로 미소가 남북한을 분할 점령하여 각기 군정을 실시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여 추진하려는 굴욕적인 상황이 도래하였다. 임시정부나 김구의 입장에서 보면, 제2의 독립운동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왔던 김구이고 보면 해방 정국은 또 다른 고뇌와 고난의 시기였다. 그래서 김구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나아가 민족분단이 뻔히 보이는 단독정부 수립 노선에 반대하여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 민주국가 건설에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지만 김구의 뜻과는 달리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곧이어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하였다. 남북 국토 분단에 기반하여 각기 다른 체제의 정부가 만들어져 민족 분단이 현실로 나타났다. 김구가 우려하고 걱정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 말았다.
민족 분단국가는 김구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나라였다. 낯설고 물선 수만 리 이국땅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때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걱정되는 일은 또 있었다. 민족 분단은 필연코 민족 상쟁의 비극을 초래한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만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되기에 김구의 마음이 바빴다. 좌절된 남북 통일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동포들에게 다시금 전파하고, 자신을 따르는 한국독립당 동지들을 격려하기 위해 재차 지방 순회에 나섰다.

「전주-호남제일성으로」(260~261쪽)

저자소개

이름: 도진순
약력: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중국 베이징대학교,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초빙교수를 지냈다. 현재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 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 수상), 『백범일지』, 『정본 백범일지』, 『백범어록』 등이 있다.


이름: 신복룡
약력: (전)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중앙도서관장 및 대학원장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 및 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건국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국정치사』, 『전봉준 평전』, 『한국의 정치사상가』,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2001년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수상), 『한국사 새로 보기』, 『이방인이 본 조선』, 『한국정치사상사』(2011년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수상),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 등이 있다.


이름: 김상기
약력: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매헌연구원 원장충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와 캐나다 UBC 방문교수,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자 매헌연구원 원장이다. 저서로 『윤봉길』, 『호서유림의 사상과 민족운동』, 『한말 의병운동』, 『행동하는 지성 한국의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

이름: 한규무
약력: 광주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한국 근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상임위원을 지냈고, 현재 광주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이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독교 농촌운동』,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모』(공저), 『뒤집어 본 인물 열전』, 『기독교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시선의 탄생』(공저) 등이 있다.

이름: 김용달
약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근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훈처 연구원, 독립기념관 연구원을 거쳐 국민대학교, 명지대학교, 단국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 『일제의 농업정책과 조선농회』, 『한국독립운동의 인물과 노선』, 『살신성인의 길을 간 의열투쟁가 김지섭』 등이 있다.

목차소개

발간사-김구의 숨결, 얼과 혼을 찾아가는 먼 길
서문-당신은 그곳에 가 보았는가?

보은 장안 대도소 최시형을 만나다
탈옥 후 삼남 지방 피신길 발길 닿는 대로, 인연이 이끄는 대로
공주 마곡사 출세간의 길을 가다
공주 공산성과 청양 모덕사 광복된 조국을 기리며
예산 윤봉길 의사 고택 윤봉길 의사 나고 자라난 고향

춘천 가정리 유인석 묘소 존경과 그리움의 여정

무주의 서벽과 김천의 벽서 푸르른 심산유곡에서의 비밀 회동
김천 달이실 마을 거북이, 연꽃 아래 잠행하다
남도 순방과 부산 전재민수용소 새로운 정치적 도약을 위하여
김해 김수로왕릉 난생처음 사모각대를 갖추고
진해 해안경비대 열병식을 참관하고 1호 경비함을 타다
진해 충무공 시비 바다에 맹세하고 산에 다짐하노니
진주 촉석루 촉석루 편액의 위치가 바뀐 사연
통영 한산섬 제승당 편액을 다시 걸고

순천 송광사 사진으로 찾은 김구의 발자취
보성 김광언 가옥 쇠실마을에서 추억에 잠기고
함평 이동범 가옥 토굴과 다락방에서 몸을 숨기던 곳
광주 대성국민학교와 광주여자중학교 환영회와 강연회
광주극장, 전남방직공장, 관음사 광주 시내의 자취를 찾아서
광주 백화마을 전재민을 위한 보금자리
무등산 오방정 노구를 이끌고 무등산에 오르다

군산공설운동장 공설운동장을 울리던 사자후
김제 원평과 익산 김홍량 가옥 오래전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전주 김형진 가옥과 전주향교 호남제일성으로

연보
참고 문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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