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날 밤
도서정보 : 김동인 | 2021-01-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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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창피창피 한대야 나 같은 창피를 당해 본 사람이 있겠나.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도 부끄러울세. 그렇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창피는 다시 한번 당해 보고 싶기도 하거든.
이야기할께. 들어 보게.
오 년 전 ― 육 년 전 ― 칠 년 전인가. 어느 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혈기 하늘을 찌를 듯하던 젊은 시절일세그려. 지금은 벌써 내 나이 삼사십.
얼굴에는 트믄트믄 주름자리까지 잡히었지만 이 주름자리도 없던 젊은 시절.
절기는 봄날. 우이동 창경원에 벚꽃 만개하고 사내계집 할 것 없이 한창 바람나기 좋은 절기일세그려. 얌전하던 도련님 색시들도 바람나기 쉬운 봄철에 그때 장안 오입장이로 자임하고 있던 이 대감이 가만 있겠나. 비교적 수입도 좋것다. 허위대 풍신 언변 남한테 빠지지 않고 시조 한 마디 가야금 한 곡조도 뽑아 낼 줄 알고 경우에 의해서는 호령마디도 제법 할 줄 알고 ― 장안 오입장이로는 그다지 축가는 데가 없던 대감일세그려. 그 위에 여관 생활하는 자유로운 몸이것다. 친구놈들도 모두 제법 한몫씩은 보는 놈들이것다.
― 이런 이 대감께서 말일세. 그 어떤 와류생심하고 ― 아니 이러다가는 교외정조가 나겠네. 도회풍경으로 사꾸라 만개하고 창경원에 야앵구경의 바람장이들이 몰려가는 날 몇몇 친구를 짝해서 한바탕 어디서 답청(踏靑)을 잘했다고 하세.
돌아오는 길일세. 친구놈들은 제각기 기생집으로 갈 놈은 기생집으로 가고 여편네 궁둥이를 찾아갈 놈은 제 집으로 가고 대감은 기생집도 그날 따라갈 생각도 없고 해서 여관으로 향했네.
밤도 자정은 지난 때. 야앵구경 갔던 연놈들도 모두 음란한 자리 속으로 바야흐로 들어갈 시간에 이 대감께서는 아주 호젓한 마음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여관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옥보를 옮기고 있지 않았겠나. 어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일세그려. 웬 계집애와 탁 마주쳤네그려.
물론 예의를 차리는 이 대감이 사과를 했지.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 ― 용서하십시오) 하고. 그러고는 그냥 지났지. 지나고 생각했네. 여기는 북촌이다, 북촌의 대로도 아니요 골목이다. 이 북촌 골목에 웬 남촌 계집애가 단 혼자서 그것도 자정이 지난 이 때에 방황하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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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도서정보 : 채만식 | 2021-01-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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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라디오의 지하선을 비끄러매놓고 나니, 그럭저럭 대강 다 정돈은 된 것 같았다.
책장과 책상과 이불 봇짐에, 트렁크니 행담 등속을 말고도, 양복장이야 사진틀이야 족자야 라디오 세트야, 하숙 홀아비의 세간 치고는 꽤 부푼 세간이었다. 그것을 주섬주섬 뒤범벅으로 떠싣고 와서는, 전대로 다시 챙긴다, 적당히 벌여놓는다 하느라니, 언제나 이사를 할 적이면 그러하듯이, 한동안 매달려서 골몰해야 했다.
잠착하여 시간과 더불어 오래도록 잊었던 담배를 비로소 푸욱신 붙여 물고 맛있이 내뿜으면서, 방 한가운데에 가 우뚝 선 채, 휘휘 한 바퀴 돌아보았다.
칸반이라지만 집 칸살이 커서 웬만한 이칸보다도 나았다. 웃목으로 책장과 양복장을 들여세우고, 머리맡으로 책상을 놓고, 뒷벽 중간쯤다가 행담과 트렁크를 포개서 이부자리를 올려놓고 했어도, 홀몸 거처엔 별반 옹색치 않을 만큼 방은 넓었다.
반자, 도배, 장판 일습이 집주름 영감과 주인집 마나님 말따나 파리똥 한 점 앉지 않고 정갈했다. 여름을 치른 벽이라도, 빈대피는 물론 곰팡이 슨 자죽도 없었다.
십상 잘 되었다고 다시금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그러자 방안이 별안간 화안히 밝아졌다. 돌려다보니, 서향인 듯싶은 앞 쌍창으로 마침 끄물거리던 구름이 벗어진 모양, 햇볕이 가득 들여쬐었다. 장차 명년이나 가면 여름이 더울는지는 몰라도, 당장 이 가을과 겨울 동안 해가 잘 들겠어서 또한 신통하고 반가왔다.
해는 잘 들고, 방은 넓고 깨끗하고, 보매 집안도 안팎이 정사하고 겸해서 조용하고, 아무려나 모처럼(그도 우연한 기회에) 좋은 하숙을 얻은 것이 재삼 만족했다.
그새까지 유하고 있던 원동의 하숙을 불시로 옮아야 할 사정이 생겨서 두루 물색을 했으나, 우환중에 방이 귀한 이 당철이라, 조만하여 마차운 자리가 눈에 뜨이질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제는 저 앞 큰거리를 지나던 길에 허실삼아 복덕방 영감더러 문의를 했더니, 선뜻 데리고 와서 보여준 것이 이 집 이 방이었다.
마침 한 동네 이웃간이요 해서 내정을 익히 아는데, 서른두엇은 된 젊은 여인과 육십 넘은 친정어머니와 모녀 단둘이 살고, 영감은 그 여자를 첩으로 얻어 두고서 며칠만큼씩 밤이면 다녀가곤 하여, 참 절간같이 조용하니라고, 또 방 널찍하고 사람들 쌩패스럽지 않고 음식 솜씨 좋고, 무어 점痔?하숙으로는 깍아마췄느니라고. 한갓 흠이, 식가를 오십 원씩이나 내라고 해서 좀 안되었지만, 그 대신 그 값이 거기 있느니라고.
앞을 서서 아기족거리고 걸어가면서 집주름 영감이 연해 이렇게 주워섬기며 추어 넘기며 하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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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도서정보 : 김동인 | 2021-01-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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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정성도 하늘은 몰라보았다. 어린애는 폐렴이 된 지 사흘째 되는 저녁 마침내 가망이 없이 되었다. 은희가 십수 년 전에 어린 동생 만수의 최후에서 본 바의 현상― 답답한 듯이 헤적이던 온갖 행동을 멈추어 버리고 비교적 평온하고 온화한 모양― 을 은희가 필립에게서 발견한 것은 폐렴이 된 지 사흘째 되는 저녁이었었다.
사흘을 미음만 조금씩 먹어 가면서 한잠을 자지를 않고 다리 한 번 펴보지 못하고 병간호를 한 은희는 이 날은 벌써 자기로도 자기에 대한 온 판단력을 잃은 때였었다. 아직껏 답답함에 못이겨서 헤적이던 어린애가 비교적 평온하게 될 때에 은희는 인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뿐 그냥 움직이지 않고 그 모양대로 앉아 있었다. 비교적 평온한숨을 규칙 바르게 쉬는 어린애의 얼굴을 때때로는 안개를 격하여 보는 듯이 때때로는 비상히 똑똑히 ― 바라 보면서 앉아 있는 은희의 머리는 각일각 나락의 밑으로 떨어져 들어갔다. 세상 만사가 모두 중하고 의미 없고 흐리멍덩한 가운데서 이리 바뀌고 저리 뒤채는 것이 귀찮고 시끄럽기가 짝이 없었다.
“만수야 너 필립하고 싸우지 마라.”
여기서 한 번 펄떡 정신을 차렸던 은희는 무릎을 조금 움직일 뿐 다시 어렴풋이 어린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즉 필립의 주위에는 불이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불이었었다. 시뻘겋게 불 붙는 가운데 필립의 얼굴만 두드러지게 나와서 답답한 듯이 양손을 헤적이며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필립의 주위에 있는 불은 더욱 맹렬히 타올랐다.
온갖 것을 다 사르려는 듯이 맹렬히 타올랐다. 필립의 옷에도 불이 당긴 모양이었었다. 몸이며 사위(四圍)를 온통 불에 둘러싸인 필립은 머리와 양손만 이불 밖으로 내어놓고 누구를 찾는 듯이― 틀림없이 어머니를 찾는 듯이 헤 적였다. 은희는 사랑하는 아들을 그 무서운 불에서 구하려고 맹연히 어린아 이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그는 새빨간 처네이불을 손으로 쓸어안았다. 그 가 시뻘건 불이라 본 것은 전등에 반짝이는 비단 처네였었다.
필립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오래간만에 웃음의 그림자가 있었다. 일 주일 내외에 무섭게 여윈 필립은 그 여윈 뺨에 주름을 내며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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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따위 초월한다 1권 (상)
도서정보 : 샤글리온 | 2021-01-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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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세 갈래로 찢겨 버린 사람들. 이에 순응하며 살아간 지 천이백여 년. 오랜 시간만큼이나 세 문명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난 신. 그 잔혹한 순수함은 미래를 건 게임을 제안한다. 각자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인류는 힘을 합칠 수 있을까? 그래서 신이라는 압도적 존재로부터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신 따위에게 살려달라 빌고만 있을 건데? 세상 전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건 이들의 마음이 빛난다! 신 따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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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도서정보 : 김동인 | 2021-01-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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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연하여 흘렀다.
〈고꼬와 미꾸니 노 난 바꾸리〉
가 낡아지고,
〈카츄샤가와 이야〉
가 생겼다가 없어지고,
〈고꼬와 죠셍 호꾸단노니 하꾸리아마리노 오오록 고〉
가 각 곳에서 들렸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는 동안, ○○골 안의 오학동과 정방도 이전과는 그 지위가 온전히 반대로 되어 버렸다.
관리에 등용된 정방 자식들이 그새 이백여 년을 자기네의 조상이 받은 수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하여 오학동에 대하여 가한 압박 때문에 (수리라 측량이라 양잠이라 세금이라), 마치 술집 회계비와 비슷한 헤일 수 없는 명목으로 착취를 당한 오학동은 지금은 몇몇 집이 겨우 자활을 하는 뿐, 대개는 모두 땅을 정방 종의 자식에게 팔아 버리고, 그래도 굶어 죽을 수는 없어서 이전에 종의 자식이라고 그렇게도 멸시를 하던 정 방 사람들의 소작인으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구매가격 : 500 원
신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
도서정보 : 이상권 | 2021-01-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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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영화, 드라마 등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오천 년 희로애락을 함께한 신들의 이야기
중고등 국어교과서 수록작가와 함께 읽는 우리 신화
예전에는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신으로 모셨다? 생태와 환경을 고찰하는 글로 교과서에 여러 작품이 수록된 이상권 작가가 이번에는 한국 신화 이야기를 선보인다. 『신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오천 년간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신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청소년 인문서다.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산신령부터 왕으로 모셔진 외국인 관우신까지. 조상들의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담긴 한국 신화는 먼 무덤 속이나 오래된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웹툰으로 시작해 영화로 제작된 [신과 함께]를 비롯해 [도깨비]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등 드라마, 게임까지 여러 모습으로 변해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알아도 한국 신화는 잘 모르는 청소년들을 위해 저자는 스토리텔링 형식을 빌렸다. 이모와 아이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본문은 독자들이 한국 신화를 한결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민화나 옛 사진 등 시각 자료가 풍부하게 첨부되어 있어 직접 눈으로 보며 신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우리 조상이 믿고 의지해 온 수많은 신들은 비록 작은 경전 하나 없지만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 준 고마운 존재다. 조상들과 함께 살아온 이 신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의 또 다른 역사이자 문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9,100 원
영달동 미술관
도서정보 : 피지영 | 2021-01-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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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11명의 위대한 화가와 21편의 명작!
그들이 캔버스에 포착한 순간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위한 선물이다
위대한 화가들이 남긴 명화(名畵)를 감상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왜 그는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왜 저 그림을 보고 있는 나는 감동을 느끼는가?’, ‘화가들이 포착한 장면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좋은 그림은 그 그림과 화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마음에 와닿는다. 화가들이 포착한 생의 한 순간과 세상의 단편들이 인류의 보편적 경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은 개개인이 가진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에도 말을 건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환]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사연을 갖고 그 그림과 마주하고 있다.
『영달동 미술관』은 ‘미술 소설’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화가와 그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고흐, 라울 뒤피, 마코프스키, 시시킨, 베르메르, 브뤼헐, 일리야 레핀, 렘브란트, 라파엘로, 모딜리아니, 밀레와 그들의 그림은 뛰어난 조연으로 등장한다. 불투명한 미래에 낙담하고, 한때의 실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부적절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영달동 주민들은 위대한 화가들이 그림 속에 숨겨 둔 메시지와 의미를 찾아가면서 조금씩 변화를 경험한다. 이 책의 원고를 단숨에 읽어 낸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권준수 교수는 “영달동 미술관에 가면 오래전 마음의 상처, 고통, 번민, 죄책감투성이의 ‘나’를 만나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 책이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힐링의 시간을 선사한다.”고 덧붙인다. 미술을 소재로 기이하고 미스터리한 사건을 전개하면서도 이 소설이 상처 입은 현대인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이유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 최초의 목적이 ‘위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앞서 던진 처음의 질문들에 『영달동 미술관』의 방식으로 답을 해보자. ‘위대한 화가들이 남긴 그림이 말을 거는 대상은 이 책을 펼치는 바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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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반절기
도서정보 : 채만식 | 2021-01-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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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저러고 어째서 이렇게 부지를 못하게 짜증이 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요새로 바싹 불면증이 더 도져 연일 잠을 잘 자지 못했고 더욱이 간밤에는 한눈도 붙여보지 못한 채 누워서 밝힌 터라, 신경이야 많이 까스라와졌겠지만 그렇기로니 무슨 그다지 뼈아플 까닭은 있으며, 어제 오늘 비로소 눈 거슬린 꼴이라고. 신경인들 또한 어제 오늘 비롯한 병이라고.
분명코 오랫동안 자극없이 한적하던 칩거생활로부터 별안간 이 소란하고도 정갈치 못한 분위기 속엘 들어온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대로 더 심해 가다가는 죄없이 일을 저지르고야 말지 싶다. 시방이라도 누구 톱톱한 상대나 있던지 하여 한바탕 실컷 좀 몰아 대주고 구박을 주고 했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으니.
그러나 그도 실상은 마음뿐이지, 공연한 기염이다. 그러한 경우를 당해 놓으면, 첫마디부터 흥분을 해가지고 침착을 잃는다. 자연 말을 함부로 하고서 되잡혀서는 뒷감당을 못한다. 결과는 망신만 번연하다.
이번 걸음일랑 차라리 작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만 같지 못할까 보다.
집에는 아내가 있다. 언제고 화풀이를 잘 받아준다. 아내면은 경우와 조리가 빠져도 위격으로 해넘길 수가 있어서 더욱 좋다.
마침 트집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겠다는데 저는 어제 아침에도 부중엘 들어갔더니 여럿이들 입었더라면서 우겨서 스프링을 입혀 보냈다. 정거장에 와서 본즉 스프링을 입은 사람이라곤 설렁하니 나 하나뿐이다.
추워서 도로 왔다고, 그리고 무얼 다 아는 체를 하더니 생으로 촌 쟁퉁이 구실을 시키느냐고 얼마든지 잡도리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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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
도서정보 : 채만식 | 2021-01-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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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이 아들 내외가 , 그대도록 만류하는 것을 듣지 않고, 분에 넘치는 호강도 다 마다하고 부득부득 고향으로 내려가기로만 고집을 세우는 것은, 이유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강선달은 미상불 자기 말따나, 농사라든지 집안 살림이라든지가, 두루 마음이 뇌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이라면야, 가령 농사만 하더라도, 인제는 가을걷이밖에 남지 않았으니, 웬만큼 자기가 아니더라도 큰 손자가 영호가 저 혼자서 넉넉 해치울 수가 있었다.
또, 방금 며느리가 하던 말대로 어서 내려가서 일이 하고 싶어서……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단순히 일이 하고 싶어서만 어서 바삐 내려가지를 못해 앨 쓰는 것도 또한 아니었다. 아무리 일이 하고 싶어도 손발이 저리기로서니 한가을쯤 그걸 못 참을 바 없지는 않았다.
갑갑하다는 거도 일반이었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거의 하루같이, 아침 어둘녘부터 온종일 날이 저물도록 들에서 살던 영감이다. 넓은 들에서 넓은 하늘 아래서, 활개를 펴고 맘대로 호흡하며 맘대로 일하고 살던 영감이다. 그리던 영감이 하루아침, 이 옹색스런 속에 와서 들박혀 있으려니 응당 갑갑증이 날 노릇이었다. 뜰이라야 두 걸음만 걸으면 세 걸음째는 앞 판장이 이마에 가부딪친다. 좌우는 이웃집 뒷벽이 답답히 가슴을 누른다. 하늘은 처마와 처마 사이로 손바닥만큼 올려다보인다. 하루의 태반을 좁고 더운 방구석에서 누웠다 앉았다, 서성거렸다 해야 한다. 강선달은 그래서, 이건 바로 전중이 살기보다 더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암만 그렇더라도, 꾸욱 참고 견디자고 들면야 결단코 못할 것은 아니었다. 이 밖에도, 구실은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시골로 내려가겠단 말이 날 적마다 번번이 이유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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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죽은 모나리자
도서정보 : 채만식 | 2021-01-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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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투성이(農民)의 딸자식이 별수가 있나! 얼굴이 반반한 게 불행이지.
올해는 윤달이 들어 철이 이르다면서 동지가 내일 모렌데, 대설 추위를 하느라고 며칠 드윽 춥더니, 날은 도로 풀려 푸근한 게 해동하는 봄 삼월 같다. 일기가 맑지가 못하고 연일 끄무레하니 흐린 채 이따금 비를 뿌리곤 하는 것까지 봄날하듯 한다. 오늘은 해는 떴는지 말았는지 어설프게 찌푸렸던 날이 낮때(午正)가 겨운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대로 더럭 저물어버린다.
언덕배기 발 가운데 외따로 토담집을 반 길만 되게 햇짚으로 울타리한 마당에서는 오목이네가 떡방아를 빻기에 정신이 없이 바쁘다. 콩 콩 콩 콩 단조롭기는 하되 졸리지 아니하고 같이서 마음이 급해지게 야무진 절구 소리가 또 어떻게 들으면 훨씬 한가롭기도 하다.
오목이네 이마에서는 빚어진 땀방울이 볕에 그은 주근깨 새까만 얼굴로 흘러내리다가 구정물이 되어 그대로 절구 속 떡가루로 떨어진다. 떡이, 소금을 두지 아니해도, 찝찔한 것 같다. 싯싯 하면서 찧느라고 침도 튀어 들어간다. 싯 하고 콩 하니 내려찧고는 이어 허리를 펴면서 절굿대를 들어올리느라면 때에 전 당목저고리 앞섶 밑으로 시들어빠진 왼편 젖통이 댈롱 내다보인다. 젖도,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코가 펑퍼짐 하니 궁상스러운데다가 겉늙은 얼굴처럼 시들어빠졌다. 기름이 한창 오를 여인네 사십에, 그러나 농군의 아내는 중성(中性)이 되어버린다. 여복(女服)에 머리 얹지 아니했으면 누가 여자라고 볼 사람은 없다.
콩 콩 콩 콩 오르내리는 절굿대는 바쁘다. 그래도 아직도 두 번은 더 쳐야지 무거리가 아깝다. 절구통 옆으로는 그새 찧어서 쳐놓은 떡가루가 하얗게 큰 함지로 가득 담겨 있다. 떡가루를 뒤집어쓴 체가 절구에 울려 함지전에서 위태하게 달랑거린다. 절구통 가로 땅바닥에는 잔 놈, 굵은 놈 떡가루가 아끼듯 살살 뿌려져 있다. 쌀 한 알갱이 떡가루 한 낱도 새로와하는 규모지만 절굿대 끝에서 튀기도 하고 체로 칠 때 날리기도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만큼씩은 번번이 허실을 하게 된다.
해는 더럭더럭 저물어만 간다. 들판 건너 앞마을에서 저녁 연기가 하나씩 둘씩 가느다랗게 솟아오르고, 바로 언덕 밑 대밭집의 대숲에는 잘 새가 날아들어 요란스럽게 지저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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