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의 선택 (세트)

도서정보 : 콜린 매컬로 | 2016-06-2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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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에서 집필까지 30여 년
시력과 맞바꾼 콜린 매컬로 필생의 역작
〈마스터스 오브 로마〉 세번째 이야기

포르투나 여신의 총애를 받는 자 누구인가!
추악함과 영광, 현재의 권력과 미래 권력 간의 혈투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세번째 이야기 〈포르투나의 선택〉
이 책은 3천만 부가 팔리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던 장편소설 『가시나무새』의 작가 콜린 매컬로가 여생을 걸고 쓴 대작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제3부 『포르투나의 선택』제2권이다. 이미 출간된 제1부 『로마의 일인자』와 제2부 『풀잎관』은 현재 독자들의 사랑 속에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시리즈는 작가가 자료를 모으고 고증하는 데서부터, 집필을 시작해 시력을 잃어가며 완결하기까지 30여 년이 걸린 대작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포르투나Fortuna"는 운명의 여신으로, 로마인들이 가장 열렬히 숭배했던 신들 가운데 하나다. 당시 로마인들은 자신의 운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으로 여겼지만, 술라나 카이사르처럼 대단히 지적인 인물들조차 포르투나를 숭배했다.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곧 총애를 받은 그 사람이 옹호하는 것들 역시 정당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포르투나의 그리스식 이름은 티케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몰락하는 술라와 청년 카이사르의 성장,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제3부 『포르투나의 선택』에서는 기원전 83년부터 기원전 69년까지 술라의 2차 로마 진군과 독재, 그리고 그의 사후 10여 년간을 다룬다. 제1, 2부에서 가장 매혹적인 주인공의 한 명으로 출중한 외모와 명석함과 야비함을 동시에 지닌 술라가 피비린내를 풍기며 공화정의 기반을 흔드는 독재관으로 군림하다 노쇠하여 몰락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무시무시한 권력을 행사하는 술라와의 첫 대면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카이사르의 비범한 성장 과정, 노예출신 검투사 영웅에서 반란군의 수장이 된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도 흥미를 더한다. 그리고 삼두정치의 주역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구매가격 : 37,800 원

 

월드컵 축구 엠블럼 사전

도서정보 : 류청 | 2016-06-23 | PDF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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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축구 역사의 영원한 클래스를 만나다
상징으로 정리한 세계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설 같은 이야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2002년 6월 4일,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을 가득 메웠던 대형 태극기를 기억한다. 한국과 폴란드의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D조 첫 경기가 열렸던 이날, 애국가와 함께 등장한 태극기는 당시 경기장에 있던 관중과 선수들은 물론이고 방송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전 국민을 감동과 충격에 빠뜨렸다. 대표팀 수비수로 출전한 김남일은 대형 태극기를 처음 보았을 때 “뒷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라고 심정을 고백한 적이 있다.

국기, 문장, 구호 같은 상징은 이처럼 단순한 기호나 그림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을 일정한 유대감으로 묶어주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독려한다. 이 때문에 국가 대항전에 출전하는 많은 축구팀이 자신들을 상징하는 기호와 그림을 엠블럼으로 활용한다. 나라의 명예와 자부심이 걸린 축구 경기에 나서는 각국 대표팀은 엠블럼에 조국의 위대함과 찬란한 미래를 담고, 동시에 승리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그려 넣는다. 이것이 바로 축구 엠블럼의 본질이다.

엠블럼은 마치 암호와 같아서 비밀스럽게 자리한 상징을 통해 한 나라의 축구 역사와 문화를 읽어낼 수 있고, 각국 대표팀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아챌 수도 있다. 엠블럼 변천사를 실마리로 해당 축구 국가대표팀의 정체성과 그들이 지향하는 축구 전술까지도 통시적으로 개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 《월드컵 축구 엠블럼 사전》은 세계 축구계를 선도하는 4대륙 37개국의 국가대표팀을 엠블럼과 함께 소개한다. 해당 대표팀의 기본 정보에서부터 축구 역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유명 선수와 감독들의 이야기와 기록, 대표팀의 역사와 문화까지 정리했다.

구매가격 : 8,820 원

콜디스트 윈터

도서정보 : 데이비드 핼버스탬 | 2016-06-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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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했던 한국전쟁의 진실과 강대국들의 속내를 치밀하게 파헤친 책

미국 역사에서 '잊혀진 전쟁' 혹은 '불쾌한 전쟁'으로 남아 있던 한국전쟁을 새롭게 조명한 책. 베트남전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마지막 유작이다. 그는 뛰어난 조사력과 저널리즘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어두운 구석이었던 한국전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본문은 한국전쟁에서 중대한 요소로 작용했던 참혹했던 전투의 실제 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그러한 상황이 있기까지 정책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만들어낸 사건들의 인과관계에 주목한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남북한 간에 벌어진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미국, 소련, 중국, 일본이라는 지정학적 관계와 냉전이라는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한 세계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전쟁 당사자들의 정치적 결정과 판단 착오를 숙련된 글 솜씨로 풀어내며 정확하고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또한, 저자는 한국전쟁 자체보다는 한국전쟁을 둘러싼 미국의 국내외 정치상황과 한국 땅에 와서 고군분투했던 미군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현장을 복원해내고 있다. 리얼한 전투 장면과 생사를 넘나드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핵심 전투의 실제 상황까지도 숨막힐 듯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양장본]

구매가격 : 28,800 원

백제왕조실록1

도서정보 : 이희진 | 2016-05-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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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왜곡과 조작 속에서 잊혀간
화려하고 찬란했던 동방의 강국
백제 700년 역사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는가

흔히 역사 기록과 일반적인 인식은 백제를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다고 결론지어놓고 그 이유를 찾는 데 골몰한다. 그리고 그 원흉으로 의자왕을 지목한다. 이것은 과연 진실일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의자왕 때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백제가 혼란스러웠다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자왕이 자만심에 빠져 독선적인 정국 운영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인식도 사실과 다르다.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막아야 한다는 충신의 충고를 무시했다는 점을 그 대표 사례로 지목하고 있으나 정작 백강에는 백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계백이 이끈 부대도 결사대로 보기 어렵다. 당시 5,000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으며, 이 부대는 철수 후 백강 방면에 재투입되었다. 결국 백제의 실질적인 멸망은 당이 주둔군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강성했던 백제 부흥운동이 부흥군 내부의 분열로 종말을 고한 그 시점이라고 봐야 한다.
백제는 고구려가 광개토왕비에서 ‘백잔(百殘)’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강한 증오심을 표출할 만큼 강성한 나라였다. 고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맞선 나라 백제. 이 책은 그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고자 하는 소중한 시도다.

구매가격 : 4,800 원

백제왕조실록2

도서정보 : 이희진 | 2016-05-3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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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왜곡과 조작 속에서 잊혀간
화려하고 찬란했던 동방의 강국
백제 700년 역사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는가

흔히 역사 기록과 일반적인 인식은 백제를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다고 결론지어놓고 그 이유를 찾는 데 골몰한다. 그리고 그 원흉으로 의자왕을 지목한다. 이것은 과연 진실일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의자왕 때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백제가 혼란스러웠다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자왕이 자만심에 빠져 독선적인 정국 운영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인식도 사실과 다르다.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막아야 한다는 충신의 충고를 무시했다는 점을 그 대표 사례로 지목하고 있으나 정작 백강에는 백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계백이 이끈 부대도 결사대로 보기 어렵다. 당시 5,000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으며, 이 부대는 철수 후 백강 방면에 재투입되었다. 결국 백제의 실질적인 멸망은 당이 주둔군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강성했던 백제 부흥운동이 부흥군 내부의 분열로 종말을 고한 그 시점이라고 봐야 한다.
백제는 고구려가 광개토왕비에서 ‘백잔(百殘)’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강한 증오심을 표출할 만큼 강성한 나라였다. 고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맞선 나라 백제. 이 책은 그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고자 하는 소중한 시도다.

구매가격 : 4,800 원

직설 무령왕릉

도서정보 : 김태식 | 2016-05-2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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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부터 최근 한․중․일의 연구 성과까지
무령왕릉, 고고학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파헤치다

국정 역사 교과서, 수능 한국사 필수,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중단, 박근혜의 경주 방문 등 권력과 역사의 관계가 수상하다. 정부가 역사교과서, 나아가 역사학을 통제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저의가 의심스러운 가운데 문화재 전문기자로 20년 가까이 ‘무령왕릉, 고고학과 권력의 유착관계’에 천착한 결과물이 나왔다.
무령왕릉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 남조 양나라의 전축분을 쏙 빼닮았다. 과연 누가 이 무덤을 만들었을까? 이 논쟁에는 민족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한국 학자들은 대부분 백제가 주체적으로 중국 문물을 수용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 학자들은 자기네 기술자가 와서 만들어줬다고 한다. 저자 김태식은 이러한 편 가르기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가루베 지온의 공주 일대 발굴과 이를 토대로 한 어처구니없는 명문(銘文) 오독을 필두로 중국이 돌궐을 비롯한 이웃 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했던 사례, 자신의 연구를 포함한 최근 주목받는 연구 성과까지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구매가격 : 15,400 원

한양의 탄생

도서정보 : 서울학연구소 | 2016-05-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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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수도 한양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권력과 명예, 재물과 출세가 교차하는 곳에서
지식과 예와 덕, 음률과 바느질, 의술과 붓질로 국가를 빛낸 이들

국왕을 정점으로 관리 한 명 한 명이 모여 이뤄낸 조직은
500년의 역사를 이끌어온 힘이었고
다른 역사와의 차별성을 이뤄낸 조선만의 능력이었다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모든 기술과 예술의 정점은 한양에서 이뤄졌고
관리들은 전문가적 자질뿐 아니라 덕망까지 겸비해야 했다


오늘날 대통령이 취임한 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정부기구 개편이다. 신新정권은 조직 개편을 통해 나라를 정비하겠다고 국민 앞에서 공포한다. 바로 새로운 집권자 혹은 내각의 첫걸음이다. 국민은 이로써 새로운 정권의 앞날을 가늠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태조대부터 순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정부기구는 큰 틀의 변화 없이 5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정부기구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조선의 정부기구를 통해 역사를 되짚어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한양의 탄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조선 역사를 핵심 관청을 통해 다뤄보겠다는 것이다. 한양의 거리는 의정부와 육조로 대표되는 주요 관청이 들어섬으로써 발달했다. 그 후 육조거리라 불리며 정치·행정의 심장이 되었다. 이때의 육조거리가 지금의 광화문 세종로로, 지금은 청와대를 비롯해 정부서울청사, 서울지방경찰청, 주한미국대사관 등 여러 중추 기관이 들어서 있다. 한양을 탄생시켰던 관청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면면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중심 정부기구였던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해 인사권을 행사했던 비변사나 제례를 담당했던 봉상시, 천문 관측을 주 업무로 삼았던 관상감 등 한양 관청의 역할과 역사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또 그곳에 소속되어 일했던 공무원들의 조직도 및 품계 등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다루기도 한다. 이로써 이제껏 무심히 바라봤던 서울이, 세종로가 마법처럼 새로운 의미를 띠고 다가올 것이다.

정치적 균형을 잡기 위해 줄타기를 하다, 의정부와 육조
조선시대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정치기구는 의정부와 육조였다. 의정부는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정승을 주축으로 하며, 육조는 이·호·예·병·형·공조의 여섯 가지 조직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 이 두 기관은 중국 당나라에서 먼저 발전했다.
당나라에서 시행된 3성 6부제는 조선의 것과 형태가 조금 달랐다. 3성에는 정책을 입안하는 중서성, 심의하는 문하성, 집행하는 상서성이 있었다. 6부는 문신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 재정을 맡는 호부, 제사·의례와 외교 및 교육을 처리하는 예부, 국방 및 무신 인사의 업무를 다스리는 병부, 사법을 관련된 업무를 부담하는 형부, 토목사업을 집행하는 공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고려는 건국 당시 정치제도를 정비하면서 이미 멸망했던 당나라를 모범으로 삼았다. 대신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고 고려 나름의 해석을 도입했다. 권력을 분산시켜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원나라의 등장으로 3성 6부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원나라는 고려의 정치제도가 중국의 정치제도와 비슷한 것을 트집 잡았고, 정치제도를 새로 개편하도록 했다.
고려 멸망 뒤 세워진 조선은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의정부와 육조였다. 3성이 폐지된 한편 육조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다. 하지만 의정부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시기에 따라 의정부와 육조의 위치가 달라졌다. 태종이 육조직계제를 만들어 왕권을 강화시켰던 것과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던 문종과 단종대에 의정부의 역할이 비대해졌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의정부와 육조는 마치 천칭과도 같았다. 그 사이를 잘 조율하는 역할은 왕에게 있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고, 결국 조선 후기에 비변사라는 새로운 권력기구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비변사의 등장으로 의정부·육조의 권력은 약해져갔다. 이는 왕권 역시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그 뒤 갑오개혁이 일어나 500년을 이어져 내려온 의정부와 육조 제도는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가장 가깝고도 먼 권력기구, 비변사
비변사는 막강한 인사권을 행사했던 기구다. 최종 인사권자는 물론 왕이었지만, 후보자를 뽑아 올릴 권한은 비변사에게 있었다. 이들은 국방과 재정, 또 암행어사처럼 특수한 임무를 띠는 주요 관직에 대한 추천권을 가졌다. 사실상 거의 모든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 외에도 비변사는 국정 문제 대부분을 처리했다. 지방에서 올린 지역 현안을 정리해 왕에게 보고하거나 재가를 받아 시행했다. 그런 까닭에 득세하는 세력은 저마다 비변사를 장악하려 애썼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했던 안동 김씨 역시 비변사를 오랫동안 장악했으며,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비변사부터 개편한 데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비변사는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정부기구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비변사를 궁궐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광해군 때까지는 주요 관청들이 배치되었던 육조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터를 남산으로 옮겼다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뒤에는 각각 동궐과 서궐에 가까운 위치에 청사를 두 곳 설치했다.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정무 과정이 지연되고 국가 기밀이 누출되는 일도 발생했다. 또 청사가 두 군데이다보니 빈 비변사 관청을 사대부들이 남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왕조 내내 비변사가 궐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유교를 깊이 숭상하던 왕조가 비변사라는 직접적인 권력기구를 들이는 데 아마 불편함을 느꼈을 듯하다.

계급사회 조선의 현실을 드러내다, 내의원·혜민서·활인서
조선에서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서 이렇게 총 네 군데였다. 여기서는 양반 이상의 신분을 담당했던 전의감을 제외하고 세 기관을 다룬다. 내의원은 최고 실력의 의원들로 구성돼 왕실 의료를 담당했으며, 혜민서는 도성 내 거주민을, 활인서는 도성 밖 거주민을 구료했다.
내의원 관사는 두 군데에 위치해 있었다. 창덕궁에 본청이 있었고, 경희궁에도 따로 두었다. 내의는 의과에 합격해 추천된 사람들로 총 12명으로 구성되었다. 1년에 두 번 인사고과를 거쳐 승진 여부를 판가름했다. 그 외에 침의라고 하여 침구를 놓는 의원을 따로 12명 선발했다. 의약동참이라는 이들도 12명 있었는데, 의술이 뛰어난 사대부나 일반인을 이 자리에 임명했다. 이들은 의과에 합격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했다. 어의는 내의 중에서 특출한 이들을 가려 뽑았다. 어의의 인원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혜민서는 고려시대에 혜민국을 그대로 이어받은 곳이다.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병원보다는 약국에 더 가까웠으며, 국가 재원으로 구매한 약재들을 도성 내 백성에게 팔았다. 그러나 이후 역할이 확대되어 약국의 기능뿐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 의원의 기능도 맡게 되었다. 의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다. 각 마을의 여종 가운데 영리한 자 70명을 뽑아 올리게 해서 그들에게 의학 지식을 가르쳤다.
활인서는 병든 사람을 모아두는 의료 기관이었으나 실상은 격리 시설에 가까웠다. 그런 까닭에 조선 후기에는 활인서活人署 대신 사인서死人署라 불리기도 했다. 종종 무당을 통한 주술 치료도 행해졌다. 유교 국가에서 무당은 용납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징수하는 세금이 활인서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기에 국가는 그들의 행위를 묵인해주었다. 활인서의 위치는 조선시대 내내 조금씩 변해왔다. 하지만 비변사가 궐내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활인서도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도성 내에 들였다가 병자가 모여들면 질병이 쉬이 퍼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숨겨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계급·지역 차별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활인서는 도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했고, 이에 따라 두 곳은 명백히 다른 차원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도성 안팎을 구분하는 또 다른 입구였던 것이다.

악공들의 피땀으로 예악정치를 이루다, 장악원
장악원은 조선의 궁중음악 전문 기관이다. 이곳에 소속된 이들은 왕실 의례에서 음악 연주를 담당했다. 특히나 높은 노동 강도에 시달린 것으로 유명했는데, 제례악만 해도 1년에 열 번을 연주해야 했다. 장악원을 관리하는 관직으로는 장악원 제조가 있었다. 이 자리에 음악 전문인을 임명하진 않았다. 음악적 자질은 보되 일반 문신에게 겸직케 했던 것이다. 음악 전문인이 오를 수 있는 최정점은 전악으로, 음악과 관련해 총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음악 감독 및 노래와 무용을 지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악기 구입, 악기 재료 선별, 연주 기법 전승, 연주자 배치 주관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시행되었다.
전악 밑에는 악기 연주를 담당하는 악생과 악공들이 있었다. 이들의 업무는 과중했고, 녹관으로 분류되지 않았기에 오늘날 최저임금에도 못 미칠 만큼 박봉에 시달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때를 틈타 많은 이들이 도망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런 연유로 악공과 악생 선발은 각 지역에 일정 수를 분배해 충당하도록 하는 비자발적인 방법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장악원에는 다른 일로 생계를 잇는 일이 잦은 악공과 악생을 위한 배려로 정기 연습일이 정해져 있었다. 매달 2와 6이 들어가는 날짜에 모이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장악원에서는 1년에 4번 정기 실기시험이 행해졌는데, 시험의 응시 자격은 3개월 내 30일 이상 출근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결국 이 날짜를 채우려면 정기 연습일 외에도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연말에도 연주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이때 실력이 좋지 않으면 징계를 받았다.
조선은 건국 이후 악과 예가 상보 관계를 이루는 예악정치를 지향했다. 악을 담당하는 장악원은 그 중요도가 높은 기관이었다. 하지만 정작 장악원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악공과 악생은 주체가 아닌 객체였다. 낮은 신분 탓에 명령에 따라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되고 만 것이다.

운현궁의 어원, 하늘로 미래를 점치다, 관상감
흥선대원군이 살았고 고종이 나고 자란 곳이며,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으로도 익숙한 운현궁. 이곳의 어원이 관상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 천문 관측 업무를 담당했던 기관의 이름은 서운관이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서운관은 폐지되고 관상감이라는 기관이 새로 생겼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운관이라는 이름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관상감 자리에는 서운관이 있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궁궐은 운현에 있던 궁이라는 뜻으로 운현궁이라 불렸다.
관상감은 과학기구였다. 천문학과 지리학, 명과학을 모두 담당했으며, 물시계를 관리·운영하고 시보를 전담하는 역할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천문학은 역법이었고 지리학은 풍수지리, 그리고 명과학은 길일을 점치는 점복활동을 뜻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비과학적일지 모르나 조선시대에는 모두 과학에 해당됐다. 관상감이 맡은 업무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먼저 역서 편찬 및 배포다. 역서는 곧 책력을 말한다. 관상감 재정의 대부분은 역서 편찬으로 확보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업무이자 관상감의 활동 중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역서는 절기의 시작이나 길일 등을 알려주는 각주를 달았으며, 가격을 미리 예상하고 찍어내 매해 발행 부수가 바뀌었다. 두 번째는 일월식의 예보 및 구식례 진행이었다. 해와 달이 사라지는 일월식은 조선시대에 흉조로 받아들여져 이를 예상하고 제를 올리는 일이 무엇보다 정확해야 했다. 마지막으로는 변칙적인 천문활동 관측이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조가 하루에 두 번 하늘을 보고 관측한 바를 기록했다. 언제나 하늘을 보고 있어야 했기에 업무 강도가 높았는데, 주로 하위직이 도맡아 했다.
당시 관상감에서 일하던 천문역산가 집단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어느 정도 틀을 갖췄다. 관원을 뽑는 잡과를 통해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 집단끼리 뭉치면서 천문학의 명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문인 집단인 만큼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높아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들은 서양의 시헌력 체제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역법의 자립을 일궈내게 되었다.

까다로운 만큼 앞서 있었다, 사역원
국가 무역에서의 통번역을 담당하는 사역관을 배출했던 사역원은 외국 문화를 제일 먼저 접하는 기관이었다.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곳이 고려시대에도 있었는데, 바로 통문관과 사역원이다. 육조거리에 위치한 사역원은 주로 역학 업무를 도맡았지만, 관리를 지방 관아로 파견하여 교육하는 일도 했다. 이런 교육은 보통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인접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국어 교육기관과 통·번역 기관의 두 가지 역할을 수행했던 만큼 사역원의 입학 절차는 복잡했다. 사역관이 되려는 이는 먼저 녹관청에 현직 역관의 추천서와 부·모·처의 4대조 신분을 조사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15명의 녹관은 이 서류들을 검토한 뒤 입학시험 여부를 비밀투표에 부쳤다. 15표 중에서 반대표가 3표 나오면 탈락했고, 3번 이상의 투표에서 탈락한 사람은 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입학시험을 볼 자격을 얻은 후 이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예비생도로 등록됐던 것이다. 그러나 예비생도가 된 뒤에도 수많은 시험을 거쳐야 했다. 매월 6번의 정규 시험이 있었으며, 3개월에 한 번씩 기말고사 격인 원시를 쳤다. 최종적으로는 과거제도인 역과를 통과해야 정식 역관이 될 수 있었다. 비로소 역관이 되었다 해도 고강이나 취재 같은 내부의 인사고과제도를 통과하려면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다. 이에 사역원에서는 외국어 사용이 강제된 우어청이란 곳을 두어 효과적인 교육을 꾀했다. 현대의 외국어 마을이나 회화교실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전용 외국어로 얘기하지 않으면 매를 맞거나 심한 경우 파직을 당했다.
엘리트 양성 기관인 만큼 사역원 내부의 규범은 까다로웠다. 그러나 사역원을 통해 역관이 된 이들은 선진 문물을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였고, 그에 대한 거부감도 적었다. 역관들은 조선 전기에는 주로 실질적인 기술 발전에 기여했고 조선 후기엔 중국 등을 통해 서양의 문화를 들여옴으로써 사회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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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지하공간

도서정보 : 김재성 | 2016-05-1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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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공간은 어떻게 문명을 떠받쳤는가
공학적 경험과 지식이 인문적 질문으로 터져나오다

“지하공간은 문명의 역사에 발맞추어 변화되어왔다. 오래전 인간은 천연동굴이나 조악한 손도구로 만든 지하공간에 기거했지만 땅을 파는 지혜가 고도화된 오늘날 지하공간은 인간의 생활공간으로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지하공간에 대한 이해나 조사는 물론 쓸 만한 연구 자료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아직 지하공간을 지칭하는 통일된 용어조차 정립되지 않았다.” _책머리에

“어두운 동굴에서는 상반된 두 감정이 교차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는 안도감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이다. 현대의 지하공간을 기획할 때 이 두 심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하공간은 안온함이라는 이점과 더불어 폐쇄의 불안감이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즉, 지상의 개방성을 확보하면서 지하공간의 정적인 요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_책머리에


지하공간에 대한 최초의 지적 오디세이

지구를 보면 육지와 바다가 어우러진 평면이다. 그 내부엔 멘틀과 용암이 꿈틀거리고 있다. 시야를 좁혀 가까이 관찰하면 맨틀과 지표면 사이에 인간이 뚫어놓은 지하공간이 존재한다. 아주 가까이 가보면 거기엔 마치 개미들처럼 열을 지어 인간들이 오르내리며 지상과 지하를 이어가며 살아간다. 인류의 문명은 지상의 찬란함과 우주로의 뻗어나감뿐만 아니라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의 아래를 파고들어가서 무언가를 저장하고, 도피로를 확보하며, 심지어는 그곳에 지상과 똑같은 공간을 조성해온 역사적 과정이기도 했다. 처음엔 보조적이거나 약소해보였던 이 공간은 고고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가 태초에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동굴’이었고, 그래서 기원으로서 작용하는 측면이 있고, 오늘날의 측면에서는 부족한 공간을 해결해줄 획기적 개발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하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 미흡하다. 지하공간에 대한 이해나 조사는 물론 쓸 만한 연구 자료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아직 지하공간을 지칭하는 통일된 용어조차 정립되지 않았다. 그런 시점에서 한국인 토목전문가가 깊이 있는 인문적 탐구를 바탕으로 『문명과 지하공간: 인간은 어떻게 공간과 어둠을 확장해왔는가』라는 저술을 펴냈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아카데미의 어떤 학술적인 흐름에 따라 나온 책도 아니고, 저자가 수십 년의 현장경험에서 하나하나 쌓아올린 질문들이 “왜 우리는 지하공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커녕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수준의 질문도 던지지 못하는가”라는 일성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비교적 많은 자료로 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지하공간 오디세이’에 적합하다. 즉 개론서이면서도 종횡무진 지하의 골목들을 뛰어다닌다. 크게 4부로 구성되었고, 각 부는 ‘지하공간의 개념과 역사, 인간과의 관계’라는 원론적인 부분부터 시작하여 생활문화공간으로서의 쉼, 소통으로서의 길, 미래의 쓰임 등 용도와 기능에 따라 살펴봄으로써 나름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항대립적 논쟁구도에서 벗어나, 지하공간의 확장이 오히려 문명의 독을 빼내는 데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심도 있는 토론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하긴 이 글쓰기 또한 지하공간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변변한 도구 하나 만들 수 없었던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단단한 바위를 뚫었을까, 캄캄한 지하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고 높낮이를 맞추어 물길을 만들었을까, 저 좁은 지하공간에서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보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까…… 터널을 설계하고 짓는 일을 해오면서 생겨난 궁금증은 나를 세상 밖으로 돌아다니게 했고, 글을 쓰게 했다. _ 프롤로그

지상-지하의 순환적 세계는 어떻게 붕괴되었는가

고대 신화들에는 계절이 순환하듯이 인간의 삶도 지상과 지하를 순환한다는 인식이 공유되어 있다. 고대인에게 죽음이란 지하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원시 종교에서는 지상의 삶 이후에 지하의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환적 세계를 관장하는 자는 바로 여신이었다. 여신의 몸은 곡물과 과일을 생산하는 대지이며, 여신의 자궁은 생명의 씨앗을 보존하고 움트게 하는 지하세계인 것이다. 이때 동굴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문’의 상징이었다. 즉 잉태된 생명이 태어나는 산도産道인 동시에 생명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관문으로서, 분리된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통로인 셈이다.
미궁迷宮은 자연 동굴에서 나온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지하세계다. 그러나 그곳은 추위와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는 공간이 아니다. 입구는 있으나 출구는 없으며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 없는 공간, 어둡고 음침하며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공간일 뿐이다. 도시가 처음 형성되고 왕궁과 신전이 만들어지던 고대 문명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힘에 걸맞은 거대한 미궁을 짓기 시작했다. 플리니우스Plinius가 그의 저서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서 전하는 고대 문명의 미궁을 보면 우선 규모의 거대함에 놀라게 되며 설계의 정밀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4대 미궁은 이집트의 아메넴헤트 3세14가 만든 장제신전葬祭神殿, Mortuary temple,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만들었다는 크레타 섬의 라비린토스Labyrinthos, 그리스 동쪽 화산섬에 있는 림노스Limnos 그리고 이탈리아의 클루시움Clusium이다.
인간은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이 순환의 법칙을 온몸으로 체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자연의 순환을 거부해왔다. 힘에 기반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세 종교21가 수천 년간 직선적인 세계관을 형성해오는 동안 인간은 자연에 대한 겸손을 잃었다. 순리, 부드러움, 여성성, 동굴, 지하공간, 겨울, 죽음, 낮은 것을 멸시했다. 동물과 식물을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 격하시켰으며 자연세계를 함부로 짓밟았다. 그렇게 자연의 한 축이 떨어져나가는 동안 순환의 고리는 낱낱이 분해되었다.


지하공간의 간략한 역사

자연적인 동굴만 이용하던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거공간을 얻기 위해서이거나 광물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현재 인간의 채굴 흔적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동굴은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 있는 라이언 케이브lion cave다. 인간이 한층 더 진보된 동굴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부족의 수가 늘어나고 타 부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피신처를 찾아 나서면서부터였다. 예컨대 중세 시대 로마의 종교 탄압을 피해 기독교인들이 숨어 지내던 카파도키아의 데린쿠유Derinkuyu 지하 유적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정교하게 다듬고 확장하기는 했지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신석기시대였다. 인간은 동굴에서 주거와 광물 채취라는 용도 외에 새로운 쓰임을 발견해냈다.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수로 또는 지하 통로를 뚫기 시작한 것이다. 약 7000년 전 고대 도시가 형성될 무렵 신전이나 피라미드 등의 석물을 이용한 대규모 시설이 축조되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적들을 살펴보면 당시 지하공간 축조 기술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망치나 정 외에 별다른 도구가 없던 시절에 터널을 뚫는다는 건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대규모 노예노동이 가능했던 로마시대에는 비교적 긴 터널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중세에는 공학적으로 의미 있는 터널이 거의 축조되지 못했다.
중세에는 군사적 필요에 의해 광물질을 채굴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고 이슬람 문명권 또는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금속이나 소금 등이 매장된 광산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할 정도였다. 당시의 공학 기술이 집대성된 『모탈리카De Re Motallica』를 보면 터널 기술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듯하다.
17세기 들어 유럽에 운하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터널 기술은 한층 발전되었다. 르네상스 시기 문화 부흥의 물결 속에서 전체적으로 공학 기술도 진보한 것이다. 1679년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에 운하를 건설할 때 처음으로 흑색 화약을 바위틈에 넣고 터널 입구를 뚫었다. 사람이 끌과 망치로 직접 바위를 쪼았던 당시에 이 방식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후 바위에 틈을 내는 작업은 수동식 천공기라는 장비로 대체되었고 발파의 효율도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연소 온도가 낮아 안전성이 떨어지는 화약을 다루거나 도화선을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전하여 안전하고 정교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다양한 관점으로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 지하공간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현대’란 1960년대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NATM 공법과 대형 굴착 장비인 쉴드 TBM 그리고 정밀한 발파기법이 적용된 굴착공법의 발달과 전산기술을 도입한 강력한 장비가 터널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의 개발은 인간이 더 이상 지하공간의 규모나 암반의 강도, 터널 연장 등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를 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히 암반 굴착 기술의 발전만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조명·환기·에너지 등 산업 전반의 변화와 재료·기계·금속·건축 등 공학 제 분야의 발달에 따른 시너지 효과까지 검토된 것이다.


지하를 향한 인간의 꿈은 어떻게 미래를 만들 것인가

지하공간의 역사에서 터널의 발전사는 의미 있는 지표다. 그러나 더 괄목할 점은 지하공간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다. 이전까지 터널은 교통이나 수로 건설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용도에 불과했으나 현대에는 정적인 안정감을 주는 생활공간으로 그 개념이 확장된 것이다. 바위를 파내는 일의 기술적인 어려움이 해소된 뒤에도 한동안 지하공간은 소음이 큰 발전소나 기계 시설을 배치하는 장소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공연장, 경기장, 도서관, 연구소, 시험실 등의 다양한 문화시설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기술 공학적 발달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 예를 들어 도시의 인구 집중에 따른 가용 토지 부족, 대기오염이나 자외선·방사능·전자파·지구온난화의 문제 등으로 인해 지하공간의 장점이 부각된 것이다.
지상과 지하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되는 흐름도 있다. 프랑스 파리의 신도시 구축사업인 레 알Les Halles 프로젝트는 도시 기반시설과 생활공간을 지하와 지상에 분산 배치함으로써 일상생활이 자연스럽게 연계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미국 로커펠러 센터의 로워 프라자Lower plaza 지하가로망이나 홍콩 큐어리 만의 스펀SPUN 계획 역시 지하와 지상을 연계한 도시설계다. 난항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용산과 한강 주변을 통합 개발하는 GEO 2020 프로젝트를 보면 이제 지표면을 기준으로 한 지상과 지하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미래의 지하공간은 어떻게 변모할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조지 오웰의 미래 소설 『1984』나 여러 SF 영화를 보면 미래의 지하공간이 지상에서 추방된 자들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정은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지하가 사자死者의 공간이나 도피처로 인식되어온 탓이다. 현대에 들어 지하공간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고정관념은 단번에 바뀌지 않는다. 지하공간을 계획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관심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지하공간의 조명·환기·동선 계획을 개발하는 핵심은 ‘지상과 다르지 않은 지하’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지하공간은 지상에 대한 추구보다는 지하공간 자체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생활환경, 교통, 물류 시스템을 모두 지하공간에 갖추고 있는 파리의 라데팡스La Defense 신도시를 보면 앞으로 지하공간이 어떤 기능을 하게 될지 유추해볼 수 있다. 과거 지하공간 활용이 단일 건축물이나 용도 위주였다면 미래에는 교통, 물류, 녹지 생활공간을 비롯해 도시 기반시설 전반에 대한 폭넓은 관점에서 계획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이미 서유럽을 중심으로 선진국에서 시작된 이러한 경향은 도시화가 새롭게 진행되는 남미나 아시아 지역에서 더욱 활발히 추진될 전망이다. 로마나 파리, 런던과 같은 역사 도시가 지닌 장해물들이 후발 국가에는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미래도시 설계의 관점에서 이들 국가는 ‘빈 서판’이다. 일본의 도쿄 GEO 21 프로젝트나 노르웨이의 지하공간 중심의 복합도시 계획, 국내의 용산 GEO 2020 계획, 남산 지오토피아 구상은 이러한 추세를 살펴볼 수 있는 예다.
한국은 국토 면적이 좁다는 것도 이점이 될뿐더러 세계적인 수준의 암반 굴착기술과 축적된 신도시 건설의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 한반도의 암반이 대부분 단단한 화강암층이라는 지형 조건 또한 유리하다. 이러한 암반 조건은 터널이나 지하공간을 구축하기에 불리한 장애물이었으나 기술적 문제가 거의 해결된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대규모의 지하공간을 구축하는 데 안전한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도심에 바위산이 위치하고 외곽을 둘러싼 8개의 산에 싸여 있는 서울의 경우 그 지형을 활용한 지하공간, 즉 지면 아래의 땅을 파지 않고도 평지 수준의 새로운 공간 창출이 가능하다. 예컨대 중앙정부의 R&D계획에 따라 구성된 ‘지하대공간 연구단’에서는 서울시 서초동에 있는 우면산 지하에 세계 최대 문화공연장을 구축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구체적인 설계를 시행하기도 했다. 비록 가상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미래의 지하공간 구축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과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구의 도시 집중이 심한 국가다. 특히 국토 면적의 0.6퍼센트에 불과한 서울에 20퍼센트가 넘는 인구가 거주하며, 수도권 인구까지 포함한다면 과밀 정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도시 기반시설의 지하화는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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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는 그날의 역사 8월 31일

도서정보 : 이종하 | 2016-04-2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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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짜의 역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인류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역사 속 8월의 오늘, 우리나라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군대를 잃는 것은 나라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순종의 군대 해산 조칙이 낭독된 동대문 훈련원에 모인 대한제국의 군인들을 계급장이 뜯겨나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군대 해산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군인들이 한성에서 봉기하여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지만 하루 만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순종의 군대 해산 조칙은 대한제국 황실의 뜻이 아니었다. 군대 해산의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 신협약 당시 교환한 비밀 각서에 의한 것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형제간의 도리마저 깨뜨리고 만다. 조선 태조 때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제8왕자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일을 지지하였다.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에게 군주가 나라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방원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정도전에게 앙심을 품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은 1398년 8월 26일에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누명을 씌워 정도전은 물론 그의 지지 세력까지 모두 제거하였다. 게다가 세자인 이방석과 그 형인 이방번까지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주요 인물들의 삶을 비롯하여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전 영역에서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들을 한데서 볼 수 있는 책이다. 매일매일 한국사의 흐름을 뒤바꾼 역사적 사실들을 기술하여 특정 시대와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건이 역사가 된다
그날의 역사를 그날그날 읽어 보며 교양을 쌓는 책

역사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할까?
왜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일찍이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은 인류사 전체를 아우르는 커다란 카테고리를 설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개념이다. 그러나 미시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집트에서 태양력과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건축술이 발달한 것은 나일 강의 범람에 따른 인간의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거나 혹은 앞서 나가는 예술사조의 흐름은 토인비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역사의 사전적 의미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 ‘자연 현상이 변하여 온 자취’이다. 즉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실, 혹은 그 흐름을 의미한다. 역사 자체는 관념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가 현대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은 기록을 통해서이다. 기록과 흔적으로 존재하는 역사는 단 한순간도 현재와 단절된 적이 없으며, 눈앞에 펼쳐진 과거의 기록은 현재를 해석하는 도구이자 미래를 미리 보여 주는 창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학교에서 반드시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이다.

역사를 바꾼 사건들, 유명 인물의 출생과 사망,
인류의 문화유산과 정신세계에 대한 방대한 기록

8월의 모든 역사 - 한국사는 매일매일 일어난 사건이 역사가 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8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중요 사건들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서술 분량을 달리했으며, 한국사적으로 중요한 모든 사건들을 최대한 담으려 노력했다. 단순한 사실(fact)뿐만 아니라 사건의 원 인과 과정 및 영향에 대한 모든 과정들을 흥미진진하게 전하고 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날짜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음력으로 기록된 사건이나 고대의 기록은 모두 현재 사용하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환산하였다. 고대나 중세의 사건 가운데 날짜가 불명확한 것은 학계 의 정설과 다수설에 따라 기술하였다.
한 시대를 이끌어 갔던 유명 인물의 출생과 사망, 우리의 문화유산, 시대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 등 달력에는 기록되지 않은 지난 역사 속 8월의 오늘이 이 책 한 권에 펼쳐진다.


구매가격 : 300 원

3·1 운동사

도서정보 : 삼일정신선양회 | 2016-04-2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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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사』는 우리 민족정신의 역사적 발로로 시작된 조선의 일대 독립운동으로 운동 시작에서부터 활동했던 모든 독립선언서 기초와 동지들의 활약상, 학생 등 대표 민족지도자들이 이에 참여하기까지 실제적이고 상세한 배경과 내용, 과정 등을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이 결국 체포되어 법정에서 자기주장을 관철하기까지 세밀한 재판과정과 판결내용을 담고 있으며, 우리 자주성과 국권회복을 표명하고, 민족의 생존권을 위해 조선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삼천리 방방곡곡에 태극기를 휘날리고 외쳤던 당시 실상을 다시금 고무시켜준다.

구매가격 : 8,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