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처스 1
도서정보 : 곽재식, 정은경 | 2022-08-18 | PDF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괴물 수집가 곽재식의 K-크리처 판타지
기상천외한 토종 괴물들을 소환하다!
◎ 도서 소개
드넓은 상상의 바다,
자유롭게 유영하는 괴물 이야기
왜 우리에겐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를 통해 친숙하게 접해 온 고블린이나 트롤, 오크 같은 괴물이 없을까? 『크리처스』는 오랫동안 우리 전통 설화와 민담, 문헌 기록 속 토종 괴물들을 집요하게 채집해 온 괴물 박사(?) 곽재식의 물음표에서 출발한다. 위 질문에 곽재식은 한 번도 제대로 쓰여진 적 없었기 때문이라는 듯, 전에 본 적 없는 신비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토종 괴물들을 우리 앞에 소환시킨다. 곽재식 작가의 재기발랄한 입담이 다수의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써 온 정은경 작가와 안병현 그림작가를 만나 한국형 판타지 시리즈물, 『크리처스』 1권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남을 웃기는 덕담꾼으로 성공하고 싶은 철없는 소년 소소생은 어느 날 덕담꾼으로 크게 성공시켜주겠다는 수상한 한 남자의 말을 믿고 값진 보물을 덜컥 내어 준다. 어린 소년을 상대로 사기를 친 건 희대의 사기꾼이자, 절세 미남 해적인 철불가! 화려한 사기 전과 이력을 가진 철불가는 이미 다른 해적 무리에게도 쫓기는 신세였고, 철불가를 쫓던 소소생은 졸지에 철불가와 한패로 오인받아 무시무시한 해적 무리의 1순위 제거 대상이 되는데…. 대체 어쩌자고 이런 원수 같은 인간과 엮이게 된 걸까? 신세를 한탄할 여유도 없이, 해적 무리를 피해 달아난 바다에는 설상가상! 거센 폭풍우와 번개를 흩뿌리는 백룡, 바다에 빠진 사람을 뿔에 꽂아서 잡아먹는 적각어, 고개를 젖혀도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키를 가진 장인 등 기기괴괴한 괴물까지 공격한다. 이들은 과연 무사히 집으로, 아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크리처스』는 마치 영상을 보듯 시청각적 경험을 극대화하는 소설이다. 쉴 틈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들과 비장한 장면에서 돌연 팽팽하던 긴장감을 유머로 반전시키는 재치, 역사적 고증과 상상의 힘을 버무려 환상적인 세계관을 재현한 그림은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넘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10대 청소년은 물론, 새로운 한국형 크리처물을 고대해 온 팬이라면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 선택일 것이다.
◎ 출판사 서평
괴물 박사 곽재식,
가장 신선하고도 독창적인 소재를 발굴하다!
〈부산행〉, 〈킹덤〉, 〈스위트홈〉, 〈지금 우리 학교는〉 등 한국에서 제작된 크리처물에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캐릭터와 배경이 한국인과 한국으로 설정됐을 뿐, 우리 고유의 크리처(Creature: 기묘한 생물)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왜 아무도 한국형 크리처에 주목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서양의 설화와 민담에 기반한 괴물들의 이름은 줄줄이 읊으면서도, 토종 크리처 이름 하나를 대 보라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힐까? 한국에도 괴물이 있었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혀졌을 뿐. 그리고 여기,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토종 괴물을 수집하는 일을 고집스럽게 해 온 이가 있다.
KAIST 출신의 공학 박사이면서, 과학과 역사, 판타지 등 다방면의 주제를 넘나드는 SF 소설가로 알려진 곽재식 작가는 눈길을 끄는 이력에 더해 ‘괴물 수집가’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그는 실제 기록 문헌(『고려사』, 『동국여지승람』, 『삼국유사』, 『성호사설』)을 토대로, 『한국 괴물 백과』와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등의 저서를 통해 한국 괴물 정보를 대중에 널리 알려왔다. 이처럼 작가가 집대성해 온 괴물 자료들은 『크리처스』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창조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포악하면서도 왠지 인간적이고, 생경하면서도 어딘가 사랑스러운 괴물들을 우리와 마주하게 한다.
해학과 풍자,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선사하다!
『크리처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는 장보고 사후, 바다의 새로운 주인을 자처하는 해적들이다. 잔인무도하기로 소문난 여걸 저승사자 흑삼치, 전갈의 독보다 강력한 독기를 품은 싸움꾼 바다전갈, 약탈한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는 의적 고래눈, 이렇게 세 세력은 삼면의 바다를 둘러싼 쟁탈전을 벌인다. 어째서 해적인가? 곽재식 작가는 『삼국사기』 속 실제 존재했던 신라구(신라 해적)에 대한 고증을 토대로, 부패했던 신라 왕실과 고관대작들의 횡포를 가감없이 그려낸다. 한 나라의 국운이 쇠하는 데 있어 힘없고 나약한 백성들의 책임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언컨대, 없다. 작가는 그런 신라 왕실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해적들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할 짜릿하고도 통쾌한 반전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또한, 덕담꾼 소소생이 펼치는 서툴지만 뼈 있는 덕담 한마디 한마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해 준다.
곽재식의 상상은 4D 영상이 된다!
텍스트의 시대는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 바야흐로 영상 전성시대라고 하지만,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둘 다 가진 책이 있다! 『크리처스』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공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판타지물이다. 다수의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영상으로 구현되는 글을 써온 정은경 작가는 매 장면마다 시각적인 묘사와 청각적인 효과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며 사각 영상 프레임의 한계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상상의 끝을 보여준다. 여기 더해 안병현 그림작가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토종 괴물의 역동적인 모습을 재현하는가 하면, 상상 속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고 탐험하는 주인공들을 그려낸다.
개성 넘치는 해적들의 짜릿한 액션 활극, 눈을 뗄 수 없다!
해적들의 스릴 넘치는 액션 활극도 『크리처스』를 즐기는 주요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 개성 넘치는 해적들은 고문헌 속 무기들을 재해석한 ‘솔개처럼 조각된 몸통에 화살을 연발로 쏠 수 있는 솔개날’, ‘검집이 다섯 개 달린 오합도’, ‘상 위에 놓고 쏘아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감을 안기는 상노’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눈을 뗄 수 없는 스케일을 선보인다. 그리고 텍스트 중간에 삽입된 그래픽 노블 감성의 액션 만화는 이야기의 생동감과 몰입감을 높인다.
◎ 추천사
이토록 인간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해적 무리들과 전에 본 적 없던 비주얼을 가진 괴물의 조합! 마치 빨리감기를 하고 싶을 정도로 뒷장이 궁금해지는 전개! 텍스트가 불어넣는 상상의 힘은 영상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에 매력적인 판타지 세계관을 영상에 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연상호 (〈부산행〉, 〈반도〉,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연출 및 감독)
서양 기원의 신화보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 문헌과 설화에 주목해야 하는 K-문화 전성시대! 여기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의 토종 괴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괴물 수집가 곽재식이 재해석한 역사와 상상력의 조합을 즐겨 보자.
큰★별쌤 최태성 (별별 한국사 연구소장)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세계화 바람의 구호였던 이 말은 적어도 세계 문화 콘텐츠 시장에서 새삼스러울 것 없는 팩트임이 증명되고 있다. 괴물 수집가 곽재식의 손끝에서 탄생한 우리 고문헌 속의 신박한 토종 괴물 판타지라니!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세계적인 스토리가 있을까.
한정은 (콘텐츠웨이브(wavve) 주식회사 마케팅그룹장)
◎ 책 속에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나와 철불가는 목에 올가미를 건 채 해적선 난간에 위태로이 섰다. 양손은 등 뒤로 포박당했고 두 발도 밧줄로 묶인 상태였다. 발밑을 보니 시꺼먼 바다에서 창처럼 뾰족하고 긴 뿔을 가진 괴물 물고기들이 우리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은 피에 굶주린 상어처럼 우리를 찔러 죽이려고 펄떡펄떡 바다에서 뛰어올랐다.
밧줄을 끊으면 괴어의 뿔에 찔려 죽고, 밧줄을 당기면 목이 졸려 죽을 상황. 어쩌다 철불가와 엮여 죽게 되었단 말인가. 이 마당에도 저자는 휘파람이나 불며 별 구경을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열일곱일 뿐인 내가!
평범하고 나름 선량하게 살아왔던 내가!
덕담꾼으로 인기를 얻고 싶었을 뿐인 내가!
어찌하여 죽게 되었는지 그 억울하고 구슬픈 덕담(이야기)을 그대들에게 들려드리겠다.
-p.4~5
먹구름과 비바람 사이로 검은 털이 수북한 무언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두운 데다 비바람이 거세 눈을 뜨기 어려워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다. 쿵 쿵 그것이 걸음을 뗄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웅덩이의 물도 요동쳤다.
“괴… 괴물이다!”
무역상이 덜덜 떨며 말했다.
“……내 어디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동쪽의 어느 섬에 거인이 사는 나라가 있다더군.”
검은 털이 수북한 괴물은 산처럼 두터운 손바닥으로 해적 셋을 개미처럼 눌러 죽이고, 창처럼 긴 손톱으로 해적 여섯을 꼬챙이처럼 꿰어 죽였다.
“놈은 손톱이 길고. 이빨은 톱니처럼 날카로우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했소.”
먹잇감을 놓친 괴물의 눈알이 철불가와 무역상 쪽을 향했다.
“놈의 이름은… 장인…….”
무역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괴물의 손이 무역상을 낚아챘다.
-p.27~29
“이것들은 적각어다. 적색 뿔을 가진 물고기란 뜻이지. 흰색 뿔인데 왜 적색 뿔이라고 말하는지 아느냐? 저놈들의 뿔에 찔리면 꼬챙이처럼 꿰여서 산 채로 죽을 때까지 끌려다녀야 하거든. 하얀 뿔이 피로 물들어 적색이 된다고 해서 적각어라 한다. 뿔에 꽂혀 장기를 관통당한 채 이놈 저놈에게 뜯어 먹힌다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라나? 하하하.”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웃는 흑삼치는 별명처럼 정말 저승사자 같았다. 소소생은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하마터면 난간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 모습을 보고 흑삼치의 부하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눈이 어둠에 익으니 정말로 적각어의 뿔이 피로 물들어 붉은색인 것이 보였다. 덩치가 큰 놈일수록 뿔에 사람의 잘린 팔다리가 산적 꼬치처럼 많이 꽂혀 있었다. 적각어가 펄떡거릴 때마다 잘린 팔다리도 꿈틀꿈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놈들을 쉽게 죽일 수는 없지. 밤새 벌벌 떨며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p.82
암초 사이의 좁은 길로 나룻배가 들어서자마자 휘이잉 돌풍이 불었다. 눈을 뜨기 힘들 만큼 바람이 세졌다.
고래눈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난데없는 바람에 흑삼치도 눈을 뜨기 힘들었다. 바다전갈은 팔을 들어 얼굴로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았다.
그 순간, 하늘과 바다 사이에 하얗고 기다란 것이 나타났다.
“……백룡?”
소소생은 눈앞에 나타난 것을 믿기 힘들어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분명히 백룡이었다. 온몸이 하얀 용이 용오름을 일으키며 바다에서 동이 터 오는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장 낭자다! 장 낭자가 나타났다!”
해적들이 외쳤다. 해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배를 반대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해적들이 도망치고 있어요!”
해적들이 뱃머리를 돌리는 것을 보고 소소생이 외쳤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백룡이 몸을 틀어 철불가와 소소생이 탄 나룻배로 빠르게 다가왔다.
“으아악!”
센 바람과 높은 파도에 소소생은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p.115~118
후드득 후드득. 찐득한 빗방울이 떨어졌다.
소소생은 얼굴로 떨어진 비를 손으로 닦아냈다. 손바닥이 시뻘건 색으로 물들었고, 코를 찌르는 지독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피?”
시꺼먼 털로 뒤덮인 거대한 기둥 두 개가 나타났다. 언뜻 스무 척은 넘어 보이는 커다란 괴물이 두 발로 서서 소소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뻘건 비는 까마득하게 높은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누구를 잡아먹었는지 이빨에서 흘러내린 피가 비처럼 떨어졌다. 소소생이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장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철불가는 물속에서 의지하고 있던 노를 장인에게 집어 던지고는 혼자 달아나기 시작했다. 찰방찰방 물을 튀기며 도망치려 했지만 커다란 손이 철불가를 잡아챘다.
“으아아아악!”
철불가를 낚아챈 손에는 손톱 끝마다 손가락 인형처럼 사람 머리통 몇 개가 대롱대롱 꽂혀 있었다.
-p.132~134
구매가격 : 10,400 원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도서정보 : 듀나 | 2022-08-1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다른 세계’에서 만나는 우리의 ‘미친 현실’
한국 장르문학의 거성, 듀나 소설집
한국 장르문학의 독보적인 스토리텔러
듀나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세계
한국 장르소설의 자존심, 독보적인 스토리텔러 듀나의 소설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가 10주년을 맞아 새롭게 출간되었다. 듀나의 초기 단편부터 중편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 열세 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수록작 「안개 바다」는 개정판이 동시 출간되는 『제저벨』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으로, ‘링커 우주’의 시발점이 되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그 외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등 ‘장르소설’의 스펙트럼에 속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입담을 통해 펼쳐진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한 상상력의 소유자 듀나.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떤 과정과 방식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통해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곳에 우리와 닮은 누군가가 있다
‘다른 세계’에 투영된 우리의 ‘미친 현실’
“책을 펼치는 순간, 당신이 어디에 있든 바로 거기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틈새가 열리고, 그렇게 휩쓸려 들어간 다른 세계에서 뜻밖에도 당신은 여러 겹으로 기묘하게 겹쳐 보이는 낯익은 세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듀나가 열어 보이는 이질적이고 환상적인 ‘다른 세계’에서 우리는 항상 현실의 문제들과 마주치게 된다. 인터넷 채팅을 소재로 한 「A, B, C, D, E & F」에서 A와 B가 만든 가상 인물들은 점차 막강한 실제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끼리 커플이 되고 마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이른다. 그 속에서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게 된 상황과 무한한 소통을 기대하지만 쉽게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사이버 공간의 실상이 떠오르게 한다. 「죽음과 세금」에 축조된 사회에서도 지구의 모든 인구가 ‘불사신’이 된 상황에서 공정한 살인 임무를 수행하는 불사자들의 비밀 집단이 있다는 설정은 장르적인 상상력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지금 당면한 노인인구 증가에 따른 정부의 부담과 과중한 세금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의 배경이 되는 외계 행성도 마찬가지이다. 군대 가기 싫어서 달아난 청수, 외계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간 선교사역단, 탈북인에 대한 적개심 등 우리 사회의 일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장르소설이 어떤 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그려내는지 인상적으로 예시하는 작품이다.
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시스템의 세계
가장 강력한 생태계 시스템, 링커 바이러스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시스템’ 이미지다. 「호텔」, 「소유권」 등에서 보이는 막강한 시스템은 매트릭스적 신경망과 편집증적 감시체계를 넘어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작품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바다」에 등장하는 링커들의 광대하고 강력한 네트워크 역시 지배적인 시스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브로콜리 행성에서의 끔찍한 혈투가 끝난 ‘다음 세대’에서는 지난 시대의 역겨운 기억들은 모두 지워진다. 지금의 현실을 옥죄는 강박적인 시스템과 문제 상황들도 ‘링커 바이러스’가 구축한 거대한 생태계의 흐름에서 바라본다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 이미지들과 동시에 가장 전복적인 이미지를 함께 빚어내는 상상력. 그런 작가의 상상력을 빌어 전혀 다른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재미. 그것이 듀나의 다양한 작품들이 모두 강렬한 흡인력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수록된 개성 넘치는 초기작들은 그러한 듀나의 강점이 두드러지는 작품들로, ‘듀나 월드’에 입문하는 독자는 물론 오랜 독자에게도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구매가격 : 9,800 원
모순
도서정보 : 황범정 | 2022-08-1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는 구현할 수조차 없는, 그 위에 더함이 없는 최상이요, 최고요, 으뜸이다. 이 힘은 수없이 많은 세계를 주관하고, 육안에는 보이지도 않는 티끌도 빠뜨림 없이 만물을 만들었고, 너무나 밝고 신령스러워서 감히 명하여 헤아릴 수조차 없다. 소리와 기로 원해도 보임이 없으니 내적인 성품으로 머리끝에 내리심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구매가격 : 9,100 원
수면 아래
도서정보 : 이주란 | 2022-08-1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한국문학의 독보적 감수성
젊은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수상 작가 이주란 첫 장편소설
극적인 장면 없이 고루 팽팽하고, 대단한 플롯 없이 완벽하며,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
_박연준(시인)
일상적 풍경에서 강렬한 감정의 파동을 만들어내는 독보적인 감수성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주란 소설가가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한 첫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부터 젊은작가상 수상작(「넌 쉽게 말했지만」), 김유정문학상 후보작(「한 사람을 위한 마음」) 등이 수록된 두번째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까지, 조용한 위트와 무심한 온기, 말과 말 사이의 여백으로 정서를 전달하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이주란 작가가 쓴 첫 장편소설이다.
2021년 <주간 문학동네>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 먼저 선보인 뒤 세심한 퇴고 과정을 거쳐 출간된 『수면 아래』는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함께해오다 결혼한 두 사람이 아이를 잃는 커다란 상실을 겪은 뒤 다시 삶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두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이혼을 택했지만, 완전히 이별하지는 못한 채 가까운 곳에서 일상을 나누며 살아간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을 공유한 두 사람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며 일상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잔잔하지만 널리 퍼지는 수중의 파동처럼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깊은 상실을 공유하고 헤어짐을 택한 두 사람
삶의 파동에 흔들리며 조금씩 나아가는 그들의 이야기
나는 이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우경과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우리는 열일곱 살에 처음 만났다. 삶의 반 이상을 함께해왔고 중간에 한 번 결혼을 했다가 헤어진 적이 있다. 결혼식을 하던 날에는 평소 말수 적은 나의 어머니와 우경의 동생 우재까지, 넷이서 차례로 울었던 것 같다.
_본문 중에서
해인은 매일 아침 마을버스를 타고 ‘해동중고’라는 이름의 한 중고물품점으로 출근한다. 그녀의 일상은 새로 들어온 중고 물품을 닦아서 진열하고, 종종 물건을 팔러 가게에 들르는 장미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가게 근처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등의 작은 일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녀는 가끔 우경을 만난다. 우경은 해인과 같이 동네를 걷기도 하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해인의 집에 와서 함께 카레를 먹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나누기도 한다. “한 번 결혼을 했다가 헤어진 적이 있”는 그들은 일상에서 때때로 즐거운 순간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 즐거움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기억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힌다.
우경이 더없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천천히 떠오르곤 한다. 우리는 누구도 그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적이 없다.
_본문 중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하지 않는 ‘그날 일’. 해인의 서술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에서는 (아마 차마 말할 수 없기에) 분명히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일이 두 사람이 베트남에서 아이를 잃고 돌아온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인과 우경이 말없이 공유하고 있던 커다란 상실의 아픔은 잔잔하게 이어지는 듯 보였던 풍경에 전혀 다른 색채를 덧입힌다.
그리고 어느 날 우경은 해인에게 상사로부터 베트남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아픔을 딛고 나아가고자 하는 우경, 괜찮느냐는 물음에 여전히 괜찮다고 대답할 수 없는 해인. 우경은 해인에게 그곳에 함께 가자고 말하고, 그로 인해 그동안 깊은 수면 아래 아픔을 묻어둔 채 지내온 두 사람의 관계에 고요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그냥, 난 우리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수면 아래』는 해인의 일상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베트남에 함께 가자는 우경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그녀는 뜻하지 않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다행히 그녀의 주변에는 온기어린 인물들이 있다. 이주란의 소설에는 늘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어딘지 허술해 보이면서도 마음이 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해인과 함께 분식을 사먹고, 달리기를 싫어하던 그녀에게 함께 달려보자고 제안하는 장미씨, 진해에서 함께 해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진씨, 실없는 듯하지만 뜻하지 않은 순간에 위로를 주는 성규, 천진하게 ‘슬퍼도 괜찮으니까 슬퍼도 괜찮다고’ 말하는 어린아이 환희. 이주란의 소설에는 커다란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커다란 온기가 존재한다고 말해볼 수 있을까? 이 이야기가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이토록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온기어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감정의 진폭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수면 아래』를 읽는 내내 마음이 저릿한 이유를 알 듯도 하다. 그것은 비단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안도에서 비롯된 동요가 아닐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가 아니라, 심장이 저릿할 정도의 강력한 위로. 혼자가 아니었다는 생각, 누군가가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큰 소리로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러한 감정을 이해할 것이다.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는 박연준 시인의 서평처럼, 이주란의 소설은 음악이 없는 음악이기도 하다. 가사 없이도 곧바로 마음을 파고드는 애잔한 선율처럼, 단 몇 문장으로도 이 소설 속의 공기와 정서가 읽는 이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200쪽으로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이 이만큼의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주란의 문장이 가진 불가사의한 힘 덕분일 것이고, 그건 우리가 이주란을 읽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구매가격 : 9,450 원
해 뜨는 지평선
도서정보 : 현진건 | 2022-08-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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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회사 사장 박병래(朴秉來) 씨의 부부 사이에는 여러 가지 로맨스가 많았다. 이만 석 가까이 추수를 하는 그는 제 손으로 그 회사를 맨들어 가지고 그곳에 사장 노릇을 할 뿐인가, ××중학교까지 단독으로 경영하며 역시 그 학교의 교주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하잘것없는 우리 사회에는 그의 이름이 햇발과 같이 빛났다. 그만큼 그의 한 노릇이요 그에게 관련된 일이라면 옳고 그르고 할 것 없이 말 좋아하는 세상 사람의 입길에 오르고 나리었다. 그로 말미암아 신문의 사회면이 혼잡해지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시방 안해 윤애경(尹愛卿) 씨와 첫날밤에 일어난 불상사는 오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오히려 우리의 기억에 새로우리라. 그 때의 사실을 윤곽(輪廓)만이라도 알아둠은 내가 지금 쓰려는 이 긴 이야기에 많은 참고가 되겠기로 그 때 내가 틈틈이 모아두었던 ××신문 쪽지를 독자 여러분 앞에 공개하려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첫날 ― 곧 기미(己未)년 이듬해 경신년 사월 십삼일 ― 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박 사장 결혼야의 혈극, 괴청년 신랑 난자”(朴社長 結婚夜의 血劇, 怪靑年 新郞을 亂刺)란 초호 삼단의 큼직한 제목 밑에, ××제사회사 사장이요 ××중학교 교주인 박병래 씨의 결혼식은 재작 십일에 거행되었는데, 그 식장인 종현 천주교당에 모인 손님과 구경꾼은 안으로 넘치고 밖으로 밀리어 왼 서울이 다 끓어 나온 듯한 성황을 이루었으며 식을 마치고 조선호텔로 그 피로연이 벌어지자 여러 십대 자동차와 여러 백대 인력거가 꼬리를 맞물고 그야말로 장사진(長蛇陳)을 쳤고, 초대 받은 손님으로 말해도 우리 사회의 일류 명사들이 거진 망라되었으며 귀족 측으로 박 후작을 비롯하여 김 자작·조 남작, 당국 측으로 정무총감·경무국장까지 출석하였으니 그 굉장하고 성대한 품이란 왕자의 혼례로도 따를 수 없었다. 가정의 번잡함을 피하고 새로운 정과 기쁨을 알뜰살뜰히 향락하게 위함이던지, 첫날밤을 호텔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그 날 밤 새로 한 점 가량 되어 이 행복에 싸인 신방의 문을 박차고 난데없는 청년 한 명이 뛰어들어와 섬섬한 비수로 신랑을 난자하여 원앙금침이 피투성이가 되는 불상사가 돌발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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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도둑
도서정보 : 현진건 | 2022-08-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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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밖 살림을 차린 뒤로 안잠자기 때문에 약간 머리를 앓지 않았다.
‘개똥에 굴러도 문안이 좋지 그 두메에 누가……’ 하고 그들은 처음부터 오기를 싫어한다. 일갓집들의 연줄 연줄로 간신히 하나 구해다가 놓으면 잘 있어야 한두 달 그렇지 않으면 단 사흘이 못되어 봇짐을 싼다. 속살 까닭은 여러 가지겠지만 드러내 놓는 이유는 한결같이,
‘뻐꾹새와 물소리가 구슬퍼서……’
한다. 불행한 인생의 길을 걷는 그들에겐 집을 에두르는 시냇물 노래와 뒷산 속에서 새어 흐르는 뻐꾸기의 울음도 시름을 자아낼 뿐인 모양이다. 어둑어둑한 소나무 그늘 밑에 그들은 하염없는 눈물을 씻게 되고 햇빛에 고요히 깃들인 풀 그림자도 까닭 없이 그들의 맘을 군성거리게 하는 듯.
도회의 번잡과 조음이 도리어 그들의 신경을 무디게 해 주고 심장을 지질러 주는 듯.
아모튼 안잠자기가 붙어 있지 않았다. 병약한 안해의 단손으로는 도저히 살림을 꾸려나가는 수가 없고 사람은 있어야 될 판이라, 나이 늙든 젊든, 일을 잘하든 못하든 안잠만 자 준다면 우리는 감지덕지로 위해 올리는 판이었다.
황해도 할멈이 올 때에도 우리는 사람이 없어서 무진 애를 쓰다가 드나드는 기름장수의 연줄로 간신히 그를 구해 온 터이라 인품과 일새를 볼 겨를도 없었다.
보통집 같으면 대개는 그 할멈을 싫어하였으리라. 첫째 나이 많아 육십오 세나 되었으니 세찬 일을 바랄 수 없고, 둘째 너무 추해서 불쾌한 감정을 일으킨다. 얼굴은 늙은 일본 호박 모양으로 위아래가 내밀고 눈과 코언저리가 움쑥 들어갔는데 검붉은 버섯으로 덮였고, 가을바람도 일어난 지 오래인 음력팔월인 이 때 땀이 차서 헤어진 광당포 적삼 하나를 걸쳤고 잠뱅이 비슷하게 짧은 베치마가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그 조각마다 기름때가 켜켜이 앉았다. 요새 명색 안잠자기라도 위아래를 인조견으로 휘감고 버듬적하게 양산 한 개쯤 들고 다니는 데 비하면 그야말로 소양지판이다.
그러나 우리는 와 준 것만 감지덕지다.
“저 나이에 저 꼴을 하고야 설마 오래 붙어 있겠지.”
안해도 나를 보고 해죽이 웃으며 도리어 안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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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웃음
도서정보 : 현진건 | 2022-08-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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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 새벽, 삶고 찌는 듯하던 더위도 인제야 잠깐 물러갔다. 질식한 듯 싶던 바람이 갑자기 생기를 얻은 것이 슬슬 들자, 그 축축하고 눅눅한 입김에 흔들리어 새하얀 달빛이 흩어졌다. 그 흰 가루는 마치 눈보라 모양으로 입때껏 부글부글 괴어 오르던 땀을 싸늘하게 식히는 듯하였다.
더위에 헐떡이는 것같이, 훨씬 열린 경화의 방 미닫이는 아직도 닫히지 않았다. 병일이와 단둘이 자는 꼴을, 어둠으로 가리우노라고 전등불은 꺼두었건만 그 대신 속 없는 달빛이 기어들어 올 줄은 몰랐다. 연옥색 망사모기장으로 걸어 놓으매 밝고 흰 광선은 푸르게 변하여, 햇발에 비친 바닷속도 이러할 듯. 그렇다면 젊은 사내와 계집의 손길, 발길에 채이고 밀리어, 여기 불룩불룩, 저기 꾸김꾸김한 모시 겹이불은 굼실거리는 물결이라 할까.
벼개와 요, 이불을 내버리고 맨 방바닥에 굴러와서 자던 병일은 선선한 기운에 잠이 깨었다. 어젯밤 명월관에서 삐루에다가 위스키를 많이 타 먹은 탓으로 눈 뜰 겨를도 없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그는 자리끼를 거진 다 말리고 보니, 화류 문갑 위에 얹힌 자개박이 체경이 번들번들하며, 그 옆에 놓인 유리 항아리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금붕어가 역력히 보였다. 이 밝은 빛의 원인을 알아차리자, 그는 미닫이 편으로 고개를 돌리었다.
목단화 송이처럼 멍울멍울한 구름 위에 반 남아 이즈러진 달이 마조 들여다본다.
경화도 오른팔과 왼편 다리로 귀찮은 듯이 이불을 걷어 제치고, 벼개에서 미끄러진 머리를 벼개에 처박은 채 곤하게 잔다. 그 벌거벗은 가슴, 다리, 팔은 달 그림자로 말미암아 은물에 적셔 놓은 듯. 거기 어른어른하게 수놓은 모기장은 마치 인어 몸에 붙은 파래인 듯싶었다.
이 명랑하고도 몽롱한 빛 물결 위로 한껏 정화되고 미화되어 떠오른 제 사랑을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병일은 문득 처음 경화를 만나던 광경을 눈앞에 그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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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도서정보 : 이효석 | 2022-08-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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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 요 며칠 동안의 제 생활의 변화를 두구 한 말 같어요, 이 끔찍한 변화를 기적이라구 밖엔 뭐라구 하겠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딘지 먼 하늘에서나 흘러오는 듯 삼라만상과 구별되어 궛속에 스며든다.
준보는 고개를 돌리나 먹같은 어둠 속에서는 그의 표정조차 분간할 수 없다. 얼굴이 달덩어리같이 훤하고 쌍꺼풀진 눈이 포도 알같이 맑은 것은 며칠 동안의 인상으로 그러려니 짐작할 뿐이다. 실과 사귄 지 불과 한 주일이 넘을락 말락 할 때다.
“그건 꼭 내가 하구 싶은 말요. 지금 신비 속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이런 날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해봤겠수. 행복은 불행이 그렇듯 아무 예고두 없이 벼락으로 닥쳐오는 모양이죠.”
“되래 걱정돼요. 불행이 뒤를 잇지 않을까 하는.─그만큼 행복스러워요.”
“행복이구 불행이구 사람의 뜻 하나에 달렸지 누가 무엇이 우리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요. 사람의 의지같이 무서운 게 세상에 없는데.”
“그 말이 제게 안심과 용기를 줘요. 웬일인지 자꾸만 겁이 났어요. 낮과 밤이 너무두 아름다워요. 모든 게 요새는 꼭 우리 둘만을 위해서 마련돼 있는 것만 같구먼요.”
방공연습이 시작된 지 여러 날이 거듭되어 밤이면 거리는 등화관제로 어둠 속에 닫혀졌다. 몇 날의 밤의 소요를 계속하는 두 사람은 외딴 골목을 골라 걸으면서 단원들의 고함을 들을 때 마음의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았으나 평생의 중대한 시기에 서 있는 준보에게는 그 정도의 사생활의 특권쯤은 그다지 망발이 아니리라고 생각되었다. 하물며 낮 동안에 일터에서 백성으로서의 직책과 의무를 다했다면야 그만큼의 밤의 시간은 자유로워도 좋을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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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도서정보 : 이효석 | 2022-08-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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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차례씩 고깃배가 들어올 때마다 판매소 창고 앞은 모이는 사람들로 금시에 장판을 이룬다. 선창에 수북이 쌓인 고기를 혹은 그물채로 혹은 통에 담아서 창고에 옮기기가 바쁘게 포구의 여인들은 함지를 들고 모여들 든다. 판매소 서기가 장부를 들고 고기를 나누고 적고 할 때에는 어느덧 거의 고기만큼의 수효의 여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만다. 고기와 사람의 산더미 속에서 허덕이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함지에 분부해 주면 여인들은 차례차례로 담아가지고는 그 길로 읍내로 향한다. 읍내 장터까지는 오릿길이다. 여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 길을 그렇게 왕복함으로서 한집안의 생계를 이어간다.
학수는 그 여인들 속에 그 어느 때라도 어머니의 자태를 보지 않을 때가 없다. 늙은 어머니에게는 한 마리의 나귀가 있었다. 망아지보다도 작고 등어리의 털이 거의 쓸려서 없어진─아마도 어머니의 연세만큼이나 늙었을 그 나귀가 어머니에게는 단 하나의 귀한 살림의 연장이었다. 늙은 낫세로는 부치는 근력에 함지를 이고 오릿길을 걷기는 힘들다. 어머니는 함지 대신 수레에 고기를 받아 가지고는 나귀를 몰고 읍냇길을 걷는 것이었다. 가는 길은 힘드나 오는 길은 비인 수레 속에 고기 대신에 몸을 얹고 가벼운 것이었다. 그 어머니의 양을 학수는 해변에 서서 혹은 뱃전에 의지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이 저리고 가슴이 아프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불효니 무어니 그 이전의 절박한 문제로 학수의 가슴속은 가득 찼던 것이다. 읍내의 학교를 중도에서 나온 지도 반달이 가까우면서 아직도 어지러운 마음속을 정리도 못했거니와 나갈 길의 지향을 못 찾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중이다. 불역에 나와 서서 바다를 내다보고 판매소의 요란한 광경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결코 한가한 심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는 겹겹의 근심과 우울이 구름같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불효의 탓이 아니라 눈을 솔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애쓰는 자태를 바라봄이 얼마간이라도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자는 그런 뜻임은 물론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귀를 몰고 판매소 앞을 떠나 읍으로 향하는 큰길로 들어설 때에는 학수는 은근히 모래펄을 지나 밭둑에 나서서 멀어지는 어머니의 자태를 어느 때까지나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웃집 분녀와 동행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 때이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분녀는 함지를 인 채 나귀 옆에 서서 걸음을 같이하면서 자별스럽게 웃고 지껄이고 하였다 그 정경을 . 학수는 더없이 귀엽고 부러운 것으로 여기면서 두 사람의 자태가 읍으로 향한 곧은 길 저편으로 까아맣게 사라질 때까지 시름없이 바라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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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구락부
도서정보 : 이효석 | 2022-08-08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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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무얼 바라구들 사나.”
“살아가자면 한 번쯤은 수두 생기겠지.”
“나이 삼십이 되는 오늘까지 속아오면서 그래두 진저리가 안 나서 그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그 무엇을 바라지 않고야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말하자면 꿈이네. 꿈꿀 힘없는 사람은 살아갈 힘이 없거든.”
“꿈이라는 것이 중세기적에 소속되는 것이지 오늘에 대체 무슨 꿈이 있단 말인가. 다따가 몇 백만 원의 유산이 굴러온단 말인가. 옛날의 기사에게 같이 아닌 때 절세의 귀부인이 차례질 텐가. 다 옛날얘기지 오늘엔 벌써 꿈이 말라버렸어.”
“그럼 자넨 왜 살아가나. 무얼 바라구.”
“그렇게 물으면 내게두 실상 대답이 없네만. 역시 내일을 바라구 산다고 할 수밖엔. 그러나 내 내일은 틀림없는 내일이라네.”
“사주쟁이가 그렇게 말하던가. 관상쟁이가 장담하던가.”
“솔직하게 말하면─”
“어서 사주쟁이 말이든 무어든 믿게나. 무얼 믿든 간에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일반 아닌가. 결국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게니까. 악착한 현실에서 버둥버둥 허덕이지 말구 유유한 마음으로 찬란하게 내일이나 꿈꾸구 지내는 것이 한층 보람 있는 방법이야. 실상이야 아무렇게 되든 간에 꿈조차 꾸지 말라는 법이야 있겠나.”
“그렇구말구. 꿈이나 실컷 꾸면서 지내세 그려. 공상이나 실컷 하면서 지내세 그려.”
“꿈이다. 공상이다.”
이렇게 해서 좌중에 공상이란 말이 시작되었고 거듭 모이는 동안에 지은 법 없이 공상구락부라는 명칭까지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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