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고전502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바일리마 편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테마여행신문 TTN Theme Travel News Korea | 2022년 03월 1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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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바일리마 편지(Vailima Letters by Robert Louis Stevenson)(1895)는 보물섬(Treasure Island)(1883)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1890년 11월부터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쓴 1894년 10월까지 쓴 편지를 모은 서간집(書簡集)으로, 사후 1895년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의 바일리마(Vailima)는 작가가 사망하기까지 요양한 남태평양 사모아(S?moa)의 수도 아피아(Apia)에서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그의 저택 박물관(Robert Louis Stevenson Museum)과 묘(Robert Louis Stevenson Tomb)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EDITORIAL NOTE. So much of preface seems necessary to this volume as may justify its publication and explain its origin. The writer was for many years my closest friend. It was in the summer of 1873 that a lady, whose gracious influence has helped to shape and encourage more than one distinguished career, first awakened my interest in him and drew us together. He was at that time a lad of twenty-two, with his powers not yet set nor his way of life determined. But to know him was to recognise at once that here was a young genius of whom great things might be expected.

사설 참고. 이 책의 출판을 정당화하고 그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서문이 이 책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작가는 오랫동안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1873년 여름, 은혜로운 영향력으로 두 가지 이상의 저명한 경력을 형성하고 격려한 한 여성이 처음으로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리를 하나로 모았습니다. 그 당시 그는 스물두 살의 소년으로, 아직 능력이 정해지지 않았고 삶의 방식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 예상되는 젊은 천재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것이었습니다.

A slender, boyish presence, with a graceful, somewhat fantastic bearing, and a singular power and attraction in the eyes and smile, were the signs that first impressed you; and the impression was quickly confirmed and deepened by the charm of his talk, which was irresistibly sympathetic and inspiring, and not less full of matter than of mirth. I have known no man in whom the poet’s heart and imagination were combined with such a brilliant strain of humour and such an unsleeping alertness and adroitness of the critical intelligence.

날씬하고 소년 같은 존재감, 우아하고 다소 환상적인 태도, 그리고 눈과 미소에 담긴 독특한 힘과 매력은 처음으로 당신을 감동시킨 신호였습니다. 거부할 수 없이 동정적이고 영감을 주는 그의 연설의 매력은 그 인상을 재빨리 확인하고 깊어지게 했으며, 쾌락보다는 물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시인의 마음과 상상력이 그처럼 기발한 유머와 잠 못 이루는 기민함과 비판적 지성의 영리함과 결합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But it was only in conversation that he could as yet do himself justice. His earliest efforts in literature were of a very uneven and tentative quality. The reason partly was that in mode of expression and choice of language, no less than in the formation of opinion and the conduct of life, he was impatient, even to excess, of the conventional, the accepted, and the trite. His perceptions and emotions were acute and vivid in the extreme; his judgments, whether founded on experience, reading, discussion, or caprice (and a surprising amount of all these things had been crowded into his youthful existence) were not less fresh and personal; while to his ardent fancy the world was a theatre glowing with the lights and bustling with the incidents of romance.

그러나 그가 아직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대화에 국한될 뿐입니다. 문학에 대한 그의 초기 노력은 매우 고르지 않고 잠정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표현 방식과 언어 선택 방식에서, 의견 형성과 생활 방식에서 못지않게 그가 관습적인 것, 수용된 것, 진부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심지어는 참을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각과 감정은 극도로 날카롭고 생생했다. 경험, 독서, 토론 또는 변덕에 근거한 그의 판단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젊음에 가득 차 있었다) 신선하고 개인적이었습니다. 그의 열렬한 환상에 세상은 빛으로 빛나고 로맨스의 사건으로 분주한 극장이었습니다.

To find for all he had to say words of vital aptness and animation?to communicate as much as possible of what he has somewhere called ‘the incommunicable thrill of things’?was from the first his endeavour in literature, nay more, it was the main passion of his life. The instrument that should serve his purpose could not be forged in haste, still less could it be adopted at second hand or ready-made; and he has himself narrated how long and toilsome was the apprenticeship he served.

그가 어디선가 '전달할 수 없는 것의 스릴'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능한 한 많이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적성과 생기의 단어를 말해야 하는 것을 찾는 것은 문학에 대한 그의 노력, 아니 그 이상도 처음부터였습니다. 그의 삶의 주요 열정. 그의 목적에 부합해야 하는 도구는 성급하게 위조될 수 없었고, 더욱이 중고나 기성품으로 채택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봉사한 도제 기간이 얼마나 길고 힘들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As a letter-writer, Mr. Stevenson was punctilious in business matters (herein putting some violence on his nature), indefatigable where there was a service to be requited or a kindness done, and to strangers and slight acquaintances ever courteous and attentive. I am not sure, indeed, but that in this capacity it was the outer rather than the inner circle of his correspondents who, speaking generally, had the best of him. To his intimate friends he wrote charmingly indeed by fits, but often, at least in early days, in a manner not a little trying and tantalising.

편지 작가로서 스티븐슨(Mr. Stevenson)은 사업 문제에 있어 신중했고(여기서는 성격에 약간의 폭력을 가했습니다), 대가를 받거나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곳에서는 지칠 줄 모르고, 낯선 사람과 약간의 지인에게는 항상 예의 바르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나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를 가장 잘한 사람은 그의 특파원의 내부보다는 외부에 있었습니다. 친밀한 친구들에게 그는 어울리게 매력적으로 썼지만, 종종 적어도 초기에는 조금 힘들고 감질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저자소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스코틀랜드(Scotland) 에든버러(Edinburgh) 출생의 영국 소설가(1850~1894)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1850년 영국의 북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로,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도 활동한 ‘문학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세례명은 로버트 루이스 발포어 스티븐슨(Robert Lewis Balfour Stevenson)으로, 성인이 되는 18세, 현재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으로 고쳤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과 마찬가지로, 에든버러의 서울대(?!) 에든버러 대학(The University of Edinburgh)를 졸업한 엘리트로, 공학(engineering)을 전공하였습니다. 학창 시절 연극을 무대에 올릴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의 희망에 맞춰 1875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습니다. 이후 가족의 품을 벗어나, 한명의 독립적인 문학가로써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에든버러(Edinburgh)는 스티븐슨이 태어나 자란 도시이니만큼 그와 연관된 흔적 ? 동상, 기념비, 집 등, 또한 곳곳에 있습니다.

애 셋 낳은 11세 연상의 미국인 유부녀와 결혼하다(1879) :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할 1876년, 11세 연상의 미국 여성 프랜시스 패니 마틸다 반 더 그리프트 오스본(Frances "Fanny" Matilda Van de Grift Osbourne)과 사랑에 빠집니다. 문제는 그녀가 남편 사무엘 오스본(Samuel Osbourne)이 버젓이 살아있는 유부녀라는 것! 남편의 외도에 분노한 그녀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자녀들과 함께 이주하였습니다. 그녀의 복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매료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남편과 별거 중인 그녀가 이혼하자마자 결혼식(1880)을 올립니다. 재혼한 패니 오스본은 1875년 사망한 허비(Hervey)를 제외하고 두 명의 자녀 ? 딸 이소벨(Isobel), 아들 로이드(Lloyd)가 있었는데, 새아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이 때문에 자녀들과 함께 이야기를 짓고 자신의 글을 자녀들이 읽기도 하였습니다. 보물섬(Treasure Island)(1883)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요양차 스위스 다보스에 머무를 당시 의붓아들 로이드가 엉터리로 그린 보물지도를 보고, 자녀들에게 바다를 배경으로 한 모험담을 들려주기 위해 집필한 작품입니다. 작가이기 이전에 ‘두 아이의 아버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애정 어린 작품으로, 현재까지 전 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의 동심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걸작이지요! ‘보물찾기’를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피엔딩인 것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티븐슨 가족은 1884년 영국 본머스 웨스트본(Westbourne)에 정착하였으며,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남태평양 사모아(S?moa)에서 영면에 들다(1894)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어려서부터 기관지(bronchial trouble)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겨울철마자 심한 기침과 발열로 고생했습니다. 성인이 된 후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결혼 이후에 수시로 요양원을 들락거렸습니다. 건강이 비교적 좋았던 청년기에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여행기를 집필하였고 요양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는 하나, 1888년부터는 미국을 떠나 요트 한척을 빌려 가족들과 함께 남태평양을 두루 떠돌았습니다. 그가 유독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여행과 탐험’에 매력을 느꼈고, 작가로써 적지 않은 여행기를 집필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란 견해도 있습니다. 카스코 호(the Casco)에 몸을 싣고 하와이(Hawaii), 길버트 섬(Gilbert Islands), 타히티(Tahiti), 뉴질랜드(New Zealand)... 1889년에는 아예 남태평양의 섬 사모아(S?moa)에 정착하였습니다. 절해고도의 섬 외딴 곳에 2층짜리 저택을 세우고, 아내와 함께 사는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부럽네요! 그러나, 약해진 몸은 좀처럼 회복하기 어려웠고, 1894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는 생의 말년에 세계 각지에서 만행을 저지르는 제국주의에 깊은 반감을 가졌고, 이 덕분에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모아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사후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모아의 성산 바이아 산(Mount Vaea)에 매장되었으며, 그의 묘에는 그가 지은 레퀴엠(Requiem)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그의 묘가 마련되어 있으며, 1.6 km 떨어진 그의 저택은 현재 Robert Louis Stevenson Museum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아내 패니 스티븐슨은 남편이 없는 사모아를 떠나 미국으로 귀국했고, 1914년 사망했습니다. 패니의 유골은 1915년 딸이 사모아로 옮겨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습니다.

목차소개

-목차(Index)-
프롤로그(Prologue).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 999선을 읽어야 하는 7가지 이유
조명화 편집장의 21가지 키워드로 읽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01. 스코틀랜드(Scotland) 에든버러(Edinburgh) 출생의 영국 소설가(1850~1894)
02. 애 셋 낳은 11세 연상의 미국인 유부녀와 결혼하다(1879)
03. 남태평양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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