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

프랑코 바잘리아와 정신보건 혁명

존 풋 | 문학동네 | 2020년 03월 0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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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자유가 치료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정신병원 곳곳에 내걸렸던 이 구호는 바잘리아가 이끈 정신보건 혁명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강제수용, 폐쇄병동 감금이 공공연히 행해지던 정신병원의 해체를 주창한 바잘리아는 1978년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정신병원 폐쇄로 이어진 180호 법(일명 ‘바잘리아 법’) 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혁명적 변화는 전세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바잘리아는 20세기 정신의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이 책은 바잘리아 및 그와 뜻을 함께한 개혁자들이 정신질환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드라마틱한 역사의 기록이다.

저자소개

존 풋 John Foot
영국 브리스틀대학교 이탈리아 현대사 교수. 196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고, 이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이탈리아 밀라노의 사회주의 운동(1914~1921년)을 주제로 한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에 이탈리아의 분열된 기억을 연구하기 위해 트리에스테를 찾았다가, 바잘리아 법이 통과된 뒤 베네치아에 있는 어느 정신질환자 보호소의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다큐 〈산클레멘테〉를 보고 이 바잘리아 평전을 쓰기로 결심했다. 『칼치오?이탈리아 축구의 역사Calcio: A History of Italian Football』(2007),『이탈리아의 분열된 기억Italy’s Divided Memory』(2014) 등 이탈리아의 현대사와 스포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옮긴이 권루시안
번역가로서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책을 독자에게 아름답고 정확한 번역으로 소개하려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이반 일리치·배리 샌더스의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앨런 라이트맨의 『아인슈타인의 꿈』, 잭 웨더포드의 『야만과 문명』,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죽음』, 데일 마틴의 『신약 읽기』 등이 있다. 홈페이지 www.ultrakasa.com

목차소개

제1부
고리치아, 1961~1968년

제1장 고리치아―유럽 땅 끝에서 일어난 혁명
제2장 반정신의학, 비판적 정신의학, 운동, 그리고 실용적 유토피아
제3장 고리치아의 해석―자료의 출처와 서사
제4장 바잘리아와 영국인들―번역의 누락인가?
제5장 팀을 꾸리다―고리치아의 첫 에퀴페, 1961~1969년
제6장 마니코미오=라제르, 유비의 역사와 정치학
제7장 고리치아―치료 공동체
제8장 『일 피키오』―환자들의 목소리, ‘혁명의 기록보관소’
제9장 이탈리아 방식의 반정신의학
제10장 세계적 불가사의―전체 집회
제11장 『부정되는 공공시설』의 기원
제12장 『부정되는 공공시설』―1968년의 ‘성서’
제13장 1968년과 고리치아, 1968년인 고리치아
제14장 사건
제15장 <아벨의 정원>과 『계급 때문에 죽는다』―텔레비전과 사진 속 고리치아와 그 역할
제16장 한 시대의 끝―바잘리아, 고리치아를 떠나다

제2부
고리치아를 넘어: 대장정

제17장 페루자―‘완벽한’ 사례, 1965~1978년
제18장 파르마―가스검침원과 완전 통제시설
제19장 레조넬에밀리아―관할지역 안으로 나가다, 1969~1975년
제20장 고리치아―제2의 에퀴페, 1969~1972년
제21장 아레초―고리치아의 사도들
제22장 트리에스테―정신질환자 보호소의 종말, 1971~1979년
제23장 180호 법―역사, 신화, 그리고 실제
제24장 맺음말


주요 용어와 고유명사
옮긴이의 말
해설: 왜 바잘리아인가?_이영문

출판사 서평

정신질환자가 더 위험할까?

한국 사회에서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는 대단히 낮은 형편이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은 급증하고 있지만, 조현병 환자의 범죄를 다루는 선정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혐오를 키우는 일도 빈번하고, 정신병원 강제 입원이나 환자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1960~70년대 이탈리아의 정신보건 혁명은 우리에게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장 직면한 현실이고, 미래의 청사진이다.
문명사회에서 정신병원의 역할은 ‘미친’ 사람들을 가두어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정신병원의 일차적 기능은 ‘치료’가 아니라 ‘구금’이었다. 하지만 격리와 감금은 정신질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킨다. 바잘리아식 정신보건 혁명의 핵심은 정신질환자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려보내 사회 공동체 안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지역사회 곳곳에 자리잡은 정신보건센터 같은 곳이 정신질환자 돌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극단적인 일부 사례를 통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뿌리 깊게 존재하지만, 실상 범죄 통계를 보면 정신질환자보다 비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율이 훨씬 더 높게 나타난다. 또한 정신질환은 환자 본인이나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 없는 사회적 질환으로서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임을 보여주는 바잘리아의 개혁 과정은 지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신병원 개혁에 나서다

1924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바잘리아는 반파시스트 활동을 벌이다가 1944년에 체포되어 반년간 감옥에서 보냈다. 당시 감옥은 공포와 폭력, 고통, 빈대와 오물, 질병의 장소였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 정신의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지만 학계에 자리잡지 못하고 1961년 말 고리치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asylum: 정신질환자 수용소, 사실상의 정신병원) 소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런데 바잘리아가 고리치아에서 마주친 현실은 지난 시절 겪었던 감옥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곳은 병원이 아니라 강제수용소였다.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들어가는 순간 환자는 ‘비인격자’가 되어 인격을 박탈당한다. 창문에는 창살이 꽂혀 있고 병동 문은 자물쇠로 잠가놓는다. 고문과 자살은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많은 환자에게 그곳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었다.
바잘리아의 병원 개혁은 1960년대 내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바잘리아는 처음부터 환자들을 묶어놓은 사슬을 풀어 그들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바잘리아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하나둘 고리치아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하나의 팀(에퀴페)을 이루어 개혁을 추진했다.
고리치아는 이탈리아에 ‘치료 공동체’를 세우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이후 고리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치료 공동체의 모범 사례이자 정신병원 개혁의 이정표가 된다. 1960년 중반에 이르면 고리치아는 이미 민주적으로 개방된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되어 있었다. 외견상 의사와 환자 간의 위계가 사라졌고, 환자들은 부분적으로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이제 환자들은 환자복이 아니라 자기 옷을 입었고, 언제 잠자리에 들고 언제 일어날지를 스스로 결정했으며, 자기 관리를 위한 공간(주점, 클럽 등)도 스스로 만들어 운영했다.
1965년 11월 이후로는 병원 구성원 전체가 참석하는 정기 아셈블레아(전체 집회)가 매일 오전에 열렸다. 간호사, 의사, 환자는 물론이고 이따금 학생, 영화 제작자, 기자, 활동가, 정신의학도 등도 모습을 드러냈다. 환자들이 이 집회를 운영하고 회의록을 작성했다.
1960년대 후반에, 고리치아는 68세대의 성지가 되었다. 68혁명의 이념이 현실화된 공간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당시의 개혁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공동의 기록물 『부정되는 공공시설』(바잘리아를 대표 저자로 삼아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68세대의 살아 있는 지침서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직접 고리치아를 방문하거나 『부정되는 공공시설』을 읽거나 다큐멘터리 <아벨의 정원>을 보고 바잘리아 추종자가 되었다.

이 정신병원은 개방되어 있고, 방문 시간이 따로 없으며, 대부분의 환자가 단지 내를 자유로이 다니고 심지어 병원 밖 도시 안으로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환자가 자기들을 위해 직접 운영하는 주점이 있었다. 의사 중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는 자신을 의사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환자에게는 노동의 대가로 진짜 돈을 지급했다. 이 시점에는 어느 병동도 잠겨 있지 않았다(잠겨 있던 마지막 병동이 1967년 말까지 개방되었다). 전체 집회와 병동 집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집회에서 바깥나들이뿐 아니라 병원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결정했다. 모든 것이 긴 시간을 두고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214쪽)

정신병원을 폐쇄하다

『부정되는 공공시설』의 성공 이후 바잘리아는 유명인이 되었고 1968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급진적 정신의학은 68세대가 보기에 가장 실천적인 학문 분야였다. 반권위주의, 해방 이론이 힘을 얻으면서 정신병원 반대 운동이 고리치아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1969년에는 한 무리의 학생 등이 콜로르노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를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신병원에서 보낸 저 24시간 덕분에 나는 대학교에서 수강한 모든 정신의학 과정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이탈라 로시)
그러나 바잘리아는 고리치아 시절을 겪으면서 정신병원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정신병원 시설을 그대로 둔 채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잘리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고리치아는 점점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트리에스테 정신질환자 보호소로 자리를 옮긴 바잘리아는 과감히 병원 폐쇄의 길로 나아갔다.
1970년대에 트리에스테는 사회·문화·의료 혁명의 상징이었다. 트리에스테는 고리치아를 훨씬 넘어서는 실용적 유토피아가 되었다. 트리에스테 정신질환자 보호소의 폐쇄는 대중 이벤트, 일련의 ‘해프닝’처럼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옛 병동에서 환자와 미술가와 활동가가 파란색의 커다란 모형 말(일명 ‘마르코 카발로’)을 제작하여, 수레에 실어 병원을 빠져나가 거리 행진을 벌인 일이다. 이 해방을 상징하는 이벤트는 바잘리아 운동의 핵심 장면으로 기억되었다.
이제 담장만 허무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었다. 우선 지역 곳곳에 협동조합이 구성되었다. 환자들이 일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이 협동조합은 정신보건 환자를 사회 속에 다시 통합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한편 응급 정신보건 환자는 트리에스테의 시립 병원 안에 있는 개방형 센터에서 맡는데, 이 센터는 병원 병동이라기보다는 호텔을 연상시키는 시설을 갖추었다. 내부 인테리어와 가구, 용어 사용에서도 병원에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게끔 세심히 배려했다. 이곳에서는 의사도 평상복을 입었다. 이 응급 센터는 바잘리아의 원칙을 정신보건 서비스에 적용한 모범적 사례이다. 오늘날에도 트리에스테의 정신보건 서비스는 세계 최고로 꼽힌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내내 전세계의 젊은 정신의학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정신병원 없는 나라

바잘리아의 개혁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모든 정신병원을 폐쇄하게 한 ‘180호 법’(바잘리아 법)의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법을 통해 몇 가지 확고한 원칙이 세워졌다. 우선 정신질환자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여, 이들에게 정당한 권리(투표권, 자신의 치료에 대한 통제권, 바깥세상에서 살 권리)를 돌려주었다. 또 폐쇄적인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없어지게 되며 적어도 새 환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더이상 새 정신병원도 세울 수 없었다.
바잘리아 혁명은 정신병원의 폐쇄로 끝나지 않았다.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바잘리아식의 개혁 조치는 모든 보건 서비스에 전면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정신병원의 대안으로 뿌리내린 여러 제도, 즉 공공주택, 보조금, 협동조합, 정신보건센터, 시 병원 안의 응급센터 등은 아주 실제적인 사례가 되어 세계 각국의 정신보건 정책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지원 시설과 기관 네트워크를 통해 정신질환자가 지역사회 안에 자리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 이탈리아가 정신병원 없는 나라가 되기까지 바잘리아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급진적 정신의학자들이 벌인 노력과 헌신의 기록이다. 이 개혁은 수많은 간호사, 의사, 자원봉사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혁적인 행정가와 정치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또한 정신질환자들 자신이 이 운동의 일부이고 더 나아가 주역이었다.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들은 이제 상당수가 아름다운 공원으로 변했다. 그곳에 수용되어 있던 10만 명의 환자는 대부분 사회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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