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데리다 철학,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유령이 되어버린 이방인 여행자

탁양현 | e퍼플 | 2019년 01월 25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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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제1장. Derrida哲學 一般



기존의 구조를 해체시키는 사유방식은, 東洋文化에서는 지극히 古代的인 것이다. 老莊哲學이 세계 解體主義의 始原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더욱이 노장철학은, 현대의 서양 해체주의가 지닌 代案不在의 문제까지도 이미 해결하고 있다.
예컨대, 老子의 道는 無爲自然의 土臺 위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토대는 서양의 同一性 토대와 달리, 變化性의 토대이다. 그래서 현실세계의 解體를 쉬이 수용한다. 기존의 것의 해체에 대한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그러한 해체가 同時的으로 새로운 生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의 토대 위에서 자유로이 살아내는 逍遙遊는, 莊子哲學을 대표한다.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 하지 않는 바가 없는, 無爲而無不爲인 것이다. 이 역시, 解體와 生成이 同時的으로 변화하는 시공간에서의 노닒이다.
그런데 獨尊儒術의 시대가 주도하면서, 그러한 古代的 解體主義는 정치권력으로부터 疏外된다. 朝鮮王朝는 대표적인 사례다. 애석하게도 儒家哲學에는 변화적 사유가 없지 않으나, 강조되지 못한다.
周易哲學이나 孟子哲學의 경우 지극히 radical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儒敎哲學에서는 그러한 측면이 은폐되고 소외되어버렸다. 유교철학은 철저히 現實政權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통치이데올로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硬直性 탓에, 近代에 이르러 西洋文明에 의해 철저히 蹂躪당한다. 그렇게 현대에 이르도록, 세계는 서양문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서양문명 자체에서는, 2차례의 世界大戰을 체험하면서, ‘기존의 것’들에 대한 심각한 懷疑가 찾아든다.
神과 君主의 시대를 극복하는 르네상스를 체험하고, 역사를 激變시킨 과학기술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었지만, 그 결과로서 정립된 모더니즘은, 결국 帝國主義的 覇權과 植民主義的 利權에 복무하는 거대한 戰爭으로서 마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더니즘을 마감시킨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것이, 곧 解體主義다. 이러한 상황에서, 東洋文明은 다시 고뇌에 빠져든다.
동양문명으로서는 지극히 古代的 思惟方式인 해체주의가 현실세계를 주도하지만, 유교철학이라는 동양문명의 전통적 사유방식을 추구하였던 탓에, 서양문명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던 트라우마가, 자꾸만 동양적 사유방식을 스스로 貶毁토록 하기 때문이다.
동서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解體主義의 始原으로서, 이미 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老莊哲學의 해체주의를 외면한다면, 서양문명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던 근대의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이다.
서양문명은 시공간적 他者인 탓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미 동양문명의 해체주의를 自己化하여 활용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가 그러하다.
대체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동양문명의 老莊哲學的 사유방식을 알고 있으며, 나아가 周易哲學이나 陰陽哲學까지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援用하여 각종 이론과 논리를 제시하고, 그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世界史的 思潮를 구성해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양문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애당초 동양적 사유방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설령 알더라도 외면한다. 그러면서 현실세계를 서양문명이 주도하므로, 그저 ‘서양 것’이니 추종해야 하는 양, 죄다 포스트모던의 尖兵을 자처한다.
필자가 ‘데리다 철학’을 지어내면서, 한국사회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대부분의 硏究物과 著作을 讀書했는데, 이러한 思想史的 이해를 지닌 자는 극히 稀少했다. 그러니 다소 암울한 심정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를 독서하고서, 노장철학의 해체주의에 대해 반드시 유념하기를 당부한다. 방대한 분량의 莊子는 잠시 留保하더라도, 老子道德經은 반드시 독서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필자의 메시지에 내포된 眞義를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가 後期資本主義, 後期産業社會로 사회구조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게 된다.
한 시대의 문화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며, 그에 따른 담론들도 그러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이러한 요구가 다양한 분야에서 突出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극에서의 이중극, 건축에서의 이중약호지움, 미술계에서의 알레고리, 문학에서의 패러디 같은 특징들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러한 제특징들이 보이는 유사점과 철학적 시각이, 사회문화상과 예술과 유사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데리다는, 글쓰기보다 말하기를 우위에 두어온 西歐의 形而上學 체계를 顚覆시키고,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하여,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리오따르는 ‘巨大敍事’를 지배서사로 보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지배서사를 거부한다. 더불어 진리의 비판적 수행의 과제는, 전통적 이론이 아니라 문화, 예술이라고 보며 미학을 중시한다.
지배서사 뒤에는, 잊혀졌던 敍事와 再現이, 하나가 아니고 二重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미디어 정보와 복제물이 범람하는 소비상품 사회를 분석하며, 기호학을 소비문화 현상에 적용한다. 그러면서 模造物이 더 진짜 같으며, 실체와 모사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적 특성들은, 일시성, 탈구축, 알레고리적 특성, 차용, 패러디, 종합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이러한 제 특성들은 모더니즘의 일획적, 총체적 질서와 구분되는 의미를 지님과 더불어, 새로운 활력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多元化가 오용되거나, 다시 형식의 틀 안에 귀속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다이즘적인 무조건적 거부가 아니라, 진리, 규범, 양식 속에 깃들어 있는 絶對性과 中心性의 虛構를 드러냄으로써, 解體를 시도한다.
더불어 모더니즘의 실험정신을 계승하면서도, 形式性과 總體性을 拒否한다. 그러면서 대중문화의 패턴과 어법을 차용하여, 엘리트적 권위의식과 대중문화의 二分法的 境界를 解體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물의 해체와 불확정성, 비역사성을 통해, 개인을 중시하고 인간본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와 다원화가 갖는 의미는 크다고 보며,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화 양상에 관한 연구, 이창희.


데리다의 全 작업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활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서구 형이상학을 해체함으로써,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 등에 균열을 내려고 했던 작업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 하에서 진행되고, 그리로 수렴된다.
초기의 해체가 이론이나 개념 체계를 매개로 현실에 개입했다면, 후기의 해체는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관여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해체를 시도하는 다른 곶은, 그 제목에서 해체의 내용과 방향을 표시한다.
데리다는 ‘발레리’가 대표하는 유럽인의 유럽 담론에서, 유럽의 지리적 표상으로, 유럽의 본질로 등장하는 ‘곶’의 의미를 실마리 삼아, 한편으로는 기존의 곶 담론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유럽의 정체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해체가 기존의 담론, 텍스트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양면적 평가를 요한다. 해체가, 자신이 해체하려는 담론의 논리와 문법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될 것이라는 혐의를 피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해체는 분명 전통이 된 담론의 논리와 문법을 흔든다.
유럽의 更新을 지향하는 데리다의 해체는, 자신의 전통 속에 담긴 自文化中心性에 균열을 냄으로써, 유럽을 他者를 향해 개방시킨다.
비유럽은 그러한 작업의 성과 위에서, 유럽과 보다 평등하게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해체가 유럽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긍정일 수 있다하더라도, 그 작업의 의의를 폄하하기는 어렵다. "유럽"의 해체 : 데리다의 『다른 곶』(L"Autre Cap)을 중심으로, 김정현.


근대 실증적 세계관에 대한 現象學의 반론과 반성적 자각은, 과학적 방법론과 실증주의의 원칙이 지배하는, 모든 학문적 체계와 영역에서,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한 쟁점으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특별히 객관적 과학으로서, 그 학문적 성격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近代學의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성향에 대하여, 현상학의 반론은 상당히 유력한 공격과 타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에 대한 많은 현상학적 연구들 속에서, 現代學이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성의 제시로써 이해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상학의 이러한 의의와 공헌에도 불구하고,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로 대표되는 Jacques Derrida의 날카로운 분석은, Husserl의 현상학적 시도가 여전히 전통 형이상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土臺主義(Fundamentalism)的 세계관에 머물고 있음을 비판한다.
따라서 Derrida가 주도적으로 수행한 현상학 해체와 함께, 현상학적 교육론의 해체를 엄밀하게 시도하고자 하며, 더 나아가 이 현상학 해체의 과정에서 돌출된 Derrida의 독특한 해체의 언어들, 특별히 差延(différance)의 개념과 그 논리를 중심으로 해체주의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물론 본론의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겠지만, Derrida의 해체의 언어들은, 사실 Husserl 現象學이 그렇게 구현하고자 소망했던 것, 즉 왜곡되고 황폐화된 세계의 진정한 회복과 치유, 그 자유를 더욱 철저한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함이다. Derrida의 "선험 현상학 해체"와 그 교육학적 함의, 서상문, 장사형.

-하략-

저자소개

니체와 데리다의 해체적 사유와 전략은, 아직도 많은 오해와 왜곡 속에서 읽혀지는 듯하다.
많은 오류 중 하나는, 어떤 대상을 해체한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해체되는 대상이 사용하고 작동시겼던 개념과 사유의 메커니즘에 대한 엄격한 고민 없이, 그것을 다시 재사용하면서, 자신의 해체작업을 수행하려는 오류일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해체되는 대상의 표적을, 해체작업을 통해 깔끔하게 노려낼 수 있다는 오해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론적 실천으로서의 해체는, 현실적 실천으로서의 해체만큼이나 어렵고 복잡하게 전개되기에, 이러한 전면적 전복과 해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데리다의 텍스트로부터 배우는 것은, 바로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이라는 것이, 결코 명분과 의지만을 앞세운 슬로건만으로는 실천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주로 데리다의 텍스트가 제안하는, 엄격하면서도 통찰 깊은 몇몇 해체적 전략과 개념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해체적 이론의 성찰은, 단순한 부분의 고찰이 아닌,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진행과 전개의 본질적인 속성을 드러내주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실험하고 실천한 철학적 텍스트들 중, 데리다의 텍스트와 관점과 교차하고 조우하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이론적 실천도 함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세계와 사물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에는, 안과 밖, 善과 惡, 現象과 本質 등의 이분법적 사유가 매우 깊게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메커니즘이 쉽게 전면적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행사하고 규정해왔던, 오랜 관념적 전통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떻게 이러한 구조가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을 수행한다.
텍스트의 해체는, 그 텍스트의 바깥에서, 그 바깥에만 존재하는 고유의 개념과 사유로 무장하여, 해체하려는 텍스트의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방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형이상학적 규정에 의해 만들어진, 안과 밖의 경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그것에 龜裂을 주는 작업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텍스트 내부에서의 균열이, 바로 해체적 전략의 엄격하고도 효과적인 전략이며, 이를 위해서는, 텍스트 내부로 일종의 ‘마스크’을 쓰고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안에서 텍스트를 반복하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모순과 균열을 파악하는 지점이, 바로 안으로서의 바깥, 혹은 바깥으로서의 안을, 다시 새롭게 조망하는 탈형이상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해체적 작업의 전략을 따르게 되면, 언제나 근원과 표피, 본질과 현상이라는, 근원주의적 형이상학의 메커니즘 역시 흔들리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근원의 보충이라는 논리가 작동된다.
根源이라고 말하여지는 중심, 本質이라는 개념과 형상은, 언제나 독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미 외부로부터의 개입과 침입을 받아들이는, 補充의 사태를 언제나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의 보충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 純粹現前과 純粹根源을 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음이 추적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이러한 근원적 형이상학의 욕망을 간직한 채, 로고스 중심주의와 신학적 세계관과 공고히 결속된, 관념의 구조를 강제하고 있음을 파악한다.
특히 절대적 眞理/善의 발견과 구현이라는 사태는, 실존적인 관계로 구조화되기 전에,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現存在者에게 떠맡겨지는, 형이상학적 빚의 경제구조로 전환된다.
나쁘고 저속한 것으로 강탈되어 존재자들에게 드러나는 진리는, 우리 존재자들에게 고스란히 債務로 남게 된다.
탕감되지 못하는 빚은, 언제나 존재자의 어깨에 눌려 있는데, 이 빚은 신학적 세계관에 의해 탕감되어지는, 기만적 전환의 순간을 맞는다. 본래 造作된 債務이므로, 그것에 대한 辨濟義務 또한 없다.
니체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존재자의 채무관계의 생성과 소멸의 메커니즘과 결합하는, 신학적 세계관의 은밀한 침투와 결속에 주목하고, 실존적 차원에서, 그 지점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빚의 청산은, 이상주의적 전통적 형이상학에게 드러나는 진리 개념, 그리고 신학적 세계관과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실존적 차원에서, 매순간 해체되고, 재구조화되어야하는 과제로서 남는다.
그것이 푸코와 들뢰즈가, 각기 다른 길에서 실천한, 탈형이상학적 노력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현실의 실존적 공간에서, 매순간 수행되는 사유의 모험을 요구한다. 탈형이상학적 관점과 해체적 전략들 -데리다의 이론적 실천을 경유하여, 김진택.


데리다의 解體主義는, 방법론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의 두 원리인, 恣意性과 對立性을 형이상학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렇게 하여, 그의 해체주의는 일체의 것을, 언어 특히 문자의 유희로 환원하려는 문자 환원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일반인들이 자기들의 삶의 토대로 확신하는 ‘외적 자연세계’도, 데까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최후의 도달점인 ‘사유하는 주체’도, 헤겔적 ‘절대정신’도, 버어클리의 ‘지각’, 칸트의 ‘경험’, 후설의 ‘현상학적 소여’,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 등이, 최후의 환원 불가능적인 토대로 간주하는 ‘지금여기’, 즉 ‘現前性’도 단순한 文字的 遊?, 즉 ‘差延’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자 환원주의는, 버어클리의 지각 환원주의, 후설의 의식 환원주의, 하이데거의 존재 환원주의, 사르트르의 주체성 환원주의 등과 같이,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문자 환원주의도, 觀念史 안에서 등장한 다양한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들이 갖는 가치 정도만, 자기의 고유한 가치로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어떤 모종의 인식은,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데서, 極端的인 唯物論的 還元主義가 등장할 수 있다.
또한 그 인식이 어떠한 인식이든, 주관의 개입을 상정하지 않는 인식은 없다는 데서, 극단적인 유아론적 환원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듯이, 사실 말이나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 인식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 환원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發生學的 認識論 및 일반 체계론의 인식 의미에 의거하여, 이러한 문자 환원주의적 인식 의미를 비판하고자 한다.
발생학적 인식론 및 일반 체계론에 따르면, 인식 혹은 대상은 단지 존재적 형태적 양상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주관의 구조적 개념적 언어적 차원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대단히 복잡한 다양한 차원의 교차에 의해 구성되며, 또한 끊임없이 변형된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모종의 인식이 있다면, 여기에는 적어도, 기능적 양상, 존재적 형태적 양상, 구조적 범주적 양상, 언어적 논리적 양상, 행동적 조작적 양상, 변형적 진화적 양상, 환경적 인습적 양상, 지향적 의도적 목적적 양상 등의 다양한 양상들이 복합적으로 관여하지, 오직 문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비판, 문장수.


데리다의 해체적 논리가, 서양형이상학의 전통적인 토대론적, 혹은 결정론적 사고를 비판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해체적 사고가 갖는 비판적인 힘과 한계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왜 해체인가?, 해체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어떻게 해체하는가?, 결과적으로 해체는 무엇을 할 수 있/없는가? 라는 물음을 묻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배경적 이해를 위해서, 해체적 사고의 등장과 관련이 있는, 20세기 유럽철학의 세가지 모티브, 반토대주의적 철학, 관계적 사고, 의식철학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언어철학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회가 지적된다.
여기서 데리다의 해체적 프로그램이, 현대 유럽철학의 토대주의적 철학 전통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토대주의적 철학의 전통을 비판하고, 그 전통을 해체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주장하게 되는 방식이 논의된다.
여기서 전통적 철학의 해체는, 두 가지의 모순적인 작업에 관여하는 데, 그것은 서양의 전역사에 걸쳐서 철학이 구성되어온 방식을 상세하게 밝혀냄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구성될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다.
즉, 한편에서 해체는 철학의 가능성의 조건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철학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보여준다.
데리다에 의하면, 철학이 가능해왔던 이유는, 그것의 활동이 토대론적 논리에 의거했기 때문이고, 철학이 불가능한 이유는, 철학은 해체적 논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토대론적 논리란, 자의 규정을 위해서 우선 自를 他와 구별하고, 그리고 자에 대해 타를 차별함으로써, 자의 권위에 의해 타를 자에 종속시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를 통해서, 자의 동일성의 세계는, 존재자의 토대적 지반이 된다. 이러한 권위적 논리에 포함되는 것은, 이분법적 논리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다.
그러나 해체적 논리에 의하면, 同一性의 세계는 없다. 해체적 논리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은, 一者는 항상 그리고 이미 타자의 영향 혹은 보충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일자의 영역에 항상 타자의 계기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동일성은 타자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고 배타적이라고 여겨졌던 일자의 세계는,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해체적 논리는 동일성의 세계를 분열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토대주의적 논리는 결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고, 반면 해체의 논리는 일자와 타자 간의 결정불가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토대주의적 논리와 해체주의적 논리 간의 이러한 차이점이 비교 분석된다.
데리다는, 그가 플라토의 텍스트 ‘파이드러스’를 분석할 때, 결정불가성의 논리로서의 이러한 해채적 논리를 적응시키는데, 데리다의 해체적 논리가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그가 ‘파이드러스’를 읽는 방식이 解體的 讀法의 한 예로서 논의된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은, 철학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이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철학의 한계는, 주로 이분법적 논리에 의거한, 理性的 언어의 규정성이 갖는 한계이다.
그는 차연, 보충, 파종, 원본적-글, 일반적 텍스트 등의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이성적 담론들이 그것에 근거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것들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배제하거나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이성의 역설적이고 불가피한 타자적 영역을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철학 혹은 이성의 타자란, 형이상학적 담론에서 동일성의 논리로는 모두 소화될 수 없는, 이미 그리고 항상 초과되어 있는 부분들이다.
이성의 타자가 항상 초과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지적인 표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성적 담론도, 그것이 있음/없음, 안/밖, 앞/뒤, 현전/부재 등등의 틀 안에서 작용하며, 또한 지적인 표상이, 그 틀로부터 가능한 한에서, 그 틀 자체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눈으로 사물들을 인식하지만, 눈 자체는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유비를 갖는다.

-하략-

목차소개

▣ 목차



제1장. 데리다 철학 一般
포스트모더니즘, 유럽 中心主義 解體, 東洋文明 古代的 解體主義,
로고스 中心主義 解體, 逆說, 老子, 莊子, 無爲而無不爲, 無爲自然,
逍遙遊, 西歐 形而上學 顚覆, Fundamentalism, 龜裂내기, 脫境界,
劣等한 他者를 향한 開放, 差延(différance), 强制된 觀念, 아포리아,
더 진짜 같은 模造物, 同時的 二重性, 造作된 債務, 解體的 讀法,
純粹現前과 純粹根源이라는 거짓 image, 文字的 遊戲로서 差延,
低劣한 유럽 이외에 대한 君臨, 同一性의 세계는 없다, 아이러니,
意味不在의 特別空間 khora, Jean-Paul Sartre, Keiji Nishitani,
二分法的 境界의 解體, 劇中劇으로서 mise en abyme, 動物人間,
意味의 非決定性으로서 主體의 죽음, 眞理라는 幽靈.

제2장. 데리다 철학 總論
思惟 限界 너머, 神이 되려고 하는 人間, 知識權力, 神으로서 君主,
神의 죽음, 神의 痕迹, 貧困하므로 아무 것도 아닌 자들, 解放空間,
趣味로서의 삶, 人間만을 대상으로 삼는 形而上學, 換喩된 賣春,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歡待,
Herman Dooyeweerd, 은폐된 暴力性의 道德性, 正義로서 解體,
가장 강력한 幽靈 Hegel, 불가능한 現前, 脫logos, 거리두기, 다름,
絶對的 他者와의 얽힘, 自己削除로서의 空, 略號(Code), 낯섦,
眞理라는 假面을 쓴 獨斷, 中心에서 벗어나기, Meta-narrative,
뒤집어진 삼각형 모양의 텅 빈 중심, Sigmund Freud, Lyotard,
Claude Levi-Strauss, Gilles Deleuze, 創發(emergence),
Antonin Artaud의 殘酷劇(Theatre of Cruelty).

제3장. 데리다 철학 各論
파르마콘, 주름, 이멘, 대리보충, 원-흔적, Jacques Rancière,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 名可名非常名, the irreducible excess,
Walter Benjamin, Ferdinand de Saussure, 이미 미끄러진 삶들,
Jan Svankmajer, Jacques Tati, Roman Jakobson, 不確定性,
絶對性과 中心性의 虛構를 드러냄, 유럽적 帝國主義, 白色神話,
後期資本主義, 다른 곶(L"Autre Cap), 差延이 되어버린 差異들,
後期産業社會, 안과 밖, 善과 惡, 現象과 本質, Jacques Lacan,
意味의 同時的 겹침, 意味重疊의 相互텍스트性, Roland Barthes,
늘 그러하게 補充하는 根源, 세계를 보는 눈 자체는 볼 수 없다,
이합 핫산, 아놀드 토인비, 찰스 올슨, 장 보드리야르, 어빙 하우,
찰스 젠크스, 레슬리 피들러, 수잔 손탁, 프레드 릭 제임슨, 백남준,
줄리아 크리스테바, 위르겐 하버마스, 마샬 맥루한, 토머스 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폴 파이어아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
形式性과 總體性의 拒否, 意味의 二重的 共存의 空間 pharmak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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