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삶

알랭 바디우 | 글항아리 | 2019년 02월 0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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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철학에 관심이 있든 없든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그리고 오늘날 현대 철학을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가 알랭 바디우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에서 바디우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들려준다. 그 대상은 특히 "젊은이들"이다. 크게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 이 책은 1장에서 오늘날 젊음이 갖는 의미를 탐색한다. 그 대상을 성별로 나누어 살펴본 게 각각 2장(소년들의 장래에 대하여)과 3장(소녀들의 장래에 대하여)이다. 이 글들은 바디우가 프랑스 및 벨기에와 그리스 등지의 고등학교나 교육기관 등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그의 세미나를 계기로 실시된 강연들을 토대로 한다. 일종의 젊음에 관한 강의록 묶음인 셈이다. 한때 열렬한 마오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던 철학자이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 활동가인 이 늙은 철학자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

저자소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년 모로코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극작가·소설가·정치 활동가로, 젊은 시절에는 사르트르주의자였으며 이후 루이 알튀세르의 작업에 참여했다. 1968년 5월 혁명 이후 확고한 마오주의 노선을 취하며 알튀세르와 결별, 1970년대 내내 마오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마오주의 운동이 쇠락하자 다른 대안을 찾고자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그 고민의 결과를 담은 책이 바로 『존재와 사건』이다. 바디우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와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파리 고등사범학교 소속 국제프랑스현대철학연구센터CIEPFC를 창설했다. 현재는 스위스 자스페에 위치한 유럽 대학원의 르네 데카르트 석좌교수로 있다.
대표 저서로 『주체의 이론』(1982), 『존재와 사건』(1988), 『세계의 논리』(2006) 등이 있으며, 최근 『행복의 형이상학』,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 『메타정치론』, 『일시적 존재론』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 『참된 삶』은 프랑스 및 외국의 고등학교나 교육기관 등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세미나에서 진행한 강연을 묶은 것이다.

역자소개

박성훈

연구 집단 CAIROS 회원이며, 원래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철학 및 신학 관련 책들을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테드 W. 제닝스의 『예수가 사랑한 남자: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 『무법적 정의: 바울의 메시아 정치』와 피터 홀워드의 『알랭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가 있다. 그 외에도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와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메타정치론』 등이 있다.

목차소개

1장 오늘날 젊다는 것, 그 의미와 무의미
2장 동시대를 사는 소년들의 장래에 관하여
3장 동시대를 사는 소녀들의 장래에 관하여
후기
옮긴이의 말

출판사 서평

"내가 할 말은 상당히 간명하다. 나의 목적은 젊은이들의 타락이다.”

젊은이들이 진리의 주체로서 참된 삶을 살아가기를
소년들, 그리고 소녀들에게 보내는
‘늙은’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제언


“나는 젊은이들의 타락을 요구한다”
바디우가 이 글을 시작한 2015년, (프랑스어판은 2016년 출간) 바디우의 나이는 일흔아홉이었다. 그는 글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일흔아홉인 자신이 왜 젊은이들에게 젊음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밝힌다.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훈계한다는 오해, 소위 자신은 꼰대가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자 한 듯하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말을 걸려는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무엇보다 그는 젊은이들이 겪는 중대한 방황을 관찰해왔다. 아들딸과 그들의 친구들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헤쳐나가며 그 가운데 자기의 자리를 찾는 것을, 그리고 젊은이들의 자기비하 경향을 목도했다. 그는 계속해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주민 숙소나 공장에서 정치 활동가로 일하며 이주 노동자 젊은이들을 만났다. 미래에도 여전히 가치 있을 법한 것을 전수하기 위한 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의 청중은 당연히 젊은이여야 하고, 그렇기에 “젊음의 문제는 바로 철학자의 문제”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아주 유명하고도 오래된 이야기에서부터 논의를 풀어나간다. 여기서의 ‘타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타락의 삼요소로 불리는 돈, 쾌락, 권력에서의 타락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이 모든 것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있음을, 바로 ‘참된 삶’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시작되는 타락이다. 그것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살아갈 보람이 있는,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을 훨씬 능가하는 무엇이다.
오늘날 젊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중적이다. 젊은이들은 이중으로 대상화된다. 젊음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반편, 기성세대에게 미래를 위한 재료로 간주되는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거 소크라테스 시대에 젊음이 이용 가능한 대상이 되는(가문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재산을 물려받고 공적인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보다 나은 참된 삶이 있다는 생각을 유포하는 일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비단 고대 아테네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이러한 일은 반복된다. 오늘날 이러한 충돌은 ‘세대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바디우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바디우는 1장 첫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왜 (나는) 젊은이들 자신에게 젊음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보충적인supplementaire 관심을 가지는가?” 여기서 ‘보충적인’이라는 말은 어떤 것에 무언가를 더한다는 의미를 넘어, 다른 것을 더함으로써 원래의 것의 성격을 아예 바꿔버린다는 의미로 이해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젊은이들을 문제와 분석의 대상으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측은한 대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젊은이의 타락을 요청하는, 즉 젊은이들이 스스로 어떤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진리의 ‘주체’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는 철학의 오래된 주제를 재차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입문의례 없는 입문의례를 거치는 소년들
알랭 바디우는 소년들(2장)과 소녀들(3장)에게 각각 한 장씩 할애한다. 그는 양성의 차이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사유하는 일’에 분명하게 다른 영향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전통의 동요로 인해 젊은이들은 이전 시대에 비해 한층 자유로운 입장에 서게 되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입문의례가 사라지고 과거 전통 사회에서 이어져온 노년 숭배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디우가 전통에서의 입문의례로 들고 있는 예시는 소년의 경우 군복무이고, 소녀의 경우 결혼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의 경우이기 때문에 한국 상황에 완전히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방향성은 일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년들, 즉 남자 젊은이들 혹은 아들들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바디우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 『모세와 일신교』에서 원시 부족 무리의 모티프를 차용하여 이를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원시 부족 무리 안에서 모든 향유(주이상스)의 수단을 독점하는 아버지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아들들은 모여서 함께 아버지를 죽이고 공동체 내의 향유 수단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친 살해의 죄책감은 오히려 아버지를 유일신의 형상으로 만들고, 결국 ‘아버지에 대한 봉기’는 일종의 아들들의 입문의례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지독한 반反자본주의자이자 마오주의자인 바디우의 표현에 따르면, “자본주의라는 얼음물”에 빠져 전통적 상징화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현대 사회는 이러한 아들들의 입문의례가 사라져버렸으며, 젊음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의 젊음을 질투하는 형상이 된다. 아들들은 ‘입문의례가 없는 입문의례’를 거쳐 어른의 몸이 되어서도 온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다. 즉, 성인의 유아화를 겪는다. 바디우는 이러한 형상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독제로 (사랑, 정치, 예술, 과학을 통한) 진리의 네 가지 절차를 제시한다. 도착倒着된 몸은 진정한 사랑의 마주침에 이름으로써, 희생된 몸은 참된 정치에 동참함으로써, 능력 있는 몸은 예술과 과학에 힘씀으로써, 자본주의에 의해 붕괴된 상징의 부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날의 젊은 아들들에게는 새로운 폭력과 상징이 필요한 것이다.


‘여성-일자’를 벗어나 새로운 여성상으로
그러나 소년들보다도 전통의 붕괴로 인해 더 많은 변화를 맞는 건 소녀들, 즉 여자 젊은이들 혹은 딸들이다. 소녀들의 장래를 다룬 마지막 3장에서 바디우가 주목하는 수는 ‘둘’이다. ‘둘’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 이야기하는 남성이라는 ‘하나’(1-일자)에 비추어 남성의 타자로서 제시되는 두 번째 성으로서의 둘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바디우가 강조하는 바는 순서를 나타내는 둘로서의 둘이 아니라 수의 크기를 나타내는 기수 체계에 따른 둘이다. 즉 여성을 나타내는 숫자 둘이 남성을 나타내는 하나에 비해 더 크다는 의미가 된다.
바디우는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을 통해 전통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남자-여자의 관계를 설명한다. 주인은 모든 일을 노예에게 시키고 결국 본인은 할 줄 아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노예는 어느 순간 주인의 역량을 능가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역전될 가능성이 다분해진다. 점점 물리적인 힘의 필요가 사라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입지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남자는 입문의례가 사라져버린 탓에 어른이 되지 못하지만, 여자는 소녀들이라도 해도 이미 성인 여성과 같이 조숙하다.
전통 사회에서 소녀들의 문제는 단순하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딸은 더 이상 결혼의 논리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전통의 세계에서 딸(소녀)과 여자를 가르는 것이 남자였다면, 소녀들은 점점 남성적 억압이나 오래된 세계에 퍼져 있던 결혼에 대한 의존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녀들은 동시대를 사는 소년들보다 훨씬 편하게 지내고, 실제로 학업 면에서 특히 더 나은 성취를 보인다.
이때 한 가지 바디우가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은 “부르주아적이면서도 위압적인 페미니즘” 조류인데, 이러한 페미니즘 담론은 기존의 남성 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여성으로 옮겨오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남성적 의미의 하나-일자를 남성-일자에서 여성-일자로 가져오고 싶어하는 것인데, 바디우는 이러한 여성-일자를 지양하고, 위계 구도 자체를 타파하는 장래의 새로운 여성상을 찾기를 주장하고 있다. 바디우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데, 스스로도 3장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한다. “소녀들에 대해, 어린 딸들 또는 젊은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늙은 남자라면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라고.
결국 바디우가 젊은이들에게, 소년과 소녀들에게 호소하는 젊은이들의 타락이란, 소년들은 스스로에게 규율을 부여할 새로운 상징을 찾으라는 것이며(즉 어른이 되라는 것이며), 소녀들은 자본주의적 ‘여성-일자’의 유혹에서 벗어나 기존에 없던 새로운 여성상을 정립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결국 결코 실존하지 않지만 언제나 젊은이들 안에 간직되어 있을 ‘참된 삶’에 대한 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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