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철학, 가장 조선인다운 조선인 율곡 이이의 철학사상

탁양현 | e퍼플 | 2019년 01월 04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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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제1장. ‘栗谷 李珥’는 누구인가



1. 性理學者 ‘율곡 이이’

‘李珥(1537~1584)’는, 朝鮮王朝를 대표하는 文臣이자 性理學者이다. 本貫은 德水, 字는 叔獻, 號는 栗谷이다. 관직은 吏曹判書에 이르렀다. 諡號는 文成이다.
西人의 領袖로 추대되었으며,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 등과 함께 文廟從祀와 宗廟配享을 동시에 이룬 6賢 중 한 사람이다.
9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조선왕조 최고의 秀才였다.
16세 때 어머니 申師任堂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東人과 南人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나마 李珥 정도의 강력한 보수주의자인 탓에, 승려 생활과 佛學에 대한 修學을 비판의 빌미로 삼는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그런데 예컨대, 尹?, 朴世堂 등은 朱子學에 대해 異見을 제기한다는 사실만으로 斯文亂賊이 되었으니, 율곡과는 좋은 비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조선왕조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는 ‘性理學的 朱子學’에 대해서는, 字句 하나도 달라서는 안 된다. 그러니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스러운’ 이데올로기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스러움’은, 북한의 主體思想에서 여실히 재현되고 있다. 白頭血統과 勞動黨의 獨裁에 대해서는 한치의 어긋남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2.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

율곡은, 當代를 개국 이후, 오랜 안정과 50여년간 이어진 四大士禍의 혼란 및 을사사화 이후, 20여년간 이어진 외척정치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모순과 부패가 심화된 상태로서, 시급히 경장하지 않으면 곧 土崩瓦解의 결과에 이르게 될 위기로 진단하고, 이에 구체적인 개혁의 두 축으로 貢案 개정과 軍政의 개혁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愛民, 畏民의 마음으로 세금과 ?役을 줄여 가볍게 해주며, 형벌을 신중히 하며, 절약하여 재물을 풍족하게 만들고, 백성에게 恒産이 있게 한 다음, 軍政을 닦음으로써, 興利除害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삶을 즐기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율곡의 양병설은, 安民을 위한 그의 도학적 경세설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또한 양병을 위해 양민, 군사훈련, 인재등용, 교화를 다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양병설은 養民을 우선으로 하는 도학적 양병설이며, 군사훈련, 인재등용, 교화를 갖춘 精兵論이었으며, 輔國安民이라는 그의 衷情으로부터 나온 시의적절한 대책이었다.
그러므로 율곡의 양병설이 백성들을 동요하게 하여, 오히려 화를 기르는 것이 될 것이라는 당대의 비판이나, 십만 양병을 비롯한 그의 양병설을 날조된 것이라고 糊塗하거나, 혹은 당시의 국력으로 보아 현실성이 없는 空論이었다는 근래의 주장 등은 모두 적합한 비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율곡 양병설과 그 도학적 특징, 장숙필, 율곡사상연구.

李浚慶이 죽기 직전 朋黨의 弊害에 관한 遺箚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惡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黨爭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서, 東人과 西人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의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貢納의 폐단 是正策인 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東人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戰國時代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사무라이’는, 일본 내 세력 내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未久에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西人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이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大提學을 역임하고 右贊成에 올랐다.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10만 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養兵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10만 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10만 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이에, 후대에 행해진, 일종의 歷史美化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栗谷全書에 의거하여 살핀다면, 율곡이 평생토록 조선왕조의 유지를 위해 국방과 경제를 강조했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3. 엘리트 士大夫 가문에서 태어나다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外家인 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胎氣를 느끼게 된 계기가, 黑龍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本家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형제 정승인 경재 이기, 용재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또한 종숙(당숙) 이기와 이행은 당대의 실권자들이었고, 그들은 외가쪽으로는 生六臣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고, 死六臣 성삼문의 외종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野史에 의하면,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의정부 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乙巳士禍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용한 탓에, 명종 말엽 官爵을 削奪 당했다.


4. 親母 申師任堂과 庶母 權氏

어머니 申師任堂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 능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높은 덕을 지닌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어머니를 두었던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申命和는, 조광조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己卯士禍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유교,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이원수는 신사임당 외에도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庶母 權氏는 酒母 출신으로 술주정이 심하였는데, 신사임당에게는 근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권씨는 이이를 괴롭혔으나, 그는 원한을 품지 않고 서모를 극진히 모셨다.


5. 타고난 神童이며 빼어난 孝子였던 ‘율곡 이이’

李珥는 어려서 神童이라 불렸다. 그는 生後 1년도 안 되어서, 말과 글을 깨우쳐 주변을 놀라게 하였는데,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天才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史略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지극히 小說的이다. 물론 율곡 이이의 天才性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유치원생 쯤의 나이에 언어를 터득하고, 더구나 스승보다 史略의 토를 더 잘 달았다는 대목은 당최 신빙성이 없다.
그러니 스승이 유치원생 보다 무식했거나, 지나친 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래에 기술되듯, 더없는 효자였다고 한다. 타고난 신동이면서도 빼어난 효자였다고 하니, 역사란 것이 어떤 식으로 기록되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여하튼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이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탄복하였다 한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 이원수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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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6. 忠孝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의 체제 이데올로기 중심에는 忠孝가 있다. 여기서 忠은 임금에 대한 忠誠이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은, 중국 天子의 諸侯이다. 그러니 事大主義 체제 하에서 충성은, 결국 중국에 대한 충성이게 된다.
그러한 충성을 도모하는, 가장 기초적인 文化思想的 바탕이 바로 孝다. 그래서 孝道를 잘 실행하는 인간존재의 집합체로서 家가 결성되고, 그러한 家들이 모여 國家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적 과정을 표현하는 개념이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그런데 여기서 平天下는, 세계를 지배한다고 上程되는 覇權國으로서 中國 天子만의 고유한 덕목이므로,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忠孝는 修身齊家治國에 한정된다. 현대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라면, 제1의 패권국인 美國만이 평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단지 논리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다.


7. ‘牛溪 成渾’을 만나다

1548년, 이이는 13세 때, 進士 初試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경서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스승 없이 趙光祖를 師叔하다가, 그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休庵 白仁傑을 찾아가 受學하였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牛溪 成渾을 만나는데, 성혼은 그의 오랜 친구가 된다. 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成守琛의 아들이자, 성수침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 파주는 친구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이이와 성혼은, 時流의 타락을 논하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하였다.
‘우계 성혼’은, 1535년에 한성부 順和坊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후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된 성리학자 成守琛이고, 어머니는 坡平尹氏이다. 고려가 망하자 은거한 成汝完의 후손으로, 함흥차사로 유명한 成石璘의 종6대손이며, 그의 동생인 예조판서 成石因의 6대손이었다.
종6대조 성석용은 성삼문과 성담수, 성담년의 증조부이며, 이기의 외고조부였다. 5대조 성억은 좌찬성이었고, 고조부 성득식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증조부 충달은 현령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사숙공 성세순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수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39년(중종 34년) 5세 때, 己卯士禍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경기도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으며, 이후 파주에서 자랐다. 이후 파주 출신인 ‘율곡 이이’를 만나 친구가 되어, 그와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게 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그는 말을 삼가였고, 성품이 독실하였고 민첩하였다. 청소년기가 되어서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 이름을 ?庵이라 하고, 이를 호로 삼아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 뒤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師叔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8. ‘우계 성혼’에 대해 냉혹한 평가를 하다

1567년, 선조가 인재를 추천 받을 때, 士林에서는 이 亂世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서 牛溪를 천거하는데, 우계의 사람됨을 물었다.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서 떠받드는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오랜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비교적 냉혹한 평가였다.
그런데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 라고 묻자, 이이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낫긴 하나, 수신하고 학문적 노력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성혼 역시 이이의 그러한 답변에, 유감을 갖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우계 성혼’은, 경기도관찰사 尹鉉의 천거로, 특별히 전생서 參奉을 제수받았는데, 이후 계속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적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고, 공조좌랑과 공조정랑을 잠시 지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이이 등이 찾아와, 그에게 관직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명종 말엽에 이량, 이기, 심통원, 윤원형 등의 외척 권신들이 몰락하고, 사림파들이 정치에 등용되자, 그 역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거나,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인재를 초빙하는 정책을 펴, 선조 초년에 그는 학덕으로 천거되어 參奉·縣監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로도 掌苑, 조지서 사지, 주부, 판관, 첨정 등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을해당론 이후, 심의겸, 정철 등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자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선조 즉위 후,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1568년(선조 1년)에는, 이황을 만나 사물을 담론하였다. 이때 그는 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절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뒤로 1572년부터 7년간, 이이와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理氣 논쟁을 한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정월에는 宗廟署令으로 체임되어 내려가던 중, 귀향을 허가받지 못하여, 다시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그가 되돌아오자, 왕이 직접 문병하고, 약을 하사한 뒤 治道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치도의 방법으로서 간단하게, “임금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9. ‘退溪 李滉’을 만나다

白仁傑의 門人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後生可畏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敬工夫나 格物·窮理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론하던 중, 理와 氣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의 문도들은, 그를 異人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의 문도들 중,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이황을 모욕하려 든 論敵으로 규정한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해 겨울 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生員試와 式年文科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前無後無한 기록이다.


10. 理와 氣에 대해 논변하다

조선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忠孝다. 그러한 충효를 작동시키는 철학사상적 배경에는 理氣論이 배치되어 있다. 理氣 개념이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탓에, 理氣論爭 역시 형이상학적인 卓上空論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을 평가할 때, 항상 理氣論은 그 주된 비판 대상이 된다.
실상 理氣라는 것을 제아무리 明晳判明하게 규명하더라도, 인간존재의 실제적인 삶이 나아지는 역사적 사례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 역시, 이러한 理氣論에 대해서, 당대의 대표 碩學이었던 퇴계 이황과 논변한 것이다.
李滉(1502~157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本貫은 眞寶, 字는 景浩, 號는 退溪, 諡號는 文純이다. 이언적,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종사와 종묘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사람이다.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한편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약탈해갔는데,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佛敎와 陽明學은 異端이자 禍로 간주하고, 임금에서부터 동료,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교 배척, 양명학 배척을 한결같이 말하였다.
이황은,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理와 氣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理氣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理는 純善無惡한 것이고, 氣는 可善可惡한 것이니, 즉 理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氣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理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奇大升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四端七情論’으로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하략-

목차소개

▣ 목차




제1장. ‘栗谷 李珥’
1. 性理學者 ‘율곡 이이’
2.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
3. 엘리트 士大夫 가문에서 태어나다
4. 親母 申師任堂과 庶母 權氏
5. 타고난 神童이며 빼어난 孝子였던 ‘율곡 이이’
6. 忠孝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7. ‘牛溪 成渾’을 만나다
8. ‘우계 성혼’에 대해 냉혹한 평가를 하다
9. ‘退溪 李滉’을 만나다
10. 理와 氣에 대해 논변하다
11. 四端七情 論爭
12. ‘支配者의 道德’과 ‘被支配者의 苦痛’
13.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5. ‘니부어’의 ‘기독교 현실주의’
16.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성’
17. ‘4가지 마음’과 ‘7가지 감정’
18. 理(이념)이 먼저냐, 氣(물질)이 먼저냐
19. 朱子語類 이후
20. 李滉과 奇大升
21. 李珥와 成渾의 四七論爭
22. 人心과 道心
23. 嶺南學派와 湖南學派
24. 尹元衡과 乙巳士禍
25. ‘良才驛 壁書 事件’과 丁未士禍
26. 尹元衡이 鄭蘭貞을 첩으로 삼다
27. 沈通源을 탄핵하다
28. 西人의 領袖로 추대되다
29. 虛禮虛飾을 비판하다
30. ‘花潭 徐敬德’을 비판하다
31. 下級武士 집안에서 태어난 ‘서경덕’
32. 獨學과 思索으로써 학문을 이루다
33. 己卯士禍 세력의 몰락을 예견하다
34. 仁宗이 短命할 것을 예견하다
35. 고독한 은둔자 ‘서경덕’
36. 스승 없이 학문을 이룬 ‘서경덕’
37. ‘진보주의자 徐敬德’과 ‘보수주의자 李珥’
38. ‘花潭의 氣’와 ‘老子의 道’
39. 徐敬德과 황진이
40. 李滉과 曺植을 비판하다
41. 조선의 선비 ‘南冥 曺植’
42. 己卯士禍의 피해를 당하다
43. 曺植의 스승은 아버지 曺彦亨이었다
44. 政治官僚의 삶을 체념하다
45. 曺植의 名聲이 알려지다
46. 處士로서 삶을 마감하다
47. 文定王后를 寡婦라고 칭하다
48. ‘진보주의자 彫飾’과 ‘보수주의자 李滉’
49. 曺植의 수제자 鄭仁弘이 仁祖反正 때 처형당하다
50. 曺植의 제자들 중에 義兵將이 많다
51. 晋州民亂의 進步主義的 토대가 되다
52. 냉혹한 人物評을 宣祖에게 올리다
53.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다
54. 黨爭을 조정하려고 했으나 실패하다
55. 兩是兩非論과 保合調劑論을 제시하다
56. 變法更張論을 주장하다
57. 책과 부싯돌 몇 개를 남기고 떠나다

제2장. 朝鮮儒學과 栗谷哲學

제3장. 栗谷哲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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