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췌연화편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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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이날 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에 싸이셨다.
넓은 침전 화려한 침구 잠자리가 편찮음도 아니다. 짧은 여름의 밤이니 물론 지루하실 리도 없었다. 바로 곁에는 오늘 한 밤 특히 왕을 모시게 된 명예의 미희가 아름다운 쌍겹눈을 반쯤 내려 감고 왕의 입에서 어떤 분부가 내리기만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벌써 몇 달을 두고두고 이렇듯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 왕에게는 즐거운 침실도 아름다운 시비도 모두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면 왕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시는 것일가?
원 나라에 남겨 두고 오신 정인!
왕이 석달 전 귀국하시기까지 원 나라에 계시는 오랜 동안에 그렇듯 서로 아끼고 사모하던 그 여인을 못 잊어 하심이었다.
고려로 돌아오시던 그 전야, 원나라 궁성 고전(高殿) 뒤꼍에서 떨어지는 달그림자를 바라보며 이별을 설어하던 그 날 밤은 삼월달이었지만 북국의 밤바람은 퍽 쌀쌀하였다.
『어디든지 따라 가겠나이다.』
하며 왕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울던 애인을 생각하자, 왕은 이미 고려 궁실 지존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더욱 잠을 못 이루시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면 데리고 올걸!』
하고 왕은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반쯤 눈을 감고 어슴푸레 가수상태(假睡狀態)에 잠겼던 미희가 놀라 일어나 머리를 읍하였다.
『염려 말고 저리로 누워 자라.』
왕은 부드럽게 한편 자리를 가리키고는 드륵 창을 열어 젖히었다.
보름 지난 달은 파란 빛을 왕의 얼굴과 몸에 던지며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 져갔다.
『허 그날도 달은 밝았지!』
왕의 머리 속에는 또 그리운 추억이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잇대어 퍼져갔다. 백 번 천 번 하여도 또 잊을 수 없는 회상의 가지가지, 왕은 달을 쳐다보며 한숨만 지었다.
『자기도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것을 데리고 올걸.』
왕은 다시 한 번 후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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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낙랑공주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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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었던 봄빛도 차차 사라지고 꽃 아래서 돋아나는 푸르른 새 움이 온 벌을 장식하는 첫 여름이었다.
옥저(沃沮)땅 넓은 벌에도 첫 여름의 빛은 완연히 이르렀다. 날아드는 나비, 노래하는 벌레……
── 만물은 장차 오려는 성하(盛夏)를 맞기에 분주하였다.
이 벌판 곱게 돋은 잔디 밭에 한 소년이 딩굴고 있다. 그 옷 차림으로 보든지 또는 얼굴 모양으로 보든지 고귀한 집 도령이 분명한데 한 사람의 하인도 데리지 않고 홀로히 이 벌판에서 딩굴고 있다.
일없는 한가한 시간을 벌판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보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때때로 벌떡 일어나서는 동편쪽 행길을 멀리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가는 다시 누워 딩굴고 하는 품이 동쪽 행길에 장차 나타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기를 한나절, 첫 여름의 긴 해도 좀 서쪽으로 기운 듯한 때에 이 소년은 또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소년은 비로소 빙긋 웃었다. 그리고 빨리 일어나서 좀 이편 쪽에 있는 수풀에 몸을 숨겼다. 거기는 이 소년의 승마(乘馬)인 듯한 수안장의 백마가 한 마리 소년을 가다리고 있었다.
이 소년이 들풀에 몸을 숨기자 저편 행길에서는 완연히 인마의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차차 커지면서 행길에는 한 행차가 나타났다.
낙랑(樂浪) 추장 최리(崔理)란 노부였다. 문무대신의 시위를 받으며 최리의 수레가 지금 대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소년은 잠시 그 수레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동안 소년의 얼굴에는 차차 긴장미가 돌았다. 소년은 문득 허리를 굽혀서 한개 돌맹이를 집었다. 다음 순간 그 돌맹이는 소리를 내며 날았다 소년의 겨냥은 틀리지 않았다. 소년의 손을 떠난 돌은 낙랑 추장 최리의 수레를 끌던 말의 뒷다리에 가 맞았다.
다리에 날쌘 돌을 맞은 말은 한번 껑충 뛰었다가 전 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추장의 권력으로 구하여 들였던 명마가 힘을 다하여 달아나는지라 그 속력은 놀라웠다. 이 의외의 사변에 시위하였던 문무대신들이 놀라서 추장의 수레를 붙들고자 뒤를 따랐으나 그들의 말이 수레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옥저 넓은 벌 동쪽 끝에서 돌을 맞은 말은 그 넓은 벌을 무방향하여 막 달아났다. 수레 위의 최리는 비명을 올리며 구원을 청했으나 각 일각 대신들의 말과의 거리는 더 멀어갈 뿐이었다.
소년은 잠시 미소하면서 이 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최리의 수레가 꽤 멀리 간 뒤에야 비로소 거기에 매어 두었던 자기 말의 고삐를 풀고 말등에 올라 앉았다.
『백룡(白龍)아 어디 네 발을 시험해 볼가?』
말등에 올라앉아서 갈기를 한번 두들기고 소년은 숲에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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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방기현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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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온지 다섯달, 상동(尙童)은 인제 겨우 서울 길 골목 골목을 대충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몸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행길에 나가서 제기도 차고 택견도 하고 동네 양반의 댁 수청방에 들어가서 장기도 두고 제법 둘만큼 되었다.
충청도에서 처음 괴나리 봇짐을 등에 지고 거치장스런 머리꽁뎅이를 수건삼아 머리에 틀어얹고 숭례문을 들어선 때는 나이도 열네살에 어린 총각이었지마는 처음보는 서울에 얼이 빠지고 겁이 나서, 회동(會同) 정한림(鄭翰林)의 상노로 들어 간 후로는 상전의 심부름이 아니고는 큰 길에 나서지도 못하는 어리배기었다.
이름 좋은 한 울타리로 명색은 상노지마는 상전의 요강망태기를 들고 보교 뒤를 따라가는 구실도 못하였다. 그래서 안으로 사랑으로 드나들며 군불 때기나 하고 물이나 길어대는 불목한이나 다름없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년이 지나 열다섯 살이 되고 보니 어제 올챙이가 오늘 개구리란 셈으로 어느 결에 서울물에 젖어서 탈골치 메투리도 제법 엎어 신을 줄도 알게 되고 가마채를 붙들고 한 손으로 바람을 차고 가는 남의 집 계집애 종의 맵시 평도 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한 가지 여느 상노들과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을 제법 아는 점이었다.
상동이는 시골서 홀어머니의 덕으로 글방에를 다녔다 가난하게 지나기는 했어도 뼈가 상언이 아니어서 글방에 다녀도 비실거릴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정신이 일남촉기라서 한번 배운 글은 다시 공부를 아니해도 이튿날 강에는 막혀본 적이 없었다.
글씨를 쓰면 언제든지 관주 투성이었다.
천자, 동몽선습, 소학, 맹자, 그리고 통감 이렇게 다 떼고 논어를 읽기 시작할 때 집안의 형편은 상동으로 하여금 고향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누구라 있지 말라는 것은 아니로되 어머니는 어린 상동이를 앞에 앉히고
『너를 슬하에 두고 키우자고 하였더니 집안의 형편이 말이 못되서 어머니는 창피하지마는 남의 집 침모라도 들어갈 터이니 너는 서울 가서 어떻게 굴든지 출세를 해 보아라.』
하고 눈물 섞인 훈유를 하였다.
『어머니 왜 집안이 이렇게 되었소?』
하고 묻는 말에 어머니는 쾌한 대답을 아니 해주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의 말을 들건대 모자가 연명해 오던 땅을 외삼촌 되는 이가 속여 팔아 가지고는 어디로 갔는지 영영 도주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의 수입으로 지내오던 집안이 별안간 몰락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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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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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향 평양의 봄은 유자의 심사를 어질게 하매 넉넉하거니와 봄이 지나 여름이 되었다고 이 평양은 버릴 수는 더욱 없다.
보라, 기자능의 욱은 유록과 능라도의 가랑버들, 월하의 화방이며, 만일 한발 더 나아가서 모란봉 저편 강변에 꽃 같은 젊은 여자의 빨래하는 무리들이 흥에 겨워 부르는 요요한 노래를 들으며는 그것은 납량객들의 몽매 간에도 잊지 못할 명승의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무심히 흘러 가는 대동강 물에 발을 잠그고 버들 그늘에 누워 얼굴에 실바람을 들일진댄 무력에 젖은 창자도 바야흐로 씻기어 내릴 향락의 하나일 것이니 대자연의 거룩한 조화를 맛보는 자는 봄보다도 오히려 평양의 여름을 탐낼 것이다.
숙종대왕(肅宗大王) 즉위 사년 유월 열나흘날 저녁이었다.
만월에 가까운 둥근 달이 중천에 높이 솟아 있어 대동강변 일대와 청루벽 부근 일대에는 월광을 그리어 나온 사람 시원한 바람을 쏘이러 나온 사람으로 사람의 자취가 끊어지지 아니한데 강물을 흘러내려오는 유선 중에 가장 큰 배 한 척에는 오색빛 초롱 불이 월광과 빛을 다투어 있고 풍류소리 유랑한 가운데에 아릿다운 기생들의 부르는 노래소리 바람에 실리어 강 언덕 납량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저 누구의 노릿 밴지 돈 냥이나 없애네그려.』
하는 자도 있고
『여보게 오늘 밤 같이 달 밝은 밤에는 미상불 한잔 먹고 놀아야지 우리같이 빼빼 말라서야 달님이 욕하시겠네.』
하고 부러워하는 자도 있다.
『관가 노린가 보네.』
『이 사람 누구 노린 줄도 모르고 있나.』
『알 턱이 있나 빌어먹을 팔자가 왼 종일 탕건깨나 뜨는 녀석이 저게 뉘밴지 알 재주 있나. 자네 같이 발이나 재고 이목이 빨면 모르거니와.』
『기생이 한턱 내는 거라네.』
『어느 놈 삿갓을 씨우고 말이지.』
『아니.』
『그럼 무슨 턱.』
『두옥이란 기생이 있지 않은가, 행수 기생이지.』
『그래.』
『그 기생이 이번 도임한 김 감사한테 수청을 들게 돼서 제 출물로 동무들에게 한 턱을 내는 거라네.』
『아따 자넨 참 어디서 그렇게 소문을 들어 오나 아마도 자네 그 두옥이 속에서 나왔나 보이.』
『옛기 ─ 미친녀석.』
납량객들은 이렇게 농담 짓거리를 하며 웃고 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노릿배는 기생 두옥이가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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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한 일

도서정보 : 이승우 | 2020-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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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작가인생 40년, 그 시간 속 궁극적 물음들
이승우 「창세기」 모티프 연작소설집

사십 년 가까운 작가인생을 갈망 너머의 구원에 대한 천착으로 채우며 독보적인 성취를 거두어온 소설가 이승우. 그는 ‘관념의 토르소’(김윤식),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르 클레지오), ‘조용하고 진지한 영혼에서 분출된, 감동적이면서 묵직한 소설’(르몽드), ‘갈리마르 폴리오 시리즈에 오른 최초의 한국소설’ 등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수식과 상찬이 전혀 과한 것이 아님을 소설로 인생에 복무함으로써 증명해가고 있다. 한국소설로는 흔치 않은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통찰로 ‘생의 이면’을 파고든 그가 신작 소설집에서 「창세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삶의 궁극적 물음들을 마주 세운다. ‘신’이 아니라 ‘인간’의 텍스트로 「창세기」를 다시 읽고 다시 쓴 밀도 높은 작업, 그 가운데 키워드가 되어준 단어 ‘사랑’, 그러므로 이 책은 이승우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이 총동원되었다 할 수 있겠다. 열한번째 소설집이자 첫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이다.

구매가격 : 9,800 원

장마가 실어온 발복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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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가 할아버지 영조(英祖)의 대통을 이어 등극한 이래, 주소를 불문하고 머리에 왕래하는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할아버지의 곡해를 입어 인륜상 처참지극한 죽음을 당한 비통한 사실이거니와 동시에 당신의 고모님 화평옹주(和平翁主)가 매사에 동생을 옹호하여 아버지 영조의 노염을 풀기에 지극한 노력을 하였고 아버지 사도세자도 누님을 하늘 아래에는 더 없는 사람으로 사모하고 의지하여 내 지하에 간들 어이 누님의 은의를 잊겠는가 하는 말을 항시 해왔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지라 정조는 원통히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를 극력 수호해준 고모님을 고맙게 생각하여 고모님의 남편 박명원(朴明源)에 대해서도 특별한 신임을 해왔다.
누구의 말이거나 그 말이 옳으면, 그것을 배척하는 속 좁은 임금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고모님이나 그의 남편 고모부 ── 박금성위 말이라면 신중히 취급하고 어지간하면 거역치 않고 가납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하지 못할 정담도 고모에게는 하였고 고모부의 보필을 받아 오는 터이었다.
박명원은 인격이 고아한 사람이라 비록 임금의 신임이 특히 두터울지라도 그 권세를 남용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편단심으로 임금을 보필해서 왕가의 번영을 도모하기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남의 부러워함은 받을지언정 미움은 받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척신의 한 사람으로 덕망이 높았다.
그러나 여기에 한사람 임금의 두터운 신임, 다시 더 형용하면 절대적인 신임을 아끼지 아니하는 벼슬아치 하나가 있었으니 그는 홍낙춘의 아들 홍국영(洪國榮)이다.
그러나 홍은 박명원과 같은 인격자는 아니었다. 그 권세를 남용하며 여러 사람에게 원망을 사고 횡포 무쌍한 처사는 물론을 일으키었다.
그러나 언제나 상감은 눈을 감고 그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일찌기 상감이 세손(世孫) ─ 뒤를 이을 손자)으로 있어서 극도의 신경질을 지니고 있는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받들고 있을지음 자칫하면 세손의 지위에서 떨어질 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험할번한 일을 홍국영의 예민한 돈지로서 무사히 면하게 되자 세손은 그 공훈에 감격하여 「내 다음날 보위에 오른 후에는 그대가 설혹 반역의 대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대를 살리리라.」
하는 수서(手書)까지 써 준 일이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고 상감은 홍국영의 여하한 죄과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상감(정조)의 세손 시대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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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색깔

도서정보 : 꿈꾸는 담쟁이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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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색깔은 조대여고 책쓰기 동아리 ‘꿈꾸는 담쟁이’ 8명의 학생들이
10대 고등학생 소녀들의 일상과 상념을 담은 감성 넘치는 글모음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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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촌기

도서정보 : 이무영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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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일
아침 여섯시에 기상. 제법 산산하다. 일어나는 길로 우물로 가다. 우물을 친 지가 여러 날 되어서 파란 이끼가 서리어 있다.
얀정없이 샛노란 감나무잎이 두 잎새 물 위에 동동. 헤식은 밤나무 단풍 한 잎이 저도 단풍이로라 감나무잎 사이로 매식매식 돌아다닌다.
우물 둥천 이맛돌에 놓인 바가지 조각으로 물을 휘휘 저어 한 모금 마시다. 잔입이라 그런지 물맛이 곧 달다. 되거퍼 한 모금. 웬일인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고추밭머리를 돌아서 방울방울 열린 이슬을 차고 골짜기를 건너막은 밤나무 다리를 건너 산기슭에 오르다. 안개낀 때처럼 목안이 칼칼하다.
동산에 오르니 펀한 들. 모닥모닥 한줌씩 집어다 놓은 것 같은 조그만 산들이 잔솔을 덮고 요기도 하나, 조기도 하나. 으레 그 산밑에는 초가가 네다섯 집. 어쩌다 많은 곳이라야 여남은 채. 그러나 한 집, 두 집, 산당처럼 선 곳도 또한 여러 군데다.
산 아래 뫼. 뫼 앞에 농가. 농가 둘레로는 빠알갛게 불붙는 감나무가 그 이글이글한 횃불을 아직 이슬에 촉촉히 젖은 대공을 향하여 쏘고 있다. 나직한 산기슭에 불덩이 같은 단풍인가…
삐―ㄱ!
기다란 흰 연기가 널따란 들판을 가로지른다. 여섯시 봉천행인가. 누이가 나간 지 십오분. 오늘은 지각이 아닐까?
스스로 창안한 아침 체조를 한 십분. 하얀 사기 대야에 세숫물을 찰찰 넘게 떠놓고, 언제 보아도 고운 감나무잎에 소금을 한줌 갖다놓고, 세숫물 속에 얼른거리는 야윈 얼굴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려니, 우물터 위 동산 망주석에 까치 한 마리가‘깍깍깍’손을 부른다. 전하는 말에, 까치는 손이 옴을 알린다고―누가 이 산속을 찾아오려나?… 아무라도 좋으니 오기만 한다면… 소식 채갱이나마 다정히 마주앉아 하루를 즐기련만…
오후에 고개 너머 서 군이 찾아오다. 이십대 청년에게 장죽이 격에 안 맞는다. 그런 말을 하니 서 군은 오직 웃을 뿐.
“허허, 모르는 소리니, 짚단을 깔고 앉아서 세상만사를 모두 잊고 뻑뻑 빠는 맛이야 말로 신선 부럽지 않으니…”
모를러라.―된 현실 앞에 눈을 감음이 그 신선이 될지…
서, 흡, 나― 이렇게 셋이 수수밭과 콩밭 샛길을 타고 산기슭에 허리를 폈다. 우물 오른편 쪽 동백나무와 대추나무 사이로 쑥 들여다보이는 도독하고도 편편한 지점을 장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자네도 여기다 집이나 한 칸 세우게.”
하고 서가 권하는 말이다. 조그마한 여유가 있대도 초가삼간라도 세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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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과 도승

도서정보 : 윤백남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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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실정과 횡포로 민심(民心)을 잃고 있던 광해조(光海朝)에 있어서는 어른 아이 할것없이 기가 죽고 풀이 삭아 이르는 곳마다 침체한 기운이 음산하게 떠도는데 저평(砥平)읍 백아곡(白?谷)에 있는 이식(李植)의 집 넓은 바깥 마당에는 여덟살로부터 열아믄 살 쯤 되어 보이는 울망졸망한 아이들의 한떼가 싸움장난에 열중하고 있다.
돌을 모아다 성을 쌓고 홍백군으로 갈리인 두패가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나무 막대기로 된 칼들을 휘두르며 와 ─ 몰려 갔다가 또다시 우 ─ 몰려오고 어린 목이 찢어져라고 고함들을 지르며 놀이하는 모양은 비록 어린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입에 침을 삼키게 해주었다.
이때 얼굴이 맑고 눈이 영특한 한 소년이 옆에 책을 끼고 들어오다가 아이들의 왁자하고 떠드는 것을 보자 약간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그냥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럼 이 소년은 누구인가. 곧 이 집의 어린 주인 이식(李植) 그 사람이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남의 집 마당에다 돌을 쌓고 금을 긋고 한 것이 어린 것들의 마음에도 미안하였던지 장난하던 아이들은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흘글흘금 식이를 쳐다보며 흥이 깨어진 모양인데 그 중에도 똑똑해 보이는 한 아이가 앞으로 나서며
『이얘 너도 용문산(龍門山) 스님에게 글 배우러 갔었나 보구나』
하고 아첨하듯 웃었다. 식이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어 긍정하는 뜻을 표하니 그 아이는 역시 웃으며
『너도 책 두고 나온. 우리 하고 놀자.』
한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참 재미있단다.』
『그래 여간 기쁘지 않아 얘』
『얼는 나온!』
하며 충동을 하나 식이는 낯을 붉히며 고개를 흔드니, 그것은 그가 비겁하거나 그 같은 놀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몸이 약질이라 아이들 틈에 섞이어 놀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과연 그의 얼굴은 맑고 준수하기는 하난 소년다운 혈색이 없이 오직 창백할 뿐이오, 손팔 역시 피부 속을 달리는 정맥(靜脈)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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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

도서정보 : 이무영 | 2020-12-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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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둘레가 깔쪽깔쪽한 오십전짜리 은전 한 푼이 나의 총재산이었다. 이 오십전으로 서울까지의 삼백리 길 노자를 해야 했고, 이 오십전으로 백사지 땅이나 진배없는 서울 에서 고학을 해야 했다. 아무리 물가가 싼 시절이라 하지마는 정말 터무니없는 공상이었다. 열세 살 때 일이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는 얼마간의 학비쯤은 보태어줄 수도 있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두 섬지기의 광작이었고 남한테 내어준 땅섬지기로 텃도지 들어오는 것도 약간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보조도 바랄 수 없이 일을 저지르고 집을 떠났었다. 서울 공부 가는 것을 방해하는 형을 재떨이로 때리어 머리를 터뜨렸던 것이다.
아버지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반은 죽는 판이다. 그날 밤을 메밀묵 장사 하는 복순네 집 벽장 속에서 새우고, 이튿날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맨주먹으로라도 떠날 작정이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가 오십전 한 푼을 주시면서,
“음성 가서 며칠 있다가 오너라. 끼니 거르지 말구 떡을 사먹는지 밥을 사먹든지 해.”
이렇게 일러주신다. 아버지 성미를 아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보다도 더 겁이 나시는 눈치시었다. 처음 만져보는 닷 냥짜리다. 그때는 어린 생각에는 이 닷 냥만 가지면 조선땅이라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내게는 큰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해 설날 양직 분홍 두루마기를 새로 해입었었다. 양직이 우리 시골에 처음으로 들어왔었다. 값이 비싸서 아무도 엄두도 못 내는데 어머니가 막내아들이라고 끊어주셨던 것이다. 그것을 입고 이화(모표)없는 마래기(모자)를 쓰고 나선 것이다.
집에서 이천까지는 백사십리나 된다. 장원까지는 지름길을 왔으니까 백이십리 폭이지만 열세 살 난 소년한테는 벅찬 길이었다. 그래도 그날로 이천까지 왔었다. 두 끼 먹고 하루 숙박에 한 냥(십전)이었다. 음성 외가댁에 가서 며칠 묵은 일은 있었지만, 집을 떠나서 객지에 나오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저녁을 먹고 앉았으려니까 설움이 복받친다. 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말았었다. 울다가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니 먼동이 튼다. 나는 아침도 안 먹고 또 길을 떠났었다. 보행 객줏집 할머니가 신통하다고 하시면서 닷 돈(5전)을 되거슬러 주신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백오십리였다. 경안까지 겨우 와서 자고 이튿날 서울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니 왕십리다. 서울에는 같이 졸업한 화석이가 먼저 와서 있었다. 화석이는 용산에 고모님이 계시기도 했지만, 집안도 넉넉했다. 내가 터무니없는 고학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실은 이 화석이 때문이었다. 화석이한테 지기가 싫었다. 화석이가 일번 내가 이번으로 졸업은 했지만 사뭇 일번을 번갈아 다투던 화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화석이는 반가워했다. 보름턱이나 먼저 올라온 화석이는 전차도 탈 줄 알았고, 학교도 혼자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얘, 저 육중한 것이 어떻게 저렇게 좁다란 쇠길 위로 달리면서도 쓰러지지를 않는다지?”
하고 내가 희한해했을 때도 화석이는,
“에이, 밥통, 그게 왜 쓰러져! 안 쓰러져.”
기실 저도 똑똑히는 모르는 눈치였는데도 이렇게 핀잔만 준다.

구매가격 : 5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