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포그래픽 미국의 모든 것

도서정보 : 크리스티앙 몽테스, 파스칼 네델렉 | 2023-02-28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는다!

국토나 인구나 경제력, 군사력 등 미국은 어느 모로 봐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다. 북극권에서 열대 지역까지 커버하는 국토 면적이 세계 3위인데다 드넓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마치 앞마당처럼 지배하고 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17세기 초부터 영국을 위시한 서유럽인들의 북동부 지역 진출로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종주국 영국과 독립 전쟁,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남북 전쟁, 19세기의 서부 개척 시대를 거치며 오늘날 미국의 모습을 완성했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세계 각지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답게 미국은 인종적 다양성과 함께 광활한 대륙의 지리적 다양성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미국은 단일 국가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의 문명권으로 이해하는 게 차라리 올바른 접근법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국토의 지리적 특징과 환경을 바탕으로 이른바 ‘미국의 모든 것’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며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지리학자와 지도 제작자가 다양한 데이터와 자료로 만든 컬러 지도와 도표를 통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국의 참모습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지리학적으로 접근하면 미국의 장단점에 대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한 견해는 세계 각지로부터 잘못 알려진 고정관념이나 가치관 등이 산더미처럼 모여든다. 예를 들면 눈부신 경제적 성공, 점차 확대하는 불공평과 불평등, 자유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 친미와 반미를 둘러싼 국가별 대립 등이다. 따라서 미국은 여러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

미국에 대해 세계인이 동경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 초부터 세계 질서를 주도한 최강국 미국에 대해 세계인이 동경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화를 주도하면서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제시한 미국이 최근에 탈세계화로 회귀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는 미국은 나쁜 제국주의와 좋은 제국주의 사이에서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이처럼 미국이라는 나라의 자화상은 아주 복잡하고 미묘하다.
미국의 초상화를 제대로 그리고자 한다면 언제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견해가 충돌한다. 이처럼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조정하는 국가적 메커니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메리칸드림을 상징하는 화려한 성공 신화와 대도시 빈민가의 노숙자는 미국의 빛과 그림자처럼 선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많은 미국인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거나 언젠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류 대학들이 지식경제의 중심에서 기술혁신을 하고, 북동부의 뉴욕과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벗어난 절대 빈곤층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고, 인종차별과 빈부 격차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갈등은 통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총기를 사용하는 흉악 범죄의 증가와 시중에 풀려 있는 수억 정이 넘는 총기는 여전히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미국과 미국인의 자화상을 통해 건국 이후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낙관주의와 함께 수백 년간 누적된 문제와 갈등의 뿌리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제목처럼 미국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지만, 독자 여러분에게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16,000 원

지포그래픽 미국의 모든 것

도서정보 : 크리스티앙 몽테스, 파스칼 네델렉 | 2023-02-28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는다!

국토나 인구나 경제력, 군사력 등 미국은 어느 모로 봐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다. 북극권에서 열대 지역까지 커버하는 국토 면적이 세계 3위인데다 드넓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마치 앞마당처럼 지배하고 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17세기 초부터 영국을 위시한 서유럽인들의 북동부 지역 진출로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종주국 영국과 독립 전쟁,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남북 전쟁, 19세기의 서부 개척 시대를 거치며 오늘날 미국의 모습을 완성했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세계 각지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답게 미국은 인종적 다양성과 함께 광활한 대륙의 지리적 다양성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미국은 단일 국가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의 문명권으로 이해하는 게 차라리 올바른 접근법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국토의 지리적 특징과 환경을 바탕으로 이른바 ‘미국의 모든 것’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며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지리학자와 지도 제작자가 다양한 데이터와 자료로 만든 컬러 지도와 도표를 통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국의 참모습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지리학적으로 접근하면 미국의 장단점에 대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한 견해는 세계 각지로부터 잘못 알려진 고정관념이나 가치관 등이 산더미처럼 모여든다. 예를 들면 눈부신 경제적 성공, 점차 확대하는 불공평과 불평등, 자유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 친미와 반미를 둘러싼 국가별 대립 등이다. 따라서 미국은 여러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

미국에 대해 세계인이 동경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 초부터 세계 질서를 주도한 최강국 미국에 대해 세계인이 동경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화를 주도하면서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제시한 미국이 최근에 탈세계화로 회귀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는 미국은 나쁜 제국주의와 좋은 제국주의 사이에서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이처럼 미국이라는 나라의 자화상은 아주 복잡하고 미묘하다.
미국의 초상화를 제대로 그리고자 한다면 언제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견해가 충돌한다. 이처럼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조정하는 국가적 메커니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메리칸드림을 상징하는 화려한 성공 신화와 대도시 빈민가의 노숙자는 미국의 빛과 그림자처럼 선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많은 미국인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거나 언젠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류 대학들이 지식경제의 중심에서 기술혁신을 하고, 북동부의 뉴욕과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벗어난 절대 빈곤층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고, 인종차별과 빈부 격차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갈등은 통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총기를 사용하는 흉악 범죄의 증가와 시중에 풀려 있는 수억 정이 넘는 총기는 여전히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미국과 미국인의 자화상을 통해 건국 이후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낙관주의와 함께 수백 년간 누적된 문제와 갈등의 뿌리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제목처럼 미국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지만, 독자 여러분에게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16,000 원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

도서정보 : 일본박학클럽 | 2023-02-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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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는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
- 39가지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통찰하면 세계사의 장대한 흐름이 한눈에 잡힌다

깜짝 퀴즈 하나. ‘세계사에 등장한 최초의 길이자 인류가 내디딘 가장 위대한 첫걸음은?’ 정답은 ‘출아프리카’, 즉 아프리카 대륙에 맨 처음 뿌리 내린 인류가 그곳을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동한 사건이다. 만일 그 위대한 길, 위대한 여정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 떨어져 싹을 틔우지도 뿌리내리지도 못하는 식물 씨앗처럼 태동하지도, 성장하고 발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깜짝 퀴즈 둘. ‘전쟁을 계기로 지식혁명의 불길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확산시킨 역사적인 길은?’ 정답은 8세기,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국 당나라에서 이슬람 아바스왕조를 거쳐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제지법 전파의 길’이다. 이 위대한 길이 없었다면 인류는 이토록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지도,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지도,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책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위대한 선택, ‘출아프리카의 길’에서 시작해 ‘무역과 식민지를 발판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를 평정한 페니키아인의 길’과 ‘역설적으로 아테네에 ‘민주주의의 길’을 열어준 페르시아 원정의 길’ 등 고대의 길과 ‘유럽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꾼 바이킹의 원정로’ 등 중세의 길, ‘신항로 개척 시대의 포문을 연 레콩키스타의 길’ 등 근세의 길을 거쳐 ‘잠자는 사자’ 미국의 코털을 건드려 스스로 멸망의 길로 걸어간 일본 군국주의의 길’ 등 근·현대 길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위대하고도 흥미진진한 39가지 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매가격 : 11,700 원

러시아 히스토리

도서정보 :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 | 2022-12-09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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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러시아는, 왜, 그럴까?
유럽 아닌 유럽, 러시아의 역사와 그 기원을 살펴보자!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러시아가 도대체 왜 저러지?’ 이러한 생각은 전쟁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의문부호를 더해갔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푸틴의 억지에 가까운 정당화,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에서 ‘네오나치’ 세력을 저지한다는 등의 명분이 그렇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대계인 걸 감안하면,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러시아는 대체 어떤 나라인걸까? 어떤 과거와 역사를 가졌기에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라고 부르며, 별도의 국가임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 혹은 푸틴의 러시아는 어떤 생각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러시아 히스토리: 제국의 신화와 현실』은 러시아 1000년을 다룬 역사서이다. 또한 과거의 러시아와 현재의 러시아를 이해하고, 한 권으로 빠르게 읽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소련이 붕괴되던 1988-1992년에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였던 저자가 1000년의 러시아 역사를 매우 읽기 쉽게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러시아를 더 잘 이해하고,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왜 침공했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구매가격 : 12,600 원

아프리카 역사

도서정보 : 존 파커·리처드 래스본 | 2022-09-2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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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땅 인간의 요람 아프리카

통념과 오해를 뛰어넘어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분석적 연구
광활한 대지는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아프리카 역사’의 역사를 들여다보다
‘아프리카 역사’는 아주 거대하고 포괄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학문적 연구로서 인정받은 지는 40~50년 밖에 되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유럽 중심의 역사 인식으로 바라본 아프리카는 미개하며 과거에 종속된 땅이었고, 문자성과 집단적 역사의식이 결여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들어 단편적이고 모호하게 인식되었던 아프리카의 정치와 사회, 이념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상당 부분 결함이 있고 불완전한 연구 과정을 거쳐 아프리카 역사의 역사도 다른 어떤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빠르게 발전해왔다. 존 파커와 리처드 래스본이 공동 집필한 이 저서는 그 다면적이고 생생한 연구를 차근차근 짚어가며 독자에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프리카 역사는 세계 다른 지역의 역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므로, 동일한 ‘보편적 진리’들과 동일한 학문적 분석 방법으로 분석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아프리카의 과거를 연구할 때는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아프리카 자체의 고유하고 다양한 논리에 따라야 하는가? 한마디로 어떻게 쓰여야 아프리카 역사가 ‘아프리카다운가’?” _본문 중에서

다채롭고 단일한 정체성
종종 아프리카 바깥에서 뭉뚱그려지는 것과는 다르게, 아프리카 사람들 간의 유전적 다양성은 실로 크다. 뿐만 아니라 이 거대한 대륙의 언어, 음악, 종교, 정치, 국가 형태 등 여러 방면에서 다양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다움’, 즉 아프리카의 단일성 역시 아프리카인들의 자기 인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일은 아프리카 사람들 개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롭고 모호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를 정의한 방식만큼이나 외부인이 부여한 정체성을 점검할 필요도 보인다. 특히 ‘부족’이라는 개념에 다양한 정체성을 욱여넣는 과정에서 계급의 차이나 국민성, 혈연, 종교, 문화, 언어 등이 부족 정체성에 편입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과정 뒤에는 아프리카 사회의 미개화된 문명, 비과학적인 기술과 미신에 의존하는 경향 등으로 대표되는 열등성을 암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권력 쟁취를 위한 도구로서 포퓰리즘에 의해 부족 내의 유대감이 강조되기도 했다.

사실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를 세운 권력자들은 ‘부족’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만한 일치성이 전혀 없는 다수의 다양한 사람들을 지배했다.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혈연, 문화, 종교적 성향으로 연결된 국가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 편찬가들은 이런 면보다는 아프리카인들이 생활 터전을 옮겨가는 과정과 물질적·지적·사회적 실험을 통해 보여준 역동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_본문 중에서

제국주의 역사 기록의 위험
비록 아프리카 문명이 식민 정복을 겪은 뒤에도 살아남았을 만큼 강했지만, 대륙 곳곳에서 자행된 유럽의 식민 지배가 남긴 폭력과 착취는 큰 상처를 남겼다. 이른바 아프리카의 ‘식민 시대’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유럽의 식민 지배 세력만큼이나 아프리카 사람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식민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많이 밝혀짐에 따라, 아프리카 식민 시대의 재정의와 이에 관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역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 식민 시대의 사회적·문화적 변화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간 아프리카 식민 정복이 유럽 역사의 일부로 취급되었을 만큼, 아프리카 역사는 자신의 역사 기록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타자로만 남아 있었다. 최근 들어 토착민 중개인들과 공모한 선교사, 관리, 민족지학자 들이 형성한 간접 지배의 주춧돌이 식민 시대 이후에 현대 아프리카의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정치 체제에 미친 영향 등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 역사에서 주체성을 드러내는 면면에 대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이 책은 이러한 새로운 관점을 조심스레 살피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전에 형성된 위계 구조, 즉 유럽과 아프리카 간의 역학 관계나 전통 형성의 복잡한 성질을 짚어내며 독자가 길을 잃지 않고 최신 아프리카 역사 연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식민 지배를 파고들수록, 식민 지배가 파편화되어 있는데다 모순이 많았고 유동적이었으며, 일부 아프리카 사람들의 능동적인 참여에 의존했고, 그들이 자율적인 환경에서 자신들의 어젠다를 스스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_본문 중에서

이 책은 제7장으로 구성되어, 아프리카 역사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1장 ‘‘아프리카’란?’에서는 ‘아프리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인식되고 있는지를 다루고, 2장 ‘아프리카 사람들: 다양성과 통일성’에서는 아프리카다움’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 살핀다. 3장 ‘아프리카의 과거: 역사 자료’에서는 아프리카 역사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4장 ‘세계 속의 아프리카’와 5장 ‘식민 시대 아프리카’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진 식민 지배를 비롯한 세계와 아프리카의 관계를 짚어본다. 마지막으로 6장 ‘미래에 대한 상상과 과거의 재구성’과 7장 ‘기억과 망각, 과거와 현재’에서는 식민 사관과 인종 계급 타파에 힘쓰는 아프리카 내에서의 역사 인식 변화와 더불어 아프리카가 맞은 정치적, 자연적 위기 속 역사 연구의 접근법을 고찰한다.

유럽의 식민 지배 시절은 점점 오래된 과거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 시대의 유산은 아직도 거듭되는 많은 논쟁의 대상이며, 역사학자들은 아프리카가 주권을 회복했던 1960년대 전후 시기에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전 세계가 점점 더 촘촘하게 연결되어가는 시점에 아프리카 역사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는 핵심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짧은 책이 그런 과제를 수행할 때 유용하고 흥미를 자극하는 안내서가 되었으면 합니다. _한국어판 서문에서

구매가격 : 10,800 원

지금 시작하는 일리아스

도서정보 : 양승욱 | 2022-06-27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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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들의 필독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역사는 신화가 되었고, 신화는 역사가 되었다.”

서양 인문학의 뿌리가 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일리아스를 명화와 함께 읽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궁극의 서사시로 시대를 초월하여 최고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초석으로 숭배 받으며, 서사시라는 용어의 정의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었다.
신과 인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복잡하게 전개되는 고대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이야기,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는 무려 24권 1만 5,000행에 이르는 방대한 서사시로 이 전쟁을 노래했다. 지금 호메로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가 여러분을 고대 트로이아로 안내할

구매가격 : 15,000 원

베르됭 전투

도서정보 : 앨리스터 혼 | 2022-06-0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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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미쳤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미친 게 틀림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을 보라! ……
지옥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미쳤다!”
_ 1916년 6월 베르됭에서 전사한 알프레드 주베르의 마지막 일기에서

10개월 동안 7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제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303일의 기록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최소 70만 명의 사망자가 났다. 독일군이 먼저 시작한 전투의 목표는 프랑스군을 ‘말려 죽이는’ 것.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엄청나게 소모시킨 후 서부전선을 돌파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결전의 장소로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 베르됭이 선택되었다. 대포를 비롯한 물자와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독일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10개월 뒤 독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베르됭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도 바뀌었다. 베르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베르됭 전투는 ‘참호전’의 전형이었다. 기관총과 대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은 깊숙이 참호를 파고 들어갔고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진지에서 얼음물을 퍼내며 적진으로 진격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극심한 허기와 갈증, 잠든 얼굴 위로 뛰어다니는 쥐와 벼룩, 이가 병사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은 말했다. “이곳은 지옥이다.”
베르됭 전투에서는 인간이 대포와 싸웠다. 돌파를 위해 달려 나간 보병들은 적군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쏟아지는 포탄에 무참히 쓰러졌다. 때로 아군 포대에서 쏜 포탄에 맞아 죽기도 했다. 급조된 참호 벽에 죽은 동료의 머리와 팔다리가 박혀 있었고, 포탄 구덩이에는 시체들이 떠다녔다.
베르됭 전투는 지휘관의 냉혹함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양측 지휘관 모두 병사들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의 전략은 ‘말려 죽이기’였고,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의 신조는 ‘죽을 때까지 공격하기’였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나지 않고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전략의 전부였다. 한 뼘의 땅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병사들을 지배했다. 결국 독일군과 프랑스군 모두 무수한 죽음을 양산했고 베르됭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 박살난 무기, 희게 변한 유골이 쌓인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베르됭 전투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밝힌 전쟁사의 고전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인 베르됭 전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 전체를 살펴보는 통찰력 있는 역사서다. “베르됭 전투를 다룬 책 중 가장 중요한 책”,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에서 저자 앨리스터 혼은 병사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지휘관들의 회고록, 신문과 잡지 기사,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 사료 등 관련 문헌은 물론이고 생존한 참전 군인들에게 직접 들은 증언까지, 다방면의 수많은 자료를 바탕 삼아 1916년의 베르됭을 그대로 되살려냈다.

저자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만연한 죽음과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병사들의 굳은 의지, 야전 지휘관들의 용기와 희생정신, 일기 변화, 병사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양국 군 지도부의 무능과 내부 갈등까지 전투의 성패를 가른 모든 요인들을 명료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그리하여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이 뚜렷이 우세했는데도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프랑스는 ‘인계에 펼쳐진 지옥’이라는 10개월의 전투 속에서 어떻게 베르됭을 지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 전투가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라 불리는지,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

1916년, 베르됭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투

1915년 말,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착 상태를 풀고 승기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베르됭을 공격 지점으로 삼자고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군은, 자발적으로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피를 남김없이 흘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여러 차례 베르됭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는데, 특히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다 독일에 함락된 베르됭은 프랑스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프랑스를 ‘심판’하라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은 ‘심판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공격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포격으로 기세등등하게 선공했다. 몇 시간 동안 폭우처럼 쏟아진 포탄 세례에 프랑스군의 철로는 모두 망가졌고 숲은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되었다. 독일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돌격부대를 보냈다. 전장을 지키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상부의 지휘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밀려드는 독일군을 대적해야 했다.

프랑스군 제165연대가 곧바로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포격에 참호 여럿이 완전히 사라졌고 소총의 총열은 먼지로 가득 차 쓸 수 없게 되었으며 수류탄과 탄창이 담긴 상자들은 잔해에 파묻혔다. 폭이 거의 800미터나 되는 전선의 한 구역에서 2개 소대가 전우들을 파내느라 녹초가 되었다. 이들이 독일군의 첫 번째 정찰대를 발견했을 때, 그 독일군 병사들은 겨우 약 9미터 밖에 있었다. …… 진지 두 곳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점령되었고, 부아도몽 숲의 제1선 참호 전체가 곧 무너졌다. 동행한 독일군 기관총 분대들은 부리나케 움직여 노획한 무기를 차지했고, 산소 아세틸렌 토치를 든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남은 가시철조망을 잘랐다. …… 지휘관 들라플라스 대위는 정신이 나가 여단장 볼레 대령에게 이런 통신문을 보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6장 첫날(141쪽)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
소모전은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군의 전투력을 소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자칫하면 인명으로 인명을 소모해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이었다. 연합군은 ‘총알받이’가 될 병사의 수를 따져볼 때 연합군이 우세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양쪽이 한 사람씩 병력을 잃는 방법을 쓰면 결국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기계적으로 계산했다. 동맹군도 같은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어느 독일 작가는 “마지막에 남은 독일군과 프랑스군 병사가 주머니칼이나 이빨, 손톱으로 서로 죽이려고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참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전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단위 면적당 사망자 수가 가장 높은 전투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베르됭 전투의 전체 사상자 수는 다양하게 추산되었다. 그 전쟁에서 인간의 생명은 결코 꼼꼼하게 집계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공식 전쟁사(1936년 출간)는 1916년 10개월 동안 베르됭에서 입은 손실을 37만 7,231명으로 잡는데 그중 16만 2,308명이 전사나 행방 불명이다. 반면 처칠의 《세계 위기(World Crisis)》(1929)를 바탕으로 한 계산은 46만 9천 명까지 높게 잡는다. 같은 기간 동안 독일군이 입은 손실은 가장 신뢰할 만한 수치에 따르면 대략 33만 7천 명이며(처칠은 37만 3천 명에 가깝다고 계산했다), 당대 독일군 명부에 따르면 사망과 행방 불명만 10만 명이 넘는다. 어떤 수치를 받아들이든 프랑스와 독일 양측 사상자를 합치면 7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수가 된다. …… 유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519~520쪽)

참호, 병사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1916년 2월 혹독한 겨울, 전투를 기다리며 병사들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정신적 공포에 더해 참호의 열악한 환경이 병사들을 한 번 더 괴롭혔다. 참호는 지옥이었다. 병사들은 물이 차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끈적끈적한 진창이 된 참호에서 질병에 시달렸고 모래 같은 비스킷을 먹으며 쥐떼와 공생했다.

참호는 보통 10여 센티미터, 때로는 30센티미터 높이로 물이 차올랐고, 결코 완전히 마르는 법이 없었다. 병사들은 악취 나는 진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근무 교대 후 짧은 시간 동안만 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대피호는 거대한 쥐들과 나누어 썼다. 참호의 쥐들은 …… 전쟁 덕분에 번성한 유일한 생명체로 보였다. 쥐는 잠든 병사들의 얼굴 위로 뛰어다녔고, 배낭 속 음식을 갉아먹었으며, 아직 매장되지 않은 사망자의 살로 포식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을 제외하면 두 종의 생활은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 5장, 참호 속의 병사들(117~118쪽)

베르됭의 좁은 전장에서 병사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참호를 파거나 포격에 죽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적군이 방어선 뒤에서 끊임없이 쏘아대는 포탄은 진격을 저지할 뿐 아니라 병사들의 피난처도 완전히 뭉개버렸다. 독일과 프랑스가 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 가면서 베르됭에는 교착 상태가 계속됐다.

독일군이 진격해 점령한 것은 대부분 여기저기 널린 포탄 구덩이였다. 구덩이 안을 보면 고립된 병사들이 수류탄과 곡괭이 자루로 자신들의 ‘진지’를 지키며 살아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죽어 있었다. 이번에는 독일군의 상황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프랑스군 대포가 쉴 틈을 주었더라도, 독일군이 소중히 여긴 지하 진지를 만들 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숲의 대포들이 친 치명적인 탄막 때문에 독일군의 힘이 소진되면, 그 뒤엔 반드시 프랑스군의 반격이 이어져(24시간 이내에 반격했다) 생존자들을 다시 밀어냈다. - 14장 불타오르는 지옥, 모르옴(270쪽)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가 점령되다
저자는 실제 작전에 참여했던 병사가 “실제 참전한 이만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 평가할 정도로 눈으로 직접 보듯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투 현장을 묘사한다. 특히 베르됭 방어의 주춧돌이자 난공불락으로 평가받던 두오몽 요새에 소수의 독일군이 잠입해 총성 한 발 없이 점령하는 과정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쿤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칠흑같이 어두운 긴 터널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깥에서 귀를 찢을 듯한 포격 소리가 들린 후 숨 막힐 듯 섬뜩한 고요가 이어졌다. 쿤체는 계속 전진했다. …… 쿤체는 곧 방출된 탄피가 내는 덜커덕 소리를 들을 만큼 접근했다. 이 대담무쌍한 중사는 권총을 손에 쥔 채 문을 박차고 들어가 독일어로 고함을 질렀다. “손 들어!” 화약으로 얼굴이 검게 그은 프랑스군 포병 네 명이 크게 놀라 멈춰 섰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포탑 밖으로 거칠게 떠밀렸다. 쿤체는 한 손으로 그 요새에서 가장 큰 대포인 155밀리미터 포의 발포를 멈추었다. - 9장 난공불락 두오몽 요새 점령(191쪽)

2월에 일어난 두오몽 요새 점령 못지않게 6월의 보 요새 점령도 상세하게 다룬다.

레날은 신호기로 다시 전갈을 보내 호소했다. “완전히 지치기 전에 개입하라. …… 프랑스 만세!” 그렇지만 수빌로부터 추가 응답은 없었다. 보 요새가 굴복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날 늦게 거대한 포탄 한 발이 요새에 떨어져 중앙 통로의 둥근 천장 일부가 함몰되었고, 질식과 갈증에 대한 우려에 생매장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더해졌다. …… 6월의 지난 사흘 동안 수비대 병사는 각자 전부 합해서 반 잔의 더러운 물을 받았다. 절망에 빠진 병사들은 요새 벽면의 습기와 점액을 핥았다. …… 일부 병사들은 통로에 기절해 있었고 다른 이들은 자신의 오줌을 마시고 심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 21장 보 요새의 마지막 일주일(421쪽)

화염방사기에서 독가스까지, 대량살상무기의 등장
베르됭은 신무기의 시험장이었다. 독일군은 거대 대포, 화염방사기, 포스겐 가스 등으로 무장하고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독일군 화염방사기는 숨어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독일군이 쏘아올린 포스겐 가스탄은 프랑스군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독일군은 쓰러지는 적군 병사들 위로 곧바로 포탄을 쏟아부었다.

왼편에 뚫린 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온 회녹색 물결이 젊은 사관후보생 베르통의 소대가 지키는, 거의 온전하고 잘 방비된 진지에 도달했다. 독일군은 잠시 멈춰 의논했다. 그리고 베르통의 병사들이 사격을 가할 유효 표적을 찾기 전에 먼저 맹렬한 불기둥이 그들을 덮쳤다. …… 곧 화염방사기가 욋가지를 엮어 만든 참호의 외벽에도 불을 질렀다. 방어군은 의복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채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어지럽게 도망쳤다. 독일군은 연기를 내뿜는 진지를 신속히 점령한 뒤 기관총을 설치해 공포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의 등에 총탄을 퍼부었다. - 6장 첫날(145~146쪽)

500문이 넘는 독일군 중포가 겨우 약 1.6킬로미터가 약간 넘는 전선을 따라 포격을 시작했다. …… 지상의 병사들은 “살아 있는 것은 다 죽여 없애려는 듯 독일군은 우리 한 사람마다 대포 한 문씩 지정한 것 같다”고 느꼈다. …… 어느 장교는 자신이 어느 하루 동안 참호에서 어떻게 세 번이나 파묻혔는지, 또 그때마다 병사들이 어떻게 자신을 꺼내주었는지 묘사했다. …… 어느 대대에서는 겨우 세 명만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대부분 포격 때문에 산 채로 땅에 파묻혔다. - 14장 불타오르는 지옥, 모르옴(283~284쪽)

포스겐?독일군은 그 가스탄에 그려진 문양을 따라 ‘녹십자 가스’라고 불렀다.?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스는 전쟁에서 사용된 가장 치명적인 가스에 속한다. …… ‘녹십자 가스’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나뭇잎은 시들었고 달팽이까지 죽었다. 한 가지 좋은 일이라면, 시체로 넘치는 전장 위를 날아다니는 파리 떼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수빌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섬뜩하게 뒤틀린 채 쓰러졌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 24장 독가스 공격과 죽음의 카니발(456~457쪽)

“이곳은 지옥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사들의 목숨은 죽음으로 상대의 전력에 손실을 입힐 때만 의미가 있었다. 상급 지휘관들과는 자주 연락이 끊겼고, 병사들은 맞닥뜨리는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대응하며 목숨을 지켜야 했다. 병사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전투를 이어 갔다. 전투력이 없는 부상병들은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과로한 군의관들은 즉시 부상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어쨌든 죽을 것이므로 수술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 십중팔구 살아나겠지만 전쟁 수행에 더는 쓸모가 없을 사람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군무에 복귀할 수 있을 사람들. 의사들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부상자들에게 아낌없이 관심을 쏟았는데, 이를 ‘유효 병력의 보존’이라고 했다. 두 번째 범주는 시간이 허락하면 대충 봉합해놓았다. 그 결과는 종종 끔찍했는데, 뒤아멜은 이렇게 소름끼치는 문장으로 묘사했다. “산드라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옆구리에 뚫린 구멍으로 변을 보았다.” - 5장 참호 속의 병사들(125쪽)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리면, 엄청나게 강력한 폭발 진동을 견디기 위해 온몸을 움츠린다. 그 일이 되풀이될 때마다 새로운 공격, 새로운 피로, 새로운 고통이 찾아온다. ……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고 열기에 몸이 타버릴 것만 같고 진이 빠져 대처할 수 없게 된다. …… 마침내 우리는 단념하고 상황에 몸을 맡긴다. 파편을 막으려고 배낭으로 몸을 엄폐할 힘조차 없다. 신에게 기도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은 별일 아니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멀쩡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지가 잘리고 찢어져 과육처럼 으깨지는 것,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공포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포격이 주는 고통이다. - 15장 포탄 구덩이와 시체들의 땅(294쪽)

왜 독일군이 패배했나?
베르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전투 초기, 독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의 우세,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선공해 승기를 잡았다. 독일군은 당시 난공불락으로 평가받던 프랑스의 두오몽 요새 등을 점령했지만 길어지는 전투로 인한 인적?물적 자원 부족, 지도부 간의 갈등으로 병력이 약화되었다. 1916년 말, 독일군이 10개월간 33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얻은 것은 런던의 왕립 공원을 합친 것보다 약간 더 큰 땅이 전부였다. 반대로 프랑스는 10개월의 전투를 끈질기게 버티면서 끊임없이 병력을 충원하고 무기를 보강하고 훈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솜강 전투를 발판 삼아 흐름을 반전시켰다. 팔켄하인의 ‘말려 죽이기’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베르됭 전투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는 분명해졌다.

황태자는 이렇게 인정했다. “뫼즈강의 맷돌은 군대의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완전히 갈아버렸다.” 지휘관들에 대한 군대의 신뢰가 처음으로 근본적으로 흔들렸으며 사기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전선에서나 후방에서나 전쟁 피로증이 나타났으며, 베르됭 전투가 끝난 직후 독일의 첫 번째 강화 제안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암시하는 바가 컸다. 1917년 독일은 한동안 팔켄하인의 프랑스군 ‘말려 죽이기’ 전략을 이용할 힘이 없었다. -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525쪽)

저자 앨리스터 혼은 베르됭 전투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베르됭 전투의 끔찍한 점 가운데 하나는 발발 후 첫 세 달이 지나면서 어찌된 일인지 전투가 인간의 지휘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듯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 베르됭은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상징에 사로잡혀 두 나라 모두 전술적으로 후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독일이 최종적으로 베르됭에서 몸을 빼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의 손실은 거의 비슷했으며, 전투 시작과 비교해 전선의 이동도 거의 없었다. 베르됭은 프랑스에는 신성한 상징이 되었으나 내적으로 군대의 정신은 체념에 물들었으며, 1940년 독일군은 끔찍한 패배를 극복하겠다며 다시 한번 베르됭으로 전진했다.

구매가격 : 18,900 원

책의 민족

도서정보 : 맥스 I. 디몬트 | 2022-06-0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의심할 나위 없이 가장 뛰어난 유대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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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아브라함 시대부터 세계사의 주역이 된 20세기까지
‘책의 민족’ 유대인의 경이로운 4천 년 역사 이야기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문명이 쇠퇴하고 소멸하는 동안 나라도 없이 떠돌던 유대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고대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미국과 이스라엘까지, 네 대륙으로 흩어지고 여섯 문명을 거치면서도 유대인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중세 이슬람 문명과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 혁명기 유럽과 미국에서 수백 년 동안 꽃을 피운 유대인의 놀라운 창조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예수, 바울,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을 배출하고 노벨상 수상자의 20퍼센트를 차지한 유대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슬람 제국 시절 유대인은 아랍인으로부터 ‘책의 민족(People of the Book)’이라는 존경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며 번영했다. 수천 년간 나라 없이 살아가야 했던 유대인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생존법이 필요했다. 그 중심에 바로 ‘토라’와 《탈무드》를 비롯한, 그들의 고유한 정신과 사상을 담은 책들이 있었다. 디몬트는 유대 전통과 역사 속에서 일구어낸 유대인의 지적 성취를 총체적으로 살핀다. 유대 철학을 그리스와 로마에 전파한 《70인역 성경》부터 유대인의 지혜를 집대성한 《탈무드》와 19세기 유대 민족주의의 원형 《쿠자리》까지, 유대인은 민족의 책을 통해 정체성을 지키며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창조성을 키웠다. 유대인에게 책은 지혜의 뿌리이자 생존의 도구였고 창조의 원천이었다.

수천 년 인류 역사를 관통한 영적·지적 성취의 숨은 주역
유대인은 수천 년간 수많은 역경과 도전을 이겨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 가나안의 방랑기, 바빌론의 포로 생활을 거쳐 헬레니즘 세계에 융화되었고, 로마 제국의 흥망을 지켜본 후 이슬람 문명권과 르네상스기 유럽에서 번성했으며, 중세 암흑기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수많은 문명과 종교와 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지거나 흡수되었을 때 유대인은 어떻게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유대인이 문화를 창조하는 공동체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즉 유대인 특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 역사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유대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고 유대 사상을 이웃 민족과 구별하게 해준 ‘모세 율법’부터, 유대교의 바탕이 된 ‘토라’, 포로 생활에서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신 개념을 만들어낸 예언자들, 그리스 문학과 과학 저술을 아랍에 전한 번역가들, 유대 사상을 지식 체계로 구체화한 《탈무드》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념과 사상을 가슴에 품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책은 한 민족이 소멸의 위험에 맞서 전진과 후퇴, 도전과 응전을 거듭해 온 기나긴 투쟁의 서사시이자, 유대인이 수천 년 역사를 관통하며 인류의 영적·지적 성취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생동감 넘치고 매혹적인 이야기다.
세계사의 주인공인 적은 없었으나 세상을 정복한 민족, 유대인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약 0.2퍼센트(15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 과학, 경제, 철학, 문학, 음악, 미술, 상업, 산업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유대인은 주변국을 정복해 제국을 이루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역사의 전환점이 된 사건 뒤에는 늘 유대인이 있었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별 짓게 해준 ‘유일신 사상’은 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탄생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에 능통했던 유대인 언어 천재들은 책을 활발히 저술하고 번역하여 유럽과 아랍 문명의 번영을 주도했다. 근대 유대인 혁명가들은 1848년 이탈리아의 통일에 참여했고, 프랑스인·독일인·영국인·러시아인으로서 싸우며 19~20세기 유럽의 변혁을 이끌었다.

“영어로 쓰인 가장 탁월한 유대 역사서”
《책의 민족》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유대 역사서이다. 미국 역사가이자 작가인 맥스 I. 디몬트는 유대 역사를 학자들만의 것으로 남기지 않고, 4천 년 유대 민족의 일대기를 유머가 깃든 대중적인 필치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책의 민족》에는 유대 역사와 세계사에 박학다식한 저자의 방대한 지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비한 인물인 모세의 정체에 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해석부터 유대교와 기독교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드러내준 <사해 문서>의 발견에 얽힌 이야기, 나폴레옹이 제국 내에 살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천8백 년 만에 유대 최고 회의를 소집한 일화까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대인과 유대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어로 쓰인 가장 탁월한 유대 역사서”라는 평을 받았다.

전 세계를 배경 삼아 펼쳐지는 유대 민족의 놀라운 모험
유대인은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책의 민족》은 유대인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 먼저 세계 각국의 역사를 개괄하고, 네 개의 대륙과 여섯 개의 문명에서 꽃피운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를 속도감 있게 그려낸다. 유대의 신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만남에서부터 수천 년간 이어진 유랑 생활, 헬레니즘 문화의 도전, 아랍과 유럽에서 맞이한 부흥기, 유럽에 퍼진 반유대주의, 시온주의의 탄생과 이스라엘 건국까지 4천 년 유대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마치 모험 소설을 읽는 듯하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겪어내며 살아남은 유대인의 생명력과 끈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의 관심 밖에 있던 유대인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다
역사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유대 역사를 전혀 다루지 않았고,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유대인의 역사를 ‘각주’로만 다루었다. 이처럼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남긴 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유대인과 같은 시기에 역사에 등장했던 다른 민족과 달리, 유대인은 민족의 영광을 증언해주는 유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대신 유대인에게는 사상이 있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유물만 남긴 민족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사상을 남긴 유대인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책의 민족》은 유대 사상의 핵심을 이룬 ‘모세 율법’, ‘토라’, 《탈무드》의 탄생 배경과 발전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역사의 뒷면에 존재했던 유대인을 역사의 무대 앞으로 끌어낸다.

유대인과 유대 사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기원전 2000년경 유대인은 중근동 민족들 사이에서 뒤늦게 출현했다. 유대 역사는 최초의 히브리인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만나 언약을 맺은 그날로부터 시작한다. 신은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계명을 내렸고,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가나안 땅에서 방랑하던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유일신 사상, 할례, 인신 제사 금지였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고 풍요 제의를 올리던 근동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유대인은 보이지 않는 신을 믿었고 어디에서나 회당을 세워 사제 없이 신과 직접 소통했다. ‘하나뿐인 신’과 ‘보이지 않는 신’ 개념은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확연히 구분되게 해주었고, 각 문명을 넘나들며 지적 성취를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

유일신 사상과 보이지 않는 신 때문에 유대인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었다. ‘움직이는 성막’이 유대인들을 특정한 장소에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회를 따라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옮겨 다닐 수 있었다. …… 그리스인의 전통 의상인 튜닉, 아랍의 무슬림 랍비 무프티, 미국의 아이비리그처럼 디아스포라 문화가 어떻게 포장되었든 그 안에는 언제나 여호와 유일신교가 있었다. - 171~179쪽

유대 정체성을 세운 ‘모세 율법’
성서에 따르면 이집트로 가 유대인을 해방시키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모세는 홍해를 지나 시나이 사막으로 유대인을 이끌었고 그곳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었다. ‘모세 율법’은 유대인의 정치·문화·종교 등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신의 명령이었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국가의 관계, 개인과 신의 관계를 규정했다. 모세 율법은 가나안에서 방랑하는 유대인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해주었다. 약 3천 년 전에 작성된 모세 율법에는 오늘날 미국 헌법의 철학과 유사한 자치주의와 휴머니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미국 헌법의 철학과 모세 율법의 철학 사이에는 신기한 유사성이 있다. 연방 정부가 헌법이 부여한 권한만 지니는 반면에 개별 주정부들은 그들에게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도 모세 율법이 금지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유대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허락한다. 그들은 율법에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60쪽

그리스 문명은 유대 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기원전 3세기경, 근동 지역에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가 들어왔다. 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통치를 받으며 헬레니즘 문화와 맞닥뜨렸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추구했던 그리스인과 달리 유대인은 금욕적인 유일신 신앙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다. 이렇게 달랐던 두 민족의 사상은 어떻게 한 지점에서 만났을까?
유대인 대부분은 헬레니즘 자체는 거부했지만 그리스 철학은 철저히 연구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제공한 모든 지적 유산을 흡수하여 유대인의 감각을 더해 자신들만의 탁월하고 수준 높은 지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런 사상적 융합의 분위기 속에서 기원전 3세기에 《구약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구약 성경》을 플라톤 철학으로 해석했다. 플라톤에 심취했던 필론은 유대 신앙을 그리스 철학과 융합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구약 성경》은 근동 지역 언어인 아람어로 쓰인 <다니엘>, <에스라>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등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구약 성경》의 내용이 언어보다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을 전혀 모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70인역 성경》은 유대인이 이방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심 어린 전략에서 탄생했다. 이 책은 외국의 이방 문화에서 성장한 유대인을 유대교의 테두리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70인역 성경》은 그리스, 로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0인역 성경》은) 문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그리스어 저작이며,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 더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유대의 휴머니즘과 철학을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전파한 것도 이 책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전도하러 왔을 때 그의 교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미 《구약 성경》에 익숙했다. - 171, 172쪽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은 어떻게 유대 정체성을 지켰나?

유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흩뜨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팔레스타인 땅 밖에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 역사는 유대인이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때부터 19세기 유럽의 게토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이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주변 문화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유대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

《탈무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만들어 디아스포라라는 위기에 맞섰다. 《탈무드》는 완성되기까지 2백 년이 넘게 걸렸다. 1100년경 법전화된 《탈무드》의 편찬자들은 구전으로 전해 오던 율법을 구체적인 윤리 체계로 정리했다. 도덕과 신앙에 관한 철학적 담론뿐 아니라 위생, 천문, 경제 등 일상적 문제까지 담은 《탈무드》는 유대인의 생존 도구였다. 유대인은 언제 어디서나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적 삶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탈무드》는 변화된 삶의 조건에 맞게 어디에서나 적응 가능한 유대인을 창조했고, 동시에 흩어진 유대인을 영적 공동체로 결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탈무드》 연구자들은 하느님을 일상적인 활동에 받아들여, 유대인의 행동이 하느님의 성품으로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라가 종교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유대인의 관심을 과학과 이론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성경이 민족주의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어디에서나 적응 가능한 유대인을 창조했다. - 238쪽

유대 학문의 구심점 ‘예시바’
《탈무드》의 산실은 유대인 고등교육기관인 ‘예시바’이다. 이 학교들에서 유대 사상이 《탈무드》 또는 ‘지혜’라고 불리는 지식 체계로 구체화되었다. 예시바의 역사적 역할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이방인의 땅에서 살면서 급속도로 변화할 유대인의 운명을 보호하기 위해 율법에 융통성을 부여한 데 있다. 최초의 예시바는 3세기에 로마의 보복을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탈출한 랍비들에 의해 바빌론에 세워졌다. 9세기 이후에는 유럽에 최초로 예시바가 세워졌고, 13세기 이후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예시바는 유대 문화에서 지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12세기에 최초로 세워진 유럽 대학의 원형이 되었다.

유대 사회에서 학자는 점점 더 큰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학자들은 오늘날 기업 총수나 스타 영화 배우보다 더 크게 존경받았다. 유대 전설에서 영웅은 칼로 난폭한 괴물을 죽이는 기사가 아니라, 지식으로 무지의 용을 죽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었고,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무식하면 경멸의 대상이었다. 유대 랍비들은 학식 있는 평민이 배우지 못한 귀족 자제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임신한 여자들은 배 속의 아이가 학자의 영으로 충만하기를 원하며 예시바에 모여들었다. - 245쪽

아랍인은 왜 유대인을 존경했을까?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은 첨예하게 갈등하는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두 민족은 유대인이 아라비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1세기 말부터 15세기 무렵까지 평화롭게 공존했다. 아랍인은 유대인을 ‘책의 민족’이라 부르며 존경했고, 유대인은 아랍인의 관용에 힘입어 유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6세기 아랍인은 사막 유목민이었고, 7세기 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의 정복자였으며, 8세기 아랍인은 비잔틴을 제패한 제국의 주인이었고, 9세기 아랍인은 눈부신 문명과 예술·건축·과학의 선도자였다. 이슬람 제국의 번영 뒤에는 유대인이 있었다. 유대인이 아라비아로 들어오면서 상업과 산업이 부흥하고, 메카가 국제 도시로 탈바꿈되고, 학문이 꽃피기 시작했다. 이 시대 유대인 가운데 철학, 의학, 과학, 수학, 언어학 분야에서 위대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유대인을 존경한 이슬람교의 메시아
아랍인은 유대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구약 성경》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 중 하나인 무함마드는 유대교를 향한 열정과 존경심이 가득했던 아랍인이었다. 《코란》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백성을 어떻게 구원할지 고민하던 무함마드 앞에 아브라함, 모세, 예수가 겪었던 것처럼 신이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준 토판에는 하느님(알라)이 무함마드를 ‘전달자’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교의 탄생에는 유대교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영웅이 나타나 아랍인의 자연 숭배, 기독교도의 구원 교리,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을 새로운 신 개념으로 통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영웅이 바로 무함마드였고, 그 종교가 이슬람교였다. …… 무함마드는 대상들에 의해 시리아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처음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접한다. 만남 이후 그는 평생 유대인의 ‘그 책(The Book, 《구약 성경》)’을 존경했다. 유대 족장들은 그의 영웅이 되었고, 이후에 이슬람교의 성경인 《코란》에도 그 영웅들 이야기가 들어가게 된다. - 274, 275쪽

이슬람과 유럽을 연결한 문화 전도사
이슬람 제국이 번성한 8세기 무렵이면 그리스어로 쓰인 책 대부분이 사라졌고 그리스어는 잊혔다. 아랍인은 시리아어 번역본을 통해 전해지거나 유대인과 로마인의 도서관에 보존돼 있던 그리스어 서적을 유대인에게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장려했다. 당시 여러 문화를 경험한 유대인은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스어, 라틴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에 능통했다. 유럽의 군주들도 유대인의 능력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리스·아랍의 저술과 히브리 문학을 라틴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유대 학자들을 나폴리로 초청해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했다. 유대 번역가들은 유럽에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을 소개했고,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플라톤의 철학과 소포클레스의 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현대의 학자 모지스 해더스(Moses Hadas)가 그리스 과학과 인문주의를 유럽에 전달하는 일을 가리켜 이른 ‘유럽으로 통하는 터널’이 8세기 유대인에 의해 재개통되었고, 그 터널은 1400년까지 유지되었다. 최초의 번역서들은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아랍어로 번역한 것이었지만 곧 그리스어와 아랍어 저술들도 히브리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히브리 문학과 철학도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즉 쌍방향의 문화 소통이 발생한 것이다. - 284, 285쪽

근대 유럽 문명의 감춰진 창조자

중세 유대인의 역사는 영국에서는 1300년경에, 프랑스에서는 1400년경에, 에스파냐에서는 1500년경에 끝났다. 각 나라에서 유대인이 추방되거나 게토로 쫓겨난 것이다. 근대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기술이 필요해진 17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다시 유대인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역사의 무대가 근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유대인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십자군 운동이 끝난 14세기에 그리스?로마 고전 문화 부흥 운동 르네상스가 온 유럽에 퍼졌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는 유대인을 지적인 민족으로 인정했고, 일찍부터 이탈리아로 그들을 불러들였다. 이탈리아 유대인은 의사, 시인, 천문학자, 금 수공업자, 약사, 선원, 조각가 등 당시 존재했던 거의 모든 전문직에 종사했다. 이탈리아인은 철학과 과학, 의학과 수학을 유대인으로부터 배웠다.

르네상스가 유대인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분야에서 꽃피운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가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은 그곳에서 유대인이 3백 년 동안 그리스, 아랍, 히브리 고전들을 라틴어로 활발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나폴리로 프리드리히 2세가 유대인을 초청해 그리스 책들을 번역하게 했고, 기독교 학자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했다는 것이다. - 322쪽

프랑스 혁명과 유대인의 해방
유대인을 프랑스 시민으로서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1789년 프랑스 혁명기와 이후 나폴레옹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적 논쟁이었다. 교회는 혁명의 적이었으므로 유대인도 혁명 공화국의 적이 되었다. 18세기 유대 계몽주의자 모제스 멘델스존을 통해 유대 문화에 감화를 받은 귀족 출신 혁명 지도자 미라보 백작은 자신이 시민의 보편적 권리라 여긴 것들을 유대인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변론했다. 결국 유대인 시민권 문제는 국민 투표에 부쳐졌다. 파리의 60개 구 가운데 53개 구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찬성했다. 1791년에 프랑스 유대인 7만 명이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이 되었다. 그 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해방이 뒤따랐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스스로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독립 집단이자 거의 완전한 자치 국가를 이루고 살던 유대인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대산헤드린 의회를 소집해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12가지 질문을 던졌다. 나폴레옹은 대산헤드린 의회에서 유대인은 자기들만의 국가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 유대인은 조국인 프랑스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카드를 펼쳐 보였다. 그는 거의 1천8백 년 만에 최초의 대산헤드린 의회를 소집했다. 대산헤드린 의회는 로마가 성전을 파괴한 기원후 70년 이래로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유대인이 특별 대산헤드린 의회에서 자신들의 대답을 재천명함으로써, 그 대답이 모든 유대인에게 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제야 나폴레옹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대산헤드린이라는 유서 깊은 의회가 다시 한번 유대인의 삶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에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은 유대인 세계에 급속도로 퍼졌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모든 유대인에게 알려졌고, 전 유럽과 미국의 회당에서 그를 위한 특별 예배가 진행되기도 했다. - 450쪽

유대인은 왜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나?

유대인이 해방된 뒤 19세기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유대인은 속물스러운 민족이라 경멸당했고, 대량 학살되고, 고문당하고, 추방되었다. 디몬트는 과거 유대인에게 자행된 폭력은 ‘반유대적(anti-Jewish)’ 행위라고 지칭하며 반유대주의와 구분한다.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적 행위에는 서로 다른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전에는 많은 민족이 유대인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중세에 기독교도가 유대인에게 폭력을 가한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개종 유대인은 기독교도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반유대적 행위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의식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범죄’로 만드는 것이었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다.

유럽에 혁명이 전염병처럼 돌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탄생한 19세기는 ‘해진 화이트칼라 계층(frayed-white-collar class)’과 유대인이 갑자기 정치인들에게 중요해진 시기였다. 우익 정치인들은 좌익 정치인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몰락 계층(d?class?)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들은 몰락 계층의 불안정한 삶을 당시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유대인의 악행 탓으로 돌렸다. …… 우익 정치가들은 ‘유대인만 없다면 몰락 계층의 모든 사람이 사회의 중요한 기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반유대주의의 시작이었다. - 474, 475쪽

현대 시온주의 운동과 이스라엘의 탄생
나치 암흑기에 절멸의 위기를 겪은 유대인은 다시 세력을 결집해 새로운 유대 국가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반유대주의의 탄압 속에서 유대인으로서 생존하겠다는 새로운 의지는 시온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불타올랐다. 19세기에 싹을 틔운 ‘시온주의’는 ‘시온으로의 복귀’, 즉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주장하며, 옛 고향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모았다. 시온주의 운동이 많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 세계 각지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모여들었고,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유대 국가가 탄생했다. 건국 직후 이스라엘과 원래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던 아랍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다툼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에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공식 출범했다. 그곳에서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는 벤구리온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대 민족의 타고난 권리와 역사적 권리에 의해,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 국가가 설립되었음을 선포한다.” 선포 직후 벤구리온은 신생 유대 국가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협조를 구하면서 이스라엘은 “중동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집트는 이 신생 국가를 없애기 위해 곧 침략할 것임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다른 세 아랍 국가?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도 형식적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이집트와 같이 행동하겠다고 발표했다. - 6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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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신, 여신, 영웅 핸드북

도서정보 : 리브 앨버트 | 2022-05-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서양 문명의 근원, 그리스 신화라는 미로 탐험

그리스 신화는 말이 신화이지,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올림포스 산의 신들은 인간 못지않게 질투하고 갈등하며 복잡하게 얽힌 사랑에 거침없이 뛰어든다. 인간계의 영웅도 마찬가지다. 기분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영웅도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그리스 신화에 빠져들게 된다. 욕하지만 시청률은 높은 막장 드라마 같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가 신성시되는 걸 생각하며 더 그렇다.
그런데 왜, 어떻게 보면 막나가는 스토리에 가까운 그리스 신화를 읽어야 할까? 바로 그리스 신화가 성경과 더불어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양계 끝자락에 있는 명왕성을 서양권에서는 ‘플루토’라고 하는데, 이 플루토가 바로 저승의 신 ‘하데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 같은 정신분석 관련 용어에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이름이 사용된다. 이런 것들의 배경을 찾다보면, 결국 그 근간에는 그리스 신화가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 신, 여신, 영웅 핸드북》에서는 서양 문명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올림푸스 신들의 드라마와 비밀을 캐릭터별로 정리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올림푸스 산과 인간계의 슈퍼스타들이 겪은 시험과 시련을 낱낱이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11,200 원

세계질서와 문명등급

도서정보 : 리디아 류,궈솽린,량잔,류다셴,멍위에,쑹사오펑,자오징화,장징,청웨이,칼 레베카,탕샤오펑 | 2022-04-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500년 서양 문명 패권에 대한 인문학적 도전
서양 문명은 어떻게 세계질서를 형성하고 변화시켜왔으며 도전받는가
문명의 위상이 급변하는 시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글로벌 히스토리 연구

“당대 인문학자에게 있어서 과거 수백 년간의 지식구조를 반성하고
새로운 역사의식을 탐색하는 것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_리디아 류, 「서문」에서

서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세계질서와 문명등급이라는 유령
오늘날 물리적·심리적 국경과 나라별, 민족별 문명의 서열화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온 것일까. 이 책은 철저하게 서구의 시선으로 형성되고 인식하게 된 지난 500년의 세계질서와 문명등급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비판, 반성과 새로운 연구방법을 개척하기 위해 각기 다른 학문적 배경을 지닌 11명의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수년에 걸쳐 이룬 흥미로운 인문학적 결정체이다. 이 책은 주로 중국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적 문명론 및 근현대 중국의 사상과 가치의식에 대한 비판도 포함한다. 비서구의 많은 국가가 자국의 문화와 인물에 대한 서구의 평가를 갈구하며 문명국가로서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보인다. 서구 중심의 문명등급론은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이념으로 비판받아 지금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근현대 역사를 살펴보면 실은 더욱 완고하게 내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명과 문명등급론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지만,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일상의 언어에 유령처럼 스며든 채 떠돌면서 서구 사회의 눈을 의식하며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문제의식은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를 넘는 전 세계의 보편적 역사 인식에 관한 새롭고도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장기간 ‘서학 편역’은 동아시아 학자들과 서구 지식 사이의 연계방식을 주도해왔으며, 우리의 역사의식을 지배하고 미래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주재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낡은 모델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의 방법을 개척해야만 하지 않을까? _리디아 류, 「한국어판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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