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투쟁: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도서정보 : 박명수 | 2024-01-1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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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에서 미군이 진주한 1945년 9월 8일까지 약 20여 일 동안 건국을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우선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한편으로는 과대평가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화되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과대평가되었다는 점은 총독부의 도움으로 시작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창설된 지 얼마 가지 않아서 미군의 진주와 임정의 귀환소식 때문에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며, 미화되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건준에서 좌익 주도가 분명하고 우익세력이라는 것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건준을 좌우가 연합한 민족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에 들어간다. 정치적으로 아시아에서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었고,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의 국가를 이룩하였으며, 종교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것은 북한의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된다. 북한은 세계사상 찾아보기 힘든 독재국가이며, 백성들은 가난과 질고에 시달리고 있고, 신앙의 자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면 이 같은 남한과 북한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해방 이후 남한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은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지도자들을 존경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해방 직후부터 이 나라가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의 연대 가운데서 임시정부를 주체로 해서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송진우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구매가격 : 8,400 원

근대 용어의 탄생

도서정보 : 윤혜준 | 2024-01-05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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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명의 키워드
말의 역사를 다루다

민주주의, 경쟁, 비즈니스, 진보, 혁명, 대학···
우리가 쓰는 용어들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도착했는가?
지성사, 문학사, 사료를 통해 탐사·수집한 근대 용어의 계보

역사를 건너뛴 채 진리를 말하지 않는
비코식 탐구의 이정표

특정 시간들 속에서
특정 방식으로 탄생된 말의 역사

이 책은 근대문명의 키워드, 즉 문명을 구성하고 사는 모든 일반인이 자주 쓰는 말,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의 역사를 다룬다. 이를테면 외국에서 들어와 우리말에 자리잡은 비즈니스, 프로젝트, 리뷰 등의 외래어와 대통령, 자유, 헌법, 민주주의 등 흔히 사용하고 접하는 말들을 소개한다. 이 말들은 근대문명의 내력과 내면을 살펴보고 탐색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 역할을 한다.
이 책은 각 키워드에 따라 여러 분야의 다양한 주제에 걸쳐 있는 역사 이야기를 조사하고 수집했다. 주로 경제와 정치 영역에서 활발히 쓰인 말들이 ‘근원지’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달라졌는지 아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근대문명’이라는 용어가 포괄적으로 뜻하는 체제, 제도, 문화, 가치, 정서 등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유지되는 현실을 전제로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근대의 공간적·시대적 배경

이 책에서 다루는 키워드의 시대는 영국이 근대로 이행할 준비 단계인 17세기부터 제국주의 전성시대인 19세기까지다. 하지만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18세기다. 그에 따라 공간적 배경도 영국이다. ‘근대문명’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중요한 요소인 의회정치, 시장경제, 자유출판시장, 제국주의 등이 모두 18세기 영국에서 발원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주요 사상가인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등을 소환, 인용하여 키워드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근대 영국 외에도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 영어 외에 다른 언어가 필요할 경우 함께 다루었다.

‘문화’나 ‘사회’가 아니라
왜 ‘문명’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키워드들이 실생활에서 활발히 사용된 빈도, 즉 화려한 현실 참여를 반영하기 위해 문화나 사회에 해당하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이라는 포괄적 말을 택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변천되었는지 이해하기 쉽도록 가나다순이 아니라 알파벳순으로 차례를 구성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산업화를 거쳐 세상이 점점 더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의 의미가 근대 이전 시대에 말속에 담겨 있던 지혜와 가치가 손상되어 단순하고 경직된 의미에 제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말들의 내력을 ‘역사’를 무기로 하는 잠바티스타 비코를 소환하여 설명한다. 인간들이 남긴 흔적을 탐구함으로써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에서 표현되고 기록된 된 바를 해당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또한 그렇게 탄생된 원문을 소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주인공인 ‘근대문명의 키워드’를 비코식 탐구의 이정표라고 말한다.

구매가격 : 15,500 원

건륭

도서정보 : 장훙제 | 2024-01-04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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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황제인가, 실패한 황제인가
사료로 고증하고 분석한 건륭성패!
CCTV 백가강단 인기 강연!

인류 역사상 실질적인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63년 4개월) 제왕이자, 가장 장수한(89세) 군주 중 하나. 인자하면서도 잔인했고, 상냥하면서도 냉정했으며, 검소하면서도 사치스러웠고, 겸손하면서도 거만했던 인물. 일생 동안 위대한 정치적 업적을 쌓았고, 재임 기간에 태평성대를 이룬 성공한 황제이자, 말년에 정치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범하면서 스스로 태평성대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아편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은 실패한 황제. 그는 바로 청나라의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 정치가와 학자, 시인, 여행가, 사냥꾼 등 다양한 모습이 합쳐져 있는 별종 황제에 대하여 가까이 다가가 그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한다.
장훙제의 『건륭: 63년 4개월의 절대 권력』(원제: 乾隆成敗)은 청淸나라 6대 황제 건륭(재위 1735∼1795)의 초년 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 거의 80여 년에 달하는 기간을 밀착하여 취재하듯이 모든 것을 세밀하게 지켜보는 책이다. 숨죽이며 마련된 무대에 올라간 건륭이라는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의 억양, 이마에 맺힌 땀방울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세계 제1의 제국을 통치한 지도자의 내면과 사생활, 즉 다양한 취미생활, 심리적 콤플렉스와 경향성, 공부와 학습의 역사 등은 물론 주요 정책들이 결정되고 시행된 과정, 청나라 만주족 권력의 생리, 관료체제의 운영,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권륭이라는 한 권력자의 성공과 실패를 조목조목 짚어보고 있다.
그를 위해 총 23개의 강의로 이뤄져 있으며, 황위를 물려받기 전 살떨리는 경쟁 시스템에 대한 소개와 타고난 사주팔자의 행운, 일찍이 강희제의 눈에 들어 부친 옹정제의 황위 등극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점, 황위에 오른 뒤에는 부친이 시행한 큰 정책들을 과감하게 폐지하는 모습, 대신들을 다루는 방법, 황후의 사망에 따른 중년기의 고통, 태평성대의 절정에 이르는 과정까지가 책의 전반부를 이룬다. 나머지 후반부는 변화와 위기, 기이한 사건들,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이를 상징하는 화신이라는 인물의 등장, 신하들과의 대결 국면, 영국의 통상요구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대응 끝에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드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의 주요 내용

건륭제의 성은 청나라 황실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이며 본명은 홍력弘曆이다. 청나라 초기에는 황족 이름을 짓는 데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 그래서 황족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족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강희제康熙帝는 황자皇子와 황손皇孫들의 이름을 짓는 규칙을 마련했다. 이제 황자들은 이름 첫 글자는 반드시 윤胤자로 쓰고, 두 번째 글자는 보일 시示 변이 있는 자를 써야 했다. 그래서 윤진胤禛, 강희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옹정제雍正帝의 이름 등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황손들은 이름의 첫 번째 글자는 반드시 홍弘, 두 번째 글자는 날 일日 변이 있는 글자를 써야 했다. 건륭의 이름인 홍력의 ‘역’은 ‘曆’이다.
건륭의 생일은 강희 50년인 1711년 음력 8월 13일이다. 띠는 토끼띠이고 별자리는 천칭자리다. 태어난 곳은 베이징 옹화궁雍和宮으로 알려졌지만 이를 두고는 이론이 분분하다. 건륭의 아버지는 알려진 대로 옹정제고, 어머니는 만주족 유호록鈕祜祿 씨다. 혈통으로 보면 건륭제는 만주족 피 81.25퍼센트와 몽골족 피 6.25퍼센트, 한족 피가 12.5퍼센트 섞인 사람이다. 건륭의 외모는 외국인의 기록이 신뢰할 만하다. 건륭제 말년에 영국의 사신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눈짐작으로 건륭제의 키가 약 5.2피트 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60센티미터 정도다. 자금성에는 건륭이 여름에 입었던 십이장十二章, 중국 황제의 예복에 붙어 있던 열두 가지 장식 조포朝袍가 남아 있는데 이 옷을 근거로 했을 때 그의 키는 166센티미터 정도였을 거라고 본다.
건륭제는 평생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바꿔 말하면 건륭제의 주요 업적과 역사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건륭 말기 중국 인구 3억…그 전대보다 2배 늘어

첫째,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청나라 이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인구수는 아무리 많아도 700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일정 시점에는 중국의 인구수가 잠시 1억을 돌파한 때도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데 건륭제 초기인 건륭 6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중국의 인구수는 이미 1억4000만 명에 달했다. 건륭 60년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얼마나 나왔을까? 3억에 가까웠다. 건륭제가 나라를 다스린 50여 년 동안 중국의 인구수가 몇 배나 늘어난 것이다. 이는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둘째, 경제 규모가 세계 제일을 차지했다.
건륭제 시기 중국의 GDP는 전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중국 제조업의 총 생산량은 영국의 여덟 배, 러시아의 여섯 배였다. 1990년대에 독일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안드레 귄터 프랑크Andre Gunder Frank는 『리오리엔트』에서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서도 막강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셋째, 청나라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건륭 24년 중가르准噶爾, Jungar, 17세기 초에 일어나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몽골 오이라트족의 부족집단과 그 국가를 평정한 뒤 청나라 영토는 14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현재 중국의 면적이 960만 제곱킬로미터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다. 또한 중국의 역대 왕조와 황제들이 회유하거나 느슨한 제도로 변방을 거느렸던 것과 달리 건륭은 변방을 정치적 관할구역에 포함시키고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다. 역대 다른 황제들은 전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넷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문화적 기록을 남겼다.
건륭제 때 만들어진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중국 역사상 글자 수가 가장 많은 책이다. 책은 약 8만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자는 9억 9600만 자에 달한다. 중국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총서라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기록은 건륭제가 중국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황제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한다. 경제와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와 문화 방면에서도 그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최장 재위기간, 최장수, 신친 7대…기록 갱신의 제왕

이 외에도 건륭은 몇 가지 특별한 역사적 기록을 만들어냈다.
우선, 그는 전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이 가장 긴 군주였다. 건륭제는 60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고, 그 후 3년간 태상황太上皇, 자리를 물려준 뒤 살아 있는 황제의 부친 자리에 올라서도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정리하자면 건륭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청나라를 통치한 기간은 63년 4개월로, 이는 전 세계 통치자들 중 가장 긴 기간이다.
강희제의 통치 기간이 더 긴 것이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연호가 강희는 61년, 건륭은 60년까지였다. 하지만 강희는 태상황에 오르지 않았고, 또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겨우 여덟 살이었기 때문에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실질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55년에 그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72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왕위에 올랐을 때가 겨우 다섯 살이었고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실제 통치 기간은 50년에 불과하다. 이란의 국왕 샤푸르 2세Shapur II는 총 70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그가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는 아직 어머니 배 속에 있었다. 따라서 실제 정치에 참여한 기간은 60년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기간이 64년이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국은 이미 군주입헌제를 택했기 때문에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군주일 뿐 권력은 중국 황제와 비교되지 않는다.
건륭은 또 세계에서 장수한 왕들 중 하나다. 중국 역사상 나이를 고증할 수 있는 황제는 500여 명인데, 그중 일흔 이상 살았던 왕은 아홉 명, 여든 이상 왕은 네 명이다. 바로 양나라 무제武帝, 무측천武則天, 송나라 고종, 건륭이다. 건륭은 여든아홉까지 살았으니 네 명 중 가장 장수했다.
하지만 전 세계로 범위를 확대해보면 그는 두 번째가 된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Ramesses II가 건륭보다 한 살 많은 아흔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건륭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신친 7대身親7代’를 경험한 황제다.
‘신친 7대’란 자신을 포함한 7대를 모두 직접 만났다는 의미다. 위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래로는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까지 보았고, 거기에 건륭 자신을 합치면 7대가 된다. 이 기록은 역대 제왕들 중 유일무이하며 누구도 이를 뛰어넘은 적이 없다. 황실에서 유일할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역사 기록을 조사해보니 수천 년 동안 당나라 시인 전기錢起에서 명나라 화가 문징명文徵明까지 겨우 여섯 명만이 신친 7대를 이루었다.
이런 몇 가지 기록을 제외하고도 건륭에게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부분이 또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문무文武 겸비

그중 하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많았다는 것이다. ‘무武’ 방면에서 건륭은 기초체력이 아주 뛰어났다. 평생 건강한 신체와 체력을 유지했으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문文’ 방면에서는 아이큐가 높아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았고 만주어, 한어漢語, 한족의 언어로 지금은 중국어를 뜻함, 몽골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다섯 가지 언어를 구사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었다. 평생 시를 몇 수 남겼을까? 총 4만3630수나 된다. 『전당시全唐詩』에는 당나라 시대에 활동했던 2000명이 넘는 시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모두 합쳐도 4만8000수가 채 되지 않는다. 건륭 한 사람이 당나라 시인 2000명의 시 선집만큼 시를 지은 것이다. 이 역시 흥미로운 기록이다.
또한 운이 좋았다. 건륭제는 즉위 과정이 순조로웠는데, 옹정제가 비밀리에 태자를 세우는 제도를 마련해놓은 덕분에 그는 황위를 두고 다른 황자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옹정제가 건륭을 후계자로 정한 뒤 일찍 세상을 떠나 건륭은 젊고 혈기왕성한 스물다섯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즉위했을 때는 정치적 기초도 아주 잘 다져져 있었다. 강희제와 옹정제가 7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아주 안정된 상태였고, 나라 안팎으로 특별한 우환도 없었다. 말하자면 정치라는 무대 위의 모든 세트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
마무리도 완벽했다. 역사상 유종의 미를 거둔 황제는 많지 않다. 중국 황제가 횡사橫死, 즉 정상적이지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확률은 44퍼센트나 되었다. 정말이지 고위험군에 속하는 직업이다. 이에 반해 건륭은 6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성공적으로 의식을 거행해 자신이 고른 후계자 가경嘉慶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 후에도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말년의 탐욕, 지나친 문자옥, 자만과 폐쇄정책

‘시비是非’와 ‘공과功過’를 모두 따져보자면 건륭제의 ‘잘못’을 이야기해야 한다.
건륭의 첫 번째 잘못은 말년에 태평성세에 취해 탐욕을 부리며 부패를 만들어내고 청나라를 쇠락의 길로 내몬 것이다. 그는 화신和珅을 중용해서 황실 수입을 늘리도록 했고 대신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공물로 바치라고 강요했다. 이 바람에 청나라 정계에는 횡령과 부패가 성행했고, 결국 백련교白蓮敎, 송·원·명·청나라에 걸쳐 유행했던 신흥종교로 청나라 가경제 때 가장 큰 반란을 일으킴의 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두 번째 잘못 역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이다. 바로 ‘문자옥文字獄’이다.
건륭은 훌륭한 일을 역사적 기록으로 많이 남겼지만 일부 잘못도 역시 기록으로 남았다. 그는 중국 역사상 문자옥을 가장 많이 일으킨 황제다. 청나라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예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삼대에 걸쳐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그래도 강희제는 열 차례에 그쳤지만 옹정제는 스무 차례에 달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얼마나 되었을까? 130여 차례나 되었다.
건륭의 또 한 가지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바로 폐기한 책의 권수다. 그는 『사고전서』를 만들며 문화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런데 실상은 그 기회를 틈타 청나라 왕조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책을 모두 불살랐는데,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 양이 적어도 6∼7만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사고전서』를 만들면서 또 다른 ‘사고전서’를 불태운 셈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문화적 재앙의 하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잘못이다. 바로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외교방식을 택한 점이다. 건륭이 살던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다. 물질적으로는 건륭이 즉위한 이듬해인 1733년 영국인 케이John Kay가 플라잉셔틀flying shuttle, 직조기계의 씨실을 넣는 장치로 직물 생산을 능률화 한 발명품을 발명하며 산업혁명의 서막이 올랐고, 건륭 34년(1769)에는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해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문화적으로는 건륭의 나이 마흔넷이 되던 건륭 19년(1754)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명작을 발표했고, 말년인 건륭 54년(1789)에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시민들은 「인권선언」을 발표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정신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여든다섯이 된 건륭이 아들 가경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에 오른 이듬해인 1796년,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연임하지 않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은 연임할 수 없다는 관례가 생겼다. 이 두 역사적 거물이 보인 권력에 대한 태도에서 당시 청나라와 서양 정치문명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건륭은 서양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기본적으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는 ‘청나라는 위대하며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던 때에 오히려 문을 닫고 나라를 봉쇄했다. 학자들은 건륭의 이런 뒤처진 외교적 사고가 청나라 몰락과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복잡한 인간, 건륭

저자는 한 단어로 건륭의 성격을 표현해야 한다면 ‘복잡複雜’을 고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는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인자하고 선량한 면이 있었다. 옹정은 임종 전 남긴 조서에서 건륭을 ‘천성이 인자하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나 개가 죽으면 반나절을 울곤 했다는 것이다. 또한 건륭은 나라의 재난 현장을 보고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어느 해에는 안후이성 타이후현에 심한 기근이 닥치자 먹을 것이 없어진 백성이 들로 나가 ‘흑미黑米’라는 것을 파먹으며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흑미란 오래되어 검게 변한 곡식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건륭은 이 소식을 듣고 관리들을 시켜 흑미를 가져오도록 했다. 도대체 무엇을 먹는지 직접 보려고 한 것이다. 흑미가 오자 그는 맛을 보았다. 그런데 입안에 넣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그것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흑미를 황자들에게 나눠주며 백성의 힘든 생활을 가슴에 새기도록 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정확한 것을 좋아한 건륭은 유독 재난 복구 과정에서만큼은 ‘낭비’를 허락해주었다. 설령 관리들이 일부러 상황을 부풀려 보고하는 한이 있어도 모든 백성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는 매우 인자한 황제다.
하지만 그에게는 폭력적인 면도 있었다. 『청대문자옥당淸代文字獄檔』을 살펴보면, 건륭 18년에 정문빈丁文彬이라는 자가 저장성에서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부孔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더니 며칠 전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자신에게 공부의 두 딸을 주시겠다고 했으니 이 집 사위가 되겠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바로 관아로 끌고 갔다. 관리들이 몸을 수색하니 책이 한 권 나왔는데 표지에 알 수 없는 연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관리에게 자신의 귓가에서 천자가 될 운명이라는 말이 자꾸 들린다며, 그 목소리를 따라 이 연호를 적었다고 말했다. 관리들은 이 사실을 바로 건륭에게 보고했다. 건륭은 그가 그저 정신 나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 ‘미치광이’를 거리로 끌고 나와 백성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하고 산 채로 몸을 3600번 베게 했다.
건륭이 이런 처벌을 내린 까닭은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우민愚民’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건륭은 인자함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도 그에게는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 사교적이고 기품 있으며 주변 사람이 ‘봄바람과 따뜻한 기운’을 느낄 만큼 온화했지만, 매우 오만해서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깔보았으며 정책을 시행할 때는 엄격하고 냉정했다. 또 절제되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지키며 평생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극도로 사치스러워서 여섯 차례나 남쪽지방을 순행하며 엄청난 경비를 지출했다. 젊어서는 총명하고 겸손하며 신중한 성격으로 청나라를 태평성세에 올려놓았지만 말년에는 고집불통에 기고만장해서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고 스스로 그 성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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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쩐의 전쟁

도서정보 : 이한 | 2024-01-0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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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 유산 싸움부터 노비가 알려 주는 소송의 기술까지
돈에 웃고 돈에 울던 500년 전 조선과의 만남!
“부모를 죽인 원수는 금방 잊어도 자기 재산을 앗아간 원수는 죽어서도 갚는다.” 16세기 정치가 마키아벨리의 말이다. 인간의 가슴에 가장 큰 원한, 울분, 억울함을 쌓는 것이 ‘돈’이라는 말이다. 이로부터 약 5세기가 지난 현대를 사는 인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식이며 코인, 부동산 투기 등등 평생 돈에 얽매여 괴로워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훨씬 더 과거였던 14세기 조선, 유교와 점잖은 선비의 나라는 좀 달랐을까?
이 책의 저자인 이한 작가는 온갖 사료에서 건져 올린 조선인의 여러 사연이 현대와 절대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돈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없고, 형제자매나 부모자식도 안중에 없는 사연이 수두룩했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의식주가 풍족하지도 않았고 신분제까지 존재하던 시대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원래 있는 놈이 더하다고, 더 부유하고 높은 신분이 자기보다 가난하고 낮은 신분을 약탈하고 착취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양반들은 노비가 주인에게 돈을 바치는 ‘기상’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돈 많은 노비가 울며 겨자 먹기로 바치는 재산을 당당하게 갈취했고, 세금 비리가 심하던 때는 죽은 사람의 백골과 갓 태어난 아기에게까지 세금을 매기며 백성을 수탈했다. 그럼 민초들은 그대로 짓밟히기만 하고, 참고 또 참으며 숨죽이고 살았을까? 슬슬 감이 오겠지만, 절대로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조선 시대는 노비라도, 여성이라도 모두 자신의 억울함을 공식적으로 호소할 수 있었다.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조정을 요청할 수 있는 ‘송사(소송)’ 제도가 있었으며, 한자를 알지 못해도 자신의 사정을 글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도울 ‘한글’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관아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소송전을 벌였다. 위로는 양반부터 아래로는 천민까지 누구든 고소장을 들고 “내 재산을 돌려 달라!”고 외칠 수 있는 나라, 분명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조선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사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은 역시 물질에서 벗어나 살 수 없는 것인지, 대체 이 욕심의 끝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끝이 있기는 한 것인지, 피도 눈물도 없고 가족과 친구도 한낱 돈 앞에 하찮은 존재가 되고야 마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 것인지.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점은 그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투쟁하고, 저항하고, 도전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나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삶이 인간의 본성인 건 아닐까?
밟는다고 가만히 밟히지 않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주저앉아 울고 있지만은 않았던 조선인들의 통쾌하고 씩씩한 투쟁기를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도 다양한 시련을 헤쳐 나갈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조선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 편견을 깨게 되길 바란다.

구매가격 : 15,000 원

조상의 눈 아래에서

도서정보 : 마르티나 도이힐러 | 2023-12-2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한국을 향한 노대가의 열정,
한국 사회사 연구의 획기적인 이정표

세계적인 석학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의
50년 한국사 연구를 집대성한 역작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난 50년 동안의 열정을 다한 한국사 공부를 집대성한 신작『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내놓았다. 이 책은 신라시대 초기에 생겨나 가장 대표적인 사회 단위로 뿌리내린 한국 고유의 출계집단(씨족 또는 족, 겨레라 불리는)에 초점을 두고, 신라 초기(4~5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국 출계집단의 역사를 다룬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친족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내구력을 부여했다. 중국에서 차용한 과거제와 신유학은 위계질서를 허무는 데 실패했다. 엘리트의 월권에 제약을 가하기는커녕 괄목할 만한 방식으로 엘리트의 지배를 강화했던 것이다. 도이힐러 교수는 신유학의 변혁능력을 강조한 기존 한국사의 관점은 이 토착적인 친족 이데올로기의 지속성을 간과했다고 한다. 엘리트에게 유교식 사회의 윤곽을 제시한 신유학은 종종 후기 조선사회의 경직성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엘리트 제도’를 존속시킨 것은 신유학이 아니라 내구성 있는 친족 이데올로기였다.

저자는 경상도의 안동과 전라도의 남원을 선택하여 그들이 만들고 다진 촘촘하게 짜인 사회구성을 들여다본다. 예컨대 내앞의 의성 김씨, 유곡의 안동 권씨, 주천의 진성 이씨, 둔덕의 전주 이씨, 안터의 순흥 안씨 같은 집단과 행동했던 개인들에 대한 내러티브에 지성사,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를 엮어 넣는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경제적·지적 문제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저자의 관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는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신흥사대부 조선 건국론’에 대해 신흥사대부의 출현은 애초에 없었다며 고려의 세족(世族)이 조선의 사족(士族)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라는 점, 고려 말의 권문(權門)과 세족은 엄연히 다른 집단이기 때문에 권문세족이란 용어는 폐기하자는 점, 당쟁은 정치적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엘리트층의 신분과 신분 유지에 직결된 사회적 현상이었다면서 붕당의 끈질긴 생명력은 친족 집단과의 관련성이 기인한다는 점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왕조의 경계를 뛰어넘은 친족 이데올로기의 검토에서 얻어지는 저자의 통찰이,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나아가 그 유구한 역사의 성격과 작동방식을 다시 평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사 연구의 획기적인 이정표라 할 만하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1960년대에 한국에서 조사 및 연구를 수행한 최초의 서양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해외 한국학을 선도하는 학자로, 중요한 저서 몇 편을 쓴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로운 상을 다수 수상했다. 저자는 역사와 사회인류학의 방법론을 결합하여 한국의 역동적인 역사와 사회를 관통해온 메커니즘을 재평가하는 참신한 틀을 만들어냈다.

구매가격 : 31,000 원

메소드 The Method

도서정보 : 아이작 버틀러 | 2023-12-2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19세기 러시아의 “시스템”에서 20세기 미국의 “메소드”로
연기 혁명은 세상을 어떻게 바꿨을까

놀랍고 변화무쌍하며 혼란스럽고 논쟁적인 연기 테크닉
메소드의 역사를 다룬 단 한 권의 책!

*** 2022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 2022 『타임』 『뉴요커』 『샌프란시스코 클로니클』 선정 올해의 책
*** 2022 복스(Vox), 살롱(Salon), 릿 허브(Lit Hub) 선정 올해의 책

“메소드는 단순히 연기론이나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울먹이게 만드는 든든한 방법이 아니다. 변화를 불러오고 혁명을 일으킨 현대적인 예술운동이자, 20세기의 위대한 생각이다. 무조음악, 모더니즘 건축, 추상미술처럼 “시스템”과 메소드는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버릴 인간 경험을 상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내놓았다.” _들어가며 중에서

영화와 연극을 좋아하고, 배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메소드’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메소드는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와 하나가 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특별히 메소드 배우라고 지칭하지 않더라도 현대 연기에는 어느 정도 메소드 연기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메소드의 등장은 ‘연기 혁명’이라 불릴 만큼 연기에 대한 접근법은 물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던 연기에 대한 개념까지 바꿔버렸다. 하지만 메소드는 논란이 많은 테크닉이기도 하다. 감정을 끌어내는 몇몇 방식이 배우들을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평론가이자 연출가인 저자 아이작 버틀러는 아역 배우로 활동했고, 한때 메소드에 반했던 젊은 배우였다. 그러나 연기에 필요한 감정을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그는 결국 배우를 그만두고 연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메소드라는 연기 테크닉에 대해 여러 의문을 갖게 했고, 이 책 『메소드』의 집필로 그를 이끌었다.

버틀러는 메소드를 몇몇 전설적인 천재들의 이야기 또는 몇몇 스타 배우들의 기이한 연기 테크닉이라는 프레임에서 꺼내, 메소드 자체가 주인공인 새로운 문화사를 만들어냈다. 그는 메소드에게는 부모가 있으며, 메소드와 메소드를 둘러싼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소드가 살아온 시대와 당시 문화적 맥락에서 이를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러시아 혁명 이전의 러시아에서 시작된 연기 철학이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왔고,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를 점령하며 미국 연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는가를 주제로 다룬다.

구매가격 : 28,000 원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40가지 사건

도서정보 : 강부원 | 2023-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다시 쓰는 우리 역사의 빛과 그림자!
20세기 한국사의 변곡점을 운명지은 순간들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은 빛나는 발전과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며 누구나 제 목소리를 당당히 낼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가도, 어느 한 곳이 황망하게 무너져도 참고 견디라고 말하는 야만의 사회이기도 했다. 20세기 한국은 견고한 듯 보이지만 살짝만 균형을 잃어도 무너져 내릴 만큼 위태로웠다.
이 책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40가지 사건』은 성장의 그늘과 민주화의 이면이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켜 무참한 사건과 사고들이 연속되었던 20세기 한국의 단면을 그렸다. 특별한 역사와 소소한 일상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역사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시리즈 일곱 번째 책이다. 우리가 살았던 시간은 사적인 흔적이자 공적인 기록인 셈이다.
이 책이 소개하는 40가지 사건 사고는 모두 20세기의 변곡점 내지는 분기점으로 작용했을 만큼 중요하다. 그 시간들은 마냥 아름답고 평화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툼과 갈등으로만 점철되지도 않았다. 변화와 혁신이 뜻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름 없는 이들의 헌신과 노력 덕분에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 20세기 한국이다.

구매가격 : 12,000 원

사기열전 (상)

도서정보 : 사마천 | 2023-12-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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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주三家注’를 넘어 최신 연구 성과까지
『사기』의 모든 주석을 망라한 결정판!

그동안 국내『사기』 번역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등 ‘삼가주三家注’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었다.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다.

글항아리에서 펴낸 이번『사기열전』 상·하는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삼가주三家注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같이 검토함으로써 풍부한 주석의 세계를 선보였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한 뒤에 가장 옳다고 생각한 내용을 번역에 반영했으며, 아울러 독자들도 다양한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분량 또한 방대해졌다.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런 부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때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가 뒤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범위한 연구 성과 반영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사기』의 판본은 상당히 많다. 『사기』의 각본刻本은 북송 때 시작되었고, 이후에 가장 유명한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합친 ‘삼가주합각본三家注合刻本’이 출현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평론을 숭상하는 기풍에 따라 평림본評林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 평론은 구절과 단락을 나누어 평론한 것도 있고 편 전체를 평론한 것도 있다. 청대에 와서는 송나라 판본을 보충한 백납본百衲本이 출현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잔본殘本들을 모아 완성시킨 것으로 백납본白衲本 『사기』라 부른다.
이후 현대에도 많은 『사기』가 간행되었지만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2013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點校本二十四史修訂本 『사기』’를 이번 번역 작업의 저본으로 삼았다. 이 책은 1959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 『사기』와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5)에 금릉서국에서 간행한 『사기집해색은정의합각본史記集解索隱正義合刻本』 130권을 저본으로 삼아 『사기』 문헌학의 권위자인 자오성췬趙生群 난징사범대학 교수의 교감과 수정을 거쳐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정한 ‘수정본 『사기』’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각 「열전」 말미에 ‘교감기’를 통해 본문의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소개했는데, 역자는 이번 번역본에서 이를 참고하고 인용할 때 주석에서 ‘교감기’라 하지 않고 ‘수정본’이라고 밝혀두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사기』 번역본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삼가주三家注’(남조南朝 송宋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특히 『사기』의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이러한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삼가주’의 중요한 주석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들의 견해를 주석을 통해 설명하며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삼가주’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출처를 밝혔다. 역자가 참조한 대표적인 저작물은 명대 능치륭凌稚隆의 『사기평림史記評林』을 비롯해 청대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가운데 「독사기잡지讀史記雜志」, 곽숭도郭嵩燾의 『사기찰기史記札記』, 그리고 근대의 저작물인 추이스崔適의 『사기탐원史記探源』 , 천즈陳直의 『사기신증史記新証』, 일본 학자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등과 왕수민王叔岷의 『사기각증史記斠證』, 현재 『사기』 연구의 최고 전문가라 평가받는 한자오치韓兆琦의 『사기전증史記箋證』(2015년 수정판), 그리고 장다커張大可, 딩더커丁德科의 『사기통해史記通解』(2015)를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들 외에도 번역 중 검토했던 주요 자료 목록을 참고문헌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사마천의 오류 집중 분석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의 출판물에서는 이러한 오류 부분에 대한 지적과 설명,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되고 타당한 견해들을 소개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채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오류 이외에 『사기』에는 또한 『전국책』 『한서』 등과 비교해 내용이 상이하거나 시대 순서의 오류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 또한 『전국책』 『한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소개했고, 『전국책』 『한서』와 관련된 많은 역사 저작에서 『사기』와 상이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석에 소개하고 각각의 오류를 검증하고 바로잡았다.
그 외에 사마천은 『사기』를 기술하면서 제자백가와 사서오경 등 여러 고대 저작물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글항아리판 이번 번역에서는 사마천이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 상이하거나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까지도 비교 검토하여 주석에 상세히 소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판된 기존의 『사기』 번역서에서 심각한 번역 오류라 판단된 경우에는 이들 번역이 왜 오류인지 근거와 함께 바른 번역을 제시했다.
『사기』는 중국 최고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중국 역사의 고찰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천天’이 아닌 ‘인人’, 그리고 ‘민民’으로 더욱 구체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들 평민 백성의 사적과 역할을 기술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혼란한 시대 상황과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분노했다.

구매가격 : 32,300 원

사기열전 (하)

도서정보 : 사마천 | 2023-12-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삼가주三家注’를 넘어 최신 연구 성과까지
『사기』의 모든 주석을 망라한 결정판!

그동안 국내『사기』 번역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등 ‘삼가주三家注’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었다.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다.

글항아리에서 펴낸 이번『사기열전』 상·하는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삼가주三家注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같이 검토함으로써 풍부한 주석의 세계를 선보였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한 뒤에 가장 옳다고 생각한 내용을 번역에 반영했으며, 아울러 독자들도 다양한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분량 또한 방대해졌다.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런 부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때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가 뒤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범위한 연구 성과 반영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사기』의 판본은 상당히 많다. 『사기』의 각본刻本은 북송 때 시작되었고, 이후에 가장 유명한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합친 ‘삼가주합각본三家注合刻本’이 출현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평론을 숭상하는 기풍에 따라 평림본評林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 평론은 구절과 단락을 나누어 평론한 것도 있고 편 전체를 평론한 것도 있다. 청대에 와서는 송나라 판본을 보충한 백납본百衲本이 출현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잔본殘本들을 모아 완성시킨 것으로 백납본白衲本 『사기』라 부른다.
이후 현대에도 많은 『사기』가 간행되었지만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2013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點校本二十四史修訂本 『사기』’를 이번 번역 작업의 저본으로 삼았다. 이 책은 1959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 『사기』와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5)에 금릉서국에서 간행한 『사기집해색은정의합각본史記集解索隱正義合刻本』 130권을 저본으로 삼아 『사기』 문헌학의 권위자인 자오성췬趙生群 난징사범대학 교수의 교감과 수정을 거쳐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정한 ‘수정본 『사기』’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각 「열전」 말미에 ‘교감기’를 통해 본문의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소개했는데, 역자는 이번 번역본에서 이를 참고하고 인용할 때 주석에서 ‘교감기’라 하지 않고 ‘수정본’이라고 밝혀두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사기』 번역본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삼가주三家注’(남조南朝 송宋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특히 『사기』의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이러한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삼가주’의 중요한 주석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들의 견해를 주석을 통해 설명하며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삼가주’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출처를 밝혔다. 역자가 참조한 대표적인 저작물은 명대 능치륭凌稚隆의 『사기평림史記評林』을 비롯해 청대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가운데 「독사기잡지讀史記雜志」, 곽숭도郭嵩燾의 『사기찰기史記札記』, 그리고 근대의 저작물인 추이스崔適의 『사기탐원史記探源』 , 천즈陳直의 『사기신증史記新証』, 일본 학자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등과 왕수민王叔岷의 『사기각증史記斠證』, 현재 『사기』 연구의 최고 전문가라 평가받는 한자오치韓兆琦의 『사기전증史記箋證』(2015년 수정판), 그리고 장다커張大可, 딩더커丁德科의 『사기통해史記通解』(2015)를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들 외에도 번역 중 검토했던 주요 자료 목록을 참고문헌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사마천의 오류 집중 분석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의 출판물에서는 이러한 오류 부분에 대한 지적과 설명,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되고 타당한 견해들을 소개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채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오류 이외에 『사기』에는 또한 『전국책』 『한서』 등과 비교해 내용이 상이하거나 시대 순서의 오류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 또한 『전국책』 『한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소개했고, 『전국책』 『한서』와 관련된 많은 역사 저작에서 『사기』와 상이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석에 소개하고 각각의 오류를 검증하고 바로잡았다.
그 외에 사마천은 『사기』를 기술하면서 제자백가와 사서오경 등 여러 고대 저작물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글항아리판 이번 번역에서는 사마천이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 상이하거나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까지도 비교 검토하여 주석에 상세히 소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판된 기존의 『사기』 번역서에서 심각한 번역 오류라 판단된 경우에는 이들 번역이 왜 오류인지 근거와 함께 바른 번역을 제시했다.
『사기』는 중국 최고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중국 역사의 고찰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천天’이 아닌 ‘인人’, 그리고 ‘민民’으로 더욱 구체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들 평민 백성의 사적과 역할을 기술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혼란한 시대 상황과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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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 여행 : 폴란드

도서정보 : 그레고리 알렌, 막달레나 립스카 | 2023-12-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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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습, 역사, 문화, 생활, 삶
이 책은 『세계 문화 여행』 시리즈의 폴란드 편으로 폴란드의 풍습, 역사, 문화, 생활, 삶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업차 폴란드를 방문하든 단순한 여행이든, 폴란드에서 더욱 풍성하고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폴란드 현지 풍습과 전통, 역사와 종교와 정치, 폴란드인의 가정과 직장과 여가, 의식주, 의사소통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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