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중세, 수 당 오대십국 송 요 금 북송 남송

탁양현 | e퍼플 | 2019년 11월 0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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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중국 역사 중세

1. 수나라(581~618), 남북조(420~589) 멸망시키고 통일하다

21세기 현재에 이르도록, 대한민국에서 중국의 역사를 살피는 관점은, 대체로 事大主義的이다. 그러한 까닭은, 李氏朝鮮의 역사적 관성이,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탓이다.
그러다보니 중국 역사에서 유독 ‘漢나라, 宋나라, 明나라’ 시절에 집중한다. 이 3개 왕조가 漢族의 왕조이기 때문에, 중국 역사의 정통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漢族中國人의 관점에서는 온당하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우리의 관점에서, 중국 역사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역사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서 위상을 정립한 시기는, 대부분 북방 유목민족의 왕조가 중국대륙을 점령하던 시기였다. 隋나라, 唐나라, 元나라, 淸나라 등이 그러하다.
더욱이 이러한 북방유목민족 왕조들은, 古代에는 東夷族 계열의 세력이었다. 따라서 동일한 동이족 계열인 韓民族으로서는, 이민족으로서 중국대륙을 장악한 왕조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지리도 쪽팔리는’ 李氏朝鮮의 小中華主義的 관점을 좇아, 북방유목민족 왕조의 역사를, 오랑캐 세력에 의해 중원대륙을 점령당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짱께’들의 관점에서 온당한 것이지, ‘짱께’들로부터 동일한 오랑캐로 취급당하던 한민족에게 온당한 인식일 수는 없다.
그러니 되도록, 이민족 왕조 중심의 중국 역사를 재구성하여 살펴야 한다. 기존의 중국 역사는, 그야말로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중심이다. 그래서 이씨조선 500여 년 동안, 朱子學이 猖獗했던 것이다.
주자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국제정치적 propaganda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李成桂와 鄭道傳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事大主義를 闡明했다. 易姓革命 당시에는, 우선 권력을 簒奪해야 하므로,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지만, 찬탈 이후에는, 그러한 사대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이씨조선은, 점점 더 깊은 小中華主義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결국에는 ‘일본 텐노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나라를 통째로 빼앗겨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한 사대주의적 소중화주의가,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역사적 관성으로써 작동하고 있다. 중국 역사를 굳이 ‘한족 짱께’ 중심으로 살피려는 작태만 보아도, 여실히 검증된다고 할 것이다.
중국대륙의 中世期 역사를 살피다 보면, 姜以式, 乙支文德, 楊萬春 등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전쟁을 격퇴시킨 인물들이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는, 이들과 관련된 부문이, 자기네에게 쪽팔리는 역사이므로 貶毁하고 縮小하였다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인물들에 관한 史料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우리나라의 대표 歷史書인, 三國史記를 지은, 고려 중기의 金富軾으로부터, 철저한 事大主義者였던 까닭이다.
그래서 이후 이어지는 역사에서, 그들의 기억은 차츰 희미해져 갔다. 대놓고 事大主義를 闡明한 李氏朝鮮 시절이라면, 더 이상 말할 나위 없다. 외려 그들을 역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예컨대,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당태종 이세민이 애꾸가 되었고, 그로부터 臥病되어 痢疾을 앓다가 죽어갔다는 史實은, 겨우 고려시대의 詩 한 쪽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어느 역사책에서도, 그 사건에 관한 기록은, 죄다 삭제되어버렸다. ‘짱께’들은 자기들이 쪽팔리므로 그러했다지만, 우리 선조들은 왜 그런 짓을 자행한 것일까.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대가리에 먹물 든 기득권층들이, ‘짱께’들에게 잘 보여, 자기들의 利權을 지켜내며, 享有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아울러, 고작 그런 정도의 의식 수준에서 주장되는, 舊弊的 이데올로기가, 그 잘난 春秋大義에 의한 春秋筆法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양만춘과 당태종에 관련된 사실은, 전설과 같은 野史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얼빠진 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역사를 살필 때에는, 기껏 正史라고 떠들어대는 것일지라도, 그것 역시, 정치적으로 교묘히 脚色되고 潤色된 史實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事實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양만춘에 관하여, 안시성 전투를 제외한 삶은, 모든 것이 미상으로,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그 이름조차 現存하지 않는다.
現傳하는 기록 중에서, 梁萬春이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明나라의 소설 唐書志傳通俗演義, 약칭은 唐書演義 혹은 唐書志傳이다. 太宗東征記는, 이 책의 후반부를 이른다.
尹根壽, 宋浚吉, 朴趾源 등,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당서연의를 채용하면서, 양만춘이란 민족 영웅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
한편에서는, 성씨가 梁이 아니라, 楊이라 주장하였고, 楊萬春 역시 널리 통용되었다.
金富軾은 私論으로, “당 태종은 고명한 불세출의 임금으로, 난을 평정함은 탕왕과 무왕에 비할 만하고, 통치는 성왕과 강왕에 가까웠다.
용병술은 그 기묘함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방 정복만은 安市城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비범한 호걸이라 하겠다.
다만 사서엔 그 성명조차 전하지를 않으니, 양웅이 제나라와 노나라 대신들의 이름은, 사서에 남지 않았다고 한 바와 다르지 않다. 심히 애석하도다.”라 하였다.
三國史記의 편찬자 金富軾(1075~1151)은, 고려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立之, 호는 雷川이다.
高麗 仁宗의 명을 받들어, 鄭襲明, 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三國史記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文烈이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樂浪國開國候로 봉했고, 그 뒤 김부식은 仁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송나라의 使臣 路允迪이 왔을 때, 館伴使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徐兢이, 그의 高麗圖經에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의종) 5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武臣政變이 일어나, 鄭仲夫에 의해 剖棺斬屍를 당한다.
1123년, 중국 송나라의 국신사로 고려를 다녀갔던 徐兢은, 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김부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博學?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그보다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신채호는, 1929년, 朝鮮史硏究草,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에서,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西京叛亂軍 토벌을 지휘한 것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 년간, ‘묘청의 난’보다 지나친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왕의 군사가 반역자를 친 전쟁으로 알았을 뿐이었다.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朝鮮史가 독립적이며 진취적으로 진전했을 것이다.”
반면, 한국 史學 1세대로 평가되는 역사학자 이기백은, “三國史記는 합리적인 유교적 史觀에 입각하여 씌어진 史書로, 이전의 神異的인 고대 사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사서이다”고 호평했다.
양만춘 등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김부식 등은 역사에서 부각되는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의 사학계가 대체로 이러한 분위기이나, 어쨌거나 事大主義的 史觀을 수용할 수도 없으며, 수용해서도 안 된다.
당 태종이, 安市城主 楊萬春이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14세기 고려의 시에 등장한다. 이 시는, 고려후기 牧隱 李穡(1328∼1396)의 貞觀吟이다.
이색은, “어찌 알았으랴. 현화(당태종의 눈)가 백우전(화살)에 떨어질 줄을(那知玄花落白羽)”이라고 읊었다.
이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여러 수필집, 시가집, 야사에 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들이야말로, 우리 韓民族의 관점에서 기술된, 참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외교적 차원에서, 굳이 이러한 기록들을 중국 측에 내세워서, 외교적 분쟁을 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 스스로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과연 어떠한 역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國益에 보탬이 되는 역사인지, 보다 섬세히 思慮해야 한다.
隋는, 북주의 외척인 양견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남북조 시대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나, 무리한 원정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다.
南北朝時代는, 晉나라와 隋나라 중간시대에 해당하며, 이 동안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각각 왕조가 교체해서 흥망하였다.

-하략-

저자소개

지은이 탁양현

<인문학 여행자의 동아시아 여행기>
<그리스비극 철학사상>
<삶이라는 여행>
<노자 정치철학>
<장자 예술철학>
<들뢰즈 철학>
<데리다 철학>
<미국 철학>
<일본 철학>
<공자 철학>
<원효 철학>
<니체 철학>
<헤겔 철학>
<맑스 철학>

목차소개

목차

중국 역사 중세

1. 수나라(581~618), 남북조(420~589) 멸망시키고 통일하다
2. 양견, 선비족으로서 이민족 왕조 수나라를 건국하다
3. 강이식, 수 문제의 제1차 고구려 침략전쟁을 격퇴하다
4. 을지문덕, 수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침략전쟁을 격퇴하다
5. 제3차 제4차 침략전쟁은, 수나라 내부 폭발로 인해 실패
6. 수 문제 양견,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몰락
7. 양광, ‘문제’와 ‘독고황후’의 비위를 잘 맞춰 황태자가 되다
8. 수 양제 양광, 신하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몰락
9. 당나라(618~907), 선비족의 정복 왕조
10. 당 고조 이연, 수양제를 정벌하고 당나라 황제가 되다
11. 당 태종 이세민, ‘정관의 치’를 실현하다
12. 양만춘, 사대주의에 의해 삭제되어버린 민족 영웅
13. 연개소문, 사대주의에 의해 왜곡되어버린 민족 영웅
14. 방현령, 두여회, 위징
15. 측천무후, 중국 역사 유일한 여성 통치자
16. 당 현종 이융기, 며느리 ‘양귀비’와 결혼한 황제
17. 양귀비 양옥환, 155㎝ 65㎏, 풍만하고 육덕진 당나라 미녀
18.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당나라의 몰락
19. 당나라의 당파싸움, 그야말로 ‘당나라군대’가 되어버린 시절
20. 당나라의 국내정치적 상황
21. 당나라와 주변국들의 관계
22.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는 선비족 왕조의 문화적 융성
23. 오대십국(907~979)
24. 송나라(960~1279), 한나라에 이은 한족 왕조
25. ‘후주’로부터 선양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다
26. 요나라(916~1125), 거란족 정복 왕조
27. 야율 아보기, 거란문자 창제하다
28. 요나라에게 침략당하여 발해 멸망하다(926)
29. 야율대석, 중앙아시아에 서요 건국하다
30. 금나라(1115~1234), 여진족 정복 왕조
31. 완안 아골타, 여진문자 창제하다
32. 흠정만주원류고, 금나라 시조는 신라 김씨 왕족이다
33. 만주족 계통,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발해, 여진
34. 북송(960~1127)
35. 서하(1038~1227), 티베트 탕구트족 왕조
35. 남송(1127~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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