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 개벽혁명 사상가들, 홍수전 손문 모택동

탁양현 | e퍼플 | 2018년 10월 05일 | EPUB

이용가능환경 : Windows/Android/iOS 구매 후, PC, 스마트폰, 태블릿PC에서 파일 용량 제한없이 다운로드 및 열람이 가능합니다.

구매

전자책 정가 3,000원

판매가 3,000원

도서소개

‘빠삐용의 開闢’과 ‘체 게바라의 革命’



開闢은 곧 革命이다. 개벽이든 혁명이든, 흔히 인위적인 激變인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런데 天地自然 안에서 어떠한 변화든, 그것은 자연스런 변화일 따름이다. 그러한 바는, 個人이든 集團이든 매한가지다. 다만, 개벽은 원만한 自然의 측면이 강하고, 혁명은 급격한 人爲의 측면이 강하다는 차이는 있다.
또한 개벽은 종교적 개념이고, 혁명은 정치적 개념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것은 다소 便宜的인 분별일 따름이다. 그러한 detail이 不要한 바는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개벽적 혁명이란, 천지자연 자체의 자연스런 변화라는 인식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세계에는 온갖 다양한 형식의 ‘開闢的 革命’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개벽적 혁명 중에서, 굳이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가장 巨大한 존재형식인 國家的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고, 가장 微小한 존재형식인 個人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최소한의 생존이나마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우리 민족의 ‘生存의 利得’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는 집단공동체는 중국과 일본이다. 물론 북방의 여러 민족도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미국이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여건보다도 강력한 地政學的 여건을 좇는다면, 응당 중국과 일본을 우선하여 거론치 않을 수 없다.
中國 近代 역사에서, 그러한 開闢的 革命을 실현한 인물은 홍슈취안, 쑨원, 마오쩌둥 등이다. 이 외에도 개혁적인 변화를 추구한 인물들은 많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실행한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그러했다면 근대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 안에서 중국대륙은, 항상 혁명적 개벽의 변화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래서 중국대륙을 지속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반도는, 高麗王朝로부터 朝鮮王朝에 이르는 1,000여년 동안, 마치 ‘고인 물’처럼 별다른 변화가 없이 정체된, 王朝 獨裁의 역사였다.
그래서 오히려 21세기의 한반도는, 개벽적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만큼 개벽적 혁명의 에너지가 오랜 세월동안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세기를 지나면서, 이미 ‘6․25, 4․19, 5․16, 5․18’ 등의 개벽적 혁명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체험했다고 해서, 이제 개벽적 혁명의 動力이 정지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체험 탓에, 더욱 새로운 개벽적 혁명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러하다면 그러한 개벽적 혁명은 어떤 것일까.

21세기 大韓民國이야말로, 開闢的 革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것이, 철저히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人民民主主義와 共産主義’ 주변의 개벽적 혁명들이, 죄다 역사의 뒤안으로 소멸해버리는 것을, 이미 여실히 目睹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것들을 죄다 삭제해버고서 나아질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면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으며, 기대해서도 안 되는 듯하다.
어쨌거나 개벽적 혁명은, 철저한 現實主義의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예컨대 낭만적 혁명가 ‘Che Guevara’와 같은 理想主義的 想像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이었지만, 결국 한갓 ‘그림자 연극’에 불과했음이, 역사로써 검증되는 탓이다.

예컨대, 근대 중국에서, ‘홍수전’의 太平天國이라는 개벽적 혁명의 경우를 살피면, 지금으로부터 150~160여 년 전에, 基督敎的 신화를 통해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열정이, 無知하고 배고픈 민중에게 먹혀 들어갔다는 사실이 참으로 怪異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잠시만 생각해보면, 첨단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예컨대 ‘허경영’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현상들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으니, 그다지 괴이할 것은 없다. 하물며 서민대중의 대부분이 ‘文盲으로서의 지적 궁핍’과 ‘奴隸로서의 물질적 빈곤’에 허덕이던 과거에는 어떠 했을지, 쉬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지상세계에 진정 Utopia는 작동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유토피아는, 인간존재의 認識的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결코 나쁜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권력과 자본을 탐내어 표에 아부하는 ‘정치꾼’ 수천 명 보다는, ‘홍수전’이나 ‘허경영’ 같은 ‘유토피아적 이미지’가 더욱 소중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당최 가진 게 없는 서민대중으로서는, 험난한 亂世가 닥쳤을 때, 그 고통스런 세월을 견뎌낼 마땅한 방편이 도무지 없으며, 기득권층은 본래 그랬듯이 국가나 국민에게는 관심 없으며 그저 제 몫에나 집념할 때, 그래도 그나마 힘이 되어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것이, ‘미륵’과 같은 유토피아라는 개벽적 혁명의 理想鄕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홍수전’의 태평천국이 작동한 시기는, 동아시아는 물론이며, 전 세계가 집단적 난세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경우에도, 彌勒, 鄭鑑錄, 東學, 甑山 등, 다양한 혁명적 영웅과 개벽적 이상향이 등장했다. 그러니 설령 그것이 惑世誣民의 似而非에 불과할지라도, 그 의미와 가치는 각별하다. 그러한 난세에는, 외려 합법하고 적법하다는, 집단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暴壓이야말로, 더욱 잔혹하며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日帝强占 시기에, 그 主體勢力인 일본은 말할 나위 없으며, 그러한 일본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末期 朝鮮王朝는 또 어떠한가. 과연 그들에게서, 서민대중들이 一抹의 희망이라도 모색할 수 있었겠는가.
고통의 기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면, 稀少하게도 ‘빠삐용’처럼 불굴의 의지로써 이상향을 추구하는 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서민대중은 시나브로 매몰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할 때, 영웅과 이상향은 참으로 소중한 대상으로서 작동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만 한다. 이는 실로 현실세계의 不得已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아주 잘 알려진 두 가지 캐릭터를 회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향후, 21세기 韓民族의 개벽적 혁명을 모색함에 있어, 아주 강렬한 본보기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작 ‘체 게바라’는 ‘빠삐용’의 同一的 그림자였음을, 반드시 유념해야만 한다.
그런데 ‘체 게바라’와 ‘빠삐용’의 ‘이미지 중첩’과 유사한 역사적 상황으로서 모티브가 된 것은, 근대 중화민국과 조선왕조에서 등장한다. 중국군벌 ‘차오루린’은, 조선왕조의 ‘이완용’과 상호 유사한 캐릭터다. ‘차오루린’은 ‘5․4운동’의 비난의 대상이고, ‘이완용’은 庚戌國恥의 비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문제가 되는 외교문서에 결정적으로 직접 서명을 하였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서명한 것은, 비단 개인의 결정에 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러한 상황에 처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니 일견 ‘역사적 희생양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중들은 時流를 좇아, 대다수가 비난을 하면, ‘생존의 이득’을 도모하며, 집단의 관성에 떠밀려 多數의 무리에 편승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집단대중에게는, 어떤 집단적 인식능력이나 판단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완용’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韓民族의 대표적인 민족반역자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규정되어 비난받는다. 그래서 단지 ‘이완용’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極右나 極左에 의해 비난받는 상황까지도 연출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이완용’처럼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極右的인 衛正斥邪主義者’나 ‘極左的인 獨立主義者’처럼, 적극적인 폭력행사도 不辭하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집단대중은 ‘이완용’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생존의 이득’을 도모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존재의 행동방식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비난한다. 비난을 표하지 않으면, 자칫 자기가 ‘희생양 이미지’가 되어버릴 수 있는 탓이다. 게다가 자기 편의 숫자가 多數이면, 이제 비난의 정도는 가혹할 지경에 이른다. 이는, 어떻게든 ‘희생양 이미지’를 제작하고야 마는, ‘권력의 가혹한 本性’이다.
그리고 정작 대표적 민족반역자로서,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응당 그 시절에 가장 큰 권력을 지녔던, 高宗에게 묻는 것이 합당하다. 어쨌거나 ‘차오루린’이나 ‘이완용’은 ‘역사의 희생양 이미지’로서, 아주 오래도록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한다’고들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차오루린’과 ‘이완용’이 상호 유사하게 ‘이미지 조작’되었다면, 정반대의 위치에 배치되어 ‘이미지 조작’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동시대에 발생한 상황이므로, ‘역사적 이미지 조작’을 思慮함에 있어, 재미있는 비교가 될 수 있다.
현대의 중국이나 대만을 가보면, 소위 ‘中山公園’이나 ‘中山路’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것은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매한가지다. 이는, ‘손문(쑨원)’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쑨원’은 그야말로, 현대의 중화민국을 제작해 낸 國父로서, 굳건히 자리매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近代史를 살핀다면, 실상 ‘쑨원’의 역할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니 아무래도 과장된 ‘역사적 이미지 조작’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물론 ‘쑨원’이 나름대로 중국의 근대화에 主演으로서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餘他 인물에 비해 별로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에 동시대에 대한민국에서, 대체로 ‘이승만’은, ‘쑨원’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이승만’ 역시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 ‘쑨원’처럼 國父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을 거론할 때면, ‘정읍 선언’에 의한 남북분단의 元兇이며, 고집센 高齡의 독재자로서 규정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일부 보수적 세력을 제외한다면,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이승만’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니 이 또한, ‘쑨원’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이미지 조작’되었듯이, ‘이승만’은 지나치게 축소되어 ‘이미지 조작’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역시 당시의 상황에서, 누구 못잖게 나름대로 민족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 것이 사실이다. 다시 日帝强占과 같은 지옥으로 매몰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적 이미지 조작’의 片鱗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 바로 역사이다. 그러니 역사를 대할 때,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서, 항상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략-

저자소개

그렇다면 현대사회의 이러한 ‘이미지 조작’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에서는 불과 몇 년 전에, 어느 대통령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최태민’이라는 ‘한국판 라스푸틴’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탄핵되고서도, 과연 ‘최태민 이미지’가 ‘한국판 라스푸틴’이었는지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느 누구도 밝히려 하지 않으며, 굳이 밝힐 까닭도 없는 듯하다. 다만, 당시 서민대중들은, 그런 유사한 類의 gossip들을 빌미 삼아, 아주 신바람 난 듯,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서, 열에 들떠 선동되었고, 그 결과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그리고서는 그저 그뿐이다. 애써 먼 과거의 역사를 회상할 것도 없이, 실로 그런 것이 정치판이며, 권력다툼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다소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생존을 저당잡힌 채 蒙昧한 서민대중은, 그러한 권력놀음에 놀아나야만 한다. 혹시라도 다소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희망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정권이 바뀌어도, 서민대중의 고달픔은 별반 나아지지 않는다. 여하튼, 이렇게 따지자면 한이 없을 테니, 이제 ‘체 게바라’와 ‘빠삐용’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1967)’는,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자,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에서, 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년월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6월 14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당시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게바라’의 부모가 혼전 임신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결혼 이후의 정상적인 임신을 알리기 위하여, 1개월 늦게 출생등록을 한 것이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Y 죠사’는, 실제 社會主義者는 아니었으나, 共産主義的 사고를 갖고 있었다.
또한 1824년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등 라틴 아메리카 해방군과 ‘아야쿠쵸’에서 싸운, 페루 부통령 ‘호세 드 라셀나’의 후예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이기도 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살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체 게바라’의 부모님은, 아들의 건강을 우선시해서,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럭비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할 때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돌아오곤 했다. ‘게바라’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17세의 ‘게바라’는, 194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아다니는 방랑여행을 경험하였다. 이 때 남미 각 나라들은, 우익 쿠데타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경험했지만, 빈부의 격차와 노동착취가 매우 심했으며, 부유층은 최상의 삶을 누리는 반면, 서민층은 극도로 빈곤한 삶을 살아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게바라’는,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의 첫 의식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1952년에는,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유치와 산업 민영화에 반대하였다.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남미 방랑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체 게바라’의 生來的 혁명가 기질을 예견할 수 있다.
그의 삶은, 철저한 ‘집시로서 방랑자’였으며, ‘보헤미안으로서 여행자’였다. 그러한 그의 기질이, 혁명가로서의 삶을 유발하였을 것이다. 이는, 비단 ‘게바라’만의 특수한 자질인 것은 아니다. 역사에 남겨진 대부분의 偉人들이 방랑자 혹은 여행자의 기질을 지녔으며, 그러한 기질을 좇아 고독하게 살아냄은 쉬이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정착하여, ‘지금 이대로’ 식의 안정을 도모하는 기질을 지닌 者라면, 애당초 개벽적 혁명의 변화를 도모할 리 없음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저 ‘고인 물’처럼 시나브로 腐敗해가는 愚民大衆을 일깨우는 역할을, 역사 속 방랑자와 여행자들이 하였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게바라’는, ‘후안 페론’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당초 베네수엘라 ‘구라나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그스만’ 시대 ‘포프리스모(사회주의 정부)’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한다.
22세의 ‘게바라’는, 1951년,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0년 10월의 선거로 성립된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기업(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착취에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고, 과테말라의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착취만 당하였던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과테말라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루벤스 정권’이 ‘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PBSUCCESS 전략),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정권은 붕괴된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된다.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아’와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서 멕시코로 망명한다.

1955년 7월, 멕시코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쿠바 ‘후르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카스트로’에 공감하게 된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反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내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실로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지쳤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반군의 상륙 계획을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당시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혁명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 재판 당시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체 게바라’ 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 한번 혁명에 도전하여, 親美 성향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결국 붕괴시킨다.
-하략

목차소개

▣ 목차





序說: ‘빠삐용의 開闢’과 ‘체 게바라의 革命’
제1장. ‘홍수전’의 태평천국
1. 태평천국(1851~1864)
2. ‘예수’의 동생이 되다
3. 가난한 민중들에게 포교하다
4. 정치혁명을 위한 군사조직을 결성하다
5.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다
6. 태평천국이 급속히 팽창한 이유
7. 태평천국은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혼합된 개벽이었다
8. 태평천국 내부의 잦은 권력투쟁
9. ‘권세양언’을 읽고서 지난 꿈을 연상하다
10. ‘권세양언’이라는 성서 번역서
11. ‘배상제회’라는 종교결사를 결성하다
12. 태평천국 군대를 결성하다
13. ‘풍운산’을 만나다
14. 천하가 태평했던 원시 공산주의 사회
15. 태평천국 건국을 선포하다
16. 토지를 균등 분배하다
17. 사상을 통제하다
18. 내란이 발생하다
19. 종교적 신앙을 더욱 강제하다
20. 세계 정세를 이해하지 못하다
21. 기이한 이상주의 실험
22. ‘고지마 신지’의 평가
23. ‘테오도르 햄버그’의 傳記
24. ‘홍수전’의 중국식 기독교
25. 태평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제2장. ‘손문’의 삼민주의
1. 종이호랑이 중국
2. 제1차 아편전쟁(1840)
3. 난징조약(1842)
4. 제2차 아편전쟁(1856)
5. 톈진조약(1858)
6. ‘아편전쟁’의 국내정치적 배경
7. ‘아편전쟁’의 국제정치적 배경
8. 동서양 기술문명의 현격한 차이
9. ‘백련교’의 난(1796~1804)
10. ‘백련교 난’의 발생 배경
11. ‘백련교’의 정체성
12. 도피하고 싶은 현실
13. ‘임칙서’와 ‘찰스 엘리어트’
14. ‘기선’과 ‘조지 엘리어트’
15. 중국인들의 분노
16. 청일전쟁(1894~1895)
17. ‘청일전쟁’과 조선왕조
18.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다
19. 전쟁이 시작되다
20. 시모노세키조약(1895)
21. 국제정치의 Great Game
22. ‘위안스카이’와 ‘이토 히로부미’
23. 전주 강화조약
24. 친일정권이 수립되다
25. 강화회담을 요구하는 청나라
26. ‘청일전쟁’은 ‘조일전쟁’이기도 하다
27. 일본에 대한 3국의 간섭
28. ‘청일전쟁’의 목적
29.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
30. ‘청일전쟁’의 피해자 조선왕조
31. 중일전쟁(1931~1937)
32. ‘국공합작’과 ‘항일 민족통일전선’
33.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
34. 두 세계의 ‘사이[間]’에서 태어나다
35. ‘흥중회’를 결성하다
37. ‘중국 국민당’의 전신 ‘흥중회’
38. ‘런던 조난기’를 저술하다
39. ‘삼민주의’를 구체화하다
40. 민족, 민권, 민생
41. ‘삼민주의’의 구체적 내용
42. ‘신해혁명’과 ‘5․4운동’
43.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44. 신해혁명(1911)
45. 중국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다
46. ‘난징’에서 ‘중화민국’이 건국되다
47. ‘위안스카이’의 ‘베이징 정부’가 수립되다
48. ‘신해혁명’의 도화선
49. ‘손문’을 임시총통으로 선출하다
50. 2천여 년의 절대군주제가 해체되다
51. ‘신해혁명’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혁명의 과정이다
52. 수구파, 입헌파, 혁명파
53. 근대 중국의 一帶一路
54. 근대 중국의 中國夢
55. ‘신해혁명’ 당시 ‘쑨원’은 미국에 있었다
56. ‘신해혁명’은 鐵道國營化에 반발한 나비효과였다
57. ‘쑨원’은 얼떨결에 ‘중화민국 대총통’이 되었다
58. 청나라 멸망을 확정 짓다
59. ‘위안스카이 정권’ 붕괴를 위한 ‘신해혁명’이 시작되다
60. 황제가 되려고 하는 ‘위안스카이’
61. 베르사이유 조약(1919)
62. 새로운 국제질서의 태동
63. 신흥 패권국 ‘미국’의 등장
64. ‘우드로 윌슨’의 순진한 착각
65. 弱肉强食이라는 국제정치의 현실
66. ‘베르사이유 조약’의 내용
67. 理想에 불과한 ‘윌슨’의 理想主義
68. 5·4운동(1919)
69. ‘중국 공산당’의 등장
70. ‘돤치루이 정권’의 실패한 외교
71. ‘북양삼걸 돤치루이’
72. ‘정도거사 돤치루이’
73. ‘역사의 희생양’ ‘차오루린’과 ‘이완용’
74. ‘5·4운동’은 너무 확대된 ‘이미지 조작’이다
75. ‘손문’과 ‘이승만’이라는 ‘이미지 조작’

제3장. ‘모택동’의 공산주의
1. ‘마오쩌둥’과 ‘중화인민공화국’
2.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마오 쩌둥’
3.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 취직하다
4. 러시아 혁명(1917)
5. ‘차르’라는 ‘이미지’의 실체가 드러나다
6. 방탕한 者 ‘라스푸틴’
7. ‘라스푸틴’과 ‘최태민 이미지’
8. ‘라스푸틴’의 예언
9. ‘2월 혁명’과 ‘케렌스키 임시정부’
10. ‘레닌’과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
11. ‘白軍과 赤軍’의 內戰은 사실상 國際戰이었다
12.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13. 새로운 지배 계급의 등장
14.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진압되다
15. ‘공산주의자’가 된 ‘마오쩌둥’
16. 공산혁명의 動力으로서 農民을 주목하다
17. 제1차 국공합작(1924~1927)
18. 제2차 국공합작(1937~1945)
19. ‘공산당 군대’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이 시작되다
20. ‘28인의 볼셰비키 그룹’
21. 대장정(1934~1935)
22. 다시 ‘게릴라 전술’을 선택하다
23. ‘대장정’이라는 신화의 탄생
24. ‘대장정’의 배경과 원인
25. ‘쑨원’의 사망과 갈등의 시작
26. ‘장제스’ 세력의 浮上
27. ‘제1차 국공합작’이 파탄나다
28. 공산당 토벌작전에서 번번이 실패하다
29. 공산당 내부의 갈등
30. ‘장제스’의 토치카 전술
31. ‘대장정’이 시작되다
32. 계획도 목적지도 없는 탈출
33. 홍군의 탈출 사실을 알아차리다
34. 병력이 10만에서 3만으로 줄다
35. ‘쭌이 회의’가 개최되다
36.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비판 대상으로 삼다
37.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하다
38. 공산당이 도덕적이었다는 것은 역사 조작이다
39. 홍군이 약탈을 자행하다
40. 공산당에게 적대적인 티베트
41. 다시 공산당 내부 분열이 일어나다
42. 약탈로 인해 고갈되자 다시 ‘대장정’을 나서다
43. ‘대장정’이 끝나다
44. 남북 2개의 ‘당중앙’이 결성되다
45. 참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공산당
46. 공산당을 기사회생시킨 ‘시안 사건’
47. 정풍운동(1942)
48. ‘주관주의, 종파주의, 형식주의’를 배격하라
49. ‘주관주의’ 배격
50. ‘종파주의’ 배격
51. ‘형식주의’ 배격
52. ‘정풍’은 ‘자아비판’과 ‘숙청’에 활용되었다
53. ‘국민당’과 ‘공산당’의 內戰
54. ‘김일성’과 ‘박헌영’과 ‘스탈린’
55. ‘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는 ‘마오쩌둥’
56. ‘모택동’의 명령으로 참새의 씨가 마르다
57. ‘대약진 운동’(1958)
58. ‘대약진 운동’의 대실패
59. ‘문화 대혁명’의 불씨가 되다
60. 핵실험 성공(1964)
61. 문화대혁명(1966~1976)
62. ‘홍위병’의 등장
63. ‘천안문 광장’ 100만인 집회
64. ‘등소평’의 복귀
65. 문화대혁명은 ‘모택동파’와 ‘등소평파’의 권력투쟁이다
66. 10年 動亂
67. 모든 혁명적 운동은 권력투쟁으로 귀결된다




회원리뷰 (0)

현재 회원리뷰가 없습니다.

첫 번째 리뷰를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