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제국의 역사, 대한제국실록 1권,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조선왕조실록(탁양현 엮음) | e퍼플 | 2018년 09월 07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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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잊혀진 帝國의 歷史, 大韓帝國



大韓帝國은 이미 잊혀진 帝國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제국을 일군 것은, 檀君과 高句麗 외에는 없는 듯하다. 비록 대한제국은 虛名에 불과하며,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든 견뎌보려는 苦肉之計였다. 그런 탓에 현대인들은 자의반타의반으로 그 역사를 忘却코자 한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짐짓 모르는 체 뭉개버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고종 34년 10월 13일(1897)의 기록이다.

“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檀君과 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高麗 때에 이르러서, 馬韓, 辰韓, 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王業을 세웠으니, 禮樂과 법도는 唐堯와 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白嶽山의 남쪽에서, 天地에 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光武 元年으로 삼으며, 宗廟와 社稷의 神位版을, 太社와 太稷으로 고쳐 썼다.
王后 閔氏를 皇后로 책봉하고, 王太子를 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제 조선왕조는, 모름지기 대한제국이 되었다. 비록 대한제국이 되었을망정, 국가의 상황은 당최 겨를이 없었다. 더욱이 乙未事變(1895. 10. 8.)에 閔妃가 日本浪人 패거리에 의해 살해당한다. 민비의 행태나 조선왕조의 상황에 의한 결과이겠지만, 이는 실로 지울 수 없는 민족의 羞恥스런 汚辱이다.
현대에 이르러 민비를, 조선의 國母로서 더없이 德性있는 明成皇后로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 제 역사를 되도록 보기 좋도록 潤色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으나, 그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민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各論이 紛紛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종 34년 11월 22일의 기록이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明成’이라 하였고, 陵號는 ‘洪陵’이라고 하였으며, 殿號는 ‘景孝’라고 하였다.
…황후는 여러 차례 책봉하는 글을 받았다. 계유년에는 朝臣들이 尊號를 올려 ‘孝慈’라고 하였고, 무자(1888), 경인(1890), 임진년(1892)에는 황태자가 尊號를 더 올려, ‘元聖正化合天’이라고 하였다.
정유년에는 대소 신하와 백성들이, 나라가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한 것 때문에, 明나라 이후에 천하의 禮樂이, 다 우리나라에 있으니, 마땅히 황제의 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민비가 살해당한 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이 되면서, 민비 또한 명성황후로 추존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明成이라는 諡號의 의미는, 실상 그 기사의 전체를 감안한다면, 과거 明나라에 대한 事大主義가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애당초 제국으로서, 황제의 국가라는 의지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대의 대한민국 역시 그러하다. 남북통일로써 만주라는 故土를 收復하여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패권국으로서 浮上코자 한다면, 그저 자기편의 政權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執權을 위하여, 附和雷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고종실록을 살피면, 무능하고 파렴치할수록 아주 그럴듯한 美辭麗句로써 온갖 논리를 늘어놓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로써는, 결코 국가공동체를 살려낼 수 없음을, 우리는 역사로써 검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러한 역사는 되풀이되는 듯하다. 그러니 비록 별다른 권력을 지니지 못했을망정, 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각 個人이 명료히 깨어서,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부단한 苦惱를 마다하지 않아야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공짜는 결코 없는 법이니까.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大韓帝國은 가장 비극적인 국가공동체 중 하나였던 탓에, 텅 빈 허공에 대한제국의 성립을 외침은, 한갓 喜劇的 퍼포먼스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러한 비극이야말로 진실을 드러냄을 留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오히려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역사일수록, 微視史의 관점으로써 더욱 세밀히 살펴야 하는 까닭이다.
누구라도 자랑스레 떠들어댈 만한 역사라면, 굳이 어느 누가 針小棒大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역사적 歪曲의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물론 상대편의 입장은, 예컨대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 왜곡처럼, 그 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남사스런 역사라면, 어떻게든 없는 양 하는 것이 人之常情이다. 대한제국의 역사가 실로 그러하다.
기묘한 노릇이지만, 필자 개인의 삶을 회고할 때도 그러하다. 필자도 적잖은 세월을 사는 동안, 이런저런 체험 속에서 삶의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삶이란 것이 마냥 좋고 행복한 일만 지속될 리 만무하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자살해버리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만큼, 치욕스럽고 고통스런 체험도 하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런 일마저도 당최 목숨을 스스로 끊을만한 일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아픈 체험의 기억이 망각될 리 없다. 그래서 필자의 마음은, 저절로 자기합리화로써 생존에 유익한 기억만을 보다 부각시키며, 害가 되는 기억은 저절로/스스로 무의식 저편으로 潛在시킨다. 이는 참으로 自然스런 현상이다.
예컨대 필자로서는, 지난날 철학과 대학원에서 집단에 밀려 겪었던 일들이나,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온갖 갑질을 당해야만 하던 일들이 想起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몸서리를 칠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侮辱 또한 필자의 삶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그러한 체험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러할 까닭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체험 속의 人間群像들과 再會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필자가 지속적으로 출판을 하는 탓에, 그에 대해 인터넷 따위를 통해, 지극히 천박한 대응을 해오는 짓거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내해야만 한다. 여하튼, 여전히 필자는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니 그런 일들에 대해 참으로 잘 제어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선지 대한제국의 역사를 살피며,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필자의 삶이 오버랩된다. 대한제국의 시절을 극복하고서,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속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르러, 세계 패권국의 무역전쟁과 북한 문제 등으로 인해, 금세 역사의 나락으로 떨어질는지 모른다. 필자의 삶 역시, 그런 치욕스런 체험 이후에도, 여전히 생존을 위해, 이런저런 직업군을 전전하며, 최하층의 삶이나마 감내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역사처럼, 어떤 사실 자체를 공부하여 그 진실을 알게 될 때, 다소나마 삶의 의미를 찾는다. 가뜩이나 빈곤한 삶인데, 의식마저 비루하다면, 그 삶은 참으로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원하는 만큼의 삶을 일구지는 못했지만, 이만큼이라도 공부하며 살아낼 수 있음은, 天地, 父母, 同胞, 法律 등 四恩의 은혜임이 자명하다.
특히 하늘땅과 부모의 은혜는, 더 이상 말할 나위 없다. 그러한 은혜가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 필자가 지금껏 생존했으며, 이 글들을 지어낼 수 있었겠는가. 우리 민족에게 아픈 역사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온갖 표면의 화려함이 ‘나’를 살게 하는 양 착각하지만, 정작 내면의 소박함이 ‘나’를 살게 하는 탓이다.
-하략-

저자소개

본래 조선왕조의 정치적 지향은 洪範九疇의 실현이었다. 그러한 ‘洪範’의 정치철학적인 구체적 지향은 ‘天命의 실현’이다. ‘천명’은 ‘백성의 마음[民心]’이 반영된 ‘하늘의 명령’이다. 그러한 ‘천명’을 현실세계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五行’의 원리를 체득하여 ‘五事’로써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오행’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五紀’를 파악하고 ‘庶徵’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하며, ‘稽疑’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천지자연의 ‘오행’이, 인간존재에게서 ‘오사’로써 실천될 수 있다. ‘오사’를 실천하는 인간존재 중에서, ‘천명’을 부여받은 자는 ‘皇極’으로서 군주가 된다. ‘황극’으로서 군주는 ‘三德’을 실행하고 ‘八政’을 펼쳐서, 백성들에게 ‘五福’을 베풀어 주고 백성들의 ‘六極’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것이 ‘홍범’이 지향하는 ‘善政’의 상태다.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은 ‘洪範’을 國是로 삼고서 ‘性理學的 道德政治’의 실현을 목적한다. ‘홍범의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사회는, 후대에 ‘공자’가 논변하는 ‘大同과 小康’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大同’ 개념은 ‘홍범’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小康’ 개념은 ‘詩經’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공자’가 처음으로 ‘대동과 소강’에 대해 정치철학적 논변을 한다.
‘대동’은 말할 나위 없이 정치적으로 완성된 상태로서, ‘이데아’가 실현된 現場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탓에, ‘홍범’의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실현되지 못 한 理想鄕이다. 그리고 ‘天命에 의한 天罰’로써 응징되어야 할 상태로부터 조금 나아진 상태가 ‘小康’이다. 그러므로 ‘소강’에서 停滯되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조금 편안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대동’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孔子’ 이후 ‘대동’과 ‘소강’은 정치철학적인 개념으로서 정립된다. 이후 ‘儒家’에서는 흔히 ‘儒學의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政治狀態가 ‘대동’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실제로 ‘대동’을 지향한 상황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으며, 대부분 ‘소강’의 상태를 지향했을 따름이다. ‘조선왕조’ 역시 그러하다.
‘공자’가 정립한 ‘小康의 理論’은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은, 고도의 ‘善政’이 이루어지는 상태다. 그런 탓에, ‘조선왕조’에서 논의되는 ‘선정’은 대체로 ‘소강’의 상태를 지칭한다. 다만, ‘공자’는 ‘小康의 家天下’에 만족하지 않고, ‘大同의 公天下’을 꿈꾸었다. 이는 ‘공자의 정치철학’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의미와 가치를 갖는 충분한 까닭이다.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조선왕조’ 후기로부터 말기에 이르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기 십상이다. 여느 왕조들처럼 국가공동체가 멸망에 이르는 ‘末期的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商’나라의 ‘말기적 상황’이 죄다 ‘주왕’의 失政 때문인 것으로 인식하지만, 한 王朝나 國家가 멸망할 때에는 최후의 最高權力者 혼자만의 과실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대목은 마치 ‘고려왕조’ 말기에 토지제도가 문란해져서 富益富貧益貧이 극심해지고,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지는 ‘말기적 상황’과 별다르지 않다. 역사 안에서, 대부분의 왕조 말기에는 內患이든 外患이든 ‘말기적 상황’이 연출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조가 멸망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말기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상’나라 ‘주왕’과 ‘주’나라 ‘무왕’의 왕조 교체는,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왕조 교체의 모델로서 지속적으로 膾炙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출되는 정치는 참으로 볼품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상황이 그러하다는 것이며, 현실정치 이외의 모든 측면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문화나 예술’ 등은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이 많다. ‘도덕이나 법률’의 측면에서도 본받을 것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부문은 단편적일뿐, ‘조선왕조’ 자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치라는 것은 ‘조선왕조’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 탓에, 부득이하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엄밀한 비판이 요구되는 것이다.
‘洪範의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天命의 실현’이다. 그런데 ‘홍범’의 시대로부터, ‘천명’이 ‘하늘[天]’로부터 離隔되는 순간 ‘천명’은 변질되기 시작한다. 현실세계의 어디에도 절대 순수의 ‘이데아’는 실재하지 않음과 같다. ‘천명’은 천지자연 자체에 본디 상태로 존재할 때만 ‘천명’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의 ‘천명’은 인간존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천명’은 인간존재에게 인식되어야만 하는데, 인간존재가 ‘천명’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애당초 ‘천명’은 본디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현실세계에 드러나는 어떠한 ‘천명’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존재의 이해와 해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명’에 내재된 ‘不得已’다.
‘서경 홍범’에는 ‘大同’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다. ‘洪範九疇의 農用八政’ 중 일곱 번째 조목 ‘稽疑’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대동’ 개념이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明文化된 최초의 사례다. 임금이 따르고, ‘거북점’이 따르고, ‘시초점’이 따르고, 높은 벼슬아치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면, 이것을 ‘대동’이라고 하니, 몸이 평안하고 굳세며, 자손을 두면, 길할 것이다.
이러한 ‘대동’은 말 그대로 ‘위대한 同一性’을 의미한다. 君主, 占卜, 臣下, 庶民 등이 모두 ‘따르는[從]’ 상태, 그것이 곧 ‘대동’이다. 그렇게 세상의 온 존재가 실제적인 滿場一致로써 합의될 수 있는 상태는, ‘천명’을 좇아 ‘천명’을 실현하는 경우 이외에는 없다. ‘홍범’에서는 이렇게 만장일치를 이루는 상태에 대한 묘사 이외에는 ‘대동’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홍범의 대동’ 개념이 등장한 이후, ‘천명이 실현되는 대동’의 상태에 대하여 최초로 학술적 論辯을 시도한 것이 ‘공자’다. ‘대동과 소강’에 대한 아주 잘 알려진 談論이 있다. ‘禮記 禮運’에서는, ‘孔子’와 그의 제자 ‘言偃(子游)’이 ‘대동과 소강’에 대해 問答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大道’가 실행될 때와 ‘夏商周 3대의 賢人’들이 정치를 했을 때에 대해, 내가 그 시절의 수준에 미칠 수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 그 정신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공자’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대도’는 곧 ‘천명’이다. 따라서 ‘하상주 3대의 현인’들이 ‘대도’를 실행했다는 것은 곧 ‘천명’을 실행했다는 의미다.
‘대도’가 실행되던 때는, 세상이 ‘公天下’였다고 比定될 수 있다. ‘공천하’에서는, 어질고 재능 있는 이들을 선발하고, 신용을 중시하며 화목함을 닦고, 사람마다 자기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아니고, 자기 자식만 자식이 아니다. 노인들로 하여금 여생을 완성하게 하고, 장년은 쓰임이 있고, 어린이들은 교육을 받는다. 늙어 부인이 없거나, 늙어 남편이 없는 아낙, 부모 없는 아이, 자식이 없는 노인, 장애인들이 모두 부양받는다.
사내에게는 그에 적합한 직분이 있고, 아낙은 의지할 곳이 있다. 재물이 폐기되는 것을 싫어하여, 결코 과분하게 소유하지 않는다. 힘은 자기 몸에서 나오지 않음을 꺼려 직접 쓰지만, 자신을 위해서만 쓰지는 않는다. 그러한 정서 때문에, 권모술수가 막혀 흥기하지 못 하고, 도적이나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바깥문도 잠그지 않는다. ‘공자’는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를 ‘대동’이라고 규정한다.
‘공자(기원전551~기원전479)’보다 50여 년 후에 태어난 ‘플라톤(기원전427년~기원전347)’ 역시 ‘理想國家’를 제시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요구되는 까닭은, 현실의 국가가 ‘말기적 상황’에 이르러서, 必要不可缺한 것들 이상의 것들을 갖추고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부풀어 오른 염증 상태의 나라(plegmainousa polis)’ 혹은 ‘돼지들의 나라(hyōn polis)’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염증으로 부풀어 오른 돼지들의 나라’를 법률과 제도로써 정화한 최선의 국가가 완벽하게 좋은 ‘이상국가’다.
‘이상국가’는 ‘1人 1業의 원리’에 충실하고, 그래서 ‘성향에 따라 수립된 나라(kataphysin oikistheisa)’이다. 그렇기 때문에, ‘支配 계층’과 ‘被支配 계층’과 ‘守護 계층’이 각기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국가다. ‘이상국가’는 무엇보다도 正義를 최대한 실현하는 나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이나 어느 한 집단이 특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을 누리는 국가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공자의 공천하’와 유사하게, 재산의 공동소유, 사유재산 금지, 각 구성원의 공동생활 및 공동참여 등을 예시하고 있다. ‘플라톤’은 실제적으로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왕이 되거나, 아니면 현재의 君王 내지 最高權力者로 불리는 자들이 철학자로 되는 것을 주장한다. 즉, ‘정치권력(dynamis politikē)’과 철학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다.
‘홍범의 정치철학’이 ‘조선왕조’에 이르도록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활용되었듯이, ‘플라톤’ 역시 ‘정치’와 ‘철학’이 결합된 ‘정치철학’으로써 ‘이상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종의 ‘플라톤 식 大同’이라고 할 것이다. 동양문명에서는 ‘공자’ 이후 다양한 ‘이상사회’가 제시되었고, 서양문명에서는 ‘플라톤’ 이후 다양한 ‘이상국가’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도록 역사 안에서 그런 ‘이상사회’나 ‘이상국가’가 실제적으로 실현된 例는 없다. 실현되지 않으므로 理想的일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최상의 정치가 실현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대동’과 아울러 논의되는 정치의 수준을 ‘小康’이라고 한다. ‘書經 洪範’에 등장하는 ‘대동’ 개념과 마찬가지로, ‘詩經 大雅’에 등장하는 ‘소강’ 개념 역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최초로 명문화된 사례다. ‘시경’에서 이르는 ‘소강’은, 백성들이 여전히 수고롭다가 겨우 조금 편안해진 상태다.
겨우 조금 나아진 상태이므로, 나라의 중앙에서부터 더욱 은혜를 베풀어서, 온 나라가 평안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상태다. ‘대동’의 상태는 아니지만, 그나마 ‘백성의 삶[民生]’을 유지하며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수준의 정치적 상태가 ‘小康’이다. 최악의 상태에서 조금 나아진 상태인 것이다. ‘大同’이라는 것은, ‘孔子’ 이후 ‘儒學’에서 지향하는 일종의 ‘정치적 理想鄕’이다. ‘이상향’이기 때문인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대동’의 상태가 실제로 실현된 例는 없다.
그런데 그 실제적인 이유는, ‘禮記 禮運’에 기술된 ‘공자’의 분석처럼, 현실세계 대부분의 국가공동체는 ‘대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소강’의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예기 예운’에서, ‘소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발언한다. 오늘날은 ‘公天下의 大道’가 사라져서, 세상이 ‘家天下’가 되어버렸다.
사람마다 자기 어버이만을 어버이라 여기고, 자기 자녀만을 자녀로서 챙긴다. 재물과 권력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쓴다. 천자와 제후들은 ‘禪讓’ 대신 ‘世襲’을 예의로 여긴다. 성곽을 쌓고 ‘垓字’를 파서 자기방어만을 공고히 한다. ‘공자’는 이러한 상태가 ‘家天下의 小康’이라면서 비판한다. 그런데 ‘소강’은 결코 쉬이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상태는 아니다.
‘소강’을 실현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상태가 실행되어야 한다. ‘五倫’으로 기강을 삼음으로써 군신관계를 정립하고, 부자관계를 돈독히 하며,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부 사이는 조화로워야 한다. 정치제도를 정립하고, 밭의 경계를 정해야 한다. 현명하고 용맹한 자를 우대하고, 功績을 자기 것으로 여겨야 한다.
-하략-

목차소개

▣ 목차





1. 고종 34년 10월 12일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산호만세 등을 창하다

2. 고종 34년 10월 13일
진하를 받고 조서를 반포하여, 대사령을 반포하다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대사령을 내려, 중죄인들의 죄를 가볍게 해주다
축하하기 위해 뵐 것을 청한, 각국의 관리들을 소견하다

3. 고종 34년 10월 14일
태극전에 나아가, 왕태자비 민씨를 황태자비로 책봉하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 관리들에게 시상하다

4. 고종 34년 10월 15일
인산의 각 항목의 날짜를 다시 정하다

5. 고종 34년 10월 16일
태묘에 삭제를 지낼 때, 헌종실과 철종실에 대한 칭호를 정하다
죄의 등급을 낮추어 주고, 석방하도록 하다

6. 고종 34년 10월 19일
공사 비용 증액에 대해, 예산 외에 지출하도록 하다

7. 고종 34년 10월 20일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장례원의 당상을 소견하다
그릇과 의장은, 다 천자의 의식 절차대로 쓸 것을 명하다
궁인 엄씨가 황자를 출산하다
유인석이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다

8. 고종 34년 10월 21일
원세순이, 역서를 반포할 것에 관하여 상소를 올리다

9. 고종 34년 10월 27일
노응규가 처벌받을 것을 청하다

10. 고종 34년 10월 29일
대신을 보내어, 천지와 종묘 사직에 치제할 것을 명하다

11. 고종 34년 10월 30일
시호를 책봉할 때, 태극전에서 친림할 것을 명하다

12. 고종 34년 11월 1일
여러 경비를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도록 하다

13. 고종 34년 11월 6일
빈전에 시호를 올린 것에 대하여, 조서를 반포하다

14. 고종 34년 11월 7일
산릉에 금정을 열 때 나아갔던, 대신 이하를 소견하다
박정양이 죄를 다스려 줄 것을 청하다

15. 고종 34년 11월 8일
조병식이, 박정양의 글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다

16. 고종 34년 11월 11일
황후의 복제에 대하여 문의하도록 명하다

17. 고종 34년 11월 13일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를 초빙하여, 탁지부 고문관에 고용하다
민영준이, 현재의 급선무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18. 고종 34년 11월 16일
여러 경비를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도록 하다

19. 고종 34년 11월 17일
황후의 인봉 때 의식을, 장례원으로 하여금 작성하도록 하다
청목재에 나아가, 총호사 이하를 소견하다

20. 고종 34년 11월 19일
황태자가, 여사군들에게 6만 냥을 나누어줄 것을 명하다

21. 고종 34년 11월 22일
대행 황후 지문의 어제 행록을 내리다
신련이 떠나갈 때, 황태자가 위내에서 배봉할 것을 명하다
일본국 특파공사 ‘가토 마스오’가 신임장을 봉정하다

22. 고종 34년 11월 29일
주석면이, 현 시기 급선무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23. 고종 34년 12월 2일
황제에 즉위한 날을 계천기원절로 칭하다

24. 고종 34년 12월 3일
남정철이 내부에 보고하다

25. 고종 34년 12월 18일
러시아의 명명일에 직접 축전을 보내다

26. 고종 34년 12월 20일
김석구가, 역적들의 죄를 진술하는 상소를 올리다
성대영이, 현 시국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정한용이, 징계해 줄 것을 주청하다
홍병후가, 현재의 형세를 바로잡는 방도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27. 고종 34년 12월 21일
지석영이, 음력을 사용할 것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이문화 등이, 역적을 처벌할 것을 주청하다
최훈주가, 현실 문제를 타개할 계책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여형섭이, 함경북도 백성들의 실정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28. 고종 34년 12월 24일
조병세가, 두 죄인의 처벌에 대해 차자를 올리다

29. 고종 34년 12월 27일
산천단을 설치하도록 하다

30. 고종 34년 12월 28일
태의원에서 입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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