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 의병장 면암 최익현의 유배 여행기, 면암집

최익현 지음(탁양현 옮김) | e퍼플 | 2018년 08월 3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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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流配旅行者 勉菴 崔益鉉



면암 최익현의 시대는 중세국가인 조선왕조가 근대국가인 서구세력이나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支離滅裂해가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君臣의 동맹을 맺고서 의지하는 淸나라 역시 그러했다. 그러한 시대에 면암 최익현의 삶은, 不得已 나라의 붕괴를 감내해야 하는 士大夫로서, 온갖 旣得權을 박탈당한 流配의 형태로서 점철된다.
면암은 ‘梁大集 在成의 書室에 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記述한다.

“西洋은 하나의 禽獸이다. 그들은 父子ㆍ君臣ㆍ夫婦ㆍ長幼의 질서와, 禮樂ㆍ文物ㆍ節烈ㆍ衣冠의 융성함을, 등에 난 가시나 눈에 생긴 못처럼 여길 뿐만 아니다.
기필코 더럽히고 욕보일 것을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가 쇠약해진 것을 편승하고, 우리가 욕심대로 방종하는 것을 엿보더니, 방자하게 우리에게 호령하기를, 어찌 너희의 黻冕(슬갑과 면류관 즉 제복)과 珪璋(옥으로 만든 예물)을 없애 버리고, 너희의 남녀와 상하의 구분을 없애 버리고, 우리의 간편함을 따르지 않느냐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스스로 예의에 구속함을 싫어하고, 저들의 개방된 행동을 좋아하여,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끝내는 노골적으로 그들과 합류한다. 그리하여 돼지로 길러 去勢하여도 성낼 줄 모르고, 소로 길러 코를 뚫어도 심상하게 여기다가, 급기야 國母를 시해하고 머리를 깎는 변이 천지를 뒤흔들어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지 않는다.
이리하여 天性이 바뀌고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온 천하가 금수로 변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면암의 서양 인식은 當代 엘리트 지식인의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말기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해를 傍證한다.
또 면암은, ‘魯城 闕里祠에서 講會할 때 誓告한 條約’에서는 이렇게 기술한다.

“中華와 오랑캐의 큰 경계와 사람과 짐승의 큰 한계는, 진실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므로 옮기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중화의 중화가 된 까닭은 예의와 문물이 있기 때문이다.
문물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衣冠만한 것이 없는데, 옷은 반드시 옷깃과 소매를 중히 여기고, 冠은 반드시 비녀와 상투가 있으니, 혹시라도 형체와 의복을 毁傷하여, 머리를 깎거나 검은 옷을 입는다면, 비록 짐승이 되는 것을 숨기고 싶어도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일본놈들이 오니, 여러 역적들이 저들의 일등공신이 되고 싶어, 멋대로 호령하여 먼저 우리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다시 머리를 깎으려 하였다.
가령 저들의 명령하는 것이, 간혹 옛 성인의 制作을 모방하여 의리에 그다지 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금을 협박하여 멋대로 호령하는 처지에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따르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중화가 되고 오랑캐가 되며, 사람이 되고, 짐승이 되는 판가름이 여기에 있음에랴.”

孔子로부터 이어지는 수백 년의 禮治 전통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勤幹이었다. 면암은, 그러한 것을 포기함은, 국가공동체를 팔아넘기는 賣國奴와 같은 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衛正斥邪의 이념을 고수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올바름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고, 사악함은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외부세력이 막강하더라도, 그들의 문명 수준은 한갓 禽獸나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高宗은 그저 왕실만이라도 다소의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만을 바랐고, 開化派들은 개혁을 선도할 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면암은, 결국 乙巳條約이 체결되고서 조선왕조가 붕괴하자, ‘魯城 闕里祠에서 先聖에게 고한 글’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崇禎(明毅宗의 연호) 287년, 을사(1905, 광무 9) 12월 초하루, 기해 26일 갑자에 후학 崔益鉉은 통곡하며 先聖 孔夫子께 고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인민도 오래되었고, 순박한 풍속도 오래되었으며, 三皇ㆍ五帝ㆍ三王 같은 표준을 세운 성인도 가신지 오래되었으니, 세대의 치란과 道의 흥망이 氣數의 성쇠로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문에 周의 말엽에 하늘은 집대성한 성인을 내어 春秋의 권한을 빌려, 亂臣賊子를 죄주고 王道를 바르게 했으니, 이것이 곧 우리 夫子의 道가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주어, 堯舜보다 더 어질게 된 것입니다.
그후 다시 覇道에서 떨어져 오랑캐가 되고, 오랑캐에서 다시 떨어져 짐승이 되었으며, 楊墨(楊朱와 墨翟)은 변하여 老佛(道敎와 佛敎)이 되고, 노불이 다시 변하여 陸王(陸象山과 王陽明)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하를 변역한 것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亞聖ㆍ大賢들이 전후에 번갈아 나서, 道를 호위하고 邪說을 막는 책임을 지고, 尊周攘夷의 공을 세운 때문에, 道學이 다 떨어지지 않고 衣裳도 다 찢어지지 않아 중화의 전통을 보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陽秋(春秋의 별칭)의 한 가닥 맥이 線같이 海東의 한 지방에 오히려 존재해 있었으니, 이는 곧 碩果不食으로 천하의 志士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요사이 서양의 鬼物들이 날뛰어, 利瑪竇 같은 예수[耶蘇]들의 邪說이 점점 물들어 고질이 되었고, 끝내는 동쪽 오랑캐가 몰아 잡아먹어, 인류가 거의 다했습니다.
우리를 비린내 나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쇠사슬을 채워,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臣妾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鬱鬯酒를 맡던 종주국이 위태로워 종묘ㆍ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부자의 말씀을 외고 본받던 선비들이 스스로 금지하여, 선비의 복장이 깨끗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道는 전수할 데가 없게 되었고, 聖靈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는 실상 저희들이 우매하고 용렬하여서, 禍의 기틀이 싹터 움직일 적에 대책을 세워 막지 못하고, 惡의 불꽃이 치열할 때 성토하고 멸망시키지 못하여, 春秋의 법을 끝내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으니, 천지의 죄인인 동시에 부자의 죄인입니다.
경건하게 뵈옵는 마당에, 가슴이 찢어지고 정신이 떨려서, 통곡하고 죽고 싶을 뿐이기에 삼가 고하옵니다.”

上記에서 드러나듯, 면암의 삶은 痛恨으로 점철된다. 그 근본적 원인은 王朝와 文明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勉菴으로서는, 오랑캐에 불과한 일본과 금수에 불과한 서양세력에 의해 박탈되었음이 더욱 견딜 수 없는 羞恥였다.
일본과 서양세력이 등장하기 전에도, 斯文亂賊으로서 楊墨(楊朱와 墨翟), 老佛(道敎와 佛敎), 陸王(陸象山과 王陽明) 등은 존재했다. 그러한 온갖 걸림돌을 죄다 제거하면서 지탱해 온 왕조였다.
그런데 ‘Matteo Ricci(利瑪竇)’의 예수[耶蘇]를 앞세우며 새로이 등장한 서양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은, 기존의 사문난적들과는 그 樣相이 전혀 달랐다. 어차피 철학사상이나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근원은, 인류문명의 始原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므로, 살펴보면 공통점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세력이 지닌 과학기술이나 군사력은, 당시 朝鮮王朝로서는 당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는 이념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견고한 이념을 지녔더라도, 그것을 지탱할 실제적인 物理力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이념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최익현의 시대 이후 이어지는 공산주의 이념에서 검증된다.
人類史에서 共産主義者들이야말로 종교적 신앙심에 버금하는 강력한 이념을 지녔다. 실로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은 조선왕조 衛正斥邪主義者들 못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經濟力이라는 물리력을 상실하면서 죄 몰락해버렸다.
물론 그 결과는 20세기 末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므로, 최익현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다보니 면암의 삶은, 굳이 실제적인 流配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심리적인 유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하략-

저자소개

崔益鉉(1834~1907)은 조선왕조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초명은 奇男, 字는 贊謙, 아호는 勉菴이다. 김기현과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이자 위정척사파의 중심 인물이었고,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抱川郡 嘉范里에서 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初名을 奇男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익현으로 고쳤다. 최익현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華西 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의 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4년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정인홍,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결사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開港五不可의 丙子斥和疏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늑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의 발병(풍증)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1928년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면암 최익현은, 14세 때 경기도 楊根郡 蘗溪에 은퇴한 노론성리학의 거두 李恒老의 문하에서 擊蒙要訣, 大學章句, 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그는 이항로의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되었고, 나중에는 송시열과 송준길-권상하-한원진, 이간-이항로를 잇는 노론의 정통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스승인 화서 이항로로부터 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明經科 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孔孟의 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화서는 최익현에게 勉菴이란 호를 지어 주고, 洛敬閩直이란 글을 주면서 항상 학문을 권면하였다. 이로부터 최익현은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받아 위정척사의 救國扶道의 의리를 구현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쳤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유인석, 김평묵 등을 만나게 된다.
1855년(철종 6년) 2월에 春塘臺에서 열린 講經에서 1등, 바로 생원시나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도, 그 해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철종 재위 중인 1855년(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順康園守奉官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했다. 成均館典籍, 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 吏曺正郞, 新昌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강직과 善政으로 칭송되었다. 地方官과 言官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하다가 눈밖에 나는가 하면,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도 가문 축출에서 벗어나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 등도 등용하자, 그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사헌부장령을 거쳐 공조참의, 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8년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중략-
최익현은 긴 침묵을 깨고 고종 32년(1895) 6월 26일 다시 상소를 올렸다. 62세의 노령이었다. “역적을 토벌하고 의복제도를 복구하기를 주청하는 상소(請討逆復衣制疏)”라는 제목대로 그것은 박영효ㆍ서광범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를 처단하고, 그들이 좁은 소매에 검은 옷으로 변경한 의복제도를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상소였다.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국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같은 해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 단발령에 내려진 것이다. 최익현은 포천에서 단발령에 반대해 궐기하려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때부터 1904년까지 고종은 호조판서ㆍ경기도 관찰사ㆍ의정부 贊政ㆍ궁내부 특진관 등의 벼슬을 내리면서 출사를 권유했지만, 최익현은 모두 사직했다. 그러면서 나라의 실질적인 멸망과 함께 최익현은 마지막 상소와 투쟁에 나섰다.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 11월 3일과 14일 최익현은 마지막 상소인 請討五賊疏를 올렸다. 거기서 그는 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그 체결에 참여한 박제순ㆍ이완용ㆍ이근택ㆍ이지용ㆍ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상소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한계를 절감한 최익현은 투쟁의 방식을 바꿨다. 73세의 최고령 의병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06년 2월 그는 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린 뒤, 호남으로 내려가 자신의 제자이자 전 낙안군수 林秉瓚(1851~1916)과 함께,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4백 명 정도의 최익현 의병은 정읍ㆍ순창ㆍ곡성 등을 돌며 시위했지만 병력과 무기 등 모든 측면에서의 열세로 인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최익현은 1906년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7월 8일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단식으로 저항했고, 결국 11월 17일에 순국했다. 실로 한국 근대사의 격동을 모두 겪은, 73년의 길고도 波瀾 많은 流配의 생애였다.
勉菴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고, 유배되어 단식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그 기록을 읽는 것만으로도 피눈물이 나는 심정을 갖게 한다. 면암의 시대는 물론이며 어느 시대라도, 면암과 같은 삶을 살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한 상황에서 大衆의 절대다수는, 그저 自身을 爲始한 家庭이나 家門쯤의 작은 울타리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낼 따름이기 때문이다. 실상 그러함이야말로 人之常情이며, 그러한 상황은 21세기 ‘지금 여기’에서도 매한가지다.

목차소개

▣ 목차





1. 탐라로 귀양 가게 된 전말
2. 한라산 유람기
3. 문일지십, 문일지이에 관한 설
4. 지장암기
5.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는 데 대한 설
6. 아산영당기
7. 소옥설을 위계온 대인에게 부침
8. 양대집 재성의 서실에 씀
9. 외성당기
10. 고청여 석진에게 써서 보임
11. 구봉정사기
12. 팔도 사민에게 포고함
13. 노성 궐리사에서 강회할 때 서고한 조약
14. 송포당기
15. 일본 정부에 보냄
16. 농와기
17. 창의격문
18. 한벽당 중수기
19. 영사정기
20. 월명정사기
21. 창의격문 재격문
22. 구계정기
23. 노성 궐리사에서 선성에게 고한 글
24. 을사년
25. 병오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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