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나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행하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삽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세상에 주어진 규칙을 잘 지키고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산다고 해서 항상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실망합니다. _ P. 29.
건강이 단지 질병의 부재가 아니듯, 행보고 단지 고통의 부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 요구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과 대면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매일 아등바등하며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합니다. _ P. 47.
인간 행동에 대한 학문 역시 그만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도덕 체계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좋거나 싫거나 이것이 우리가 지침으로 삼고 있는 ‘지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확실한 지도를 만들 수 있을까요?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PP. 84~85.
미국 원주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용기 같은 것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용기는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필멸을 직시하고 살아 있는 한 두려움 없이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_ P. 103.
우리의 삶이 행복한지 슬픈지, 만족스러운지 불만스러운지는 대체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에 의해 결정됩니다. 인생이 실망스럽고, 악과 고통으로 가득한 위험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신문에는 죽음과 파괴와 추악한 인간성에 대한 기사가 끊임없이 실립니다. _ P. 134.
자유롭게 성관계를 할 수 있고 여행을 함께할 친구들이 있다면 굳이 결혼을 해서 거추장스러운 가족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은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사람을 찾으려는 욕망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스스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_ P. 169.
두려움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기도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이 왜 그렇게 자주 찬양을 요구하는지도 나로서는 궁금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신의 말씀에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_ P. 214.